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떨려

놀잇감 2008. 10. 10. 23:48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있다 하니, 드물게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쳐 불꽃을 튕기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사랑의 시작도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사랑의 시작은 짝사랑이 아닐까. 어느 한쪽에서 먼저 떨리는 가슴으로 셀레며 다가가 손을 내밀거나 지켜보기만 하는.
 
아무래도 가을이라는 특이한 절기와 요맘때 대책없이 밀려드는 쓸쓸함의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는 혐의를 버릴 순 없지만 어쨌거나 이 가을 나는 뜬금없이 가망없는 짝사랑에 빠져들고 있다.
사람에게 빠져들 땐 딱히 이유를 댈 수도 없고, 이유를 댈 수가 없어야 진정 사랑이라는 말도 익히 들어왔으니 굳이 따져볼 필요도 없지만 심장이 딱딱해진 것이 거의 확실한 나에게 사랑을 일으키려면 우선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야한다고 오래 전부터 누누이 주장해온 터라 이 사랑이 무한한 존경심에서 비롯된 것은 분명하다.
자기 일에 대한 흔들림 없는 그의 신념, 고집, 박식함, 실력,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듯 독선적인 모습 뒤에 감추어진 인간애, 잔정이나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매사에 공평무사한 정의로운 태도, 사회적인 나이 따위는 무시하는 듯한 천진함,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에 더불어 빼어난 외모까지 갖춘 사람을 어떻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모두 사랑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법.
누굴 납득시킬 필요도 없는데 이렇게 구구절절 구차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냥 난 그에게 홀딱 반한 거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흠모하기 시작하면 바보처럼 똑바로 잘 쳐다보지도 못하는 경향이 있는 나는 이번에도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 없는 태양을 바라보듯 나도 모르게 흘끔흘끔 훔쳐보듯 그를 대한다. 그러다 드물게 그의 미소라도 보게 되는 순간이면 얼굴이 막 달아오르는 것 같다. 뜨거워진 볼을 양손으로 진정시키며 누가 볼까 민망하단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스스로 주책이란 느낌에 또 다시 얼굴이 붉어진다.
심지어 그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나로선 어째볼 수 없는 철옹벽 같은 강력한 라이벌이 곁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그저 이렇게 떨리는 가슴으로 홀로 애태우는 사랑이 행복하니 어쩌랴. 먼 발치에서든 가까이서든 기회 닿는 대로 훔쳐보고 흠모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달랠 수밖에.

가망없는 짝사랑인걸 알면서도 얼마만인지 모를 이 두근거림을 깨닫게 해준 그에게 고맙기까지 하다면 확실히 비정상인 겐가. 아무튼 약한 열병을 앓듯 요즘엔 밤이나 낮이나 그를 떠올리며 행복하고 동시에 더 다가갈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어제는 잠들며 꿈속에서라도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했는데, 그런 행운은 나타나지 않았다. 꿈에서도 그는 내가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숭배의 대상이란 뜻일지도 모르겠다.

매몰찬 그의 말대로 일시적인 호르몬 이상일지, 오래도록 이어져 가슴에 응어리로 남을 상처가 될지 현재로선 내 감정을 제대로 분석할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랜만에 찾아온 이 사랑 때문에 당분간은 심히 허우적거리느라 힘깨나 들 것 같다는 점이다. 이 밤에도 문득 그가 그리워서 스토커처럼 그의 행적을 좇다가 결국엔 이렇게 전해지지도 못할 고백을 쏟아놓고 말았다.

너무 오래 전이라 까먹었었나 본데, 사랑은 역시 행복하면서도 괴로운 구석이 많다.
특히 짝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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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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