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잘하세요'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11.08.25 분노하라 INDIGNEZ-VOUS! 12
  2. 2011.08.12 사이시옷이 기가막혀 10
  3. 2011.07.11 엄마가 달라졌어요 18
  4. 2011.07.06 모르겠다 6
  5. 2011.05.30 으으음... 4
  6. 2011.05.25 그녀들은 없다 13
  7. 2011.04.14 무명 4
  8. 2011.04.08 때문이야 15
  9. 2011.01.07 그놈의 공부 20
  10. 2011.01.02 '-대'와 '-데' 10

<전세계를 감전시킨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 때문이라기보다는(띠지에 적힌 글귀다) 애당초 이 책에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표지 포함 34쪽에 불과한 얄팍한 이 원서 한권에 국내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선인세가 만오천 유로까지 올라갔다는 소문을 들었던 게 주효했다(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이 정도 분량의 원서라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을 감안할 때 선인세는 5천 유로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과연 그런 책이 팔리나? 출판사들 미친 거 아냐? 하기야 선인세 몇억도 막 베팅하다가 퍽퍽 부도나 넘어가는 출판사가 어디 한둘인가. 한심하다...

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옮김/돌베개/2011

그 상황 그대로였다면 나는 괜스레 심술이 나서 아마도 이 책을 사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원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본 적 없지만[!] 선인세 10억을 주고 사왔다는 말만 듣고도 <1Q84>는 처음부터 독서제외 대상이었다. 참 별스러운 나의 독서취향^^;). 헌데 반전이라면 반전인 소식이 들려왔다. 저자를 설득한 끝에 돌베개 출판사(서경식 선생의 책을 비롯해 나도 돌베개가 내는 책들이 좋고 심지어 어쩜 그런 책들만 내는지 존경스럽다. 물론 출판사와 개인적 친분은 전혀 없고 그저 독자로서;;)가 최고액 선인세를 제시한 경쟁사를 물리치고 만 유로로 판권을 따냈다는 것. 만 유로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저항과 행동을 부르짖는 노투사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꺼이 책을 사들여 후딱 읽었다. (원서엔 없는 저자 인터뷰, 추천사, 역자후기를 붙여 프랑스 원서보다 두배 이상 분량을 늘였어도 불과 87쪽이다.ㅎㅎ) 

스테판 에셀은 1917년생이다. 우리나라 나이셈법으로 따지면 무려 아흔다섯.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운동 분야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단다.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합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 전쟁 이후엔 외교관으로 활약, 퇴직 이후에도 인권 및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이라는 것이 그의 약력이다. 예술애호가인 어머니 엘렌이 트뤼포 감독의 <쥘과 짐>의 실제 모델이라니, 결혼제도를 비웃는 그런 관계를 지켜보며 살았을 가정환경도 참 자유로운 분위기였을 것 같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대학생, 현직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일었을 때 사람들이 외친 구호가 상당수 이 책에서 인용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부당함과 차별에 분노하고 비폭력으로,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어찌보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원칙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새삼 노투사의 당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건 그 이야기가 탁상공론이 아닌 평생 현역에서 활동해온 운동가의 부르짖음이자,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이기 때문이다. 부당함과 차별의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상 정치쇼를 일삼는 딴나라당의 일꾼답게 사퇴 카드와 함께 눈물로 읍소까지 했던 서울시장의 주민투표가 무산된 어제, 사퇴 이야기는 쏙 빼고 딴소리를 하는 인간들의 면면이 하도 환멸스러워, 읽은지 한두달 지난 책을 새삼 꺼내들어 다시 읽었다. 이른바 한나라당 표밭이라는 강남 3구의 투표율과 대단한 차이를 보이는 가난한 자치구의 투표율을 보며, 타워팰리스 내부에 설치된 투표소의 경우엔 투표율이 60%라는 언론 발표를 보며 정말이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 사회엔 희망이 있을까? 왜 우리나라엔 이렇게 존경할만한 어르신을 찾아보기 힘든걸까.

화는 본디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는'(出) 것이라 했다. 다른 나라 어르신이긴 해도 분노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격려해주시니 계속 버럭버럭 분노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여기며 다시 책을 덮었다. 사라코지 덕분에 프랑스도 우리나라와 많이 비슷해졌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지만, 참 구구절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같이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 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10쪽)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중략)....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12쪽)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드물었다. (15쪽)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22쪽)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34쪽)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언론 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38-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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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원고의 맞춤법은 어디까지나 편집자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고는 하나, <손댈 데 없는 매끈한 원고>를 일단 목표로 삼으려면 맞춤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그간 잘못 알고 있었기에 민망했던 수많은 낱말들(째째하다/쩨쩨하다, 금새/금세, 궁시렁/구시렁, -데와 -대의 구별 등 무진장 많다!)이야 얼른 수긍하고 앞으로 잘 쓰면 그만인데, 원칙과 옳은 것을 알고도 도무지 마음에 안드는 게 현 외래어 표기와 사이시옷이다.

경음은 사회가 각박해진다나 뭐라나 해서 잘 못쓰게 하는 바람에 짜장면을 굳이 <자장면>으로 강요해왔으면서 또 왜 그리 예외는 많은지(일관성 없게 <짬뽕>은 뭔가?!). 태국과 베트남어는 경음 표기가 허용되고 왜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는 경음으로 표기하면 안되는가 말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불만(<흔히들 bulldog을 <불독>이라고 쓰지만 맞는 표기는 <불도그>라는 걸 아시는지? ㅠ.ㅠ 하기야 <핫독>이 아니라 <핫도그>니까...)은 나중에 기회되면 입에 거품 물며 따로 쓰기로 하고, 일단은 사이시옷 성토나 좀 하자.

국립국어원 온라인 사전을 퍼왔다.  

사이-시옷[---옫]사이시옷만[---온-]〕
명사」『언어
한글 맞춤법에서, 사잇소리 현상이 나타났을 때 쓰는 ‘ㅅ’의 이름. 순우리말 또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 가운데 앞말이 모음으로 끝나거나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ㄴㄴ’ 소리가 덧나는 것 따위에 받치어 적는다. ‘아랫방’, ‘아랫니’, ‘나뭇잎’ 따위가 있다. ≒중간시옷.

위에서 예로 든 나뭇잎, 아랫니, 아랫방을 비롯하여 <웃옷, 뒷방>같은 것들은 하도 오래전부터 사이시옷을 넣어 써왔으니 옳다고 보는 데 다들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칫국>도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북엇국, 감잣국>은 어떤가? 북어국, 감자국은 늘 끓여먹고 살아왔지만 <북엇국, 감잣국>이라면 먹기 싫어질 듯한 느낌마저 든다. -_-; 원칙에 따르면 순대국, 칼국수집, 떡볶이집도 <순댓국, 칼국숫집, 떡볶잇집>이라 써야 옳다.

뭐니해도 여름 내내 일기예보 보면서 내가 제일 싫어했던 표현은 <장맛비>. 그냥 편안하고 부드럽게 경음 발음없이 <장마비>라고 하면 좀 좋은가! 그런데 왜 꼭 저놈의 사이시옷 때문에 [장맏삐]로 발음해야 하느냐고!!! 장독대에 열어둔 장항아리에 들어갔다 튕겨나와 맛이 엄청 짜게 변한 (물론 말도 안 되지만;;) 비라면 모를까, 여름 장마 때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분명 <장맛비>가 아니라 <장마비>라 우기고만 싶다. 

최근 경악하며 발견한 사이시옷의 싫은 예 중 최고는 바로 <막냇동생>. 내 평생 <막내동생>이 옳은 말이라 알고 써왔는데 아니란다. <막내동생>이 [망내동생]으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나는 발음이라면 <막냇동생>은 낱말의 생김새부터, [망내똥생, (심지어는) 망낻똥생]이라는 발음까지 어쩐지 정 떨어지고 짜증나는 느낌이다. 

어차피 언어는 생명을 지니고 계속 변화하는 유기체이므로 특정 기관에서 시기별로 다수의 용례에 따라 원칙을 정하는 게 맞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지난 수십년간 맞춤법이 이리 바뀌었다 저리 바뀌었다 하는 것이라고 이해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기법이 바뀔 때마다 이상하게 시대를 역행해 퇴보하는 듯한 맞춤법이 꼭 있다. 많이 헷갈려서 그렇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원칙이라 여겨 특히 사이시옷을 미워하고 있었는데, 요번 <막냇동생>에서 정말 뒷목(봐라, 여기도 쓸데없이 사이시옷 등장. 허나 '뒷목'은 심지어 표준어도 아니다. '목덜미'의 방언이라고... 쳇.)이 쭈뼛했다. -_-; 아무리 원칙이라 해도 나는 앞으로 <장마비>와 더불어 <막내동생>을 절대 사수할거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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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좋은 칭찬도 계속 되풀이하면 짜증나게 마련인 것을 나는 병든 엄마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만 수년째 해대는 무서운 딸이었다. 아무리 반복해도 소용없는 엄마의 망각과 무심함을 간간이 대놓고 지긋지긋해하면서. 내가 하는 잔소리는 대략 이런 거다.

매일 매일 몸을 움직여 운동을 해야 한다.
과식은 금물, 식사는 천천히, 많이 씹어야 한다.
식후 곧장 드러눕는 건 역류성식도염으로 가는 지름길.
노상 못한다 못한다 생각하지 말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시도해봐라.
쓸모없는 인간이라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 말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면 되지 않느냐. (집안일 좀 도와달라는 뜻;;)
멍하니 TV 많이 보면 바보 되니까 책 좀 읽으셔라.
제발 TV 볼륨 좀 작게 틀어라...

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엄마가 내게 하는, 밤에 일하지 말고 일찍일찍 자라, 살 좀 찌게 많이 먹어라, 병원 가라, 따위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듯 엄마도 내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듣고 무시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내게 화를 내는 법은 없는데, 나는 엄마가 내 말 안듣는다고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실망스러워 아예 입을 꼭 다물고 대화를 거부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엄마가 칠순을 넘긴 노인이며 각종 성인병 더하기 우울증까지 갖춘 환자이므로 내가 더 많이 이해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자각은 혼자 반성하는 밤에만 찾아올 뿐, 막상 얼굴을 마주 대하면 짜증이 치밀었다. 지쳤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딸이 책으로 밥을 빌어먹는 사람이든 아니든 울엄마는 원래부터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젊은시절엔 드문드문 아버지가 들고오는 책을 함께 읽었고, 여성중앙 같은 월간지를 정기구독하기는 했어도, 라디오와 TV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만큼 열심히 독서하는 모습은 기억이 없었다. 내가 번역하는 책마다 증정본이 수북이 날아들면 자기도 읽어보겠다면서 괜히 한권씩 가져다가 화장대에 쌓아놓기는 열심히 하셨지만 읽는 기미는 전혀 없었다. 나도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어차피 엄마가 흥미를 갖고 읽으실만 한 책도 별로 없었고. -_-;;

구구단 외기보다, 화투치기보다 독서가 치매예방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책읽기가 복합적인 사고와 감각 활용을 요하는 고도의 두뇌활동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가뜩이나 정신 시끄러운 우울증 환자가 가만히 집중해 책을 들여다보는 게 쉬울 리 없다. 나 또한 예민함이 극에 달하면 활자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데, 왜 그걸 모르겠나. 그러니 더더욱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식사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TV와 함께 하는 엄마를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노친네들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TV라지 않은가.

같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문화센터를 다니며 뭔가를 배우고, 김치를 담가 자식들에게 퍼돌리고 한다는 엄마의 동창들 얘기에 그저 부러움만 품을 뿐이었다. 물론 손자손녀 육아에 허리가 휠 지경인 엄마의 친구분들은 왕비마마처럼 손가락 까딱 안하시는 울 엄마를 일견 부러워한다고 했다. ("얘, 너는 복 많은 줄 알아!") 하기야 나로선 엄마가 한달에 한번 동창모임에 홀로 외출을 하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일년에 못 나가시는 달이 절반 가까이니 원.

그러던 엄마가 최근 좀 달라지셨다. 지난 3월에 입원했을 때만 해도 100에서 7빼는 셈을 나보다도 더 잘하더니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지면서 7빼기 셈은커녕 구구단도 엉뚱하게 대답할 정도라, 나의 애를 태운 게 불과 한달 전이다. 단축번호로 잘 걸던 휴대폰 사용도 낯설어 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일단 TV를 꺼버렸다.(엄마 스스로도 '정신통일'이 되지 않는다며 드라마 따라가기도 어려워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불경 베껴쓰기를 '숙제'로 내주었다. 가뜩이나 악필인 엄마 글씨는 도저히 알아보지 못할 수준으로 흔들렸다. 손이 아프다며 오래 쓰지도 못했다. 차선책으로 나는 다시 책을 내밀었다. 질병이든 노화든 극복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어찌보면 아주 빤한 이야기를 담은 심리실용서였다. 내가 작년부터 입이 아프게 했던 잔소리도 거의 다 그 책에서 주워들은 내용을 써먹은 거였다. 노인용으로 활자가 크게 찍힌 책도 아니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엄마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조금씩 달라졌다. @.@

백문이 불여일독!? 어려운 용어도 많고 활자도 작아서 진도는 지지부진 형편없고, 자꾸 내용을 까먹어 읽은 데 또 읽고 또 읽고 한다지만, 엄마는 자기 이야기를 쓴 것 같다며 하루에 몇 시간씩 꼬박꼬박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더니 그 내용을 급기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내가 달력에 표기해가며 하던 화분에 물주기를 엄마가 하고 있다. (책에도 요양원 노인들에게 화분 가꾸기 책임을 맡게 하였더니 자존감과 삶에 대한 주도의식이 높아져 수명도 길어졌다는 사례가 나온다;;)
허리가 아파서 통 못하겠다던 설거지도 거의 하루에 한번은 엄마가 해주신다. (야호!)
약의 종류가 하도 복잡해서 어떻게 분류하는지 모르겠다던 아침약, 저녁약 통에 담기도 지난주부터는 엄마가 '혼자' 한다. (그간 약의 종류가 꽤 줄긴 했어도 여섯 칸으로 나뉜 플라스틱 통에 아침과 저녁 약을 종류별로 나눠 담는 건 정말 나도 귀찮은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담아놓고 먹어야 매일 약을 먹었는지 안먹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몇년째 세탁기 돌리는 법도 까먹어서 못하겠다고, 그러니 죽어야 한다고 울상이시더니만 한번 해보겠다고 나선 게 벌써 몇번째다. (비록 헹굼 추가 버튼은 내가 눌러야하지만 이게 어딘가!)
내가 절반도 먹기 전에 밥그릇을 비우던 엄마가 요샌 나보다 더 느리게 드시는 때가 많다. (결과적으로 체중도 꽤 줄었다!)

지금도 집안이 고요하다. 엄마가 책을 읽고 있다는 뜻이다. (고맙게도 아래층 똥개마저 오늘은 조용한 편이다) 집안의 소음 여부가 빈부의 환경 차이에도 기준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물론 부자가 아니지만, 고요함이 주는 평화에 마음이 다 푸근해져서 부자가 된 것 같다. 가장 감사하고 기쁜 일은 물론 엄마의 변화다. 당연히 냉랭하던 모녀관계도 엄청 호전되었다. 나는 남편이 아니니까 애기처럼 기대지 말라고, 온몸으로 밀어내는 제스처를 취하던 딸이 원하는 건 결국 늙은 엄마의 엄마노릇이었던 거다. 뜻밖에 책 한권으로 촉발된 모처럼만의 변화에 고무된 나는 엄마가 흥미를 가질만한 책이 또 뭐가 있을까 벌써부터 고민중이다. 노인용으로 활자 크게 나온 책이 뭐가 있는지 서점엘 나가볼까. 못된 딸년은 기회는 이 때다 싶어 계속 엄마를 부려먹을 생각만 키우고 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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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투덜일기 2011. 7. 6. 02:40

고등학교 졸업후 소식을 통 모르다 수십년 만에 만난 동창생. 많이 변했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워낙 인면치이긴 하지만 어디서 본듯한 낌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성형 때문이었다. 눈, 코, 뺨, 치열교정의 효과라고 했다. 나로선 도대체 시선을 어디 두어야할지 몰라 어색함을 무릅쓰고 일부러 계속 옆자리에 앉았다. 좀처럼 마주볼 자신이 없을 정도로 첫인상은 좀 무서웠다. 예전엔 눈매가 기름하니 순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거의 변하지 않은 목소리와 걸음걸이로 겨우 붙잡아낸 반가움이 긴 세월의 무게와 낯설음을 이기기까지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같이 만난 다른 친구에게도 고백했지만 내눈엔 조금도 예쁘지 않았고 나이보다 젊어보이지도 않아 이상했다.

그 친구의 성형이 좀 과할뿐, 내 주변에도 성형으로 '예뻐진' 이들이 서넛에 하나쯤은 있는 듯하다. 쌍꺼풀 정도는 아마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변화한 뒤에 만난 사람에겐 굳이 물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한다는데야 성형수술을 굳이 반대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전혀 성형 따위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친구가 떡하니 얼굴을 고치고 나타난 경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심 약간 실망스럽기는 했다. 나 역시 예쁘고 잘생긴 사람에 반색하는 외모지상주의자이면서 그 무슨 심술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눈을 째고 코를 높이고 턱뼈를 깎고 얼굴 사방에 주사바늘을 꽂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외모를 바꾸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배우나 모델이라면 몰라도;;). 심지어 수술후 더 미워진 경우는 정말 속상하다. 개인적으로 쌍꺼풀이 없는 길쭉한 눈매를 좋아하는데 하나같이 눈을 찝어 동그랗게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놓는 것도 못마땅하다.

요즘 젊은 남녀가 많이 다니는 곳에 가보면 인면치인 내눈엔 정말 똑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공장에서 규격 맞춰 찍어놓은 공산품처럼. 외모도 경쟁력이기 때문에 너도나도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뜯어고쳐야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린다. 오죽하면 성형공화국이 됐을까. 가뜩이나 취직도 잘 안되는 상황에 못생기고 뚱뚱하면 시작도 해보기 전에 패배자로 낙인찍힌다나. 정말 그럴까. 90%를 훨씬 넘는다는 대학진학률처럼 우리나라 인구의 성형률도 그 정도 수치에 육박하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게 아닐까.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돈을 들여 스펙쌓기 경쟁을 하듯, 외모와 성형의 정도도 시술 가격 및 결과에 따라 경쟁력을 갖게 되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친구의 경우 성형으로 미인이 된 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부자연스러운 건 확실히 아름답지 않다. 대부분의 인공미인을 내가 못마땅히 여기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성형까지 갈 것도 없다. <6시 내고향> 같은 탐방 프로그램에 나오는 지방의 할머니 어르신들도 가만 보면 다 문신으로 짙게 새겨 숱검댕이 같은 눈썹을 하고 나온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서워 죽겠다.

다들 감쪽같이 자연스럽게 예뻐져 눈쌀 찌푸릴 일이 없다면야, 그들이 생돈을 들이든 뼈를 깎는 아픔을 겪든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미추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므로 내 잣대를 들이댈 일도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관리가 칭송받아야 하는 덕목임은 확실하므로, 자연을 거스르는 인공적인 관리 노력 역시 미덕으로 봐야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 생이 있어 외모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예쁘게 태어나고 싶은지, 귀엽게 태어나고 싶은지 꽤 심각하게 고민했던 걸 떠올려 봐도 점점 더 모르겠다. 과정이 어떠하든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 좋은 건가. 에라이, 모르는 소리는 관두고 중력 때문에 늘어지고 처진 내 뺨과 주름을 사랑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데나 신경을 써야겠다.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극구 위로하면서. 10년쯤 뒤 극구 위로하던 자연스러운 변화가 영 마음에 안들면 나도 겁없이 과학과 의술의 힘을 빌려는 생각이 들지, 그 또한 모를 일이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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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음...

투덜일기 2011. 5. 30. 16:19

세상도 그렇고 주변도 그렇고 들리는 이야기가 다 우울하고 쓸쓸하다. 연로한 부모님들은 자꾸 건강에 빨간불이 들어와 자식들을 긴장시킨다. 사별 후 홀로 남은 부모님을 '잘' 모시는 일도 쉬운 건 아니다. 엄마의 황혼 재혼을 나는 단 한번도 상상해본 일조차 없는데, 주변에선 아주 흔한 일도 아니니 무엇이 옳은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나마 하나 알겠는 건 부모에게 재산이 좀 있으면 확실히 문제가 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연이어 돌아가셨을 때 우리 가족은 그냥 망연히 슬퍼하는 것밖엔 딴데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두분 다 여든을 넘기고 장수하신 편인데다 얼마 앓지도 않고 갑자기 돌아가셨고, 남겨줄 유산 같은 건 거의 없었으니 자식들 간에 분란 일어날 일도 없었다. 어떤 집안에선 장례 때 들어온 부의금 갖고도 싸움이 난다는데, 두분의 장사를 치르고 남은 돈은 앞으로 제사를 모셔야 하는 장남이 '당연히' 갖고 있는 거라며 간단하게 결론이 났다. 나는 다 그런 줄만 알았고,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자손들의 유산 싸움은 재벌들 사이에서나 벌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상황이 달랐다. 할머니의 유산이라야 집 한 채가 전부이긴 해도 규모가 크니 다툼이 벌어졌고 심지어 장례비용과 부조금 갖고도 내놔라 마라 패악을 부리는 자식이 있어 지켜보며 학을 떼었다. 욕심을 크게 부린 그 자식은 장례 며칠 후 현관 유리를 깨며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기가 막혔고, 외할머니의 삶이 너무도 기구해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을 엄마 명의로 바꾸느라 법무사를 찾았을 때, 괜히 듣기 좋으라고 한말이겠지만 법무사가 엄마에게 자제분들이 다 착하네요, 했다. 집이라고 얼마 하지도 않는데요 뭐, 정도로 대꾸하자 그들은 정색을 했다. 요즘 자식들이 각박해서, 단돈 백만원도 순순히 부모에게 넘기려 하지 않는다나. 그래서 어차피 돌아가실 노인들이라는 핑계로, 사별의 경우 집 같은 건 당연히 자식 명의로 바꾸는 게 대세인데 자식들이 서로들 가지려고 쌈박질을 해댄다고 했다. 외할머니 때 이미 그런 자식을 본 적이 있으니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버지 형제 팔남매, 우리 삼남매의 의가 좋은 건 부모가 가난했기 때문이라는 명제를 세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친구 하나는 요즘 홀로 남은 아버지 때문에 전전긍긍 속앓이 중이다. 재작년에 10년 넘게 병석에 계시던 엄마가 돌아가시고, 70대 중반인 친구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난 권사님과 얼마전 살림을 차렸단다. 그 '아주머니'(새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기로 형제들은 작당을 했다)를 집에 받아들이며 자식들이 부자 아버지와 협상한 조건이 있었다. (재산 때문에 재혼도 마음대로 못하는 불쌍한 노인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처음 알았다. 부모가 돈이 많으면 자식들이 고분고분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수억대의 아파트를 그 아주머니 명의로 해주는 것으로 추후 재산권 주장은 금하며, 앞으로의 분란을 막기 위하여 혼인신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각자 자식들이 있으니 처음엔 그 아주머니도 아버지도 그러마고 동의를 했다는 모양이다. (자식들에게 그분들이 환멸을 느끼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헌데 누구의 의견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아직 60대인 그 아주머니의 처지가 늙은 남자 밥 해주러 들어온 살림 도우미도 아니고 하니 혼인신고를 끝내 해야겠다고 두분이 우기신다는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친구 아버지는 아직도 제조업을 경영하고 있는 상당한 재력가이고 장남인 친구 오빠가 같이 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친구를 포함하여 모두 결혼해 분가한 오남매는 그 아주머니를 거의 재산 노리고 접근한 꽃뱀 취급하며 결사반대를 하고 있어, 집안이 쑥대밭이란다. 친구는 아버지가 적잖은 돈이 든 통장을 생활비조로 이미 아주머니에게 넘겼을 텐데, '정말 욕심 많은 노친네'라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두분이 정말로 정이 깊어 혼인신고를 하고 정식 부부로 말년을 보내고 싶으실지도 모른다는 나의 의견은 단칼에 무시됐다. ("니가 뭘 안다고 그러니!"-- 그럼 암것도 모르는 나한테 얘기는 왜 했담;;)

물론 나는 두분의 마음을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 울 엄마가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 개가하길 원한다면... 한동안 배신감에 사로잡히기는 하겠지만 그것 역시 엄마의 권리이자 선택이므로 자식으로서 말리고 말고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물정을 아직 몰라서, 또는 거액의 상속재산 따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홀로 남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비혼의 친구 하나는 아직 건강한 아버지가 쓸쓸하지 않게 여자친구라도 만드시길, 가능하다면 황혼재혼도 추진해보려고 넌지시 권유하는 중이라던데, 그 친구도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몰라서 그런 생각을 품은 걸까? 아무리 내리사랑이라지만 요즘 세상 자식들 하는 짓과 욕심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무섭다. 가난해도 자식에게 버림받고 돈이 많아도 자식의 욕심에 말년이 편칠 않으니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옛날부터 있었겠지만,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었는지 씁쓸하다. 수십억이 왔다갔다 하는 문제라며 핏대를 올리는 친구 앞에서 계속 인상을 쓰다가 들어왔더니 머리가 다 아프다. 부자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은 참 의외의 순간에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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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국민들이 영어에 미친 요즘과 달리 꽤 구세대인 나는 당연히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음 영어를 접했다. 그때 처음 느낀 영어에 대한 인상이 무엇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참 복잡하고 남녀차별적인 언어구나 하는 생각은 줄곧 이어졌다(고등학교 진학 후 불어를 만나 형용사마저 성별을 달리하는 걸 보고 더욱 경악했지만;;). 인칭별로 달라지는 be동사도 이상하고, 시제별 동사변화(특히 불규칙 동사!)도 이상하고 특히나 인칭대명사는 참 이상했다. 그냥 '그 사람, 그분, 걔'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성별따져서 he/she 나누는 것도 웃기고 '그녀'라는 말도 웃겼다.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지만 시사영어사판 중1 교과서 첫과 즈음에서 She가 등장했을 때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영어선생이 "그녀는 OOO입니다"라고 한 설명을 '그년은'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수업시간에 욕을 하다니! 나처럼 오해한 아이들이 꽤 있었던듯 누군가 킥킥 웃기도 했던 것도 같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영어와 '그녀'라는 말이 우리말에 도입된 역사는 아직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명실공히 여성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로 번역서뿐만 아니라 국내 문학이나 언론, 방송, 일상생활에 뿌리 깊이 자리를 잡았다. 다만 원래도 대명사를 잘 쓰지 않는 우리말 습관 때문에 입말에서만큼은 그다지 사용되지 않을 뿐이다. 구어체에서는 '그녀'뿐만 아니라 '그', '그들'도 잘 쓰이지 않는다. 괜히 욕을 바가지로 먹고 싶다면 일상적인 입말로 저런 인칭대명사를 사용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녀가 오늘은 좀 늦네. 그녀에게 전화 좀 해봐." "그들은 언제 오니?"라는 식으로. -_-;

번역과 관련된 노하우나 경험담을 담은 책을 보면 'he/she'를 번역할 때 '그/그녀'를 적절히 사용하라는 조언이 거의 빠지지 않는다. 특히 엄마, 할머니, 심지어 여동생을 가리키는 대화에서도 계속 꿋꿋하게'그녀'라고 해놓은 번역서를 만나면 아주 난감하다. 특별히 가족을 남으로 대하는 인물이거나 성격상 후레자식이 아니고서야... 쩝...
또 한 가지, 쓸데없이 복수명사에 얽매여 '들'을 붙이지만 않아도 초짜 티를 벗어날 수 있다는 팁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선 사물에 복수형을 붙여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자동차의 홍수 속에서...>라는 식으로 쓰면 틀린 건 아니지만 어딘가 어색하다. '마다'라는 조사와 '홍수'라는 표현에서 이미 거리와 자동차 여럿의 이미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 학생들, 어른들, 애들, 노인들처럼 사람의 경우엔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쓰일 수 있지만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바로 '그녀들'이다.

똑같이 '걔'나 '그사람', '그분'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그/그녀로 나누어 성차별을 했던 he/she도 여럿이 뭉치면 사이좋게 다시 그들/they 하나로 통합된다는 기본적인 영문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영어로는 똑같이 they인 말을 한글에선 왜 굳이 '그녀들'로 바꾸게 된 걸까? man이 남자이면서 인간을 대표하는 것처럼 '그'의 복수형인 '그들'이 3인칭복수형의 대표가 되는 것에 열이 뻗친 이 땅의 여성주의자들이 우리말 번역에라도 별도의 복수형을 만들어야겠다고 주장한 것은 설마 아닐테고...

그 정도로 언어를 연구했다면 3인칭 여성 단수로 '그녀'가 당연한 듯 쓰이기 전에는 '그'나 '저'가 성차별없이 공용으로 쓰였음을 '그들'이 몰랐을 리 없는데 말이다. 이제껏 작업한 번역서 가운데 절반 이상이 소설이었던 터라 '그녀'의 효용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더러 이름으로 바꾸기도 하고 생략도 해보지만, '그녀'를 아주 안쓰고는 못배긴다. 그만큼 '그녀'는 이제 우리말과 생활에 깊숙이 파고들었음을 인정한다. 그건 그렇다쳐도 일상생활에서 맞닥뜨리는 '그녀들'은 확실히 아니다 싶다. 소설가나 시인 앞에 굳이 '여류'를 붙여 폄하하는 태도처럼 나에겐 참으로 못마땅하고, 특히나 잡지와 광고에서 수시로 쏟아지는 '그녀들' 때문에 너무 싫어서 멀미가 날 지경이다. 

'그녀들의 발칙한 반란이 시작된다.'
'독하게 성공한 그녀들의 비법을 소개한다.'
'잘 나가는 그녀들이 여기 다 모였다'
우웩~~~~!!!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대로 된 우리말에 그녀들은 없다(영어에도 없다니깐!!). 그들이 있을 뿐이다. 걔들, 또는 그분들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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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하나마나 푸념 2011. 4. 14. 16:06

가뜩이나 시끄럽게 온 사회가 떠들어대는 문제에 흥분한 입 하나 더 얹는 거 별로 좋은 일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계속 신경이 쓰이니 몇자 적어두는 것으로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유명 한복 디자이너가 신라호텔 뷔페식당에서 한복을 입어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절당했다. 폭 넓은 한복이 거추장스러워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란다.(도무지 말이 안된다. 외할머니 산수연을 그 호텔 영빈관에서 했을 때, 당연히 음식은 뷔페식이었고 한복입고 참여한 친지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한복입고 밥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다했어도 사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실화니까 믿어도 좋다). 신라호텔 측은 공식 사과문을 게재하고 사장이 직접 그 한복 디자이너를 찾아 사과했지만(이 소식을 나는 어제 밥먹다 뉴스에서 보았다) 논란은 계속되는 모양이다. 한복 디자이너의 인터뷰 영상까지 나오는 뉴스를 보며 나는 문득 카이스트 논란을 떠올렸다. 이 나라엔 자살공화국의 오명이 붙은지 오래고 살인적인 등록금 문제와 취업난에 이중으로 시달린 대학생들은 해마다 이미 수백명씩 목숨을 끊어왔음에도 이토록 대학생 자살과 등록금이 사회적 이슈가 된 건 역시 단기간에 되풀이된 비극적인 자살의 장본인이 카이스트 대학생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우수한 과학 인재를 국가적으로 지원 양성하겠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설립된 카이스트의 징벌적 차별 등록금제는 사라져야 마땅하고, 학계에도 가차없이 적용되는 신자유주의식 무한경쟁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명 국립대라서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문제가 사회적인 논란과 비판과 대안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건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신라호텔 뷔페에서 한복 입었다고 쫓겨난 사람이 힘없고 이름없는 어느 개인이 아니라 청담동에 번듯한 한복숍을 소유하고 있는 유명 디자이너라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만약에 내가 한복입은 울 엄마를 모시고 그 식당을 찾았다가 쫓겨났더라면 똑같이 트위터와 블로그에 불만을 토로했더라도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삼성가의 3세 사장이 찾아와 직접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테고.

우리나라 국민의 사망원인 1위가 암이라는 건 온갖 민영 건강보험 광고에서 귀에 못이박히도록 떠들어대지만, 그건 연령대를 통합했을 때의 일이다. 10대와 2, 30대의 경우엔 압도적인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이는 통계상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라해도, 작년 한해에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리나라 '대학생'이 3백명에 가깝다는 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일년 내내 거의 하루에 한명꼴로 젊은이들이 희망이 없어 생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닌가. 도무지 희망이 없어서 안타까운 생각을 하는 건 이 나라 10대도 마찬가지다. 성적을 비관해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중고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뉴스에서 흘러나와도, 사람들은 다들 치러내는 그깟 부담감과 경쟁을 못 이겨낸 패배자로 치부하고 금세 잊는 분위기다. 기껏해야 만연된 우울증을 잠시 조명하면 다행이고.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데 많은이들이 공감하는데도 해마다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이들의 자살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무명의 힘없는 개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제도를 변경하기는 해도 절대 물러나지는 않겠다고 버티는 카이스트 총장은 외국 명문대에도 학과 부담을 못 이겨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고(더 많다고 했던가? 까먹었다) 항변했다. 얼추 맞는 말이다. 먼 옛날 나의 대학 친구 하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는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이런저런 추측만 나돌았을 뿐이었다. 찾아보면 대학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한 학생들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그 동기가 '살인적인 등록금', "무한경쟁 스펙 쌓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취업난'으로 명확하게 밝혀진 적은 없었다.

신라호텔 한복 사건과 카이스트 논란이 내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언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변화의 움직임을 촉발하려면 다수의 무명인들보다는 소수의 유명인이 앞장서 행동하는 게 빠르다는 너무도 뻔한 진실 때문이다. 특급호텔이 저마다 매출저조를 이유로 한식당을 없애버렸다는 사실은 이미 몇년전에도 지적됐던 점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수십억의 예산을 영부인한테 쏟아부으며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선답시고 떠들어내는 판국이다. 특급호텔이 한식의 세계화를 외면하는 건 이명박 정부로선 당연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식으로 시장논리에 따라 없애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나. 하지만 이번 한복사건과 더불어 한복에 대한 이 사회의 전반적인 홀대 문제는 특급호텔 업계의 한식 외면 문제에까지 불똥이 튄듯하다.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반값 등록금 공약을 지키라고 정부에 촉구하는 전국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된 것과 마찬가지다. 해마다 등록금 투쟁 때문에 언론 앞에서 삭발하는 총학생회장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최근 학내 집회와 수업거부, 거리 시위에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는 걸 본 적은 정말 드문 것 같다. 신자유주의식 경쟁논리에 물들어 자기 스펙 쌓기에만 바빴던 학생들도 드디어 무명의 힘이 뭉치면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일까. 과연 그들은 정말로 죽음으로 항변할 만큼 힘든 현실을 뒤집어놓을 때까지 뚝심있게 버텨줄까 자못 기대된다.

아무튼 이름 높은 한복연구가 덕분에 앞으로 신라호텔 뷔페식당에서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무명인들은 결코 없을 것이다. 참 다행이다. 학비 부담 없이 마음껏 과학을 연구해볼 욕심에 카이스트 입학을 꿈꿨을 텐데 징벌적 등록금제 때문에 크나큰 부담을 느꼈을 상당수 학생들이 학점을 비관해 자살하는 일은 앞으로 줄어들 것이다. 더불어 말도 안되는 전과목 영어강의 같은 제도도 바뀔 모양이니 정말 다행스럽다. 영문학 박사 따느라 유학생활만 10년 하고 돌아온 교수 친구도 영어강의 전날은 수업준비 때문에 술도 안마신다. 우리말 수업 때는 유머와 농담으로 재미있는 강의를 한다고 점수가 높지만 영어강의 때는 통 재미가 없다고 학생들도 아우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물며 영어전공 강의도 그런데, 어렵기 짝이 없을 심도 깊은 과학논리를 영어로 강의하고 수업듣는 교수와 학생들은 얼마나 죽을 맛이었을까. 이참에 모든 대학의 영어강박증도 좀 사라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러려면 또 어느 유명인의 놀라운 에피소드가 필요할까? 역시 이름값이 가진 권력 때문에 사람들이 다 성공하고 유명해지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라는 걸 또 한번 깨닫기는 했지만, 이젠 좀 무명인들의 힘없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는데 행여나... 그 날이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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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야

투덜일기 2011. 4. 8. 12:47

차두리가 이상하게 엇박으로 몸을 움직이며 "간 때문이야~"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CF를 볼 때마다 비싯 웃음이 난다. 그 제약회사는 그 광고에 힘입어 매출이 엄청나게 올랐다니, 확실히 성공한 광고 사례다. 차두리의 매력과 중독성 강한 CF송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내 생각엔 어린시절부터 누구나 "@@때문이야!"라고 핑계대는 화법에 익숙해서 광고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던 게 아닐까 싶다. 친구랑 놀다가도 "너 때문에 망쳤잖아!"라거나 "쟤 때문에 안 놀아!", 부모나 동생에게 "엄마(너) 때문에 TV 못 봤잖아!"라고 했던 기억 누구나 있지 않을까.

어제는 종일 비 내린다고 괜히 분위기 잡다가 정말로 호박 부침개 부치면서 빈속에 먼저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더니 전도 술도 어찌나 맛이 있던지 헬렐레 기분까지 좋아졌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간만에 마신 술에 적응이 안됐는지 금세 알딸딸, 결국엔 초저녁에 뻗고 말았다. 밀린 일 할당량은 어쩌라고 술을 마셨던고 나중에 후회해봐도 소용없는 일. 벌개진 얼굴로 누워 속으로 외쳤다. 비 때문이야! 호박 부침개 때문이야! 맥주 때문이야!

물론 시작은 나 때문이다. ㅋㅋ
 

광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차두리의 간 영양제 광고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반대로 요즘 볼 때마다 내가 기분나빠하는 광고가 하나 있으니, 바로 ㅇ사의 브랜드 광고다. 아리따운 아이돌 여가수들이 떼로 몰려나와서 엄마를 하녀 부리듯 "엄마, 시원한 물 한잔 부탁해~!", 세수하고 나서는  "엄마, 수건 좀 부탁해!"라는 식으로 온갖 잔심부름을 시키며 "부탁해~!"라고 외치다가 그럼 엄마는 누구한테 부탁하느냐고 묻는 줄거리다. 엄마는 ㅇ사에 부탁하면 된다나. 악!!!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진짜 짜증난다. 신경숙의 소설이 워낙 잘 나가니까 그 제목을 패러디했다는 건 알겠으나, 내 맘에 안드는 건  안드는 거다. 물론 아직도 자식을 하늘 떠받들듯 공주 왕자 모시듯 보필하는 엄마들이 세상엔 많겠지만 이건 뭐, 물 한잔도 엄마에게 시켜먹으라고 대놓고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뭐냐고! 나의 조카들은 대여섯 살만 되면 물은 자기가 알아서 따라먹을 수 있더구만, 왜 다 큰 멀쩡한 지지배들이 겨우 손톱 칠하느라고 엄마를 부려먹는지 원. 혹시라도 그 광고 때문에 애들이 새삼스레 엄마를 더 부려먹게 될까봐 염려하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_-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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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첫째 조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공주의 부모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노심초사했다. 유치원엔 무려 세살부터 다녔지만 선행학습 따윈 부질없는 짓이라 여겨 한글도 입학 직전에 3개월 속성으로 겨우 깨친 조카와 달리, 다른 아이들은 책을 줄줄 읽는 정도를 넘어 독후감까지 거침없이 쓴다는 '소문'에 바짝 얼었던 거다. 염려했던 대로 12월 생이라 또래보다 좀 늦된 조카의 초반부 학교생활은 퍽 힘겨웠고 아이는 가엾게도 무책임한 공교육과 매정한 담임에게 마음의 상처를 꽤 입었다. 별달리 문제가 있는 게 아닌데도 단지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아이를 교사들이 무조건 '사회적응 장애'로 몰아세운다는 사실을 우리도 비로소 깨달았다. 몰개성하고 유순한 규격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는 걸 교육자들은 정말로 모르는지 화가 치밀었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들의 경우엔 어느 정도 미리 '준비'를 하는 것으로 교훈을 삼을밖에. 
 
어쨌거나 여전히 개성 넘치는 성격으로 잘 자라준 조카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가족들은 또 다시 불안초조하다. 요즘 중학교는 또 어떤 난관으로 아이를 힘들게 할까 싶어서 말이다. 흔히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를 잘 보내야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공부 재능도 운동신경처럼 타고나는 거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다만 뭐든 '중간쯤' 하는 평범한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워낙 '미친 사교육 열풍'에 휩싸인 사회 분위기에선 그 '중간쯤'도 쉽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벌써 웬만한 아이들은 중학교 교과 과정을 미리 공부하느라 종합반엘 다니고 있다나 뭐라나.
 
까마득한 옛날 나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상당히 겁을 냈다. 내가 배정된 중학교는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거느리고 있는 '사립학교'였고, 그 사립 국민학교 출신들이 워낙 많아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소문이었다. 아주 뛰어나진 않아도 '나름 우등생'이었던 큰딸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울 엄마도 주변에 조언을 구했는지 당시 진짜로 종로통에 있었던 '종로학원'에 영어와 수학 과목을 등록해놓았으니 새해부터 열심히 다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과외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내가 '학원'이라니 어린 마음에 바짝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사교육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 딱 새해부터 과외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중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 내내 '잉글리시 펜맨쉽'이라고 적힌 공책에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인쇄체와 필기체 대소문자 알파벳을 그려 연습하고 외웠을 뿐, 연일 동생들 데리고 스케이트나 타러 다니면서 팽팽 놀았다.

예전과 시대가 완전히 달라지긴 했지만 마음 같아선, 특목고다 뭐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시광풍에 휩쓸리는 친구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 분명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조카에게도 '마지막으로' 실컷 놀라고 해주고 싶다. '고모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조카의 영어공부를 봐주던 얼치기 과외선생으로선 걱정이 태산이다. 특히 영어과목에 대해선 요즘 부모와 애들이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영어에 목숨건 아이들은 이미 방학을 맞아 캐나다다 호주다 필리핀이다 해서 어학연수를 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도 토익 수준의 단어를 하루에 스무개, 서른개씩 외운다던가. -_-; 그간 조카가 영어단어 외우기를 죽도록 싫어해서 (한글 맞춤법 좀 틀려도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공주의 주장;; 애당초 나도 영어 거부증을 면하게 해주려고 철자 달달 안 외워도 된다고 타일렀다가 그만 발등 찍혔다 ㅠ.ㅠ) 그냥 내버려뒀던 나도 요번엔 고삐를 죄었다. 방학동안 초등학교 기본 영어단어라는 800개는 점검하고 넘어가자고 말이다. 이미 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낱말이니까 잘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고 살살 달래보지만, 실은 나 역시 조카에서 속성 암기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다. 영어단어 외우라고 족치는 대신에 좋은 책이나 좀 읽고 곧 헤어질 친구들이랑 실컷 놀러다니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왜 다들 공부공부 미친 타령을 해대고 있는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부터도 공부라면 학을 떼겠는데! (쌘이와 미아를 비롯해 아직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친구들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그 옛날의 나와 똑같이 대체 왜 써먹을 데도 없는 어려운 수학이랑 과학을 공부해야 되느냐고 묻는 조카에게 나 또한 "살아가는데 다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뻔한 대답을 해주며 한숨이 나왔다. 영어권 나라로 여행 가고 싶으면 고모를 데려가거나 영어를 잘하는 친구랑 가면 되고, 어차피 프랑스에선 영어로 해도 안 통한다며? 라고 항변하는 조카에겐 이미 영어공부의 당위성도 없어서 말문이 막힌 내가 "꼴찌는 하면 안 되잖아!"라고 윽박질러놓긴 했으나 과연 조카의 속성 단어암기 프로젝트도 성공리에 마무리될지 모르겠다. 으휴. 꼴찌 좀 하면 또 어떻다고... 그 역시 학창시절의 재미난 추억이 될 거라 여기면 좋을 텐데, 부지불식간에 꼴찌는 곤란하다고 튀어나온 걸 보면 나 역시 학력지상주의에 물든 속물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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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와 '-데'

놀잇감 2011. 1. 2. 16:40

2011년 첫 포스팅은 과연 언제, 무슨 수다로 하게 될까 내심 궁금했는데 두둥, 우리말 얘기라니 고무적이다. ㅋㅋㅋ 새해연휴고 뭐고 역자교정에 힘쓰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긴 하나, 블로그질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요번 교정을 보면서 그간 내가 '잘못' 알고 있던 우리말을 또 하나 발견했다. 출판사에 친절하게 오타 지적하는 메일을 보내거나 게시판 글 올리는 독자들 가운데는 본인이 잘못 알고 있으면서 나무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데, 지금껏 나도 역자교정하면서 틀리게 고쳐 되돌려 보낸 경우가 있을 정도로 찾아보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말이다. '-대'와 '-데' 가운데서 나는 말을 전달하는 경우 종결어미가 대부분 '-대'여야만 하고, '-데'는 '~하던데'나 의문형인 '왜 그러는데?'의 형태로만 옳은 용법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아니란다. 켁. 그동안 블로그 돌아다니면서 '~~했데'라고 쓴 걸 보면 눈쌀을 찌푸리며 폄하했는데, 내가 틀렸다는 얘기! 

-대: '-다고 해'의 준말. 직접 경험한 사실이 아니라 남이 말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때 쓰인다.
예) 저 사람 아주 똑똑하대.
     철수도 오겠대?

-데: 과거 어느 때 화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현재의 말하는 장면으로 그대로 옮겨와 보고하듯이 말할 때 쓰이는 말로 '-더라'의 의미다.
예) 걔가 오늘 약속 못 지키겠데!
     그 사람 집이 시골이데. 

사실 예문을 보아도 하도 오래 잘못 알고 있었던 터라 아래 문장들은 눈에 몹시 설다. -_-; 요는 전달하려는 사실이 직접 경험인가 간접 경험인가의 차이다. 이렇게 여기 적어두기까지 했으니 앞으론 헷갈리지 말아야지. 수십년간 책 읽으며 종결어미 '-데'를 오타라고 생각했던 과거 모든 착각의 순간을 또 한번 반성한다. 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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