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궁궐 중에서 그간 내가 경복궁을 그닥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유는 일단 워낙 넓어서 어수선하고 죄다 복원해놓아 '옛맛'이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광화문부터 삐까번쩍 새것이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복원한 흥례문과 영제교 일대도 죄다 새것이고, 웬만한 행각들도, 단청 안했다는 이유로 그나마 좋아라하는 건청궁도 복원한지 10년도 안 됐다. 일제시대 훼손을 피해 그나마 남아있던 몇 안되는 건물들 역시 다들 알다시피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기에, 조선 건국 후 처음 지어진 으뜸궁궐이라고는 하나 내가 느끼는 경복궁의 위상은 그리 높지가 않다. 

 

임진왜란 때 홀라당 타버린 여러 궁궐 가운데 광해군 때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중건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어차피 궁궐도 임금이 사는 집이니 나라도 좀 더 아기자기하게 사는 맛이 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창덕궁을 택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 사견일 뿐, 조선왕조가 경복궁을 다시 짓고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란다. 첫째, 전쟁으로 파탄 난 경제사정 상 드넓은 경복궁 전각을 복원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창덕궁 복원에 돈이 덜 든다는 신료들의 입김. 둘째,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풍수가들의 주장. 셋째, 가뜩이나 왕권의 입지가 불안했던 광해군의 얇은 귀? ^^) 어쨌거나 창덕궁, 창경궁엔 3-4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전각들이 더러 있는 반면, 경복궁엔 국보로 지정된 근정전, 경회루 정도만이 15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임란이후 경복궁보다 더 오래 '법궁'의 지위를 누렸던 창덕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도 되었겠다) 더더욱 조선 최고의 궁궐이라는 자부심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경복궁 계신 분들은 파르르... 떨며 인정 안하는 분위기. 경복궁이야말로 고대 예법에 맞춰 지어진 조선 최초의 궁궐이라니깐! ㅋㅋ)

 

내눈에도 경복궁은 돌아다니기에 너무 넓고 아직도 복원이 한참 덜됐다고는 하나 구석구석 어딘가 휑하고 정신이 없다. 물론 그 이유의 절반은 항상 지나치게 많은 관람객들 때문이다. ㅠ.ㅠ  창덕궁 역시 단체 외국인 관광객이 많긴 하지만 대규모 수학여행단은 좀처럼 볼 수가 없는데, 어휴.. 경복궁엔 항상 어딜 가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요즘은 특히나 수학여행과 현장학습 철인지 와글와글 시끄럽고 요란한 학생단체가 정말 많이 몰려다닌다. 초중고생은 입장료가 무료라서 더 그렇다는데, 하긴 나 중고등학생 때도 백일장, 사생대회는 늘 경복궁에서 했었다. 흙먼지 피우며 뛰어다닌다고 그때도 주변 어른들한테 핀잔듣고 그랬으니 참 세상은 변함없이 돌고도는 듯.

 

암튼 150년도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암만해도 경복궁은 창덕궁이나 창경궁만큼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덕수궁 석어당도 월산대군 사저일 때부터 선조가 임시 거처로 쓰던 그대로인 줄 알았건만, 화재로 1904년에 다시 지어졌음을 알고나서는 예전만큼 애정이 가질 않는다 ㅠ.ㅠ)는 딜레마에 빠져있던 차(?)에 엄청 오래된 물건을 경복궁에서 발견했다. 전각은 아니지만, 돌로 된 것이라 무려 태종때부터 그대로 내려온 것이라니 오호 놀라워라.

 

그것은 바로 영제교 양옆 석축에서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록'들이다. ^^

원래 네 마리인데 사진을 셋밖에 안찍었다. 오른쪽 앞에 있는 나머지 한 마리는 등에 구멍이 뚫려있는 걸 다시 메워놓은 문제의 서수인데, 그 앞쪽으론 늘 사람들이 바글거려서...

어쨌거나 얘네들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느라 이 근방을 헐어버렸을 때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다가 복원하면서 다시 제자리를 찾은 거란다. 이 천록상에 대해서는 영조 때 유득공이 서울을 유람하고 쓴 <춘성유기>에도 적혀 있단다. 이상하게도 당시 영제교 천록은 세 마리 뿐(동쪽에 두마리, 서쪽에 한 마리)이었고, 남별궁 뒤뜰에서 등이 뚫린 천록 한 마리를 본 적 있다며 필시 다리 서쪽에 있던 한 마리가 옮겨진 것이라고 유득공은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이 남별궁 뒤뜰의 천록도 고종 때 경복궁 중건하며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다는데...

 

여기서 다시 아쉬운 점이 발생한다.

요번에 광화문 일대 복원과 함께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던 천록들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옛 기록대로 등 뚫린 천록을 서쪽에 놓았어야 하지 않은가?!? -_-;;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등 뚫린 천록은 떡하니 다리의 동쪽 앞, 경복궁 안내팻말을 등지고 놓여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내면서 경복궁을 맨 앞에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었던데, '메롱'하는 천록(가운데 사진!)의 해학 찬양하는 내용은 있어도, 왜 등 뚫린 천록자리를 옛 기록과 달리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뜨르르 하는 학자들이 죄다 복원에 참여했을 텐데, 유득공의 기록을 무시할만한 다른 근거가 있었을까? 몹시 궁금타.

 

저 천록들 말고도 경복궁에서 내가 다른 궁궐보다 더 예스럽다고 느낀 부분 역시 '돌'인데, 엄밀히 이건 150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어느 궁궐보다도 '오리지널'이다. ^^; 그것은 바로 근정전 앞 조정의 박석. 다른 궁궐 조정의 박석들은 일제가 잔디로 바꿔놓았던 것을 현대 들어 복원하며 기계로 다듬어 깔아놓은 것인 반면, 근정전 마당 박석은 고종 때의 것. 깨진 박석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 박석 역시 고종 때 박석을 캐온 강화도 채석장에서 날라온 것이라 확실히 다른 궁궐 박석과는 느낌이 다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와처럼 구운 매끈한 전돌을 깔 수도 있었겠지만(근정전 바닥은 바로 그런 전돌이 깔려있다), 조정 마당에 굳이 울퉁불퉁한 박석을 그대로 깔아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단다. 현장학습 온 학생들에게도 선생님들이 종종 그 이유를 알아오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 녀석들 머리 쓸 생각은 안하고 대뜸 해설사분들에게 달려와 묻곤 한다. 흥! 그러나 쉽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ㅎㅎ

 

첫째는 미끄럼 방지. 옛날 가죽신엔 고무창이 달려있을리 만무하니, 매끈한 전돌이 깔려있었다면 비오는 날 뇌진탕으로 쓰러지는 사람들 여럿이었을 거다. 마른 날에도 미끄럽긴 마찬가지였을 테고...

둘째는 눈부심 방지. 울퉁불퉁한 박석 표면이 햇빛을 난반사하여 눈부심도 방지하고 근정전 안까지도 조명효과를 낸단다.

셋째는 배수량 조절. 워낙에도 근정전 앞 마당의 기울기가 상당하여 배수에 신경을 썼지만, 흐르는 물줄기가 박석 사이사이로 한번 더 휘휘 돌아 천천히 배수구로 모여들게 하는 이치다. 

넷째는 경거망동 방지. 임금 앞이기도 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으니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다섯째는 지열 분산. 예전엔 박석 사이 간격이 훨씬 더 넓었고 자연히 사이사이에 풀도 많이 났단다. 한여름 뙤약볕에 달궈진 돌 대신 풀을 밟고 서면 지열을 피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지만 현재 근정전 마당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그러나 풀 자란 곳이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구석쪽에나 간신히 풀이 자란 걸 볼 수 있는데, 설명 듣기 전까지 난 박석 사이에 잡초 자란 게 오히려 관리소홀인 줄 알았었다. ㅎㅎㅎ  그런 게 미안해서 친히 풀 자란 부분의 박석도 찍어왔음.

 

왼쪽 윗부분 공백은 아무래도 내 손가락인갑다 -_-;

 

한번에 무려 세 시간씩 경복궁에 대해서 다시 심화교육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도 편전까지밖에 못 들어갔다. 하기야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했던 첫 수업에선 세 시간 강의를 들었는데도 근정문엘 들어가지 못했으니 오죽하랴. 알아야 할 것은 많고 두뇌는 한계가 있는데, 복작거리는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싫고 생활한복이든 전통한복이든 복장강요하는 것도 싫으니 고민은 계속되는 중. 일단은 배우는 데까지만 배워보는 걸로! ㅋ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