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 해당되는 글 43건

  1. 2013.07.12 비오는 날 경복궁 4
  2. 2013.06.04 경복궁 예쁜 곳 7
  3. 2013.05.18 동궐도 전시회 8
  4. 2013.04.21 경복궁에서 옛것 찾기 8
  5. 2013.03.25 궁궐이 좋아서 3
  6. 2013.03.21 종묘 8
  7. 2013.03.08 벼락치기 17
  8. 2013.02.26 덕수궁 답사 9
  9. 2013.01.28 창경궁 14
  10. 2013.01.23 덕혜옹주 특별전 5

비오는 날 경복궁

놀잇감 2013. 7. 12. 17:34

유홍준 교수가  부제를 '인생도처유상수'로 붙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서 그랬다. 경복궁 근정전은 비 많이 내리는 날 가보아야 그 진가를 감상할 수가 있다고. 그래서 내심 장마기간 동안 기대하고 있다가 꽤나 비가 철철 내리는 날 어디 진짜 그런가 살펴보았다.

흥례문 행각, 근정문 앞마당 구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뒷배경의 북악산에 드리워진 비구름과 어우러진 모습이 꽤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가 궁금했던 건 정말로 근정전 앞 조정바닥에 깔린 박석 사이로 물길이 휘휘 돌아 흘러 배수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하는 점! ^^; ㅋㅋㅋ 배수구로 연신 물이 빠져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낮아진 박석 주변엔 어쩔 수 없는 물웅덩이가 보여, '개뻥 아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____^ 내가 조정에 얕게나마 물웅덩이 있다고 투덜대니까, 저 정도면 물 고인 거 아니라고... 집중호우 쏟아져도 강남사거리처럼 물바다로 변하진 않는다고...

째뜬 장화신고 가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만큼 궁궐 마당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생겨났다는 것이 현실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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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예쁜 곳

놀잇감 2013. 6. 4. 14:47

2주가 참 금방 간다. 한달에 두 번 그까이거 아무것도 아니지, 라고 생각하지만 한달에 두번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뭔가를 배우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 하도 오랜만에 하다보니 퍽이나 고되게 느껴진다. 누가 시켜선 절대로 못할 '귀찮은' 일을 자진해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기함과 존경은 여전하다. 나와는 확실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듯.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은 섣불리 덤벼들어선 안될 일이다. 

째뜬 주어진 시간동안 많이 보고 들으며 예쁜 광경을 눈에 머리에 담아두자고 생각하고 있는데, 제대로 사진 찍을 여유도 사실 별로 없다. 한가로운 '관광객' 모드로 돌아다니질 못하니 원...  ㅎㅎ 그래도 눈치 슬쩍슬쩍 보면서 볼수록 예쁜 곳을 휴대폰에 담아두고 심심할 때 감상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옛기술과 지혜와 솜씨와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는 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자꾸 보고 설명을 들어도 통 모르겠다 싶은 경복궁에서 그래도 제일 마음에 드는 곳 사진 몇장 골랐다. 

여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때,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려준 조대비 신정왕후에게 가장 화려하게 지어바쳤다는 자경전의 꽃담. 3월에 찍은 사진이라 나무들이 앙상하다. 지금은 초록잎이 무성한데... 세월 무상.

일일이 색기와를 구워 액자처럼 꽃나무를 표현하고 바탕은 삼화토로 마무리해 갈라지는 법이 없다는 저 그림 하나하나에도 각기 다른 사연이 숨어 있단다. 앵두나무에 걸린 보름달을 표현한 첫번째 그림은 중국어 발음까지도 관련이 있다던데... 복잡해서 다 까먹었다. ㅎㅎ 암튼 경복궁에 있는 침전 중에서 옛모습 그대로 간직된 전각은 자경전이 유일하다. 그래서 보물 809호. 전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나는 훼손되면 기술 재현이 불가능해 복구할 방도가 없다는 저 꽃담이 훨씬 더 예쁘고 정겹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든 무늬는 강녕과 장수를, 아름다운 꽃나무는 부귀영화를 의미한다네. 

자경전 뒤에 있는 유명한 십장생 굴뚝도 지나칠 수 없다. 온돌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굴뚝을 담장과 연결하고 이런 장식을 하다니 옛사람들 정말 천재가 아닌가 싶다. 자경전과 별도로 이 십장생 굴뚝도 보물로 지정, 810호다. 정면에서 찍어 안보이지만 굴뚝 옆으로 돌아가 보면 맨 꼭대기엔 박쥐가 매달려 있다. 박쥐의 한자 이름이 '편복'이어서, 과거엔 복을 주는 동물이라 여겼다고. 십장생 말고도 연밥, 포도, 불노초 등 다양한 장식을 새겨놓았다. 볼 때마다 숨은그림 찾기 하는 기분.. ^^;

예쁜 굴뚝이라고 하면 교태전 뒤 화계에 세워진 아미산 굴뚝도 빼놓을 수 없다. 굴뚝마저도  육각으로 예쁘게 쌓고 꼭대기엔 기와처럼 지붕까지 올려둘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중전마마 보기 좋으라고 생각해냈다지만, 참 아기자기한 발상이다.

 

교태전 전각 자체는 1995년에 복원한 새것이지만, 아미산 굴뚝은 옛것 그대로라 역시나 보물 811호. 자경전부터 번호가 쪼르륵 붙어있어 욀 생각이 없었는데도 각인되었다. ㅋㅋ 요즘은 교태전과 강녕전 전각을 개방해놓아, 신벗고 들어가 대강이나마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데, 이 아미산 굴뚝은 반드시 교태전에 들어사 툇마루 쪽에서 바라보아야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고... (그러나 툇마루엔 못나가게 관리인 아저씨가 지키고 있다. 쳇;; 전각 뒤쪽 계단으로 올라가 보아도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는 낫지만, 상상으로라도 중전마마 놀이 하기엔 역부족! ㅋㅋ)

마지막으로 향원정이다. 중고등학생때 수없이 그려댄 향원정을 딱 그 구도로 찍어오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좀 더 왼쪽으로 가서 다리를 비스듬하게 잡아야하는데 해설 중 눈치보여서 그러지 못했다. 저 다리의 이름은 향기에 취한다는 뜻을 지닌 '취향교'. 원래 아치 형태로 건청궁 쪽으로 나 있었으나, 한국전쟁때 폭격 맞아 파괴된 것을 복원하며 반대쪽에 직선으로 놓았다. 건청궁은 최근에 복원하였으니 오래도록 그 자리는 그냥 빈마당이었고, 관람객 편의를 위해 다리도 반대쪽으로 놓았던 거다. 2030년까지 계속된다는 경복궁 복원사업이 끝나기 전에 저 다리 역시 건청궁 쪽으로 되돌려진다는 듯.

향원정에서 또 하나 웃겼던 건 수많은 연꽃들이 사라진 이유였다. 정말로 내가 중고딩때 그림 그리러 갔을 땐 연못 한 가득 잎 하나가 거의 우산만한 연잎이 수면을 가득 메워, 그것만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었다. 나도 몇번 시도해보았다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던 것 같다. 근데 김영삼 정부 시절, 기독교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자 '알아서 아부하는 관리들'이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경회루와 향원정 주변에서 죄다 뽑아버렸단다. (미친 거 아냐!?) 이젠 다시 작은 수련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암튼 이 나라 행정의 무식한 무대포 정신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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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전시회

놀잇감 2013. 5. 18. 16:33

조선시대 세워진 궁궐은 무려 다섯개. 5대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중에서 역대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고,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사라지기 이전에도 익히 애용했던 궁궐은 창덕궁이다. 그렇다고 다섯 궁궐이 동시에 모두 사용되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고, 법궁과 이궁, 두 개의 궁궐을 사용하는 양궐체제가 주욱~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궁궐이 여기저기 워낙 많아서 그랬는지, 원래 이름 이외에도 궁궐엔 별칭이 있었다. 경복궁은 북궐,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 경희궁은 서궐이라 불렀다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지금 담장으로 나뉘어 입장료도 따로 내고 들어가야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성종 때 대비마마가 무려 네 분이나 계신 덕분에 창덕궁이 비좁아 왕실가족을 위하여 넓혀 지은 공간이 창경궁이므로 엄밀히는 하나의 공간이었고, 당연히 드넓은 후원도 공유했다. 지금 창경궁 입장에선 아름다운 후원이 창덕궁 쪽에서만 접근할 수 있으니 꽤나 억울하겠다.

 

암튼 이 '동궐'이 조선시대 왕조사의 핵심이 되는 궁궐임은 분명한듯, 경복궁의 경우 흥선대원군 복원 당시나 이전의 단면도 정도만 현존하는데 비해 창덕궁과 창경궁 권역은 <동궐도>라고 하는 엄청난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서 각각 하나씩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로도 지정된 귀중한 자료인데, 놀라운 것은 이 <동궐도>에 대한 역사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든 전각은 물론이고 나무 하나 꽃 하나까지(심지어 나무 위 까치집도 있음!) 세밀하게 묘사한 놀라운 기법의 정밀화를 누가 왜 어째서 그리게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는 '미스터리'가 또 이 동궐도의 매력이다.

 

 

어쨌거나 고려대와 동아대가 각기 갖고 있던 동궐도 둘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있었다. 2월말에 시작해 5월 12일까지라기에 시간 많다고 여유부리다 끝나기 며칠 전에 간신히 볼 수 있었다(그러나 두둥~ 알고보니 6월 2일까지 연장 전시한다고! ㅋㅋ) 부산 동아대까지 가서 보긴 뭣해도 고려대 박물관에 가면 무료 상설전시로 언제든 구경할 수 있는 줄 알았더니만, 훼손 방지를 위해 더는 전시를 안한다는 것이 문제 ㅠ.ㅠ 고려대본 16폭을 죄다 펼쳐놓고 전시했던 때를 못 본 것이 참으로 아쉽다. 이번엔 화첩을 4개만 펼쳐놓고 나머지는 그냥 쌓아놨더군. 쳇. 빌려온 동아대본(병풍으로 만들어졌다)을 더 예우하려 했던 것일까나?

 

하여간 하나도 못본 것보다는 낫다고 애써 위로하며, 도화서 화원들의 솜씨에 감탄하며, 꽤나 훌륭한 보존상태에 기뻐하며 구경했다. 궁궐 강의 들을 때 창덕궁 소장님이 그랬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백년 수령의 향나무가 태풍때 가지가 부러지는 수난도 겪었고 계속 기울어 버팀대를 하고 있어 안타깝지만, <동궐도>에도 이미 그 향나무는 지주대로 버텨놓았을 만큼 고목이었다고.

 

그래서 <동궐도>는 단순히 역사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건축학과 조경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자료란다. 다른 화원이 그려서 그랬겠지만, 고려대본과 동아대본이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것도 신기하고 ^^;; 우진각 지붕인 돈화문(광해군 때 중건 이후엔 한번도 소실된 적 없다는데;;)을 팔작지붕으로 그려놓은 것도 미스터리란다. 그래서 전시장에서도 두 그림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컴퓨터 영상이 계속 돌아간다. 극사실화를 추구하더라도 계단 모양이나 대문의 빗살, 나무와 까치집의 크기 같은 건 화원마다 다르게 그렸을 수도 있겠으나, 선정전 잡상이 고려대본엔 있고, 동아대본엔 없다는 것도 참 재미있다. 현재 창덕궁 선정전에도 잡상이 없다는데... 어느 쪽이 맞을까나.

 

열여섯 폭 비단에 그린 고품격 채색화인 <동궐도>는 분명 당시에도 야심찬 기획이었을 텐데, 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지 생각할수록 궁금하다. 고려대본에 '인(人)이라고 적혀 '천/지/인' 세가지 본이 그려졌음을 알수 있다는데, 두 개만 전해지는 것도 안타까운 부분. 그나마 동아대본은 누군가 화첩을 아예 중간에 병풍으로 만들어 버렸고, '천'과 '지' 어느 판본인지 알 수도 없다. 세번째 지도가 더 있었다면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셋을 비교해보는 묘미가 더 컸을 텐데...

 

지도 자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동궐도의 제작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목조건축이라 수없이 화재 소실과 중건을 겪은 궁궐 전각에 대한 기록이 소상하기 때문이다. 창덕궁에서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공간인 '연경당'은 1828년 순조 때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려고 지은 건물이란다. 그런데 <동궐도>에 이미 연경당이 보인다. 그밖에 창경궁의 전각과 빈터 등을 고려할 때 동궐도는 1828년에서 30년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당시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이므로 효명세자가 도화서에 명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란다.

 

효명세자가 누군가. 정조의 손자로, 창덕궁 후원입구에 한칸 반짜리 소박한 북향 전각 기오헌을 지어놓고 언덕 너머 규장각에서 책을 날라다가 밤낮으로  '열공'하면서 할아버지 정조대왕의 뒤를 이으려고 했던 준비된 인재 아닌가. 그래서 순조가 일찌감치 대리청정을 시켰을 테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요절. ㅠ.ㅠ 정조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고 괜한 가능성을 점쳐보며 한탄하듯,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는 소현세자와 함께 효명세자 역시 요절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명운을 바꾸어놓았을 인물로 종종 손꼽히는 인물인데 참 아쉽다. 째뜬 그나마 귀중한 유산 <동궐도>를 남겼으니, 감사할 따름. 

 

국보급 유물의 전시라서 당연히 동궐도 진본의 촬영은 불가능했다. 대신 복사본을 밖에 걸어뒀던데 이왕 복사본을 만들려면 좀 제대로 또렷하게 인쇄를 하든지! 진품의 위용을 흐리지 않기 위함인지 복사본 지도는 흐리멍텅, 선이며 채색이 몹시 마음에 안들었다. 쳇;;; (그래도 찍어왔으면서  ㅋ)

 

가로 5.76미터 세로 2.73미터의 엄청 큰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 궁궐 안엔 나무를 심지 않았다는 원칙이 상당히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궁궐을 뜻하는 네모 안에 나무 목(木)을 넣으면 빈곤할 곤(困)자가 되기 때문에 궁궐 담장 안엔 나무를 심지 않는다고 하지만, 조경학에서 귀중한 자료로 사용할 만큼 동궐도엔 수종도 다양한 나무들이 엄청 많다!

 

 

복사본을 그나마도 흔들어 찍어온 위 사진으로 동궐도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기엔 역시나 역부족. 부분부분 세밀화를 보아야 느낌이 전달되므로, 문화재청 자료 자신 몇장 퍼왔다. ^^;; (그나마 화질이 좋아 퍼오긴 했으나, 실제 그림보다는 전체적으로 너무 노란 기운이 강하다)

 

팔작지붕의 미스터리를 갖춘 돈화문 부분. 문 앞으로 길게 뻗은 월대 앞 ㅈㅈ 표시는 궁궐출입자들이 모두 가마와 말에서 내려야한다는 하마비(그 앞에 ㄴ자로 생긴 돌의 이름)를 나타내는 거라고 들었다.

 

 

부용지에 배를 띄워놓은 모습도 보이는 주합루 앞과 그 너머 연경당의 모습. 조감도를 그릴 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 그릴 수 없었으니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겠고, 당연히 실제 거리나 원근법과는 좀 맞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5월에 그린 그림인 듯. 꽃나무 색깔이 아련하다. 저거 앵두나무일까? +_+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의 특색이 두드러져 보이는 부분. 현재 창덕궁에서 청기와가 남아있는 전각은 선정전이 유일한데, 이 그림엔 대조전과 복도각으로 이어진 경훈각(그림 맨 꼭대기 건물)도 청기와다. 청기와는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회회청으로 구워야해서 돈이 많이 들었다던데.... 아우.. 그림이 정말 정교하지 않은가! 깃발까지 날리고 있다. 전각마다 다 이름이 적혀있고, 편액 글씨까지 섬세하게 다 보이는데, 내가 무식하여 한자를 다 못읽는 것이 아쉬웠다. -_-;

 

안내문엔 하루에 몇번 로봇이 하는 전시 설명과 해설사 설명이 있다던데, 대학원생인 듯한 해설사 설명을 조금 듣다가 관뒀다. 완전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느낌으로 설렁설렁...   아무리 봐도 해설사란 남들이 뭐라든 자기만의 열정이 샘솟아야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 <하하하>에서 문소리가 열연했던 왕성옥 정도는 되어야... 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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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궁궐 중에서 그간 내가 경복궁을 그닥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유는 일단 워낙 넓어서 어수선하고 죄다 복원해놓아 '옛맛'이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광화문부터 삐까번쩍 새것이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복원한 흥례문과 영제교 일대도 죄다 새것이고, 웬만한 행각들도, 단청 안했다는 이유로 그나마 좋아라하는 건청궁도 복원한지 10년도 안 됐다. 일제시대 훼손을 피해 그나마 남아있던 몇 안되는 건물들 역시 다들 알다시피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기에, 조선 건국 후 처음 지어진 으뜸궁궐이라고는 하나 내가 느끼는 경복궁의 위상은 그리 높지가 않다. 

 

임진왜란 때 홀라당 타버린 여러 궁궐 가운데 광해군 때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중건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어차피 궁궐도 임금이 사는 집이니 나라도 좀 더 아기자기하게 사는 맛이 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창덕궁을 택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 사견일 뿐, 조선왕조가 경복궁을 다시 짓고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란다. 첫째, 전쟁으로 파탄 난 경제사정 상 드넓은 경복궁 전각을 복원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창덕궁 복원에 돈이 덜 든다는 신료들의 입김. 둘째,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풍수가들의 주장. 셋째, 가뜩이나 왕권의 입지가 불안했던 광해군의 얇은 귀? ^^) 어쨌거나 창덕궁, 창경궁엔 3-4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전각들이 더러 있는 반면, 경복궁엔 국보로 지정된 근정전, 경회루 정도만이 15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임란이후 경복궁보다 더 오래 '법궁'의 지위를 누렸던 창덕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도 되었겠다) 더더욱 조선 최고의 궁궐이라는 자부심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경복궁 계신 분들은 파르르... 떨며 인정 안하는 분위기. 경복궁이야말로 고대 예법에 맞춰 지어진 조선 최초의 궁궐이라니깐! ㅋㅋ)

 

내눈에도 경복궁은 돌아다니기에 너무 넓고 아직도 복원이 한참 덜됐다고는 하나 구석구석 어딘가 휑하고 정신이 없다. 물론 그 이유의 절반은 항상 지나치게 많은 관람객들 때문이다. ㅠ.ㅠ  창덕궁 역시 단체 외국인 관광객이 많긴 하지만 대규모 수학여행단은 좀처럼 볼 수가 없는데, 어휴.. 경복궁엔 항상 어딜 가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요즘은 특히나 수학여행과 현장학습 철인지 와글와글 시끄럽고 요란한 학생단체가 정말 많이 몰려다닌다. 초중고생은 입장료가 무료라서 더 그렇다는데, 하긴 나 중고등학생 때도 백일장, 사생대회는 늘 경복궁에서 했었다. 흙먼지 피우며 뛰어다닌다고 그때도 주변 어른들한테 핀잔듣고 그랬으니 참 세상은 변함없이 돌고도는 듯.

 

암튼 150년도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암만해도 경복궁은 창덕궁이나 창경궁만큼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덕수궁 석어당도 월산대군 사저일 때부터 선조가 임시 거처로 쓰던 그대로인 줄 알았건만, 화재로 1904년에 다시 지어졌음을 알고나서는 예전만큼 애정이 가질 않는다 ㅠ.ㅠ)는 딜레마에 빠져있던 차(?)에 엄청 오래된 물건을 경복궁에서 발견했다. 전각은 아니지만, 돌로 된 것이라 무려 태종때부터 그대로 내려온 것이라니 오호 놀라워라.

 

그것은 바로 영제교 양옆 석축에서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록'들이다. ^^

원래 네 마리인데 사진을 셋밖에 안찍었다. 오른쪽 앞에 있는 나머지 한 마리는 등에 구멍이 뚫려있는 걸 다시 메워놓은 문제의 서수인데, 그 앞쪽으론 늘 사람들이 바글거려서...

어쨌거나 얘네들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느라 이 근방을 헐어버렸을 때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다가 복원하면서 다시 제자리를 찾은 거란다. 이 천록상에 대해서는 영조 때 유득공이 서울을 유람하고 쓴 <춘성유기>에도 적혀 있단다. 이상하게도 당시 영제교 천록은 세 마리 뿐(동쪽에 두마리, 서쪽에 한 마리)이었고, 남별궁 뒤뜰에서 등이 뚫린 천록 한 마리를 본 적 있다며 필시 다리 서쪽에 있던 한 마리가 옮겨진 것이라고 유득공은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이 남별궁 뒤뜰의 천록도 고종 때 경복궁 중건하며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다는데...

 

여기서 다시 아쉬운 점이 발생한다.

요번에 광화문 일대 복원과 함께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던 천록들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옛 기록대로 등 뚫린 천록을 서쪽에 놓았어야 하지 않은가?!? -_-;;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등 뚫린 천록은 떡하니 다리의 동쪽 앞, 경복궁 안내팻말을 등지고 놓여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내면서 경복궁을 맨 앞에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었던데, '메롱'하는 천록(가운데 사진!)의 해학 찬양하는 내용은 있어도, 왜 등 뚫린 천록자리를 옛 기록과 달리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뜨르르 하는 학자들이 죄다 복원에 참여했을 텐데, 유득공의 기록을 무시할만한 다른 근거가 있었을까? 몹시 궁금타.

 

저 천록들 말고도 경복궁에서 내가 다른 궁궐보다 더 예스럽다고 느낀 부분 역시 '돌'인데, 엄밀히 이건 150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어느 궁궐보다도 '오리지널'이다. ^^; 그것은 바로 근정전 앞 조정의 박석. 다른 궁궐 조정의 박석들은 일제가 잔디로 바꿔놓았던 것을 현대 들어 복원하며 기계로 다듬어 깔아놓은 것인 반면, 근정전 마당 박석은 고종 때의 것. 깨진 박석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 박석 역시 고종 때 박석을 캐온 강화도 채석장에서 날라온 것이라 확실히 다른 궁궐 박석과는 느낌이 다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와처럼 구운 매끈한 전돌을 깔 수도 있었겠지만(근정전 바닥은 바로 그런 전돌이 깔려있다), 조정 마당에 굳이 울퉁불퉁한 박석을 그대로 깔아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단다. 현장학습 온 학생들에게도 선생님들이 종종 그 이유를 알아오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 녀석들 머리 쓸 생각은 안하고 대뜸 해설사분들에게 달려와 묻곤 한다. 흥! 그러나 쉽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ㅎㅎ

 

첫째는 미끄럼 방지. 옛날 가죽신엔 고무창이 달려있을리 만무하니, 매끈한 전돌이 깔려있었다면 비오는 날 뇌진탕으로 쓰러지는 사람들 여럿이었을 거다. 마른 날에도 미끄럽긴 마찬가지였을 테고...

둘째는 눈부심 방지. 울퉁불퉁한 박석 표면이 햇빛을 난반사하여 눈부심도 방지하고 근정전 안까지도 조명효과를 낸단다.

셋째는 배수량 조절. 워낙에도 근정전 앞 마당의 기울기가 상당하여 배수에 신경을 썼지만, 흐르는 물줄기가 박석 사이사이로 한번 더 휘휘 돌아 천천히 배수구로 모여들게 하는 이치다. 

넷째는 경거망동 방지. 임금 앞이기도 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으니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다섯째는 지열 분산. 예전엔 박석 사이 간격이 훨씬 더 넓었고 자연히 사이사이에 풀도 많이 났단다. 한여름 뙤약볕에 달궈진 돌 대신 풀을 밟고 서면 지열을 피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지만 현재 근정전 마당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그러나 풀 자란 곳이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구석쪽에나 간신히 풀이 자란 걸 볼 수 있는데, 설명 듣기 전까지 난 박석 사이에 잡초 자란 게 오히려 관리소홀인 줄 알았었다. ㅎㅎㅎ  그런 게 미안해서 친히 풀 자란 부분의 박석도 찍어왔음.

 

왼쪽 윗부분 공백은 아무래도 내 손가락인갑다 -_-;

 

한번에 무려 세 시간씩 경복궁에 대해서 다시 심화교육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도 편전까지밖에 못 들어갔다. 하기야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했던 첫 수업에선 세 시간 강의를 들었는데도 근정문엘 들어가지 못했으니 오죽하랴. 알아야 할 것은 많고 두뇌는 한계가 있는데, 복작거리는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싫고 생활한복이든 전통한복이든 복장강요하는 것도 싫으니 고민은 계속되는 중. 일단은 배우는 데까지만 배워보는 걸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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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 좋아서

삶꾸러미 2013. 3. 25. 18:00

혹시 나처럼 궁궐이, 또는 한옥이 좋아서 궁궐 전각 청소라도 하면서 가까이서 보고 싶어한다거나 궁궐 한옥과 관련된 공부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어쩌면 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번에 내 경우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일을 저지르고 났더니만 공부할 땐 좋았는데, 이젠 뭔가 막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좀 당황스럽다. 원래 원했던 것이 이거였나 싶기도 하고, 궁극적인 목표(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는 궁궐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를 달성할 때까지 일단 참으며 계속 따라가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 줄곧 의문이 든다.

 

내가 멍청해서 그렇지, 요즘 사람들이야 검색 능력이 워낙 뛰어나므로 마음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잘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겪어보니 단체와 경로도 워낙 많아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뭐가 뭔지 아리송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야 좀 알게 된 문화재 관련 민간활동의 차이와 접근법을 좀 적어놓을까 한다.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면 다행이고,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뭔가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볼 때 한 쾌에 필요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속셈도 있다. 

 

하여간에 궁궐이나 문화재, 박물관에 관심이 있고 그것과 관련된 교육을 받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보아야 할 곳은 문화재청(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홈페이지다. 궁궐과 한옥, 기타 문화재, 유적지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망라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연계된  NGO와 재단에 대한 링크와 소개도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 관련 자원봉사 공지는 대부분 문화재청 게시판에도 동시에 올라온다. 종종 무료 인문강좌 안내도 올라와서 나는 그걸 노리고 들락거리다 그만 궁궐을 '지키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받는 교육을 알게 되었다. ^^

 

처음 내가 알고 있던 단체는 아름지기(http://www.arumjigi.org/). 

창덕궁이 워낙 내가 좋아하던 궁궐이라 거길 청소하려면 아름지기 자원봉사 회원이 되는 수밖에 없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회원을 연중내내 모집하는 게 아닌데다 대체 언제 모집하는지 통 잘 모르겠고(알아보면 늘 모집 끝났다고 나왔다. 흥!) 연회비(12만원)도 내야한대서 일단 마음을 접었었다. 처음에 어느 대기업이 세운 재단이라는데 내가 별로 안좋게 보는 대기업이란 것도 마이너스 요인.

하지만 현재는 후원기업의 목록이 상당히 많고 문화재 주변 환경정리사업 뿐만 아니라 한옥 보급, 한옥 운영 같은 것도 함께 한다.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함양한옥이 바로 아름지기가 운영하는 곳이다. 아무래도 '재단'이다보니 영리사업도 하는 게 아닐까. 회원이 되면 함양한옥 숙박비도 약간 할인된다는 것 같다. 헌데 여기선 문화재나 역사 관련 교육도 매번 돈을 내고(1만원 정도) 신청해서 들어야 한다. 그나마도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일반인 상대 교육을 요샌 거의 안하는 것 같다. 요즘 질 좋은 무료강좌가 얼마나 많은데 돈까지 내가며 듣겠나. ㅎㅎ

 

알고보니 자원봉사를 청소수준에서만 그치고 싶었다면 내가 찾아갔어야 하는 단체는 따로 있었다. 바로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한문화재 한지킴이'(http://jikimi.cha.go.kr/community_new/newCafeMainList.action)

주요 문화재를 하나씩 기업체 하나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개인이나 가족 지킴이 신청도 받는다. 문제가 있다면 관심 있는 문화재를 딱 한 군데 지정해서 활동해야한다는 점(하기야 궁궐해설사가 된다해도, 궁을 한군데만 정해서 해야한다. 몇년쯤 경력이 쌓인 다음에 소속을 바꿀 수야 있겠지만;;). 게다가 문화재 지킴이를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심사를 거쳐서 통보를 해준다고 한다. 창덕궁 같은데는 바로 옆에 있는 현대에서 맡아서 지킴이 봉사한다고 들었는데 개인이 신청한다고 창덕궁 청소활동에 붙여주기나 할지 그건 미지수다(그러고 보니 창덕궁 도배랑 청소 같은 건 아름지기 전담이라던데, 어떻게 활동영역을 나눴는지는 알수 없다). 하여간에 이 제도는 자기가 사는 곳 주변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아끼고 보호하는 활동을 권장하기 위함이란다. 정부 주도의 커뮤니티 활동이므로 유료회원제도는 아닌 것 같다만 끝까지 가입해보질 않아 확실하지 않다. ^^; 내가 궁궐 전각 청소를 빌미로 문화재에 좀 들어가볼 작정으로 공부 시작했다니깐, 다들 그럼 한문화재 한지킴이를 했어야 했다고 조언해주었다. 쩝;;

 

다음으로는 '우리궁궐지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http://www.rekor.or.kr/)이 있다. 4대궁궐과 종묘에서 해설 자원봉사를 주 활동으로 하고, <우리문화사랑방>이라고 해서 한달에 한번(매월 셋째주 토요일 3시-5시) 일반인 대상으로 무료 인문강좌도 여는 단체다. 이곳에서 두어달 간 소정의 교육을 받고(교육비 15만원) 6개월 수습활동까지 거치면 궁궐 해설사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한달에 만원씩 회비도 내면서... (아름지기 연회비가 12만원인 걸로 보아 유사 단체들 모두 그게 적정 회비 수준이라고 정했나보다. 혹시 이것도 담합? ㅋㅋㅋ) 궁궐과 종묘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 담당 요일은 금요일과 토요일. 지원자격은 18세-65세 사이,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연말에 있는 듯. 정식으로 궁궐해설사가 되어 자원봉사를 하게 되면, '한복'이나 최소한 '생활한복'을 입고 활동해야 한단다. 궁궐을 안내하는 자원봉사자에 대한 문화재청의 요구사항이라고. (헌데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경복궁의 경우 문화재청 소속일 듯한 해설사 직원들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가만보니 검은색 코트를 유니폼으로 입는다. 창덕궁 해설사들은 다 한복을 입던데, 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유무의 차이일까? 암튼... 유료 해설사들은 한복 안입고 설명하는데 자원봉사자들은 반드시 한복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웃긴다! 흥)  

 

궁궐지킴이의 종류는 또 있었으니, '궁궐길라잡이(http://www.palaceguide.or.kr/)'라고 원래 한국청년연합(KYC)에서 운영하던 NGO인데 따로 독립했다는 것 같다. 암튼 여기도 똑같이 15만원의 교육비를 낸 뒤 총 8개월간 이론교육과 실습교육을 마친 다음에 무료 궁궐해설사로 활동한다. 활동 요일은 일요일. KYC에서 시작한 터라 궁궐지킴이보다 상대적으로 궁궐길라잡이의 연령대가 낮다고 들었다. ^^; 그러나 교육생 지원자격은 '성인'으로만 되어 65세로 제한이 있었던 한국의 재발견보다 오히려 더 탄력적이다.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같은 시기가 아닌듯, 올해는 2, 3월에 모집 공고가 났고 최근 60명을 선발했다. 여기도 교육 마치고 해설사로 활동하려면 회비를 내야하는데 학생 5천원, 성인 만원. (오, 학생한테 유리하군! 그러나 방학도 아닌데 어찌 교육을 받으라고 쯧쯧쯧;;). 여기도 정식 궁궐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할 때는 생활한복을 입어야 한다. 궁궐지킴이들은 각자 취향에 맞는 한복과 생활한복을 입는 반면, 궁궐길라잡이들은 생활한복 유니폼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내 눈엔 심히 안 예쁘다. 내가 변형한복을 마뜩찮게 여기기 때문일 수도;;)

 

뿐만 아니라 궁궐문화원(http://gungstory.com/common/main.asp)도 있다. 여긴 어린이와 청소년 궁궐학교와 체험학습을 좀 더 세밀하게 운영하고 있는 듯, 청소년 궁궐기자단 같은 것도 모집한다. 궁궐에서 자원봉사할 문화해설사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역할은 위 단체들과 똑같다. 창경궁 내에 궁궐문화원이 있다고 하는데, 교육받는 공간이나 사무실 같은 것들이 대체 어디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사회적 기업이라서 무려 궁안에 사무실을 차리게 해준 건가? ^^

어쨌거나 여기도 지난달엔가 궁궐 해설 자원봉사자 교육생을 모집했다. 00명이라고 공고가 났던데, 신청인원이 적었는지 최종 선발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다. 똑같이 10주 정도 기본교육을 받은 뒤 6개월 현장 수습기간을 거쳐, 궁궐해설사로 활동하는데, 종묘를 제외한 4대 궁궐에서 매주 목요일에 자원봉사를 하게 된단다. 역시나 지정 복장을 해야한다는 걸 보니, 자원봉사 활동시에는 한복을 입어야하는 모양이다(맞다, 문화재청의 권고사항이랬지;; ㅋ). 자원봉사 이외에도 여기는 '문화유산 체험학습지도사', '궁궐숲해설사' 같은 자격증을 따기 위한 전문가 양성과정도 있고, 관련 자격증도 발급하는 모양이다. 자원봉사가 아니라 나중에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쪽으로 접근해야 할 듯.

 

그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민속박물관, 서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과천현대미술관... 기타등등 온갖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도 자원봉사 해설사를 모집하고 있으며, 간간이 유무료 인문강좌를 연다. 왕릉에 대한 수업도 있고, 기획전시 일정에 따라 특정 시기의 유물에 대한 강좌도 있다. 시간과 에너지만 허락된다면 찾아다니면서 들어볼만한 인문강좌가 참 많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각종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인문강좌도 많고, 아예 문화해설사 과정도 따로 있더라. 인문학이 외면을 받고 죽어간다고 한쪽에선 난리지만(흔한 말로 "요즘 인문학을 공부하면 하버드 학위가 있어도 취직이 안돼!"라고들 한다.) 현실에선 분명 인문강좌에 대한 수요가 꽤 많다는 얘기다. 이 또한 내겐 좀 의아하고 신기했다. ^^

 

나로선, 아니, 내 돈 내고 생고생하는 자원봉사를 빡세게 교육까지 받아가면서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먼저 들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참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나보다. 타인을 위한 봉사가 곧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어쩐지, 나는 아직 그런 숭고한 이념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라 기묘하기만 한데 눈 씻고 찾아보면 자신의 흥미에 맞게 찾아할 '봉사할' 일은 널려있는 듯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할 일을 시민에게만 떠맡기는 건 아닌가 나 같은 삐딱이는 좀 의심스럽지만 뭐 다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데 어떡하겠나. 너도나도 재능기부가 유행인 것을. 나처럼 깊은 생각 없이 기웃대는 사람은 오래 버텨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지만 암튼 당분간은 재미난 구경 다니는 셈치고 지켜볼 작정이니 앞날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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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놀잇감 2013. 3. 21. 00:33

탑골 공원의 노인들이 대거 종묘 앞 공원으로 몰려들면서 종묘는 내게 더더욱 매력없는 곳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파르테논 신전 기둥들만 위대하다 구경다닐 게 아니라고, 조선 왕들의 사당인 종묘 역시 신전으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춘 곳이라고 책에서 읽긴 했어도 내심으론 좀 미심쩍었다. 지나치게 길쭉하기만 한 종묘 건물들 역시 아름다운 한옥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궁궐들과 달리 종묘에 대해선 그렇게 좀 삐딱한 생각이 있었는데, 이론수업에 이어 답사를 가보고는 의외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 설명에 쏙 빠져들었다. 종묘제례 순서와 음악과 제관들의 역할과 동선, 각종 제물과 제기 놓는 위치까지 죄다 기록으로 남겨놓아,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실연할 수 있게 해놓다니, 비록 망하긴 했어도 조선의 문화수준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종묘 정전의 모습. 신실의 수는 모두 19칸이란다. 좌우행각을 잘라도 워낙 길어 한 화면에 잡을 수가 없다.

종묘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답사를 다녀온 이후에도 잘 모르겠다만 ^^; 왜 그렇게 건물이 마냥 옆으로만 길어졌는지 사연을 들여다보면 결국 저 아랫동네 종가집 제사 문화와도 관련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종묘는 궁궐보다도 먼저 지어졌다.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 그리고 곡식과 땅의 신을 모시는 사직이 국가의 근간으로 궁궐보다도 더 중요했단 얘기다. 사극에서 만날 '종묘사직' 운운하는 이야기가 그 때문이란다.

 

암튼 천자국은 7묘, 제후국은 5묘가 당시 예법이고 왕실제사도 4대조만 봉사하면 되므로 신실 5칸만 만들어놓으면 되는데 왜 저렇게 자꾸만 길이가 늘어났느냐. 그건 결국 '효'를 확장하면 '충'이 되는 유교원리를 널리 지배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기 위한 일환인 것 같다. 그리고 그놈의 '정'과 '정통성에 대한 집착'? ^^; 세월이 흘러흘러 4대조 봉사에서 벗어나는 까마득한 조상 신주는 옆에 따로 마련한 영녕전으로 옮기면 그뿐인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니 옮길 수가 없어 그냥 놔두었고, 태종도 공이 많으니 그냥 놔두었고, 세종대왕은 당연히 위대한 왕이므로 옮길 수가 없었고... '불천지주'라고 해서 옮기지 않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을 늘려짓게 된 거다. 종묘에선 서쪽이 높은 자리라서 왼쪽 신실은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오른쪽으로만...  

이성계가 추존한 4대조와 정전에서 밀려난 나머지 왕들의 신주가 있는 영녕전. 여긴 지붕높이로도 가운데 4칸이 가장 선대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공덕이 높은 선대 왕만 정전에 계속 두기로 원칙을 세웠지만, 왕이 되고 보니 자기 아버지가 '불천지주'가 되야 그야말로 '끝발'이 서는 셈이니 숙종 같은 임금은 아직 신주 옮길 순서도 되지 않은(원래 4대째 후손 왕이 신하들과 논의하여 정해야 하는데!) 아버지 신주를 후다닥 불천지주로 정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암튼 그래서 몇칸씩 자꾸만 미리 늘려지어놓은 정전 신실이 무려 19칸에 이르게 됐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걸 다시 지은 원래 건물 부분의 기둥은 배흘림 기둥이고 후대에 증축한 부분의 기둥은 민흘림 기둥이라나 뭐라나... 예리한 눈으로는 기둥 다른 것도 구분할 수 있다는데 난 설명듣기에 바빠 그것까지 확인하진 못했다. ^^

 

하여간에 종묘를 직접 가보고서 처음 알게된 것 하나는 내가 그간 왕릉 구경다니면서도 궁궐과 똑같이 가운데가 어도이고 좌우가 문무 신하들이 다니는 길이라 착각했던, 박석 깔린 길의 용도였다! 아 글쎄, 가운데는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을 옮기는 제관)만 다닐 수 있는 신도이고 오른쪽이 왕이 다니는 길, 왼쪽이 세자가 다니는 길이었단다. 대동한 신하들은 박석에도 못 올라갔단 얘기. 심지어 종묘 정전과 영녕전 앞의 대문도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만 드나들 수 있다. 왕릉 홍살문이 신성한 공간임을 가리키는 곳이란 건 전에도 알고 있었는데, 양쪽 대문도 궁궐문처럼 다 막힌 판문이 아니라 홍살문처럼 위쪽이 뚫려있었다. 왕과 제관들은 종묘 입구부터 아예 동선이 달라져서 옷 갈아입고 목욕제례 준비하는 별도의 건물로 들어갔다가 동문으로 입장한단다. 악공 같은 하급 관리들은 동문 출입도 안되고 반대편 서문으로 드나든다고.

 

그래서 답사 설명 내내 교육생과 관람객들에게 함부로 한 가운데 신도를 밟지 말라는 당부가 이어졌고, 종묘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내용이 적힌 팻말도 서 있었다. 하지만 어디 사람들이 그런데 계속 신경을 쓰는가 말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인 것을. ㅋㅋ 하여간 종묘와 왕릉의 가운데 길은 인간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던 제례절차와 제물의 종류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제사 지낼 때 향과 술을 왜 같이 올리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믿는단다. '혼비백산'이 거기에서 나온 말이라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스며드는데, 그래서 혼은 사당에 모시고 묘를 만들어 백과 시신을 함께 모시는 거란다. 제사를 지내려면 혼백을 다시 모셔와야 하니, 향을 피워 혼을 부르고 술을 부어 백을 불러올린다네! 종묘 신실 앞에는 그래서 바닥에 술을 붓는 구멍도 있다고! ^^; 일부 집안에서 제사때 '모사기'라고 하여 모래를 담은 그릇에 술을 붓는 순서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다. 나로선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

 

어쨌거나 재미났던 건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명절 증후군을 앓듯, 역대 조선의 왕들도 직접 제사를 올려야하는 날짜가 잡히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종종 병을 앓았단다(가령, 재임기간이 특히나 길었던 영조가 와병으로 제사를 친히 지내지 못해 개탄하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나온다고;;). <국조오례의> 율법에 따라 왕이 직접 가는 제사(친행)와 신하를 대신 제관으로 보내는 제사(섭행)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왕이 제사증후군 때문에 지엄한 국법을 더러 지키지 못했다는 얘기다. ㅋㅋㅋㅋ 그 옛날 왕실 제사도 그럴진대 요즘 우리들 제사야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런데도 요즘 일부 종가집에서는 까마득한 몇대 조 할아버지 제사며 시제까지 꼬박꼬박 지내고 있으니... 전통을 따진다면 수천년전 전통이 더 역사 깊고 오래 된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불과 6백년인데 뭘 그리 예법 따지고 전통 따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왕실사당에서 유교 예법에 맞춰 4대조 봉사를 하고, 심지어 불천지주를 정하여 수많은 선대왕에게 1년에도 몇번씩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영녕전으로 옮긴 왕들에 대해서는 1년에 딱 한번 한식에만 제사를 지냈다. 오 나름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놀랍게도 양반가에서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대부분 4대조 봉사를 하지 않았단다. 간편하게 부모님 제사만 올리는 것이 대세! 하기야 부모 돌아가시면 3년상씩이나 해야하는데, 어떻게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챙기겠나! 

 

신분 가리지 않고 고조부까지 4대 봉사를 한 건 순전히 조선후기 들어 성리학에 지나치게 얽매인 지배층의 의식변화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선중기까지는 딸, 아들 구분없이 제사와 차례를 나누어 모시거나 번갈아 모셨으며 재산분배도 동등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체적인 나라 살림살이가 거덜난 가운데 빈부상하 할 것 없이 4대 봉사의 전통이 서서히 자리잡으면서 유산과 제사 모두 장자에게 편중되는(한 놈이라도 먹고 살게 밀어주자;; 뭐 이런 심리) 악습이 시작되고 만 거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민가의 제례가 신분의 격차에 따라 아예 정해져 있었다. 벼슬이 대부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면 됐던 거다. 그나마도 불교식이라 매장이나 화장 후 신주는 절에 모셨으므로 실제 제례는 절에 가서 제를 올렸단다. 그러니까 고려시대만 해도 집안에서 복작복작 여자들이 제사음식 장만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

 

설날을 기점으로 차례와 제사가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오면서 당연히 울 엄마를 비롯해 일부 집안 어르신들이 큰 걱정을 했다. 한 번 나간 제사가 다시 돌아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이번 궁궐 수업을 들으러 다닌 건 어쩌면 우리집에 그런 일이 있을 걸 미리 안 미지의 힘이 나를 조종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수업때 듣고 책에서 읽은 '옛날 법도'와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어르신들의 우려를 쉽사리 잠재울 수 있었다.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황, 이이 때만 해도 딸이랑 아들이랑 번갈아가며 부모 제사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데 뭘요! 딸과 사위가 혼례 후 계속 친정에 눌러 살면서 친정집안 제사를 도맡는 경우도 많았단다. 당시 논의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건 현모양처의 화신 신사임당 드립! 오죽헌은 다들 알다시피 신사임당의 친정집, 율곡 이이의 외가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출가 후에도 오죽헌에서 무려 18년을 살았단다. +_+ 친정 집안에 아들이 없기는 했지만, 남편과의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지만 정말 '현모양처' 치고는 대단한 뚝심 아닌가? ㅋㅋㅋ (그 옛날에 신사임당이 18년간 강릉 친정 살면서 시댁 올라가서 제사 지냈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팔순 큰고모는 대답을 못하셨다 ^^v)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옥 고택의 사연을 읽다보면 놀랄 때가 많다. 주로 양반 아무개가 장가를 들어 처가집 근처에 새로 지은 집인 경우가 왜 그리 잦은지! 그 옛날엔 영아사망률이 워낙 높다보니 남자가 여자네 집으로 장가를 들러가면 집을 새로 짓든 말든 암튼 친정에서 최소한 3년쯤 첫 아이를 낳아서 무사히 돌잔치를 할 때까지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단다. 친정엄마한테 육아 맡기느라고 친정 근처에 집 얻는 요즘 세태와 다른 게 무언가!

 

종묘 이야기하다가 흥분해서 딴소리로 끝나고야 말았지만 하여간에 왕이든 평민이든 제사는 참 부담스러운 행사였다는

점이 이날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진창에 발이 푹푹 빠지고 돌아다면서도 경쾌하고 기분좋게 답사를 마치고 돌아설 수 있었던 듯. 그날은 겨울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예뻤다. 

 

그러고 보니 밀린 답사후기도 이걸로 끝이다. 이때만해도 사방에 쌓인 눈이 수북했는데, 꽃샘추위라 내일은 날씨가 다시 영하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햇살과 꽃눈을 보면 확실히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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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치기

투덜일기 2013. 3. 8. 23:40

다섯번의 현장답사를 빼고도 18번이나 이론수업을 받은 내용을 하루아침에 벼락치기로 몰아서 공부하면 과연 결과가 좋게 나올까? +_+ 왕릉답사 가는 날은 사촌동생 결혼식이랑 겹쳐 당연히 못갔고, 지난주 화요일엔 몸도 안좋고 강의내용도 별로라서(대인 예절과 자기관리법 같은 거였다) 두번째 결석을 했다. 개근상 받을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궁궐지킴이 활동을 정식으로 할지말지, 그것 역시나 여전히 고민중이라서 내일 시험도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난 두달 넘게 계속 마음이 변덕을 부렸다. 아 다 귀찮아, 그간 배운 걸로 충분해. 그런 마음이었다가 또 과연 시험을 보면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왜 사서 간을 졸이려는지 모르겠으나, 내 실력을 평가받고 싶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또 시험에 떨어지면 쪽팔리고 자존심 상할까봐 아예 응시하지 않아야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든다. 아우 이놈의 변덕과 우유부단함!

 

학창시절에도 워낙 벼락치기의 여왕이었던 터라, 한 사나흘 빡세게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면 시험에 떨어지진 않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건 어디까지나 며칠 전 상황이었고, 실제 며칠동안은 놀러 나가거나 오늘아침까지 애먼 일(애물단지 동생을 돕는 일;;)로 밤샘까지 해야 했다. 결국 오늘은 온종일 시체놀이를 하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밤중이다. 심지어 내일은 저녁때 왕비마마 생신 파티가 있어서 저녁먹고는 간만에 또 대청소도 했다. ㅠ.ㅠ

 

두툼한 교재와 그간 깨알같이 적어놓은 필기노트와 궁궐 답사 갔을 때마다 집어온 안내책자를 책상에 쌓아놓고 앉아있긴 한데, 언제 다 읽어보나 싶은 것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객관식 문제만 있으면 대충 찍는 걸로 밀어부쳐 보겠는데, 주관식도 있단다. 이걸 해, 말어? ㅋㅋㅋㅋ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 맞기는 한데,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나답고 깔끔한지 그걸 모르겠다. 어흑...

 

오매불망 선망하던 궁궐 전각에 그나마 좀 자유로이 출입하려면 궁궐지킴이 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겠으나, 또 다시 몇 달 수습기간을 거친 뒤 부족한 숫기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인데 과연 내가 그 자부심 돋는 '자원봉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자원봉사가 진정 타인을 위한 것인지 본인의 허영심 만족을 위한 것인지 아직도 갸웃갸웃 하는 사람으로서 자격이 되는가 말이다. 100명이나 되는 교육생들과는 두달반 동안 완전히 생까고 잘 지냈지만, 수습이랍시고 궁궐에 배정되고 나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텐데 아무리 궁궐애호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도 나름 '조직'에 속해서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는 걸 내가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벼락치기든 아니든 '시험'을 위한 공부는 정말이지 하기 싫다는 진리를 또 한번 깨달으며, 여기 끼적이다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 예상되는 나의 행동이 대강 그려지기는 한다. ㅋㅋㅋ 일단 밤샘을 해서라도 벼락치기에 힘을 써보겠지. 그래서 시험범위를 다 끝내면 시험을 보는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이고, 범위를 다 못 끝내면 아마 시험시작 직전까지(1시부터 마지막 교육과 수료를 마치고 시험은 3시부터 본다 ^^;;) 볼까말까 계속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에라이 소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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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답사

놀잇감 2013. 2. 26. 17:50

포스팅거리가 너무도 많이 밀려있다보니, 길고 긴 겨울방학 끝자락에 훌쩍훌쩍 눈물 훔쳐내며 밀린 일기와 숙제 하는 아이 같은 심정이다. 방학일기야 까짓것 대충 써가거나, 아예 안 써가면 그만이지, 하며 대범하게 넘겼던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서도 나는 지난 신문더미에서 한두달 전 날씨까지 확인해가며 꼬박꼬박 밀린 일기를 쓰곤 했다. 연필 하나로 계속 연달아 쓰면 밀렸다 한꺼번에 쓴 일기임이 탄로날까봐(대체 앙큼하게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았을까??) 연필도 뭉툭한 거 진한 거 흐린 거 바꿔가며 쓰던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해간 방학숙제와 일기로도 상을 하나쯤 은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_+ 

 

아무튼... 정신없이 2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 궁궐지킴이 시험을 볼지말지도 아직 결정을 안 내렸고, 1월달엔 꽤 열심히 했던 예습복습(! 답사 후 포스팅하는 게 주요 복습이었는데;;)도 완전 무시하며 지낸 터라 머리에 뭐가 남아있긴 한가 잘 모르겠다. 일단 기억을 환기하여 적어보기로...

 

현대미술관 덕수궁 분점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 덕수궁에 대해서는 그나마 익숙하고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ㅋ 전각 이름 좀 알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아는 건 결코 아니었다. 덕수궁 답사의 시작을 환구단 정문에서 한다고 할때부터 의아했다. 엥? 시청앞에 환구단 정문이 있다고? 답사안내문에 나눠준 사진과 그림을 보니 그렇다는데, 지난 가을 덕수궁 프로젝트 관람하고 나서 대한문을 나와 분명 시청앞 광장으로 길을 건너가 저녁을 먹으러 갔었음에도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내심 요 몇달 새에 생긴 건가 싶었다.

 

최근에 복원된 건 맞지만(2005년이라던가;;), 물론 환구단 정문은 분명 작년 그날에도 시청앞 광장 건너편에 엄연히 서 있었다. 무지한 내가 못 본 것일뿐.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덕수궁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와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덕수궁 자리는 과거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타버려 피난 갔던 선조가 돌아와 석어당(석어당이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다)에 머물게 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렸었다. 헌데 일반주택이라 해도 일단 왕이 머물고 나면 일반인이 다시 살 수가 없으며, 집에도 '궁'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운현궁이 '궁'인 이유도 훗날 왕이 된 고종이 살던 집이기 때문이다. 암튼 그래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가 머물렀던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내렸다. 덕수궁을 경운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의 근본이다.

 

임란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고 난 뒤 경운궁은 오래 별궁으로 남아 외면당했다가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다시 역사의 중심이 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성기 때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했단다. 궁역을 자꾸만 넓히며 건물을 짓다 보니 심지어 정동길 너머로도 영역을 확대하여 구름다리로 연결해 썼단다. 이론수업에서 아직도 그 때의 구름다리 흔적이 남아있으니 정동 돌담길 걸으며 한번 확인해보라는 말도 들었겠다, 공식 답사일정이 끝나고 나서 실제로 둘러보니 그 부분이 눈에 딱 들어왔다.

 

두툼한 구름다리 석축이 확실히 담장보다 튀어나와 있는 게 보이지 않나? 여기 말고도 경희궁 쪽으로도 구름다리로 두 궁궐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같다. 경희궁 터야 완전 박살나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이 건너편은 서울 시립미술관이니까 구름다리를 복원해도 좋겠다 싶었다. 어차피 덕수궁(경운궁)은 고종황제가 근대왕조국가를 꿈꾸며 새로 짓다시피 확장시킨 궁궐이니 현대 기술로 복원하기에도 수월하지 않을까나.

 

덕수궁이 다른 궁궐에 비해 이질감이 컸던 이유도, 궁궐건축의 원칙과 풍수에 따라서 산세를 등지고 터를 고른 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남은 땅을 최대한 활용한 데다 근대건축술을 도입한 서양식 건물을 한옥전각 바로 옆에 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고종의 지시로 덕수궁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이 셋 있는데,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이다. 석조전을 고종황제가 생활공간으로 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입김으로 생겨난 건물인 줄 알았더니 고종이 친히 의도하여 지은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궁궐은 전각별로 쓰임새가 다 나뉘지만, 서양식 궁궐은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 하나에 온갖 용도의 공간이 다 들어있지 않은가. 고종 역시 석조전을 크게 지어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려 했다. 

 

언젠가 한국근대미술전 보느라 석조전에 들어가서 본 서양식 응접실과 다실에서 고종황제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의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짠했다. 나라를 빼앗긴 무능력한 왕의 전형으로 오래도록 알려졌던 고종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그 시기는 중세왕조가 사라져가고 근대국가가 생겨나는 시기였으니 조선의 패망이 고종황제의 무능력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탓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고종황제가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러 다닌 것도 황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뜻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전까지는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기에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엄연히 내려왔던 환구단의 전통이 조선초 완전히 사라졌던 것을 고종이 되살린 것이라고.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 문앞에서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옛날 환구단의 모습인데, 담장 주변 잡초로 보아 일제가 철거하기 얼마 전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환구단의 흔적은 시청앞 광장에 있는 줄도 모르게 서 있는 복원된 정문과 빌딩숲에 가려져 간신히 보이는 환궁우와 삼문(흑백 사진 왼쪽의 팔각정 같은 전각과 아치 세 개 부분), 돌북 세 개뿐이었다. 복원공사를 계속 하고 있긴 하던데 아는 사람이나 알지, 나도 예전엔 조선호텔 후원에 세워놓은 정자인 줄만 알았거늘... 흠.

 

왼쪽 사진이 바로 환구단의 정문을 뒤쪽에서 찍어온 것이다. 시청앞 광장 쪽에서는 사실 찍어도 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건물인 재능교육에서 해고당한 방문교사들이 바로 저 문 앞 인도에 천막을 쳐놓고 천팔백몇십 일째 농성중이었다. 올 겨울 유독 추위가 엄혹했는데 천팔백일만 따져도 대체 몇년째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복원은 했다지만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환구단 정문의 위상이나 재능교육 해고교사들의 위상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고종황제는 덕수궁 대한문을 나서 환구단까지 위엄 돋는 행차를 거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일제의 압박에 왕위를 물려줄 때도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뿐 정식으로 양위의 뜻을 밝힌 적이 없단다.  그런데 일제와 친일파 대신들이 얼렁뚱땅 왕위를 순종에게 넘긴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일제는 상왕이 된 고종을 격하시켜 '덕수궁 이왕'이라는 궁호를 내렸다. 그래서 덕수궁이란 이름을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에 열을 올리는 이들도 많은가본데, 대체로 덕수궁으로 그냥 쓰자는 분위기가 대세라고. 덕수궁 원래 이름이 경운궁인 걸 아 글쎄, 일반인들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지난 가을 찍어왔던 정관헌 사진 재활용^^ 경운궁 내 최초의 서양 건물이라는 중명전

 

<무한도전>에도 나와서 꽤 유명해진 '정관헌'은 경치좋은 곳 여기저기 정자를 세워두었던 다른 궁궐과 달리 땅이 좁은 덕수궁에 정자 대신 세워놓고 고종이 커피도 즐기고 연회를 벌이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장소다. 서양식 건축과 한옥 양식을 섞어 지어서 어찌보면 이도저도 아닌 요상한 양식이 되었지만, 베란다에 깔린 타일도 예쁘고 기둥과 난간에 새긴 십장생이며 용무늬도 꽤나 정교하다.

 

'중명전'은 덕수궁 담장 밖에 있다. 홍순민의 <우리 궁궐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이 건물이 해방 이후 여러번 팔리다가 개인 소유가 되어 사무실 건물로 함부로 쓰이고 있다는 통탄의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얼마 전 정부가 사들여 복원해놓았다. 미 대사관저를 사이에 두고 현 덕수궁과 뚝 떨어져 골목 안에 숨어 있다는 중명전이 궁금해서 답사 끝나고 열성 뻗치게도 나중에 찾아가 보았다. ㅋ 입장료는 무료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도 있게 해놓았다.

 

원래는 황실 도서관으로 지은 건물로 '수옥헌'이라 불렀다는데 덕수궁에 큰불이 났을 때 고종이 다른 궁궐로 옮겨가지 않고 이곳에서 지내며 연회장이나 접견장소로 이용했단다. 원래 왕이 머무는 전각엔 '-전' '-당' 수준의 이름이 붙는다. 그래서 나중에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겠지. 헌데 여기서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대고, 헤이그 특사 파견도 이루어진 비운의 역사적 장소란다. 신발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안에 들어가면 여러 사진과 함께 친절하게 여러 설명문이 적혀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설명문보다 복도 바닥에 깔린 색깔 타일이 더 인상적이었지만서도...

 

여기도 정관헌처럼 건물 바깥쪽을 베란다로 둘러놓았다. 날씨만 안 추웠더라면 저 의자에 걸터 앉아서 높은 담장으로 가려진 미대사관저 부지까지도 궁궐터였던 때를 상상하는 놀이에 젖어볼 수 있었을 텐데... 얼른 사진만 한장 찍고 퇴장했다.

 

 

 

 

 

에고고...

덕수궁에 있는 서양 건물 셋 얘기만으로도 너무 사연이 길고 지친다. ㅋ 암튼 덕수궁 미술관 구경다니면서, 뜬금없이 화장실 건물과 나란히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문과 그 안에 놓인 자격루 따위의 보물이 좀 수상하다 여겼었는데 이번에 의문이 약간이나마 풀렸다. '광명문'이라는 편액이 달린 저 문은 원래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엉뚱하게 옮겨진 거란다. 제 자리도 아닌 문 안에 포와 종과 물시계를 나란히 진열해놓은 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궁궐이라는 것이 어차피 죄다 과거 속의 죽은 공간이라 훼손의 역사를 빼고는 도무지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걸 안다. 그래서 궁궐을 볼 땐 상상의 나래를 많이 펼칠수록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덕수궁은 가장 최근까지 근대의 서글픈 과거가 담긴 공간이다보니 안타까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중화전만 해도 다른 궁궐처럼 처음엔 중층으로 지어졌는데 대화재 후 재정궁핍으로 조촐하게 단층으로 축소해서 지었다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궁궐 조정 마당엔 죄다 행각을 복원해서 둘러놓았으면서, 왜 덕수궁 중화전만 휑하니 뚫리게 그냥 두었는지?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하면서 가장 많이 망가진 줄 알았더니만, 궁궐 훼손의 정도는 어느 게 더 심하다고 손꼽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째뜬 내가 덕수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석어당은 퍽이나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선조가 피난 갔다 돌아와 임시로 거처한 역사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이미 고이 보존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었대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살다던 공간이기도 하며,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온 고종황제 역시 경운궁을 본격적으로 넓혀 짓기 이전에 석어당을 임시 거처로 썼단다. 다만... 1904년에 큰불이 났을 때 다른 전각들과 같이 홀라당 다 타버려서, 현재 건물은 당시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지금 전각도 100년이 훨씬 넘기는 했지만, 선조 때의 모습 그대로인가 했다가 아니라니까 왜 실망스러운지 원...

 

가을에 찍어온 석어당 사진도 재활용 ^^

아무려나,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가 옥새를 넘기면서 저 석어당 마당에 광해군을 무릎 꿇려 앉혀놓고 조모조목 죄목을 읊으며 꾸짖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으로 <광해> 2편이 마구 그려지면서 새삼 흥미진진했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아 글쎄 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놀랍게도 예순살이 넘도록 살았다네그려. 나중에 인조반정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나오면, 배경이 석어당인지 아닌지 꼭 확인해야지!  

 

 

 

 

 

 

 

탑루만 남은 러시아 공관

이날 덕수궁 미술관에선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프라하'에 대한 선망 때문에 별 생각도 없이 무작정 들어가 본 그림들은 공교롭게도 상당수가 덕수궁의 근현대사와 맞물리는 시기에 그려진 거였다.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화가 많아서 기억에 남는 그림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오히려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한국근대미술: 꿈과 시> 작품들을 한번 더 볼 수 있어 좋았다. 아픈 다리를 끌고 굳이 내가 러시아 공관이 있던 언덕까지 정동길을 헤매고 다닌 이유도 아마, 이날 본 1907년 즈음의 정동 주변 그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구한말, 고종황제, 을사늑약, 한일합방... 같은 말을 들으면 까마득한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바로 그 시기 이땅의 화가들은 또 서양 미술을 배우고 익혀 유화로 서울 풍경을 그려 남기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불과 백여년 뒤의 내가 구경하러 다니는데, 그림 속에 담긴 러시아 공관의 모습이 일부나마 여전히 현재의 시공간 속에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이 어쩐지 기묘했다. 

 

게다가 지금은 저렇게 철책으로 둘러쳐 지정문화재 따위로 엄히 보호받고 있는 공간이지만, 15년전쯤만 해도 난 친구들과 김밥 몇줄 사가지고 올라가 러시아 공관 폐허 바로 옆 잔디밭에서 뒹굴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때도 여기가 아관파천의 역사 현장이래.... 어쩌구 종알거렸던 것 같다.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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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놀잇감 2013. 1. 28. 23:13

지난 주말 하필 최저기온 영하 13도라는 날에 창경궁 답사를 가며, 덕수궁 못지않게 궁이 좁아서 30분이면 다 둘러보겠던데 3시간이나 무슨 설명을 하려나 좀 의아했었다. 그러나 웬걸... 너무 뺨시리고 손시려워서 볼펜과 수첩은 꺼낼 생각도 하지 않고 핫팩만 감싸쥔 채 열심히 들으며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이 다 지나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궁궐은 무조건 창덕궁이라고 주장했었는데, 창경궁도 아기자기 정말 예쁘다. 복원한지 몇년 되지 않아 너무 선명하고 화려해서 오히려 거부감 드는 다른 궁궐에 비해 예산 편성이 되질 않아 복원 속도도 가장 느리고 단청 색깔도 몹시 낡고 바란 것이 되레 더 정겨웠다. 마음 편히 산책하기에도 딱 적당한 크기와 구조인듯. 게다가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 셋(500년도 넘었다는 창덕궁 금천교 말고;;)은 글쎄 다 창경궁에 있었다!

 

 

광해군 때 세워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전각 셋 중 하나가 바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란다. 버스 내려서 횡단보도 건너기 직전에 건너편 길에서 얼른 한장 찍었더니만 수평이 안맞았다. ㅠ.ㅠ

창덕궁의 보조 궁궐 성격이 크다보니 규모와 품격도 낮아 중간에 문이 하나 생략되었고, 정문에서 곧장 정전이 들여다보이는 유일한 궁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명정전이랑 명정문, 홍화문 축이 일직선은 아니란다. 의도적으로 좀 틀어놓은 듯하다고...

추정되는 이유도 두 가지쯤 설명 들었는데, 하나는 화살 사정거리 때문이래고 나머지 하나는 뭐였더라... 까먹었다. ㅋ 

 

째뜬 바로 저 문밖까지 왕이 나와서 친히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영조가 균역법 실시 전에 홍화문 밖에 나와 일종의 설문조사를 했단다!), 정조는 화성행차 이후에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정치적인 쇼였다지만 그래도 쌀 받아든 백성들은 감동하지 않았을까? +_+

 

창경궁 이론수업에서도 나왔던 <홍화문 사미도>가 안내책자에도 작게나마 들어있었다. 원래도 왕실 행사는 죄다 기록으로 남긴다지만 이런 기록까지 죄다 의궤로 꼼꼼하게 남기게 한 정조는 진짜 기록문화의 대가, 원조답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수많은 화원들은 또 뭔가! 문앞에 쳐놓은 차일까지도 대단히 정교하다. 앞으로 어디선가 의궤 전시회 한다고 그러면 꼭 달려가서 구경해야지... ㅠ.ㅠ

 

 

새삼 내가 찍어온 사진과 이 그림을 같이 놓고보니 차도로 잘려버린 홍화문 앞 마당이 더욱 초라해보인다. 어차피 왕도 사라졌고 조선의 궁궐이란 다 죽은 공간이지만, 문화재면 문화재답게 대우하고 보존하는 것도 나라의 수준과 함께 발전하는 것 같다. 문화재 보호도 다 먹고 살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

 

그나마도 율곡로로 잘려버린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공사가 요새 한참 진행중이다. 자동차는 지하로 다니게 하고 본래 창덕궁, 창경궁, 종묘로 이어졌던 숲을 일부나마 연결한단다. 그간 안국동에서 버스타고 대학로 가려면 무진장 막혀서 짜증냈었는데 알고보니 그 길 뚫는 공사였다. 앞으론 불편해도 암말 말아야지...

 

 

궁궐에서도 품계석이 서 있는 조정 마당에 들어설 때면, 문이 액자처럼 건너편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거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 비슷하게 찍어본 것이 홍화문 정문에서 들여다본 명정문의 모습이다. 어차피 안에 들어가면 설명 듣느라 사진은 못 찍을 테니까....

 

날이 워낙 춥기도 하고, 창경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기도가 떨어지는 편이라 토요일 오후임에도 다른 관람객들이 많지 않아 좋았다. 저기 안으로 들여다 보이는 명정문도 그러니까 광해군이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은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금천 위로 가로지르는 옥천교도 옛날 그 다리다. 더욱이 창경궁 금천에는 실제로 졸졸졸 물도 흐른다! 다 얼어붙긴 했지만 흐르는 물을 직접 확인했음. 창덕궁 금천은 물길이 말라버려 어느 지점에선가 일부러 물을 끌어다 흐르게 했다던데.

 

일제시대  창경원으로 전락하며서 가장 많이 훼손된 아픈 역사를 지닌 궁궐이면서 또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갖춘 건물이 제일 많기도 한 궁궐이라는 묘한 아이러니가 이곳의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린시절 흑백사진을 보면 정말로 창경원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 많다. 동물원에서 코끼리 과자 주는 사진도 있고, 드넓은 잔디밭에서 도시락 펴고 먹는 사진도 있고...

 

궁궐 안에서 보이는 너른 잔디밭은 곧 건물의 무덤이라는데(홍순민의 <우리궁궐 이야기>를 어제부터 다시 읽고 있다 ㅎㅎ), 그 옛날엔 까마득히 모르고 궁궐 전각의 무덤에서 신나게 뛰놀며 도시락을 까먹었구나 싶다. 일제는 조선왕실을 부정해야 하니 그렇다쳐도, 창경원은 80년대까지 있지 않았나? ㅋ

 

 

창경궁에선 특히나 광해군 때, 19세기에, 1980년대 이후에 각기 지은 건물이 공존하기 때문에 서로 지붕 모양이며 처마의 각도도 미묘하게 조금씩 다를 거라고 했는데(이건 또 대목장의 취향과도 관련된 문제란다;;), 나의 막눈으로야 당연히 구분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새로 지은 경복궁 흥례문이나 창덕궁 인정문과는 확실히 좀 다른 것 같다. 같은 팔작지붕이라도 각이... 좀 더 예리하다고나 할까? 암튼 예쁘다. ㅎㅎㅎ

 

옥천교 앞에서 본 명정문

 

창덕궁도 후원을 돌아다니려면 언덕을 오르고 내리며 헉헉대야 할 때도 있고 높은 지대에서 아래쪽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도 있지만, 궁궐 전각들의 지붕을 조망하는 건 북촌 언덕에 올라야만 가능하다. 헌데 창경궁엔 높은 계단 위 언덕의 자경전 터에 서면 곧장 궁궐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숨도 고르면서 사진 한장 찍어도 된다고 해서 얼른 나도 찍어보았다.

 

오른쪽 사진 앞쪽에서 보이는 작은 건물은 후궁들의 처소로 추정되는 '집복헌'이다. 80년대 이후 복원해 놓은 건물이긴 하지만, 암튼 옛날 저기 있는 집복헌에서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단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하여 자주 저기 드나들었대고, 아예 바로 옆으로 이어진 건물(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쓰다 거기서 세상을 떠났단다. 정조 관련 이야기는 창덕궁에 더 많은 줄 알았더니만 아니었다. 사도세자를 위한 경모궁을 서울대학병원 터에 지어놓고 한달에 한번씩 특별히 드나들던 문(이름하여 '월근문')도 여기 있더라. +_+ 

 

그밖에도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여성 인물들의 거처도 다 창경궁에 있었다. 나름 자주 찾아다녔던 다른 궁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긴 전각 이름도 죄다 낯설고 어려워 공부를 한참 더 해야 턱턱 건물 이름이 생각날 것 같다. -_-; 째뜬 내게도 추억의 장소인 대온실도 구경했다. 궁궐과는 참 안어울리는 일제강점기의 잔재이지만 (당시엔 아시아 최대 온실이었다고;;) 이미 100년을 넘기고 보니 그 또한 등록문화재이고, 나름 아름답다. 궁궐 해설할 땐 안 들어간다는데 우리는 너무 추워서 잠시 들어가 몸을 녹였다.

 

원래 있던 희귀식물들은 죄다 과천 식물원으로 옮겼고 지금은 한국 자생식물들로 채워져 있단다. 봄가을에 시민들에게 야생화 모종 나눠주기 행사도 한다고...

어린 시절 난 저 온실 안에서 동생들이랑 술래잡기 하다가 뛰어다닌다고 다른 어른들에게 혼이 났던 것도 같다. 온실 안이었던 건 확실한데 어쩌면 남산 식물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창덕궁에 갈 때마다 인정전 꽃문살 참 예쁘다고 늘 한번 더 어루만졌는데, 그 또한 창경궁 명정전 문살이 '오리지널'이고 인정전과 근정전은 명정전을 본보기로 삼아 복원해 놓은 거란다. 어디서나 '원조', '오리지널'이라고 하면 왜 더 다시 보이는 건지 원. ㅎㅎㅎ 암튼 세월이 느껴지는 허름한 단청 빛깔도 원숙해 보이고, 일제시대에 전각이 있던 터까지 죄다 파버려서 복원하기에도 수월하지 않아 휑하니 사방에 빈터 투성이에다 건물 주변의 행각은 좀체 볼 수도 없는 창경궁은 그 허망한 느낌이 또 은근하게 좋았다. 다른 궁궐엔 눈 새하얗게 쌓였을 때 꼭 한번 가보고싶어지던데, 여긴 어쩐지 따뜻한 봄날에 다시 찾아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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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특별전

놀잇감 2013. 1. 23. 21:35

 

지난주 경복궁 답사 갔을 때 교육 끝나고, 며칠 남지 않은 덕혜옹주 특별전도 둘러봤다. 지난번 <덕수궁 프로젝트>에서 덕혜옹주의 처소를 재현해놓은 설치미술도 본 터라 실제 유품을 보는 기분이 묘했다.

 

1960년대에 한국으로 돌아와 1989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 살았으니 유품이 꽤 많을 것도 같은데 이번 전시는 일본 큐슈국립박물관 소장품을 빌어다 하는 것이라 볼 거리가 그리 많진 않다. 어렸을 때 입었던 당의와 돌복, 버선 같은 의류와 사진 몇장, 혼수품으로 가져갔을 것으로 여겨지는 비단필과 유리 공예품, 금속 촛대 따위가 전부다. 아, 맞다. 덕혜옹주가 학창시절 그리고 지었다는 그림과 시화, 엽서 글씨도 볼 수 있다. 서화에 능했다더니 정물 그림이 꽤 훌륭해서 놀라웠다.

 

학창시절 사진을 보아도 상당히 총명해 보이던데, 일본으로 끌려가 곧장 심신이 피폐해졌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아프다. 십대에 이미 조발성 치매로 진단받은 상태에서 일본인 백작과 정략결혼을 했다는데 그 병명이 확실한가?

 

90년대 초에 창덕궁에 가보았을 때, 낙선재에서 실제로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양식으로 바꾸어놓고 살던 내부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시멘트와 타일로 대강 바른 화장실과 부엌이 너무도 작고도 초라했고, 당시 해설사는 곧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할 것이라고 설명했던 것 같다. 정말로 몇해 후 다시 갔을 때는 아예 낙선재 구역을 폐쇄하고 보여주지 않았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덕혜옹주 특별전보다는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궁궐의 온갖 보물과 소품들을 보고싶었으나 너무 피곤한 나머지 다음을 기약했다. 덕혜옹주의 사진으로 꾸민 몇 장의 영상물이 남긴 인상이 너무 무겁기도 했고... 망한 나라의 마지막 공주(왕비의 자식이 아니라 공주도 아니고 '옹주'이지만;;)의 운명은 대부분 불행할 수밖에 없나보다. 러시아 제국의 아나스타샤 공주에 대한 영화도 본 것 같은데;; 

 

일본에서 갖고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가 워낙 많아서 일본인의 개인소장품이나 일본 박물관 소장품을 빌려다 한국에서 전시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지만, 덕혜옹주의 불행한 인생사 때문인지 1월 27일 전시가 끝나면 곧 일본에 돌려줘야한다는 상황이 더욱 서글프게 다가왔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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