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주머니'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09.04.04 관계의 강요 23
  2. 2009.01.15 할머니의 추억 14
  3. 2008.12.09 남산 케이블카 27
  4. 2008.10.30 버스 모험 14
  5. 2008.08.13 홍대앞 추억 14
  6. 2007.11.16 신문 스크랩 6
  7. 2007.11.15 수능 단상 3
  8. 2007.10.16 홍옥 예찬 18
  9. 2007.10.02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8
  10. 2007.10.02 이층집 4

관계의 강요

추억주머니 2009. 4. 4. 22:01

국민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그 시기에 특히 또래 집단들과의 긴밀한 우정이 형성되는 모양인지, 반엔 유독 끼리끼리 어울리는 무더기들이 많이 생겨났던 것 같다. 꽤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우정을 과시하듯 서너명씩 몰려다니는 그 아이들이 꼴같지 않기도 했고, 당시 유행하던 고무줄 놀이에 낄 수 없을만큼 엄청난 실력(밑바닥이란 의미다) 때문에 어차피 같이 놀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유독 나를 자기네 무리에 끌어들이려고 공을 들이는 아이가 하나 있기는 했다. H는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이 아닌데도 괜히 빙 돌아서 시장 언저리까지 나와 동행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막 우겨서 나를 고무줄 놀이 깍두기로 껴주었다.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고맙다기 보다는, 1, 2단을 넘기지 못해 놀림감이 되기 쉬운 내 고무줄 실력을 아이들 앞에 보여야 한다는 게 곤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의향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H의 바람대로 학기초에 써내는 가정환경조사서에 그애의 이름을 적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가 막히지만, 부모의 학력과 직업은 물론이고 집에 TV 따위의 가전제품이 있는지 없는지, 말도 안되는 항목까지 써내야 했던 그 종잇장에는 친하게 지내는 학우관계에 관한 항목도 있었고, 그 종이를 내기 전날 H는 나에게 다가와 "나는 친한 친구 이름에 니 이름 쓸 거니깐, 너도 내 이름 써야한다. 알았지?"라고 말했었다. 
H가 특별히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싫은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는 그냥 귀찮아서 그애와 친구로 지내는 걸 <눈감아주기로> 했던 것 같다. 도시락을 먹을 때나 점심시간 이후 운동장에서 놀 때, 방과후 집에 갈 때도 난 오히려 요란하게 휩쓸려 놀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불편했음에도 거의 모두 끼리끼리 무리를 이룬 반 분위기 때문에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4월 중순쯤 우리반에 전학생이 등장했다. 뿔테 안경을 써 모범생 분위기가 나고 꽤 얌전해 보이던 그 아이는 전학생이 흔히 겪어야 하는 따돌림의 운명을 고스란히 겪기 시작했다. 학기초이긴 해도 이미 <파벌>이 형성된 이후에 전학을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느 점심 시간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애를 확 밀어 넘어뜨리는 장난을 한 순간 그애가 "아부지!"라고 외치며 울음을 터뜨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대부분 아이들은 깜짝 놀라거나 위험에 처한 순간 본능적으로 "엄마!" 또는 "엄마야!"라고 하는데, S는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든 아이들에게 이상하게 비쳤던 거다.
육성회 임원인 엄마를 둔 H는 당장 자기네 엄마를 통해 S의 뒷조사에 돌입했고, 전학시키던 날 학교에도 온 적 있던 S의 예쁜 엄마가 친엄마가 아닌 새엄마라는 사실, 그날 등에 업혀 있던 유난히 어린 아기동생은 배다른 남동생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 온 반아이들에게 떠들어댔다. 이혼율이 높아진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이혼이든 사별이든 재혼 가정이나 홀부모 가정은 무조건 <결손가정>이라며 잠재적인 문제아를 양산하는 가정으로 손가락질 했던 것 같다.
나도 2학년때 그 학교로 전학을 와 한동안 빙빙 겉돌던 기억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새엄마와 함께 사는 S를 안쓰러워하진 못할망정(사실 나의 무작정 동정심도 문제였지만;;) 괜히 따돌리는 반아이들에게 분노했고, 마침 집도 서로 그리 멀지 않은 S를 우연히 등교길에 만난 날 나도 모르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때도 친구를 본격적으로 사귀는 건 꽤나 뜸을 들이는 성격이라, 내가 S의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의협심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그냥 편견없이 전학생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와 S가 몇번 등하교를 같이 하는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즉각 수군대기 시작했고, H는 나를 운동장으로 불러내 <절교선언>을 했다. "S랑 같이 다니면 너랑 절교할 거야. 어쩔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H에게 나는 기가 막혀서 니 마음대로 하라고 대꾸하고는, 보란듯이 S와 친한 척을 했다. 당연히 나까지 따돌림을 당하는 추세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들의 패거리 횡포가 부당하다고 느끼며 분노했다. 다행히 한동안 지켜본 결과 S는 나와 책읽는 수준도 비슷했고, 나처럼 운동도 싫어하는데다 나처럼 아기들을 예뻐해서 자기네 아기동생을 만날 업어준다고 자랑을 했다. 우리집보다 훨씬 책도 많은 S의 집에 놀러가 보니, 동화속의 악독한 새엄마들과 달리 S의 새엄마는 특별히 다정스럽진 않아도 그저 평범한 엄마였다.
내 인생의 책 첫권으로 꼽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바로 이 친구가 선물해준 책이었다. 여자애들의 전반적인 따돌림 속에서 나는 얼떨결에 S와 단짝이 되고 말았지만, 나에게 정말로 각별한 친구의 존재는 S가 처음일 정도로 반발심이랄지 분노에서 시작된 우정은 퍽이나 성공적이었다. 한편, 나에 대한 H의 응징은 단순히 절교로 끝난 게 아니었다. ^^; 자신의 우정을 <감히> 거부한 배신자(실제로 H는 고무줄 놀이에 나를 끼워주었던 무리들에게 나를 <배신자>라고 칭했다)를 가만둘 수 없었는지, 따돌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은 듯 H는 화장실 낙서사건을 공모했다. 당시엔 재래식 화장실인 <학교 변소>에 남녀 학생의 이름이 나란히 쓰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하트 속에 내 이름과 나란히 적힌 남자애가 우리반에서 제일 말썽쟁이에다 잘 안씻어서 더럽고 공부도 못하는 또 다른 왕따였다는 사실이 H가 꾸민 복수극의 핵심인 모양이었다.
화장실 벽에 분홍색과 노란색 분필로 그린 하트 속에 이름이 적히는 사상최대의 스캔들을 직면하고 엄청난 놀림을 받기 시작한(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떼지어 "얼레리 꼴레리, 라니하고 OOO하고 얼레리 꼴레리~"라고 놀려댔다) 나는 처음엔 화가 나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욱하는 성질머리와 삐딱한 반항심은 그때도 여전했는지, 스스로도 잘난 척하며 나와는 터무니 없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던 코찔찔 말썽쟁이 OOO에게 일부러 보란듯이 연필도 빌려주고 전에없이 다정하게 구는 것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왕따들의 연대감이라고나 할까? 그때부턴 유독 잘난 아이들이 못되게 따돌리던 힘없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유독 뚱뚱해서, 말을 더듬어서, 잘 안씻고 꾀죄죄해서, 숙제를 잘 안해와서, 그밖에 사소한 이유로 따돌림을 받던 아이들은 각자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쉽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드러내놓고 엄청 친한척을 하진 않았지만 심정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는 사이였던 셈이다.
마침 그해 담임은 2학기부터 이상하게 좌석배치를 자율에 맡기겠다며 조장 몇명을 임명하곤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대신 남녀 비율은 반반씩 섞어 조를 꾸리게 했다.  폐품수집이든, 환경미화든, 용의검사든, 학예회 준비든 모든 경쟁평가는 조별로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장으로 뽑힌 내가 멍하니 앉아 있는 사이, 이미 패거리는 정해졌고 나는 굳이 조원을 선별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데도 뽑히지 않은 왕따 아이들은 전부 우리 분단에 앉으면 되는 거였다. ^^
그래서 우리 왕따 조가 모든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전분야에서 최고 평가를 받았다든가 하는 드라마 같은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단언컨대 꼴찌 조는 우리가 아니었다. 육성회 임원 자식들이 대거 모여있던 H의 조가 단연 극성스러운 1등을 차지한 건 말하나 마나일 것이다. 하지만 왕따들도 모이면 힘이 세지는 걸 우린 느꼈고, 근거없이 화장실 벽에 이름을 적혀 스캔들을 내는 복수극 같은 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반에서 제일 키 큰 코찔찔 OOO이 주먹을 휘두르며 누군지 들키면 죽을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스캔들 당사자인 내가 바락바락 아니라고 하며 울고불고 해야 재미가 있을 텐데 오히려 의연하게 구니까 소문은 더 빨리 잦아들었던 것 같다.

쓰다보니 나 혼자 옛생각에 재미가 들어 쓸데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왜 내가 새삼 이런 사연을 적고 있는고 하니, 제목에도 적은, 최근 경험한 어떤 관계의 강요 때문이다. 나는 고집스러운 구석이 많아서 누가 느닷없이 강요하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수긍하기 보다는 반발심이 먼저 생기는 편이고,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결과적으로 상처를 입더라도 제3자의 판단을 따르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겪고 판단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꼭 나를 염려한다는 명분으로 관계를 대신 정립해주려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그렇게 다가와서 간섭한 이들과 오히려 관계가 틀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각별히 친하게 지내라거나, 새삼스레 그 사람 이런저런 사람이니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지인에게 듣더라도,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인 때문인지 덜컥 그 말을 수긍할 수가 없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지만 십수년을 겪어도 뜻밖이라 생각되는 면을 발견할 만큼 한 인간을 파악한다는 게 어려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나는 느닷없는 관계의 강요에 제일 먼저 불쾌감을 느꼈다. S와 놀면 자기와는 절교라는 식으로 극단적인 협박을 한 H와는 전혀 다른 사건이지만, 어쨌든 나는 내 판단력과 관계망을 간섭하려는 그의 시도에 11살 때의 추억이 떠올랐고 부디 그때처럼 순전히 반발심으로 원래 관계가 흐트러지진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하기야, H와는 5학년에 올라가서 그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S와 함께 셋이 다시 친구가 되긴 했었다. 국민학교 졸업 후 그 둘다와 연락이 끊긴지 오래지만.
지금 그들은 또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하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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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맏이 부모의 맏딸로 태어난 데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이 다 장수하신 편이라 어른이 된 뒤에도 할머니들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많다.
놀라운 건 두 할머니 모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글만 익히셨으며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까지 쪽머리를 하셨을 정도로 외모로는 <구식> 할머니였고 외출할 때 말고 그냥 집에서 입는 옷은 언제나 <몸뻬> 바지였다는 점, 그럼에도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아들과 손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남아선호사상이야 뼛속 깊이 자리잡은 본능 같은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 딸들과 손녀딸들이 크게 홀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맏손녀딸이다 보니 오히려 특혜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예컨대, 나는 7살에 국민학교에 얼떨결에 입학한 뒤 한 학기 내내 할머니의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다. 당시 전교에서 제일 작은 아이였다는 후문이 있기는 하지만 ㅠ.ㅠ 그래도 매일 손녀딸을 업어 등하교를 시키는 우리 할머니의 정성은 온 동네에 유명했다고 한다. 확실히 두 할머니들은 장손을 각별히 챙기시는 듯해도, 손위 누이인 나에 대한 신뢰는 더욱 전폭적이었고 내 말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다 동의해주셨다.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번역이란 걸 시작할 때도 집안에서 큰 반대는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심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내 결심을 듣자마자 "쟤는 무슨 일을 하든 똑 떨어지게 잘 해낼 거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앞장서서 온 식구들의 우려를 잠재우셨다.
두분은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와 달리 이런저런 사회문제를 의논해도 나와 말이 잘 통했고 애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절대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친할머니 손에서 8살까지 자란 나는 당연히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은 사람이어서 아빠와 엄마보다 순위가 앞섰고, 외할머니와는 친할머니만큼 곰살맞은 관계는 아니어도 늘 나를 감싸주시는 커다란 산 같은 분이라고 여겼다. 두분 다 서울 하늘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사셨으니 그만큼 자주 만나며 지낸 덕분도 있겠지만 나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크고 공고했으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친할머니는 허리가 심하게 굽고 심장이 약해 말년엔 바깥출입이 거의 불편하시긴 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안에선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걸레질과 정리정돈을 하시던 바지런한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마지막 1, 2년을 암 때문에 괴로워하셨지만 그 전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랬기에 내 기억에 남은 두분 할머니는 늘 자애로운 미소에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십여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 용돈까지 일일이 챙기시는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속 상한건 할머니가 된지 오래인 우리 왕비마마 때문이다.
우리 조카들은 고모한테 열광하는 것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워낙 울 엄마가 손녀 손자들을 각별이 예뻐하고 안아주고 사족을 못쓰는 성품이 아니다 보니, 예민한 아이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 때문이다.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셨던 울 아버지는 언제나 온 몸을 던져 손녀손자들과 놀아주셨지만 오히려 엄마는 그렇게 손주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보기엔 당신에게 쏟아져야 할 남편의 사랑이 손녀손자들에게 나뉘어 가는 것조차 질투하시는 듯했다. 내가 조카들에게 몸바쳐 봉사할 때도 겉으로는 늙은 딸 피곤해 할까봐 염려하시지만, 사소한 일로 어린 손녀딸과 말다툼을 벌이는 걸 보면 아마도 속마음은 무수리의 온전한 보필을 당신만 받고 싶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울 엄마는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쌀쌀맞은 속담의 신봉자다. 아이들이 그리워서 거의 매일 손주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의 귀찮은 질문(숙제 다 했니? 밥 먹었니? 유치원에 잘 갔다 왔니?)을 던지고는 쌀쌀맞거나 시큰둥한 반응(그거 어제도 물어봤잖아? 할머니는 왜 만날 밥먹었느냐는 거만 물어요?)에 마음 상해 하고, 손주들이 놀러오기를 학수고대하는 한편, 떼로 몰려온 조카들이 마구 뛰어다니면 정신없다고 타박을 하시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니 눈치 빤한 조카들은 심지어 얼마 전부터 헤어질 때 할머니 볼에는 뽀뽀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_-;;

어린 조카가 장난삼아 일부러 나한테도 뽀뽀를 안해주고 까탈을 떠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라고 위로를 하긴 하지만, 어느새 머리가 굵어져 할머니한테 툴툴거려도 내심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정민공주 이외엔 나머지 조카들이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은근히 할머니를 따돌림하고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녀석들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늘 아프고 온종일 TV나 보고 자기네랑 놀아주지도 않고 귀찮고 빤한 질문이나 해대는 사람인 모양이다. 왕비마마 본인도 그게 섭섭해서 마음 아파하시지만 정작 조카들을 대할 땐 ~~ 하지 마라, 고모 괴롭히지 마라, 뛰지 마라 따위의 잔소리만 해대니 관계가 호전될 리가 없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너무 일찍 빼앗겨 버린 조카들에게 할머니의 추억만이라도 오래오래 감동으로 남겨주고 싶은데 나로선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조카들을 업어주기엔 울 엄마의 건강이 너무 나빠지셨고 할머니들과 윷놀이, 공기놀이를 함께 하던 나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홀로 하는 컴퓨터 게임에 너무 익숙하다. 조카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낯선 게임용어와 컴퓨터 용어에 왕비마마는 더욱 절망하는 판국이니 원...
우리 왕비마마와 어린 조카들의 전격적인 관계 개선을 위한 묘안은 어디 없을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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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였다.
볕이 좋은 일요일, 가난한 부부는 계획했던 대로 올망졸망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남산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결혼식을 마치고 속리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택시를 대절해 친구들과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이 벌써 6, 7년 전의 일이었다. 그땐 평생 단 한번의 호사라 택시를 타고 남산을 올랐지만, 이번엔 두 아이를 걸리고 막내를 아내 등에 업힌 채 당연히 버스를 타고 회현동으로 향했다. 
탈 것들을 담은 그림책에서만 보던 케이블카를 태워주겠다고 아이들과 오래 전부터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보는 것은 젊은 부부도 처음이었기에 폴짝폴짝 뛰며 흥분해 좋아하는 아이들 못지않게 마음이 설렜다. 편도 표를 끊어 무쇠로 만든 작은 버스 같은 케이블카에 오르자 정말로 거짓말처럼 케이블카는 줄에 매달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케이블카 창에 매달리듯 유리에 얼굴을 대고 내다보는 남산의 초록빛 녹음은 더욱 아름다운 듯했고,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는 곳의 동네이름을 어림짐작으로 가르쳐주며 새삼 서울이 참 넓구나 싶었다.
아쉽게도 케이블카는 몇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특히 둘째 아이의 목표는 남산구경이 아니라 오로지 케이블카 타기였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녀석은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또 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남편은 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셈을 했다. 예정했던 대로 남산 팔각정 주변을 둘러본 뒤 아이들과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나면 집에 돌아갈 차비 정도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말 잘 들으면 또 태워주겠다고 달래자 아들녀석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얌전히 아빠의 손을 잡았다.
굵게 불어터진 우동 면을 멸치 국물에 말고 유부 몇조각을 얹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남산을 쏘다니다 먹은 늦은 점심은 행복의 맛이었고, 다섯 식구의 일요일 나들이는 평화롭게 끝나가고 있었다.
둘째녀석이 내려갈 때도 케이블카를 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전까지는.

남편은 남은 돈을 계산해보았으나 집에 돌아갈 버스비를 제외하면 솜사탕 하나를 사먹거나, 어린이용 반표를 끊을 수 있는 돈이 남을 뿐이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매를 맞고도 좀처럼 꺾이지 않는 둘째의 막무가내 성격을 잘 아는 그는 길바닥에서 큰소리로 아이를 혼내는 남부끄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분 좋은 가족 나들이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아내와 의논 끝에 아들녀석만 케이블카에 태워 내려보내자고 결론을 내렸다.
아들 녀석에겐 꼼짝도 하지 말고 케이블카 내리는 곳에서 엄마아빠를 기다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고, 케이블카 차장에게도 아이를 잘 간수해달라고 부탁을 한 뒤 부부는 그저 좋아라 손을 흔드는 아들을 배웅했다. 뒤이어 남은 두 아이를 하나씩 업고 안은 부부는 부지런히 뛰다시피 남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나 케이블카를 탔을 땐 눈깜짝할 새에 정상에 당도했으므로 동네 언덕쯤으로 어림짐작했던 남산 길은 막상 걸어보니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둘째를 잃어버릴까봐 더럭 겁이난 젊은 부부는 부디 아들녀석이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꼼짝않고 기다려주기를,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 데려가는 일은 없기를 기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케이블카 승강장이 보여 길잃을 염려가 없게 되자 남편은 큰아이 손을 아내에게 쥐어주고는 홀로 먼저 승강장 건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들녀석은 잔뜩 겁먹은 얼굴에 눈물자국이 두 줄기 말라붙은 채로 얌전히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멀고 먼 남산 길을 숨가쁘게 달려온 부모의 수고를 알 리 없는 녀석은 심통이 나서 제 아빠를 반기기는커녕 입술을 잔뜩 빼물고 눈을 흘겼다.
엄마는 금방일 줄 알았는데 걸어내려오려니 너무 멀어서 오래 걸렸다는 설명 끝에, 다음에도 또 케이블카 혼자 탈래? 라고 물으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을 겪기는 했지만, 다섯식구는 손에 손을 맞잡고 나란히 남산 입구 길을 내려오며 또 다음 나들이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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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케이블카가 수십년만에 새것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니 또 문득 떠올라, 우리 가족이 차를 타고 남산 옆을 지나간다거나 이야기 도중 남산이 언급될 때 늘 되풀이되던 어린시절의 추억을 적어보았다.
사실 나는 저 날을 기억하지 못하며, 전부 엄마 아빠한테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다. 나름 꽤나 놀랐을 법한 동생녀석도 그날의 기억을 갖고 있진 않는 듯하다.  
저 날 이후 나는 거의 30년쯤 뒤에야 비로소 다시 남산 케이블카를 타보았는데, 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들도 아이들 데리고 남산에 놀러갔단 이야기는 들어보았는데 케이블카 얘긴 없었던 걸 보면 안탔단 얘긴가? 자동차를 가져갔을 터이니 그랬음직도 하다.
어느해였나 송년모임에서 굳이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야경을 보자던 후배의 주장에 촌스럽다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안 그랬으면 새것으로 바뀌기 이전의 케이블카를 타볼 기회를 영영 놓쳤겠구나 싶어 새삼 고맙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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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모험

추억주머니 2008. 10. 30. 20:48

내가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최초의 장래희망은 선생님이지만, 가족들의 증언과 놀림으로 각인된 어린시절의 장래희망은 버스차장이었단다(참고로 한살 어린 나의 큰동생의 꿈은 버스 운전수였고, 나와 둘이 세트로 버스놀이를 많이 하고 놀았다고 했다).
나와 세대차가 많이 나는 이들은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하겠지만, 버스 중간에 달린 문앞에 섰다가 정류장마다 오르내리며 차비도 받고 만원버스에 사람들을 밀어올리기도 했던 자주색 유니폼에 빵떡모자를 실핀으로 꽂은(주로 양쪽으로 땋은 갈래머리거나 단발머리였다) 버스 차장이 되겠다고 했다니 얼마나 웃긴지. 버스 외부에 달린 볼록거울도 없고 하차벨도 없던 시절, 버스 차장은 차체를 탕탕 두번 두들기며 "오라이!"라고 외쳐 운전수에게 출발을 알렸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둘 이상 데리고 탄 승객이 있으면 자기가 대신 한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버스 계단을 내려주기도 했다.
버스 차장이 되고 싶다고 얘기했던 건 정말로 생각나지 않지만, 버스차장이 아직 어려 행동이 굼뜬 나나 큰동생 중에서 가까이에 있는 아이를 덥썩 안아 허공을 날듯 버스에서 내려주었던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다. 무서움 많은 나는 대부분 거친 손길로 내 허리를 안아 붕 날리듯 버스 밖으로 내려주는 걸 싫어했는데, 왜 차장이 되겠다고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알 것도 같다. 어린 나의 눈에 그저 버스가 멋있고 근사해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국민학교 시절 "커서 뭐 될래?"라고 묻는 어른들의 질문에 암팡지게 "선생님이요!"라고 대답하곤 했던 나에게 삼촌과 고모들은 버스 차장 된다더니 웬 선생님이냐며 버스 운전수가 되겠다던 큰동생과 나를 한꺼번에 놀려댔다.

동생의 버스 운전수 희망이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이내 버스차장이란 직업의 지난함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차비를 <삥땅>치는지 감시하느라 근무가 끝나면 알몸수색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는 버스차장들의 항의시위 사건도 뉴스에 종종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똑같이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에 또래 친구들에게 차비를 받고 여린 몸으로 만원버스 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온몸으로 사람들을 받치고 있는 모습도 안쓰러웠다. 그래서 버스 차장이 되겠다던 나의 소망은 재빨리 꼬리를 내렸고 다만 버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애정만 오래도록 남았던 모양이다.
많이 흔들리거나 기름냄새가 심한 버스에서 멀미를 해 샛노란 얼굴로 중간에서 내려야 하거나 엄마가 준비하고 다니던 비닐봉지에 구토를 한 기억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나는 어려서도 지금 만큼이나 버스 타는 걸 좋아했다. 제일 처음 혼자 버스를 탄 게 몇살 때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암튼 혼자 타는 버스를 나는 대단한 모험처럼 즐겼고 멀지는 않지만 노선이 기묘해 꼭 한번은 버스를 갈아타야하는 할머니댁에 주말마다 숙제를 챙겨들고 가 하룻밤 자고 오는 것이 나의 낙이었다.
다른 교통수단보다 버스가 훨씬 좋다는 이야기를 언젠가도 적어놓았지만, 고등학생 땐 심심할 때마다 친구들과 회수권 한장으로 떠나는 버스 종점여행이 엄청 재미있고 신나는 일탈이었다. 그땐 버스노선도 워낙 길어서 왕복하려면 3시간즘 걸리는 버스도 있었는데, 그 오랜 시간 조잘조잘 떠들며 창밖과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늘 신났다.

그러나 버스 종점여행에 맛을 들이기 이전에, 한번은 버스를 잘못 타 크게 식겁한 적이 있었다.
중학생 때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마지막날엔 꼭 단체로 영화나 연극관람을 했었는데 그날은 마침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난 뒤였다. 친구들과 나는 당시 유행했던 <잘생긴> DJ가 나오는 떡볶이집엘 가느라 대학로에서 성신여대앞 돈암동까지 걸어갔다. 차비까지 돈을 톡톡 털어 모은 돈으로 떡볶이와 튀김 따위를 사먹은 우리들은 내가 여유 있게 갖고 있던 회수권을 한장씩 나눠가진 뒤 각자 집으로 향했다. 돈암동에서 집이 멀지 않은 친구들은 걸어가기로 했고 그 외의 친구들과 나는 회수권을 한장씩 손에 들었다. 가끔 친구들을 따라 돈암동에 떡볶이를 먹으러 간 적은 있었지만 여전히 낯선 그 동네에서 불안해 하는 내게 친구들은 타야할 버스 두 가지를 가르쳐주고는 총총이 제 버스가 오는 순서대로 가버렸다. 그런데 친구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내가 타야할 버스는 둘 다 중간에 노선이 갈라져 버스 앞에 별도로 붙여놓은 표지판을 확인하지 않으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는 사실이었다. 수중에 회수권도 딱 한장밖에 없는 주제에, 그때도 잘난척 하는 아이였던 나는 버스 운전기사에게 방향을 묻지도 않고 늘 학교앞에서 보던 버스 번호를 보자마자 냉큼 올라탔다. 

그러나 내가 탄 버스는 예상하던 동네로 가지 않았다. 버스 노선이 바뀌었나보다고 애써 위로하며 좀 지나면 낯익은 길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질 않았다. 급기야 나는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어느 아주머니께 이 버스가 **동 가는 거 아니냐고 물었고, "하이고, 버스 잘못탔네!"라는 청천벽력같은 대답을 들었다. 이미 나는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땐 당연히 버스 안내방송도, 버스노선도 같은 것도 없었다. 이미 버스 차장 제도도 없어진 뒤였다)
때는 깜깜한 밤이었고 내 수중엔 회수권도 땡전 한 푼도 없었다. 대학생 때도 종종 해지는 시간이 통금시간이었던 내가 겨우 중학생 때 밤중귀가라니. 난생 처음 간 동네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어정거리며 느꼈던 낭패감과 공포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는 엉엉 울며 일단 건널목을 찾았다. 건널목 앞 구멍가게엔 빨간 공중전화가 매달려 있었다. 일단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 내 상황을 알려야한다고 생각했고, 훌쩍훌쩍 울며 가게 주인에게 다가가 돈이 없는데 집에 전화를 걸어야하니 20원(10원이었던가?)만 빌려달라(언제 갚겠다고?)고 했다. 가게 주인은 나를 째려보고는 험악한 표정으로 대꾸도 하지 않더니 가게 안으로 들어가 유리 미닫이 문을 탁 닫았다.
서러움이 복받쳐 엉엉 울며 건널목을 건넌 나는 어서 차비와 전화비를 구걸해야 한다는 생각과 어떻게 그 돈을 마련할 것인지 절망감 사이에서 한동안 울기만 했다. 행인도 거의 없던 캄캄한 밤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울고 있는 교복 입은 여중생이라니. 누가 봐도 가엾긴 했던지, 멀리서 다가오던 아줌마가 나를 빤히 관찰했다. 나는 속으로 이 아줌마에게 어떻게든 사정을 설명하고 돈을 구걸해야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그쪽을 흘끔거리며 계속 울고만 있었다. 다행히도 그 아줌마가 왜 우냐고 말을 걸었고, 나는 웅얼웅얼 버스를 잘못 탔는데 차비가 없다고 고백한 뒤 또 한참 끄억끄억 울어댔다.(내가 울음끝이 좀 질기다^^;)
착한 그 아줌마는 당장 지갑을 열어 백원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며 집에서 엄마가 걱정하겠다고 혀를 찼다. 나는 전화부터 해야하는데 전화할 돈도 없었다고 흑흑 흐느꼈고, 아줌마는 길 건너편 공중전화를 가리키며 전화부터 하라고 타일렀다.
당시 학생 차비는 50원쯤 되었던 모양으로 백원이면 차비와 전화를 걸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때 백원이 지금 천원보다도 가치가 높았다는 얘기다. 암튼 나는 그 쌀쌀맞은 가게 주인에게 다시 가서 백원을 내밀며 전화걸게 잔돈을 바꿔달라고 말하며, 속으로 가게 주인이 나를 의심해 그 돈을 훔쳤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그래서 돈을 빼앗으면 어쩌나 마구 떨었다. 다행히 매몰찬 가게주인은 말없이 잔돈을 바꿔주었고, 내가 공중전화에 매달려 또 엉엉울면서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이야기를 엿듣는 눈치였다.

밤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던 딸이 대뜸 전화를 걸어 엉엉 울며 버스를 잘못 타 어딘지도 모르는 동네에 내렸다고 하자, 엄마는 버스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갈테니 얼른 버스를 바꿔타고 오라고 당부했다. 차비도 없어서 길 가는 아줌마한테 얻었다는 말에 엄마는 푹 한숨을 쉬었을 뿐 야단을 치지는 않았다.
드디어 버스를 다시 타고 몇번이나 운전기사와 주변 승객에게 **동 가는 거 맞느냐고 묻던 나는 익숙한 길과 동네가 나타나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엄마가 눈에 들어온 순간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춘추복을 입기엔 아침저녁으로 약간 쌀쌀한 날이었던지 엄마는 스웨터를 팔에 걸친 채 기다리다, 버스에서 내려 꺼이꺼이 우는 나에게 얼른 옷을 입혀주었다. 엄마 팔짱을 끼고 집으로 돌아오며, 친구들과 돈을 모두 털어 떡볶이를 사먹느라 여유 있던 회수권을 나눠가졌다는 사실을 실토했음에도 나는 전혀 야단을 맞지 않았고 다만 앞으로는 비상금으로 천원짜리 하나랑 회수권 10장을 꼭 갖고 다니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내 모험담을 들은 친구들은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나는 정말로 간담이 서늘해졌던 경험이었다.

지금 계산해보니, 내가 처음 홀로 버스를 탔던 건 5학년때부터인 것 같다. 셋방을 전전하느라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같은 동네에서 집을 옮겨다녀야 했던 그 시절, 5학년 무렵엔 학교에서 걸어다닐 수 없어 버스를 타고 대여섯 정거장 정도 가야하는 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7살에 입학한 나는 당시 11살이었다.
그런데 올해 11살이 된 정민공주도 얼마 전 버스 모험을 시작했다.

만날 제 엄마 차를 타고 편히 오던 우리집엘 혼자서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은 올들어 시작된 정민이의 소망이었다. 제 엄마와 버스를 타고 오는 걸 일부러 몇번 연습도 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난달 처음으로 정민이는 영어공부를 할 책이 담긴 보조가방을 들고 첫 홀로 버스 여행을 시도했고 결과는 대체로 성공이었다. 중간에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하는데, 얼마전 버스 노선번호 뒤에 A/B 식별제가 시행된 후라 주변 아줌마에게 물어 확인한 뒤에 버스를 탔다고 했다. 
비록 한 정거장 전에 내리는 바람에 한 정거장은 걸어오다 마중나간 나와 상봉하긴 했지만 정민이도 나도 몹시 뿌듯했었다. 
문제는 두번째로 오던 날이었다.
갈아타는 버스정류장에서 정민이는 하필 나에게 110번 A를 타는 것인지 B를 타는 것인지 전화로 물었고, 나는 너무도 확신에 차서 A라고 가르쳐주었다. -_-;;
그러나 20분쯤 뒤 정민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고모, 이 버스 이상한데로만 가는데? 이번 정류장이 경동시장이고 다음이 동대문 구청이래."
헉... 내가 잘못 가르쳐줬던 거다!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한바퀴 돌면 **동엘 오는지 물어보고 아니면 건너가서 갈아타라고 일러준 뒤 나는 초조하게 마음을 졸였다.
중학생이면서도 낯선 동네에서 더럭 겁을 집어먹었던 나의 경험이 떠올랐다.
다행히 정민이에겐 돈도 넉넉하고 휴대폰도 있으며 시간도 대낮이었으니 나보다 나은 상황이었지만, 역시나 어린 정민이는 겁이 난다며 전화를 끊지 말고 계속 통화를 하자고 했다.  
어리버리한 고모 탓에 결국 정민이는 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처음 출발했던 기점으로 되돌아가느라 한시간이나 허비한 뒤 무사히 110번B 버스를 탔고, 정류장도 제대로 내려 버스정류장에서 멍청한 고모와 상봉했다. 과거의 나와는 상황이 꽤 다르긴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던 정민이는 약긴 긴장된 표정이었다가 나를 보며 이내 생글생글 웃었다. 그때까지 1시간 반동안 부주의한 정신머리를 자책하며 정민이만큼이나 전전긍긍 조바심을 쳤던 내가 더 감격스러웠지만 물론 울진 않았다. ㅋ
그러고 나서 지난 월요일. 세번째로 버스모험을 시도한 정민이는 출발할 때도 도착해서도 전화 한번 안하더니 대뜸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왜 마중을 안 나왔느냐고 따졌다. ^^

정민이가 5살 때였나, 버스는 가난한 사람들만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일부러 단둘이 버스를 타고 시내 책방에 갔던 적이 있다. -_-;;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는 재미와 파란 줄이 그어진 버스전용차선의 의미, 주차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비싼 택시비를 낼 필요도 없이 빠르게 목적지에 갈 수 있는 버스의 묘미를 제대로 설명해주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쨌든 정민이는 혼자서 버스를 갈아타고 고모네 집에 오는 걸 대단한 재미로 느끼는 눈치인데, 그게 장하고뿌듯하긴 해도 여전히 나와 울엄마는 공주의 홀로서기가 불안하다. 그나마 밤중에도 홀로 버스타고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가 어렸을 땐 10살쯤부터 스스로 다 컸다고 잘난체 했었지만, 조카를 보면 아직도 마냥 애기 같고 불안하다. 동생부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가 우겨서 정민이에게 휴대폰을 사준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이 좀 험악하고 불안한가! 아이가 셋이라 다섯식구가 가끔 택시를 탈 때도 눈치를 봐야했고, 웬만해선 우르르 버스를 타고 다녔던 나의 어린시절과 달리 조카들은 태어나자마자 제 아빠가 모는 자동차를 타고 다녔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지극히 드물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의 홀로서기는 더더욱 느리고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카들이 자라는 걸 지켜보며 세상은 달라졌어도 많은 것들이 되풀이됨을 느끼며 참 신기하다.
짜증스러워 귓등으로 흘렸던 어른들의 잔소리를 지금은 내가 하고 앉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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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앞 추억

추억주머니 2008. 8. 13. 17:05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좀 샀더니 뜻밖의 부록들이 딸려왔다.
5천원짜리 국제전화카드와 홍대앞 클러빙 맵.
책 홍보를 위해 지도를 비매품으로 제작해 돌리는 출판사도 별로 마음에 안들지만(나도 두어 권 책을 내긴 했어도 다시는 거래하기 꺼려지는;;) <클러빙 맵>이라는 제목부터 눈쌀이 찌푸려진다.
clubbing map이라니. 곤봉으로 후려치는 지도라는 뜻이냐 뭐냐!  (club은 night club의 준말이기도 하지만 '곤봉', '곤봉으로 때리다'의 뜻도 있다)
그냥 '홍대앞 클럽 지도'라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말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 쓸데없이 아무데나 영어를 같다붙이는 세태는 아무래도 못마땅하다.

어쨌거나 홍대앞 클럽과 카페, 음식점 따위가 깨알같이 적혀 있는 지도를 시큰둥하게 들여다보자니
옛날 생각이 났다.
주말마다, 때로는 주중에도 밤마다 홍대앞으로 몰려가 맥주캔 하나에 몇 시간 동안 열광하던 10년 전의 추억이.
그때도 이미 난 30대였는데 어디에서 그런 체력과 열정이 나왔는지 원.
지금 생각하면 의아하고 신기하다.

나와 지인들을 한꺼번에 홍대앞 클럽으로 이끈 건 학원에서 만난 어느 후배였다.
요즘처럼 인터넷 검색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므로, 번역하면서 가끔씩 나오는 슬랭도 물어보고
녹슨 영어실력도 닦을 겸, 그리고 어떻게든 규칙적인 생활리듬을 되찾아보겠다고 열심히 영어학원엘 다니던 시절이었다. 학원 사람들 가운데 몇몇과 놀랍게도 죽이 잘 맞아선 수업 끝나고도 헤어질 생각을 않고 같이 점심 먹고선 '스터디' 한답시고 온종일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다 저녁에 직딩파들이 퇴근후 합류하면 맥주마시러 돌아다니느라 연일 일은 팽개치고 놀기만 했었는데, 똑같은 놀이문화에 식상해질 무렵 휴학중이던 한 아이가 홍대앞 클럽엘 가자고 했다.
술도 안 마시는 그 아이는 주말마다 스트레스 풀러 친구들이랑 홍대앞 클럽을 가는데, 우리 분위기로 봐서 다들 좋아할 것 같다나. 그 아이가 데려간 클럽은 인디밴드들이 라이브 공연을 하는 곳이 아니라, 디제이가 음반을 틀어주되 나이트클럽과는 달리 기본도 없고 입구에서 두당 5천원을 내면 무조건 캔맥주 하나를 주는데, 그걸 마셔도 되고 다른 음료수로 바꿔마셔도 되는 요상한 시스템의 별천지였다. (나중엔 입장료를 따로 내면 음료권을 주고 팔목에 도장을 찍어주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내가 첫발을 디딘 홍대앞 클럽의 이름은 <황금투구>.
내 경우 워낙에도 대학시절부터 직딩시절까지 춤추러 다니는 걸  좋아했었지만, 어느 순간 나이트클럽은 춤을 추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예쁘게 차려입고 나가는 짝짓기와 즉흥만남을 위한 장으로 변질되어 춤판에 발을 끊은지 오래였다. 그런데 앉을 자리도, 가방을 놓을 자리도 별로 없이 다들 제 흥에 겨워 춤을 추거나 한 구석에서 음악에 심취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유로운 그 공간이 나에겐 얼마나 파격적이고 마음에 들던지, 우리는 금요일과 토요일 일주일에 두번씩은 꼬박꼬박 홍대앞으로 달려갔고, 대부분 맨정신에 열심히 춤을 추어대거나 디제이가 틀어주는 음악에 열광하며 행복해했다. <황금투구>엔 음악을 아주 잘 틀어주는 디제이가 몇명 있었는데, <황금투구>가 자리를 옮기고 또 다시 <명월관>으로 이름을 바꾸는 과정에서 그들을 따라 약간은 무서운(마약을 하는 아이들도 드나든다는 소문이 도는 아주 외진;;) 클럽에 갈 때도 있었는데 결국엔 <명월관>과 <발전소>, <조커>, <흐지부지-원래는 Hodge Podge인데 우린 흐지부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오래 전 영어강사들이 마약을 하다가 대거 체포되기도 했던 이름 까먹은 클럽을 전전했던 것 같다.
홍대앞 클럽에서 춤추는 재미에 푹 빠진 나는 처음의 일행들 말고도 주변 지인들을, 심지어는 송년모임에 나를 불러낸 거래 출판사 사람들까지 홍대앞에 데려가 춤바람을 일으켜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는데, 시커멓고 거칠고 조악한 클럽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춤바람에 물드는 이들도 꽤 됐다.
그땐 정말이지 주말에 지인들과 다른 동네에서 약속을 했다가도 그들을 꼬드겨 홍대앞으로 데려가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

하지만 클럽 음악도 변하기 마련이니, 온갖 종류의 폭발적인 음악들을 전부 들을 수 있었던 클럽들은 어느틈엔가 테크노음악에 점령당했고, 나는 죄다 그 음악이 그 음악 같은 테크노 리듬에 싫증을 느껴 춤바람(?)도 차츰 수그러들었다. 더욱이 언제부턴가 홍대앞엔 버릇없고 거칠고 아는 영어라곤 욕밖에 없는 듯한 미군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는데, 그들과 보란듯이 팔짱을 끼고 나타나는 야시시한 옷차림의 예쁜 여자애들이 비비적비비적거 리며 추는 춤도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얼마 후 미군 범죄 사건 때문에 홍대앞 클럽에선 미군들의 출입을 거부하는 운동도 벌어졌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전혀 모르겠다)
라이브 공연을 하던 <드럭> 같은 클럽으로 장소를 옮겨보기도 했지만 한번 시든 춤바람은 좀처럼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즈음에 양현석이 대규모로 오픈한 힙합 클럽도 생겨나 가끔 연예인을 구경하는 재미라도 보자는 지인들에게 이끌려 <NB> 같은 클럽에도 가봤지만 만 2년을 정점으로 결국 나(와 지인들)의 가열찬 클럽 생활은 막을 내렸다.

그러니까 내가 제일 열심히 홍대앞을 찾아다니던 때는 98년과 99년이라는 의미인데, 그 뒤로는 가끔 클럽엘 가도 곡 하나를 끝까지 추기에 체력이 딸릴 정도였고 한때 그토록 열광했던 '춤' 자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후 홍대앞을 가는 일은 훤한 대낮에 근처의 출판사를 방문할 때나, 약속을 만들어 엄청나게 생겨난 카페와 술집 따위를 찾을 때뿐이고 클럽에 가고싶다는 생각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약속이 있거나 볼일이 있어 홍대앞을 찾게되면 아직도 옛추억이 떠올라 비싯 웃음이 나고 마음이 설렌다. 이제는 골목골목 빈틈없이 들어찬 술집들과 카페가 약간 숨막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홍대앞엔 뭔가 다른 공기가 떠도는 것 같다. 하나의 틀로는 도저히 정돈할 수 없고 막무가내로 제 목소리를 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개성의 동네랄까. 나만의 착각이자 편견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홍대앞엘 나가는 기분은 언제나 그럴듯하여 행복에 가깝다.

그리고 오늘 마침 홍대앞에서 약속도 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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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스크랩

추억주머니 2007. 11. 16. 18:10
오래 전, 할아버지댁엘 가면 안방 아랫목의 할아버지 자리 옆에 늘 신문더미가 쌓여 있었다.
폐품  수집하는 날 학교에 내기 좋게 접어놓은 것도 아니고 신문 크기 그대로 몇달씩 쌓여있기 일쑤인
신문더미를 식구들이 돌아가며 타박을 해도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내 기억으론 신문을 두 종류나 보셨는데 (물론 둘 다 보수적인 논조의 일간지였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쓰시고도 큼지막한 둥근 돋보기를 손에 들고 앞장부터 맨끝까지 광고 포함 모든 기사를
훑으셨다.
문제는 그렇게 신문을 "방안에" 몇달씩 쌓아두었다가, 너무 많아지면 다락으로 옮겨 놓았다가
1년쯤은 지나야 폐지로 팔거나 폐품으로 내도록 허락을 해주셨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건 바로 할아버지의 열성적인 신문 스크랩.

할아버지는 신문에 실린 '유용한' 정보를 대단히 신뢰하셨고
삶의 지혜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쓸만하겠다 싶은 기사는 반드시 오려두었다가
'해당 인물'에게 건네며 당장 당신 눈앞에서 읽게 시킨 뒤 실천을 강요하셨다.

예를 들어 환절기에 "감기 예방법"이라는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나와 막내 고모를 불러다 앉혀놓고 그대로 하라고 명하시거나,
"학계에까지 침투된 고정간첩 비상" 따위의 기사는 학교에 계시던 우리 아버지에게 건네며 주의를 주시는 것이었다.
처음 우리는 시큰둥하게 오린 기사를 받아들고 읽은 뒤 건성으로 "네" 대답하고는 오린 신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나중에 그 기사를 내놓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므로 언제부턴가 나는 아예 할아버지가 오려주신 신문기사를 따로 공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가끔은 오래 된 그 신문 스크랩을 학교 숙제에 유용하게 써먹은 적도 있었다)

일요일마다 온 식구가 할아버지 댁에 가서 놀다가 점심,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건 참 좋았지만
내심 이번엔 할아버지가 누구를 불러다 신문스크랩을 내밀며 "잔소리"를 하실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애정과 신뢰를 가장 많이 받았던 막내고모는 할아버지가 신문 스크랩을 내밀면
꽥 소리를 지르며 그만 좀 하시라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나나 동생들, 우리 엄마, 작은엄마, 그리고 우리 아버지까지도 호랑이 할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워
"신문 스크랩 전달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냥 묵묵히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기사를 읽고나서
"소중히" 간직하는 체 접어 넣곤 했다.

그땐 신문의 논조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강박적인 신문 스크랩과 실천 강요가 참 짜증스럽기만
했고, 나머지 식구들 모두 워낙 그 순간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켜본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 전달"은 내가 서른살이 될 때까지도 그저 참고 견뎌야할
절차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툴툴거렸던
할아버지의 자식들 8남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똑같이 신문을 오려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읽어보라고 건네는
것을 "생활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셋째 고모는 신문을 3개나 구독하며 주식, 직장생활, 건강, 재테크, 웰빙... 수없이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사촌동생들과 그 배우자에게 나눠주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라고
강권하기에 이르렀다. 가끔은 그 정성이 우리집에까지 뻗쳐 "당뇨병 관련 특집 기사" 같은 것이 실리면
가족모임에 가지고 나와 우리 엄마한테 전달하기도 하신다. ^^

그뿐인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 사이의 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 역시
신문을 보다 가끔은 스리슬쩍 기사를 찢어 보관한다. ㅋㅋ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좌르륵 관련 기사와 정보가 수도없이 뜨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해두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로 내게 남을 것만 같다.
나는 아직 오려낸 신문기사를 누구에겐가 전달하는 정성까지 보이진 않고 있지만
내가 우리 고모들 나이가 되면 어쩌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커피 관련 특집 기사가 생각나
내다 놓으려고 꿍쳐 두었던 신문더미에서 좀 전에 후다닥 그 페이지를 찢어 책꽂이에 올려두며
내 모습이 우스워서 혼자 킥킥 웃었다. (아 참... 우유부단한 모녀는 아직도 신문구독 중단에 대한 결정을 못 내렸다 -_-;)

정리는커녕 그간 오리거나 찢어두기만 한 신문기사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지만
막상 버릴까말까 다시 읽어보면 슬쩍 있던 자리에 꽂아두게 된다.
역시 핏줄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못 속이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떠오르는데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익숙한 습관의 반복인지, 정말로 유전인자의 강력한 작용 때문인지
무지한 머리로 헤아릴 길은 없지만 아무튼 이런 것도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다.

예전엔 그리도 싫고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내 안에 아직 살아계신 할아버지의 숨결로 느껴지다니, 조금씩 철이 들고 있긴 한가 보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그저 "늙어감"의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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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단상

추억주머니 2007. 11. 15. 16:45
수능일이란다.
듣기평가 시간엔 전국에서 비행기도 못뜨게 하는 나라로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은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암튼 해마다 시끄러운 수능 열기를 지켜보며 늘 나의 과거가 떠오른다.
물론 나때는 학력고사였다.

"니들의 대학 수준에 따라 남편감과 팔자가 달라진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무서운 선생들의 압력이 아니어도
겨우 하루 시험에 12년 공교육의 향방이 갈린다는 게 참 억울했다.

푸는 것보다 찍는 것이 더 많은 수학과목 때문에 모의고사 점수가 늘 들쭉날쭉했던 나는
수학이 포함된 2교시 과목을 치르고 나서 이미 비감에 젖었었다.
때에 따라 10문제까지도 풀 수 있었던 모의고사 수학시험에 비해 실전에선 아는 문제가 딱 6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 난 수학이 정말 싫고 어려웠다 ㅠ.ㅠ. 그리고 정말로 발표뒤에 알게된 수학 점수는 딱 12점이었다! 번호 하나로 몰아서 찍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고사장은 서울 정독도서관 근처에 있는 풍문여고였는데
마지막 시험시간이 지나가고 문제지와 답안지 수거가 무사히 끝났으니 하교해도 좋다는 방송을 듣고
운동장으로 내려가자, 12월이라 이미 어둑어둑 날이 저물기 시작한 교정엔 하필
진추하의 One summer night이 흘렀다.
무척 슬픈 영화 <사랑의 스잔나>의 삽입곡이었던 그 노래 때문에 가뜩이나 우울한 심정은 더욱 극에 달했는데
설상가상 교문 앞엔 집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나는 말도 못하고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렸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도 계속 훌쩍거렸다.

시험결과가 발표된 후 나는 내심 반드시 재수를 해서 더욱 좋은 점수를 손에 쥐겠다고 결심하며
똑같은 공부를 1년 더 하는데 어떻게 점수가 오르지 않겠나 반문했었다. ^^
사실 고3시절 나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도 걸핏하면 떡볶이를 먹으러 내려가거나(학교가 산꼭대기에 있었다 ㅋㅋ) 꽤 넓은 대학교정을 쏘다니며(대학 부속 학교였다) 친구와 나란히 '마이마이'를 귀에 꽂고
꽤나 여유롭게 보냈기 때문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후회도 컸던 것 같다.

아무려나 재수를 하겠다는 나의 바람은 부모님과 담임의 협공으로 무산되고
결국엔 그날의 운명에 따라 내 인생이 결정되었다.
다른 길로 빙빙 돌아서라도 다시 지금 이자리에 와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날 본 학력고사 점수가 조금 더 높았고 내가 원하는 학교와 학과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거나, 혹시 시험을 더욱 잡쳐 완전히 형편없는 점수가 나와 또 다른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면
정말로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졌을 것 같다.  

나의 과거와 견주해보면, 학력중심주의 사회에서 청소년들의 인생은 정말로 수능시험 하루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들에게 "수능시험이 니 인 생의 전부는 아니란다"라는 섣부른 충고는 해주기 어렵지 않을까.
물론 수능시험을 거쳐 좋은 대학을 가도 취업경쟁의 지옥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그들의 삶을  예견하면 더욱 암담하다. 현실은 수능이 청소년들의 미래와 인생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분명하고 그래서 이 나라 교육열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을 것이다.

수능고사장을 나온 아이들이 지금쯤은 해방감에 휩싸여 활짝 웃고 있을지,
아니면 과거의 나처럼 눈물바람을 비치며 방구석으로 숨어들지
그들의 무거운 어깨를 생각하니 내 가슴도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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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옥 예찬

추억주머니 2007. 10. 16. 21:05

홍옥에 관해 비슷한 글을 이미 쓴 것 같아 찾아보니 벌써 2년 전이었다.
다시 봐도 감흥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아
퍼다가 조금 다듬어본다.

내가 어렸을 땐 사과 종류가 홍옥과 국광(어린 친구들 이런 사과가 있었다는 거나 알려나?)만 있는 줄 알았다.
제사나 차례상에 오르는 사과는 그냥 내게 "맛없는 사과"일 뿐이었고 그 이름이 '부사'라는 건 아마 나중에 알았던 듯하다.

홍옥은 새빨갛고 윤기 나는 얇은 껍질이 특색이고 새콤달콤한 맛이었던 반면
국광은 알도 작고 볼품이 없을 뿐더러 육질이 좀 단단하고 단맛이 많았는데
둘 다 가격은 저렴해서 우리는 가을 무렵 얼기설기 나무로 엮어놓은 상자에 담겨, 쌀겨에 파묻힌 홍옥이나 국광 사과를 한 '궤짝'씩 집에 들여놓고 오래도록 먹곤 했다.
홍옥은 금세 시장에서 사라지는 데 반해, 국광은 좌판에서 한겨울에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후지, 또는 부사로 불리던 사과도 지천으로 깔려 있었지만 달기만 하고 푸석푸석한 사과의 맛을
나는 좀체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암튼 내가 그리도 좋아했던 홍옥이 단맛 위주의 사과 종류에 밀려 사라진 것이 10년도 더 넘은 듯했다.
더불어 저렴하지만 때깔도 떨어지고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국광' 사과도 찾아볼 길 없었다.
해서 그나마 초가을에 나오는 초록색 풋사과로 새콤달콤한 홍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는데...
몇년 전부터 드디어 홍옥이 과일가게에 다시 출현한 것이다!

모름지기 홍옥은 빤질빤질 매끄러운 빨간 껍질을 눈으로 음미하다
통째로 한손에 쥐고 와삭... 깨물어 먹는 것이 제맛이다.
그러면 새콤달콤 싱그러운 과즙이 입 한 가득 돌면서 행복함이 밀려든다.

고등학교 때였나...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도시락을 두개씩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
가을부터 겨울까지
울 엄마는 도시락 두개와 함께 꼭 홍옥 사과 두 개를 함께 싸주셨더랬다. 디저트로 먹으라고..
그러면 손 힘 좋은 단짝 친구한테 반으로 쪼개달라고 부탁해서
반쪽씩 손에 들고 서로 바라보며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 먹던 재미와 맛도 일품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홍옥을 통 만나볼 수가 없었기에 안타까워하고만 있었는데
이태 전 과일가게에서.. 수많은 종류의 사과 이름 속에서 '홍옥'이란 글씨를 보고 긴가민가.. 의심 많은 인간 답게 설마... 했었다. '홍옥'의 짝퉁임이 분명한 '홍로'를 좀 더 익혀놓고 사기 치는 게 아닌가 했던 것.
그러나 "속는 셈 치고" 한번 사와 먹어보니
역시나 새콤달콤 감동의 맛이었다.
나처럼 그간 홍옥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들이 꽤 많았던지
행복하게도 해마다 요맘때면 반짝 과일가게에서 홍옥을 만날 수가 있다.

감기 기운을 이겨보겠다고 며칠 신경써서 과일을 먹으며 계속 홍옥 타령을 해댔더니
엄마가 드디어 새빨간 홍옥을 사다주셨다.
겉에 입혀 놓은 왁스 때문이라지만, 예전엔 홍옥을 먹기 전에 꼭 옷자락에(지금 생각하면 더럽기도 하다만;;)
쓱쓱 닦아 빤질빤질 더욱 윤이 나게 문지르곤 했다.
그러면 제일 처음 한입 크게 깨물었을 때 생겨나는 동그란 이빨 자국과 연노랑색 과육이 참으로 예쁘게 느껴졌다.
*_*

좀 전에도 엄마가 굳이 과도와 포크까지 쟁반에 받쳐다 주신 걸 마다하고 덥썩 집어
무식하게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껍질에 농약성분이 남아 있거나 말거나, 홍옥은 무조건 껍질째 먹어줘야 제맛이란 말이지.
쨍쨍 얼음이 어는 겨울은 커녕 11월만 되도 홍옥은 자취를 감춘다.
과육이 연한 탓에 오래 보관하거나 유통시킬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있을 때 많이많이 먹어두는 수밖에 없다.

으으...
글을 쓰면서도 다시 입안에 침이 돌아 얼른 또 새빨간 홍옥 사과 하나 꺼내
깨물어 먹어줘야겠다.

사고가 단순한 식탐가인 나에게 홍옥은, 이 가을 몇 안되는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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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적을 떼면 나오는 이른바 '원적'엔 저런 주소가 적혀 있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동 ***번지.
저기가 어딘고 하면 김소월의 고향인 영변(이제는 김소월보다 핵시설로 더 유명한 듯한!)에서 멀지 않다는데, 물론 나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고, 심지어 우리 아버지도 말로만 들었지 가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식솔들 데리고 만주땅으로 올라가 사업(?)을 벌이던 사이 태어나셨다가 난리통에 월남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북 출신이시고, 살아생전엔 절대 고향 땅을 밟지 못하리란 걸
한으로 여기셨던 두분 때문에 나는 정말로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은 꿈에도 통일"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정민공주보다 어렸을 땐 해마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할아버지가 나와 큰동생을 데리고 주섬주섬 음식을 싸가지고 문산행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좌석이 있는 객차엔 앉을 자리도 없어 마룻바닥 같은 것이 길게 깔린 짐칸에 탈 때도 많았던 완행열차의 종착역에서 내리면(지금은 경의선의 종착역이 문산이 아니라 도라산 역이라더라) 다시 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야했고, 임진각에서도 군인들이 보초를 선 철조망 앞까지 간 우리들은 작은 돗자리를 펴고 또 다시 북녘을 향해 술을 따르고 절을 했더랬다.
할아버지는 간단히 음복을 한 후 남은 음식을 보초 서는 군인들에게 나눠준 뒤
또 다시 손주들을 데리고 허름한 시외버스와 복작거리는 완행열차를 갈아타고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셨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거의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할아버지의 채근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고단한 행차를 나와 큰동생은 꽤 오래 별 투정 없이 따라다녔는데, 다녀와선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투덜거려도 결국 추석날이 돌아오면 기차 타러 가자는 할아버지의 꼬드김에 또 다시 선뜻 넘어가곤 했다.
기차를 타는 것도 매력적이었겠지만, 철조망 너머로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거나 때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시는 할아버지를 어린 마음에도 차마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은 아침에 차례를 지냈는데 굳이 임진각 철조망 앞에까지 가서 또 다시 성묘 대신 절을 하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못말리는 대신, 같이 따라나서진 않는 것으로 나름대로 반항을 했기 때문이다. ^^

나와 동생들이 머리가 굵어져 추석마다 고생스럽게 경의선 열차를 타고 임진각으로 떠나던 할아버지의 성묘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한 뒤엔 다시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그 임무가 넘겨졌고, 차츰 기차 대신 자동차로, 임진각 대신 행주산성으로, 교통수단과 행선지가 바뀐 우리 할아버지의 간이 성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었다.

몇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이 온종일 생방송으로 이어지던 날 나는 당연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대중까지도 빨갱이라며 치를 떨게 싫어하시던 할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셨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몹시 궁금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를 둔 아들인 우리 아버지는 그날, 북한에 얼마나 돈을 많이 퍼다주고 저렇게 요란한 쇼를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퍽이나 못마땅해 하셨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햇볕정책과 북한에 '퍼다주기'를 비판하지만
나는 현재 북한 청년들의 평균신장이 165센티미터를 겨우 넘을까말까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듯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의 식량현황이 그저 안타깝기에 어떻게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생색내기든 아니든 북한주민들에게 쌀 한 톨이라도 더 배급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그렇게 지원한 자원과 식량은 절대 북한 주민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 권력층의 배를 더욱 불리고 군비확장과 핵시설에 투자될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렇게 빼돌려지고도 남은 식량은 결국 죽어가는 '인민'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겠나? -_-''
감상적인 온정주의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제3세계의 가난한 난민과 굶주린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선교단을 보내고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정작 휴전선 너머에서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나 탈북자들을 나몰라라 하는 인간들은 위선자나 다름 없다고 본다.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체제가 다르고 테러를 지원하는 군사독재국이고 핵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핵으로 가장 크게 전세계를 위협하는 나라는 사실 사방에 핵잠수함을 띄워놓고 있는 미국이 아니던가?

오늘 또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걸어 넘어 북한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떠올렸고, 과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원은 통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국적을 가졌고 한국말은 몇마디 하지도 못하는 하인스 워드 같은 사람까지도 한 핏줄이고 '동포'라고 아우르는 마당에, 같은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같으며 커다란 스포츠 행사 때마다 한반도 기를 달고 함께 출전하면서 남북을 서로 잃어버린 자기네 땅이라고(한국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잠시 휴전 중이라잖아!) 우기는 두 나라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왕래하고 쌀과 돈을 최대한 공유하며 살면 왜 안되는데?
 
물론 남이든 북이든 탐욕스러운 놈들은 더욱 많이 가질 테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테지만(지금은 안 그런가 뭐?) 최소한 남북 청소년들의 평균신장 차이라도 덜 벌어지지 않겠나 말이다.
먹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고 굶으면 벌컥 화가 나는 나로서는 전체적으로 못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남한 또래 아이들보다 한뼘 이상 키가 작은 북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의미에서 또 오늘 뽈록한 김정일의 배를 보니 버럭 화가 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짐작하듯 아직도 통일은 요원한 일일 테고
더 많은 이들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 만남으로 진정 '인민'과 '국민'을 위해 뭔가 소중한 결실이 하나라도 더 맺어지길 빌 뿐이다.
그러다 보면 금강산과 개성공단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대신 내 살아 생전에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땅을 한 번 밟아볼 수도 있지 않겠나.

횡설수설... (쓸데 없이 글이 길긴 또 왜 이렇게 기냐..헐)
두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본 나의 어지러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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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층집

추억주머니 2007. 10. 2. 02:00
정민공주를 위한 영어수업에서 이번주엔 장소를 묻는 의문문과 함께 집의 구조를 다루었는데
그러면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다.
그림엔 외국의 흔한 주택 구조에 따라 자는 방, 화장실, 거실, 부엌, 마당 따위가 그려져 있었는데 공주는 2층에 주로 밀집된 방으로 연결되는 2층의 작은 복도 같은 공간을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거다.
그림 속의 엄마는 바로 그곳에 서서 아이들에게 "너 어딨니?"라고 묻고 있었는데!

언젠가 놀러갔던 펜션과 호텔 복도를 예로 들어 구조를 설명하려 애쓰긴 했지만
(공주는 영어공부와 상관없이 또 궁금한 건 절대로 못참는다 -_-'')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나! 주변에 이층집에 사는 측근이 단 한명도 없고
내 어린시절과 달리 공주는 이층집엘 놀러가서 그 재미있고 독특한 구조를 속속들이 경험해 본 적이 전무했다!
아 물론 우리 친척들이 주로 서민적인 탓도 있겠지만
과거엔 마당 넓은 2층집에 살던 이들도 이젠 아파트나 빌라로 사는 곳을 옮겼거나
그 땅에 건물을 올려 층층마다 임대료를 챙기는 건물주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1층엔 주방과 넓은 거실, 식당 방 따위가 있고 침실은 죄다 2층으로 몰아놓은
서양식 2층집과는 구조가 좀 다르지만, 어린 시절 나의 로망이기도 했던
이층집엘 놀러가면 우선 가장 눈길을 끄는 계단과 2층 베란다, 철제 그네가 놓여있기 십상인 잔디 깔린 마당을 이제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예전에도 지금에도 대대로 이어진 넉넉한 부유함을 상징하는 평창동이나 성북동 정도에 가면 또 모를까... 아 맞다, 신도시의 단독주택 단지나 새로 뜨기 시작한다는 타운하우스를 찾으면 되긴 하겠군.

어쨌든 우리 동네에 꽤 많았던 예쁜 2층 양옥집들은 지금 죄다 빌라나 다가구주택으로 바뀌었고 초록 잔디밭이 예뻤던 공간은 자동 개폐식 차고문이 달린 주차장으로 탈바꿈했다.
땅덩어리가 워낙 좁고 집이 필요한 사람들의 수는 늘어나기 때문이겠지만,
부동산 문제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는 문득 옛날이 그리워졌다.
물론 나는 마당 넓은 2층집엘 살아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친척집이든 친구네 집이든
푸르른 잔디밭과 정원을 갖춘 2층집엘 드나들며 노는 게 정말로 좋았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오르면 눈앞에 새로운 놀이터라도 펼쳐진 것 같았고, 금상첨화로 다락방까지 있는 집이라면 매캐한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하루종일이라도 그곳에서 놀 수 있었다.

아...
그런데 공주는 그나마 전원주택인 고모할머니나 작은 할아버지댁의 옥상 올라가는 계단 이상의 구조는 상상하기 힘들어 했던 거다.
내가 하도 마당 있는 집 타령을 해대며 아파트 혐오증을 읊어댄 탓에 공주도 아파트 보다 마당 있는 주택이 훨씬 좋은 줄 알고 있었는데, 오늘 그림 속 이층집의 방 이름들을 하나하나 되뇌며 영어단어를 익히던 공주는 우리도 방 8개짜리 이층집을 지어서 할머니랑 고모랑 같이 살면 좋겠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을 했다.

흠... 그런데 나는 선뜻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다.
어린 시절에야 나도 마당 있는 2층집에 사는 것이 로망이었지만
현재의 로망은 흙냄새 맡으며 기와 얹은 한옥에 사는 것이라 말로라도 '그러자!'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층 한옥이라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경복궁 경회루밖에 없는 것을 어쩌랴. -_-;;

하지만 이 밤중에 다시 생각해보니
정민공주네가 옛날 느낌의 예쁜 2층 양옥집에 살게 되어 혹시 나를 청한다면
주책바가지 이 고모도 다락방 한귀퉁이에서 계속 무수리로 살아줄 용의는 있을 것 같다. ^^
아담한 한옥은 까짓거 작업실로 꾸미면 되지!

돈 안드는 상상이라고 아주 마음껏 날개를 펼치는 중이다.
현실에선 아... 그저 돈이 웬수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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