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주머니'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07.02.01 내력 2
  2. 2007.01.16 계단 공포 10
  3. 2006.12.18 버스가 좋아 5
  4. 2006.12.01 눈, 귤, 홍시 5
  5. 2006.11.22 악기 열망 3
  6. 2006.11.01 친구 4
  7. 2006.10.25 체력장의 기억 4
  8. 2006.10.17 신데렐라 귀가시간 4
  9. 2006.10.16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5
  10. 2006.10.11 문방구 중독 4

내력

추억주머니 2007. 2. 1. 23:36
찍어놓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닮은 모녀나 모자, 부녀, 부자를 보면
유전자의 힘은 참 무섭고도 놀라운 것이로구나 느끼게 되는데
단순히 생김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가족간에 하는 행동까지 똑같다는 걸 깨닫게 될 때는,
시대와 삶의 질이 달라진 듯해도 결국 인생은 핏줄을 매개로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른 집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은 그렇다는 얘기다.
생김새는 별로 집안 내력 따질 만큼 닮은꼴이 아닌데(내가 키 작은 거랑 눈 나쁜 거 말고 다른 생김새도 아부질 닮았다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습관이나 행동은 어느 순간 놀랍도록 세대간의 동일함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사례 1)
우리 친할머니는 나른한 오후쯤 가만히 앉아서 꾸벅꾸벅 조시는 일이 많았는데
베개 꺼내드리고 좀 누워 주무시라고 하면 한사코
"나 안 졸리다"고 손사래를 치셨고, 억지로 이불이라도 덮어드리면 곧장 박차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셨다.

나이 드니 정말로 잠이 준다고 투덜대시는 울 아부지,
나른한 오후가 되면 꼭 TV 앞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조시는데
요즘처럼 추운 날엔 감기 걸리니 잠깐이라도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내가 잔소리를 하면
이상하게도 방에 들어가면 잠이 달아난단다.
꾸벅꾸벅 졸다가 정작 누우면 잠이 달아나는 것이 노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여길 수도 없는 것이, 울 엄마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하면 아예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낮잠을 주무시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만의 모전자전이란 말인가?

사례 2)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한량의 삶'을 사신 분이라 할머니가 고생을 무던히도 하셨고, 장남인 울 아부지는 대단한 효자였음에도 당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할아버지는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재주가 참 많으신 분이어서
서예, 그림, 한시(쓰기 뿐만 아니라 "처엉~~~~~산~~~~~~~~~~~~~~~~~~~이 어쩌고.."하는 한시 읊는 솜씨도 참 구성지셨다), 애완 조류 키우기, 화분 가꾸기 같은 일에 탁월하셨다.
특히 이웃에서 죽어가는 화분을 버리려고 내놓거나 할아버지께 맡기면 기필코 살려내는 '신의 손'에 가까웠다. *.* (그 재능이 나에겐 이어지지 않음이 안타깝다 ㅠ.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작은 화분에 키우는 무화과 나무에서 해마다 토실토실한 무화과를 '수확'해 우리도 맛을 볼 수 있게 하실 정도였으니까..

반면에 우리집은 늘 화분이 죽어나가는 집이었다.
아부지가 직장생활 하시는 동안에 받아온 값비싼 난 화분이나 분재는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빈 화분만 남겨지기 일쑤였고, 정년퇴직 직후 선물받은 각종 화분도 다 죽였을 거다.
그래서 역시 울 아부지는 오종종한 생김새부터 할아버지(옛날 분치고는 키도 크고 멋지게 생기셨다!)랑 닮은 부분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아부지가 본격적으로 화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 둘 씩 집에 초록 식물을 늘려가더니, 해마다 한식 때 성묘 다녀오는 길에 사온 화분들이 나날이 번창해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죽어나간 화분은 전적으로 엄마와 내 "악의 포스" 때문이었음 증명하듯,
아부지는 내 작업실에서 죽어가던 산세베리아도 살려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고는 거실 한 귀퉁이에 화분들을 "모셔놓고" 손주들이 뛰어다니다 잎이라도 다칠라치면 버럭~ 화를 내셨던 울 할아버지처럼, 아부지도 거실 한 귀퉁이에 줄지어 세워놓고 달력에 날짜 표시해가며 물주고 키우는 화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카들이 놀러오면 녀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혹시 애지중지하던 화분이라도 쓰러뜨릴까봐 전전긍긍하신다. -_-;;
올 한식엔 또 새 화분을 몇개나 사자고 하실까...

사례 3)
홍시 얘기를 할 때도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유사함을 적은 적이 있는데,
참외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는 참외를 참으로 좋아하셨고, 외출했다 돌아오셨거나 야외로 소풍 같은 걸 갔을 때 참외를 드시고 싶은데 과도가 빨리 준비되지 않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손으로 참외를 퍽~ 쳐서 깨뜨려 껍질째 드시기도 했더랬다.
일제 강점기에 쬐끄만 일본 순사들이 '6척 장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우리 외할머니가 그렇게 크고 긴 손으로 참외를 쩍 잘라 나에게도 한 쪽 주시면, 난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

과일을 깎아 대령하는 걸 차마 못 기다릴 만큼 참외에 대한 탐닉이 강한 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
참외는 내가 별로 좋아하는 과일도 아니지만 (먹게 되면 속 다 파내고 먹는데, 울 엄만 그럼 무슨 맛이냐!고 막 퉁박이다), 내가 껍질 벗긴 참외를 작게 자르느라 뜸을 들이면, 대뜸 "난 자르지 말고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셨더랬다. ㅋㅋ
그나마 당뇨 발병 후엔 하나를 다 통째로 내놓으란 소린 못하고, 절반만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시며 "역시 참외는 손으로 먹어야 제맛"이라고 중얼거린다.

참외 탐닉의 내력은 이상하게도 딸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큰 동생에게 흘러갔고, 그 녀석도 외할머니, 엄마 닮아서 참외를 몹시 좋아하는데
내가 예쁘게 과일 깍는답시고 참외를 조각조각 반달썰기하면 막 화를 낸다.
먹을 게 없다나 뭐라나... -_-;;
그러면서 자기도 통째로 반쪽 내놓으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여름 참외철이 되서 큰동생네가 놀러오면 장유유서고 뭐고 없다.
얼른 참외를 깎아 울 엄마 반쪽, 큰 동생놈 반쪽 먼저 손에 쥐어주고
그 다음에 먹기 좋게 한 접시 잘라 아부지께 드리는 순이다. ㅋㅋ
 
사례 4)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야 하는 버릇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들 방학숙제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암튼 우리 집 삼남매는 어린 시절 방학숙제마저도 개학이 코앞으로 다가와야만,
그것도 급기야 부모님께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고 혼이 난 다음에야 전전긍긍 밤샘작업으로 개학 전날까지 가까스로 마치는 부류였다. ㅜ.ㅡ;;
그런데 문제는 방학 내내 배짱좋게 놀다가 해가는 숙제이니 '대충대충' 시늉만 하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소심함과 완벽주의 탓인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다.
한달이나 두달치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주제에, 날씨 좀 틀리면 어떻다고 지난 신문을 죄다 뒤져 일일이 확인하는 식이니 시간이 오죽 더 많이 걸릴까.
내 경우는 그림이나 글짓기, 만들기 숙제도 심혈을 기울여야 직성이 풀렸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숙제를 다 해갔던 것 같다. ㅎㅎㅎ

2월 1일 개학을 하루 앞둔 어젯밤, 조카 정민공주네가 집으로 쳐들어(!) 왔다는 전화가 왔다.
ㅋㅋㅋ 역시나 방학숙제 때문이었다.
방패연과 꼬리연을 만들어 가야하는데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고,
동시를 지어 꾸미는 숙제엔 컬러 프린터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일기는 그나마 미리미리 다 써두었으니, 어쩌면 제 아빠나 삼촌, 고모보다 훨씬 훌륭한 조카였지만, 동시 꾸미기 숙제를 하면서 드러난 성격은 놀랍게도 판에 박은듯이 고모와 똑같았다.
이미 다 지어온 동시를 세 편이나 한글 프로그램에 앉히고
각종 그림으로 시화를 꾸미는 것이 숙제인 모양인데, 정민공주는 한글97 그리기 마당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으면 절대로 대충 아무거나 선택하지 않았고....
인터넷 이미지를 다 뒤져서라도 결국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냈다.
울 올케의 짐작으론 '타이핑만 하면' 되니 금세 끝날 숙제였지만, 실제론 동시 한 편에 시간이 30분도 더 걸렸고, 결국 조카는 시간도 없는데 꾸물거린다는 제 엄마의 꾸지람과 호통에 결국 눈물을 보였으며, 공주의 방학숙제는 밤 11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

오밤중에 숙제를 끝내놓고도 고모랑 더 놀다 가지 못해 안달하는 조카들을 내쫓다시피
집으로 보낸 뒤, 엄마가 한 말씀 하셨다.
"쯧쯧쯧.. 어떻게 방학숙제를 개학 전날까지 밤새다시피 해가는 것까지 집안 내력이라니..."

내가 <내력>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였다. ㅎㅎ
(사례 하나 추가했다. 이것들 말고도 더 많지만.. 너무 길어지면 지루할 테니까..^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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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공포

추억주머니 2007. 1. 16. 17:22
몸치...까지는 아니지만 운동신경이 발달하지 못한때문인지 툭하면 어디든 잘 부딪치고
울퉁불퉁한 평면에선 '반드시' 발을 접지르거나 넘어지는 나에게 계단은 참 못마땅한 장소다.
오늘 또 집을 나오다 계단 끝을 잘못 짚어 발목을 접지르고 보니
언젠가 예고했던 계단 관련 포스팅을 해야겠다 싶어졌다.
역사가 길어서 몹시 길고 긴 포스팅이 될 것 같으니 시간 없으신 분들은 감안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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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좋아

추억주머니 2006. 12. 18. 15:51
약속시간에 대한 압박감과 상관없이 대중교통수단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버스를 택하는 사람이다.

우선 지하로 내리락 오르락해야 하는 수많은 계단들이 제일 싫고
(나의 계단 공포증 역사에 대해선 나중에 글을 쓰든지, 어딘가 올린 글을 퍼오든지.. 하겠음 ㅜ.ㅜ)
지하 특유의 탁한 공기랄까, 꽉 막힌 느낌이 싫고 (밀실 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또 목적지까지 끊임없이 밖을 내다보며 어딘지 정류장을 확인해야 하는 것도 싫고
(지하철 고수들은 휴대폰 알람 맞춰놓고 잠도 잔다는 걸 알지만! 나 같은 하수는 좀 멀다 싶어 책 따위를 본다거나,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다가 걸핏하면 정류장을 지나치기기 일쑤다)
환승역에서 우르르 떼거리로 내리고 오르는 인간들 물결에 휩쓸리는 것도 싫다.
왠지 나는 꼭 넘어져 밟힐 것만 같은 기분;;;

아무튼...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매연 냄새 때문에 멀미를 할 때를 지나고선
계속 버스가 좋았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시험 끝난 날이라든지, 토요일에 특별활동으로 고궁이나 박물관 따위엘 간 날이면 친한 친구들이랑 '버스여행'이란 걸 하며 즐거워했다.
말이 여행이지, 사실은 그냥 노선이 제일 긴 버스를 골라잡아 타고 맨 뒷좌석에 주르륵 앉아 수다를 떨며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뿐인데도 그땐 그게 어쩌면 그리도 재미있고
뿌듯한 '여행'이었는지 모른다.
달콤한 초콜릿을 나눠먹으면서, '마이마이' 따위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원래 이 이름이 이리도 길었던가?)로 음악을 들어도 좋았고, 그냥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뽕짝' 음악에 맞춰 마구 흔들리는 버스 차체에 몸을 얹고 까르륵 대는 것도 좋았다.

지금은 버스 타고 다니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버스에 올라 맨 뒤에서 바로 한칸 앞에 있는 하나짜리 의자에 앉아 창밖 거리를 내다보거나,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묘미는
여전하다. 혹시 백일몽에 잠겼더라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내다보면 어딘지 곧장 알 수 있는 낯익은 느낌이 무엇보다 나에겐 편안함을 주는 듯하다.
딴짓하다 말고 과연 다음 역이 어디일지 깜깜한 굴안에서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는 지하철의 느낌과는 얼마나 다른지!

그러고 보니 서울 시내버스 디자인도 참 많이도 바뀌었다.
전 모 대통령의 부인이 보라색을 좋아한대서 바뀌었다는 아주 탁한 보라색 시내버스는  
참 혐오스럽다고 여겼는데, 정말로 보라색으로 바뀐 이유가 영부인의 개인적인 취향이었던 걸까 새삼 궁금하군.
아무튼... 내 개인적인 취향으론 연노랑 바탕에 샛노란 색이 띠처럼 둘려지고 빨간색으로 노선번호가 동그랗게 그려졌던 때가 제일 예쁜 것 같다. ^^

이번에 명박이놈이 바꿔놓은 버스는 일단 나에게 오랜 동안 혼돈을 주기도 했고
웬만한 시내까지는 다 있던 집앞 노선을 홀라당 없애버렸기 때문에 괘씸죄가 적용되어
별로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초록색 지선버스 번호는 4자리가 된 바람에 번호 외기도 힘들뿐더러
나처럼 눈이 나빠 야맹증까지 있는 인간에겐 멀리서 번호 알아보고 타기도 어려워졌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런 버스 타령을 하는 블로그를 포스팅하게 된 이유는
며칠 전 집앞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다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커다란 선물 포장(!)을 보고 몹시 흐뭇했기 때문이다.
가끔 버스 측면광고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보며 기발하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번엔 파란색 버스에 전면, 후면까지 '빨간' 리본을 둘러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라는 글씨를 적어놓은 뒤 측면에 영화 광고를
실었는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확 전달되는 예쁜 모양새에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조수석에 앉으셨다가 나보다 먼저 그 버스를 발견하신 울 아부지,
'아니, 저게 대체 뭐냐?'고 물으셨는데
무슨 광고일지 나도 궁금해져 신호 떨어졌는데도 그 버스 지나가길 기다리느라
고개를 쭉 빼고 있었다. ^^;;

나와 취향이 다른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한참 지난 영화 포스터를 달고 다니는 버스를 보며 눈쌀을 찌푸리듯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요란한 빨간 리본을 앞뒤로 매단 버스를 보면
을씨년스럽다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버스를 볼 때마다 공연히 나에게 달려오는 선물을 받는 느낌일 거란 생각에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해낸 사람에게 고맙다.

서울 시내를 쏘다니는 빨간 리본을 단 선물이라니...
아이디어가 너무 귀엽잖아!

그나저나 올해가 가기 전에 그 예쁜 버스를 한 번 타보아야 할 텐데
과연 기회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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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귤, 홍시

추억주머니 2006. 12. 1. 05:11
드디어 겨울이 오고야 말았다.
영하 날씨에야 차마 가을타령을 할 수야 없는 것.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영하권으로 떨어진 그저께
나는 가을의 冬死(동사)를 애도하는 의미로 아예 집밖에 나가지 않고 하루 동안 冬眠(동면)했다. -.-;;
(요새는 벨로가 블로그 안하니깐 음독은 생략 ^^;;)
((생략했다가 키드님의 요청으로 급 수정했음^^;;))
그러더니 급기야 어제는 눈까지 내리더군.
나도 이젠 어쩔 수 없이
가을의 바짓가랑이를 놓아주고 찾아온 겨울을 맞아야 한다.

추워지면 좀처럼 몸을 옴쭉달싹하기 싫어하는 '여름형' 인간이지만
그래도 겨울에 내가 좋아하는 게 있긴 하다.
, 홍시, .
사실 귤과 홍시는 하우스재배와 저장법이 발달되면서 반드시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겨울이 가장 제맛 아닌가.

중학교때였나..
이 너무 비쌀 땐 사먹을 생각도 못하다가 드디어 겨울이 되어 귤이 쏟아져 나오면
한 박스씩 집에 쟁여놓고 엄마랑 둘이 한번에 몇 개씩, 심할 때는 10개까지도 야금야금 까먹는
바람에 손바닥이 완전히 노래지는 일시황달에 걸려 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물론 처음엔 일시황달이 귤 때문일 리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몹시 놀랐는데,
의사가 귤을 많이 좋아하나보다면서, 겨울 지나고 귤 떨어지면 괜찮아질 거라고 그냥 돌려보냈더랬다.

어찌된 영문인지 요샌 거의 일년 내내 귤을 먹을 수 있는 것도 같지만
재주소년의 노래 '귤'처럼
과일가게에 온통 노랗게 귤이 깔리면 드디어 찬바람이 불 거라는 예고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굳이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살얼음 깨물듯 과즙 많고 시원한 귤을 먹는 묘미는
역시 겨울이라야 제격이다.

빠알갛게 익은 홍시 역시 귤과 함께 겨울에 먹어줘야할 대표적인 과일!
말랑말랑해서 주로 할머니들이 좋아하신다는 홍시는 나에게도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많다.
어려운 시절을 오래 보내신 탓인지, 우리 친할머니는 홍시를 드실 때 절대로 혼자서
한 개를 다 안 드셨다.
말년엔 워낙 양도 적으셨지만, 아무튼 할머닌 '우리 홍시 하나 먹을까..' 그러면서
꼭 납작한 홍시를 절반 잘라 나에게 주셨는데
과일 대장인 나는 홍시 반쪽으로 영 양이 차지 않았고,
얼른 반쪽을 다 먹고 난 뒤엔 또 홍시를 하나 반으로 갈라 일단 반쪽만 냠냠 먹어주었다.
남은 반쪽은 할머니께 권하기도 했지만, 몇분쯤 두었다간 결국 내가 낼름 먹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난 오래도록 납작한 홍시는 '꼭' 절반씩 갈라서 먹어야하는 걸로 알았고
친구집에 갔을 땐가, 홍시를 통째로 귤까듯 껍질을 얇게 벗겨 베어 먹는 걸 보고 약간은 충격을 받았으며, 지금도 뾰족한 대봉시가 아닌 납작한 홍시는 '반드시' 반으로 갈라 먹는다.

우리 외할머니도 홍시를 참 좋아하셨는데, 워낙 통이 큰 분이시라
외할머닌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사람을 보내 아예 덜 숙성된 홍시 감을 몇박스쯤 사오게 하셨다.
주로 '대봉'이라고 불리는 뾰족한 모양의 홍시였다.
억지로 숙성시킨 것보다는
항아리에 켜켜로 앉혀 익혀 겨울 내내 먹으면 맛이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곤 내가 놀러가면 사랑방에 있는 항아리에서 잘 익은 놈으로 골라주시거나
나중에 거동이 불편하실 땐 이모나 나에게 맛있게 생긴 놈으로 골라오라 하셨다.
사먹는 홍시도 맛있지만.. 그렇게 외할머니가 항아리에 담아 익혀주신 홍시는 완전히 꿀맛이었고, 워낙 커서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요샌 대봉시를 얼렸다가 여름에 무슨 대단한 별미나 되는 것처럼 백화점에서 비싼 값에
팔기도 하지만, 겨울 사랑방에서 살짝 얼듯말듯 차가워진 우리 외할머니표 대봉시만큼 맛있는 감은 두번 다시 맛볼 수 없을 것 같다.

할머니 닮아서 홍시를 몹시 좋아하는 울 엄마 역시
얼마 전부터 큼지막한 대봉시를 잔뜩 사놓고는 뒷베란다에 내놓고 이리저리 매만지다
잘 익은 놈으로 하나씩 골라 드시면서 몹시 뿌듯해하고 있다.
당뇨 때문에 달디단 홍시는 좀 걱정이 돼 내가 만날 눈을 흘기는데도, 전혀 소용이 없다.
ㅎㅎㅎ
그래도 홍시 안 먹고 운동 안하는 것보다는, 홍시 먹고 내 등쌀에 못 이겨 엄마가 운동 나가시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
물론 어젠 첫눈 온다고 사방에서 날아온 문자 메시지 때문에 나도 밖을 내다보긴 했지만
그리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모름지기 눈이란 더러운 세상을 뽀얗게 뒤덮어주어야 제맛이 아니겠나.
함박눈으로 펑펑 쏟아지긴 했어도, 땅에 닿자마자 녹아내리는 걸 보니 아쉽기만 하더군.
게다가 예전처럼 용감하게 맞고 돌아다닐 수도 없을 만큼 눈도 공해에 찌들어
우산으로 막아야하는 눈... 확실히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럼에도 눈이 내리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설레고 푸근해지는 게 사실이다.
물론 그런 마음보다는 녹은 눈 때문에 질척거리는 길에 대한 짜증과
눈이 얼어 빙판길이라도 되면 우리 동네 언덕 내려갈 걱정이 더 커지기도 하지만
아직도 눈이 펑펑 내려 많이 쌓이면 뛰쳐나가 작은 눈사람이라도 만들고픈 충동을 버리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2년전 때아니게 3월에 내린 폭설로 내가 만든 눈사람 사진이나
퍼와야겠다. (정민이가 인어공주 눈사람이라고 불렀던 사진 ^^;;)

그러면서 이왕 와버린 겨울, 까짓것.. 하면서 보낼 수 있기를 빌어야지.
까짓것.. 석달만 참으면 봄이 오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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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열망

추억주머니 2006. 11. 22. 02:30
나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악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렇다고 당장 뭘 배워 익히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악보는 나에게 늘 암호문처럼 어렵기만 했고
중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들도 악보를 '보고' 부른다기 보다는
남들이 부르는 걸 듣고 따라 불렀다는 게 맞는 말일 만큼 별것도 아닌 이론에 약했으며
끈기가 없어서 뭐든 제대로 연주할 수 있을 때까지 익힐 자신도 없다.

어렸을 때 못 배운 피아노에 대한 열망 때문에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 두어달 레슨을 받으러 다녀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왼손과 오른손이 완전히 따로 놀아야 하는 고도의 연주기술을 나처럼 단순한 두뇌를 가진 인간이 습득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기도 했고, 대학 신입생답게 친구들이랑 어울려 카페 다니고 술마시는 약속들이 많아지면서 결국 슬그머니 포기를 선언한 전적마저 있는 내가 아니던가.

거의 독학으로 제법 그럴듯하게 기타 연주를 하는 동생들의 어깨 너머로
나도 몇개쯤 코드를 외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로망스' 연주를 연습한 적도 있지만 그 역시 짧은 손가락과 잘 안 생기는 손끝의 굳은살을 핑계 삼아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니 사실 내가 악기 하나 쯤 제대로 다루고 싶다는 바람은
절대로 하지 못할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희원이자 허영이며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 행여나!

하지만 첼로의 깊은 선율을 들을 때나
플룻 같은 관악기의 매끈한 음율을 들을 때,
피아노 건반을 오가는 기다랗고 힘찬 손가락을 볼 때면 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면서 몹시 부럽고 가끔은 마구 질투심이 끓어오르기도 한다.
왠지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의 영혼은 나보다 훨씬 더 충만하고 풍요로울 것도 같다.
직업삼아 손가락에 피가 맺히도록 하는 연습을 담보로 하는 연주자의 삶이야 너무 치열할 수도 있겠지만, 취미 삼아 특기 삼아 가끔씩 애인처럼 악기를 쓰다듬는 기분은.. 몹시 그럴듯하지 않을까? ^^;;
천박한 허영심이라고 나무라도 할 말은 없다.
그냥 내 마음이 그런데 어쩌라고.

그렇다고 또 열심히 연주 음악을 찾아듣는 것도 아니면서
가끔씩 왜 이런 생각이 드는건지 원.

공연히 자괴감만 더욱 깊어지는 이런 생각 집어치우고
오늘은 장한나 CD나 틀어놓고 일해볼까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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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추억주머니 2006. 11. 1. 23:58
내일 21년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설레기도 하고 어쩐지 떨리기도 하고... 그 오랜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이야기가 잘 통할 것인지 조금 걱정도 된다.
미니홈피를 통해 그간 좀 변한 친구의 모습도 확인했고, 대강이나마 어떻게 지내는지 분위기는 파악했으니 화제거리가 궁해 어색한 침묵 때문에 진땀을 흘릴 리는 없을 거다.
하지만... 정말로 세월의 거리감을 완전히 잊을 만큼, 우린 과연 그때처럼 통하는 게 많고 든든한 정을 느낄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때 난 덩치로 보나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리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별로 속 안썩이고 착한 척을 하는 편이어서(가령 환경미화 같은 거에 동원되면 밤을 새서라도 시간표 꾸미기나 게시판 디자인에 힘썼다. 그렇다고 환경미화로 상을 받을 만큼 아이디어가 뛰어난 것도 아니면서.. ㅡ.ㅡ;;) 크게 미움을 받거나 화려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고, 고만고만한 앞번호 아이들과 폭 좁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가끔 제비뽑기로 자리배정을 하는 경우 뒷번호 아이들과 같이 앉게 되면 나를 귀여워하는 그들에게 여전히 토실토실한 뺨을 내주거나 슬쩍 안기며 드물게 친구를 만들어 갔는데, 이 친구도 그렇게 사귀게 된 '뒷번호' 친구였다. ^^*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고 괴로워했던 체육시간을 이 친구는 참 좋아했고
100미터 달리기 따위를 하면 가늘고 긴 다리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얼룩말처럼 달려 내 탄성을 자아냈다.

'수업 끝나고 우리집에 갈래?' 따위의 내용이 적힌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던 것 같고
친구 집에 가서 음악 들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오래 나누기도 했는데
어쩐 일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서로 연락이 끊겼다.
가끔 이런저런 경로로 그 친구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안해본 것 같다. 그냥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만 한 정도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난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거 싫어하고 감정표현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본인의 성격을 개조해보려는 노력에 돌입했는데, 원래 인복이 많은 덕분인지 그 뒤론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이 마구 불어났다.
물론 어린 시절 친구들을 계속 만나온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나중에 사귄 친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얼마 전엔가 20년지기 친구들에게 푸념을 했더랬다.
포도주와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 말 다 거짓말이라고.
와인 맛에 문외한인 탓도 있지만, 어쨌든 무식한 내 입맛에는 오래오래 묵어 값만 비싼 고급 포도주보다 작년에 갓 수확해 싱그러운 맛이 느껴지는 저렴한 포도주가 훨씬 맛있고,
알고 지낸 햇수는 거창하되 각자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져, 요즘 만나는 횟수는 일년에 서너번도 안 되는 오랜 친구들은 정작 내가 지금 당장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힘들고 아파하는지, 아니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하나도 모른다고 말이다.
사귄지 얼마 안 됐지만 (물론 그래도 최소 몇년은 된^^;;) 이런저런 소통의 혜택을 받아
심정적으로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어린' 친구들이 내 인생을 더욱 퓽요롭게 하는 것 같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포도주 맛에 대한 내 취향이 혹시 변덕스레 바뀔 수도 있듯이 앞으로 또 한 20년 지난 다음에도 그 '어린' 친구들이 내 곁에 있는지 둘러본 다음 그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것이었다. ^^;;

살면서 인간관계를 늘 똑같이 유지할 수 없듯이
친구들도 살다보면 저절로 정리가 된다.
소식이 뜸해지다가 서로 더는 찾지 않게되고, 하도 연락한지 오래 되어 갖고 있는 전화번호로 과연 연락이 닿을지 염려스러워 아예 시도조차 안하게 되는 거다.
물론 몇년씩 못 만났어도, 일년에 몇번 통화나 가끔 하면서도 늘 만나온 것 같은 친구도 있고 다시 만났을 때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거리감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확실히 내가 느끼는 건 가족과 달리 친구는 정성을 들여야 소중히 오래 간직된다는 거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담긴 그 친구의 자리를 가끔은 보듬어주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뛰어난 나의 건망증이 작용해, 위태롭게 잇고 있던 인연의 줄이 끊어지고 만다.

끊어졌던 연을 다시 이을 기회를 맞게 된 나의 옛 친구는 과연 앞으로 나와 어떤 세월을 쌓게 될까.
어렸을 땐 참 친한 친구였는데, 혹시라도 만나서 아파트 얘기, 아이들 교육 문제, 재테크, 주식 얘기로 나를 소외시켜 슬프게 만드는 일부 친구들 부류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뭐든 사서 걱정하는 버릇은 대책없는 낙관주의 성향과 함께 아직도 나를 양쪽에서 뒤흔든다. ㅎㅎ
일단은 마음을 비워야겠다.
멀지도 않은 동네에 사는 친구이니, 수시로 오다가다 수다 한 판과 차 한 잔 청할 수 있는 친구 하나 되찾았다고 조만간 기뻐하게 될지 또 누가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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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장의 기억

추억주머니 2006. 10. 25. 13:22

체력장 다음날 느껴지는 온몸의 뻐근함을 다들 기억하는지.
분명 체육시간마다 미리 100미터 달리기며, 윗몸 일으키기, 공던지기, 매달리기 따위의 연습을 시켰을 터인데도
몸과 머리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뇌에서 시키는 일을 팔다리가 제때 힘써 해내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점을 지니고 있는 나는
본격적으로 체력장을 하고 난 다음날, 늘 배가 당겨 누웠다가 일어나기가 거북하여
으아... 엄살 섞인 신음을 내뱉었고,
허벅지며 뒷다리가 당겨 계단을 오르내기기가 불편한 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움직이다
장난스런(그리고 운동신경이 뛰어나 뻐근함이 거의 없거나 덜한) 친구들이 일부러 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리닫으면, 으아악... 비명과 까르륵 웃음을 함께 터뜨리느라
당기는 뱃가죽이 더 아팠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온 몸을 불살라가며 체력장에 힘썼어도 중고등학교 시절 체육점수는 '미'를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기에 더욱 슬프고도 처절한 기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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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부터 이미 허벅지가 심히 당김이 느껴져 이거 마치 체력장 한 다음날 같군..
생각했더니 역시나.
오늘 일어나니 뱃가죽까지 심히 당겨, 쿡쿡 웃음이 난다.
미루어 짐작되는 원인은 두 가지.

하나는 어제 아침 같은 동네 사는 조카 유치원에서 있었던 '거북이 마라톤 대회' 구경에
늦는 바람에 헐레벌떡 500미터쯤 되는 거리를 달려가야 했던 것.
중고등학교 시절 각각 600미터와 800미터 오래달리기를 하고나서 늘
양호실에 실려가거나,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끼며 친구 다리 베고 땅바닥에 누워 있곤 했던
전적을 떠올리면, 어젠 그 뒤에도 멀쩡히 사진 찍겠다고 촐싹댄 게 신기할 정도다.
앗.. 그러고 보니, 몇년 전 거금 들여 마라톤화 사들인 뒤
매일 동네 개천변 산책로에 나가 남들 걷는 속도로 달리기를 시도했던 효과가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겐가??

아무튼 다행히 행사가 지연되어 늦지는 않았지만.. 달리는 조카 사진 찍어준다고 덩달아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도 역시 운동부족이 심한 나에게는 무리가 되었을 듯.

다른 하나는 난데없는 총각김치 담그기. ㅡ..ㅡ;;
어제 하남시에 전원주택 짓고 살며 텃밭도 가꾸시는 외삼촌이 총각무를 뽑아 갖고 오시겠다
하였을 땐, 살짝 염려가 되긴 해도 구체적으로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줄 차마 모르고 있었는데... 예쁘게 다듬기까지 하여 가져오신 총각무를 보니, 거의 김장수준이더라.

해서.. 어젯밤, 총각무를 한시간 반에 걸쳐 하나하나 수세미로 씻고
큰 플라스틱 통에 켜켜로 앉혀 굵은 소금에 절여놓았는데,
난생처음 김치 담글 걱정을 하고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일어나고 보니 온몸이 체력장 다음날 같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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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손놀림도 잘 안되고, 게다가 요새 좀 편찮으신 엄마 대신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펑펑 치기는 했지만..
좀 걱정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닌데 ㅎㅎㅎ
인터넷으로 찾아본 레시피와 엄마의 조언대로 찹쌀풀까지 쑤어서
방금 총각김치를 버무려 통 세개에 나눠 담아 베란다에 내다놓았다.

느낌은 버얼써 성공한 것 같지만
과연 어떤 맛이 나와주려는지... 진짜 성공여부는 얼마 후에나 알 수 있겠지.
체력장 후유증 같은 이 뻐근함이 다 풀릴 무렵, 맛있게 익은 총각김치를 먹을 수 있게 되면 좋겠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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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의 글엔가.. 해리님이 덧붙인 댓글에서 본 신데렐라 귀가시간 얘기에
문득 자극 받아 하소연이나 해볼까..

나이 40에 아직도 부모님이 정한 통근시간에 구애를 받는다고 하면
다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부모는 말이야, 길들이기 나름이야. 니가 길을 잘못 들인 거지!"라고 나무라기 일쑤다.

하지만 비딱투덜이의 삶을 추구하는 내가 그런 길들이기 과정의 몸부림을 시도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국이 하수상하여 걸핏하면 시위물결과 최루탄이 온 캠퍼스를 뒤덮던 시절에 들어간 대학 신입생 초창기 땐 심지어 '해지는 시간'이 통금이었다. ㅜ.ㅜ
여름엔 얼추 8시까지도 해가 길어지지만
겨울엔 5시반만 돼도 어둑어둑해지는데 그 시간 전에 집에 오라니!

엄마 몰래 나랑 단둘이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그럴 땐 당연히 통금 시간 해제!), 다 큰 딸이 다리 아프다 그러면 다리도 선뜻 주물러주시고, 집안 청소는 걸레질까지 온통 도맡아 하시는 등, 겉으로는 제법 자유진보주의자의 탈(!)을 쓰신 우리 아버지는 정치를 포함한 일부 분야에선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보수주의 가부장으로 돌변하시는데...

그게 가장 표면적으로 두드러진 것이 큰딸의 통금시간이었다.
물론 외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대신 남의 집 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외박을 해도 무방했다.)
통금시간을 어긴다고 해서 내가 물리적인 체벌을 받는다거나 감금을 당한다거나 하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우리집안 사람들 특유의 '화나면 말 안하기'의 효과는 물리적인 체벌보다 그 파장이 훨씬 컸고, 당장 주급으로 받던 용돈을 달라는 말도 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금야금 반항을 시작함과 동시에
일단 대학 친구들을 아부지한테 데려가 얼굴을 익혀드림으로써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교직원이셨던 아부지는 학교에 시위라도 벌어지면, 혹시 당신 딸도 그 '뻘건'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일부러 순시에 나섰으므로,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우연을 가장하여 수시로 친구들과 나의 '안전함'을 아부지한테 보여준 뒤, 뒤늦게 물결에 동참했다. 물론 뭐 주로 수업거부, 시험거부 뭐 이딴 이슈에 더 팔려서 ㅡ.ㅡ;;)  
하 수상한 바깥 세상에도 금지옥엽 고명딸을 믿고 맡겨도 좋을 이들이 있다는 걸 강조했다.
(다행히 우리 과엔 남들보다 늦게 입학해 나보다 6살이나 많은 언니가 동급생이었는데, 그 언니에 대한 울 아부지의 신뢰가 대단하여, 1학년 2학기 때는 단식투쟁 따위의 극단적인 반발 없이 엠티도 갈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통금시간은 점점 연장되어 나도 남들처럼 음주가무를 즐길 수도 있게 됐고
4학년 후반부터 이미 사회인이 된 뒤로는 까짓거 용돈 때문에 반항의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필요도 없어졌지만, 아무리 반항을 해도 자정으로 확정된 통금시간 자체를 없앨 순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게 된 뒤로는 '회식'이라는 아주 훌륭한 빌미가 있어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도 당당하게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화목한 조직생활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시는 아부지도 '회식'이라는 핑계 앞에선 딱히 트집을 잡아 금주를 명하거나 회사를 관두라거나 하진 않으셨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남들이 얘기하는 "부모님 길들이기 체제"에 돌입해
어울리지도 않는 신데렐라 딱지를 떼어보겠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직장에서 굳이 강요하지도 않는 회식자리의 2차, 3차 자리까지 죄다 쫓아다녔고
너무 늦어지겠다 싶으면 슬쩍 집에 전화를 넣어 도무지 자리를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먼저 주무시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아부지는 마구 역정을 내시며 그냥 도망쳐오라고, 택시비 없으면 큰길에 나가 기다릴 터이니 당장 오라고 난리를 치셨지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새벽까지 버텼다.
(어린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당시엔 휴대폰 따위 없었다! ㅋㅋ 삐삐도 상당히 나중에야 생겼던 것으로 생각됨.. 헐... 이래서 측근들과 마구 세대차이 나주시고;;; )

그.러.나...
얼큰하게 취해 열쇠를 쩔그럭거리고 현관문을 들어선 순간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 입구에 떡 하니 서 있는 검은 그림자.
별로 크지도 않은 우리 아버지의 키가 그땐 장승만큼이나 커보였고, 얼핏 보면 저승사자 같기도 했다. ㅠ.ㅠ 물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며, 현관에서 미처 신발도 벗지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는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울 아부지의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몇분간 그런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거나, 약간 혀 꼬인 소리로 내가 말이라도 붙일라 치면 아부지는 차갑게 "실망이다" 따위의 촌철살인으로  나를 넉다운 시켰다. ㅠ.ㅠ

새벽 3시건, 4시건 시간을 불문하고 자식이 귀가할 때까지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우리 아부지의 무서운 집념은 때론 큰길까지 뻗치기도 했고
살짝 취해 공연히 기분 좋아 흥얼거리며 생새벽에 택시에서 내린 내 앞에 문득 나타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취기를 순식간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왜 그렇게 딸을 못 믿느냐고 항변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나는 그간 믿음직한 큰딸이었고 그건 부모님 포함 친척들까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울 아부진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못 믿는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을 반증하듯, 주기적으로 아녀자 피습사건이나 납치, 강간 따위의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젠장!

그렇게 통금시간을 둘러싼 부녀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결정적으로 나의 패배를 선언하게 된 계기는, 그간 심정적으로 무던히 딸을 지원해주던 우리 엄마의 와병이었다.
몇년에 한번씩 아주 잠깐씩만 찾아오던 엄마의 우울증은 언제부턴가
거의 해를 거르지 않았고, 우울증의 첫 증세는 무엇보다 불면이었는데
내 귀가시간이 좀 늦어질라치면, 예전엔 아부지가 제 아무리 안달을 하셔도 염려없이 먼저 주무시던 엄마까지 동참해 나란히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을 못본 체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우리 엄마의 불면과 우울증이라는 효과적인, 참으로 서글픈 족쇄 때문에 나의 신데렐라 생활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가끔 반항기가 동하면 지금도 통금시간 12시를 살짝 넘기는 일탈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엄마 걱정에 내 마음 역시 조마조마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처럼 금기를 저지른다는 짜릿함이나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ㅡ.ㅡ;;

그리고 늙어가는 딸에 대한 귀가시간 제한을 여전히 고수하시는 이유가
정말로 딸에 대한 불신보다는 무서운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음주 모임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는 아부지를 기다리며, 시간이 많이 늦어지면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울 아부지가 술김에 잠들었다가 혹시 아리랑치기 따위를 당하시는 건 아닌지 별별 망측한 상상을 다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니 말이다.

늘 투덜거리면서도 사실 부모님 품안에서 캥거루족으로 살아가며 온간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인데, 혹시라도 능력을 키워 독립하는 그날이 오면 드디어 통금시간 따위 없어졌다고 통쾌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땐 또 딱히 통금시간을 넘겨 곤드레만드레 음주를 즐기거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밤새 정담을 이어갈 지인들이 곁에 없어서 일찍일찍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면 요즘엔 정말 술친구 청하는 이들이 줄었다.
술 안마시는 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얘긴데...
쓸데없이 감정이 넘쳐나고 마음의 빗장이 스스르 풀리긴 하지만, 나는 알콜의 힘을 빌어서라도 가끔 관대해지고 온 세상이 잠깐이나마 근사해보이고 술자리 건너편에 앉은 이가 몹시 예뻐 보이는 순간을 참 좋아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대단한 술꾼 같군.. 예전엔 정말로 제법 대단한 술꾼이었는데.. 이젠 맥주 한두 병에 알딸딸해지고 만다. 늙기도 설워라커든... ㅜ.ㅡ;;

하여간 이젠 나도 익숙해져버린 신데렐라 귀가시간...
굳은살처럼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도 잘 안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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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루시드 폴의 '오 사랑' 앨범을 사서 들은지 좀 됐는데
두번째 수록곡인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를 들을 때마다
10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친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이런저런 상념에 젖곤 한다.
정말로 할머니들의 마음은 어쩜 그리도 넓으신지...

영화 <집으로...>를 보면서 허리가 반으로 접힌 깡마른 그 할머니의 체구가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통곡하듯 눈물을 흘렸던 이유도 신파스러운 영화에 대한 절절한 감동보다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이야기 속에 이리저리 겹쳐졌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루시드 폴이 그리워하는 할머니한테서도 나는 우리 할머니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다.


초겨울 추위도 무시 못할 만큼 매섭던
나의 어린 바닷가.
여름엔 바지락 겨울엔 굴을 따다 채운
가난한 호주머니,

시골의 장터,
오늘은 일요일,
해뜨기 한참도 전 대야를 이고 향하는
할머니의 꿈, 우리 건강한 꿈,
빌고 또 비는 할머니의 꿈.

채 익지도 않은 삼백원짜리 수박에도
우린 기뻐했었지.
몹시 아프던 날, 나를 들쳐 업고 달리던
땀에 젖은 등자락.

이제 난 알지. 돌아가셨어도
나에게, 누나에게 살아 있음을.
어머니, 아버지에게서 숨쉬는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파피루스 덕분에 익히 루시드 폴이 부른 노랫말의 아름다움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쩜 이렇게도 간결하고 절절하게 느낌을 담아냈는지!)

이 노래를 들으면 또 조건반사처럼 덩달아 떠오르는 기형도의 시가 있다.
바로 '엄마 걱정'


시에선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지만,
열무 삼십단 대신 생선 광주리를 이고 행상을 나간 우리 할머니가 해저물고도 돌아오지 않으시면, 열두어 살이었던 우리 아버지가 어두운 골목을 지나 장터로 이어지는 길로 마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어려서 듣고 마음에 새겨둔 때문인지
기형도의 시를 처음 읽은 순간에도 나는 작은 체구에 커다란 생선 광주리를 이고 다니셨을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었다.

몸종을 데리고 시집올 만큼 한동안은 어려움 모르고 사셨다는 우리 할머니.
평안북도 정주에서 남편따라 만주로 피난 올라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한 몫 단단히 챙겨 온 재산은 대가족이 1년 가까이 여관에서 생활하느라 다 날리고
평생 시나 읊고 기생놀음만 하는 한량이셨던 할아버지 대신 생계를  할머니가 책임지셔야 했던 이야기를 두고두고 손녀딸에게 가만가만 들려주시며,
'내 허리가 이렇게 형편없이 반으로 굽은 건 전부 다 니 할아버지가 고생시킨 탓'이라고...
돌아앉아 담배 피우시던 할아버지를 곱게 흘겨보셨더랬다.

생일이 늦어 취학통지서도 나오지 않은 첫손녀를 굳이 동네 통장에게 막걸리 한 되 뇌물까지 써가며 한 해 일찍 국민학교에 들여보내 놓고선 못내 마음이 안 놓여 한 학기 내내 등하교 때마다 나를 업어 나른 우리 할머니의 정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나는
겉으론 흥흥흥 같이 웃어드리면서도
할머니의 굽은 허리에 나도 한 몫 단단히 한 것 같아 늘 마음이 짠 했다.

우리 할머니도 이제는 돌아가셨지만
부산 피난 시절 할머니의 꿈과 한과 희망이 담겼을 생선 광주리의 추억도 나는 알 것 같고
우리 아버지를 거쳐 나와 내 동생들에게까지 이어진
드넓은 할머니의 마음을 지금도 분명 느낄 수가 있다.

루시드 폴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래서 참 고맙고 또 슬프다.
우리 할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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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방구 중독

추억주머니 2006. 10. 11. 02:44
내가 온라인으로도 오프라인으로도 수시 구경을 즐기는
어느 문방구 가게 (디자인 소품 상점이라고 해야 정확하려나?)에서 개점 5주년 행사로
1주일간 20퍼센트나 할인판매를 단행한다는 이메일이 날아왔다.
다른 광고는 읽어보지도 않고 삭제를 하면서
유독 그 사이트에서 날아오는 광고 메일은 어김없이 열어보고선
입을 헤벌리고 한참이나 구경을 하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가끔은 쓸데없이 귀여운 책 스탬프와 잉크패드, 메모지, 스프링 달린 수첩,
스티커, 앙증맞은 공책, 알록달록 모양이 예쁜 박스 포장용 테이프 따위를 사들인다.

그나마 오늘은 그동안 사려고 별러두었던
명함 앨범을 거의 2천원이나 싸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갔던 것인데...
또 한 시간도 넘게 이것저것 문방구를 뒤적이다
잔뜩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놓았다가는 딱히 급히 쓸모 있는 물건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반성하는 의미에서 곧장 구매하지 않고 wish list로 옮겨놓은 뒤 얼른 나왔다.

나말고도 이런저런 문방구를 욕심껏 사들이는 지인들이 꽤 여럿이다.
다 쓰지도 않으면서 색색깔의 펜들을 사들여 필통에 꽂아두고 흐뭇해 하는 이가 없나
역시나 다 쓰지도 못할 아담한 크기의 각종 수첩과 노트를 보는 족족 사들이는 이가 없나
스티커만 보면 눈을 반짝이는 친구가 없나...

대체 "다 큰 우리들"이 이러는 이유는 뭘까?
나 같은 경우 그닥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내지는 못했으므로
문방구에서 늘 사고 싶었던 색연필이나 예쁜 지우개, 손에 잡히는 감촉부터 남달랐던
앙증맞은 일제 샤프펜슬, 수첩, 지갑 따위를 만지작거리며 오래오래 지켜만 보다가
뭔가 특별한 날 아주 큰 마음을 먹고 사들이는 형편이었으니
그에 대한 보상심리라고 쳐도,

상당히 풍요로운 어린시절을 보낸 터라 출장 다니시는 아버지 편에 수많은 일제 문방구들을
다 섭렵했고, 내가 몹시도 부러워했던 철제 케이스에 든 48색 색연필(아마도 독일제나 스위스제였을 거다)은 물론이고 요새 다시 유행한다는 다이모를 그 옛날에도 들고다니며 제 학용품에 이름표를 죄다 붙이고 뽐을 내, 우리들 기를 죽였던^^ 친구도 여전히 내가 대형 문방구에 들어가보자고 하면 얼굴을 빛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방구 선반을 뒤져대는 걸 보면
대체 영문을 모르겠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니 아예 키덜트 상품이라는 것이 버젓이 개발돼 나오고 있겠지만
나는 이른바 피규어figure를 비롯해 각종 인형이나 테디 베어류엔 전혀 관심이 없고
(동물 싫어하는 것 만큼이나 인형도 싫다! 먼지나 풀풀 나고 말이지... )
오로지 문방구, 특히 서지류에만 중독이 심하다. ㅎㅎㅎ

얼마 전 추석 대청소 하느라 책꽂이 맨 아래 놓인 상자를 여니
예전에 사들인 편지지 세트가 잔뜩 들어 있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편지쓰기를 관둔 게 최소한 10년은 넘었으니 그 역시 10년은 넘었을 게다.
철철이 사둔 카드야 아무 때나 쓸 수 있으니 다행이지만
해묵은 편지지는 기껏해야 조카한테나 물려줄 수밖에 없겠지.

또 앞으로 10년쯤 후에 상자에 담아 치워둔 조무라기 수첩과 공책들을 보며 스스로 한심스러워하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문방구 사들이는 일을 좀 자제해야 할 터인데
과연 어쩌려나 모르겠다.
참... 앞으로 10년 후면 내 나이가 몇이냐 말이다. ㅠ.ㅠ

반성문이랍시고 이렇게 적어놓고
분명 내일 난 득달같이 그 문방구 사이트에 로그인해서
못 이기는 척 물건 하나쯤 내려놓은 다음 낼름 계산할 게 뻔하다.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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