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궐도 전시회

놀잇감 2013. 5. 18. 16:33

조선시대 세워진 궁궐은 무려 다섯개. 5대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중에서 역대 왕들이 가장 오래 머물렀고,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사라지기 이전에도 익히 애용했던 궁궐은 창덕궁이다. 그렇다고 다섯 궁궐이 동시에 모두 사용되었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고, 법궁과 이궁, 두 개의 궁궐을 사용하는 양궐체제가 주욱~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궁궐이 여기저기 워낙 많아서 그랬는지, 원래 이름 이외에도 궁궐엔 별칭이 있었다. 경복궁은 북궐,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 경희궁은 서궐이라 불렀다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지금 담장으로 나뉘어 입장료도 따로 내고 들어가야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성종 때 대비마마가 무려 네 분이나 계신 덕분에 창덕궁이 비좁아 왕실가족을 위하여 넓혀 지은 공간이 창경궁이므로 엄밀히는 하나의 공간이었고, 당연히 드넓은 후원도 공유했다. 지금 창경궁 입장에선 아름다운 후원이 창덕궁 쪽에서만 접근할 수 있으니 꽤나 억울하겠다.

 

암튼 이 '동궐'이 조선시대 왕조사의 핵심이 되는 궁궐임은 분명한듯, 경복궁의 경우 흥선대원군 복원 당시나 이전의 단면도 정도만 현존하는데 비해 창덕궁과 창경궁 권역은 <동궐도>라고 하는 엄청난 그림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서 각각 하나씩 소장하고 있으며 국보로도 지정된 귀중한 자료인데, 놀라운 것은 이 <동궐도>에 대한 역사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든 전각은 물론이고 나무 하나 꽃 하나까지(심지어 나무 위 까치집도 있음!) 세밀하게 묘사한 놀라운 기법의 정밀화를 누가 왜 어째서 그리게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는 '미스터리'가 또 이 동궐도의 매력이다.

 

 

어쨌거나 고려대와 동아대가 각기 갖고 있던 동궐도 둘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있었다. 2월말에 시작해 5월 12일까지라기에 시간 많다고 여유부리다 끝나기 며칠 전에 간신히 볼 수 있었다(그러나 두둥~ 알고보니 6월 2일까지 연장 전시한다고! ㅋㅋ) 부산 동아대까지 가서 보긴 뭣해도 고려대 박물관에 가면 무료 상설전시로 언제든 구경할 수 있는 줄 알았더니만, 훼손 방지를 위해 더는 전시를 안한다는 것이 문제 ㅠ.ㅠ 고려대본 16폭을 죄다 펼쳐놓고 전시했던 때를 못 본 것이 참으로 아쉽다. 이번엔 화첩을 4개만 펼쳐놓고 나머지는 그냥 쌓아놨더군. 쳇. 빌려온 동아대본(병풍으로 만들어졌다)을 더 예우하려 했던 것일까나?

 

하여간 하나도 못본 것보다는 낫다고 애써 위로하며, 도화서 화원들의 솜씨에 감탄하며, 꽤나 훌륭한 보존상태에 기뻐하며 구경했다. 궁궐 강의 들을 때 창덕궁 소장님이 그랬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백년 수령의 향나무가 태풍때 가지가 부러지는 수난도 겪었고 계속 기울어 버팀대를 하고 있어 안타깝지만, <동궐도>에도 이미 그 향나무는 지주대로 버텨놓았을 만큼 고목이었다고.

 

그래서 <동궐도>는 단순히 역사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건축학과 조경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자료란다. 다른 화원이 그려서 그랬겠지만, 고려대본과 동아대본이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것도 신기하고 ^^;; 우진각 지붕인 돈화문(광해군 때 중건 이후엔 한번도 소실된 적 없다는데;;)을 팔작지붕으로 그려놓은 것도 미스터리란다. 그래서 전시장에서도 두 그림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컴퓨터 영상이 계속 돌아간다. 극사실화를 추구하더라도 계단 모양이나 대문의 빗살, 나무와 까치집의 크기 같은 건 화원마다 다르게 그렸을 수도 있겠으나, 선정전 잡상이 고려대본엔 있고, 동아대본엔 없다는 것도 참 재미있다. 현재 창덕궁 선정전에도 잡상이 없다는데... 어느 쪽이 맞을까나.

 

열여섯 폭 비단에 그린 고품격 채색화인 <동궐도>는 분명 당시에도 야심찬 기획이었을 텐데, 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지 생각할수록 궁금하다. 고려대본에 '인(人)이라고 적혀 '천/지/인' 세가지 본이 그려졌음을 알수 있다는데, 두 개만 전해지는 것도 안타까운 부분. 그나마 동아대본은 누군가 화첩을 아예 중간에 병풍으로 만들어 버렸고, '천'과 '지' 어느 판본인지 알 수도 없다. 세번째 지도가 더 있었다면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셋을 비교해보는 묘미가 더 컸을 텐데...

 

지도 자체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동궐도의 제작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목조건축이라 수없이 화재 소실과 중건을 겪은 궁궐 전각에 대한 기록이 소상하기 때문이다. 창덕궁에서 내가 사랑해마지않는 공간인 '연경당'은 1828년 순조 때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려고 지은 건물이란다. 그런데 <동궐도>에 이미 연경당이 보인다. 그밖에 창경궁의 전각과 빈터 등을 고려할 때 동궐도는 1828년에서 30년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며, 당시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이므로 효명세자가 도화서에 명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란다.

 

효명세자가 누군가. 정조의 손자로, 창덕궁 후원입구에 한칸 반짜리 소박한 북향 전각 기오헌을 지어놓고 언덕 너머 규장각에서 책을 날라다가 밤낮으로  '열공'하면서 할아버지 정조대왕의 뒤를 이으려고 했던 준비된 인재 아닌가. 그래서 순조가 일찌감치 대리청정을 시켰을 테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효명세자는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요절. ㅠ.ㅠ 정조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고 괜한 가능성을 점쳐보며 한탄하듯,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는 소현세자와 함께 효명세자 역시 요절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명운을 바꾸어놓았을 인물로 종종 손꼽히는 인물인데 참 아쉽다. 째뜬 그나마 귀중한 유산 <동궐도>를 남겼으니, 감사할 따름. 

 

국보급 유물의 전시라서 당연히 동궐도 진본의 촬영은 불가능했다. 대신 복사본을 밖에 걸어뒀던데 이왕 복사본을 만들려면 좀 제대로 또렷하게 인쇄를 하든지! 진품의 위용을 흐리지 않기 위함인지 복사본 지도는 흐리멍텅, 선이며 채색이 몹시 마음에 안들었다. 쳇;;; (그래도 찍어왔으면서  ㅋ)

 

가로 5.76미터 세로 2.73미터의 엄청 큰 그림이다. 이 그림을 보면 궁궐 안엔 나무를 심지 않았다는 원칙이 상당히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궁궐을 뜻하는 네모 안에 나무 목(木)을 넣으면 빈곤할 곤(困)자가 되기 때문에 궁궐 담장 안엔 나무를 심지 않는다고 하지만, 조경학에서 귀중한 자료로 사용할 만큼 동궐도엔 수종도 다양한 나무들이 엄청 많다!

 

 

복사본을 그나마도 흔들어 찍어온 위 사진으로 동궐도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기엔 역시나 역부족. 부분부분 세밀화를 보아야 느낌이 전달되므로, 문화재청 자료 자신 몇장 퍼왔다. ^^;; (그나마 화질이 좋아 퍼오긴 했으나, 실제 그림보다는 전체적으로 너무 노란 기운이 강하다)

 

팔작지붕의 미스터리를 갖춘 돈화문 부분. 문 앞으로 길게 뻗은 월대 앞 ㅈㅈ 표시는 궁궐출입자들이 모두 가마와 말에서 내려야한다는 하마비(그 앞에 ㄴ자로 생긴 돌의 이름)를 나타내는 거라고 들었다.

 

 

부용지에 배를 띄워놓은 모습도 보이는 주합루 앞과 그 너머 연경당의 모습. 조감도를 그릴 만큼 높은 곳에 올라가 그릴 수 없었으니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겠고, 당연히 실제 거리나 원근법과는 좀 맞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5월에 그린 그림인 듯. 꽃나무 색깔이 아련하다. 저거 앵두나무일까? +_+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의 특색이 두드러져 보이는 부분. 현재 창덕궁에서 청기와가 남아있는 전각은 선정전이 유일한데, 이 그림엔 대조전과 복도각으로 이어진 경훈각(그림 맨 꼭대기 건물)도 청기와다. 청기와는 청나라에서 수입하는 회회청으로 구워야해서 돈이 많이 들었다던데.... 아우.. 그림이 정말 정교하지 않은가! 깃발까지 날리고 있다. 전각마다 다 이름이 적혀있고, 편액 글씨까지 섬세하게 다 보이는데, 내가 무식하여 한자를 다 못읽는 것이 아쉬웠다. -_-;

 

안내문엔 하루에 몇번 로봇이 하는 전시 설명과 해설사 설명이 있다던데, 대학원생인 듯한 해설사 설명을 조금 듣다가 관뒀다. 완전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느낌으로 설렁설렁...   아무리 봐도 해설사란 남들이 뭐라든 자기만의 열정이 샘솟아야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영화 <하하하>에서 문소리가 열연했던 왕성옥 정도는 되어야... 끙.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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