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추억주머니 2011. 1. 28. 21:34

사춘기에 대한 까마득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착하게' 보냈다고 생각된다. 갑자기 와락 화가 나거나 슬펐던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크게 반항기를 내보일 만한 형편이 아니란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어려서 잘 몰랐던 것인지 정말로 무탈하게 넘어갔던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암튼 지긋지긋할 정도로 역사가 오래 된 엄마의 우울증을 목격한 기억이 없던 반면, 중학생때 목도한 엄마의 심한 우울증은 너무 괴롭고 난감해서 나까지 속을 썩이면 절대로 안된다는 다짐을 불러올 정도였다. 그래도 중학시절의 반항 사건이 두 가지 정도 남아있는 걸 보면, 내가 기억에서 지워버려서 그렇지 사춘기의 엇나감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왕비마마의 증언에 따르면 조잘조잘 노상 집에 와서 학교 얘기를 털어놓던 애가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만 보지 않으면 한숨을 푹푹 쉬는 정도였을 뿐, 이제부터 고백하려는 거짓 일기장 사건 말고는 달리 속썩이는 일이 없었다니 앞으로도 나는 계속 '대체로 착한' 사춘기 소녀였다고 주장할 작정이다.

거짓 일기장 사건은 중학교 1학년땐가 난생처럼 수련회라는 걸 가면서 생겨났던 일이다. 이름도 우스운 '간부 수련회'라는 걸 며칠 가야했는데,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가는 것도 모자라 준비물에 '잠옷'이 있었다. 요즘 수학여행 같으면 그냥 '편한 옷' 정도로 적혀 있었을 테고, '잠옷'이라고 적혀 있었어도 그냥 편한 옷 아무거나 챙겨가면 되겠거니 여겼겠지만 고지식한 나에겐 '잠옷'이라는 품목이 반드시 지켜야할 규정으로 생각됐다. 물론 당시 나도 집에서 입던 파자마 형태의 낡은 잠옷이 있었다. 다만 그게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입던 거라 소매와 바짓부리가 모두 껑충하게 7부쯤으로 짧아졌고 낡아서 프린트도 다 흐려진 쪼글쪼글한 몰골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집에서 입는 건 상관 없지만 그런 잠옷을 학교 수련회에 가서도 입고 자야 한다니, 나로선 앞이 캄캄했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그 참에 잠옷을 새로 사달라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집안 형편은 갖고 싶은 것을 아무때나 불쑥 사달라고 말해선 안되는 수준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선 뜻밖의 지출인 수련회 회비도 은근히 부담스러워하시는 마당에 잠옷이라니. 그런데도 나는 정말이지 헌 잠옷을 수련회에 가져가기가 싫었고, 결국 잠옷 사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에 영악하게도 일기를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일기 내용은 빤했다. 수련회에 헌 잠옷 입고 가는 게 정말 창피해서 수련회도 가기 싫을 정도지만, 부모님한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새 잠옷을 사달라고 하는 건 큰딸로서 할 짓이 아니다. 다른 애들은 다 새 잠옷을 사온다는데 아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구 저쩌구... 집안 사정을 크게 고민하는 (나름)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한 거다. 그렇게 새 공책에 딱 한장 일기를 써서 책상에 올려놓고 학교를 다녀와보니(원래 쓰는 비밀 일기는 늘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녔었다 ㅋ)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그날 저녁 연분홍색 바탕에 진분홍 땡땡이가 찍힌 예쁜 새 파자마를 내밀었다. 물론 엄마는 내가 새 잠옷을 얻기 위해 딱 한장짜리 거짓 일기장을 '일부러' 책상에 두고갔음을 알았고, 그 때문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못된 기집애, 그냥 사달라고 할 것이지... 라면서. 그렇게 해서 생긴 새 잠옷을 수련회에 들고 가긴 했지만, 나는 두고두고 그 잠옷을 입을 때마다 양심에 찔려서 괴로웠고 엄마 역시 잊을 만 하면 친척들 앞에서도 가짜 일기장을 언급하며 내 약점을 공략했다. 쟤가 은근히 영약한 애예요.... ㅠ.ㅠ

이후 나의 사춘기가 평탄했던 건 거짓 일기장과 잠옷으로 생겨난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내가 또 한번 눈물을 쫄쫄 흘리며 괴로워했던 사건이 있었으니, 그 또한 금전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주말마다 특별활동을 상당히 심도 있게 운영했고, 미술반이던 나는 격주 토요일마다 늘 이젤과 화구상자를 들고 경복궁 등지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별도로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역시나 가끔 고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던 막내고모를 따라 몇번 어깨 너머로 배운 수채화 기법을 '흉내'내봤더니만 교내 사생대회에서도 막 상을 주질 않나, 학교 대표로 뽑혀서 '서부지역' 중학 사생대회에 파견되질 않나 결과가 꽤 우쭐했다. 그러다 드디어 중3때 학교 축제일. 그간 교내 및 교외 사생대회에서 지나치게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탓에 나는 그림을 세 개나 전시하게 되어 개인이 내야 하는 표구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림 하나 당 5천원쯤 했던 것 같은데(당시 친구가 다니던 미술학원비가 한달에 2만5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꽤 큰 돈이었다) 축제 기간 동안에 그림을 걸려면 각자 자기 그림을 인사동이나 홍대앞 표구상에 가져가서 유리액자에 끼워 제출하거나, 학교에서 단체로 표구를 맡기도록 그림당 돈을 내야 했다. 집에 와서 부모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대번에 엄마는 꼭 그림을 전시 해야하느냐고, 그냥 액자 없이 '판떼기' 같은 데 붙이거나 이젤에 올려놓으면 안되는 거냐고 물었다. 액자 3개 값이면 한두달 치 쌀값이라는 둥... 결국 나는 알았다고, 전시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는 꽝 소리 나게 방문 닫고 들어가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하필 우리집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동네 최고 부잣집 딸이라 (당시 마당에 수영장이 꽤 크게 있고,  뜰 한 구석엔 팔뚝보다 큰 잉어들이 노니는 연못이 있었으며, 기사 딸린 검정색 세단이 가끔 토요일에 나와 친구를 경복궁으로 실어 날라주기도 했다) 그 친구는 일부러 인사동 표구상에서 최고급 액자로 표구를 맡겼다는 걸 알기에 내 처지가 더욱 비관스러웠던 것 같다.

학교축제일까지 근 열흘쯤 그야말로 나는 학교 다니는 게 죽을맛이었다. 그림 위치 선정 외에도 축제때 미술반이 해야할 일이 꽤 많아 이런저런 잡일에 동원되느라 방과후마다 미술실에 가면서도 나는 미술선생을 계속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 표구비가 없어서 그림 전시를 안하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미술반 아이들은 대개 미대 전공을 꿈꾸는 넉넉한 집안 아이들이라, 이젤과 화구상자도 고모가 쓰던 낡은 걸 물려받아야 했던 나 말고는 표구비로 전전긍긍하는 애들이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나는 마치 가난 때문에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그림천재라도 되는양 오만상을 떨었을 게 분명하다. 크크크. 집에선 입을 꾹 다물고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부모님을 축제에 초대하는 가정통신문도 당연히 전달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걸지도 못하는데 뭣하러! 물론 나 혼자 심통을 있는대로 부리고 다니긴 했지만, 아마 무심한 엄마는 그림 표구비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지 마는지, 학교 축제가 언제인지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네 엄마는 예의 그 검정색 세단을 타고서 축제 첫날 큼지막한 꽃다발과 함께 왕림하여 친구 그림 앞에서 기념촬영까지 하셨지만 말이다. ;-p 아, 맞다. 약간의 감동스러운 반전이 있기는 했다. 표구비를 못 냈으므로 당연히 내 그림은 한 개도 전시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놀랍게도, 미술실과 교무실 앞 복도엔 미술선생이 전시를 명했던 내 작품 세개가 모두 걸려 있었다. 비록 삐까번쩍하게 고급 액자로 새로 표구를 한 건 아니었지만, 미술실에 돌아다니는 옛날 그림 액자를 재활용해 미술선생이 내 그림을 전시해주었던 것. ㅠ.ㅠ 표구비 못내서 내 그림은 없을 거라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 얘기해놓았다가, 막상 내 이름표가 달린 그림을 마주하고 느낀 감동에다 이튿날 친구들이 그림 밑에 붙여준 장미꽃까지 곁들여져 중3 때의 추억은 신파스러우면서도 퍽 아련하게 남을 수 있었다.

쓰고 보니 사춘기 반항담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심통부린 이야기가 다 인것 같아 민망하지만, 암튼 세상 고민을 혼자 다 하는 것처럼 괴로워하던 나의 사춘기는 중3때로 막을 내렸던 것 같다. 고1때부터는 걸핏하면 병나는 엄마 대신 아침밥 챙기고 동생들 도시락 싸주고 그러느라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흔히들 하는 얘긴데 옛날 우리들은 나처럼 대개 사춘기가 짧고 굵게 금방 지나갔단다. 옛날 세대들이 확실히 삶이 덜 여유로워 철이 빨리 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지금보다 부모의 간섭이 심하지 않아 반항할 일도 덜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정답이야 모를 일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사춘기 성향을 보이는 요즘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조카를 봐도 그렇다. 5학년때부터 이미 발칵발칵 성질을 부리고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걸 보며 벌써 사춘기에 접어들었나 보다는 심증을 가졌는데 점점 아주 가관이시다. 제 부모도 그렇고 나도 왕비마마도 본격적인 공주의 사춘기를 두려워할 정도다. 원래 사춘기 때는 뇌의 구조와 기능부터 달라서 번쩍번쩍 아무때나 스파크가 일고 번개가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뇌관 같은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는 어른들의 이해가 필수적이라던데, 여전히 철도 덜 났고 수시로 감정의 기복이 많은 나로서는 이해는커녕 제법 참고 지켜보다 덜컥 싸움을 할 태세가 되고 만다. +_+ 요번에 방학맞이 공주의 왕림기간 동안, 정말이지 작년 여름방학과는 다른 양상에 나도 왕비마마도 어쩔 줄을 몰랐다. 원래도 여기 오면 제멋대로 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으므로, 그러려니 했는데... 암튼 이번엔 확실히 받아주기 어려운 상황들이 많았고, 특히나 왕비마마께서 마음 상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심지어 기물파손(?)도 한 건 있었을 정도다. ㅎㅎㅎ 왕비마마께 가장 긴요한 물건인 간단형 리모컨을 공주께서 집어던져 망가뜨렸는데, 내가 중재자로 나서야 했을 정도로 할머니와 손녀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걸 보며 나는 더럭 겁이났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던 나의 공주는 이제 없구나 싶기도 하고. 원래는 심성이 착한 아이니까 자기도 주체 않되는 감정의 기복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방법을 스스로도 발견하리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고모는 언제나 네편이 되어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해야했던 조카의 사춘기가 과연 어떻게 넘어갈지... 그나마도 여자애들은 좀 나은 편이고, 남자애들이 더 문제라는데 주르륵 공주 아래로 셋이나 되는 사내녀석들은 또 어찌 사춘기를 버텨나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성장과정이므로, 뭐 고민해봤자 지켜보는 것밖엔 할 일이 없겠지만 취미가 조카사랑이라고 주장해온 얼치기 어른 고모에겐 벌써부터 큰 두려움이다. 지금까지도 애들 버르장머리 없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비난을 계속 들어왔는데, 설마 조카들의 사춘기도 나 때문에 더욱 힘겨워지는 건 아니겠지? 어려서도 커서도 조카들이랑은 늘 속을 털어놓는 멋진 고모가 되는 게 꿈인데, 인품이 딸려서 과연 그런 경지에 오를 수나 있을지... 암튼 부모노릇엔 댈 것도 아니지만 오지랖 넓은 고모노릇도 뭐 쉽지는 않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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