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하나마나 푸념 2011. 4. 14. 16:06

가뜩이나 시끄럽게 온 사회가 떠들어대는 문제에 흥분한 입 하나 더 얹는 거 별로 좋은 일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계속 신경이 쓰이니 몇자 적어두는 것으로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유명 한복 디자이너가 신라호텔 뷔페식당에서 한복을 입어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입장을 거절당했다. 폭 넓은 한복이 거추장스러워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란다.(도무지 말이 안된다. 외할머니 산수연을 그 호텔 영빈관에서 했을 때, 당연히 음식은 뷔페식이었고 한복입고 참여한 친지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한복입고 밥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다했어도 사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실화니까 믿어도 좋다). 신라호텔 측은 공식 사과문을 게재하고 사장이 직접 그 한복 디자이너를 찾아 사과했지만(이 소식을 나는 어제 밥먹다 뉴스에서 보았다) 논란은 계속되는 모양이다. 한복 디자이너의 인터뷰 영상까지 나오는 뉴스를 보며 나는 문득 카이스트 논란을 떠올렸다. 이 나라엔 자살공화국의 오명이 붙은지 오래고 살인적인 등록금 문제와 취업난에 이중으로 시달린 대학생들은 해마다 이미 수백명씩 목숨을 끊어왔음에도 이토록 대학생 자살과 등록금이 사회적 이슈가 된 건 역시 단기간에 되풀이된 비극적인 자살의 장본인이 카이스트 대학생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물론 우수한 과학 인재를 국가적으로 지원 양성하겠다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설립된 카이스트의 징벌적 차별 등록금제는 사라져야 마땅하고, 학계에도 가차없이 적용되는 신자유주의식 무한경쟁은 타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명 국립대라서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문제가 사회적인 논란과 비판과 대안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건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신라호텔 뷔페에서 한복 입었다고 쫓겨난 사람이 힘없고 이름없는 어느 개인이 아니라 청담동에 번듯한 한복숍을 소유하고 있는 유명 디자이너라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만약에 내가 한복입은 울 엄마를 모시고 그 식당을 찾았다가 쫓겨났더라면 똑같이 트위터와 블로그에 불만을 토로했더라도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삼성가의 3세 사장이 찾아와 직접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테고.

우리나라 국민의 사망원인 1위가 암이라는 건 온갖 민영 건강보험 광고에서 귀에 못이박히도록 떠들어대지만, 그건 연령대를 통합했을 때의 일이다. 10대와 2, 30대의 경우엔 압도적인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다. 이는 통계상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라해도, 작년 한해에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리나라 '대학생'이 3백명에 가깝다는 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일년 내내 거의 하루에 한명꼴로 젊은이들이 희망이 없어 생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닌가. 도무지 희망이 없어서 안타까운 생각을 하는 건 이 나라 10대도 마찬가지다. 성적을 비관해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중고생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뉴스에서 흘러나와도, 사람들은 다들 치러내는 그깟 부담감과 경쟁을 못 이겨낸 패배자로 치부하고 금세 잊는 분위기다. 기껏해야 만연된 우울증을 잠시 조명하면 다행이고.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데 많은이들이 공감하는데도 해마다 수백명씩 죽어나가는 이들의 자살이 제대로 공론화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무명의 힘없는 개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제도를 변경하기는 해도 절대 물러나지는 않겠다고 버티는 카이스트 총장은 외국 명문대에도 학과 부담을 못 이겨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고(더 많다고 했던가? 까먹었다) 항변했다. 얼추 맞는 말이다. 먼 옛날 나의 대학 친구 하나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는 아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이런저런 추측만 나돌았을 뿐이었다. 찾아보면 대학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한 학생들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처럼 그 동기가 '살인적인 등록금', "무한경쟁 스펙 쌓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취업난'으로 명확하게 밝혀진 적은 없었다.

신라호텔 한복 사건과 카이스트 논란이 내게 공통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언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변화의 움직임을 촉발하려면 다수의 무명인들보다는 소수의 유명인이 앞장서 행동하는 게 빠르다는 너무도 뻔한 진실 때문이다. 특급호텔이 저마다 매출저조를 이유로 한식당을 없애버렸다는 사실은 이미 몇년전에도 지적됐던 점이다. 그러면서 정부는 수십억의 예산을 영부인한테 쏟아부으며 한식의 세계화에 앞장선답시고 떠들어내는 판국이다. 특급호텔이 한식의 세계화를 외면하는 건 이명박 정부로선 당연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식으로 시장논리에 따라 없애겠다는데 어떻게 말리겠나. 하지만 이번 한복사건과 더불어 한복에 대한 이 사회의 전반적인 홀대 문제는 특급호텔 업계의 한식 외면 문제에까지 불똥이 튄듯하다. 카이스트 대학생들의 자살 사건이 반값 등록금 공약을 지키라고 정부에 촉구하는 전국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된 것과 마찬가지다. 해마다 등록금 투쟁 때문에 언론 앞에서 삭발하는 총학생회장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최근 학내 집회와 수업거부, 거리 시위에 그토록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는 걸 본 적은 정말 드문 것 같다. 신자유주의식 경쟁논리에 물들어 자기 스펙 쌓기에만 바빴던 학생들도 드디어 무명의 힘이 뭉치면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한 것일까. 과연 그들은 정말로 죽음으로 항변할 만큼 힘든 현실을 뒤집어놓을 때까지 뚝심있게 버텨줄까 자못 기대된다.

아무튼 이름 높은 한복연구가 덕분에 앞으로 신라호텔 뷔페식당에서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무명인들은 결코 없을 것이다. 참 다행이다. 학비 부담 없이 마음껏 과학을 연구해볼 욕심에 카이스트 입학을 꿈꿨을 텐데 징벌적 등록금제 때문에 크나큰 부담을 느꼈을 상당수 학생들이 학점을 비관해 자살하는 일은 앞으로 줄어들 것이다. 더불어 말도 안되는 전과목 영어강의 같은 제도도 바뀔 모양이니 정말 다행스럽다. 영문학 박사 따느라 유학생활만 10년 하고 돌아온 교수 친구도 영어강의 전날은 수업준비 때문에 술도 안마신다. 우리말 수업 때는 유머와 농담으로 재미있는 강의를 한다고 점수가 높지만 영어강의 때는 통 재미가 없다고 학생들도 아우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물며 영어전공 강의도 그런데, 어렵기 짝이 없을 심도 깊은 과학논리를 영어로 강의하고 수업듣는 교수와 학생들은 얼마나 죽을 맛이었을까. 이참에 모든 대학의 영어강박증도 좀 사라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러려면 또 어느 유명인의 놀라운 에피소드가 필요할까? 역시 이름값이 가진 권력 때문에 사람들이 다 성공하고 유명해지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라는 걸 또 한번 깨닫기는 했지만, 이젠 좀 무명인들의 힘없는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주는 사회가 되면 좋겠는데 행여나... 그 날이 오긴 할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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