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10.11.30 두 재벌 12
  2. 2010.06.15 어린 취향 11
  3. 2010.05.12 구김살 7
  4. 2010.01.12 맥가이버 놀이 17
  5. 2010.01.02 2009 한해 정리 12
  6. 2009.10.29 소소한 낙 14
  7. 2008.10.10 가슴이 떨려 23
  8. 2007.12.13 9
  9. 2007.02.27 병원에서 본 메디컬 드라마 1
  10. 2007.02.05 메디컬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 7

두 재벌

하나마나 푸념 2010. 11. 30. 10:04

재벌과 캔디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 퍽 싫어하지만, 요즘 현빈이 싸가지 없는 재벌로 나오는 <시크릿 가든>을 열심히 시청중이(었)다. 대체 왜 드라마작가마다 재벌과 신데렐라의 상투적인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써야만 현실적으로도 시청률이 담보된다는 상황을 나로선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으나, 이 드라마의 매력은 그런 소재가 아니라 순전히 현빈과 하지원, 그리고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재벌과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잘해야 재벌과 '인어공주' 이야기가 될 테니까 여주인공에게 나중에 거품처럼 사라져주면 되는 거라고 현빈이 처음부터 일갈하고 시작하는 데,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달까. 

"싸가지는 태어날 때 탯줄이랑 같이 자르고 나온" 전형적인 속물 재벌인 현빈은 만화 주인공 같은 외모와 맵시나는 옷차림 이외에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나 나올 것 같은", 깨진 유리를 청테이프로 붙여놓은 옥탑방에 사는 여자한테 미친놈처럼 반해서 너무도 신기한 나머지 심지어 '가난'을 공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자기 감정이 혼란스러워 문학과지성사의 시집을 꺼내 읽고, 호사스러운 정원 테이블에 앉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는 식이다. 현빈과 드라마 덕분에 의외의 대박을 친 출판사들과 아무 상관도 없으면서, 어쨌거나 나는 작가와 연출에게 박수를 보냈고 '환상의 싸가지 재벌' 현빈을 더욱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도 저런 재벌이 하나쯤 있다고(없다는 건 알지만!) 상상하는 게 나쁠 건 없잖아, 그러면서. 

그랬더니 내 환상을 조롱하듯 지난 일요일 곧 이어 채널을 돌려 본 <시사매거진 2580>에서 이 땅에서 현실의 재벌이 어떤 건지 여지없이 조명해주었다. SK계열의 귀한 재벌 아들께서 인수합병과 노조탈퇴를 거부하고 1인시위를 한 화물연대 노조원 운전기사를 데려다가 야구방망이로 때리며 한 대에 백만원씩 '겜값'을 쳐주었다는군. 역시 재벌의 현주소란 그런 것이었다. 룸살롱에서 얻어맞은 재벌2세의 복수를 위해 재벌1세가 직접 나서 종업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질 않나, 매질에도 값을 매겨 돈지랄을 하며 노동자를 '손수' 두들겨 패고도 무사할 줄 알지를 않나. 현빈의 얼굴을 한 재벌 김주원 같은 사람은 원래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근 한 시간 간격으로 TV에서 마주한 두 재벌의 괴리에서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한 스스로가 어찌나 우습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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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취향

투덜일기 2010. 6. 15. 17:50

최근 친구 하나가 '미드'에 빠져 연일 날밤을 새며 시즌을 하나씩 섭렵하고 있다며 내게도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촌스럽게도 기회가 되면 간혹 미드를 즐겨보기는 하지만 열성적인 다운로드족이 아닌 나는 그런 걸 추천해줄 입장이 못돼 민망했다.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그 옛날 <프렌즈>, <사인펠드>, <섹스앤더시티>, <ER>로 미드의 맛을 알아가기 시작했지만, 그때도 난 다운로드족이 아니라 케이블로 찾아보는 편이거나 dvd를 장만하지 않으면 주변에 빌려봤다. 확실히 나는 디지털시대를 살아가는 아날로그형 낀세대라는 얘기다.

지금도 우연히 마주치면 넋을 놓고 시청하는 <CSI>, <그레이 아나토미>, <하우스>도 파일을 다운받아 본 적은 없으며 <위기의 주부들>은 누가 파일을 보내주겠다고 하는데도 별로 볼 마음이 안생겼다. 뭔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더욱이 TV시청 자세가 퍽이나 불량한 나는 드라마라고 하면 느긋하게 소파나 큰 쿠션에 거의 드러누워 편히 감상해야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는 기분으로 봐야하는게 영 마뜩찮다. 일드를 특히 즐겨보는 부지런한 친구 하나는 열심히 다운받아서 케이블로 TV에 연결해 소파에 드러누워 보기도 하지만, 내가 그 친구 집에 가서 같이 봐주는 건 모를까 내가 몸소 그런 수고를 하고 싶은 생각은 평생 들지 않을 거다.
 
미드 친구는 당연히 <위기의 주부들>의 열혈팬이었고 내가 이름만 대강 아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열변을 토했다. 부업을 하는 가정주부인 친구는 그날 마땅히 다운받아볼 게 없으면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를 여러번 돌려보며 두세번째 시청할 땐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 식기, 패션소품까지 눈여겨봐 참고한다고 했다. 목동사시는 시간 많은 여사님들 사이에선 그게 유행이란다. +_+

추천해줄만한 미드가 생각나지 않는다는데도 굳이 최근에 본 걸 떠올리라는 친구의 말에 나는 자신없게 말했다. "가십걸...? 그 전엔 <OC>라는 것도 봤다...."
친구는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나의 어린 취향이 걱정스럽다고(그녀의 표현은 '취향이 어려서 큰일'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그런 애들 나오는 드라마는 눈에 전혀 안들어온다나. 하기야 다들 <아이리스> 볼 때도 내가 혼자 <미남이시네요> 보면서 설레고 좋아라할 때부터 알아봤단다. 아이돌 가수 몇명을 눈여겨 보며 좋아라하는 것도 그렇고...

결혼과 학부모 역할을 인생의 커다란 '성취'이자 '성숙함'로로 여기며 '비혼'은 미완성 인생과 미숙함의  표상이라는 걸 은연중에 풍기는 주부 친구들이 "너는 참 취향이 어려서 큰일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어쩌면 자격지심 때문에) 발끈하게 된다. 그들의 말엔 종종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잘 보지도 않는 미국 드라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예쁜 학용품에 열광하고 실크블라우스보다 그림 그려진 티셔츠에 더 눈길이 가는 나의 태도를 어리다고 판단한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취향은 곧 개성이라는 게 내 생각이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는 하지만 친구라고 해서 반드시 같은 취향을 가질 이유는 없다. 물론 처음부터 취향이 비슷해 급속도로 친해지는 사이도 있다. 그러나 몇 분 차이로 태어난 쌍둥이도 취향이 다른 판국에 복제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취향이 판박이처럼 똑같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겠나. 하물며 어쩔 때는 본인의 취향 마저도 마음에 안드는 것을.

사실 나는 요즘 여러 분야에서 내 취향이 뭔지 선명하게 이야기할 자신조차 없다. 이것도 좋은 것 같고 저것도 좋은 것 같고, 좋아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의 괴리 속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이제껏 그게 내 모습이라고 그려놓은 형상이 순간순간 허물어지고 일그러지는 걸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갈팡질팡 우유부단하게 해매는 자신이 짜증스럽기도 하다. 취향에 대해 핀잔을 들으면 발끈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 같다. 나도 잘 모르는 취향을 누가 얼마나 안다고! 하기야 남의 눈이기 때문에 객관적이라 더욱 판단이 잘 서는 것일까? 그렇더라도 할 수 없다. 어리다고 놀리든 말든, 난 이렇게 살테닷.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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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김살

삶꾸러미 2010. 5. 12. 16:53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정말로 구김살 없는 표정과 태도를 온전히 실감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구김살이 없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들 훌륭한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물론이고 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구김살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성격에 따라서는 과거의 구김살도 다리미로 완벽하게 펴 산뜻하고 매끄럽게 살아가는 이도 있으니, 구김살 없는 어른이 드물다는 나의 전제부터 틀렸다고 누가 반박한다면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은 변함없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나 갖고 있는 구김살을 어떻게 스스로 잘 파악하고 관리하고 펴는 노력을 펼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구김살의 사전적인 뜻, "(주로 '없다'는 부정의 표현과 함께 쓰여) 표정이나 성격에 서려 있는 그늘지고 뒤틀린 모습"을 살펴보노라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심리학엔 완전 문외한이지만 어쩐지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야할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공부한 친구에게 주워들은 풍월로는 확실히 그렇다. 심리치료를 공부한 뒤 개인병원에서 마음을 다친 아이들과 자폐아동 치료를 돕던 친구는 성당 봉사활동으로 기도모임에서 어른들의 다친 마음 치유를 이끌다가 결국엔 그 일을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기도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구김살,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지독한지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면 덩달아 가슴이 아프다. 그 친구만 해도 그렇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소금과 짠맛을 즐겼다. 고1때였던가, 가정 시간에 자기는 토마토는 물론이고 수박도 소금에 찍어먹는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도 고깃집에 가면 소금을 미리 두어접시는 더 달라고 해 옆에 끼고서 찍어먹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소금에 길들여진 체질이라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자신했다. 우린 평생 그렇게 먹어왔으니 그럴법도 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리투아니아였던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곳으로 얼마 전 성지순례를  다녀온 친구는 거기서 만난 신부님에게 뜬금없이 엄마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었단다. 엄마를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소금을 집어삼켜도 마음의 구멍을 채울 수가 없다고. (통역까지 필요했던 외국 신부님이 첫눈에 친구의 소금 취향을 어찌 알았을지 그건 미스터리다. -_-;;)

심리학적인 분석의 결과라고 해야할지 영성의 힘으로 파악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해야할지 나로선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친구의 문제는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둘째를 낳고 싶지 않아했던 터라 차마 직접적인 행동엔 옮기지 못했지만 임신 기간 내내 후회를 하며 아이가 어떻게든 잘못되기를 바랐다. 결국 친구는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남은 기간을 채워야 했는데, 늦둥이 막내딸임에도 넘치는 사랑보다는 터울이 많은 오빠에 비해 늘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안 낳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애가 이래저래 좀 처진다"는 말을 친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친구는 나이 들어서 낳은 딸을 키우기 힘들었을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약간 불만을 품었을 뿐 내면 깊이 엄마에 대한 미움과 한이 자리잡고 있을 줄은 몰랐단다. 그리고 그 증오심이 엉뚱하게 소금을 탐닉하는 것으로 표현됐을 줄은 더더욱 몰랐을 테고. 건강검진 결과로도 친구는 '전혀' 소금 체질이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지나친 나트륨 섭취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 남들의 다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본인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소홀했던 친구는 자기 문제가 뭔지 알고 난 뒤 정말로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다스려 용서하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남들보다는 짜게 먹는 편이지만 예전만큼 소금에 탐닉하진 않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꽁꽁 감추어져 있던 오래된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 마음의 구김살을 펴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놀랍다. 그들에게 상처를 남긴 장본인이 대부분 가족이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부와 행복을 누리며 자식농사마저 성공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어느 아주머니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다만 무뚝뚝한 남편이 좀 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심리치료의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모성과 애착의 결핍이 원인이었고 사춘기 이후 50대가 되도록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모녀간의 골이 깊었단다. 치료과정에서도 '엄마'라는 말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만큼.

모성이나 부성의 부재 자체가 문제인 경우도 있고, 너무 잘난 형제에 치여 마음을 다쳤거나 둘도 없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상처로 알게 모르게 마음앓이를 한 이들의 사연을 가끔 친구에게 전해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새삼스러운 이해(또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의 짐작이 전적으로 맞다고 주장할 순 없겠으나, 이러저러한 상처 때문에 이런저런 성격이 생겨났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빈약한 이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식이다. 구김살이 까칠함으로 발현된 것이 분명한 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됨은 물론이다. 심지어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이 모두 문제아가 되는 건 아니지만, 살인 같은 극단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의 개인사를 추적해보면 반드시 모성의 결핍이 두드러진다든가 하는 이론에 귀가 솔깃해지도 한다.

친구가 전하는 치료 사례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에 겪은 마음의 상처로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사실 주변에 널렸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엄마가 재혼하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 자란 남매는 사춘기 때부터 성 다른 형제들과 다시 엄마 슬하에서 살았지만, 엄마에게 한번 버림 받았던 충격으로 한 사람은 우울증, 한 사람은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린다. 인생의 멘토라고 여길 만큼 각별하게 따랐던 여교사에게 고교시절 내내 성추행을 당했던 여학생은 커서 정신병을 얻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막내딸이면서도 잘난 형제들과 비교되어 늘 위축되었던 아이는 서른살을 넘기면서 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친부의 결혼과 이혼, 재혼을 지켜본 어떤 딸은 가족들에게도 거짓말을 일삼다 사기꾼처럼 엄청난 금전사고를 일으켜 친적들에게조차 의절당하고 말았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나열하긴 했지만, 아무리 사소한 상처도 본인에게는 저도모르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길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겉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가 어떤 일을 얼만큼 심한 강도로 겪었는지 속속들이 알 수도 없는 일이고.

너무 끔찍해서 잘 안보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방송만 봐도 문제 있는 아이의 원인 제공자는 늘 부모와 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환경과 부모의 태도를 한두 달만 바꿔 놓아도 아이는 확연히 달라진다. 과연 그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구김살도 깨끗하게 펴지거나 사라질지 아직도 의문이 들지만, 중년 이후라도 자기 문제를 파악하고 애써 노력을 기울이면 다친 마음을 어느 정도 치유하는 게 가능하더라는 사례를 보면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요즘 열심히 챙겨보는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보아도 하나같이 구김살 많은 인간들의 각축장인데, 최소한 그들은 자기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그걸 인정하기도 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허구의 캐릭터인데도 안쓰럽고 정이 간다. 물론 내 주변엔 내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인정해도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펴지 못해 허덕이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드라마 속 세상에서만은 좀 덜 현실적으로 그려지더라도 그들이 주름살을 차츰 펼쳐가길 비는 중이다. 아마 나도 열심히 구김살을 다림질하는 중이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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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가이버 놀이

놀잇감 2010. 1. 12. 02:06

어렸을 땐 조립장난감을 좋아하지 않았다. 공간감각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라 입체그림이든 평면그림이든 이리저리 작은 조각의 방향을 바꾸어 조립해 맞추는 과정이 내겐 상당히 골치아팠다. 그러고 보니 끈기도 부족했던가 보다.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내긴 했지만 들이는 수고에 비해 조악한 조립장난감의 완성품은 별로 성취감도 안겨주지 못했다. 같은 재능인지는 몰라도 루빅스 큐브는 한참 낑낑거려도 한 면 맞추는 게 고작이었다. 하도 짜증나서 완전 분해했다가 색깔 맞춰 다시 조립한 적은 있었어도...

헌데 언제부턴가 그리 복잡하지 않은 생필품의 조립은 그럭저럭 재미가 있었다. 널빤지 조각에 간단히 나사 몇개를 조여야 만들어지는 수납함을 시작으로 탁자도 만들었고, 나중엔 책꽂이도 겁없이 사들일 수 있었다. 복잡한 컴퓨터 책상은 도면 놓고 오래 끙끙대는 내 꼬락서니를 안쓰러이 여긴 아버지가 나서주셨지만, 혼자 했어도 결국 제대로 완성했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그 컴퓨터 책상을 멀쩡히 내다버려야했을 때 꽤나 고민을 했다. 다시 분해를 해서 중고로 팔순 없을까, 아니 팔지 않더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잠시 하다가 결국 귀찮아서 그냥 내다버리는 걸로 결론을 내리긴 했다. 지금 그 상황이 온대도 이런 게으름으론 또 그냥 버리는 쪽을 택하기 십상이지만, 대형폐기물 스티커를 붙이느라 거금까지 들이느니 누구든 쓸 사람에게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약간 후회스럽다. 

어쨌거나 진짜 맥가이버스러우셨던 아버지엔 못미치지만, 이제 집안 여기저기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내가 나서며 맥가이버 놀이를 하는 것 같아 슬며시 뿌듯하다. 그래봤자 형광등, 백열등 갈기, 헐렁해진 서랍장 손잡이 나사 조이기, 스테플러로 지저분한 전선 벽에 고정시키기, 옷걸이로 화분 지지대 만들기, 벽에 못박기 정도이고, 그보다 힘든 일은 당연히 막내동생이 다니러 올 때를 기다리는 편이다. 요번에 왕비마마의 실내 운동을 위한 헬스싸이클을 장만하면서도, 기사가 방문하여 조립 및 설치 해주기를 원하면 출장비 2만5천원이 추가된다는 말에 내가 시도해보고 못하겠으면 동생녀석을 부르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문제의 헬스싸이클이 그놈의 눈폭탄 때문에 꼬박 일주일만에 배달되어 왔다. 비전문가의 솜씨로도 30분에서 1시간이면 된다는 자전거조립은 얼핏 보기에 별로 어려워보이지 않았고, 나는 즉각 2만5천원 벌기에 돌입했다. 부품을 확인하고 일일이 비닐과 골판지를 벗겨, 작은 렌치 두 개로 설명서 순서대로 조립을 하고 있으려니, 정말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난감 같은 렌치로 나사를 끝까지 조이는 게 만만치 않아 40여분만에 결국 조립을 끝내고 완성품에 앉아 시연까지 보이자, 내내 못미더워 잔소리를 해대던 왕비마마도 그제야 "우리 딸 맥가이버였네."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게다가 출장비는 흔쾌히 팁까지 3만원 주시겠단다. ㅋㅋ

왕비마마의 수시 운동 독려를 위해 자전거를 TV앞으로 놓느라 다시 소파를 베란다쪽으로 돌려놓고 화분을 죄다 옮기는 힘쓰기 작업까지 홀로 마친 뒤, 관짝만한 빈 자전거 포장박스를 한 구석에 치워놓고 뿌듯해 하려니 문득 며칠 전 차력을 시도하다 이가 빠진 지붕뚫고 하이킥의 오현경이 떠올랐다. 여자도 남자랑 <똑같이> 뭐든 잘할 수 있다는 걸 신애에게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습에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사무실 이사 때 여직원들은 <걸레질이나>하라는 잔소리에 걸레질 싫다면서 굳이 번쩍번쩍 책상을 옮기던 과거의 내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었다. 못하는 게 너무도 많은 인간이지만, 그걸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견엔 늘 동조할 수 없어 나름 악다구니를 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젠 운전하다 타이어가 펑크 나면 나도 당연히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출장서비스를 부르겠지만, 그런 보험 서비스가 없던 10여년 전 나는 강북강변도로 갓길에 차를 세워놓고 혼자서 당당히 타이어를 바꿔 끼우고 가던 길을 간 사람이다! ^^v (물론 그 당시엔 몹시 슬펐었다. 그로부터 불과 2년전 올림픽대로에서 펑크가 났을 때는 여러 대의 차가 멈춰서서 도움의 손길을 자청했었는데, 2년만에 아무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가 아무래도 심히 쇠퇴한 나의 외모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1차 펑크 때는 원피스 차림의 꽃단장 모드였고, 2차 펑크 때는 청바지에 티셔츠, 야구모자 차림이긴 했다.) 

여전히 나는 운동신경이 둔하고 공간감각력과 셈 능력이 떨어지며 몸놀리는 게 귀찮고 무서운 건 죽어도 싫다. 하지만 길눈은 밝고 지도도 볼 줄 알며 완전 기계치는 아니고 못 정도는 거뜬히 박으며 가끔 드라이버와 망치, 렌치 따위를 들고 맥가이버 놀이를 즐긴다. 필요가 만들어낸 적응력일수도 있겠으나, 나도 놀랐던 숨어있는 관심과 재능을 발견하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시간과 여유가 된다면 언젠가 조립주택 같은 것도 손수 만들어보고 싶다면 너무 원대한 꿈이려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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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한해 정리

놀잇감 2010. 1. 2. 01:39

글 하나에 2009년을 정리해 담는 행위는 퍽 뿌듯하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다. 이른바 삶의 <낙>이라고 하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싶을 수도 있고, 요것밖에 없었나 싶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실한 기억력으로도 요것밖에 없었나 허망한 느낌이 들 것이라는 데 심증이 가지만, 하여튼 꼽아보자. 나의 2009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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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낙

놀잇감 2009. 10. 29. 17:00

하루하루 짧아지는 해길이며 으슬으슬 추워지는 날씨까지 가을을 실감하면서 계속 시름시름 맥이 빠졌다. 바삐 마무리해야 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그와 별개로 삶이 너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어 한숨만 푹푹 나오는 습관성 무기력증에 빠졌던 거다. 새콤달콤한 홍옥 사과를 와그작 깨물어 먹어보아도 잠깐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보고싶은 조카들과 통화를 해도 약발은 지속성이 없었다.
그러다 애써 TV에서 찾아낸 요즈음의 소소한 낙. 내가 퍽 단순한 인간임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소일거리라 널리 자랑하여 그 세를 넓히고자 한다. 홍옥의 진가를 널리 알려 더 많은 농가에서 내년에도 홍옥을 많이 재배해 새콤달콤 행복한 10월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사방에 홍옥 타령을 해대고 있는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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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떨려

놀잇감 2008. 10. 10. 23:48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다 하니, 드물게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쳐 불꽃을 튕기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랑의 시작도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사랑의 시작은 짝사랑이 아닐까. 어느 한쪽에서 먼저 떨리는 가슴으로 셀레며 다가가 손을 내밀거나 지켜보기만 하는.
 
아무래도 가을이라는 특이한 절기와 요맘때 대책없이 밀려드는 쓸쓸함의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혐의를 버릴 순 없지만 어쨌거나 이 가을 나는 뜬금없이 가망없는 짝사랑에 빠져들고 있다.
사람에게 빠져들 땐 딱히 이유를 댈 수도 없고, 이유를 댈 수가 없어야 진정 사랑이라는 말도 익히 들어왔으니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지만 심장이 딱딱해진 것이 거의 확실한 나에게 사랑을 일으키려면 우선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야한다고 오래 전부터 누누이 주장해온 터라 이 사랑이 무한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자기 일에 대한 흔들림 없는 그의 신념, 고집, 박식함, 실력,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듯 독선적인 모습 뒤에 감추어진 인간애, 잔정이나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매사에 공평무사한 정의로운 태도, 사회적인 나이 따위는 무시하는 듯한 천진함,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더불어 빼어난 외모까지 갖춘 사람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모두 사랑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법.
누굴 납득시킬 필요도 없는데 이렇게 구구절절 구차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냥 난 그에게 홀딱 반한 거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흠모하기 시작하면 바보처럼 똑바로 잘 쳐다보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는 나는 이번에도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 없는 태양을 바라보듯 나도 모르게 흘끔흘끔 훔쳐보듯 그를 대한다. 그러다 드물게 그의 미소라도 보게 되는 순간이면 얼굴이 막 달아오르는 것 같다. 뜨거워진 볼을 양손으로 진정시키며 누가 볼까 민망하단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스스로 주책이란 느낌에 또 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심지어 그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나로선 어째볼 수 없는 철옹벽 같은 강력한 라이벌이 곁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그저 이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홀로 애태우는 사랑이 행복하니 어쩌랴. 먼 발치에서든 가까이서든 기회 닿는 대로 훔쳐보고 흠모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달랠 수밖에.

가망없는 짝사랑인걸 알면서도 얼마만인지 모를 이 두근거림을 깨닫게 해준 그에게 고맙기까지 하다면 확실히 비정상인 겐가. 아무튼 약한 열병을 앓듯 요즘엔 밤이나 낮이나 그를 떠올리며 행복하고 동시에 더 다가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제는 잠들며 꿈속에서라도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했는데, 그런 행운은 나타나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는 내가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숭배의 대상이란 뜻일지도 모르겠다.

매몰찬 그의 말대로 일시적인 호르몬 이상일지, 오래도록 이어져 가슴에 응어리로 남을 상처가 될지 현재로선 내 감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이 사랑 때문에 당분간은 심히 허우적거리느라 힘깨나 들 것 같다는 점이다. 이 밤에도 문득 그가 그리워서 스토커처럼 그의 행적을 좇다가 결국엔 이렇게 전해지지도 못할 고백을 쏟아놓고 말았다.

너무 오래 전이라 까먹었었나 본데, 사랑은 역시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구석이 많다.
특히 짝사랑은.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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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07. 12. 13. 17:42
드라마를 보면 아줌마나 할머니들이 골머리를 앓고 누워있다거나
아프다고 시위를 할 때 반드시 머리에 흰 끈을 매고 나온다.
대체 그게 두통에 무슨 소용이랴 싶은 생각보다도 우선은 그런 모습을 설정한 드라마 작가들의
상투적인 태도에 화가 치민다.
꽤 오래(내가 초등학생 때까지) 쪽진 머리에 은비녀를 고수했던 우리 친할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한복을 생활복으로 고수하셨던(물론 여성용이 아니라 남성용 한복이긴 했지만) 외할머니도
편찮으실 때 머리에 흰 띠를 매는 습관은 절대로 없으셨으며
두루두루 집안 어른들을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우기자면, 지끈지끈 두통이 느껴질 때 머리를 꽉 조여매면
관자놀이 마사지를 하듯 혈행에 도움이 되어 증상이 완화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머리에 매는 띠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동자들이나 노점상, 과거 활동가 학생들이
머리에 질끈 동여매는 시위용 뻘건 띠와 목적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똑같이 '시위용'이라지만 드라마 속 아줌마들의 흰 띠는 그래서 더욱 유치하고 진부하다.
앞으로는 제발이지 드라마에서 그런 소품 좀 안 썼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혹 드라마작가 주변의 노친네들은 다들 그런 흰 띠를 생활화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_-;;)

감기몸살이나 신체적인 통증 따위를 드라마에서 표현할 때 또 한 가지 빠지지 않는 상투적인 표현은
바로 "끙... 끙.." 앓는 소리를 내는 것.
엄밀히 말하면 "끙"이 아니라 "으..."나 "어.." 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소리가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오는 것인데
그 모습은 제 아무리 상투적이라 해도 크게 바뀔 순 없을 것 같다.
실제로도 근육통과 고열을 수반하는 몸살감기에 걸렸다거나
수술 따위로 생살을 째는 아픔을 겪은 뒤 진통제가 떨어지는 순간이 돌아오면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_-''

누워서 낑낑대다 저도모르게 그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면 진짜로 웃기긴 한다.
끙...끙.. 거리다 그 소리가 다시 우스워서 킥킥거리다 어느새 다시 으...으... 앓는 모습이란
완전 코미디가 따로없다.

그젯밤, 어젯밤, 이틀 내리 그런 홀로  코미디를 찍었다.
아 물론 생살을 쨌다는 건 아니고 그저 감기 ^^;;
그나마 두통약에 기대어 어렵사리 잡들고 나면 낮동안엔 좀 살만한데
어둠이 내리면 희안하게도 콧물과 기침, 근육통이 딱 낮의 두배로 늘어난다.

아마도 저녁먹고 나면 또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코미디를 찍게 될 것 같다.
끙... 끙...
아직은 그래도 킥킥킥.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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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마마의 병세가 그만그만한 상황이어서
엄마 시야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는 24시간 전방위 간병체제를 탈피할 수 있게 된
지난 주말, 재방송으로 하는 <외과의사 봉달희>를 우연히 병원에서 보았다.
한 마디로 어찌나 웃기던지, 민망한 생각에 10분도 채 보지 않고 일어나야 했다.

현실 속 병원 안내방송에선 심심치 않게 "XX 병동 코드블루 코드 블루"(응급상황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다)를 외쳐대지만 병원 복도에서, 심지어는 응급실에서조차 뛰어다니는 의사나 간호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밤중에 엄마 모시고 응급실에 갔다가 다음날 오후 4시에 병실 배정을 받기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동안,
응급실에선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실려온 청년, 심장마비로 119에 실려온 할머니,
아이의 고열 때문에 사색이 되서 달려온 부모 등등 다양한 환자들을 구경했지만
메디컬 드라마 ER에서 보던 긴박감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호사, 레지던트는 물론이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인턴들의 발걸음도 늘 여유롭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봉달희 선생을 비롯한 레지던트는 물론이고, 의대 교수인 안중근 선생 같은 사람(드라마에선 무슨 교수들이 또 그리 젊은지!)까지 드라마에선 수시로 뛰어다니며 환자를 돌보는 상황을 환자복 입은 환자들과 함께 병원에서 보자니 얼굴이 몹시 간지러웠다.

그나마 메디컬 드라마와 비슷한 현실의 모습을 찾아본다면
울 엄마의 담당 레지던트가 아침마다 회진 준비를 하려고 들렀을 때 보면, 잠이 몹시 부족한 얼굴로 대개 한쪽 뺨에 눌린 자국이 있다는 정도? ^^;;
워낙 유명하신 주치의 선생님은 아침 회진도 일주일에 3번 밖에 오지 않으시는데
그때는 정말로 <하얀 거탑>의 장준혁 과장님처럼 엄청난 레지던트와 인턴, 간호사 부대를 이끌고 병실로 들어선다. 그 기세에 눌려 보호자인 나는 병실 한쪽 귀퉁이로 밀려났다가 가끔 울 왕비마마가 대답 못하시는 부분에만 황송하게 대답을 하고 있다. ㅎㅎ

그간 드라마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이제 간병은 전문가 손에 넘기고 간병무수리의 삶에서 일단 벗어난 지금 약간의 여유가 생겼어도 메디컬 드라마를 챙겨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막연하게 현실과 다른 이상을 다룬 그런 드라마에 품었던 동경과 바람은
냉혹한 현실 속 병원생활 며칠 만에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나 보다.

현장에서 확인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너무도 커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과대포장엔 몰입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도...
어서 현장에서 탈피해 다시 메디컬 드라마에 심취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밀린 일 핑계로 간병인 쓰자고 고집을 피워놓고선, 제일 먼저 블로그질에 열을 올리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좀 민망타. 하지만 병원 생활 하는 사이, 컴퓨터 못하는 게 정말로 제일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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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공중파에서 해주던 Grey's Anatomy 시즌2가 끝났다.
요새 일요일 밤이면 완전 테순이 모드로 돌아가 TV 앞을 지켰다.
<하얀 거탑>을 보고나서 이리저리 채널놀이를 좀 더 하다보면 Grey's anatomy를 2편 내리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 시즌3은 언제나 해주려나! ㅠ.ㅠ 게을러서 파일 다운받아 보는 건 또 죽어도 못한다... 흑...)
다 찾아보진 않았지만, 가끔 시간이 맞고 마음도 내키면 <외과의사 봉달희>도 봐준다. ^^
바야흐로 메디컬 드라마 전성시대가 아닌가 싶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MBC <종합병원>이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건 엄밀히 말해 의학 드라마가 아니라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였지만
그래도 이재룡이 제법 고뇌하는 착한 의사 역할을 보여줬을 땐, 저런 의사가 어디 있나, 뻥이다.. 구시렁거리면서도 이뻐하며 봐줬던 것 같다.
그 뒤론 <의가형제>도 있었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들이 죄다 나와 보다 말았던 <해바라기>도 있었다.
그러다 내가 본격적으로 메디컬드라마 폐인이 된 건 <ER> 때문이었다.
1996년이었던가.. 고맙게 SBS에서 시작은 했어도 박세리 골프를 중계하느라 예정 편성시간을 늘 어기며 오밤중까지 기다리게 했지만, 나는 막내동생과 리모컨을 놓고 싸우며 ER 시청권을 사수했더랬다. 하지만 급기야는 방송국에서 낮은 시청률을 이유로 시즌2에서 전격 종영을 결정했다.
나름대로 ER 마니아였던 이들이 각종 PC 통신 매체에서 SBS 게시판으로 쳐들어가
불만을 토로했고, 천리안에서 활동하던 나는 ER 동호회를 만들자는 아이들의 이메일을 받고 발기인(씩이나!)이 되어 열심히 ER 사랑을 키웠다.
그러다 몇년 뒤 다시 KBS에서 ER 방영을 결정했지만 터무니없게도 시즌4부터 수입을 시작했다. ㅡ.ㅡ;;
아무려나... ER의 시그널 음악이 흐르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설레는 증상이 제법 오래 갔다 ^^;;
결국 KBS 역시 시청률을 탓하며 시즌4로 ER 방영을 그쳤지만, 아쉬운대로 케이블에서 계속 방영을 해주는 바람에, 지금 시즌9까지 진행됐다. 미국선 시즌 13까지 방송했으니 13년이나(!) 줄곧 방송 하고도 올 9월엔 시즌14가 시작될 거다.

메디컬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 미국이든 한국이든 <ER> 이전과 이후를 논할 정도로 ER은 중요한 시금석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그만큼 ER이 병원 장면의 리얼리티를 살려 다른 드라마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일 거다.
사실 ER의 긴박감 넘치는 장면들을 보다가 우리나라 메디컬 드라마를 보면 응급실이나 수술 장면이 한숨 나올 정도로 엉터리여서, 정말로 병원에서 연애하는 멜로 드라마 수준으로나 애써 봐줬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Grey's anatomy도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의 범주에 속한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도 없는지... 의사들끼리는 물론이고 의사/간호사, 심지어 의사/환자 간의 로맨스가 주를 이룬다. 드물게도 메러디스가 시즌2 막판에 수의사랑 잠깐 사귀긴 했지만(어차피 수의사도 '의사'네!)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여전히 데릭이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메디컬 드라마에 열광할까?
ER에 미쳐날뛸(?) 때부터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내 경우 그건 너무도 다른 현실에 대한 보상심리였던 것 같다.
물론 미국의 모든 병원 응급실이 ER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적이고 훌륭한 의사, 간호사들로 넘쳐나 의술이 아닌 인술이 펼쳐질 리 만무하다는 것을 잘 안다.
서류상으로만 유학생 비자를 받아 실제로는 가족들 데리고 미국 가서 돈벌이를 하던 친구 하나는 갑자기 아이가 고열에 시달려 헛소리까지 하자 근처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가, 나중에 3천불짜리 청구서를 받았다고 했다. 치료는 식염수로 체온 내리고 해열제 맞은 것 정도였다는데 말이다. 건강보험 없어도 한국 같으면 10만원 미만이었을 텐데, 미국에선 보험이 없이 911 응급차까지 불러 병원가는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간 5천불짜리 청구서를 받는 일도 허다하다고 했다.
결국 내가 감동하며 봤던 <ER>의 멋진 응급실의 모습도 있는 자들만의 응급실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응급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응급 상황 정도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지만, 응급실 환자도 MRI나 CT 따위의 값비싼 검사를 하려면, 아니 사소한 검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보호자가 '돈부터' 내야 한다. ㅡ.ㅡ;;
그뿐인가, 늘 부족한 병상은 환자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일부 환자들은 순서를 기다리다 속절없이 목숨을 잃는다.
11년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던 우리 친할아버지는 유명한 S 대학병원 응급실 복도 바닥에 침대도 없이 누워 계셨다가 결국 돌아가셨고
그로부터 6개월 뒤 역시나 뇌졸중 초기 증상으로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모셨던 우리 친할머니는(우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S 대학병원이 지척인데도 그리로 가기가 싫었다!) 응급실 담당 의사와 간호사들이 피자 시켜먹으며 히히덕거리는 사이 시시각각 의식을 잃고 결국 깨나지 못하셨다.
우리랑 말씀도 주고받던 할머니가, CT 찍어야 하니 돈 내고 오라고 해서 내가 원무과에 다녀오니 의식을 잃으셨는데, 왜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았냐고 했더니 의사가 한다는 말이 그땐 위급 상황이 아니었단다. 그땐.. 조금 전까지 피자를 씹어먹던 의사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래.. 그땐 10년 전이니 그렇다 치다.

하지만 불과 3, 4년전, 내가 같은 응급실로 실려갔을 때도 배가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던 내가 누워 있을 침대는 없었고, 검사 받으러 이리저리 내 휠체어를 밀고 다닌 건 막내동생과 울 엄마였으며, 검사 끝나면 진통제 놔주겠다고 했던 주치의의 약속은 결국 내가 수술실로 들어가 마취제를 맡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사이 나는 계속 아프다고 울부짖어야 했다.  
작년에 막내동생 때문에 거창하게 새단장해 개원한 S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을 때도
환자들이 링거 하나씩 꽂고 줄줄이 의자에 앉아 침대가 나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마찬가지였고, 몇시간 동안 지켜봐도 가운 자락 휘날리게 바삐 뛰어다니는 의사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런 게 현실이다.
그들도 인간이고, 병원에 고용된 월급쟁이고, 조직의 일원이고, 부품처럼 자기 맡은 일만 하는 사람들이니 뭐랄 수도 없다. 그게 현실이라니까!

<ER>이나 <Grey's anatomy>나 <하얀 거탑>이나 <외과의사 봉달희> 속 모습처럼
환자 이동침대를 손수 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술실로 향하는 의사들은 이 나라 현실 속엔 없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는 건 어디까지나 그 일만 따로 하는 병원 직원의 몫이다. 아... 환자가 의사 가족이거나 아부해야 할 인물이라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메디컬 드라마 속엔 정말로 환자와 생명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 같은" 의사들이 떼거지로 등장하고, 먼저 검사비 내고 오라는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죽어가는 사람들을 '대부분' 정말로 살려내기도 하며(아 물론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살려내는 수많은 의사들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응급처치 과정이 최신식 의료기의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아... 부러워라.

물론 다행히 현실에서도 정말 고마운 의사를 만난 적도 있다.
재작년에 엄마가 쓰러졌을 때 처음 엄마를 맡은 신장내과 레지던트는 그야말로 울 엄마를 살려낸 장본인이었고, 병실에서 기다란 쇠꼬챙이로 중심정맥을 뚫는 따위의 무시무시한 응급처치를 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서도 몇시간 동안이나 울 엄마 곁을 지켰더랬다.
그래서.. 메디컬 드라마를 볼 때면 가끔 그 레지던트의 얼굴이 주인공들 얼굴 위로 잠시 스치는 것도 같다.

인생은,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경우가 많지만
확실히 드라마보다 아름답진 않다.
죽어 나가는 환자 때문에 진심으로 허탈해하는 의사들의 모습은 메디컬 드라마 안에서만 볼 수 있다. 현실 속의 의사들은 어서 다음 환자를 봐야 하기 때문에 사치스러운 감정에 휩쓸릴 여유도 없거나, 집요하게 매달릴지도 모를 환자 가족들과의 거리를 두느라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현실과 드라마의 차이를 그렇게 확연히 알면서도 메디컬 드라마에 열광하는,
아니 그렇기 때문에 메디컬 드라마에 감동하는 내가 좀 한심하긴 하지만
앞으로도 난 열심히 메디컬 드라마를 챙겨볼 거다.
불륜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메러디스와
의료사고에 휩쓸리게 된 장준혁과
심장병이 도진 봉달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면서...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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