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좋아

추억주머니 2006. 12. 18. 15:51
약속시간에 대한 압박감과 상관없이 대중교통수단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버스를 택하는 사람이다.

우선 지하로 내리락 오르락해야 하는 수많은 계단들이 제일 싫고
(나의 계단 공포증 역사에 대해선 나중에 글을 쓰든지, 어딘가 올린 글을 퍼오든지.. 하겠음 ㅜ.ㅜ)
지하 특유의 탁한 공기랄까, 꽉 막힌 느낌이 싫고 (밀실 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또 목적지까지 끊임없이 밖을 내다보며 어딘지 정류장을 확인해야 하는 것도 싫고
(지하철 고수들은 휴대폰 알람 맞춰놓고 잠도 잔다는 걸 알지만! 나 같은 하수는 좀 멀다 싶어 책 따위를 본다거나,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다가 걸핏하면 정류장을 지나치기기 일쑤다)
환승역에서 우르르 떼거리로 내리고 오르는 인간들 물결에 휩쓸리는 것도 싫다.
왠지 나는 꼭 넘어져 밟힐 것만 같은 기분;;;

아무튼...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매연 냄새 때문에 멀미를 할 때를 지나고선
계속 버스가 좋았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시험 끝난 날이라든지, 토요일에 특별활동으로 고궁이나 박물관 따위엘 간 날이면 친한 친구들이랑 '버스여행'이란 걸 하며 즐거워했다.
말이 여행이지, 사실은 그냥 노선이 제일 긴 버스를 골라잡아 타고 맨 뒷좌석에 주르륵 앉아 수다를 떨며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뿐인데도 그땐 그게 어쩌면 그리도 재미있고
뿌듯한 '여행'이었는지 모른다.
달콤한 초콜릿을 나눠먹으면서, '마이마이' 따위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원래 이 이름이 이리도 길었던가?)로 음악을 들어도 좋았고, 그냥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뽕짝' 음악에 맞춰 마구 흔들리는 버스 차체에 몸을 얹고 까르륵 대는 것도 좋았다.

지금은 버스 타고 다니는 일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버스에 올라 맨 뒤에서 바로 한칸 앞에 있는 하나짜리 의자에 앉아 창밖 거리를 내다보거나,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묘미는
여전하다. 혹시 백일몽에 잠겼더라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내다보면 어딘지 곧장 알 수 있는 낯익은 느낌이 무엇보다 나에겐 편안함을 주는 듯하다.
딴짓하다 말고 과연 다음 역이 어디일지 깜깜한 굴안에서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는 지하철의 느낌과는 얼마나 다른지!

그러고 보니 서울 시내버스 디자인도 참 많이도 바뀌었다.
전 모 대통령의 부인이 보라색을 좋아한대서 바뀌었다는 아주 탁한 보라색 시내버스는  
참 혐오스럽다고 여겼는데, 정말로 보라색으로 바뀐 이유가 영부인의 개인적인 취향이었던 걸까 새삼 궁금하군.
아무튼... 내 개인적인 취향으론 연노랑 바탕에 샛노란 색이 띠처럼 둘려지고 빨간색으로 노선번호가 동그랗게 그려졌던 때가 제일 예쁜 것 같다. ^^

이번에 명박이놈이 바꿔놓은 버스는 일단 나에게 오랜 동안 혼돈을 주기도 했고
웬만한 시내까지는 다 있던 집앞 노선을 홀라당 없애버렸기 때문에 괘씸죄가 적용되어
별로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초록색 지선버스 번호는 4자리가 된 바람에 번호 외기도 힘들뿐더러
나처럼 눈이 나빠 야맹증까지 있는 인간에겐 멀리서 번호 알아보고 타기도 어려워졌으니까.

그런데!!
내가 이런 버스 타령을 하는 블로그를 포스팅하게 된 이유는
며칠 전 집앞 신호등에 걸려 기다리다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커다란 선물 포장(!)을 보고 몹시 흐뭇했기 때문이다.
가끔 버스 측면광고에서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보며 기발하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이번엔 파란색 버스에 전면, 후면까지 '빨간' 리본을 둘러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라는 글씨를 적어놓은 뒤 측면에 영화 광고를
실었는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확 전달되는 예쁜 모양새에 공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조수석에 앉으셨다가 나보다 먼저 그 버스를 발견하신 울 아부지,
'아니, 저게 대체 뭐냐?'고 물으셨는데
무슨 광고일지 나도 궁금해져 신호 떨어졌는데도 그 버스 지나가길 기다리느라
고개를 쭉 빼고 있었다. ^^;;

나와 취향이 다른 누군가는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한참 지난 영화 포스터를 달고 다니는 버스를 보며 눈쌀을 찌푸리듯
새해가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동안 요란한 빨간 리본을 앞뒤로 매단 버스를 보면
을씨년스럽다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버스를 볼 때마다 공연히 나에게 달려오는 선물을 받는 느낌일 거란 생각에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해낸 사람에게 고맙다.

서울 시내를 쏘다니는 빨간 리본을 단 선물이라니...
아이디어가 너무 귀엽잖아!

그나저나 올해가 가기 전에 그 예쁜 버스를 한 번 타보아야 할 텐데
과연 기회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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