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주머니'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07.09.29 싫은 사람 13
  2. 2007.09.10 생활기록부 6
  3. 2007.08.09 동숭동 10
  4. 2007.05.30 땡순이를 추억하다 14
  5. 2007.04.28 사무실 여직원 풍경 11
  6. 2007.04.27 첫 '미국' 출장의 기억 3
  7. 2007.04.20 만년필 10
  8. 2007.03.04 우산 5
  9. 2007.02.21 숫기 5
  10. 2007.02.15 흑백 사진의 추억 7

싫은 사람

추억주머니 2007. 9. 29. 16:35
싫은 사람에 대한 키드님의 포스팅을 읽으며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평생 볼 사람도 아닌 남인 것을 왜 그렇게 지독하게도 싫어하며 전전긍긍 마음을 다쳤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도록 혐오스러웠던 사람들이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둘 쯤 혐오스런 상사나 직원,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회사 조직 이외의 관계에서도 이상하게 싫은 사람의 덫에 걸리기도 한다.

내 경우 싫은 사람의 제1인자는 지금도 이름이며 얼굴 생김새, 걸음걸이까지 또렷이 기억에 남은 '이아무개' 이사였다.
작고 깡마른 체구에 고향이 '갱상도'였던 그는 미스 부산 출신의 아름다운 아내를 늘 자랑으로 여기며 '못생긴 여자'는 여자도 아니란 말을 서슴없이 해대곤 했는데
그가 말하는 '못생긴 여자'의 범주엔 무뚝뚝하고 목소리 크고 자기 주장 강하고 치마 잘 안입고 나긋나긋하게 남자들을 '먼저' 배려하지 않는 여자들(그 대표주자는 물론 바로 나였다^^)이 모두 포함되었더랬다.
말끝마다 "여자가 말이야..."라고 토를 단 뒤 못마땅하게 "쯧쯧쯧.."혀를 차는 그는 일개 평직원이었던 나와 업무체계가 이어지는 바람에 거의 6개월쯤 서로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워낙 인간이 싫기 때문인지, 여러가지 싫은 면모가 집약되어 싫은 인간으로 낙인 찍힌 것인지,
순서는 알 수 없지만 암튼 '이아무개' 이사는 점심식사나 회식 때에도 옆자리 회피 대상 1호였다. 쩝쩝거리는 흉물스런 소리의 대가임은 물론이려니와 내 음식 네 음식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제것처럼 먹어대는 탐식꾼이었고, 반드시 반말로 부하직원들에게 담배 사와라, 물 수건 몇 개 더 가져와라, 술맛 나게 여직원들이 술잔 좀 채워봐라, 소주 식었으니 시원한 걸로 "바까와라" 따위의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될 직장상사의 횡포와 성희롱이 그 옛날엔 꽤나 자연스럽게 자행된 탓도 있지만, 업무 면에서도 사사건건 나에게 잔소리를 해대고 멀쩡한 문서의 꼬투리를 잡는(표의 선 모양을 바꾸라든지, 세미콜론을 콜론으로  바꾸라든지!) 그 인간 때문에 나는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서 일요일 밤부터 벌써 가슴이 벌렁거리고 소화가 잘 안될 지경이었다. 이북 사투리를 비롯해 걸쭉한 여러 지방 사투리를 재미있어 하던 내가 유독 '갱상도' 사투리를 싫어하게 된 것도 이 인간의 공이 크다.

물론^^ 서로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늘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사와 평직원이라는 직급의 차이 때문에 내가 불리한 입장이었는데,
이판사판으로 치달은 마지막 즈음에는 그 이아무개 이사가 총무이사를 붙들고
"내가 미스X 무서워서 정말 회사를 몬다니겠어요"라고 푸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그 인간에게도 나는 몹시 "싫은 사람"이었다는 얘기. ^^;
유치하게도 승패여부를 따지자면 그 회사가 인수합병 될 때 당연히 이사는 잘렸으므로 끝까지 버틴 내가 이긴 셈이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 토할 것 같은 혐오감을 무릅쓰고 그 조직에서 버텼던 내가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긴 하다.

이후 직장에서 만났던 싫은 사람은 일은 죽어라 못하면서 어리광이랄지 응석이랄지 엉겨붙는 것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던 어느 여직원. -_-;;
당시 수십 명이나 되는 여직원들은 모두 단정한 감색 치마에 흰색 블라우스, 체크무늬 조끼와 감색 재킷으로 구성된 유니폼을 입어야 했는데, 그 여직원은 마치 날나리 고등학생들이 그러듯 무릎 길이의 치마를 깡총하게 무릎 위로 잘라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유일한 여직원이었다. (그 아이의 다리가 예뻐서 내가 질투를 한 건 정녕 아니었다고 부르짖고 싶다!^^)
그런데 타이트 스커트를 입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무릎 길이의 치마도 의자에 앉으면 민망하게 허벅지까지 올라가는 법이거늘, 짧게 자른 스커트야 오죽하랴.
남자 직원들의 절반은 사무실을 오가며 희멀겋게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를 위에서 쳐다보는 걸 즐겼지만 놀랍게도 나머지 절반은 자기들을 암묵적인 관음증환자로 만드는 그 상황을 민망하게 여겨 나에게(당시에도 왕언니였다 ㅠ.ㅠ) 넌지시 시정을 권유했다.
게다가 그녀는 무슨 일이든 시키면, 일단 옆에 쌓아두고는 늘 책상에 올려두고 있던 손거울을 보며 얼굴과 화장을 매만지는 것이 주업이었고 독촉을 받으면 "아잉, 대리님, 제가 깜박했네요. 쬐끔만 더 기다려주세용. 제가 맛있게 커피 한 잔 타다 드릴께용~" 따위의 멘트로 얼버무리기 일쑤였으니, 내가 엄한 얼굴로 업무 독촉을 하거나 서류상의 실수를 잡아내도 "아이, 언니, 너무 무섭당~" 그러면서 확 끌어안는 작전을 쓰기도 했다.
물론 그녀가 해낸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다시 해야할 정도로 엉망이라 사무실에선 점점 그녀에게 일을 시키는 걸 '두려워'할 지경이었고, 그녀의 업무량은 점점 줄어 당연히 그녀가 손거울을 보며 노는 시간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 모든 사람이 다 일을 잘할 순 없지만, 일도 못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며 집도 아닌 회사에서 응석을 부리며 아양을 떠는 그녀를 난 참 싫어했더랬다.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리기만 해도 부르르 짜증이 날 정도로...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그녀는 속으로만 치를 떨며 싫어할 뿐, 회사에서 공공연하게 적대감과 혐오감을 드러냈던 건 이아무개 이사가 유일했던 듯하다.

흠..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싫은 사람'의 유형엔 좀 미안한 감이 드는데;;;
"씩씩대는 네 숨소리가 싫단 말이야!"라는 충격적인 말로 이별을 고했던 기억 때문이다. ^^
숨소리가 싫다는 건 당연히 핑계였을 테고
그냥 그 사람이 싫어지니까 씩씩거리는 숨소리마저도 못견디게 싫었겠지만
못돼쳐먹어도 유분수지, 어린 마음(?)에 그에겐 얼마나 상처가 됐을지 지금도 미안하다.

이제는 첫인상만으로 철저하게 사람 됨됨이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지만
돌이켜보면 첫인상은 여전히 중요하고, 좋았다가 싫어지거나 싫었다가 좋아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싫었다가 좋아진 사람은 결국 다시 싫어져 처음에 싫어했던 단점들이 극대화되어 더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 수준이 돼버렸달까...


그나마 이제는 싫은 사람들 틈에서도 억지로 버텨야 하는 의무적인 관계의 홍수에서
벗어나 살고 있으니 참 다행이지 싶다.
여러가지 상처가 있지만 살아보니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가장 깊고 아픈 것 같다.
앞으로는 더더욱 상처를 주는 일도 상처를 받는 일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현재 있는 관계를 소중히 가꾸며 살아가야겠다. 그러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치 떨리게 "싫은 사람"으로 손꼽히는 일도 피할 수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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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기록부

추억주머니 2007. 9. 10. 17:53

계속되는 정리의 일환으로 어젠 장롱 깊숙이 들어 있던 누런 봉투 하나가
오랜만에 빛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안엔 우리 삼남매의 옛날 상장과 성적표, 심지어 생활기록부 사본까지 들어 있었다!

사람은 역시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거나 진실을 왜곡해서 머리에 새겨두는 게 맞나보다. 옛날 성적표 뒷칸에 '행동발달 사항'을 적는 난이 있었던 건 기억해도
학년 바뀔 때 생활기록부 사본을 나눠준 건 전혀 기억에 없었는데... 이상했다.

연예인들이 나와서 학창시절 친구를 찾는 프로그램에서 제일 먼저 생활기록부의
'행동발당 사항' 부분을 카메라가 비춰주는 건 아무래도 그게 제일 재미있기 때문인듯
누렇게 바랜 종이에 심각한 표정의 촌스러운 사진까지 복사된 생활기록부를 보며
나 역시 킥킥 웃어댔다.
우리 삼남매를 맡았던 담임들은 그다지 창의성이 없는듯 내용은 거의 뻔하다.
"학습태도가 좋고 성격이 온순하여 친구가 많음"
"소극적인 성격이나 매사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임"
"교우관계가 좋고 남을 잘 도우며 학급 일에 성실함"
"학습태도는 양호하나 좀 더 학업에 노력을 요함"
뭐 이런 식이라는 거다.

옛날 선생님들은 몇가지 경우의 수에 따라 생활기록부 문구를 정해놓고 있다가
그 중에서 골라 골라 적은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초, 중, 고 선생들의 표현 능력이 다 거기서 거긴지...

나 역시 한때는 (물론 아주 잠시) 변태 같은 선생들이 판을 치는 학교에서
꽤 쓸만한 교사가 되어보겠다는 꿈을 꾼 적도 있었지만 (교생실습도 나갔었다 -_-V)
무서운 아이들을 떼로 앉혀 놓고 뭔가를 가르친다는 게 나로선 역부족임을 깨달았던 것 같다.
중학생 여자애들도 무서운데(당시 중1 여학생반을 맡았는데, 나보다 작은 애들이 딱 2명 뿐이었다 ㅠ.ㅠ) 남학생들이나 고등학생은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잘 모르는 영어과목을 가르치는 건 더더욱 말도 안되는 일 같았는데,
지방으로 발령이나 집에서 '당당하게' 독립하는 아련한 로망을 제외하면
교사의 가능성을 포기한 건 참 잘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나처럼 수 개념이 바닥인데다 손가락과 두뇌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계산기조차 잘 다루지 못하는 내가
반 아이들 성적 채점하고, 계산하고 평균 내고 그러려면 얼마나 괴로워하며 피눈물을 흘렸을까! (요새야 전산화 프로그램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마는;;)
그런데 너무 뻔한 생활기록부 내용을 보고 있으려니, 나라면 다른 건 몰라도 성적표와 생활기록부에 적는 아이들의 특징에 대한 건 좀 성의 있게 써주지 않았을까 싶어졌다.
하긴... 나 역시 잡무에 치여 판에 박힌 글귀들을 골라 베꼈을지 또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요새도 선생들이 판에박힌 글귀들을 생활기록부와 성적표에 적어보내는지 어쩐지
문득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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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동

추억주머니 2007. 8. 9. 14:10
원래는 제목을 '혜화동'으로 하려했으나
엄밀하게 내가 다녀온 곳은 동숭동이라 마음을 바꿨다.
흔히 '대학로'라고 부르는 그곳은 갈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내가 난생처음 대학로엘 가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 여가로 연극활동을 하던 '교련'선생님이 나오는 연극을 단체로 보러 갔더랬다(당연히 주요배역은 아니었고, 선생님은 '마을사람3' 정도의 단역이었다).
연극 제목은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이었는데, 속으론 발랑 까졌어도 겉으론 나름 순진했던 나는 코앞에서 펼쳐지는 배우들의 러브신과 그림자로 처리되는 마지막 베드신에 꽤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
그 뒤론 꽤나 자주 연극을 보러 다녔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문예회관 앞 계단이나 마로니에 공원 큰 나무 아래 앉아 친구들과 나누는 수다가 더 정겹기도 했는데,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영문 모를 연극을 보고 나서 어린 마음에 좌절감에 휩싸이이도 했지만 그땐 차곡차곡 모아둔 연극 팸플릿을 대단한 보물 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대학 시절엔 주로 '미팅'을 하러 찻집과 주점과 카페를 더 많이 많이 다녔던 듯하고
주말이면 차 없는 거리로 변해, 온갖 공연과 술판이 벌어지던 시끄러운 분위기에 한참 휩쓸리던 시기를 지나고선 너무 정신없어서 그 동네를 멀리하던 때도 있었더랬다.

동물원이 부른 노래 '혜화동'의 정서처럼
세월이 흐른 뒤 찾아간 대학로의 골목골목은 참 많이도 변했고
지금도 꾸준히 변하고 있다.
공연히 집에 가기 싫어서 친구와 배회하던 주택가 뒷골목은 완전히 빌딩들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몇 개 안 되던 소극장들은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수십개쯤으로 늘어났으며,
골목골목마다 예쁜 카페처럼 생긴 고깃집에 호프집, 찻집들까지 갈 때마다 변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요즘도 가끔 공연을 보러 가거나 맛집을 찾아 대학로를 가게 되면
내가 보아온 대학로의 25년(무려!) 역사가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촌스러운 감청색 치마에 하얀 웃도리 교복을 입었던 나와 오늘의 나는 물리적인 나이 차 외엔 그닥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동숭동과 혜화동은 참 많이도 변했다.
그나마 혜화동 성당과 마로니에 공원, 문예회관과 샘터 파랑새 극장, 학림이 예전처럼
그 자리에서 거기가 변함없이 대학로임을 항변하고 있어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동숭동에 새로이 터를 잡았다는 출판사를 찾아가느라
한낮에 동숭동과 혜화동 골목골목을 새삼 누비고 다녀보니 더욱 낯선 느낌이었는데
마로니에 공원의 아름드리 나무가 휘청휘청 바람에 가지를 흔드는 걸 보고서야
거기가 대학로였다는 게 실감되었다.
이젠 공연을 보러가는 것보다 그저 밥 먹고 차마시고 뒷골목에 자리잡은 문방구 순례를
하는 것이 내겐 더 익숙한 익숙한 대학로 탐방 절차가 되고 말았지만
앞으로도 그 거리와 골목으로 접어들면 오랜 추억 때문에라도 묘한 기분에 젖게 되리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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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직딩생활 동안 나는 주로 땡순이였다. ^^;
여기서 땡순이란,  퇴근시간을 가리키는 마음속의 종이 '땡' 울리는 순간 곧장 퇴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퇴근 5분전에 미리 모든 준비를 마쳐놓는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마지막 회사는 '여직원' 유니폼도 입어야 하는 곳이어서 미리 퇴근 준비를 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암튼, 내가 그 회사에서 몸바쳐 일해도 나를 키워줄 곳은 정녕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후부턴 가능한 한 땡순이 생활을 고집했던 것 같다.
땡순이의 습관은 물론 첫번째 회사에서 비롯됐다.

어리버리 취업준비는 제대로 안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거의 매일 술만 퍼마셔 대던 4학년 2학기에 덜컥 취업이 되는 바람에 정신없이 시작된 나의 사회생활은 집에만 가면 9시부터 뻗어 잘 정도로 고되고 힘겨웠다.
처음엔 일보다 영어 스트레스가 제일 심했던 것 같다. ^^;; 미국 회사 서울 사무소였으니까.
암튼 처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았던 건 취업을 한 다른 친구들과 달리 퇴근시간이 몹시도 정확하다는 거였다.
자기 일이 끝나면 지점장이든 상사든 눈치보지 말고 퇴근해도 된다는 것이 그곳의 분위기였고 신입사원이라 할일도 별로 없던 나와 동기는 그야말로 땡~ 6시만 되면 가방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가끔씩 본사에서 사람들이 나오면 야근과 철야, 주말출근도 밥먹듯이 해야 했지만, 그렇게 한두 달 정도만 고된 나날을 보내면 또 다시 땡순이의 삶이 가능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어디까지나 본사에 있는 사장의 경영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늘 야근을 하는 사람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시간 관리를 제대로 못하느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
물론 그건 퇴근시간 다 되서 일감을 던져주는 악덕 상사들의 존재를 예외로 두고 하는 말이었지만, 회사 분위기 상 그땐 무작정 무식하게 해놓으라고 몰아부치거나 퇴근 직전에 일감을 던져주는 불합리한 일은 없었다. (나중에 들어간 한국 회사에선 비일비재했지만 ㅠ.ㅠ)

습관적인 야근을 곧 게으름이라고 여기는 독특한 유태인 사장은 장난기가 발동하면
가끔 6시 넘어서 전화를 걸어 우리가 받으면 버럭~ 왜 아직도 퇴근 안했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자기는 그 시간에 뉴욕 본사에 나와 있으려면 생새벽 출근을 했다는 뜻인데, 왜 그리 일찍 출근하느냐고 물으면 맨해튼 러시아워 탓을 했다 -_-;;)
물론 어쩔 수 없이 야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아침부터 후다다닥 바쁘게 움직여 그날 하루 해야할 일은 미리미리 해치우는 게 정말로 효율적이란 걸 배울 수 있었다.
다행히 그땐 개인 pc가 없을 때라 정말로 책상에 앉아 죽어라 일만 했던 것 같다. ^^;

그런데 분위기가 확실히 다른 한국회사로 옮기고 보니
컴퓨터가 슬슬 사무실을 장악하고 있었고, 오전내내 탱자탱자 놀다가 오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야근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는데, 전날 퍼마신 술 때문에 오전 내내 사우나에서 놀다 들어와 뒤늦게 일 시키는 걸 당당하게 생각하는 '남자' 상사들에게 나는 완전히 싸움닭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 그 회사가 인수합병을 당하고(당해도 싸다!)
좀 더 큰 규모의 회사로 흡수되면서, 거금을 들여 생산성 향상을 위한 컨설턴트의 자문 결과 다행히 야근필수 분위기는 정규 근무시간에 생산성을 최대로 높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물론 성질 급한 '경상도' 출신 상사들의 터무니없는 닥달(오후에 대뜸 "오늘 퇴근하기 전까지 *** 실적 뽑아와라!"라든지)은 가끔씩 이어졌고
시차 때문에 다 저녘때 내가 영국으로 보낸 팩스의 답이 "URGENT!" 도장이 찍혀 곧장 삐직삐직 들어오면 울며 겨자먹기로 야근을 해야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는 땡순이란 별명에 어울리는 삶을 보냈던 것 같다.
그땐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꼭 야근을 하는데도, 땡순이로 불리는 게 억울했지만^^;;
부당하게 야근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온몸으로'(?) 항의하는 '싸움닭 땡순이 미스 ㅂ'의 지랄맞은 성깔을 1년쯤 겪어본 회사 사람들은 그럭저럭 내 주장을 인정해주었더랬다.


흠....
난데없이 땡순이의 추억을 돌이켜 본 까닭은
요즘의 내가 너무 한심스러워서다.
작업실 출근 시간은 나날이 늦어지고 (오늘은 무려 오후 3시 반에 출근했다 ㅠ.ㅠ)
더불어 퇴청시간도 계속 늦고 있다.
물론 집에 돌아가서도 이어지는 야근(?)과 철야는 기본이다.
그럼, 돈 들여가면서 작업실은 왜 얻었는데!! -_-;;;
낮밤을 거꾸로 사는 올빼미의 삶을 추구한다고는 해도, 생산성과 능률면에서도 요즘은 도무지 진도가 봐줄 수 없을 정도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하루 15시간도 넘는 것 같은데, 정작 열심히 일하는 시간은 손꼽아보기도 민망하다. ㅠ.ㅠ
인터넷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시간을 확 줄이기만 해도 내가 만날 이렇게 아등바등 살지는 않아도 되련만...

타인의 강요가 아니더라도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만날 말로만;;;)
하지만 이렇게 살면 소박하고 화끈하게 바짝 벌어서 소박하고 화끈하게 바짝 놀고 여행하며 살겠다는 나의 바람은 그야말로 공허한 바람으로 끝나고 말지 않겠나.
으휴...
그런데도 밀린 일은 관두고 좀전에도 여행 사이트나 실실 돌아보았다.
'땡순이 미스 ㅂ'의 철저한 시간관리가 여실히 필요한 때다. ㅠ.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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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출장 얘기를 쓰고 보니 한 가지가 더 궁금해졌다.
내가 직장생활을 때려친 것이 또 10년도 넘다보니, 요즘은 어떠려는지...
바로 여직원의 신발 얘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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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가 애틀란타에 가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글을 보고 나니
나도 나름 파란만장했던 첫 출장의 기억이 떠올랐다.
뉴욕에 대한 긴긴 로망을 품게 된 최초의 경험을 남기기도 했지만
그땐 정말 빨리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 죽을 뻔했었다.

때는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에 가까운 듯한 1990년.
길고 지루할 것 같으니 more 기능으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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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추억주머니 2007. 4. 20. 20:41
얼마 전까지도 나는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 더는 없는 줄 알았다.
극히 일부의 마니아들만 고가의 만년필을 소장하고 사용하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예전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것이 만년필과 시계였듯, 요즘도 만년필이 꽤 훌륭한 입학이나 입사 선물이라고 했다.
그것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금장식' 만년필 같은 것이...-_-;;;
((음.. 부자에 대한 괜한 비호감과 적대감이 있는 못난 이 성격하고는;; ))
그런데 또 주변에 물어보니, 꼬박꼬박 다이어리를 쓰고 수첩을 정리하는 지인들 가운데는
만년필을 쓰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기도 했다.
((아.. 부끄러운 나의 편견과 근시안;; ))

아무려나, 과거의 나는 만년필로 쓰는 글씨를 참 좋아했다.
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만년필에 잉크를 채워넣고(카트리지형은 나중에나 보급됐다!)
가끔 잉크가 쏟아져 손이나 공책을 버리기도 하면서, 사각사각 써지는 글씨의 촉감이 어찌나 좋은지, 편지를 쓰거나 중요한 걸 적을 땐(좋아하는 선생님 과목의 필기라든지;;)  꼭 만년필을 집어들었고, 길이 아주 잘 들은 파카 45와 21 만년필 두개는
오래도록 나의 사랑을 받았다.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영어를 배우고, '펜맨십'이라는 영어 공책에다
심지어 펜촉에 잉크를 찍어가며 인쇄체, 필기체 대소문자를 연습했던 까마득한 옛날이었던
지라, 만년필은 더더욱 소중한 애장품일 수밖에 없었는데
오래된 연필꽂이에 분명히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만년필은 카트리지형으로 개조를 한 뒤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내가 손으로 뭔가를 끼적이고 (하다못해 다이어리라도) 기록하는 걸 그만두게
되면서 만년필에 대한 애착도 덩달아 사라져 신경도 쓰지 않게 된 듯하고,
그와 더불어 명필은 아니라도 "연애편지는 꽤 썼겠군"하는 평가를 받았던 동글동글 깔끔한 글씨체도 흐트러져 이젠 간혹 계약서를 써야 할 때에도 내 글씨가 부끄러울 정도로 악필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올케가 만년필을 하나 선물했다.
번역계약 같은 거 하러 가서 근사하게 만년필로 꺼내서 서명하는 모습이 멋져보일 거라면서^^ (역시 폼생폼사에 또 내가 좀 약하다)
문제는 파는 데가 흔하지 않은 제품이라 잉크 카트리지를 사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물론 나의 귀차니즘이 가장 큰 이유지만;;)인데,
오늘 내가 만년필 관련 포스팅을 하는 걸로 보아 벌써 다들 눈치 챘겠지만
드디어 "맞는" 잉크 카트리지를 장만했다!

두어달 전에 잠실 롯데까지 부러 찾아가서 사온 카트리지는 기막히게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ㅠ.ㅠ
오래 안 써서 일단 따뜻한 물에 펜촉을 다 헹궈낸 다음에 쓰라기에 무턱대고 집에 가져왔다가
시도해보고는, 내가 바보처럼 못 끼우는 건줄 알았더니만 파는 놈이 잘 못 내준 것이었더군.

암튼... 오늘 철철 비맞고 시내 나간 김에
몇달 째 들고만 다니던 만년필을 반드시 써보겠다는 욕심으로 카트리지 장만에 성공을 거둔 것.

집에 와서 종이에 자꾸 낙서를 해보고 있는데...
꽤 굵게 사각사각 적히는 필기감이 아주 그만이다. (이상하게 나는 볼펜도 굵은 게 좋다. 아무래도 날아가게 갈겨쓰는 글씨에 좀 더 품위를 실어주기 때문인듯...)
졸필도 약간은 근사해보일 만큼 ^^;;

만년필로 간만에 어디론가 편지라도 써야할 것 같은데;; 그럴 자신은 없고
하다못해 수첩에 메모라도 해야겠다.

블로그에 주절주절 끼적이는 것도 나름 행복하지만
가끔 이렇게 아날로그 감수성을 자극하는 물건들이 주는 행복감이 참 푸근하다.
나는 어쩔수 없이 아날로그 세대인듯.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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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추억주머니 2007. 3. 4. 16:46
오늘 내일 종일 비가 내린다더라는 아버지의 귀띔을 듣고도
아침에 집을 나설 땐 비가 내리지 않고 있어서 굳이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차 트렁크에든 작업실 서랍에든 우산 하나 쯤 당연히 있겠지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 병실 들렀다 나오니 어느새 가는 빗줄기가 땅바닥을 죄다 적셔놓았던데
예상과 달리 차 트렁크엔 우산이 없었다.
그나마 점퍼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주차장에서 다시 작업실로 올라왔는데
분명히 두 개나 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작은 우산이 서랍 안에 온데간데 없다.

그렇다면 그간 죄다 집으로 실어날라다 놓았다는 뜻인데
어린 시절과 달리 우산이 흔하디 흔하고 보니, 별로 기억에 남지도 않나 보다.
옛날에야 모든 물자가 다 부족하고 귀했지만
특히 우산은 왜 식구 수보다 꼭 하나씩 모자랐는지 원.
제일 좋은 장우산은 당연히 아버지 차지였고
그 다음으로 좋은 체크무늬 접이식 우산은 삼남매 중에서 제일 먼저 학교엘 가는 사람 차지가 되어야 마땅했지만, 걸을 때마다 차르륵차르륵 소리가 나는 대나무 비닐우산을 몹시 창피하게 여기는 큰동생이 떼를 쓰는 경우엔 선뜻 내가 양보했던 것 같다.
사실 접고 펴는 성능이 좋지 않은 접이식 우산을 접을 때 나는 걸핏하면 손가락 살이 끼여
피가 날 때도 있었기 때문에 차라리 비닐우산을 쓰는 게 좋았기 때문.
하지만 내가 비닐우산을 쓰고 학교엘 가면, 뒤에서 걸어오던 짖궂은 반 아이들이
우산 노래를 부르며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부분에서 멀쩡했던 내 우산을 공연히 지들 우산 살로 찍어 찢어뜨리곤 도망가는 경우가 간혹 있어서 등굣길부터 눈물바람을 비치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중학교에 들어간 뒤론 좀 우산이 흔해져,
결혼식이나 회갑 답례품으로 늘 우산이 생기는 바람에 나름대로 우산을 골라 쓰는 재미(?)도 있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무렵엔 교복을 입고도 비맞는 걸 어찌나 좋아했는지 ^^
아침부터 비가 내리면 몰라도 오후부터 비온다는 예보 따위엔 당연히 우산 없이 학교엘 갔다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홀딱 젖은 몰골로도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모든 게 넘치도록 풍요로워진 지금은
갑자기 비를 만났을 때 사들인 우산까지 합해서 내 것으로만 우산이 서너 개가 넘는 것 같고, 그것 말고도 달랑 세 식구 사는 집에 놓인 우산꽂이에 늘상 들어 있는 우산도 대여섯개가 넘는다.
아마 장롱 속엔 아직 꺼내보지도 않은 새 우산도 몇 개 들어있을 거다.
그런데도 우산 욕심은 끝이 없어서...
기분에 따라 골라 들 수 있게, 모양이나 색깔이 예쁜 우산을 보면 또 사고 싶어진다.
하긴 등산광이신 울 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2번 가는 등산을 빠뜨리지 않기 때문에 방수 재킷이며 비옷을 챙겨가는 것 이외에도 늘 최소형, 최경량 우산을 보면 슬그머니 사들고 오시는 듯.

산성비 탓도 있겠지만
우리는 비가 조금만 내려도 너도나도 우산을 들고 다니는데, 이상스럽게도 외국엘 가보면 비가 철철 오는데도 그냥 맞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필리핀 같은 데야 워낙 아직 물자가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겠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우기엔 우산으로 전혀 막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들었지만,
똑같이 산성비 걱정을 할 것 같은 뉴욕이나 런던의 대도시에서도 그렇다는 게 참 이상했다.
모자나 후드를 눌러 쓴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만, 발걸음을 서두르지도 않고 그저 꿋꿋하게
옷깃만 세우고 비를 맞고 걸어다는 사람들 속에서 가느다란 빗줄기에도 유난스럽게 우산을 펼쳐들고 걸어가다 우산을 쓴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뜨악했던 순간이 몇번이나 있었더랬다.
아 맞다, 타이페이에 출장 갔을 땐 제법 빗줄기가 굵었는데도 그랬었지...

어쨌든 나는 이제 비 맞는 것에 익숙하질 않은 지 오래라
오늘 아침 후드를 뒤집어 쓰고도 주차장에서 얼마 안되는 건물 현관까지 무의식적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왔고, 그런 내 모습이 뒤늦게 우스워 낄낄 웃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빗줄기는 아까보다 더 굵어 보이는데
이따가 나갈 땐 잠깐이나마 의연하게 비를 맞고 걸어가게 될까, 어쩔까... 모르겠다.

암튼 집에 고스란히 쌓여 있을 우산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아도
오늘 같은 우중충한 기분을 달래줄 화사한 색깔의 봄우산 하나 더 장만해야겠다는 생각만 불쑥 치민다.
지금 갖고 있는 우산은 분홍색, 카키색, 아이보리색, 감색, 자주색밖엔 없단 말이지...
올봄엔 신록을 닮은 연두색이나 싱그러운 하늘색 우산을 또 장만하면 누가 흉보려나.. -_-;;
아.. 우산 사러 가고 싶어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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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기

추억주머니 2007. 2. 21. 16:23

대인기피증에 관한 쌘의 글을 어제 읽고 나서 댓글에도 적었지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내가 친하게 어울리고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는 지인들 가운데는
사람들 앞에 보란듯이 나서서 대중의 이목을 즐기는 사람들이 정말로 거의 없다.
물론 예외 없는 규칙은 없듯, 아주 드물게 사람들의 시선과 '조명발' 같은 것을 즐기는 측근이 한두 사람 정도 있기는 하지만, 고백컨대 그들과의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유유상종, 동병상련이라는 옛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모든 면에서 똑같을 순 없겠지만, 지인들은 물론이고 하물며 블로그 파도를 타다가 만난 낯선 이에게서도 이런저런 공통점을 발견하면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쁘고 반갑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숫기'라는 게 없어서 곤혹스러울 때가 참 많았다.
이제는 '세월의 때'가 많이 묻은 것인지, 나이와 함께 약간이나마 연륜이 쌓인 것인지
일 때문에 만나는 경우라면 낯선 사람들과도 제법 대화를 잘 나누는 편이지만,
예전엔 낯선 사람과 마주한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는지 늘 앞이 막막했다.
회사 다니던 시절 간혹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같은 거라도 하게 되면, 정말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괴롭고 떨려서 말이 겉잡을 수 없이 마구 빨라지기도 했다.

이번 설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카들이 어른들께 세배하는 걸 뒤에서 쳐다보려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똑똑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제 엄마들한테 매번 꾸지람을 듣는 조카들의 모습에 내 옛날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
나 역시 어린 시절 친척들이 사방에 둘러서거나 지켜보는 가운데 세배를 하는 것이 너무도 창피하고 쑥스러워서, 7살 무렵엔 세배 안 하고 세뱃돈 안 받겠다고 도망쳤던 전적도 있었다.
나중에 '돈맛'(!)을 알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세배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세배의 순간은 늘 당혹스러웠기 때문에 반드시 동생들과 나란히 서서 동시에 세배를 했다.
혹시라도 동생들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혼자서 세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역시나 심장이 두근거려 지레 치맛자락이나 옷고름을 밟고 비틀거렸던 것 같다.

꼭 설날이 아니라도, 우리 조카들도 만날 어른들께 인사를 제대로 못한다고 혼이 나는데, 나 역시 옛날엔 그랬다.
그건 버르장머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목소리 높여 인사하는 것이 쑥스럽고 민망하기 때문이란 걸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나 뿐만 아니라 동생들까지 포함하여 우리 삼남매는 숫기 없고 수줍어하기로 유명했다.
외가의 사촌들은 우리와 정반대로 대단히 활달하고 인사성 밝고 누가 노래라도 시키면 주저없이 나서는 바람에 우리들 기를 팍팍 죽이는 반면, 다행히 친가의 사촌들은 대부분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다.

간혹 먼 친척분들이나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애들한테는 대개 용돈을 주시지 않나?
마지못해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마치고, 손님들이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용돈을 내밀면 또 나는 그걸 받으러 앞으로 걸어나가는 순간이 죽도록 싫었다.
용돈을 받은 뒤 또 다시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 순간도.. -_-"

내성적이고 숫기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죽도록 싫고 민망했던 성격을 조금이나마 고쳐보려고 우리 삼남매 모두 대학에 들어가선 나름대로 각자 노력을 기울이긴 했던 것 같다.
나와 큰동생은 연극 동아리엘 들어갔고, 막내는 노래 동아리엘 들어가 어떻게든 무대 공포증을 약간이나마 극복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두 동생은 이제 어쩌려는지 몰라도, 나는 여전히 멍석체질이다.
나름 힘들게 교직이수를 하고 교생실습을 했지만, 시골 학교 영어선생님이 되어 집에서 벗어나는 로망을 짧게 품었던 때를 제외하면, 누군가를 앞에두고 목청 높여 뭔가를 가르친다는 게 나로선 못할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물론 임용고시에 붙을 자신도 없었지만 말이다. ^^;;
이래저래 생각해봐도, 숫기 없이 뒷전에서 투덜대기만 하는 내 성격엔
조직을 떠나 이렇게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컴퓨터 자판이나 두들겨대는 일이 딱 맞는 것 같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다고 할 때, 일부에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좋아하고 나다니는 거 좋아하는 니가 혼자 고립되어 끙끙대는 일을 평생 할 수 있겠냐?"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혼자 일한다고 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나다닐 기회 역시 마찬가지여서, 가끔 계약서를 쓸 때나 얼굴을 대면할 뿐, 전화나 이메일로 원고 청탁을 받고 원고를 넘기는 정도로만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내 적성엔 딱이다.

그리고 넘치는 '끼'를 주체못하는 수많은 '요즘' 사람들의 '이상한' 풍조 속에서
나처럼 숫기 없이 약간의 자폐기질과 대인공포증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알음알음 더 많이 갖게 되는 과정이 참으로 행복하다.
익명으로 끼적댈 수 있는 이 공간이 소중한 것도 역시 나의 숫기없음 때문이지만
아무도 나무랄 사람 없으니 더욱 기쁘지 아니한가.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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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봤더라.
흔히 얘기하는 사회적 잣대로 본인의 나이가 꽤 많은지 아닌지 가늠해 보려면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보라는 데가 있었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로터리식으로 채널을 돌리는 TV의 존재를 혹시 아는지...
영화 <타이타닉>을 명절특집 TV 영화가 아니라 극장에 직접 가서 봤는지...
어린시절 흑백사진이 있는지...
뭐 이런 질문이었는데, 물론 난 그 질문에 다 해당이 되었고 ^^
피식 웃으며, 그래 나 나이 많은 거 안다, 된장. 그랬던 것 같다.

윌리 호니스 사진 전시회를 보면서 그토록 흐뭇하고 뿌듯했던 건
거창하고 대단한 느낌의 사회적 이슈를 찍은 사진들보다 (7월 혁명 기념일이라든가..
역시 잘은 기억 안나지만 주먹 불 끈 쥔 아빠의 무동을 탄 어린이의 사진 같은 것도 있긴 했다)
그냥 일상에서 느껴지는 기쁨과 행복을 담은 소박한 느낌의 사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나는 인생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과 동네를 사랑한다"라고 말했다는 그의 사진 철학은 정말로 많은 작품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현대까지도 고집스럽게 흑백사진만 고집했던 그의 작품들은 어쩐지 낯익고
정겨워, 그간 여기저기에서 볼 기회가 있었던 사진들 이외에도 혹시 우리 집에 그의 낡은 작품집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새로운 기계 따위를 사들이는 걸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한 때 수동 카메라로 열심히
우리 삼남매를 찍어주시면서 혹시나 참고한 작가는 아니었을까 하는 멋진 상상까지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가 찍은 사진과 비슷한 느낌의 흑백사진을 앨범에서 본 것도 같았고, 결국 나는 며칠이 지난 오늘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옛날 앨범을 뒤적이며 흐뭇한 추억에 젖었다.

물론 내 느낌은 그저 개인적인 비약에 불과하고 사진의 구도나 질도 큰 차이가 있겠지만,
꼬마 삼남매의 모습을 담아놓으신 아부지의 사진들에서 나는 꼬마 뱅상의 모습을 찍었던 아버지 윌리 호니스의 흐뭇한 시선을 느꼈고, 그래서 참 행복했다.
이제는 조카들 사진이 아니면 굳이 사진을 공들여 뽑고, 앨범에 넣어 정리하고 그러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됐지만, 또 몇십년이 지난 뒤 요즘 남긴 사진을 보며, '아 그래.. 이땐 그래도 제법 창창했구나..'라고 중얼거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싶더라.

암튼...
잠깐이라도 흑백사진 속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리고 그 소중학 흑백 추억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몇장 스캔도 해봤는데, 스캐너가 영 시원치않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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