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짓기

투덜일기 2011. 12. 9. 21:05

쿠쿠밥솥이 고장났다. 쌀이 안익는 건 아닌데, 수증기가 다 옆으로 새는 바람에 푸실푸실 끈기없는 낱알 같은 밥을 만들어냈다. 2년전에도 겪어본 일이라 AS 신청을 해 패킹을 갈아야겠군, 의연하게 중얼거리고는 실로 간만에 냄비 밥짓기에 도전했다. 마음 같아선 그냥 또 쿠쿠밥솥에 쌀을 앉혀 한번 더 끈기없는 밥을 먹으면 좋겠건만, 왕비마마가 별로 어렵지 않다며 냄비밥을 명했기 때문이다. (아 그러면 엄마가 직접 하시든지! +_+ 아마 엄마도 냄비밥을 지어본 건 20-30년을 넘기지 않았을까. 쳇)

백미, 현미, 흑미, 서리태, 보리, 기장쌀, 율무까지 죄다 쌀독에 섞어놓은 잡곡인지라, 제일 바닥이 두툼한 냄비에 쌀을 씻어 앉히고 (까마득한 옛날 놀러가서 코펠에 밥할 때 압력솥보다 밥물 넉넉히 두던 걸 떠올려가며) 밤새 두었다가 무려 다섯시반에 일어나 '새벽밥'을 지었다. 한시간 내 곁에 붙어서서 불조절을 한 덕분에 태우진 않았지만 결과는 젠장, 죽밥이었다. 삼층밥, 꼬두밥보다는 그래도 진밥이 낫지 홀로 위로하며 상전(?)에게 새벽밥을 해먹이고 나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취사예약 버튼 눌러놓고 잊어버리면 그만인 쿠쿠밥솥의 힘과 편리함이 실로 대단한 것이었구나. 보온밥통이 있거나 없거나 옛날 엄마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솥이나 냄비에 밥을 짓고 도시락까지 몇개씩 싸주었는데, 그 고된 노동을 최소 십수년씩 어떻게 견뎠을까. 내 경우 아버지가 보온밥통에 들었던 헌밥을 드시고 출근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도시락에 누렇게 변색된 헌밥을 싸간 적은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이야 해놓은 밥 금세 얼렸다가 전자렌지에 돌리면 새밥처럼 되살아날 뿐만 아니라, 종류별로 햇반도 나오는 시절이지만(그나마도 급식을 하니 특별한 날 아니고선 도시락 쌀 일도 없겠다만;;), 옛날엔 정말로 새벽마다 부엌에서 솔솔 풍겨오는 밥짓는 냄새를 맡으며 어렴풋한 아침 잠에서 깨어나곤 했던 것 같다. 

하기야 엄마가 새벽밥을 지어주면 뭐하나. 중학생 때까지는 꼬박꼬박 밥상에 둘러앉아 다같이 아침밥을 먹었지만, 등교시간이 훨 빨라진 고등학생 때부턴 밥보다 잠이 더 중요하다며 아침을 거르는 대신 5분, 10분 더 자는 쪽을 택했었다. 정 배고프면 학교 올라가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꼬마김밥이나 못난이 만두를 사먹거나, 2교시 끝나고 도시락 까먹기를 해도 된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엄마는 그래도 집밥이 최고라며 집에서 들기름 발라 재고 구운 김(사실 당시 김 재는 담당은 바로 나였다 뭐;;)에 싼 밥덩이 몇개를 접시에 담아 헐레벌떡 등교준비를 하는 내방에 가져다주며 눈을 흘겼었다. 그렇면 또 난 옷 갈아입고 책가방 싸면서 희희낙락 낼름낼름 주워먹었으니 참 얄밉기도 했겠다.

어쨌거나 밥솥은 AS를 신청해 해결했으므로 난데없는 냄비밥 짓기는 한번으로 끝인데, 냄비 하나 가득 만들어놓은 죽밥은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 그나마 위안은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밥에 물 부어 끓여먹으면 퍽 맛있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계속 전기압력밥솥만 쓰면서 일부러 누룽지를 만들 수도 없어 그게 아쉬웠는데, 뜻밖의 고장으로 약간의 삽질과 고생은 있었지만 얻는 것도 있긴 하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니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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