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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4.07.08 종교인이 문제다 10
  3. 2014.06.30 못해먹겠다 6
  4. 2014.06.28 자아분열? 8
  5. 2014.05.20 뜬금없는 잉여짓 9
  6. 2013.08.15 어떤 고모 8
  7. 2013.03.21 종묘 8
  8. 2013.01.04 과연 11
  9. 2012.12.22 엄마가 희망이다 16
  10. 2012.11.14 드디어 안동 9

등산이 뭔지

투덜일기 2014. 7. 15. 15:44

어차피 내려올 산을 헥헥거리며 올라가는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산이 좋으면 밑에서 올려다 봐도 되잖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려서 억지로 산엘 쫓아다녀서였을까? 북한산과 멀지 않은 동네에 오래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암튼 아버지는 꽤 젊어서부터 종종 등산을 다녔고 40대땐 부부가 아예 이런저런 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가끔씩 억지로 우리 삼남매를 등산에 끌고 갔다. 봄엔 진달래 능선에 핀 예쁜 꽃을 봐야한다면서, 가을엔 눈부신 단풍구경을 하자면서, 겨울엔 나무에 얼어붙은 눈꽃이 얼마나 예쁜지 아느냐면서... 

등산화 없다는 핑계를 대면 새로 아이젠까지 다 사주면서까지 어떻게든 꼬드겨 애들을 산엘 데려간 걸 보면 그 정성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따라나선 우리들이 착하다고 해야할지. 그 옛날엔 모든 산에서 취사가 가능할 때였으니, 코펠에 버너에 쌀과 반찬에 짐을 한보따리 홀로 짊어지고 밥짓는 노동까지 다 도맡아하면서도 아버진 뭐가 그렇게 좋으셨는지 지금도 좀 의아하다. 산에서 먹던 코펠밥과 삼겹살과 김치찌개가 엄청 맛있긴 했지만, 그 맛에 또 따라나서겠다고 할 만큼 대단하진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의 '등산 차출'에 동원되었던 건 아마 나 대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던 듯. 막내나 큰 동생은 나보다 몇 번 더 끌려(?) 갔을지도 모르겠다. 

등산이라면 절레절레 인상부터 쓰던 내가 수학여행 때 한라산엘 올라갔던 건 순전히 지도교수로 따라간 할머니 교수님 덕분이었다. 요즘이야 뒷동산엘 가도 등산화에 아웃도어에 배낭에 히말라야 등반도 불사할 차림으로 나서는 게 유행이지만, 그때 우린 대체로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었고 (심지어 정장바지에 구두를 신은 우리과의 퀸카 '패셔니스타'도 있었다!) 배낭은커녕 여관에서 아침에 싸준 은박 도시락과 물 한병을 각자 비닐봉지에 덜렁덜렁 들고 나선 터였다. 정상까지 가겠다는 생각도 당연히 없었고, 대충 올라가다가 점심 도시락 까먹고 내려와야지 싶었다. 그런데 정년퇴임을 앞둔 할머니 교수가 어찌나 깐족거리시는지... 늙은 나도 올라가는데 젊은 니들이 뭐가 힘드니, 여기까지 왔는데 백록담은 보고 가야지...

결국 얼떨결에 나까지도 한라산 정상을 올랐고, 지금까지도 그 사건은 불가사의한 추억담이다. 스물한살의 팔팔한 패기 와 오기 탓이었겠지만, 나이키 운동화에 무겁고 꽉 끼는 청바지까지 입고 대체 어떻게 한라산을?! +_+ 하여간 내 인생의 등산은 그날 한라산 해발 1950미터를 정점으로 영원히 끝이라라고 생각했다. 설악산은 흔들바위 이상 올라가본 적이 없고(케이블카 타고 권금성엔 올라갔다 ㅋ) 각종 단풍놀이로 간 내장산, 속리산, 주왕산 등등도 중턱이나 가봤을까. 직장인 시절 야유회를 산으로 가면 중간에 도망쳐 집으로 가거나 산 아래 막거리집에서 기다리는 쪽이었다. 

근데 그러던 내가 변덕도 유분수지, 최근 등산을 몇번 따라갔다.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낭떠러지가 무서워서 눈앞이 노래지는 순간을 겪으며 내 미쳤지! 다시는 안 따라올란다! 결심해놓고는 다음번에 또 따라가기를 벌써 서너번 했나? ㅋㅋ  운동삼아 동네 앞산 뒷산을 오르겠다고 장담할 때부터 스스로 좀 이상하긴 했는데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뭔가에 홀린 듯 등산화, 등산바지에 이어 스틱까지 장만하고는 요즘 계속 등산용품을 기웃거리고 있다. 어쩌면 마라톤화, 인라인스케이트, 자전거, 요가에 이어 또 그냥 흐지부지 운동타령 푸닥거리로 반짝하다 말 짓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도 못 미더워서 아직 배낭도 손바닥만한 엄마 걸 빌려갖고 다니고는 있는데 과연... 이건 그냥 물욕, 쇼핑욕일까 아니면 새로운 취미에 대한 초보스러운 열망일까. ㅎㅎㅎ

알록달록 색깔과 봉제선이 요란한 아웃도어는 또 내가 무진장 싫어하는 패션이어서 다행히 기능성 등산복엔 별로 눈길이 안가는데 배낭은 아무래도 꼭 하나 장만해야할 것 같고 ㅋㅋ 등산화도 아무케나 제일 가벼운 걸로 광고모델 봐서 덜컥 산 거 말고 좀 안미끄러운 놈으로 제대로 하나 또 사야하지 않겠나 싶어서 계속 등산용품 사이트를 들락날락... 아무래도 등산화와 배낭은 고가품이라 확 저지르기 전에 몇달째 망설이고만 있는 우유부단함이 이번엔 나름 미덕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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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미국에서 살인죄로(그것도 노수녀님을 죽였다고;;) 복역하던 가톨릭 신부의 죽음과 그 장례를 놓고 논란이 인다는 해외뉴스를 보았다. 아니 성직자가 어떻게?!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현대에서 종교란 단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고, 성직자 역시 그냥 하나의 직업이란 생각에 점점 동조하게 된다. 다양한 유형의 인간이 있듯,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의 동기와 이유와 성향도 다양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어려운 곳, 낮은 곳에서 소신껏 봉사하는 성직자들도 물론 많겠지만, 그건 그냥 개인의 성향일 뿐 성직자가 아니면서도 그러는 착한 사람들도 많은 걸 뭐.


어마어마한 재산 규모와 예산을 집행하는 개신교 대형교회들도 그렇고, 괜히 길 막아놓고는 문화재 보호명목으로 절에 안가는 사람들한테까지 입장료 받아 챙기는 불교계 사찰들도 그렇고 그들에겐 종교가 그러니까 그냥 세금포탈에 엄청 이로운 수익사업에 지나지 않는 거다. 전국 어느 절엘 가보아도 '기와불사'라면서 돈 내고 기와에 이름 적어 소원성취하라고 적혀있는 안내문이 빠지질 않아 눈쌀이 찌푸려진다. 개신교의 십일조 논리도 그렇고, 가톨릭의 성금이나, 불교계의 불전함이나 왜 신을 섬기는 일에는 꼭 돈이 빠지지 않을까. -_-; 


줄곧 심신이 건강했던 엄마는 얼마전부터 약간 흥분과 불안증세를 보였다. 짐작되는 이유도 여럿이었다. 


첫째, 작년 여름에도 그러더니만, 담당자가 공무원 성과주의에 빠진 건지,  암튼 엄마가 다니는 보건소 부설 실버합창단이 무슨 대회엘 나간다고 했다. 작년엔 서울 지역만 참가하는 합창대회엘 나갔고, 거기서 당당히 대상을 받았다. 올해는 전국대회라서 예선도 거쳐야한다는데, 엄마는 작년 대회준비를 앞두고도 스트레스로 많이 힘들어했다. 자기만 틀려서 민폐 끼치면 어쩌나, 입장순서와 동작 순서를 헤매면 어쩌나 뭐 그런 이유였다. 부모들 기쁘게 하자고 유치원 선생들이 재롱잔치 준비로 애들 잡는 거랑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작년에도 욕심 많은 지휘자 선생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었다. 헌데 올해는 전국대회라니, 노친네의 스트레스는 더욱 높아진 것 같았다. 하루종일 집에서 CD를 틀어대고 가사를 외우고... 가사 안외워져 큰일이라고 걱정하고.. 으억~!!! 하마터면 구청 사이트에 민원 넣을 뻔했다. 노친네들 성취감 고취도 좋지만,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도 많으니 괜한 고생 시키지 말고 큰일 벌이지 말라고...  일단은 참고 있다. 


둘째, 12살 조카를 3주 넘게 돌보는 건 나름 평화로운 모녀의 일상에 파격이었고 당연히 노친네에게도 스트레스였다. 지네 집에선 TV도 안켜는 애가 우리집만 오면 할머니방 TV를 점거하다시피하는데 그래도 괜찮은지, 맞벌이로 돈 번다고 애 교육 망치는 건 아닌지, 장사는 잘 되는지도 염려했고, 운전수에 보모 노릇하느라 늙은 딸 고생하는 건 또 안쓰러워보였던 모양이다.   


셋째, 엄마가 다니는 절의 신도회장을 지냈던 어떤 아줌마가 지지난주에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간 듣자하니 그 '보살님'은 좀 말도 함부로 하고 오지랖이 넓은 수준을 떠나 좀 주책스러워 밉상인 짓을 많이 하는 유형이었다. 고인을 두고 꼬치꼬치 따지기 좀 뭣하지만 이런 식이다. 울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루비반지(결혼 25주년때 아버지가 해주신 것)를 보더니 알이 좀 작지만(!) 예쁘네.. 라면서 대뜸 빼보라고 하더란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루비를 유리에 대고 문지른 뒤, 유리에 안붙는 걸 보니 이거 가짜네! 그랬단다. +_+ 그 일로 엄마는 그 아줌마를 속으로 미워하고 (나라도 엄청 미워했을 거다!) 상종하지 말아야지 마음 먹었다는데, 그분이 덜컥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 거다. 아니 그 아줌마 암 걸려 돌아간 게 왜 자기 탓인가! (물론 노인들에게 주변 사람들의 부고가 알게 모르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모르는 바 아니다.)


어쨌든 1, 2, 3번의 스트레스 원인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고, 차츰 해결이 돼 나갔다. 1번은 내가 민원 넣어서 합창대회 무산 시키면 오히려 울 엄마가 더 괴로워할 것 같아서 열심히 가사 외우기를 거들며, 노친네들은 합창 틀리는 게 묘미라고 세뇌했다. 그래야 관객들이 재미있어서 웃는다고.. -_-; 2번은 올케가 직원을 뽑으면서, 조카가 우리집에 오는 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됐고, 3번은 일단 그런 찜찜한 마음을 내게라도 털어놓았으니 치유가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ㅋ 우울증환자 보필 30년이면 이 정도 심리파악 풍월은 가능해짐을 양해바람)


저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은 2, 3주 지나면 풀리기 마련인데도, 이상하게 노친네의 불안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무언가 신경쓰이는 일이 더 있다는 의미였다. 길가다 이상하게 웃는 여자얘기부터, 누가 재활용품 이상하게 버려놨더라는 얘기까지 시시콜콜 별의별 것을 다 내게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양반이, 대체 그게 뭔데 나한테 숨길까. 


안되겠다 싶어서 이틀전 달래는 척 집요하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뭔가 나한테 말 안하고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게 분명 있다. 그게 뭔지 어서 털어놔라... 그런 거 없다고 발뺌을 하던 엄마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나중에 편지로 쓰겠다;;고 말했다. 엥? 딱 감이 왔다. 왜, 누구한테 돈 빌려줬다가 떼이셨나? 아님 절에다가 돈 갔다주셨나?  답은 후자였다.


사찰마다 교묘한 수익사업이 참 다양하겠지만, 이노무 절의 수익사업 가운데 하나는 '천불' 모시기였다. 나는 가보지도 않아서 모르겠는데 암튼 불화 전시회도 열었다는 유명한 화가(?)가 부처를 손바닥만하게 천 명이나 그린 벽화를 조성(아마도 화가의 그 노역까지 '보시'라는 이름으로 공짜로 재능기부 받았을 거다)하고 그 부처 그림 하나하나를 개개인의 이름으로 분양(?)해 돈을 버는 식이다(그림 아래 이름표라도 달아주려나? -_-;;) 우리 동네 있던 절이 새 절을 지어 서오릉 근처로 이사가면서, 그런 이야기가 있을 때 울 엄니도 당연히 하나쯤 도맡을 줄 알았고, 그러려니 했다. 결국 큰동생 이름으로 알량한 부처그림에 백만원을 쾌척하셨다. (백만원X1000 명이면 10억. 뭐 재산이 몇백억씩 된다는 대형교회완 쨉도 안되는 수준이겠으나, 나는 얘기 듣고 기가찼다.) 


그게 한 1, 2년 전이던가?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 그런데 알고보니 그 이후에도 (불교신자도 아닌 딸 잘 되라고;;) 내 이름으로도 부처그림에 또 한번 돈을 냈었대고, 최근엔 노친네 본인 이름으로도 또 하나 부처그림값(?)을 내겠다고 약속을 했단다. (원래도 부자 신도들은 한집에서 막 10개씩 척척 맡아서 돈내고 그런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수익사업이 원할하게 마무리가 안되니 마지막 바겐세일이라도 하듯--물론 깎아주는 건 아니지만--남은 그림을 분양했던 모양)  그것도 5개월 할부로. ^^*


어차피 엄마 재산(이라고 하니 엄청나게 많은 것 같지만 그냥 연금 통장 정도 ㅋㅋ)은 본인이 관리하시고,  종교생활에 드는 소소한 비용이며 본인 용돈 쓰시는 것 역시 내가 전혀 상관하지도 않는다. 아버지가 남기신 배우자 연금이 엄마 쓰시기엔 넉넉해서 어찌나 감사한지. 그저 감지덕지할 뿐. 그런데 공교롭게 얼마 전 내가 목돈으로 들어온 원고료 일부를 선심쓰듯 간만에 용돈으로 드리며 토를 달았다. 엄마가 놀러다니고 옷사입고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주는 거야, 홀라당 절에 갔다주지는 마셔. 그러면 다시는 용돈 안 줄 거임~


아무래도 복을 받아 편안하게 이 세상 하직하려면 정성스러운 금강경 필사뿐만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도 천불 모시기에 동참해야할 것 같아서, 돈 내겠다고 약속하고 돌아온 바로 그 시점에 하필 내가 저런 말을 하며 돈 봉투를 안겼으니... ㅋㅋㅋ 노친네는 차마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 했던 거다. 딸 속이고 하지 말라는 짓 하자니 제발이 저리셨겠지...


사연을 다 듣고 나니 헛웃음이 나면서도 버럭버럭 화가 났다. 돈독 오른 땡중들에게! 순진한 '보살님'들 꼬드겨서 이런저런 수익사업 챙기는 불교계의 작태에! 설교든 설법이든 성직자라는 양반들이 노친네들 앉혀놓고 복을 짓고 선행을 베풀어야 천당이며 극락 간다고, 그리고 그 선행을 돈과 연결시키는 빤한 술수에! 종교단체에 전재산 홀라당 갖다 바치고 길바닥에 나앉는 노친네들 얘기가 그리 먼 사연이 아닐 수도 있다니! 눈뜰 욕심에 분수도 모르고 공양미 삼백석에 딸 팔아먹은 심봉사 같은 인간을 내가 얼마나 혐오하는데! 


으으으... 째뜬 약속은 약속이고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은 하셔야겠기에 내가 결론을 내렸다. 할부는 무슨 할부, 5달이나 신경쓰는 거 절대 반대이니 내일 당장 송금해주고 끝냅시다.... 송금할 계좌번호나 내놓으시오...


심신이 불안해지면 울 엄만 벌써 얼굴표정부터 달라진다. 행동도 안절부절하지만, 특히 나만 알 수 있는 미묘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눈두덩 부분의 주름 방향이 달라져 위로 약간 치솟는 것. ^^;  내가 호랑이눈 됐다고 표현하곤 하는데, 3주 가까이 이상하게 절반쯤 호랑이눈이 되었던 노친네 눈주변 주름이 저 대화 이후 하루만에 평온하게 내려앉았다.... 으휴. 


엄마가 속얘기를 차마 못하고 몇주간 끙끙대다 털어놓은 뒤 맘 편해졌듯이, 나도 여기다 시시콜콜 죄다 하소연을 하고나면 나도 반나절쯤 계속해서 투덜투덜, 종교는 둘째치고 탐욕스런 종교인들이 문제야, 순진한 신자들이 문제야, 으억 내돈은 아니라도 3백만원 아까워! 라며 씨근덕대던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지만...  하여간 이번에 또 한번 깨달은 건 내 맘대로 함부로 일반화한 '일부' 종교인들의 탐욕스런 수익사업과 나의 편협함?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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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해먹겠다

투덜일기 2014. 6. 30. 22:00

이걸 정확히 뭐라고 불러야하는지 모르겠다. 일종의 파트타임 애보기라고 해야하나? 암튼 전업주부로 들어앉았던 큰올케가 또 갑자기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당분간 12살짜리 조카를 보필하는 임무가 내게 떨어졌다. 그래봤자, 화목토에 다니는 수학학원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고, 매일 저녁 해먹이고, 밤에 집에다 데려다주는 일이 전부다. 


열두살 조카는 이제 집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우리집에 오는 법을 확실히 익혔기에, 월수금엔 방과후 집으로 선생님이 찾아오는 피아노와 영어 과외를 받은 뒤 숙제거리를 싸가지고 저녁을 먹으러 11정거장 거리인 우리집으로 버스타고 찾아온다. 다행히 수학학원 가는 날엔 같이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걔네 엄마가 학교부터 학원까지 픽업을 해주거나 둘이 택시를 타고(!) 연희동으로 간단다. 애들끼리만 택시 타는 게 나는 너무도 못마땅한데, 조카의 친구 엄마 말로는 자기네 애는 하도 택시를 많이 타고 다녀서 염려 없다고 장담했고 올케도 별 거부감이 없는 눈치다. 


처음 며칠은 갑자기 달라진 삶에 심술이 난 조카가 집으로 고모가 자길 데리러 오지 않으면 안된다고 고집을 부렸었고, 그렇지 않으면 택시를 탈 테니 큰길가에 내려와 있으라고 해서 몇번인가 데리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필 고모는 바빠서 죽겠는 기간인데... 암튼 그래도 조카는 금세 리락쿠마 인형에 충전된 티머니로 버스 타는 묘미를 익혔고, 희희낙락 고모네 와서 마음껏 할머니 방 TV를 볼 수도 있고, 하녀처럼 살뜰하게 저를 챙기는 고모를 이리저리 부리는 재미(고모 놀자! 고모, 아이스 메밀차 먹을래! 고모, 방울토마토 먹을래! 고모, 바나나 먹고싶어!--집에 없어서 결국 사다줬다--고모, 얼음만 컵에 잔뜩 담아줘! 고모, 이제 우리 집에 가자! 고모, 우리 집에 같이 들어갔다가 가자!... +_+)에 길이 들었다. 


게다가 지난주와 오늘까지 기말고사기간. 괜히 왔다갔다 붕 뜬 마음에 시험공부라도 잘 못하면 어쩌나 괜히 내가 눈치가 보여서 정말로 왕자님 모시듯 떠받드는 수밖에 없었다. 둘째라 나도 아직 녀석을 애기취급하는데, 엄마 손길이 적어져 애가 맘상하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 (다행히 지난주 영어시험도 그렇고 오늘 기말고사도 잘 본 것 같단다. 물론 성적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ㅋㅋ 어쩔 수 없이 나도 성적지상주의자로다. 그치만 고모가 보필해서 성적 떨어졌단 말은 듣기 싫은데;; ㅠ.ㅠ) 


그러다 2주째였던 지난주 중간쯤엔 괜히 스트레스 폭발, 조카한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어과외를 째기로 애 엄마와 통화를 하고 애를 집에 데려왔는데, 시험기간 직전이라 굳이 과외선생이 우리집으로 찾아와 수업을 하겠다고 했던 날이었다. 6시에 온다고 해도 7시에 수업 끝나면 저녁이 늦어지는 판국에, 설상가상 길이 막혀 과외선생은 6시 반이 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난 원래 끼니 시간을 넘기면 분노 조절이 안된다. ㅠ.ㅠ 6시 반엔 저녁밥을 먹어줘야;;) 괜한 신경질에 조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왜 자기한테 화를 내느냐고 물었다. 아... 화를 낼 대상은 그냥 어쩔 수 없는 내 상황이었거늘. 금방 반성하고 사과할 수밖에.


매일 조카 저녁 챙겨먹이는 건 뭐 원래도 하는 일에 밥숟갈만 하나 더 놓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그게 그렇지가 않다. 할머니의 건강을 생각해서 늘 영양 만점이라고 생각하는(아닌 날도 많은데 ㅠ.ㅠ) 고모의 밥상을 조카가 엄청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제 엄마에게 고모는 된장찌개도 대충 끓이는 데 엄청 맛있다고 했단다 으휴...) 편식 없이 아무거나 해주는 대로 잘 먹긴 하지만, 반찬에 아무래도 신경을 더 쓸 수밖에 없고, 당분간은 저녁약속도 잡을 수가 없다! (엄마 혼자 한끼쯤 홀로 챙겨드시는 건 문제 없어도 손주 끼니 보필은 좀 무리인 게 사실.)


매일매일 조카에게 현재 어딘지, 집에 왔는지 학원에 갔는지, 예정대로 그 시간에 데리러가면 되는지, 혹은 버스 타고 오는 중인지 전화나 문자를 주고받아야 하고, 학원앞에 데리러 가서도 주차할 데 없으면 또 부리나케 전화통화를 해야하는 모든 상황이 나에겐 스트레스. 도대체 사교육에 힘쓰는 이땅의 엄마들은 어떻게 애들을 키울까! 난 겨우 2주만에 못해먹겠다 무자식이상팔자구나, 궁시렁궁시렁 온갖 투정을 해대고 있는데 말이다. 


지난 금요일엔가 나온 김에 저녁 먹고 들어가자는 말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들어가서 조카 데려다가 밥해먹여야 한다고 하자, 애들 다 키워놓은 지인들이 킥킥 웃었다. 운전해서 애들 학원 뺑뺑이 돌리는 거, 그거 마흔살 이전에나 할 수 있는 중노동이야! 라면서. 


물론 한정없이 내가 계속해야 하는 일은 아니고, 올케가 직원을 뽑아 일이 자리가 잡히면 곧 놓여날 수  있는 상황이라 그나마 다행. 아마 나더러 계속 하라고 하면 어디로 도망치고 싶을 것 같다. 부모 노릇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다고 익히 생각은 해왔지만, 역시 난 엄마가 될 수 없는 잠깐잠깐 조카들을 예뻐하는 고모일 뿐이고, 온전한 책임은 버거워하는 이기적인 사람임을 깨닫는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들 오면 반갑지만 가면 더 반갑다고 하는 말을 새삼 이렇게 뼈저리게 실감할 줄이야... 

매일 같이 지네 집과 고모 집을 전전해야 하는 조카녀석도 안쓰럽고, 집에 데려다줄 때마다 가끔씩 얼굴을 보는 고딩 큰조카도 어쩐지 안돼 보이고, 목이 다 쉬어 계속 피곤한 몸으로 오밤중까지 돈벌이에 힘쓰는 올케도 안쓰럽고, 갑작스런 애보기 신세에 스트레스 받는 나도 안쓰럽고... 문득 이 세상의 모든 맞벌이 부부나 싱글맘, 싱글대디들은 애들을 어떻게 키우나 의문이 든다. 이러면서 나라에선 출산율 떨어진다고 이상한 정책이나 세워대고 말이지...  암튼 어렵고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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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분열?

투덜일기 2014. 6. 28. 18:24

우리집 바로 옆 빌라에 얼마 전 이삿짐 옮기는 탑차가 들락거리더니 연일 동네 소음이 달라졌다. 까르르 까르르 아이들 웃음소리와 고함소리, 투닥투닥 골목길 뛰어다니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거다. 


나1: 어머, 노친네만 주로 사는 동네에 어떻게 젊은 부부가 이사왔나보네. 동네 평균 연령 내려가겠다. 아파트 촌엔 낮에도 애들 다 학원가고 뛰노는 애들 거의 없다던데, 애들 잡는 부모가 아닌가보다. 훌륭하군. 애들도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거 신선하겠지. 한참 뛰어놀 나이에 몸을 쓰며 뛰어놀아야 두뇌와 신체가 골고루 성장해 사춘기도 수월하게 넘어간다더라. 막다른 골목이라 드나드는 차도 많지 않고 다행이네. 애들이 몇살이나 됐을까... 궁금하다. 마주치면 인사도 잘하고 그러는 귀여운 아이들이었으면. 


나2: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다) 아악 시끄러워! 쟤네들은 대체 몇 시간을 뛰어노는 거야?! 힘들지도 않나? 더운데 창문을 다 걸어닫을 수도 없고! (장보러 나가려고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내 앞으로 물총을 들고 확 튀어나오는 사내아이를 보고) 으악! 이누무시키! 골목길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애들은 폭탄이야 폭탄! 부모가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 휴, 사고날뻔 했잖아... 왜 골목길에서 위험하게 물총 싸움을 하고 난리... ㅠ.ㅠ


똑같은 상황에서 며칠 차이로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정말 나인지 같은 사람인지 원... 유치원생 아니면 기껏해야 초등학교 1, 2학년인 것 같은 남매의 골목길 물총 전쟁을 룸미러도 흘끔거리며 골목길을 빠져나가면서 엄청 민망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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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잉여짓

놀잇감 2014. 5. 20. 13:59

재활용 바느질에 관한 고비의 놀라운 생산성 폭발 포스팅을 보니 나도 생각 난게 있다. (이런 따라쟁이!) 물론 지금도 역시나 초절정마감모드라서 더욱 더 딴짓이 하고 싶은 심리상태란 의미일지도. ㅠ.ㅠ


세월호 사건 이틀 후엔가 곧장 궁궐 자원봉사 활동을 하러 갔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또 다시 2주가 흘러도 여전히 바닷속에 잠겨 있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니, 생활한복이라도 나름 화사하게 보이려고 작년에 장만한  빨강 저고리를 도저히 입을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뉴스보며 노상 질질 울면서 상복 입고 조문은 못 갈망정... 어차피 치마는 검정색이니깐, 위에다 임시로 검정 티에 검정 카디건을 입을까 어쩔까 고민했는데 그러고 보니 딱 원불교 정녀 차림이란 생각이... -_-; 


그때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동생 마고자를 리폼하자는 것이었다. 궁에서 봉사할 때 입으라고 올케가 10여년전에 입던 깨끼 한복을 상자째로 줬는데(이 또한 통치마로 수선해야 재활용이 가능하다;;) 아 글쎄 그 맨 아래 동생이 결혼 때 입었던 남색 마고자까지 들어있었던 거다. 자수가 하도 예뻐서 그것도 나중에 고쳐입든지 말든지 해야지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겨울용이라서;;) 덥거나 말거나 내친 김에 바느질을 시작했다. 남자용 마고자 길이는 대충 여성용 반두루마기와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한 것. 마침 깔맞춤 양단 목도리도 들어 있어서 깃과 고름을 만들 천도 확보되어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옆선을 사선으로 확 줄이고 소매도 통을 줄여 붙이면 되겠지 대강 계획이 섰는데, 안감이 있어서 어디까지 안감을 분리해야 하나 고민했더니 웬걸, 양쪽 소매만 튿어내고 나니 오히려 안감이 있어서 바느질이 수월했다. 안감 겉감 같이 대충 꿰매서 뒤집으면 끝!  ^^; 물론 소매는 진동 모양을 올케 저고리 선 대로 볼펜으로 그려 꿰맨 뒤 어깨선과 딱 맞춰 붙이는 게 난항이었지만 (그래서 잘 보면 한쪽 어깨는 좀 쭈글쭈글 운다;;) 그래도 밤을 하얗게 새워가며 손바느질로 완성! 다 만들고 나니, 내가 궁궐 구경을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가 전생에 궁궐 살던 공주여서가 아니라 침방 나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웃긴 생각도 들었다. 깃이며 고름이며, 재봉틀도 없이 손바느질로 대충 꿰맨 거 치고는 너무 훌륭하잖아! (완전 자화자찬 모드;;)


해서 빨강색 생활한복 저고리 대신, 자수가 화려하긴 해도 남색이라 전국적인 세월호 애도 분위기에 조금이나마 덜 튈만한 저고리를 만들어 냈단 이야기다. 하지만 그날 당장 입고 갔을 때, 실크라서 더워서 혼이 났다는;; 혼자 너무 오버했다고 느껴져, 결국 그래서 또 다시 2주 뒤 그 다음 활동일엔 도로 여름용 주홍 저고리를 입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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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모

투덜일기 2013. 8. 15. 18:22

'기집애', '가시나' 소리만 들어도 엄청나게 모욕적인 욕이라고 생각해 눈물을 쑥 빼던 어린 시절. 내가 유독 싫어하는 친척 할머니가 있었다. 말끝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누구 이야기를 하든 '요년, 조년, 망할년' 따위를 추임새로 넣으니 당연했다. 그 양반 입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욕은 뭐니뭐니해도 '베라먹을년'이어서, 뜻이 궁금해진 내가 엄마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알고보니 '빌어먹을년'이라는 뜻이었다. 나 원 참. 그뿐인가. 귀엽다며 아이들 볼을 꼬집는 어른들은 원래도 있었지만 그 할머니는 그냥 쥐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아프게 꽉 잡고 마구 흔들어 빨갛게 만들거나 심지어 뽀뽀를 한답시고 뺨을 깨물어 애들을 울렸다. '정말 이상한 할머니'였다. 그러고는 또 매사에 생색을 어찌나 내는지, 옛날 전쟁 피난시절 굶는 이 집(울 외할머니네)식구들을 자기가 쌀퍼다 먹여서 살렸다는 둥(남편이 군무원이라 살림이 늘 넉넉했단다), 특히 울 엄마를 두고는 내가 재를 다 먹여살려 키웠노라, 그 어려운 시절에 입히고 먹인 건 물론이고 학교 공부는 내가 다 시켰노라 입만 열면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조카딸 학교 보내주는 고모가 세상에 어디 흔한 줄 아느냐고. (그렇다, 나에게 '고모할머니' 되는 양반이다) 우리 외할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은 그 양반의 호언장담에 맞장구도 치지않고 반박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묵묵히 듣고 넘기는 쪽이었다. 하기야 누가 말대답이라도 할라치면 괜히 막 쌍욕을 해대며 언성을 높였던 것 같다. 나로선 몇년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랑 동생들한테도 제대로 인사 안한다고(인사를 왜 안했겠나. 넉살좋게 큰소리로 반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ㅂ가네 애들 저래 숫기가 없어서 어디 가서 빌어먹기라도 하겠느냐고 보기만 하면 면박을 줘대니 얼굴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는 동안에도 그 양반의 큰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ㅇㅈ년(울 엄마)은 나한테 평생 잘해야한다'는 소리는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아 정말, 사람 이름에 왜 '년'자를 접미사로 붙이는지! 암튼 나는 또 궁금해져서, 진짜로 외갓집 식구들이 그 양반 덕을 많이 봤는지, 특히 울 엄마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물어보았다. 기막히게도 사연은 이러했다. 

 

전쟁통 피난시절, 울 엄마네는 피난을 내려가다 이미 인민군 세상이 된 걸 알고 이천인가 안성 쯤에서 서울로 되돌아갔단다. 그러고 한참 뒤, 서울 수복이 된 후 부산으로 피난갔던 그 양반 남편이 서울로 찾아왔더란다. 집에 먹을 것도 부족할 테니 군입 하나 줄이는 셈 치고 울 엄마(당시 10살)를 부산으로 데려가겠다고. 부산엔 학교도 열렸으니 학교도 보내주고 배불리 먹여주겠다고 했다나. 외할머니는 울 엄마한테 그럼 너라도 굶지 않게 따라가라 명했고, 착한 엄마는 고모부를 따라 부산으로 먼길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울 엄마가 전쟁으로 중단했던 학교를 다닌 건 맞지만 엄밀히 따져 그 양반네 집안에서 울 엄마의 위치는 '더부살이 식모'였다. 군무원이라 집에 쌀이며 기타 양식이 풍족하면 뭐하나,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보고(어린 사촌동생들이 둘이라나 셋이라나;;)... 아침에도 학교를 가려면 열살짜리 어린애가 군불을 피워 밥을 손수 해서 상차려 바치고 가야했단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화가 났다. 결국 제몸 편하려고 조카딸 데려다 식모살이 시켰다는 거 아닌가! 악당이 따로 없다. 그러면서 무슨 생색은! 미친 거 아닌가?

 

다행히 울 외할머니네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합류를 했고 드디어 모녀상봉을 했더란다. 맏딸만은 끼니 안굶고 배불리 먹으며 학교에 잘 다니고 있을 거라 짐작했던 외할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개울가에서 맨손으로 그집 식구들 빨래하느라 손등이 다 터져서 피가 줄줄 나는 딸의 손을 보고는 즉각 사태파악을 한 뒤 그 길로 도로 데려갔단다. (울 엄마 손등엔 그 때 동상에 걸려 터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고 요새도 가끔 가렵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 괴상한 양반이 울 엄마를 학교 보내고 먹이고 입히고 했으니 평생 잘해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베푼 기간은 기껏해야 1년 남짓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단 옷 입고 드러누워(울 엄마의 묘사다;;) 피둥피둥 놀면서(주로 화투를 쳤단다) 열살짜리 조카딸한테 무임금 가사노동 전담시킨 죄값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 양반의 만행은 세월이 흘러 울 엄마가 여고입학할 때 다시 속개된다. 가난한 집에서 '기집년'이 무슨 고등학교엘 가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돈 벌어 남동생 뒷바라지나 하라고 울 엄마의 교복을 진탕에 집어던졌다나 뭐라나...  자기한테 월사금 보태달라고 할 생각은 얼어죽어도 하지 말라면서... 아니, 자기가 왜 무슨 참견??

 

내 어린시절 기억 속의 그 양반 모습도 참 가관이다. 짜리몽땅한 키에(145센티미터쯤 되는 것 같다) 부를 과시하기 위함인 듯 요란한 양단 치마저고리에 주로 털배자를 떨쳐입고 동그란 얼굴엔 나비모양의 뿔테안경을 걸치고 나타나선 우리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묵어가곤 했는데, 나를 보면 최대한 방정맞게 혀를 쯧쯧쯧쯧 차면서 '기집년'이 공부를 잘하면 뭐하니, 팔자만 세진다.. 따위의 악담을 덕담처럼 던져댔다. 평생 가족에게든 남에게든 제대로 이로운 일을 하고는 살았는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 양반 입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건 들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울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지자, 그 양반은 또 귀신 들린 거라면서 굿을 해야한다고 난리를 피워서(굿을 안하면 화가 온 집안으로 퍼져 자기네도 해를 입는다나 뭐라나;;) 외할머니가 하는 수 없이 울 엄마를 데리고 굿당을 찾기도 했단다. (이날의 장면은 어린 시절 나의 뇌리에도 충격적으로 새겨졌다. 그 양반이 울 엄마를 끌어다가 마당 한 구석에 꿇어앉혔고,  무당이 울 엄마한테 살아있는 수탉을 확 던져셔 내가 막 울었음;;내가 다섯 살 때라는 것 같다)  심지어는 시집살이 때문에 울 엄마의 정신이 병들었으니 울 아버지와 갈라놓으라고도 한 적도 있단다. (진짜 그 양반 정신분석 한번 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울 엄마의 우울증 역사는 미혼시절부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른이 되어 그 양반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나는 가능하면 그 양반과 마주치는 자리를 피했고 울 엄마와도 상종을 막았으며 최근까지 거의 교류가 없었다. 잘은 몰라도,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10살에 엄마와 떨어져 배불리 학교 보내줄 줄 알고 따라간 고모 집에서 졸지에 식모살이를 하게 된 건 울 엄마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자기 잘못한 줄 모르는 양반이니, 그런 사람과는 떼어놓는 게 상책이다. 

 

아들 선호사상이 엄청난 데 하필 딸만 셋 둔 양반이라 나의 외숙과는 예로부터 쿵짝이 잘 맞아서 수시로 드나드는 모양이었지만, 울 엄마도 어린시절부터 평생 싫은소리를 들었던 상처가 워낙 컸던지 언제부턴가는 그 양반 돌아가도 문상을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양반이 불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건 다 인과응보라고 나 역시 매몰차게 악담을 했다. 딸 셋은 각기 호주와 캐나다로 이민간 지 오래였고, 혈육들도 그 양반의 더러운 입과 안하무인 태도를 못견뎌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딸들이 보내주는 일정액의 생활비로 독거노인으로 사는 수밖에. 아흔이 다 된 나이라 얼마 전부터는 거동이 불편해 요양병원에서 지내지만, 정신은 말짱하여 목에 휴대폰 걸고 다니며 사방으로 전화를 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인가 집으로 온 전화를 내가 받아서 대충 통화하고 끊었다.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였다. 니 엄마는 아파서 그렇다 치고 니년은 젊은 년이 왜 얼굴 한 번 안 뵈주러 오느냐고 했던가. 다행히 왕비마마는 집에 안 계셨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노인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뜬금없이 욕설을 퍼붓는 그 양반이 울 엄마의 '고모'이며 나에겐 '고모할머니'라고 생각하면 연민보다는 짜증이 더 치밀었다.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귀찮은 존재 정도? 차라리 남이었다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길 수도 있었을까? 

 

어쨌거나 엊그제 그 양반의 뒤늦은 부음을 들었다. 지난 설날에도 그 양반을 집에 모셔와 며칠 지냈다던 외삼촌도 나중에 일처리가 다 끝난 뒤 통보만 들었다는 걸 보면, 장례를 위해 딸자식들이 귀국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남보다 못한 '어떤 고모'의 일생이 끝난 셈이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여기다 시시콜콜 적고 앉았는지,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가깝든 멀든 집안 어르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도리도 외면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진정코 하나도 찔리지 않는 걸. 그보다는 그 양반 문상도 안가겠다 장담하던 왕비마마가, 다음번 절에 가는 날 '영가등'('영가'는 망자를 의미한다)이나  하나 켜야겠다고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그 또한 울 엄니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겠지만, 암튼 딸들도 안 들여다보는 노친네의 죽음을 결국엔 어린 시절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조카딸이 챙기누나 싶어져서 나는 또 좀 화가 난다.

 

이런 부끄럽고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이런 공개적인 공간에 적어놓아도 되는지, 내 얼굴에 침뱉기는 아닌지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결국 공개하는 건 울 엄마가 절에 가서 평생 미워한 고모를 위해 재를 올려 마음을 씻으려는 것처럼 나도 옹졸하게 마지막으로 실컷 망자를 욕해 꽁한 마음을 풀려는 시도가 아닐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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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놀잇감 2013. 3. 21. 00:33

탑골 공원의 노인들이 대거 종묘 앞 공원으로 몰려들면서 종묘는 내게 더더욱 매력없는 곳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파르테논 신전 기둥들만 위대하다 구경다닐 게 아니라고, 조선 왕들의 사당인 종묘 역시 신전으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춘 곳이라고 책에서 읽긴 했어도 내심으론 좀 미심쩍었다. 지나치게 길쭉하기만 한 종묘 건물들 역시 아름다운 한옥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궁궐들과 달리 종묘에 대해선 그렇게 좀 삐딱한 생각이 있었는데, 이론수업에 이어 답사를 가보고는 의외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 설명에 쏙 빠져들었다. 종묘제례 순서와 음악과 제관들의 역할과 동선, 각종 제물과 제기 놓는 위치까지 죄다 기록으로 남겨놓아,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실연할 수 있게 해놓다니, 비록 망하긴 했어도 조선의 문화수준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종묘 정전의 모습. 신실의 수는 모두 19칸이란다. 좌우행각을 잘라도 워낙 길어 한 화면에 잡을 수가 없다.

종묘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답사를 다녀온 이후에도 잘 모르겠다만 ^^; 왜 그렇게 건물이 마냥 옆으로만 길어졌는지 사연을 들여다보면 결국 저 아랫동네 종가집 제사 문화와도 관련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종묘는 궁궐보다도 먼저 지어졌다.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 그리고 곡식과 땅의 신을 모시는 사직이 국가의 근간으로 궁궐보다도 더 중요했단 얘기다. 사극에서 만날 '종묘사직' 운운하는 이야기가 그 때문이란다.

 

암튼 천자국은 7묘, 제후국은 5묘가 당시 예법이고 왕실제사도 4대조만 봉사하면 되므로 신실 5칸만 만들어놓으면 되는데 왜 저렇게 자꾸만 길이가 늘어났느냐. 그건 결국 '효'를 확장하면 '충'이 되는 유교원리를 널리 지배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기 위한 일환인 것 같다. 그리고 그놈의 '정'과 '정통성에 대한 집착'? ^^; 세월이 흘러흘러 4대조 봉사에서 벗어나는 까마득한 조상 신주는 옆에 따로 마련한 영녕전으로 옮기면 그뿐인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니 옮길 수가 없어 그냥 놔두었고, 태종도 공이 많으니 그냥 놔두었고, 세종대왕은 당연히 위대한 왕이므로 옮길 수가 없었고... '불천지주'라고 해서 옮기지 않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을 늘려짓게 된 거다. 종묘에선 서쪽이 높은 자리라서 왼쪽 신실은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오른쪽으로만...  

이성계가 추존한 4대조와 정전에서 밀려난 나머지 왕들의 신주가 있는 영녕전. 여긴 지붕높이로도 가운데 4칸이 가장 선대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공덕이 높은 선대 왕만 정전에 계속 두기로 원칙을 세웠지만, 왕이 되고 보니 자기 아버지가 '불천지주'가 되야 그야말로 '끝발'이 서는 셈이니 숙종 같은 임금은 아직 신주 옮길 순서도 되지 않은(원래 4대째 후손 왕이 신하들과 논의하여 정해야 하는데!) 아버지 신주를 후다닥 불천지주로 정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암튼 그래서 몇칸씩 자꾸만 미리 늘려지어놓은 정전 신실이 무려 19칸에 이르게 됐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걸 다시 지은 원래 건물 부분의 기둥은 배흘림 기둥이고 후대에 증축한 부분의 기둥은 민흘림 기둥이라나 뭐라나... 예리한 눈으로는 기둥 다른 것도 구분할 수 있다는데 난 설명듣기에 바빠 그것까지 확인하진 못했다. ^^

 

하여간에 종묘를 직접 가보고서 처음 알게된 것 하나는 내가 그간 왕릉 구경다니면서도 궁궐과 똑같이 가운데가 어도이고 좌우가 문무 신하들이 다니는 길이라 착각했던, 박석 깔린 길의 용도였다! 아 글쎄, 가운데는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을 옮기는 제관)만 다닐 수 있는 신도이고 오른쪽이 왕이 다니는 길, 왼쪽이 세자가 다니는 길이었단다. 대동한 신하들은 박석에도 못 올라갔단 얘기. 심지어 종묘 정전과 영녕전 앞의 대문도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만 드나들 수 있다. 왕릉 홍살문이 신성한 공간임을 가리키는 곳이란 건 전에도 알고 있었는데, 양쪽 대문도 궁궐문처럼 다 막힌 판문이 아니라 홍살문처럼 위쪽이 뚫려있었다. 왕과 제관들은 종묘 입구부터 아예 동선이 달라져서 옷 갈아입고 목욕제례 준비하는 별도의 건물로 들어갔다가 동문으로 입장한단다. 악공 같은 하급 관리들은 동문 출입도 안되고 반대편 서문으로 드나든다고.

 

그래서 답사 설명 내내 교육생과 관람객들에게 함부로 한 가운데 신도를 밟지 말라는 당부가 이어졌고, 종묘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내용이 적힌 팻말도 서 있었다. 하지만 어디 사람들이 그런데 계속 신경을 쓰는가 말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인 것을. ㅋㅋ 하여간 종묘와 왕릉의 가운데 길은 인간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던 제례절차와 제물의 종류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제사 지낼 때 향과 술을 왜 같이 올리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믿는단다. '혼비백산'이 거기에서 나온 말이라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스며드는데, 그래서 혼은 사당에 모시고 묘를 만들어 백과 시신을 함께 모시는 거란다. 제사를 지내려면 혼백을 다시 모셔와야 하니, 향을 피워 혼을 부르고 술을 부어 백을 불러올린다네! 종묘 신실 앞에는 그래서 바닥에 술을 붓는 구멍도 있다고! ^^; 일부 집안에서 제사때 '모사기'라고 하여 모래를 담은 그릇에 술을 붓는 순서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다. 나로선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

 

어쨌거나 재미났던 건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명절 증후군을 앓듯, 역대 조선의 왕들도 직접 제사를 올려야하는 날짜가 잡히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종종 병을 앓았단다(가령, 재임기간이 특히나 길었던 영조가 와병으로 제사를 친히 지내지 못해 개탄하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나온다고;;). <국조오례의> 율법에 따라 왕이 직접 가는 제사(친행)와 신하를 대신 제관으로 보내는 제사(섭행)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왕이 제사증후군 때문에 지엄한 국법을 더러 지키지 못했다는 얘기다. ㅋㅋㅋㅋ 그 옛날 왕실 제사도 그럴진대 요즘 우리들 제사야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런데도 요즘 일부 종가집에서는 까마득한 몇대 조 할아버지 제사며 시제까지 꼬박꼬박 지내고 있으니... 전통을 따진다면 수천년전 전통이 더 역사 깊고 오래 된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불과 6백년인데 뭘 그리 예법 따지고 전통 따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왕실사당에서 유교 예법에 맞춰 4대조 봉사를 하고, 심지어 불천지주를 정하여 수많은 선대왕에게 1년에도 몇번씩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영녕전으로 옮긴 왕들에 대해서는 1년에 딱 한번 한식에만 제사를 지냈다. 오 나름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놀랍게도 양반가에서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대부분 4대조 봉사를 하지 않았단다. 간편하게 부모님 제사만 올리는 것이 대세! 하기야 부모 돌아가시면 3년상씩이나 해야하는데, 어떻게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챙기겠나! 

 

신분 가리지 않고 고조부까지 4대 봉사를 한 건 순전히 조선후기 들어 성리학에 지나치게 얽매인 지배층의 의식변화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선중기까지는 딸, 아들 구분없이 제사와 차례를 나누어 모시거나 번갈아 모셨으며 재산분배도 동등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체적인 나라 살림살이가 거덜난 가운데 빈부상하 할 것 없이 4대 봉사의 전통이 서서히 자리잡으면서 유산과 제사 모두 장자에게 편중되는(한 놈이라도 먹고 살게 밀어주자;; 뭐 이런 심리) 악습이 시작되고 만 거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민가의 제례가 신분의 격차에 따라 아예 정해져 있었다. 벼슬이 대부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면 됐던 거다. 그나마도 불교식이라 매장이나 화장 후 신주는 절에 모셨으므로 실제 제례는 절에 가서 제를 올렸단다. 그러니까 고려시대만 해도 집안에서 복작복작 여자들이 제사음식 장만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

 

설날을 기점으로 차례와 제사가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오면서 당연히 울 엄마를 비롯해 일부 집안 어르신들이 큰 걱정을 했다. 한 번 나간 제사가 다시 돌아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이번 궁궐 수업을 들으러 다닌 건 어쩌면 우리집에 그런 일이 있을 걸 미리 안 미지의 힘이 나를 조종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수업때 듣고 책에서 읽은 '옛날 법도'와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어르신들의 우려를 쉽사리 잠재울 수 있었다.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황, 이이 때만 해도 딸이랑 아들이랑 번갈아가며 부모 제사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데 뭘요! 딸과 사위가 혼례 후 계속 친정에 눌러 살면서 친정집안 제사를 도맡는 경우도 많았단다. 당시 논의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건 현모양처의 화신 신사임당 드립! 오죽헌은 다들 알다시피 신사임당의 친정집, 율곡 이이의 외가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출가 후에도 오죽헌에서 무려 18년을 살았단다. +_+ 친정 집안에 아들이 없기는 했지만, 남편과의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지만 정말 '현모양처' 치고는 대단한 뚝심 아닌가? ㅋㅋㅋ (그 옛날에 신사임당이 18년간 강릉 친정 살면서 시댁 올라가서 제사 지냈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팔순 큰고모는 대답을 못하셨다 ^^v)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옥 고택의 사연을 읽다보면 놀랄 때가 많다. 주로 양반 아무개가 장가를 들어 처가집 근처에 새로 지은 집인 경우가 왜 그리 잦은지! 그 옛날엔 영아사망률이 워낙 높다보니 남자가 여자네 집으로 장가를 들러가면 집을 새로 짓든 말든 암튼 친정에서 최소한 3년쯤 첫 아이를 낳아서 무사히 돌잔치를 할 때까지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단다. 친정엄마한테 육아 맡기느라고 친정 근처에 집 얻는 요즘 세태와 다른 게 무언가!

 

종묘 이야기하다가 흥분해서 딴소리로 끝나고야 말았지만 하여간에 왕이든 평민이든 제사는 참 부담스러운 행사였다는

점이 이날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진창에 발이 푹푹 빠지고 돌아다면서도 경쾌하고 기분좋게 답사를 마치고 돌아설 수 있었던 듯. 그날은 겨울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예뻤다. 

 

그러고 보니 밀린 답사후기도 이걸로 끝이다. 이때만해도 사방에 쌓인 눈이 수북했는데, 꽃샘추위라 내일은 날씨가 다시 영하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햇살과 꽃눈을 보면 확실히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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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투덜일기 2013. 1. 4. 18:09

새해들어 과연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시작한 일이 하나 있다. 자원봉사 따위와는  완전 담쌓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궁궐 청소 같은 일은 해보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모종의 기획이라면 기획. 궁궐과 문화재 지킴이를 모집하는 단체가 꽤 여럿인 모양인데, 여기저기 기웃대다 한 군데서 마침 연말에 모집기간임을 극적으로 발견하고 마감일 하루 전에 허겁지겁 신청했다. 00명 모집에다 선착순 마감이라고 적혀있어서,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름 조마조마했다. 돌이켜보니 이 얼마만의 '응시'인가.

 

교육대상자 발표를 보니 무려 100명. 내가 막연하게 바랐던 궁궐 전각 청소 소임과는 사뭇 다르게, 해설사 양성 교육이라서 좀 어마어마한 느낌은 있지만 궁궐과 한옥,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뭔가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꽤나 뿌듯하게 소정의 교육비를 냈다. 그러고는 어제 첫 강의가 있어 27년만에 찾아왔다는 강추위를 뚫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6시반부터 시작되는 평일 저녁에 수업을 들으러 올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이들일까 자못 궁금했다. 방학 맞은 대학생들이 좀 있을 테고 나머지는 나처럼 죄다 백수? ^^;

 

아직 어떤 이들이 모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령비율로 보니 20대부터 60대까지 제법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고 남녀 성비는 25대 75로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많았다. 하기야 궁궐 해설사치고 여자 아닌 사람을 나는 입때껏 한번도 못봤다. 창덕궁도 그렇고 나는 궁궐 해설사들이 죄다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이거나 계약직 직원인 줄 알았는데 다들 자원봉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암튼,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해설사로 활동하고픈 마음은 없다해도 그만큼 교육내용이 알차려니 싶어서 기대중이다. 3월까지 일주일에 세번이나 교육이 있는데 끝까지 남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궁금타. 그렇다면 과연 나는 끝까지 버틸까? ㅎㅎㅎ

 

흥미로운 주제라고는 해도 강의 방식이 따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는데 세계 건축 통사를 훑어주었던 첫 강의는 퍽 재미있었다. 반사적으로 강의 내용을 공책에 열심히 필기하며(교육 끝나면 나중에 필기시험도 본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 파워포인트로 비추는 스크린이 앞좌석에 가려져 주요 사진 캡션을 하나도 못 읽은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내일 수업땐 같은 구석자리라도 한 세쨋줄 정도로 노려볼 생각이다. 그럼 담배냄새 쩌는 지각생 아저씨가 옆자리로 파고드는 일도 없겠지. ㅠ.ㅠ 어젠 정말이지 수업 내용은 흥미진진한데 숨쉬기가 어려워서 죽는 줄 알았다. 얼마나 골초면 옆사람한테까지 그토록 호흡곤란을 일으킬까나. 한껏 몸을 틀어 앉아 수업 내내 내가 스카프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던 걸 옆자리 그 골초 아저씨도 눈치챘을까? 생김새도 못봤으니 미리 알아서 피할 순 없을 테고, 무조건 중노년의 아저씨 주변엔 앉지 않겠다고 첫날 수업 한번으로 결심이 섰다.

 

공부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진즉 깨달았으면서도 또 뭔가를 배운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 수업에서 인류는 사냥과 채집으로 생존하던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역마살, 노마드 가질이 있어 여행을 좋아하며, 어딜 가든 현지에서 뭘 꼭 사오는 것도 채집 본능이라고 설명하던데, 공부 싫어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선망을 버리지 못하는 건 무슨 본능일까 문득 궁금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여호아라는 공자님 말씀에 그리 깊이 세뇌된 건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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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안하무인 MB 정권의 처단을 위해서라도 새누리당 후보는 절대 대통령 되면 안된다고 열심히 세뇌교육에 힘썼더니, 왕비마마는 그럼 강지원 변호사를 뽑겠다고 했었다. 자기가 '아는데' 정말로 청소년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나. 나는 ㅂㄱㅎ만 안 찍으시면 된다고 반색했다가 나중엔 또 다시 유치하게 이민 카드를 휘두르며(MB 대선 때도 익히 써먹은 수법이다 ㅠ.ㅠ) 정말이지 ㅂㄱㅎ가 대통령 되는 사태는 저지해야하므로  이왕이면 야권단일화 후보를 밀어주는 게 어떠냐고 엄마를 꼬드겼었다. 왕비마마는 대선 후보자 토론을 두어번 보고 나선(특히 이정희가 활약한 1차는 전편을 다 보시곤 그 여자 말 한번 시원시원 조리있게 잘하네, 했다) 2번을 찍겠다고 동의해주었다. 사람 순하게 생긴 게 박력은 없지만 꼼꼼하게 일 잘하겠다면서. 그러나 과반의 국민들은 우리와 의견이 달랐고, 모녀는 낙담했다.

 

어제 동짓날 절에 가서도 왕비마마는 대다수 ㅂㄱㅎ(어윽...이름도 쓰기 싫다!) 지지자 할마시들의 설레발에 적잖이 마음을 상하고 돌아온 듯했는데, 오늘은 또 열혈 ㅂㄱㅎ 지지자인 고모 한분과 안부  통화를 하다 정치 얘기로 화제가 넘어갔는지 논쟁이 좀 길어졌다. 멀리서 듣자하니 대화가 흥미진진하여 깔대기처럼 귓바퀴를 늘이고 통화를 엿들었다. 오, 울 왕비마마 조리있게 잘 받아치시는군!

 

ㅂㄱㅎ 당선에 할렐루야를 외쳤다는 60대 고모는 이를테면 부유한 강남 할머니의 전형. 온 종일 기분이 너무 좋아 콧노래를 불렀다고 한 모양인데, 열살쯤 손위인 엄마는 그게 콧노래 부를 일이냐, 표 차이도 얼마 안났다고(엄마, 백만표 차이래요 ㅠ.ㅠ) 문재인이 아깝게 떨어졌다고 응수했다. 고모는 무엇보다도 '예쁘고' 불쌍한 데다(부모 잃은 고아라고;;) 똑똑해서 정치를 잘하니까 ㅂㄱㅎ를 지지한다고 했다는데, 왕비마마는 부모 다 총 맞아서 불행하게 죽었으니 불쌍한 건 맞지만 토론 보니까 똑똑한 건 모르겠다고(울 엄마 화이팅!), 중요한 일 있을 때마다 쏙쏙 빠져나가면서 정치 잘 한 게 뭐 있느냐고 반박했다. 30년 넘게 똑같이 육영수 여사 흉내내는 머리 모양 하는 것도 그만큼 생각이 꽉 막혔다는 뜻이라고도 했다. (오, 내가 해준 말인데, 울 엄마 기억력 짱!!)

 

논리적으로 밀린다 싶었던 고모는 이정희를 들먹이며 종북좌파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아마도 민주당까지 싸잡아서 다 종북좌파라고 했겠지. 이 대목에서 엄마는 우아하게 웃으며 요즘 북한이 얼마나 못사는지 다 아는데, 북한 좋아서 추종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인정상 도와주자는 거지... 그리고 이정희 말도 들어보면 일리가 있더라나... ^^; 저쪽에선 또 '퍼주기' 비판을 시작한 모양이었고, 엄마는 4대강에 쓸데없이 돈 처들이고 파헤치는  것보다는 굶어죽는 사람들한테 쌀 퍼주는 게 더 나은 게 아니냐고 대꾸했다. 오오.. 존경스러운 왕비마마. 뉴스 볼 때마다 내가 추임새로 넣었던 말들을 다 귀담아 두셨었군요... ㅠ.ㅠ 그러고선 추가 공격하듯, 자기는 유니세프에 다달이 기부도 하고 있다고, 굶어죽고 병든 애들 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정점을 찍으심! (이후로 대화는 유니세프에서 산 6만원짜리 천가방이 얼마나 가볍고 쓰기 편한가 하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수백만원짜리 명품백이 여럿인 고모는 과연 왕비마마의 자랑을 어떤 표정으로 들었을지 몹시 궁금타.) 으음, 어느 대목에선가 정수장학회, 박정희, 전두환 비판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까먹었다. ^^;

 

심신이 건강해진 울 왕비마마는 최근 어딜가나 '사람이 또릿또릿해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자기가 옛날에 얼마나 멍청하고 흐릿해보였으면 그랬겠느냐고 속상해하는 적이 더러 있다. 우울증을 거의 떨쳐버려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우와 말 많고 잘난 시누이와 정치토론도 거뜬히 해내시는 걸 보니 내가 밖에서 활동하는 엄마의 모습을 못봐서 그렇지 매사에 정말로 똑똑해지고 자신감도 넘치는 게 분명했다. (하긴, 얼마전 실버합창단의 제2회 송년음악회에서 잘난 척 대장인 젊은 할머니와 왕비마마가 무대 위에서 살짝 '한 판 붙는' 장면도 내가 찍은 동영상에 담겨 있다. ^^; 알토 파트는 입다물고 기다리는 도입 부분에서 왕비마마는 단지 리듬을 타며 고개만 살짝살짝 움직이고 있었는데, 뒤에서 기분나쁘게 콱 찌르며 노래 부르지 말라고 혼냈단다. 울 엄마는 홱 고개를 돌려 왜 엉뚱한 사람 잡느냐고, 당신이나 잘하라고 대꾸하셨다고... 그 순간 입다물고 있었다는 증거 동영상도 있으니, 담주에 개강하면 정식으로 한판 붙으시라고 내가 부추겨놓았다. ^^ 울 엄마 화이팅! ㅋㅋ)   

 

전화통화를 끝낸 왕비마마는 "@@동 고모가 우리더러 좌파세력이란다"라며 씩 웃었다. 나는 70대 할머니 중에서 좌파 흔치 않을 텐데 멋지다고 대꾸했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울 엄마도 덩달아 보수파에 깊이 세뇌되어 ㅂㄱㅎ를 찍어주었을 확률이 높다는 건 잘 알지만, 투덜이 딸이 옳다니까 귀기울여 들어주고 지지해주고 촛불시위에까지 따라나서는 울 엄마. 5년 그 개고생을 하고도 또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이 나라 국민들은 도대체가 가망이 없어, 라고만 할 게 아니라, 연로한 울 엄마가 바로 내가 찾는 희망이구나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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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안동

여행담 2012. 11. 14. 16:18

드디어 안동 얘기까지 왔으니 여행자의 삶 후기도 얼마 안남았다. 쓰고 보니 많이 다니지도 않았구만 왜 그렇게 노상 쏘다닌 것처럼 느껴졌는지 원. 아무튼... 이웃 주민들 영향으로 통영과 함께 선망의 여행지였던 안동에 결국 다녀왔다.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짰던 시간표와 동선은 완전히 무너져 허망했고, 얼마 다니지도 못했음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마구 찍어댄 풍경사진을 '소장'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뿌듯하며, 그곳을 30년지기와 함께 거닐었다는데 의미가 있으니 됐구나 싶다.

 

그래도 왠지 억울해서 적어보자면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고속버스편으로 아침 일찍 출발.

안동에 도착해 점심으론 <헛제삿밥>을 먹는다.

오후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돌아본 뒤 저녁은 안동 구시장 찜닭골목에서 <안동찜닭>을 먹어줘야지.

숙소인 고택으로 가기 전에 필히 맘모스 제과에 들러 안동사과를 넣어 구웠다는 30년 전통의<사과파이>와 <맘모스빵>을 산다.

이걸로 다음날 아침 커피와 함께 요기.

이틑날 오전에는 도산서원을 돌아본 뒤 다시 안동시내로 돌아와 역앞에 있다는 간재비 아저씨네 식당에서 고등어조림과 구이로 거하게 점심. 

커피 한잔 마시며 여유 부리다 오후 늦게 부산으로 출발.

 

그러나... ㅠ.ㅠ 야무진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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