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루스의 글엔가.. 해리님이 덧붙인 댓글에서 본 신데렐라 귀가시간 얘기에
문득 자극 받아 하소연이나 해볼까..

나이 40에 아직도 부모님이 정한 통근시간에 구애를 받는다고 하면
다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부모는 말이야, 길들이기 나름이야. 니가 길을 잘못 들인 거지!"라고 나무라기 일쑤다.

하지만 비딱투덜이의 삶을 추구하는 내가 그런 길들이기 과정의 몸부림을 시도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국이 하수상하여 걸핏하면 시위물결과 최루탄이 온 캠퍼스를 뒤덮던 시절에 들어간 대학 신입생 초창기 땐 심지어 '해지는 시간'이 통금이었다. ㅜ.ㅜ
여름엔 얼추 8시까지도 해가 길어지지만
겨울엔 5시반만 돼도 어둑어둑해지는데 그 시간 전에 집에 오라니!

엄마 몰래 나랑 단둘이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그럴 땐 당연히 통금 시간 해제!), 다 큰 딸이 다리 아프다 그러면 다리도 선뜻 주물러주시고, 집안 청소는 걸레질까지 온통 도맡아 하시는 등, 겉으로는 제법 자유진보주의자의 탈(!)을 쓰신 우리 아버지는 정치를 포함한 일부 분야에선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보수주의 가부장으로 돌변하시는데...

그게 가장 표면적으로 두드러진 것이 큰딸의 통금시간이었다.
물론 외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대신 남의 집 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외박을 해도 무방했다.)
통금시간을 어긴다고 해서 내가 물리적인 체벌을 받는다거나 감금을 당한다거나 하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우리집안 사람들 특유의 '화나면 말 안하기'의 효과는 물리적인 체벌보다 그 파장이 훨씬 컸고, 당장 주급으로 받던 용돈을 달라는 말도 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금야금 반항을 시작함과 동시에
일단 대학 친구들을 아부지한테 데려가 얼굴을 익혀드림으로써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교직원이셨던 아부지는 학교에 시위라도 벌어지면, 혹시 당신 딸도 그 '뻘건'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일부러 순시에 나섰으므로,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우연을 가장하여 수시로 친구들과 나의 '안전함'을 아부지한테 보여준 뒤, 뒤늦게 물결에 동참했다. 물론 뭐 주로 수업거부, 시험거부 뭐 이딴 이슈에 더 팔려서 ㅡ.ㅡ;;)  
하 수상한 바깥 세상에도 금지옥엽 고명딸을 믿고 맡겨도 좋을 이들이 있다는 걸 강조했다.
(다행히 우리 과엔 남들보다 늦게 입학해 나보다 6살이나 많은 언니가 동급생이었는데, 그 언니에 대한 울 아부지의 신뢰가 대단하여, 1학년 2학기 때는 단식투쟁 따위의 극단적인 반발 없이 엠티도 갈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통금시간은 점점 연장되어 나도 남들처럼 음주가무를 즐길 수도 있게 됐고
4학년 후반부터 이미 사회인이 된 뒤로는 까짓거 용돈 때문에 반항의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필요도 없어졌지만, 아무리 반항을 해도 자정으로 확정된 통금시간 자체를 없앨 순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게 된 뒤로는 '회식'이라는 아주 훌륭한 빌미가 있어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도 당당하게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화목한 조직생활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시는 아부지도 '회식'이라는 핑계 앞에선 딱히 트집을 잡아 금주를 명하거나 회사를 관두라거나 하진 않으셨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남들이 얘기하는 "부모님 길들이기 체제"에 돌입해
어울리지도 않는 신데렐라 딱지를 떼어보겠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직장에서 굳이 강요하지도 않는 회식자리의 2차, 3차 자리까지 죄다 쫓아다녔고
너무 늦어지겠다 싶으면 슬쩍 집에 전화를 넣어 도무지 자리를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먼저 주무시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아부지는 마구 역정을 내시며 그냥 도망쳐오라고, 택시비 없으면 큰길에 나가 기다릴 터이니 당장 오라고 난리를 치셨지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새벽까지 버텼다.
(어린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당시엔 휴대폰 따위 없었다! ㅋㅋ 삐삐도 상당히 나중에야 생겼던 것으로 생각됨.. 헐... 이래서 측근들과 마구 세대차이 나주시고;;; )

그.러.나...
얼큰하게 취해 열쇠를 쩔그럭거리고 현관문을 들어선 순간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 입구에 떡 하니 서 있는 검은 그림자.
별로 크지도 않은 우리 아버지의 키가 그땐 장승만큼이나 커보였고, 얼핏 보면 저승사자 같기도 했다. ㅠ.ㅠ 물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며, 현관에서 미처 신발도 벗지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는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울 아부지의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몇분간 그런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거나, 약간 혀 꼬인 소리로 내가 말이라도 붙일라 치면 아부지는 차갑게 "실망이다" 따위의 촌철살인으로  나를 넉다운 시켰다. ㅠ.ㅠ

새벽 3시건, 4시건 시간을 불문하고 자식이 귀가할 때까지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우리 아부지의 무서운 집념은 때론 큰길까지 뻗치기도 했고
살짝 취해 공연히 기분 좋아 흥얼거리며 생새벽에 택시에서 내린 내 앞에 문득 나타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취기를 순식간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왜 그렇게 딸을 못 믿느냐고 항변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나는 그간 믿음직한 큰딸이었고 그건 부모님 포함 친척들까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울 아부진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못 믿는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을 반증하듯, 주기적으로 아녀자 피습사건이나 납치, 강간 따위의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젠장!

그렇게 통금시간을 둘러싼 부녀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결정적으로 나의 패배를 선언하게 된 계기는, 그간 심정적으로 무던히 딸을 지원해주던 우리 엄마의 와병이었다.
몇년에 한번씩 아주 잠깐씩만 찾아오던 엄마의 우울증은 언제부턴가
거의 해를 거르지 않았고, 우울증의 첫 증세는 무엇보다 불면이었는데
내 귀가시간이 좀 늦어질라치면, 예전엔 아부지가 제 아무리 안달을 하셔도 염려없이 먼저 주무시던 엄마까지 동참해 나란히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을 못본 체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우리 엄마의 불면과 우울증이라는 효과적인, 참으로 서글픈 족쇄 때문에 나의 신데렐라 생활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가끔 반항기가 동하면 지금도 통금시간 12시를 살짝 넘기는 일탈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엄마 걱정에 내 마음 역시 조마조마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처럼 금기를 저지른다는 짜릿함이나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ㅡ.ㅡ;;

그리고 늙어가는 딸에 대한 귀가시간 제한을 여전히 고수하시는 이유가
정말로 딸에 대한 불신보다는 무서운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음주 모임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는 아부지를 기다리며, 시간이 많이 늦어지면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울 아부지가 술김에 잠들었다가 혹시 아리랑치기 따위를 당하시는 건 아닌지 별별 망측한 상상을 다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니 말이다.

늘 투덜거리면서도 사실 부모님 품안에서 캥거루족으로 살아가며 온간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인데, 혹시라도 능력을 키워 독립하는 그날이 오면 드디어 통금시간 따위 없어졌다고 통쾌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땐 또 딱히 통금시간을 넘겨 곤드레만드레 음주를 즐기거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밤새 정담을 이어갈 지인들이 곁에 없어서 일찍일찍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면 요즘엔 정말 술친구 청하는 이들이 줄었다.
술 안마시는 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얘긴데...
쓸데없이 감정이 넘쳐나고 마음의 빗장이 스스르 풀리긴 하지만, 나는 알콜의 힘을 빌어서라도 가끔 관대해지고 온 세상이 잠깐이나마 근사해보이고 술자리 건너편에 앉은 이가 몹시 예뻐 보이는 순간을 참 좋아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대단한 술꾼 같군.. 예전엔 정말로 제법 대단한 술꾼이었는데.. 이젠 맥주 한두 병에 알딸딸해지고 만다. 늙기도 설워라커든... ㅜ.ㅡ;;

하여간 이젠 나도 익숙해져버린 신데렐라 귀가시간...
굳은살처럼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도 잘 안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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