이산가족

하나마나 푸념 2010. 10. 31. 09:45

냉랭한 남북기조 때문에 명맥이 끊겼던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이루어져 뉴스에 연일 등장하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리게 된다. 수십년씩 헤어져 살아야 했던 혈육을 만나는 기쁨과 그간의 한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당장 나라도 졸지에 형제부모와 헤어졌다가 수십년 만에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 '안' 찾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억압 때문에 가족을 '못' 찾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리움이 짙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이라는 너무도 다른 환경이 아니더라도, 오래 헤어져 산 가족의 재상봉은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헤어지게 되었는지 한 많은 사연을 주고받으며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나 싶게 각자 살던 대로 예전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다. 혹독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그냥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포장한 채 살아갈 수 있었던 때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심하게 연로해지셔서 상봉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슬픈 일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실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을 모르거나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곁에서 내가 직접 지켜보니 그럴 것 같다는 짐작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우리 할아버지는 지난 80년대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 덕에 여동생을 찾은 적이 있다. 그분은 부산에 살고계셨기 때문에 역시나 부산에 살고 있던 큰고모와 먼저 상봉을 한 후, 할아버지께 연락이 왔고 고모할머님과 할아버지의 감격적인 통화가 이루어진 뒤, 고모할머님 내외가 오빠(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셨다. 가뜩이나 북적대는 우리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잊고 살던 고모할머님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다들 마음이 짠했다. 헌데 똘똘하고 애교가 많은 막내동생이라 퍽 예뻐하셨다는 할아버지의 추억담 속에 존재했던 고모할머니는 세월에 찌들은 검은 얼굴과 시장통에서 국밥장사를 하며 거칠어졌을 입담과 엄청난 주량, 난감한 주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날의 추억은 마구 찍어댄 사진으로 남아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불콰한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맞댄 채 웃고 계시거나 음식이 차려진 상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할아버지 앨범에 들어 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그날 저녁의 분위기는 참으로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의 연속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하룻밤인가 이틀 할아버지댁에서 주무시고 서울 구경도 함께 다닌 뒤 부산으로 내려가셨던 여동생 때문에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속이 상해 홀로 약주를 많이 드셨다. 알고보니 그분은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는 남자(고모할머니의 남편인 줄 알았던 분은 그러니까 따로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그저 '동거인'으로 데리고 살고 있었고, 조강지처한테 버림받은 병든 그 동거남을 어려운 형편으로 수발중이었다. '아들' 이 아니라 '동거인'의 지위로 살아야 했던, 나에겐 '고종당숙'이 되는 그분도 삶이 엉망인듯 했고.

당시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어른들은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국 그렇게 눈물의 상봉을 한 오누이는 살가운 만남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남과 북이 아니라 겨우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그간 살아온 환경이 서로 너무 달랐고 할아버지가 보기엔 '망가진' 삶을 살아온 여동생이 못마땅했으며, 비빌 언덕이 생겼다고 여긴 가난한 누이는 오라비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바랐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그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역정을 내셨기 때문에, 나로선 제대로 묻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부산에 사시는 큰고모가 대표로 간간이 소식을 전하는 눈치였다. 굳이 탓을 한다면 힘겨운 세월과 가난 때문이라고 여겨야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어쩌다가 '그 따위'로 아무렇게나 살게 되었는지 할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셨다.

이산가족 상봉의 뒤끝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누구보다 곁에서 느끼셨을 것 같은데도, 큰고모 역시 남북이산가족 찾기로 가족을 만나러 금강산에 다녀오셨다. 이북에 두고온 형제들을 만나러 갔다는 연로하신 큰고모의 모습은 2003년 당시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우리 할머니와 재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소생이 큰고모 한분 뿐인 줄 알았던 나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금강산 상봉장에 다녀오신 큰고모의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니, 동생과 사촌이라면서 상봉장에 나온 북한의 가족들을 큰고모는 하나도 몰라보겠더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공유한 추억이 없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더라고. 당연히 감격적인 눈물의 상봉은 없었고,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보아 '꽤 사는 것 같더라'는 북한의 가족들은 고모가 가져간 선물에도 그리 반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뭐 그야 상봉인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교육탓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긴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석했던 큰고모는 고대하던 어머니 소식(큰고모가 당시 75세이셨으니 그분은 90세도 넘어 당연히 돌아가셨겠지만)도 거의 듣지 못해 괜히 갔나 싶어 후회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 사흘간이었다던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 전화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 가족들은 중국을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거나 돈까지도 보내는 방법이 있다고는 한다) 애틋한 형제의 정을 느낀 것도 아니니 뭘 더 어쩐단 말인가.

상황은 다르지만 70년대에 미국으로 입양됐던 친구 하나도 몇년 전 30년 만에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왔었고, 홀트아동복지회와 지방경찰청의 도움으로 친부모를 찾았다. 아이를 버린 부모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듯했고, 친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했다. 한국 땅에서 고아원에 버려져 살았을 삶보다 미국에 입양되어 살았던 인생이 훨씬 더 나음을 알기 때문이라면서. 2년뒤 친구 부부는 그간 낳은 갓난쟁이 딸을 데리고 한번 더 한국을 찾아와 생모를 만났지만, 친구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남편이 못마땅하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린 생모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다. 홀로 남매를 키우기 어려워 해외입양을 선택한 생부가 오히려 이해될 것 같다나. 생모 쪽에서도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친구에게 그저 죄책감을 갖고 있을 뿐 별 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는 생모가 아기 입히라며 사들고 온 옷가지와 색동저고리에 감사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돌아서서 내겐 "촌스러워서 집에 돌아가자 마자 다 버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헤어지던 날, 자긴 두번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 때문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친부모를 만나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정타는 생모의 입에서 나왔다. 말이 안통하는 양쪽을 위해 계속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나에게 생모가 넌지시 물었었다. 미국서 쟤네들이 좀 사는 것 같으냐고. 사진작가와 기자면 먹고 살만 하지 않겠느냐고. -.-; 내 친구가 어떻게 나오나 한번 실험해봐야겠다면서, 생모는 대구 산다는 자신의 손녀딸(그 아주머니는 재혼해서 새로이 딸아들 낳아 잘 살고 있었다)이 쓸만한 '유아용 카시트'를 미국에 돌아가면 사보낼 수 있겠는지 내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난감해진 내가 부피가 커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거라고 만류해 보았지만, 일단 물어는 보라나.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 카시트를 사서 대구로 보내주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질문을 받은 내 친구는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다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그날의 만남을 정리해 생모 가족과 헤어지고 나서 나와 친구, 친구의 남편은 허탈한 마음에 술을 마셨었다. 해외입양아가 친부모를 찾고, 서로 말이 안통하면서도 어떻게든 인연의 끈을 이어가려고 애쓰는 건 TV에서나 나오는 일이로구나 싶었다. 친구 부부는 뿌리를 알기 위해서였으니, 친부모를 찾은 게 잘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 과정을 줄곧 지켜본 나로선 과연 그 상봉이 잘한 짓이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가족이었다면 그냥 헤어진 채로 그리움과 의혹, 좋은 상상의 기억만 품고 사는 게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지만, 어린 시절엔 노상 전쟁통에 피난을 가다가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사방에서 폭탄이 터져 홀로 어느 낯선 곳에 숨어 있는 악몽을 꾸다 울며 깨어나곤 했다. 꿈이라 다행이라며 어린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만약에 현실에서도 내가 그렇게 이산의 아픔을 지니고 살았다면, 나 역시 현실의 괴리가 어떻든 일단은 가족을 찾으려들 것이 확실하다. 나중에야 차라리 찾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든지 말든지. 그렇기 때문에 남은 생이 얼마 안되는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하루빨리 더 많은 상봉기회를 누리기를 빌고 있기는 한데, 그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할아버지도, 고모할머님도 이제는 다 돌아가신 분들이라, 마음에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때 만나기를 잘하셨다고 생각하는지 여쭤볼 도리도 없다. "꿈에 그리던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흔한 말이 그분들에게나, 지금 이산가족을 상봉하고 있는 실향민들에게나 서글픈 진실이길 바랄 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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