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 사람

추억주머니 2007. 9. 29. 16:35
싫은 사람에 대한 키드님의 포스팅을 읽으며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평생 볼 사람도 아닌 남인 것을 왜 그렇게 지독하게도 싫어하며 전전긍긍 마음을 다쳤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도록 혐오스러웠던 사람들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둘 쯤 혐오스런 상사나 직원,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회사 조직 이외의 관계에서도 이상하게 싫은 사람의 덫에 걸리기도 한다.

내 경우 싫은 사람의 제1인자는 지금도 이름이며 얼굴 생김새, 걸음걸이까지 또렷이 기억에 남은 '이아무개' 이사였다.
작고 깡마른 체구에 고향이 '갱상도'였던 그는 미스 부산 출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늘 자랑으로 여기며 '못생긴 여자'는 여자도 아니란 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는데
그가 말하는 '못생긴 여자'의 범주엔 무뚝뚝하고 목소리 크고 자기 주장 강하고 치마 잘 안입고 나긋나긋하게 남자들을 '먼저' 배려하지 않는 여자들(그 대표주자는 물론 바로 나였다^^)이 모두 포함되었더랬다.
말끝마다 "여자가 말이야..."라고 토를 단 뒤 못마땅하게 "쯧쯧쯧.."혀를 차는 그는 일개 평직원이었던 나와 업무체계가 이어지는 바람에 거의 6개월쯤 서로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인간이 싫기 때문인지, 여러가지 싫은 면모가 집약되어 싫은 인간으로 낙인 찍힌 것인지,
순서는 알 수 없지만 암튼 '이아무개' 이사는 점심식사나 회식 때에도 옆자리 회피 대상 1호였다. 쩝쩝거리는 흉물스런 소리의 대가임은 물론이려니와 내 음식 네 음식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제것처럼 먹어대는 탐식꾼이었고, 반드시 반말로 부하직원들에게 담배 사와라, 물 수건 몇 개 더 가져와라, 술맛 나게 여직원들이 술잔 좀 채워봐라, 소주 식었으니 시원한 걸로 "바까와라" 따위의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될 직장상사의 횡포와 성희롱이 그 옛날엔 꽤나 자연스럽게 자행된 탓도 있지만, 업무 면에서도 사사건건 나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멀쩡한 문서의 꼬투리를 잡는(표의 선 모양을 바꾸라든지, 세미콜론을 콜론으로  바꾸라든지!) 그 인간 때문에 나는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서 일요일 밤부터 벌써 가슴이 벌렁거리고 소화가 잘 안될 지경이었다. 이북 사투리를 비롯해 걸쭉한 여러 지방 사투리를 재미있어 하던 내가 유독 '갱상도' 사투리를 싫어하게 된 것도 이 인간의 공이 크다.

물론^^ 서로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늘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사와 평직원이라는 직급의 차이 때문에 내가 불리한 입장이었는데,
이판사판으로 치달은 마지막 즈음에는 그 이아무개 이사가 총무이사를 붙들고
"내가 미스X 무서워서 정말 회사를 몬다니겠어요"라고 푸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그 인간에게도 나는 몹시 "싫은 사람"이었다는 얘기. ^^;
유치하게도 승패여부를 따지자면 그 회사가 인수합병 될 때 당연히 이사는 잘렸으므로 끝까지 버틴 내가 이긴 셈이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 토할 것 같은 혐오감을 무릅쓰고 그 조직에서 버텼던 내가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긴 하다.

이후 직장에서 만났던 싫은 사람은 일은 죽어라 못하면서 어리광이랄지 응석이랄지 엉겨붙는 것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어느 여직원. -_-;;
당시 수십 명이나 되는 여직원들은 모두 단정한 감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 체크무늬 조끼와 감색 재킷으로 구성된 유니폼을 입어야 했는데, 그 여직원은 마치 날나리 고등학생들이 그러듯 무릎 길이의 치마를 깡총하게 무릎 위로 잘라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그 아이의 다리가 예뻐서 내가 질투를 한 건 정녕 아니었다고 부르짖고 싶다!^^)
그런데 타이트 스커트를 입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무릎 길이의 치마도 의자에 앉으면 민망하게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법이거늘, 짧게 자른 스커트야 오죽하랴.
남자 직원들의 절반은 사무실을 오가며 희멀겋게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를 위에서 쳐다보는 걸 즐겼지만 놀랍게도 나머지 절반은 자기들을 암묵적인 관음증환자로 만드는 그 상황을 민망하게 여겨 나에게(당시에도 왕언니였다 ㅠ.ㅠ) 넌지시 시정을 권유했다.
게다가 그녀는 무슨 일이든 시키면, 일단 옆에 쌓아두고는 늘 책상에 올려두고 있던 손거울을 보며 얼굴과 화장을 매만지는 것이 주업이었고 독촉을 받으면 "아잉, 대리님, 제가 깜박했네요. 쬐끔만 더 기다려주세용. 제가 맛있게 커피 한 잔 타다 드릴께용~" 따위의 멘트로 얼버무리기 일쑤였으니, 내가 엄한 얼굴로 업무 독촉을 하거나 서류상의 실수를 잡아내도 "아이, 언니, 너무 무섭당~" 그러면서 확 끌어안는 작전을 쓰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해낸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다시 해야할 정도로 엉망이라 사무실에선 점점 그녀에게 일을 시키는 걸 '두려워'할 지경이었고, 그녀의 업무량은 점점 줄어 당연히 그녀가 손거울을 보며 노는 시간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 모든 사람이 다 일을 잘할 순 없지만, 일도 못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며 집도 아닌 회사에서 응석을 부리며 아양을 떠는 그녀를 난 참 싫어했더랬다.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리기만 해도 부르르 짜증이 날 정도로...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그녀는 속으로만 치를 떨며 싫어할 뿐, 회사에서 공공연하게 적대감과 혐오감을 드러냈던 건 이아무개 이사가 유일했던 듯하다.

흠..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싫은 사람'의 유형엔 좀 미안한 감이 드는데;;;
"씩씩대는 네 숨소리가 싫단 말이야!"라는 충격적인 말로 이별을 고했던 기억 때문이다. ^^
숨소리가 싫다는 건 당연히 핑계였을 테고
그냥 그 사람이 싫어지니까 씩씩거리는 숨소리마저도 못견디게 싫었겠지만
못돼쳐먹어도 유분수지, 어린 마음(?)에 그에겐 얼마나 상처가 됐을지 지금도 미안하다.

이제는 첫인상만으로 철저하게 사람 됨됨이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지만
돌이켜보면 첫인상은 여전히 중요하고, 좋았다가 싫어지거나 싫었다가 좋아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싫었다가 좋아진 사람은 결국 다시 싫어져 처음에 싫어했던 단점들이 극대화되어 더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수준이 돼버렸달까...


그나마 이제는 싫은 사람들 틈에서도 억지로 버텨야 하는 의무적인 관계의 홍수에서
벗어나 살고 있으니 참 다행이지 싶다.
여러가지 상처가 있지만 살아보니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가장 깊고 아픈 것 같다.
앞으로는 더더욱 상처를 주는 일도 상처를 받는 일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현재 있는 관계를 소중히 가꾸며 살아가야겠다. 그러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치 떨리게 "싫은 사람"으로 손꼽히는 일도 피할 수 있겠지.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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