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추억주머니 2006. 11. 1. 23:58
내일 21년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설레기도 하고 어쩐지 떨리기도 하고... 그 오랜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이야기가 잘 통할 것인지 조금 걱정도 된다.
미니홈피를 통해 그간 좀 변한 친구의 모습도 확인했고, 대강이나마 어떻게 지내는지 분위기는 파악했으니 화제거리가 궁해 어색한 침묵 때문에 진땀을 흘릴 리는 없을 거다.
하지만... 정말로 세월의 거리감을 완전히 잊을 만큼, 우린 과연 그때처럼 통하는 게 많고 든든한 정을 느낄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때 난 덩치로 보나 외모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그리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저 별로 속 안썩이고 착한 척을 하는 편이어서(가령 환경미화 같은 거에 동원되면 밤을 새서라도 시간표 꾸미기나 게시판 디자인에 힘썼다. 그렇다고 환경미화로 상을 받을 만큼 아이디어가 뛰어난 것도 아니면서.. ㅡ.ㅡ;;) 크게 미움을 받거나 화려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고, 고만고만한 앞번호 아이들과 폭 좁은 교우관계를 유지했다.
가끔 제비뽑기로 자리배정을 하는 경우 뒷번호 아이들과 같이 앉게 되면 나를 귀여워하는 그들에게 여전히 토실토실한 뺨을 내주거나 슬쩍 안기며 드물게 친구를 만들어 갔는데, 이 친구도 그렇게 사귀게 된 '뒷번호' 친구였다. ^^*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고 괴로워했던 체육시간을 이 친구는 참 좋아했고
100미터 달리기 따위를 하면 가늘고 긴 다리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얼룩말처럼 달려 내 탄성을 자아냈다.

'수업 끝나고 우리집에 갈래?' 따위의 내용이 적힌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던 것 같고
친구 집에 가서 음악 들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오래 나누기도 했는데
어쩐 일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서로 연락이 끊겼다.
가끔 이런저런 경로로 그 친구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볼까.. 하는 생각은 안해본 것 같다. 그냥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만 한 정도랄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난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거 싫어하고 감정표현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본인의 성격을 개조해보려는 노력에 돌입했는데, 원래 인복이 많은 덕분인지 그 뒤론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이 마구 불어났다.
물론 어린 시절 친구들을 계속 만나온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대학생활과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나중에 사귄 친구가 압도적으로 많다.

얼마 전엔가 20년지기 친구들에게 푸념을 했더랬다.
포도주와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 말 다 거짓말이라고.
와인 맛에 문외한인 탓도 있지만, 어쨌든 무식한 내 입맛에는 오래오래 묵어 값만 비싼 고급 포도주보다 작년에 갓 수확해 싱그러운 맛이 느껴지는 저렴한 포도주가 훨씬 맛있고,
알고 지낸 햇수는 거창하되 각자 삶의 방식이 크게 달라져, 요즘 만나는 횟수는 일년에 서너번도 안 되는 오랜 친구들은 정작 내가 지금 당장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얼마나 힘들고 아파하는지, 아니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하나도 모른다고 말이다.
사귄지 얼마 안 됐지만 (물론 그래도 최소 몇년은 된^^;;) 이런저런 소통의 혜택을 받아
심정적으로 더욱 가깝게 느껴지는 '어린' 친구들이 내 인생을 더욱 퓽요롭게 하는 것 같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포도주 맛에 대한 내 취향이 혹시 변덕스레 바뀔 수도 있듯이 앞으로 또 한 20년 지난 다음에도 그 '어린' 친구들이 내 곁에 있는지 둘러본 다음 그때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것이었다. ^^;;

살면서 인간관계를 늘 똑같이 유지할 수 없듯이
친구들도 살다보면 저절로 정리가 된다.
소식이 뜸해지다가 서로 더는 찾지 않게되고, 하도 연락한지 오래 되어 갖고 있는 전화번호로 과연 연락이 닿을지 염려스러워 아예 시도조차 안하게 되는 거다.
물론 몇년씩 못 만났어도, 일년에 몇번 통화나 가끔 하면서도 늘 만나온 것 같은 친구도 있고 다시 만났을 때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거리감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확실히 내가 느끼는 건 가족과 달리 친구는 정성을 들여야 소중히 오래 간직된다는 거다. 자주 만나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담긴 그 친구의 자리를 가끔은 보듬어주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뛰어난 나의 건망증이 작용해, 위태롭게 잇고 있던 인연의 줄이 끊어지고 만다.

끊어졌던 연을 다시 이을 기회를 맞게 된 나의 옛 친구는 과연 앞으로 나와 어떤 세월을 쌓게 될까.
어렸을 땐 참 친한 친구였는데, 혹시라도 만나서 아파트 얘기, 아이들 교육 문제, 재테크, 주식 얘기로 나를 소외시켜 슬프게 만드는 일부 친구들 부류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다.
뭐든 사서 걱정하는 버릇은 대책없는 낙관주의 성향과 함께 아직도 나를 양쪽에서 뒤흔든다. ㅎㅎ
일단은 마음을 비워야겠다.
멀지도 않은 동네에 사는 친구이니, 수시로 오다가다 수다 한 판과 차 한 잔 청할 수 있는 친구 하나 되찾았다고 조만간 기뻐하게 될지 또 누가 알겠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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