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주머니'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1.01.28 사춘기 8
  2. 2011.01.06 자리 9
  3. 2010.11.22 비가 와서 7
  4. 2010.06.26 까마중 9
  5. 2010.01.21 방학 14
  6. 2010.01.04 눈타령 8
  7. 2009.12.18 영하 10도 4
  8. 2009.12.11 엠티의 역사 11
  9. 2009.08.26 칠석에 내리는 비 6
  10. 2009.06.11 춘천의 추억 7

사춘기

추억주머니 2011. 1. 28. 21:34

사춘기에 대한 까마득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착하게' 보냈다고 생각된다. 갑자기 와락 화가 나거나 슬펐던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크게 반항기를 내보일 만한 형편이 아니란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어려서 잘 몰랐던 것인지 정말로 무탈하게 넘어갔던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암튼 지긋지긋할 정도로 역사가 오래 된 엄마의 우울증을 목격한 기억이 없던 반면, 중학생때 목도한 엄마의 심한 우울증은 너무 괴롭고 난감해서 나까지 속을 썩이면 절대로 안된다는 다짐을 불러올 정도였다. 그래도 중학시절의 반항 사건이 두 가지 정도 남아있는 걸 보면, 내가 기억에서 지워버려서 그렇지 사춘기의 엇나감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왕비마마의 증언에 따르면 조잘조잘 노상 집에 와서 학교 얘기를 털어놓던 애가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만 보지 않으면 한숨을 푹푹 쉬는 정도였을 뿐, 이제부터 고백하려는 거짓 일기장 사건 말고는 달리 속썩이는 일이 없었다니 앞으로도 나는 계속 '대체로 착한' 사춘기 소녀였다고 주장할 작정이다.

거짓 일기장 사건은 중학교 1학년땐가 난생처럼 수련회라는 걸 가면서 생겨났던 일이다. 이름도 우스운 '간부 수련회'라는 걸 며칠 가야했는데,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가는 것도 모자라 준비물에 '잠옷'이 있었다. 요즘 수학여행 같으면 그냥 '편한 옷' 정도로 적혀 있었을 테고, '잠옷'이라고 적혀 있었어도 그냥 편한 옷 아무거나 챙겨가면 되겠거니 여겼겠지만 고지식한 나에겐 '잠옷'이라는 품목이 반드시 지켜야할 규정으로 생각됐다. 물론 당시 나도 집에서 입던 파자마 형태의 낡은 잠옷이 있었다. 다만 그게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입던 거라 소매와 바짓부리가 모두 껑충하게 7부쯤으로 짧아졌고 낡아서 프린트도 다 흐려진 쪼글쪼글한 몰골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집에서 입는 건 상관 없지만 그런 잠옷을 학교 수련회에 가서도 입고 자야 한다니, 나로선 앞이 캄캄했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그 참에 잠옷을 새로 사달라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집안 형편은 갖고 싶은 것을 아무때나 불쑥 사달라고 말해선 안되는 수준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선 뜻밖의 지출인 수련회 회비도 은근히 부담스러워하시는 마당에 잠옷이라니. 그런데도 나는 정말이지 헌 잠옷을 수련회에 가져가기가 싫었고, 결국 잠옷 사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에 영악하게도 일기를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일기 내용은 빤했다. 수련회에 헌 잠옷 입고 가는 게 정말 창피해서 수련회도 가기 싫을 정도지만, 부모님한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새 잠옷을 사달라고 하는 건 큰딸로서 할 짓이 아니다. 다른 애들은 다 새 잠옷을 사온다는데 아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구 저쩌구... 집안 사정을 크게 고민하는 (나름)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한 거다. 그렇게 새 공책에 딱 한장 일기를 써서 책상에 올려놓고 학교를 다녀와보니(원래 쓰는 비밀 일기는 늘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녔었다 ㅋ)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그날 저녁 연분홍색 바탕에 진분홍 땡땡이가 찍힌 예쁜 새 파자마를 내밀었다. 물론 엄마는 내가 새 잠옷을 얻기 위해 딱 한장짜리 거짓 일기장을 '일부러' 책상에 두고갔음을 알았고, 그 때문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못된 기집애, 그냥 사달라고 할 것이지... 라면서. 그렇게 해서 생긴 새 잠옷을 수련회에 들고 가긴 했지만, 나는 두고두고 그 잠옷을 입을 때마다 양심에 찔려서 괴로웠고 엄마 역시 잊을 만 하면 친척들 앞에서도 가짜 일기장을 언급하며 내 약점을 공략했다. 쟤가 은근히 영약한 애예요.... ㅠ.ㅠ

이후 나의 사춘기가 평탄했던 건 거짓 일기장과 잠옷으로 생겨난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내가 또 한번 눈물을 쫄쫄 흘리며 괴로워했던 사건이 있었으니, 그 또한 금전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주말마다 특별활동을 상당히 심도 있게 운영했고, 미술반이던 나는 격주 토요일마다 늘 이젤과 화구상자를 들고 경복궁 등지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별도로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역시나 가끔 고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던 막내고모를 따라 몇번 어깨 너머로 배운 수채화 기법을 '흉내'내봤더니만 교내 사생대회에서도 막 상을 주질 않나, 학교 대표로 뽑혀서 '서부지역' 중학 사생대회에 파견되질 않나 결과가 꽤 우쭐했다. 그러다 드디어 중3때 학교 축제일. 그간 교내 및 교외 사생대회에서 지나치게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탓에 나는 그림을 세 개나 전시하게 되어 개인이 내야 하는 표구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림 하나 당 5천원쯤 했던 것 같은데(당시 친구가 다니던 미술학원비가 한달에 2만5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꽤 큰 돈이었다) 축제 기간 동안에 그림을 걸려면 각자 자기 그림을 인사동이나 홍대앞 표구상에 가져가서 유리액자에 끼워 제출하거나, 학교에서 단체로 표구를 맡기도록 그림당 돈을 내야 했다. 집에 와서 부모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대번에 엄마는 꼭 그림을 전시 해야하느냐고, 그냥 액자 없이 '판떼기' 같은 데 붙이거나 이젤에 올려놓으면 안되는 거냐고 물었다. 액자 3개 값이면 한두달 치 쌀값이라는 둥... 결국 나는 알았다고, 전시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는 꽝 소리 나게 방문 닫고 들어가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하필 우리집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동네 최고 부잣집 딸이라 (당시 마당에 수영장이 꽤 크게 있고,  뜰 한 구석엔 팔뚝보다 큰 잉어들이 노니는 연못이 있었으며, 기사 딸린 검정색 세단이 가끔 토요일에 나와 친구를 경복궁으로 실어 날라주기도 했다) 그 친구는 일부러 인사동 표구상에서 최고급 액자로 표구를 맡겼다는 걸 알기에 내 처지가 더욱 비관스러웠던 것 같다.

학교축제일까지 근 열흘쯤 그야말로 나는 학교 다니는 게 죽을맛이었다. 그림 위치 선정 외에도 축제때 미술반이 해야할 일이 꽤 많아 이런저런 잡일에 동원되느라 방과후마다 미술실에 가면서도 나는 미술선생을 계속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 표구비가 없어서 그림 전시를 안하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미술반 아이들은 대개 미대 전공을 꿈꾸는 넉넉한 집안 아이들이라, 이젤과 화구상자도 고모가 쓰던 낡은 걸 물려받아야 했던 나 말고는 표구비로 전전긍긍하는 애들이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나는 마치 가난 때문에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그림천재라도 되는양 오만상을 떨었을 게 분명하다. 크크크. 집에선 입을 꾹 다물고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부모님을 축제에 초대하는 가정통신문도 당연히 전달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걸지도 못하는데 뭣하러! 물론 나 혼자 심통을 있는대로 부리고 다니긴 했지만, 아마 무심한 엄마는 그림 표구비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지 마는지, 학교 축제가 언제인지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네 엄마는 예의 그 검정색 세단을 타고서 축제 첫날 큼지막한 꽃다발과 함께 왕림하여 친구 그림 앞에서 기념촬영까지 하셨지만 말이다. ;-p 아, 맞다. 약간의 감동스러운 반전이 있기는 했다. 표구비를 못 냈으므로 당연히 내 그림은 한 개도 전시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놀랍게도, 미술실과 교무실 앞 복도엔 미술선생이 전시를 명했던 내 작품 세개가 모두 걸려 있었다. 비록 삐까번쩍하게 고급 액자로 새로 표구를 한 건 아니었지만, 미술실에 돌아다니는 옛날 그림 액자를 재활용해 미술선생이 내 그림을 전시해주었던 것. ㅠ.ㅠ 표구비 못내서 내 그림은 없을 거라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 얘기해놓았다가, 막상 내 이름표가 달린 그림을 마주하고 느낀 감동에다 이튿날 친구들이 그림 밑에 붙여준 장미꽃까지 곁들여져 중3 때의 추억은 신파스러우면서도 퍽 아련하게 남을 수 있었다.

쓰고 보니 사춘기 반항담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심통부린 이야기가 다 인것 같아 민망하지만, 암튼 세상 고민을 혼자 다 하는 것처럼 괴로워하던 나의 사춘기는 중3때로 막을 내렸던 것 같다. 고1때부터는 걸핏하면 병나는 엄마 대신 아침밥 챙기고 동생들 도시락 싸주고 그러느라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흔히들 하는 얘긴데 옛날 우리들은 나처럼 대개 사춘기가 짧고 굵게 금방 지나갔단다. 옛날 세대들이 확실히 삶이 덜 여유로워 철이 빨리 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지금보다 부모의 간섭이 심하지 않아 반항할 일도 덜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정답이야 모를 일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사춘기 성향을 보이는 요즘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조카를 봐도 그렇다. 5학년때부터 이미 발칵발칵 성질을 부리고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걸 보며 벌써 사춘기에 접어들었나 보다는 심증을 가졌는데 점점 아주 가관이시다. 제 부모도 그렇고 나도 왕비마마도 본격적인 공주의 사춘기를 두려워할 정도다. 원래 사춘기 때는 뇌의 구조와 기능부터 달라서 번쩍번쩍 아무때나 스파크가 일고 번개가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뇌관 같은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는 어른들의 이해가 필수적이라던데, 여전히 철도 덜 났고 수시로 감정의 기복이 많은 나로서는 이해는커녕 제법 참고 지켜보다 덜컥 싸움을 할 태세가 되고 만다. +_+ 요번에 방학맞이 공주의 왕림기간 동안, 정말이지 작년 여름방학과는 다른 양상에 나도 왕비마마도 어쩔 줄을 몰랐다. 원래도 여기 오면 제멋대로 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으므로, 그러려니 했는데... 암튼 이번엔 확실히 받아주기 어려운 상황들이 많았고, 특히나 왕비마마께서 마음 상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심지어 기물파손(?)도 한 건 있었을 정도다. ㅎㅎㅎ 왕비마마께 가장 긴요한 물건인 간단형 리모컨을 공주께서 집어던져 망가뜨렸는데, 내가 중재자로 나서야 했을 정도로 할머니와 손녀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걸 보며 나는 더럭 겁이났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던 나의 공주는 이제 없구나 싶기도 하고. 원래는 심성이 착한 아이니까 자기도 주체 않되는 감정의 기복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방법을 스스로도 발견하리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고모는 언제나 네편이 되어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해야했던 조카의 사춘기가 과연 어떻게 넘어갈지... 그나마도 여자애들은 좀 나은 편이고, 남자애들이 더 문제라는데 주르륵 공주 아래로 셋이나 되는 사내녀석들은 또 어찌 사춘기를 버텨나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성장과정이므로, 뭐 고민해봤자 지켜보는 것밖엔 할 일이 없겠지만 취미가 조카사랑이라고 주장해온 얼치기 어른 고모에겐 벌써부터 큰 두려움이다. 지금까지도 애들 버르장머리 없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비난을 계속 들어왔는데, 설마 조카들의 사춘기도 나 때문에 더욱 힘겨워지는 건 아니겠지? 어려서도 커서도 조카들이랑은 늘 속을 털어놓는 멋진 고모가 되는 게 꿈인데, 인품이 딸려서 과연 그런 경지에 오를 수나 있을지... 암튼 부모노릇엔 댈 것도 아니지만 오지랖 넓은 고모노릇도 뭐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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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추억주머니 2011. 1. 6. 14:14

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버스에서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뒤에서 두번째 줄, 혼자 앉을 수 있는 자리다. 요샌 거기도 두 좌석이 놓여있는 버스가 많지만, 몸체가 낮고 하차문이 안쪽으로 열리는 신형 버스에도 맨뒤에서 둘째 줄엔 한 좌석짜리 버스들이 더러 있어서 드물게 거기 앉을 수 있는 날이면 몹시 기분이 좋다. 아무래도 나는 모든 공간에서 구석자리를 선호하는 모양으로 카페나 음식점에 가서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한가운데보다는 주로 모퉁이에 콕 박혀 있는 게 좋다. 요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연코 내가 원하는 자리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않아도 되는 벽쪽 가장자리 자리다. 하지만 공주마마를 보필하고 다니는 무수리로선 가장자리 자리를 차지하기가 쉽지 않다. 벽쪽은 언제나 낼름 조카가 앉는다. 그래서 둘이 티격태격할 때도 있는데 내가 차지하고 싶은 요가매트는 가장자리 중에서도 버스 자리처럼 뒤에서 둘째 줄이다. 사람들이 꽉 차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에 뒤에서 둘째 줄에 앉아도 뒷사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워낙 촘촘하게 요가매트를 깔아놓았기 때문에 맨끝줄에선 구르기 같은 동작을 할 때 잘못하면 벽에 부딪친다. 하지만 공주는 무조건 맨끝줄에만 앉으려고 든다. 앞쪽은 나도 절대 사절이지만 맨끝줄에 앉아서 설렁설렁 딴짓하며 동작도 어설프게 하다가 걸핏하면 잠들어버리는 조카녀석을 보노라면, 과거 맨뒷줄에 앉아서 노상 꾸벅꾸벅 졸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_-; 

학창시절 내 자리는 거의 언제나 앞쪽이었다. 국민학생 때는 그나마도 키와 상관없이 중간쯤까지 진출했었고,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십몇번대라 둘째 줄이었으나 고등학교 올라가선 가차없이 맨앞줄에 앉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고2땐 키와 상관없이 제비를 뽑아 자리를 정하는 바람에 나중엔 슬쩍 번호표를 바꿔 친구들끼리 앉을 수 있었고, 나는 드디어 염원하던 대로 맨 뒷자리를 몇달간 경험할 수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따로없다며 친구들끼리 다닥다닥 앞뒤로 옆으로 붙어앉아 지냈던 그 시절엔 정말로 하루하루 학교 가는 게 즐거웠다. 맨앞줄에선 등잔밑이 어두운 교탁 바로 코밑자리(거기선 교탁에 교과서를 기대놓는 척하고 딴 책을 숨겨보는 게 가능했다)아니고서야 딴 책 읽기가 불가능했지만, 맨뒷줄에 앉으니 온종일 교과서에 숨겨 만화책을 비롯한 딴 책을 읽어대도 걸릴 염려가 없었다. 돌아가며 망보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 선생들이 필기를 시켜놓고 교실 앞뒤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우린 교실이 좁다는 핑계로 의자를 벽에 바짝 대놓고 우리 뒤쪽으론 못다니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있었다. 당시엔 아직 과외금지령이 내려져 있을 때라 학원이니 과외니 하는 것도 전혀 없었고 순전히 학교 공부로만 버텨야 하는 시대였다. 나는 예습복습을 거의 하지 않고 수업중에 바짝 정신차려 집중하는 걸로만 대충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맨 뒷줄에 앉아서 그렇게 노상 딴짓만 하다보니 성적에도 당연히 티가 날수밖에 없었다. 단순암기, 찍기의 여왕이 되려면 일단 수업중에 선생이 중요하게 언급한 부분에 형광펜이라도 칠해놓아야 하는데 그 몇달간은 망보는 임무를 맡은 수업이 아니고선 교과서며 요점정리 유인물이 그저 하얗기만 했다. 사실 딴짓하는 친구들을 위해 망을 보느라 대표로 수업을 들을 때도 맨뒷줄에선 앞줄에 앉았을 때와는 공부의 질이 달랐다. 선생에게 시선을 집중해 보아도 시야에 들어와 거슬리며 움직이는 다른 아이들에게 신경을 빼앗겼고(맨앞줄에선 선생과 나의 시선을 가리는 장애물이 중간에 없다! ㅋㅋ ) 목소리가 작은 선생의 설명은 맨뒤까지 잘 들리지도 않아 수시로 졸렸다. 키가 커서 늘 뒷자리에만 앉아 지냈던 친구들은 아마도 그런 악조건을 극복하고 수업에 집중하는 노하우를 꾸준히 쌓아왔을지 몰라도, 앞줄 붙박이였던 나는 암튼 그랬다. 그렇다고 친구들 배신하고 다시 맨앞줄로 갈 수도 없으니, 공부엔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그래도 고2때 아니면 언제 놀아보겠냐며, 고3 올라가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3때 다시 맨앞줄로 회귀한 뒤에도 그랬지만, 대학엘 가서도 강의실에서 내 자리는 거의 앞쪽이었다. 맨앞줄은 단호히 거부했어도 거의 두세째 줄에 늘 앉았던 이유는 워낙 거구의 친구들이 많아서 뒤쪽에 앉으면 아예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200명씩 듣는 합동강의실이든 영문과 단독 강의실이든 뒤쪽엔 요란하게 사투리를 쓰는 '무섭고 시끄러운' 남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물론 가끔 졸릴 때면 일부러 덩치 큰 친구 뒤에 앉아 잘 가리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싫어하던 교직과목의 경우엔 가려주는 사람 없이도 뒷줄에서 빌빌 졸았지만.

사실 고2때 찍은 저 기념비적인 사진 속엔 뒷줄에 앉았든 아니든 전교1등 하던 친구도 있었으니 교실에서 앞줄과 뒷줄 여부로 공부나 집중도의 차이를 단정할 순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처럼 얼치기 범생에겐 확실히 지리적인 차이가 성적과 수업집중도에 분명 영향을 미쳤으니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도 할 수없다. 요가원 원생들을 봐도 그렇다. 언제나 맨앞쪽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몸을 늘이고 유려한 동작을 보여준다. 수업 맨 마지막에 편하게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자세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쿨쿨 잠을 자다가, 그만 휴식에서 깨어나라는 요가 강사의 말을 못듣고 끝까지 누워 있다가 얼떨결에 일어나는 사람들은 나의 조카를 비롯해 꼭 뒷줄에 있던 사람들이다. 나도 이젠 확실히 어떤 자리든 뒷줄이 편하고 앞장서서 주장을 펼치기보다는 뒷자리에서 구시렁거리는 걸 즐기는 사람이지만, 벌써부터 맨 뒷자리만 고집하는 조카의 기호는 너무 일찍 자리잡은 게 아닐까 염려스럽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학교에서도 만날 맨뒷자리에 앉아 딴짓하고 조는 거 아니니, 공주야? ㅠ.ㅠ 물론, 맨 뒤에 앉아 빌빌 졸거나 만화책만 읽어대도 행복하고 바른 아이로 잘만 자라준다면 걱정이 없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다 부질없는 욕심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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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추억주머니 2010. 11. 22. 03:38

일기예보를 안 봐서 비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새벽에 난데없이 요란하게 비가 내린다. 아파트도 그렇고 콘크리트로 지은 요즘 집에 살면서 밖에 비오는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유독 빗소리에 민감한 이유는 오래된 우리집 뒷베란다 쪽으로 덧씌운 섀시 때문이다. 알루미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지붕을 후두두둑 때리는 빗소리가 좀 요란해야지. 빗줄기가 가늘면 제 아무리 예민한 귀를 지녔대도 나 역시 비오는 걸 못 알아차릴 때가 많지만, 지금처럼 빗줄기가 굵을 땐 옛날 '슬레이트' 지붕을 덧댄 기와집에 살 때처럼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보안등에 비친 빗줄기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확실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요란한 빗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 다섯식구가 셋방을 전전하며 살 때 가끔 자다말고 물난리를 겪는 경우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어딘가 깨진 기와 때문에 천장에서 똑똑 떨어진 물이 이불을 흠씬 적신 다음에야 한밤중에 깨어난 부모님이 삼남매를 깨워 이부자리를 한 구석으로 치우고는 물 떨어지는 곳에 대야를 받쳐 놓아야 했다. 어린 우리야 잠자리를 구석으로 옮기고는 곧장 잠이 들었지만나 부모님은 걸레로 물기를 닦고 나서도 대야가 넘칠까봐 밤새 불침번을 서셨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곧장 지붕에 올라가 기와 깨진 곳을 확인하셨는데, 그런 일이 워낙 다반사인지 집집마다 마당 한구석엔 기왓장이 몇장씩 쌓여있었다. 어린 눈엔 그냥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기와를 가져다가 소꼽놀이라도 할라치면 어른들에게 혼이 났다. 그래도 몰래 한장쯤 기와를 훔쳐다가 냅다 깨뜨려서 망까기와 비석치기에 쓸 괜찮은 판판한 돌멩이를 만들어 나눠 갖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옛날 빗물 떨어지는 천장 아래 대야와 양은 그릇을 받쳐놓으며 부모님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셨지만 어린 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똑똑 번갈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저 재미있기만 해서 자꾸 손을 갖다 대며 물놀이를 하려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지붕이 새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양은 그릇에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재미있는 건 여전해서 처마 밑에 일부러 양동이를 가져다놓은 기억도 있다. 혹시 빗물을 받아서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함이었던가? 빗물을 받아 며칠 두었다가 어항에 넣어주었던 것도 같고...

아파트에 살면 다달이 관리비 내는 것으로 집안팍의 유지관리와 관련된 모든 수고를 남에게 일임할 수 있으니 그건 제일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집은 몇년에 한번씩 해야 하는 외관 페인트칠도 그렇고 지붕 방수도 그렇고, 매년 해야하는 정화조 청소도 그렇고 일일이 사람을 불러다가 의뢰를 해야한다. 일년에 한번쯤은 사다리 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방에서 날아온 낙엽이 혹시 배수구를 막고 있지는 않은지도 확인해야 하고.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던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제 그런 것들도 모두 내 책임인데, 과태료 운운하며 구청에서 매년 업체 연락처가 적힌 안내장을 보내오는 정화조 청소 말고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던 터라 사실 비만 오면 불안불안하다.

아직은 아래층에서도 어디 비새고 물샌다는 얘기도 없고 방방마다 멀쩡하긴 한데 원래 문제 생기기 전에 올해쯤 미리미리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장마철 지나고도 수시로 비가 많이 왔던 지난 여름 내내 지붕에 올라가서 낙엽 치우고 배수구 확인했어야 하는데 어쩌냐고 계속 불안해하시는 왕비마마에게 막내녀석 다니러 오는 날 시키면 된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는 매번 까먹고 그냥 넘어갔다. 여름도 잘 지났으니 올 겨울은 무사히 넘어가주지 않을까. 

갑자기 내린 비는 소나기였나보다. 옛 추억에 골몰해 자판을 두들기는 사이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쓸데 없는 생각 그만하고 일이나 더 하라는 배려인가. 흐흐흐. 암튼 이렇게 월요일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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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중

추억주머니 2010. 6. 26. 14:37

까마중이라는 식물의 존재를 정말로 '새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김점선의 책을 읽다 발견했다. 아 반가워라.
이제는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린 서울 한구석 나의 본적지는 어린시절만 해도 거의 허허벌판 이었고, 주변에 야산과 풀밭이 많아 아이들이 뛰어놀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마당에 포도나무까지 심어 기르셨으니 철철이 온갖 화초가 넘쳐났어도, 그래도 나는 야산울 쏘다니며 산딸기와 까마중, 오디 같은 열매를 신나게 찾아다녔다.
산딸기와 오디는 최근에도 상품으로 구경할 수 있을 정도라 잊을 이유가 없었지만, 까마중은 수십년째 본 적이 없는 듯하다. 물론 근교든 멀리든 산엘 가본 기억이 가물거리기 때문이겠지만서도.


동글동글 새카맣게 익은 까마중을 따서 입안에 넣으면 꽤 달콤해, 집에 계신 할머니랑 고모 가져다주겠다고 잔뜩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가 다른 놀이에 팔려 쭈그려 앉는 바람에 다 터뜨려 바지에 물을 들였던 기억도 있다. 인간의 기억은 향과 맛으로 가장 깊이 각인된다더니만, 사진만 봐도 풋내 나는 까마중의 흐릿한 달콤함이 입안에 감도는 기분이다.

요샌 샐비어, 분꽃, 채송화 같은 소박한 옛날 꽃들도 다시 사랑을 받는 모양인지 심심찮게 눈에 보이던데, 까마중은 과연 어딜 가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까마중, 까마중, 까까머리 중학생이 떠오르는 귀여운 이름까지 다신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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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추억주머니 2010. 1. 21. 22:12

방학(放學):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 추위가 심한 일정 기간 동안 수업을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놓을 방, 배움 학이니, 방학은 배움을 놓고 놀라는 뜻이 틀림없다.

초중고대,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아도 방학땐 거의 놀기만 했던 것 같다. 요샌 방학이 되어도 누구 하나 정신없이 놀기만 하는 학생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마냥 놀아도 되었던 시절을 타고난 복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3을 앞둔 겨울방학엔 자율학습을 하느라 매일 학교에 가야했지만, 등교는 했으되 공부대신 우린 여전히 수다가 본업이었고 고체 연료와 냄비, 양푼 따위를 집에서 날라와 친구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거나 도시락을 모두 모아 비빈 양푼 비빔밥에 달려들어 숟가락 다툼을 하며 히히덕거렸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 달리 괜한 시국 탓하며 학기중에도 학업을 멀리했던 우리가 방학 동안 공부를 했을리 만무했다. 친구들 따라 토익, 토플 특강을 신청하긴 했어도 출석일수가 열흘을 넘긴 적은 없었다. 그나마도 3학년 때부터는 특강 등록증을 검사하는 학생회 친구가 거저 들여보내 줄 터이니, 다들 특강비로 술 사마시자고 꼬드겨 단체로 부모님을 속인 뒤 꽤 오래 술과 밥을 사먹으며 놀았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대학시절 4년이라고 아직도 아련하게 추억하는 이유도, 학기중이든 방학이든 따지지 않고 참 원없이도 놀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미래가 두렵긴 했지만 특별히 인생을 계획하고 앞길을 따져 본 적 없이, 그저 빈둥빈둥 놀았다. 뭐가 그리 재미 있었으냐고 꼬치꼬치 따지면 딱히 손꼽을 것도 없이, 멍하니 무심하게 놀 수 있었던 건 정말 그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아 물론, 노는 게 본업이었던 유년시절은 빼고서 그렇다는 말이다. 학원이나 과외는 생각도 못하고 요즘 학습지에 해당하는 <일일공부>가 유일한 사교육 경험이었던 나는 학기중이든 방학때든 만날 시험지가 밀려도 별 걱정하지 않고 놀았다. 까짓것 일주일치가 밀려도 하룻저녁 끙끙대며 앉아 다 풀면 되는 일이었다. <방학생활>과 일기가 문제이긴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한참 밀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해치우는 버릇은 여전했으므로 개학을 일주일 쯤 앞두고서 숙제검사를 실시한 부모님에게 손바닥을 몇대 맞은 뒤 시작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개학 후 글짓기든 독후감이든, 만들기든 뭔가 하나쯤은 상을 타왔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치밀한 구석이 있어서, 똑같은 굵기와 진하기의 연필로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다 쓰면 티가 날까봐 나는 연필도 굵은 것, 흐린 것, 뾰족한 것, 뭉툭한 것 번갈아서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렇게 강요받은 일기 쓰기가 싫더니, 요샌 누가 쓰라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 블로그질을 하는 걸 보면 우습다. 한두 달치 밀린 일기를 며칠 만에 다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필력>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건가? 흐흐흐.

어쨌든 어린 시절 방학 중 내가 가장 크게 기대했던 이벤트는 친척집 순례였다. 친할머니댁에서 며칠,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고모네집에서 며칠, 원두막이 있는 시골집이 아니라 다들 서울 하늘 아래라 특별한 것도 없건만 나는 방학동안의 홀로 외박을 학수고대했다. 싸가지고 간 방학숙제와 일기는 언제나 손도 대지 않은 채 며칠 뒤 다시 집에 가져갔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부시시 눈을 떠보면, 안방 한가운데 덩그라니 내 이불만 놓여있고 같이 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불은 어느틈에 치워졌을 뿐만 아니라, 방 구석에 상보가 덮인 소반 하나가 놓여있기 일쑤였다. 두분 아침 드시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완고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할아버지가 늦잠 자는 손녀딸을 그냥 내버려두고 그 옆에서 아침상을 받아 진지를 드셨을 걸 생각하면 지금도 놀랍다. 할머니가 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내버려두라고 말리셨을 게 분명하지만, 밥상 예절을 중시하셨던 할아버지 성격상 보아 넘기시기 힘드셨을 텐데. 딱히 할머니댁에서 뭘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고, 갓 성년이 된 고모들 수다 떠는 데 눈을 빛내며 끼어 앉아 있고, 낮잠자고 누룽지나 찐고구마 같은 간식 먹고 TV 드라마 보고... 나중에 작은아버지댁이랑 합치셨을 땐 사촌동생들이랑 놀아주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

방학때 할머니댁에서 며칠 놀다 돌아오면 집에서 한 일주일쯤 보내다가 다시 외할머니댁엘 갔다. 거긴 사촌언니가 있는데다 만화책을 수십권씩 빌려다 쌓아놓고 보는 외삼촌들도 있었으니 더욱 즐거웠다. 물론 할머니댁보다는 늦잠자기가 수월하지 않았지만 새벽같이 안방에서 쫓겨나 잠이 모자라면 건넌방이나 사랑방으로 베개를 들고 옮겨 이어잘 수도 있었다. 온갖 과일과 한과, 견과류가 그득했던 외할머니댁 광이나 다락에서 끊임없이 가져다먹는 간식의 묘미는 또 어떻고!  두 할머니댁 말고도 고모네 집에서도 거의 방학마다 나를 불렀던 건 좀 의아하다. 살림이 여유로웠던 셋째 고모는 딸이 없어 그러려니 한다지만, 꽤나 먼 동네 단칸방에 살았던 넷째 고모네는 딸도 있는데 거길 가서 며칠 씩 지내다 온 건 무슨 이유였을까. 아무리 아이라지만 군 식구 하나 더 챙기는 게 꽤나 귀찮았을 텐데, 고모들이 나를 심히 예뻐했다는 것말고는 딱히 나를 오라고 했던 정황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편하기만 했던 두 할머니댁과는 달리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며칠은 나도 대단히 조심스럽고 어려웠는데도, 다니러 오라는 고모들의 청이 싫지 않았다. 어린마음에도 오히려 내쪽에서 큰 아량을 베푸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끼니 때마다 고모들을 도와 수저를 놓거나 물잔을 옮기며 듣는 칭찬도 퍽이나 뿌듯했고.

물론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과거의 나처럼 마냥 놀지 못한다. 놀기는커녕 다음 학년 수업을 땡겨서 선행학습을 하느라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오래 학원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좀 더 여유가 있는 집안에선 아예 방학 내내 외국으로 연수를 보내거나... 달리 노는 인생을 아예 알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나름 행복과 즐거움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여유롭고 신나야 할 때조차 공부에 치여 보낸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더욱 숨막히는 삶에 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몹시 안타깝다. 유년을 돌아보며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빈둥빈둥 놀기만 했어!"라고 즐거이 고백하는 나와 달리, 그 아이들은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학원을 다섯개나 뺑뺑이하느라 정신없었어!"라고 토로하며 그마저도 행복하다 여기는 건 아닌지.

아무려나 일 하기가 싫으니 만날 꿈꾸는 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년, 방학, 휴가, 이 따위 것들이다. 이 맘때쯤 아직은 밀린 방학숙제와 일기 걱정 없이 태평하게 빈둥빈둥 놀고 있었을 내 유년의 방학이 그리워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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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타령

추억주머니 2010. 1. 4. 15:50

여기다 눈 얘기를 자꾸 쓴 탓은 아닐 텐데 오늘 서울에 내린 눈은 40년만에 처음이라는 대폭설이다. 2시쯤 본 뉴스에서 서울 적설량이 현재 25.8cm라고 했음. @.@
언덕 중턱에 사는 나로선 이런 날 외출이 무서워 그냥 집에 콕 박혀 있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인데, 집앞 골목길은 여러 이웃들이 힘을 합쳐 거의 다 쓸고 길을 냈지만, 골목에서 모퉁이를 돌아 이어지는 큰 언덕길 눈밭은 이미 죄다 밟히고 다져져 비나 넉가래로는 치울 형편이 아니라 염화칼슘만 여기저기 뿌린 뒤 모두들 포기하고 돌아서야 했다. 위쪽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눈을 치우며 내려와 골목 어귀에서 만났는데, 비질을 하는 부모들 옆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났다.

나의 본적 주소지이자 (지금은 동네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주소에도 <산31번지>라고 되어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할머니댁은 언덕 위에 있었다. 조부모님은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부산서 살다 다시 상경하셨으니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 정착한 게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데, 서울 토박이인 외할머니댁도 똑같이 한강 건너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은 좀 신기하다.

아무튼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할머니댁이든 외할머니댁이든 언덕길에서 비닐포대 썰매를 타며 꽤나 즐거워했다. 물론 그 때도 겁이 많아서 다른 아이들처럼 경사가 제일 급한 곳부터 길게 타고 내려가진 못하고 완만한 부분만 즐겼는데, 우리가 그렇게 비닐포대로 반들반들하게 언덕길을 빙판으로 만드는 건 어른들에게 대단히 혼날 일이어서 조만간 동네 어른들 가운데 누군가 연탄재를 들고 나와 우리의 놀이터를 망가뜨리기 십상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우리의 썰매장을 망가뜨리고 나면 아이들은 어른들에 대한 복수를 감행했다. 연탄재가 덜 뿌려진 곳을 골라 일부러 더욱 매끄럽게 발로 문질러 눈을 다진 뒤에는 마치 처음 눈이 내린 상태처럼 보이도록 눈을 보슬보슬 뿌려놓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재수없게 그곳을 밟은 사람은 영락없이 미끄러져 자빠지도록!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지만, 그땐 그렇게 만들어놓은 빙판 언덕길에 누군가 와장창 넘어지는 걸 구경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ㅎㅎㅎ

오늘 내다본 집앞 언덕길도 그 오래 전 할머니댁 언덕처럼 꽤나 반들반들 발자국이 찍혀 있어, 비닐포대만 있다면 한번쯤 주욱 미끄럼을 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쪽 옆에 줄지어 서 있는 자동차에 처박히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이 동네에 이상한 여자 산다고 소문 날까봐 차마 시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누군가 아이들 가운데 비닐포대를 구해 썰매를 타고 논다면 슬쩍 한번 빌려타자고 나설 자신은 있는데, 요즘 아이들은 썰매를 눈썰매장에서나 타는 것으로 아는지 아쉽게도 저 아까운 언덕길에서 썰매 타고 노는 아이가 한명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언덕과 인연이 많은 운명인지, 내가 다녔던 중고등학교 모두 산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주소로는 무려 <종로구>인 서울 중심지에 그렇게 높은 학교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이야 염화칼슘이 흔하지만 내가 중학생 때는 염화칼슘의 존재조차 알지 못할 시기였다. 해서 겨울방학 이전에 눈이 좀 많이 내린다 싶으면 우리 학교는 무조건 단축수업을 했다. 산꼭대기라 워낙 춥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겨울 교복으로 바지를 입어도 무방했는데, 특히 추위에 약한 나는 교복 바지를 2개나 맞춰 돌려 입으며 당연히 안에 내복까지 껴입고 다녔다. 마침 근처에 화교학교가 있기도 해서, 중학교 시절 나는 교복바지 때문에 화교학교에 다니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눈이 심상치 않게 많이 내리는 날엔 어김없이 단축수업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고, 우리는 환호를 하며 하산준비를 했다. 경사가 3, 40도 이상인 언덕이라 그야말로 눈밭 하산길은 만만치가 않아, 기다란 동앗줄 같은 밧줄이 군데 군데 드리워졌고 체육 선생들이 중간에 서서 벌벌 기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때도 멋내는 데 열중한 아이들은 제 아무리 추워도 반드시 치마 교복에 메리제인슈즈 같은 학생 구두를 신고다녔지만, 나처럼 바지교복을 갖춰입은 아이들은 눈이 많이 내리면 책가방을 썰매삼아 타고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2학년때였던가 그날은 정말 순식간에 폭설이 내려 책가방 썰매가 얼마나 스릴 넘치고 재미나던지, 몽둥이를 휘두르는 (길 미끄럽게 한다고;;) 체육선생을 피해 몇번이나 오르내리며 책가방 썰매를 즐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재단에 건물만 달라진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눈오는 날 단축수업은 그야말로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새 염화칼슘이 도입되었던 것. 아마 중고등학교만 있었다면 굳이 염화칼슘을 그렇게 미친듯이 뿌려대지 않았을 텐데 그 산꼭대기에 대학건물까지 있었으니 서서히 많아지기 시작한 교직원들의 자동차 운행 때문에라도 염화칼슘을 무더기로 살포했던 것 같다. 눈이 많이 내려도 단축수업을 하지 않는 서글픈 현실을 개탄하며, 나는 책가방 썰매 타고 가파른 학교 언덕길을 하산했던 무용담을 신이 나서 들려주었지만 다른 중학교 출신들은 좀체 믿으려하지 않았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서도 교복바지파가 드물어 증언도 부족한 터라, 책가방 썰매 하교길은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전설로 남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스키장이든 눈썰매장이든 가본지가 까마득하다. 보드는 타본 적도 없고 두발로 타는 스키도 잘 타지 못하는 터라 리프트 탈 때마다 추위에 벌벌 떨어야 하는 스키장엔 지금도 가보고픈 생각이 전혀 없지만, 썰매 운전도 운전이랍시고 방향조절을 꽤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하므로 ^^ 에버랜드에서 타던 스키썰매는 약간 그립다. 다 미친듯이 내린 눈 때문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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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

추억주머니 2009. 12. 18. 03:17
요샌 겨울이 돼도 영하 10도씩 내려가는 일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연일 강추위다. 이런 추위엔 본능적으로 동면모드에 접어들어 집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야 정상인데, 그놈의 요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하려면 아주 귀찮아 죽겠다. 어떤 날은 온종일 눈꼽도 안떼고 있다가 오밤중에 세수 한 번 하고 마는 게으름뱅이가 이틀에 한번은 제대로 씻고 떨쳐입고 나서야 하다니 말이다. 그나마 핫요가라 학원에만 가면 따끈따끈하기에망정이지, 추운데서 옷갈아입고 벌벌 떨어야 하는 요가였다면 애저녁에 관뒀을 거다.
째뜬 영하10도의 날씨는 중무장을 했어도 건물 사이로 휘몰아치는 도시의 칼바람엔 귀떼기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무서운 추위임을 새삼 실감했다. 목도리와 장갑으론 부족해 털모자를 썼어야 했다고 어찌나 후회를 했는지. 장갑 낀 손으로 귀와 코를 간간이 보듬다가 오래 전 추억이 떠올랐다. 아침 등교길에 춥다고 징징거리다 아버지한테 귓방망이를 얻어맞았던 사건.

5학년 때였나. 내복과 외투를 다 껴입고도 마당에서 얼굴 춥다고 징징대는 딸에게 목도리를 두르고 마스크까지 씌워줬던 아버지는, 내가 "그래도 밖으로 나온 눈이 춥다"고 계속 징징대자 참지 못하고 손지검을 했었다. 아버지는 아마도 뒤통수 정도를 갈기려고 했다가 얼떨결에 뺨을 때린 것도 같았는데, 그 이전까지 매라고는 가끔 동생들과 단체로 손바닥 정도나 맞아보았던 나는 너무도 큰 충격에 징징대던 울음까지 뚝 멎어버렸다. 더 혼나지 말고 얼른 학교나 가라고 채근하는 엄마 말대로 멍하니 집을 나서 학교로 향하며, 나는 아픔보다도 난데없는 배신감에 소리없이 뜨거운 눈물을 계속 쏟았던 것 같다.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라 여겼던 고명딸의 자존심도 여지없이 무너졌음은 물론이다. 그날 저녁까지도 충격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 나는 아빠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내 눈치를 보며 자꾸만 말을 거는 아빠에게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결국 흐지부지 아빠와 화해를 한 건 틀림 없지만 아빠가 내 뺨을 때렸다는 사실은 어린 마음에도, 아니 3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대사건>이었다. 아버지도 그렇고 울 엄마도 그렇고 자식들을 사랑의 매로 다스리는 분들이 아니어서, 집에 분명 회초리는 존재했지만 특별한 체벌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껏해야 방학숙제 밀렸다고 삼남매가 쪼르륵 서서 손바닥을 몇 대 맞았던 정도였는데, 내가 아빠에게 뺨을 맞다니.
물론 내가 아버지에게 뺨을 맞은 것은 인생을 통틀어 그 추웠던 겨울 아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귓방망이 맞은 충격 때문에 며칠간이나 화를 풀지 않고 아빠의 눈길을 외면했던 나의 <시위> 때문이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삼남매 가운데서 아버지한테 뺨맞은 자식은 내가 유일할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동생들 만나면 한번 물어봐야겠다.

지구온난화 탓도 있지만 주거여건을 따져봐도 확실히 그때 겨울이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 마루엔 널빤지가 깔려 당연히 난방이 안돼 추운 겨울날 맨발로 방에서 나와 디디는 것이 고역이었던 그 옛날의 한옥은 당연히 세수도 마당 수돗가에서 엄마가 솥에 데워놓은 더운물을 떠다가 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에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처럼 들릴 삶의 모습들이 불과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란 게 놀랍다. 자다 말고 내복 바람으로 옥외 화장실에 가야하던 그 때의 매서운 추위를 떠올리며 요즘 추위쯤 <요까짓것> 코웃음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본성이 간사한지라 그게 잘 안된다. 추운 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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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티의 역사

추억주머니 2009. 12. 11. 22:57

누가 그랬다. 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엠티를 다니냐?
그러고 보니, 멤버십 트레이닝의 약자라는 <MT>를 다닌 역사가 그 이전 역사보다 길다. 하하하.

첫 엠티. 열아홉살때. 대성리. 청량리역에 모여 기차타고 가서 허름한 민박집에 묵었다. 
오티, 엠티 같은 데 가면 운동권 학생들한테 <포섭> 당하거나, 위험한 <혼숙>이 자행되는 공간이라며 절대 못가게 하시던 구시대 아버지를 설득하느라 애를 좀 먹었었다. 나중에 학생들 엠티에 한번 쫓아가본 아버지는 문제의 <혼숙>이란 것이 운동장 만한 방에 수십 명이 떼로 모여 한쪽에선 술마시다 자고 한쪽에선 고스톱치고 한쪽에선 기타치며 노래부르는 요상한 놀이의 장임을 깨닫고는 두말 안하셨다.
여전히 청평, 강촌, 남이섬 등지를 벗어날 수 없었던 두번째, 세번째 엠티 때도 똑같았다. 청량리역이나 성북역에 모여 기차를 타고 가선 시설 조악한 민박집이나 방갈로 같은 데서 죽어라 술퍼마시며 놀다 돌아왔다.

방학을 맞아 동아리에서 떠난 엠티는 장소가 좀 더 멀어졌다. 첫 동아리 엠티는 역시나 너무 멀고 기간도 길다고  집안 반대에 부딪쳐 못가고 스무살 때 비로소 동아리 엠티를 따라갔다. 3박4일짜리 동해안. 망상 해수욕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속버스 타고 가서 무려 <텐트>에서 잤다. 동아리가 개강하자마자 공연을 해야하므로, 체력단련한답시고 밤늦도록 술먹이고는 새벽에 깨워 백사장을 달리게 했다. 3박4일간 찍은 사진을 보면 다들 팅팅 불어 가관이었다. 

첫 직장에 들어가자 고급스러워진 엠티 장소는 드디어 콘도 또는 호텔. 상사들이 모는 자동차에 나눠타고 움직였다. 숙소는 호화로워졌지만 고기 먹고 밤새 술마시다 퍼지는 건 똑같았다. 회사 규모가 커지니 슬쩍 이름도 <워크샵>이라고 바뀌고 아예 관광버스를 몇 대씩 대절해 아무도 운전 안하는 건 좋았지만, 회사에서 출발하자 마자 버스 안에서부터 술을 마셔대는 분위기였다. 거의 20시간 술자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다행히 돌아오는 관광버스 안에선 다들 쓰러져 잠들어 더는 술권하는 이가 없었지만, 간간이 속이 아파 배를 움켜쥐고 괴로워해야 하는 후유증이 꽤나 심했다.

회사생활을 관두고서도 엠티 기회는 이어졌다. 관계가 돈독해진 몇몇 출판사에선 번역자 관리 차원에서 직원들 엠티 때 끼워주었다. 스스로 가고 싶을 때도 있었고 가기 싫을 때도 있었지만, 일 끊길까 염려되어 웬만하면 따라갔다. 숙소는 펜션 아니면 콘도, 호텔. 장소가 무려 제주도일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가기도 해서 신났다. 허나 가서 하고 노는 건 역시나 고급 안주에 밤새 술마시기. 세상은 안변하더라.

늙다리 대학원생 시절에도 엠티가 있더라. 딱한번. 요샌 학부생들도 우아하게 콘도 같은데로 엠티 간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다. 양평이었던가 십수년 전 학생때와 다르지 않던 허름한 민박집. 그나마 대절한 관광버스를 타고 가긴 했다. 밥먹고 술마시고 캠프파이어 하고 레퍼토리도, 다음날 숙취까지 기시감이 들 정도로 똑같았다.

그 뒤로 이래저래 만난 이들과 좀 각별히 친해지고 싶을 땐 어김없이 엠티를 떠났다. 장소도, 탈것도, 먹거리도 전보다 다양해졌다. <여행>에 방점이 찍히는 게 아니라 <엠티>에 방점이 찍히는 짧은 나들이는 확실히 장소보다 사람이 더 기억에 남는다. 매번 <구경>보다는 먹고 마시고 수다떨고 앉은 자리에서 최대한 즐기는 게 엠티의 골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딘가에 모여 밤새 수다떨며 술마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역시나 엠티는 그와는 다른 <설렘>을 동반한다. 소풍 전날 가방에 간식을 싸며 설레던 어린시절처럼, 오늘도 뭔가 간식을 싸야할 것 같은데 겨우 1박2일에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 그냥 설렘만 즐기고 있다. 이 감미로운 설렘을 위해서라도 힘 닿는 때까지 엠티를 따라다닐 테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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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날짜보다 음력이 더 편한 할머니 두분이랑 오래도록 가까이 산 데다 이젠 울 엄마도 할머니가 되어 매일 양력과 음력이 나란히 적혀 있는 달력을 들춰가며 날짜계산을 하는 터라 며칠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오늘이 칠석이라고. 절에선 칠석(음력 7월 7일이다)부터 백중(음력 7월 보름)까지 계속 특별기도가 있는 터라 왕비마마는 원래 절에 가셨어야 하는데 마침 안과 정기검진일이라 못 가게 된 게 엄청 아쉬운 모양이었다.
왕비마마의 아쉬움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오늘도 과연 비가 내릴 것인가 그것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방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칠월칠석은 견우랑 직녀가 일년에 딱 하루 오작교를 타고 만나는 날이고, 그래서 기쁨의 눈물이 비로 내린다는 전설을 나는 전래동화책을 보기 이전에 까마득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것 같다. 한 여름 낮잠을 자려고 할머니방에 누우면 친할머니는 잠이 쉬이 오도록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겨 주시거나 부채질을 해주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평안북도 고향에 사실 적에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었는데 계집애라 학교에 못가게 하는 바람에 오라버니들 책 읽는 걸 귀동냥으로 들으며 독학으로 대강 한글을 익혔다는 이야기며, 몸종 거느리고 꽃가마를 타고서 시집 오던 날 이야기, 한량 남편의 기생질 사건 같은  할머니의 실제 경험담도 있었지만, 견우 직녀 얘기랑 햇님달님 이야기 같은 옛날 이야기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곧 진리이기도 했지만, 칠월칠석엔 정말로 해마다 비가 내려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비가 조금 내리면 기쁨의 눈물이라 살짝 울고 마는구나, 오늘처럼 장대비가 내리면 이번엔 그동안 서로 헤어져 지내는 게 힘들어서 서러움의 통곡을 하나보다, 하는 할머니의 부연설명까지 곁들여지면 어찌나 더 실감이 나던지. 여름마다 옥수수를 사다가 쪄먹을 때 옥수수 끄트머리에 달린 수염을 뜯어내면서도, 햇님달님 호랑이가 마지막에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 옥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옥수수 수염이 빨갛게 됐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는 호랑이 피가 묻어 색이 변했다는 옥수수 수염을 단 한오라기도 남겨놓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왈칵 울음을 쏟아내던 견우와 직녀가 진정했는지 이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쳤다. 언젠가는 칠석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가 해가 쨍 났다가 저녁무렵 다시 비가 내린 적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날 직녀랑 견우가 만나서 기뻐 울다가 행복해져서 해가 났었는데 저녁때 다시 헤어져야 하는 게 슬퍼 또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하셨고, 종일 비가 안 내려 이상하다 싶었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린 어느해 칠석엔 아마 까마귀랑 까치가 게으름을 부려서 오작교를 늦게 만들어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10여년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에겐 참 늘 위대한 분이었던 우리 할머니, 이제 돌이켜보아도 정말 참 대단하시다. 할머니가 소싯적에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든, 당신이 직접 꾸며내신 이야기였든 칠석날 하나에도 손녀딸에게 이토록 소중한 추억과 다양한 이야기를 남겨주셨다니.
오늘따라 눈물나게 할머니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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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추억

추억주머니 2009. 6. 11. 18:11

춘천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과 동경의 장소다. 김현철의 노래 <춘천가는 기차>가 나오기도 훨씬 전인 고3 여름방학때, 두 친구와 작당하여 아침부터 이어지는 따분한 자율학습을 과감히 제끼고 난생 처음 춘천행 기차에 올랐었다. 그 전에는 땡땡이라고 해봤자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떡볶이를 사먹는다든지 조금 일찍 달아나는 정도였을 뿐, 하루를 온전히 빼먹는 땡땡이는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전날부터 몹시 마음이 설렜다. 청량리역에서 만나 일단 성북역까지 가서는 거기서 춘천행 기차를 타야했는데, 두어시간 남짓한 그곳이 나에겐 마치 한반도 끝에 있는 부산만큼이나 심정적으로 먼 곳이라 생각되어 대단히 짜릿한 일탈로 여겨졌다. 이미 아는 오빠를 따라 춘천에 몇번 다녀본 전적이 있는 친구의 안내대로, 춘천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간 공지천 주변을 거닐다 호숫가에 서 있는 <이디오피아>라는 카페에서 볶음밥과 빙수를 먹은 뒤 돌아오는 기차를 탄 것이 여행의 전부였지만, 우리 셋은 너무도 행복했다. 기차를 타고 오가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남한강과 북한강 주변의 경치도 아름다웠고, 완행열차에서 사먹은 삶은달걀도 감동의 맛이었다.
그날의 추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나와 친구들은 남은 학기 내내 두고두고 춘천 기차여행 이야기를 되뇌다, 학력고사를 보고 나서 졸업 전에 다시 춘천으로 이별여행을 떠났다. 진학을 하든 재수를 하든 단짝 친구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서글퍼하면서. 두번째 춘천 여행에선 꽝꽝 얼어붙은 소양강댐에도 구경했고, 새하얀 눈밭으로 변해버린 공지천을 배경으로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열여덟살이던 당시 춘천은 나에게 짜릿한 일탈의 공간이었고, 어른을 동반하지 않고 내가 홀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고, 여러가지 매력 넘치는 기차여행을 누릴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춘천 기차여행을 큰 자랑거리로 떠벌였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경한 친구들에게 겨우 두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춘천은 일탈의 장소이긴커녕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다녀오거나 매일 통학할 수도 있는 지척의 도시였다. +_+ 그나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친구 하나가 동조해주는 바람에 눈이 펑펑내리던 어느날 충동적으로 다시 춘천행 기차를 탔던 날, 우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버스가 올라가지 못하는 소양댐을 굳이 걸어서 올라갔고 언 손을 호호 불며 맛없고 쓴 커피를 마시면서도 행복했다. 그날 처음 춘천 닭갈비라는 것을 먹어보았는데, 종일 눈에 젖어 덜덜 떨다가 들어가 먹어본 그 맛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몇년에 한번씩 춘천엘 간 적은 있지만 죄다 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춘천가는 기차>가 상징하는 춘천여행의 묘미와 추억을 더는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완행열차 비둘기호는 사라져버렸어도 언제고 한번 꼭 기차를 타고 춘천엘 가봐야지 막연하게 마음은 먹었지만, 강원도 여행길에 일부러 들르지 않는 한 춘천 자체를 찾아갈 일도 아예 없는 편이어서 춘천은 점점 내 추억의 창고에서도 깊숙한 구석쪽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낭보가 들려왔다. 판화가인 막내고모가 춘천에서 열리는 강원아트페어에 전시를 한다는 소식이었다. 기차여행은 못하겠지만 간만에 춘천 땅도 밟아보고 고모 그림도 보고 닭갈비도 먹고 일석삼조, 일타삼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지난 7일, 왕비마마를 모시고 춘천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당연히 설레고 들떴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가는 길에 가평 찰옥수수도 사먹을 생각을 하면, 막히는 길쯤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왕비마마와 공주 일행이 납시었는줄 온 세상이 알았는지 전날엔 미치도록 막혀 되돌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는 춘천행 국도도 뻥 뚫려 오히려 병목현상이 나타나는 곳마다 서 있는 옥수수 장수들을 만나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뜨겁고 매운 닭갈비를 먹기에 딱 좋은 날씨여서, 이번 춘천 여행에선 정말로 눈과 입과 위 모두 흐뭇하게 대접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에서도 가끔 닭갈비를 사먹긴 하지만, 역시 닭갈비는 춘천에 가서 먹어야 제맛이란 진리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또 언제 춘천엘 가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일탈의 공간이었던 춘천에 처음으로 가족들을 동반하고 간 이번 여행의 의미는 또 다른 추억의 겹으로 남아 돌이킬 때마다 흐뭇할 거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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