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까마득한 학교 후배 하나가 우는 소리를 했다.

"언니, 영문과 나와서 이렇게 취업이 어려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다른 과를
선택할 걸 그랬어요.."

입학할 때부터 학과를 결정했던 나와 달리
요즘 유행하듯 학부제로 입학해서 2학년 때인가 제일 인기 높은 영문과를 선택했던 후배는 착실히 학점관리도 했을 테고, 영어연극반에서 배우와 연출도 맡았을 만큼 활동도 많았으니 취업에 별 어려움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주변을 돌아보면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작년에 졸업하고도 백조나 백수 생활을 하는 지인들이 꽤 된다.
학교를 다니고 있더라도 4학년이 되기 전엔 일단 휴학이 필수라고도 했다. 취업준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 어학연수든, 취업공부든 미리 해두어야 한다나.
그나마 대학원 후배들은 석사 마치고 나서 계속 공부를 하든, 취업을 하든, 엄연한 직업인 전업주부로 활약하든지 하고 있으니 청년실업자의 대열에 속한 건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절반쯤은 현재의 직업과 처지에 불만을 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영문학" 전공이라는 공통적인 한계를 지닌 사람들에게 주어진 미래의 경우의 수는 너무도 좁기만 하단다.

자기 직업에 100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이 사실 몇명이나 되겠냐고 위로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와는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고등학교때부터 국문학자가 되고 싶었고, 특별히 가고 싶은 학교도 따로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 끝에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교원자녀 혜택이 있는 학교엘
입학했고  "문과대학에서 제일 성적이 높고 취직이 잘 되는 영문학과"를 가야한다는 부모님의 강압에 따라 영문도 모르고 전공을 정했다.
사실 입시 즈음 나는 "재수필수"를 외치며 단식투쟁 중이어서 ^^;;
대입원서를 쓸 때 방문 잠그고 집에 있다가 담임과 아부지의 독단적인 행동에 허를 찔리고
말았었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게 "영어로 밥벌어먹고" 있으니 그분들의 결정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 바람대로 국문과를 갔더라면 아마도 기껏해야 중학교 국어선생 정도로 살고 있지 않겠나 싶은데, 누군가를 가르치는 게 싫어서 과외 알바도 거의 한 적 없는 내가 교사를 직업으로 평생 살아야 했다면 늘 불행하다 외치지 않았을까?  ㅎㅎ

암튼...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 나라 경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정말로 영문과를 나오면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토익 시험 따위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주제에 대기업 공채에 원서를 넣었다가 서류전형부터 쓴맛을 보기는 했지만, 그런 걸 미리 준비해둔 친구들은 더러 대기업에 입사를 했고
별 준비 없이 4학년 내내 미래 걱정을 안주삼아 매일 술이나 마셔대던 나 역시 4학년 가을, 취업이 결정돼 11월부턴 회사로 출근을 했더랬다.

영문과 구성비로는 유례없이 여학생보다 4배나 많았던 남자동기들이 군대 다녀와서 3년 뒤 졸업을 할 때도 희한할 정도로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직장인 대열에 합류했고, 최악의 경우(?)가 학원강사로 빠지는 케이스였던 것 같다.

늘 시국이 시끄러웠던 80년대 중간에 입학했던 친구들의 현재 직업을 따져보면
교수, 교사, 시간강사, 학원강사, 학원원장, 사업가, 자동차 세일즈맨, 주식 분석가, 무역회사 직원, 그냥 회사원, 은행원, 전업주부, 번역가, 고액과외 선생, 마을버스운전기사(전직 학원강사였다 -_-;;), 목사, 스님(!), 외교관, 기자 따위가 있고
지금은 직업이 바뀌었지만 스튜어드나 스튜어디스인 친구도 있었다.

따져보면 대강이나마 전공을 살려 직업을 선택한 경우는 절반도 안되는 듯하니, 영문학이라는 전공이 우리 때는 취업의 걸림돌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학 후배들 뿐만 아니라, 몇몇 대학원 후배들의 말을 들어보면
영어는 누구나 잘해야 하는 필수 자질이 되고 보니,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는 영문학 전공은 전혀 취업에 도움이 되질 않을 뿐더러 심지어 석사학위는 '가방끈이 너무 길다'는 걸림돌로 작용한다고 한다.  

연일 날아오는 취업 낙방 소식에 기운이 쭉 빠져 있는 후배의 푸념을 들으며
나 역시 기분이 암울해졌다.

나는 지금도 대학을 다니던 4년이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황금기였다고 여기며
그 4년이 단순한 취업준비를 위한 준비기간이란 생각은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1학년때부터 이미 장기적인 취업 준비를 착착 해두지 않으면
졸업 후 고스란히 실업자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대학원 다니며 조교하던 시절
내가 얼핏 잘못 체크한 출석표를 눈에 불 켜고 확인하며 펄펄 뛰던 학부생들의 태도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으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20대 후반에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입시준비에만 바빴을 19살, 20살 아이들이 어떻게 미래를 짐작하고 계획하며 전공을 선택하고 직업을 준비할 수 있을까?
인생의 행복과 상관 없이 단순히 '취업'과 '돈버는 것'이 목적인 대학생활은 과연 얼마나 낭만적이고 알찰 수 있을까?

내 주변엔 30대 후반이나 늦게는 40줄에 들어서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며
다시 굳은 머리를 두들겨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도 있는데...
긴 인생에서 겨우 3, 4년간 정해진 대학 전공 따위로 삶이 좌우되는 건 정말 너무하다.
최소한 그들에게 미래에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도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일년 내내 아무 때나 동기며 후배들 취직턱 얻어먹으러 다니던 그 때가 그립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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