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답사

놀잇감 2013. 1. 22. 01:23

한옥의 역사와 궁궐의 역사, 이론 수업을 두 주일 하고 나니 벌써 궁궐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최초의 조선 궁궐인 경복궁을 시작으로 일단 창덕궁까지. 경복궁은 가뜩이나 관람객 바글거리는 토요일 오후에 시끌시끌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창덕궁은 휴관일인 월요일에 교육생들만 특별 출입을 할 수 있어서 고즈넉하니 좋았지만 온종일 철철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 함정. 다행스럽게 이틀 다 날씨가 별로 안추웠지만, 경복궁은 허허발판이라 칼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역시나 영하였고 창덕궁엔 살얼음이 얼거나 얼어붙은 길이 다시 비에 녹아 미끌미끌 위험천만이었다. 완전무장 후 핫팩을 들고 다녔는데도 발시리고 손시리고 코시려워서 여간 힘이 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을만한 한겨울의 궁궐답사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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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왕비마마라고 칭하되 딸이면서도 나에겐 스스로 '무수리'라는 칭호를 붙여 비하하고 자학하는 건 꽤나 오래 된 버릇이다. 아마도 직장을 관두고 번역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 '프리랜서 번역가'란 곧 백수나 마찬가지로 여겨졌고(실제로 첫해 6개월은 그러했다;;), 늘 시간이 남아도는 인력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부모님이 명하면 동원되는 것이 마땅한 잉여 존재 취급을 받았다. 주로 운전수, 심부름꾼의 역할이다가, 엄마의 우울증 와병 기간이 길어지고 잦아지자 밥순이의 임무와 강도도 예전보다 커졌다. 그러다 심한 우울증에 당뇨 합병증까지 겹쳐 엄마가 생사를 넘나드는 지경까지 갔다가 극적으로 회복되고 나서는 당연히 가사일이 모두 내 차지였다. 물론 아버지 생전에는 청소며 설거지, 세탁까지 종종 거들어주시면서, 이 집안엔 왕비마마 하나, 무수리 하나, 머슴 하나가 산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셨지만서도.

 

째뜬 신데렐라와 함께 무수리는 주변에서 흔히 나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특히 내가 궁궐에 다니는 걸 좋아하면서 아무래도 전생에 궁에 사는 공주였나보다고 킥킥대면 친구들은 공주가 아니라 무수리였겠지! 라며 놀렸다. 무수리는 궁궐에서 궁녀를 보필하는 최하층 하인이지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도 승은을 입어 왕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신세 고단한 이름이라 해도 뭐 어떤가 싶었고, '왕비마마 엄마를 보필하는 무수리 딸'의 조합이 더욱 재미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가 왕비면 딸은 공주가 맞다면서, 왕비마마는 제발 딸 부려먹는 못된 엄마 만들지 말라고 나의 무수리 드립을 몹시 싫어하시지만 자조적인 나의 무수리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헌데 궁궐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배운 오늘 수업에서 나의 무수리론이 끝장나고 말았다! 궁궐의 각 처소에 소속된 내인(=나인)들이 거느린 하인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가운데 무수리는 궁녀들이 공동으로 부리는 하녀 중 '물 긷기 담당'을 칭하는 이름이란다. 당시 궁궐엔 처소별로 전각마다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물 긷는 일이 퍽 중요한 임무여서 '수사(水賜)' 또는 '급수인'(汲水人)'이라고도 했다. 특별한 선발기준은 없었으나 내인들의 소개로 민간 아낙네들 중에서 일 잘하는 여인으로 뽑았다고. 게다가 그들은 대개 기혼자들로 출퇴근을 했단다! 헐...궁궐에 출퇴근하며 물긷는 튼실한 아낙네가 무수리였다니. 어려서부터 내가 보아온 사극에선 젊은 궁녀들더러 죄다 무수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나의 무수리론은 고증 없이 대충 쓴 사극 대본의 폐해였던 모양이다. ㅠ.ㅠ

 

그러므로 영조에게 적잖은 출신 컴플렉스를 제공했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설도 잘못된 것이라고 오늘 수업을 맡은 교수님이 지적하셨다. 숙빈 최씨가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된 이유가, 나인 시절 폐서인 된 인현왕후의 생일날 한밤중에 방에서 기도를 올리다 밤궁궐을 거닐던 왕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무수리라면 일단 퇴근을 했을 터이니 밤중에 궁궐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 당연히 무수리 주제에 궁궐 안에 자기 방도 가질 처지가 아니었다. 혼자서 쓰는 방도 아니고 궁녀 둘이 함께 쓰는 방이 배정되는 것도 입궁 후 15년이 지나 관례를 치른 이후였으며, 단독 처소를 갖게 되는 건 입궁후 무려 25년, 35년을 지내 상궁에 올라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수리를 비롯한 궁녀의 하인들은 궁녀 처소에서만 움직이므로 아예 왕족을 만날 일조차 없었단다. 따라서 숙빈 최씨 무수리 설 또한 극적인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를 위한 후대인들의 과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궁녀 처소에서 물만 긷는 하녀가 무수리였다니... 어휴. 궁녀의 역할과 임무를 배우다가 십수년도 더 이어온 나의 무수리론이 단숨에 뒤집혀 폐기될 줄이야! ㅋㅋㅋ 오늘 배운 내용으로 다시 내 역할에 그나마 잘 맞는 배역을 고른다면, 궁녀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4-5세) 제일 먼저 상궁이 되며, 왕의 측근에서 보필하기에 궁녀 중 가장 엘리트라는 '지밀상궁', 또는 왕 본인이나 정승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궁녀들의 수령격인 '제조상궁'이라 하고 싶으나... 나는 왕을 보필하는 자가 아니라 왕비를 보필하는 자라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그냥 소주방 나인이 제격인가 싶기도 하고... ㅋㅋㅋ 어쨌든 이로써 그간 나는 무수리가 아니었으며 무수리가 될 수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왕비마마의 조석 수라를 주로 담당하고 간간이 세탁과 청소, 가마 수행, 의녀 놀이, 심지어 손톱발톱까지 깎아드리는 전천후 소임을 맡고 있지만 결정적으로 출퇴근직이 아니지 않은가! ^^;; 오늘은 재미난 역사공부와 더불어 놀라운 깨달음까지 얻었으니 특히나 일석이조의 수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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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투덜일기 2013. 1. 4. 18:09

새해들어 과연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시작한 일이 하나 있다. 자원봉사 따위와는  완전 담쌓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궁궐 청소 같은 일은 해보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모종의 기획이라면 기획. 궁궐과 문화재 지킴이를 모집하는 단체가 꽤 여럿인 모양인데, 여기저기 기웃대다 한 군데서 마침 연말에 모집기간임을 극적으로 발견하고 마감일 하루 전에 허겁지겁 신청했다. 00명 모집에다 선착순 마감이라고 적혀있어서,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름 조마조마했다. 돌이켜보니 이 얼마만의 '응시'인가.

 

교육대상자 발표를 보니 무려 100명. 내가 막연하게 바랐던 궁궐 전각 청소 소임과는 사뭇 다르게, 해설사 양성 교육이라서 좀 어마어마한 느낌은 있지만 궁궐과 한옥,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뭔가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꽤나 뿌듯하게 소정의 교육비를 냈다. 그러고는 어제 첫 강의가 있어 27년만에 찾아왔다는 강추위를 뚫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6시반부터 시작되는 평일 저녁에 수업을 들으러 올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이들일까 자못 궁금했다. 방학 맞은 대학생들이 좀 있을 테고 나머지는 나처럼 죄다 백수? ^^;

 

아직 어떤 이들이 모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령비율로 보니 20대부터 60대까지 제법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고 남녀 성비는 25대 75로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많았다. 하기야 궁궐 해설사치고 여자 아닌 사람을 나는 입때껏 한번도 못봤다. 창덕궁도 그렇고 나는 궁궐 해설사들이 죄다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이거나 계약직 직원인 줄 알았는데 다들 자원봉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암튼,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해설사로 활동하고픈 마음은 없다해도 그만큼 교육내용이 알차려니 싶어서 기대중이다. 3월까지 일주일에 세번이나 교육이 있는데 끝까지 남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궁금타. 그렇다면 과연 나는 끝까지 버틸까? ㅎㅎㅎ

 

흥미로운 주제라고는 해도 강의 방식이 따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는데 세계 건축 통사를 훑어주었던 첫 강의는 퍽 재미있었다. 반사적으로 강의 내용을 공책에 열심히 필기하며(교육 끝나면 나중에 필기시험도 본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 파워포인트로 비추는 스크린이 앞좌석에 가려져 주요 사진 캡션을 하나도 못 읽은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내일 수업땐 같은 구석자리라도 한 세쨋줄 정도로 노려볼 생각이다. 그럼 담배냄새 쩌는 지각생 아저씨가 옆자리로 파고드는 일도 없겠지. ㅠ.ㅠ 어젠 정말이지 수업 내용은 흥미진진한데 숨쉬기가 어려워서 죽는 줄 알았다. 얼마나 골초면 옆사람한테까지 그토록 호흡곤란을 일으킬까나. 한껏 몸을 틀어 앉아 수업 내내 내가 스카프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던 걸 옆자리 그 골초 아저씨도 눈치챘을까? 생김새도 못봤으니 미리 알아서 피할 순 없을 테고, 무조건 중노년의 아저씨 주변엔 앉지 않겠다고 첫날 수업 한번으로 결심이 섰다.

 

공부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진즉 깨달았으면서도 또 뭔가를 배운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 수업에서 인류는 사냥과 채집으로 생존하던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역마살, 노마드 가질이 있어 여행을 좋아하며, 어딜 가든 현지에서 뭘 꼭 사오는 것도 채집 본능이라고 설명하던데, 공부 싫어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선망을 버리지 못하는 건 무슨 본능일까 문득 궁금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여호아라는 공자님 말씀에 그리 깊이 세뇌된 건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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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프로젝트

놀잇감 2012. 11. 19. 15:07

원래는 친구의 LA 동료들과 만난 날 밤에 같이 가려고 했었는데, 자기들끼리 바로 다음날 궁궐순례 계획을 잡아놓았다고 하여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해서 친구는 결국 덕수궁 프로젝트를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친구에겐 궁궐과 설치미술 구경보다는 수세미, 행주부터 수면바지, 속옷까지 식구수대로 사가지고 갈 쇼핑품목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미술관 때문에 제일 자주 찾는 궁궐이 덕수궁이지만 '서도호'를 포함한 설치미술이 전각 안에 전시되어 있다니 더욱 흥미가 동했다. 드디어 덕수궁 전각 안에도 들어가보게 되는군!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덕홍전. 금속으로 만들어놓은 곡선형 좌식 의자가 바닥에 빼곡하게 깔려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전각 밖에서 안을 흘끔흘끔 들여다보고만 있는데, 입구에 서 있는 안내인은 들어와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왜?! 내가 먼저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이 부쩍 차가워져 엉덩이와 등이 이내 시려왔으니망정이지 안그랬으면 한 30분쯤 누워 쉬었으면 좋았겠다 싶을 만큼 인체공학적으로 몸에 딱 들어맞는 편안한 디자인이었다. 하지훈의 <자리>라는 작품이라고. 찍어온 안내판 사진을 보니 성기완의 음악도 연주되고 있었다는데 사실 기억에 없다. ㅋ

 

파도의 일렁임 같기도 하고 터미네이터2가 생각나기도 하는 금속 의자와 덕홍전 천장 사진을 세트로 찍어오는 블로거들이 많던데 그럴만했다. 편히 눕다시피 앉으니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새로이 채색한 듯한 화려한 단청이었다. 예쁘기도 하지...

 

 

석조전도 그렇고 중화전 뒤쪽으로도 그날따라 공사중인 곳이 꽤 많아 길을 돌아돌아 가다보니 고종이 커피를 즐겼다는 정관헌이 나왔다.  

아니 이것도 작품인가 싶게 거울을 사이에 두고 회의 탁자가 놓여있었다. 설치미술은 뭔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다시 되살려준 정서영의 작품. ^^

 

 

전시 시작할 때는 미술관에서 설치미술 제작 과정을 죄다 보여주는 특별전시도 함께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갔을 땐 미술관 문이 닫혀 있었다. 어쩐지, 입장료로 달랑 천원만 받더라니... 좀 아쉬웠다.

 

 

단풍으로 아름다운 나무들을 바라보며 궁을 가로지르다 보니 바닥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최승훈+박선민의 <결정>이라는 작품. 전시 안내책자에 어찌나 인색한지 브로셔도 없이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다 작품과 함께 설명 표지판을 찍어온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서 작품 제목까지 기억하는 게 가상타. -_-;

 

 

아래 사진은 덕수궁에서 제일 잘생긴 건물이 아닌가 싶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석어당의 옆모습.

 

이상하게도 단청 화려한 궁궐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전각을 꼽다보면 꼭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창덕궁에선 연경당.

덕수궁에선 석어당.

경복궁에선 건청궁.

 

경희궁과 창경궁은 아직 복원이후 구경가보지 못했다. 어서 거길 다 가보아야 남아있는 5대궁궐 탐사가 다 끝날 텐데... ^^;

 

예술가들도 각별히 애정을 품었는지, 이곳에선 두가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김영석의 <better days>와

이수경의 눈물.

 

 

덕혜옹주를 특히나 어여삐 여겼다는 고종이 석어당에 유치원을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복과 보료, 영사기로 투사된 덕헤옹주의 사진들로 방을 재현해놓은 작품이 왼쪽의 모습이다.

 

 

흑백사진을 투명한 망사에 저렇게 비춰놓으니 더욱 처연하면서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죄다 어디에서 난 사진인고 했더니, 그 사진 액자들이은 분합문 위 문틀에 나란히 올라가 있다.

 

 

 

 

 

중화전 행각에 있던 이 작품은 이름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겠다. 궁중소설을 읽어주는 성우의 목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오던데 우린 철사에 묶여 있는 소설책을 대충 넘겨보다 잠시 앉아 다리만 쉬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중화전에도 뭔가 조명과 음향을 설치해놓은 것 같던데 하나도 안보이고 안들렸었다. 밤에만 보이는 건가?

 

 

기대했던 서도호의 함녕전 작품 <동온돌>은 약간 의외였다. 

고종이 명성황후와 엄비를 그리워하여 항상 이불 세채를 깔고 주무셨다는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래고, 대청 한가운데에선 한복 입은 남자가 자리에 누웠다 일어나고 궁녀들이 이불 개고 펴며 잠자리 준비하는 동영상이 계속 돌아갔다. 이불 세채의 사연이 좀 안쓰럽긴 하지만 서도호의 리움 전시를 본 사람으로선 애개개 싶었음.

 

 

 

덕홍전 천장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함녕전의 천장.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쌍학이 날고 있는 똑같은 그림이다. 천장마저도 서글픈 느낌.

 

 

 

궁궐 전각과 예술품의 만남이라는 프로젝트의 의의도 좋았고 뿌듯했지만, 역시나 이날 가장 감동을 주었던 건 가을 풍경이었던 것 같다. 아직 만추가 되기 전이었던 저 나무들도 지금은 다 완전히 색이 달라졌거나 헐벗었겠지. 게으름 부리다 밀린 일기 쓰는 것의 장점 하나는 떠난 계절까지도 오래도록 질질 붙들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덕수궁 프로젝트는 12월 2일까지.

 

 

 

 

 

(201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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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나들이

놀잇감 2012. 11. 13. 00:28

생각해보니 가열차게 놀러다닌 날들이 벌써 한달이 다 돼간다. 그때만 해도 단풍든 나무보다 새파란 나뭇잎이 더 많았는데 어느새  요 며칠 겨울 같은 날씨에 나무들은 헐벗었고 올해도 한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ㅠ.ㅠ 남은 기억 다 지워지기 전에 사진 쳐다보며 밀린 이야기를 다 풀어내야할 터인데. 이것 참.

 

일본에 다녀온 다음날부터 곧장 이틀에 걸쳐 서울 관광 스케줄을 쫀쫀하게 짜놓았으나, 그건 그저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시차도 너끈히 견딘 친구와 달리 며칠 전까지 급마감에 힘쓰며 밤샘을 거듭했던 나는 혓바늘이 돋질 않나,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길 않나 저질체력임을 여실히 실감했고, 연일 강행군은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냥 하루는 장이나 봐다가 맛난 거나 해먹으며 쉬자고... 

 

LA선 절대 맛볼 수 없다는 납작말랑한 홍시와 홍옥사과, 막걸리와 해물부추전으로 비타민과 영양(?)을 보충한 다음날에야 비로소 나설 수 있었던 창덕궁. 그나마 원래는 창덕궁과 종묘를 한꺼번에 돌려던 계획이었으나 창덕궁 하나만 보기로...

 

친구가 이날 저녁부터 주말까지는 외가에 들러야 해서 짐을 싸가지고 나왔기에 마냥 돌아다니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창덕궁엔 입구에 무료 사물함이 있고, 나중에 이대앞에선 지하철역 사물함을 이용할 수 있었다. 지하철 사물함 나도 난생처음 이용해보는 것이었는데 열쇠 없이 디지털 화면으로 사물함이랑 비밀번호 지정하고, 심지어 거기서 택배도 보낼 수 있더군! +_+ 놀랍도록 편리한 나라임을 새삼 실감. ㅋㅋㅋ

 

암튼 창덕궁에 들어서자마자 다리 건너편 느티나무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에 반해, 왼쪽에 사열하듯 서 있는 장엄한 회화나무 세 그루는 찍어오는 걸 까먹고 말았다. 걔네들은 아직 초록이 성성한 자태였는데...

 

 

 

대개는 인정전과 대조전 등지의 전각을 먼저 다 보고 후원 들어가기 전에 낙선재를 둘러보는데, 사진 순서를 보니 이날은 낙선재부터 들렀던 모양이다. 한달도 안 돼 벌써 이렇게 기억이 흐려지다니 뜨끔;; 아무튼 까마득한 오래 전 지금처럼 복원이 끝나기 전에 이방자 여사가 개조해 놓고 썼던 양실 목욕탕도 구경할 수 있었던 때도 좋았고, 원래대로 바꿔놓은 지금도 좋은 낙선재. 궁궐에 있을 정도니 당연하겠지만 참 짱짱하고 단아하게도 지었다는 느낌이 든다. 

자세히 보면 난간에도 이렇게 정교하게 구름과 호리병 무늬를 조각했다.

 

낙선재 마당에 있던 감나무마다 또 감이 얼마나 튼실하게 매달려 있던지 원. 잘 생긴 한옥집에 살 일은 아마도 요원하겠지만 혹시라도 다시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나도 감나무를 꼭 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사는 집앞에 있는 앵두나무도 시작은 버릴까말까 고민하던 작은 분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정전과 대조전 사진은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는데, 후원쪽으로 건너가면서 회랑 너머로 보이는 인정전 지붕이랑 원래 궁궐을 모두 감싸고 있었을 소나무가 나온 이 사진은 좀 괜찮은 것 같다. 옛날엔 내가 사진 찍은 자리도 그냥 마당이 아니라 빼곡하게 전각이 서 있었겠지... 

 

 

 

 

아래는 아마도 내의원이 있었다는 전각인 것 같다.  이날은 해설사 설명도 안 듣고 브로셔도 안들고 그냥 설렁설렁 돌아다녔는데, 떼를 지어 수첩과 볼펜 들고다니며 역사공부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어찌나 많은지 귓등으로 많은 정보를 얻기는 했으나 이미 다 까먹었다. ㅋ 암튼 누각과 단층 전각을 이어서 지은 이 건물 마음에 든다. 안에선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려나 심히 궁금.  

 

 

 

 

 

10월 중순이라 새파란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더 많긴 했지만 창덕궁 후원으로 넘어가니 조금씩 깊어가는 가을이 느껴졌다.  

 

역시나 가을의 손길이 제일 먼저 찾아온 곳은 애련지와 애련정 주변.

 

 

 

궁궐 전각들이 다 화려하고 근엄하긴 하지만 창덕궁에서 역시나 제일 마음에 드는 한옥을 꼽으라면 양반 사가를 그대로 궁에 옮겨놓았다는 연경당이 최고. 낙선재도 아담하고 예쁜데 한 군데 콕 집어서 살라고 하면 난 역시 사랑채 안채 별채 서재까지 다 갖춘 연경당을 택하겠다. ㅠ.ㅠ

 

 

특히나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난 작은 저 문.

옛날에 해설사한테 주워들은 가락을 옮겨보자면, 사랑채에 손님이 오면 안방마님이 하인들한테 굳이 묻지 않고 저 문으로 살짝 내다보아 사랑채 섬돌에 놓인 신발 켤레 수로 주안상을 준비한다나 뭐라나...

요새도 해설사가 연경당 안내할 때 그런 설명을 하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ㅎㅎ

 

암튼 단청 안 칠하고 적당히 낡고 바란 아담한 나무문과 문살이 참 예쁘지 아니한가. 

 

 

 

 

 

 

창덕궁의 가을은 작년에도 포스팅한 적이 있으니 이쯤해두련다.  (201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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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년 전인 것 같다. 덕수궁에서 한국근대미술 전시회가 열렸을 때, 유독 설명이 소상하고 정성스러웠던 도슨트가 이인성 화백의 그림 앞에서 말했다. 2012년이 탄생 100주년이니 아마도 조만간 대규모 회고전이 기획될 것이라고. 그 말대로 올해 5월부터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나 역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맙소사, 석달 내내 벼르다 또 다시 끝나기 며칠 전에 겨우 다녀왔다. 입장료도 안받는 이런 무료 전시회는 미리미리 다녀와서 사방에 광고 하고 그래야하는데 쩝...  그나마 이인성 회고전 말고도, 2층에선 <꿈과 시>라는 주제로 근대미술 기획전시도 하고 있는데 그건 12월 2일까지라는 데서 위안을 삼아야겠다. 역시나 무료. 덕수궁 입장료 천원만 내고 들어가면 된다.

 

 

 

<계산동 성당>, <해당화>, <카이유>, <소녀> 같이 전에 본 적 있어 반가운 그림도 있었고 난생 처음 보는 그림과 소장품들도 많았다. 유화와 수채화만 그린줄 알았더니만 특히나 수묵담채화도 그렸더군! 그간 나는 이인성의 그림을 예뻐서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요번에 모아놓은 그림들을 돌아보니 어쩌면 뭔가 많이 익숙한 느낌이라 좋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속적인 인물화에서는 고갱의 화풍이 느껴지고, 해바라기 정물화에선 당연히 고흐가 떠올랐으며, 풍경화 몇점에선 언뜻 샤갈이나 마티스가 연상되기도 했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없이 미술상에서 도안과 수채화를 배워 전시회에 출품해 척척 입선을 했다니 천재가 틀림없다.

 

 

이인성, [가을 어느날] 1934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鄕. 3, 40년대 문화예술계에서 워낙 조선의 향토성이 활발히 다루어졌대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선 아예 향토색을 심사기준의 하나로 강조했다지만 대구 출신의 이인성은 꾸준히 조선의 향토색과 한국적인 정서를 서양의 화풍과 기법에 접목했던 듯하다.

 

왼쪽은 타히티 여인들을 그린 고갱의 그림과 종종 비교되는 <가을 어느날>. 이 작품도 조선미술전람회 수상작이란다. 일제시대 관제미술의 수혜자였으므로  당연히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듯한데, 식민지 백성으로서 별다른 부와 배경 없이 남다른 재능을 펼치려면 일단 널리 인정받는 수밖에 더 있었겠냐고 설명했던 2년전 도슨트의 이야기에 나도 수긍했었다. 다만 그림 구석구석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놓여 있는 갖가지 소재들의 의미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전시장엔 이인성 화백이 소장하고 있던 각종 자료와 그림엽서, 사진들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도  나처럼 참 열심히도 명화 엽서를 사모았다는 사실에 괜스레 흐뭇했다. 물론 나야 한동안 구경하다 서랍속에 넣어두고 끝이지만, 이인성은 엽서 그림으로 서양의 화풍을 배우고 참고해 자신의 작품세계에도 반영했다고. 그래서 작품의 화풍이 다양하게 느껴진 것 같다. 모르긴 해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지 않았을까?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언뜻보고 마티스의 <붉은색 실내>와 비슷한 인상을 받은 <여름 실내에서>. 

이인성 [여름 실내에서] 1934

단순히 붉은 빛깔의 인테리어와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 풍경 때문일텐데, 나만 비슷하고 느끼는지 다른 사람들도 뭔가 관련성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두 사람의 활동시기가 얼핏 겹치니까 혹시라도 일본 체류시절 교류의 가능성이 있을까나? 하지만 <붉은 실내>는 1948년 작품이라, 이인성이 이 그림을 훨씬 먼저 그렸다. 괜히 나 혼자 소설 쓰고 앉았는 것일지도... 어쨌거나 타임머신 타고 돌아가 화백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아오... ㅎㅎ

 

 

 

 

 

 

 

 

 

 

이인성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카이유>나 <계산동 성당>은 과천 현대미술관에 가면 늘 볼 수 있는 그림인데도 정겹고 참 좋다. 저 성당 앞 감나무가 아직도 있어 여전히 '이인성 감나무'라 칭한다는데, 진짜로 어떤 모습일지 대구에 가게 되면 꼭 한번 찾아가 보리라 마음먹은지 수년째, 대구는 기차타고 지나가보기만 했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 때문인지 요번에 처음 본 <이화 교정>이나 <아리랑 고개> 그림은 나도 좀 지나다녀 본 언덕이라 슬며시 반가워 유심히 더 오래 구경했다. 

 

 

 

 

 

대체로 작은 크기의 그림들 사이에서 <가을 어느날>과 <해당화>는 꽤 큰 작품이라 이번에도 두드러져 보였는데 나의 착각인지 예전에 뭔가 오류가 있었는지  <해당화>가 '개인소장'이라고 되어있어서 살짝 의아했다. 지난번 기획전시때 본 <해당화>에는 분명 '삼성 리움 미술관 소장'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우리나라 미술품 가운데 대작은 다 삼성이 갖고 있군, 하며 코웃음을 쳤었는데... 어찌된 것일까나. ㅋㅋ 어쨌거나 언제 또 만날지 알 수 없는 개인소장품들을 더 열심히 오래오래 감상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전시실을 나섰다.

 

덕수궁 미술관 2층 전시실에선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을 비롯해 유명한 한국 근대서양화가의 작품을 대거 만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오지호의 <남향집>도! ^^; 사실 과천 현대미술관에 가면 늘 상설로 순회전시를 하고 있으니 만나기 어렵지 않은 작품들도 많았지만, 볼 때마다 흐뭇한 걸 어쩌라고... 

 

오지호 [남향집] 1939

화가의 딸이라는 빨간옷 소녀와 햇살 받으며 졸고 있는 하얀 강아지, 청보라색으로 표현된 나무그림자까지 정겹고 사랑스럽다. 이른바 '한국적 인상주의의 완성작'이라고 소싯적부터 교과서를 달달 외던 시절부터 마냥 좋았던 것 같다. 인상파 편향적인 나의 그림 취향은 참 오래도록 변할줄을 모른다. ㅋ

 

<남향집>외에도 미술교과서에서 익히 보던 화가와 작품들이 꽤 눈에 띄며, 작품 사이사이에 이상과 윤동주 등의 싯구절을 적어놓았다. 생각해보면 이 나라의 근대는 암울한 일제강점기지만 그 시절에도 예술은 꽃피고 사람들은 꿈을 꾸며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분명 이 땅에선 황금시절이 아니었겠지만 우리나라 근대의 모습도 퍽이나 매력적인 것 같다. (엇, 이런 발언 위험한가?) 이런 상상은 아마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영향인듯. 

 

 

 

 

 

 

 

 

 

궁궐 안 마당에 군데군데 서 있는 이인성 전시회 배너 가운데서 <카이유>를 찍어가지고 나오려니, 대한문 바로 옆에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에서는 쉰 목소리로 마음 아픈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가롭게 전시회나 보러다니는 게 조금 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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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한권의 책

놀잇감 2011. 10. 31. 08:33

언제부턴가 창덕궁에서는 봄과 가을에 후원 정자 몇개를 개방하고 책을 비치해 관람객을 유치(?)하는 연례행사를 벌인다. 이른바 한권의 책. 먼저 다녀온 이의 말에 따르면 비치된 책이라는 것이 몇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얄팍한 시와 에세이, 아동서 정도라 기대해선 안된다고 했다. 의미를 둔다면 평소 특별관람으로 후원엘 들어가도 해설사 안내에 따라서 한시간 반 이내에 쫓기듯 보고 나와야하는데 반해, 행사 기간에는 후원 정자 몇개에 들어가볼 수도 있고 후원 경내를 마음껏 돌아다녀도(물론 여전히 출입금지 구역은 있지만) 된다는 점이다. 봄과 가을에 딱 2주간씩 주어지는 혜택이라 요번엔(10월 30일까지였음) 날을 잡아 엄마랑 다녀왔다.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억새와 단풍 구경을 하고 싶다는 엄마의 눈치를 진작부터 받았으나, 나도 며칠 들먹 설레어 숙소와 항공편을 알아보다가는 제풀에 포기하고 만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니 작년에 일본 갔던 악몽이 다시 떠오르질 않겠나... (내 다시는 엄마랑 단둘이 여행 안가리라 다짐도 했었으니 -_-;) 해서 단풍구경은 서울에도 좋은 데가 있다는 걸 보여줄 작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풍구경은 절반의 실패였다. ㅠ.ㅠ 창덕궁에서 가을 책 행사 기간을 17-30일로 잡았길래 나는 지난번 반짝 추위로 단풍이 예년보다 일찍 들었나보다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켁, 나의 착각이었다. 10월말에 늘 한권의 책 행사를 기획하는 건 그때가 가을 행락철이라(말하자면 설악산, 내장산 같은데로 단풍구경 다니는!) 덩달아 그렇게 잡았다는 해설사의 설명. 단풍 예쁘게 든 후원구경을 할 요량이었다면 너무 일찍 왔다고 말했다. 쳇! 그렇지만 나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후원 정자와 전각에 들어가보는 것이었으니 얼른 마음을 달랬다. 드문드문 꽤 가을색으로 물든 나무들도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지난번 창덕궁엘 갔을 때만 해도 입장료 5천원에 인정전 일대와 후원의 부용정, 연경당 부근까지 보여주더니만 그새 시스템이 바뀌었다. 일반관람료는 3천원(65세이상 무료)이고 이 표로는 오로지 전각들이 있는 구역만 볼 수 있었다. 후원을 보려면 안에 따로 함양문 앞에 있는 후원 매표소에서 5천원짜리 특별관람권을 끊어야했다(경로우대 없음). 특별관람은 1회 입장인원도 원래 10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행사기간이라 200명으로 인원을 늘여준 덕분에 우리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3시 좀 넘어 궁에 들어가 전각 구역을 설렁설렁 돌아본 뒤(친구들이랑 다닐 땐 몰랐는데 궁궐엔 계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오르기는 수월하나 계단 내려오기는 울 왕비마마의 취약점이거늘... ㅠ.ㅠ 붙잡고 다니느라 모녀 동반 땀깨나 뺐다), 4시에 후원 입장하는 표를 끊었는데 내가 표를 살 때 전광판에 적힌 4시 관람 인원이 179명인가 그랬다. 평일 오후에 별러서 궁궐 거닐러 온 사람이 참 많기도 하지!

일본인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까지 바글거려서 전각 구역은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별로 없고 사진 한 장 못찍었다. 주워들은 풍월로 설명을 해보았으나, 엄마는 정민이 어릴 때 같이 갔던 경복궁과 계속 헷갈려했다. 열심히 설명하고 나면 그러니까 이게 근정전이지?(근정전은 경복궁에 있고 이건 인정전이라니깐~!) 저 대들보 없는 건물 뒤로 가면 예쁜 꽃담이랑 그림 달린 굴뚝 있었지?(거기는 경복궁 교태전이거든요... -_-") 뭐 이런 식...  암튼 엄마의 결론은 '창덕궁엔 처음인 것 같다'였다. 근데 넌 언제 그렇게 여길 자주 구경온 거니? 누구랑? @.,@ 엄마가 섭섭한 듯 추궁할 기세를 보이길래 커피랑 물 사온다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ㅋ

제대로 단풍이 들었다면 빨갛게 터널을 이루었을 후원 입구는 아직 초록빛이 완연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단풍 요란하게 드는 활엽수들은 원래부터 창덕궁에 있던 나무가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하도 좋아하여 새로 심은 것이란다. 옛날 궁궐 후원엔 변함없이 푸르른 소나무가 대부분이었다는 해설사의 이야기가 어찌나 새삼스럽던지(과거에 듣고도 까먹은 것일까나, 해설사 설명을 귓등으로 들은 것일까나). 단풍구경은 가을 궁궐이 제일이라며 그간 구경다닌 나는 뭐람. ㅎㅎ

부용지에서 올려다본 주합루

애련지와 애련정


아무튼 후원에 들어가 제일 처음 만나는 부용지 주변을 므흣하게 바라보며 인증샷을 찍었다. 바글거리는 사람 안 넣으려니 어찌나 힘든지 원... 위 사진 둘 다 한 사람씩 잡혀 있다. 왼쪽 여자는 무려 출입금지 팻말을 세개나 거슬러 계단을 올라가 사진을 찍던 외국인. 방송으로 내려오라고 해도 못 알아듣더라. 오른쪽 사진의 빨간 잠바 아줌마도 참 사진마다 내 앞을 가리며 속을 썩이더니 어느새 찍혀 있다. ㅋ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과 반도지

존덕정의 화려한 천장


원래는 궁궐이랑 엄마 사진을 제대로 찍어오려고 디지털 카메라도 가져갔었는데... 흑.. 두장 찍고 나니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집에서 켜봤을 땐 배터리 다 차있길래 그냥 가져간 건데.. 쩝... 하여간 후원이 깊어 그런지 4시를 넘기고 나니 해도 안비쳐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 참 다들 알량하다. 얼마만에 보는 반도지와 관람정인데! 으휴... 천장의 팔각형 단청이 유난히 아름다운 존덕정엔 정조의 친필 현판과 주련이 걸려있어 더욱 유명하다. 사진 오른쪽에 밤색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정조의 친필. 마침 존덕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어 얼른 걸터앉아 쉬며 사진을 찍었다.

연경당 뒤쪽부터는 나도 그야말로 난생처음 가보는 옥류천 일대! 등산이나 다름없다고 겁을 잔뜩 주는 바람에 엄마도 나도 긴장했는데 조금 가파른 비탈길이 있어 숨이 잠시 가빠지긴 했으나(그래서 옛날 왕들도 행차하기 힘들어 후원으로 안 넘어오고 창경궁 쪽으로 돌아 다녔단다) 금세 취규정인가 뭔가 하는 정자가 나타났다. 그담부터는 다시 내리막길. 호젓한 오솔길을 내려가니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물이 흐른다는 옥류천이었다. 커다란 바위를 깎아 물길을 내고 폭포(!)를 만들었다는데, 책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옥류천은 실물로 보니 어찌나 규모가 아담하신지... ㅋㅋㅋ

옥류천 폭포(?)

청의정과 태극정


숙종이 지었다는 한시가 돌에 새겨져있는 옥류천 주변에는 정자 셋이 조르륵 둘러쳐 있다.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이 남아있는 청의정! 원래 궁궐도를 보면 청의정 주변이 연못이었다는데 대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게 주변이 논으로 변했단다. 가을이라 추수를 마친 논 한 가운데 서 있는 청의정 모습이 참 신기했음. 논에서 벤 볏짚으로 청의정 지붕을 단장한다고 하므로, 논을 다시 연못으로 바꿀 수도 없겠다. 옥류천 일대는 창덕궁의 가장 북쪽 끝이라 담장이 빤히 보이고, 그 담장 너머엔 옛날 성균관이 있었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었나, 정조가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궁궐 전각까지 몰래 대물 일행을 피신시키던 장면이 떠올라 얼핏 웃었다. 그들도 산넘고 물건너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싶어서.
 
암튼 일단은 엄마를 위하여 해설사의 이야기를 따라 듣다가 나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전각에 들어가 쉬려고 마음 먹었던 우리는 옥류천에서 뒤처졌다. 원래도 정자보다는 전각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나가면서 부용지 옆에 있던  널찍한 영화당--옛날 과거시험 본부 건물이라고--에 올라가 쉬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못했다 ㅠ.ㅠ) 옥류천 옆쪽에 농산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는데다가 외져서 그런지 사람이 한명도 없는게 아닌가! 나는 냉큼 신발벗고 들어가 아픈 허리와 다리를 쉬었으나, 엄마는 신발 벗기 귀찮다고 툇마루에만 앉아 쉬셨다.

읽고픈 책이 한권도 없었다 -_-;

그만 좀 찍어라..고 하심


전각에 비치된 책은 저 정도... 예전에 세자와 왕들이 묵으며 학문을 닦던 곳이라는데 죄다 마룻바닥이니 겨울엔 얼마나 추웠을까. 일부러 공부만 하려고 북향으로 지은 전각들도 꽤 되던데 참... 왕과 왕자도 못할 짓이었다 싶다.

두다리를 쭉 뻗고...

깔고 앉으라고 방석도 놓아두었던데, 아무리 관리를 하더라도 곳곳의 나무가 들고 일어난 걸 보니 안타까웠다. 한옥은 목조주택이라 특히나 사람의 온기가 미치고 자꾸 밟아주어야 들뜨지 않는다는데, 일년에 두어번 행사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더욱이 농산정처럼 외진 전각은 행사기간에도 거의 외면당하는듯. 책꽂이 위에 방명록이 있던데 적힌 이름이 몇 되지 않았다. 나 또한 10분도 못 넘기고 쫓겨나야 했으니...

우리가 와글거리는 일행과 떨어져 전각에 들어앉으며, 이젠 더 볼 것도 설명 들을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자 밖에서 관리인인 듯한 아저씨가 말을 거들었다. 나가는 길에 700년된 향나무 설명 듣는 게 마지막인데, 작년 곤파스 때 부러져버렸다고. 그러면서 5시반에는 이곳을 나가야 하니 5분만 더 있다가 자기랑 같이 나가면 되겠다고 했다. 궁궐은 6시까지지만 옥류천 일대는 5시반에 관람시간이 끝난다는 것. 게다가 6시 되기 전이라도 좀 더 있으면 완전 깜깜해져 나가기 불편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우린 순순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 26분. 슬슬 일어서 나가려는데 아저씨가 너구리 좀 보라고 했다. 엥? 놀라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정자 옆 오솔길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너구리 두 마리! 나는 얼른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 아저씨는 무전기로  동료에게도 너구리 구경하라고 알렸다. "민OO씨! 그쪽으로 너구리 두 마리 올라갑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야생너구리가 살고 있다니! 신기해서 물어보니 꽤나 자주 나타나는 녀석들이란다. 대체 무얼 먹고 살까 염려되었으나 워낙 잡식성인데다 주변에 상수리나무가 많아 먹거리는 풍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뒤에서 보는 궁둥이가 아주 토실토실.

전각 문을 닫고 뒷정리를 하는 아저씨를 뒤에 남겨두고 우린 얼른 너구리를 따라 언덕길을 올랐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숲으로 피신하는 너구리를 멀리서나마 포착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데도 이 너구리란 놈 도망도 안가고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테면 찍어보라는 듯이... 아무리 서툰 목수가 연장 탓 한다해도 이미 해는 기울어 어둑한데 아이폰으로 당겨 찍어봤자 한계가 있었지만, 창덕궁 후원에서 만난 너구리 두 마리는 모녀의 가을 나들이에서 아주 유쾌한 마무리였다. 곧이어 열뻗치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주 금상첨화였을 텐데.... 흠...

아무튼 단풍구경이라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어도 도심에서 원없이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를 흡입하며 장단지 허벅지가 팍팍해질때까지 산책한번 거하게 잘한 셈이었다. 막판에 헐떡거리며 올랐던 가파른 언덕 대신 더욱 호젓하고 완만한 오솔길로 퇴청한 것도 좋았고.



이날의 산책이 어찌나 고되었던지 집에 돌아온 나는 10시를 넘기자마자 뻗어버렸다. 그러고는 새벽 4시에 잠이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보통 왕들이 원래 새벽 3, 4시에 일어나 아침부터 공부를 하고 온종일 업무를 본 뒤 밤 늦게 또 상소나 경전을 읽다가 자정에나 겨우 잠드는 삶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전날 들었는데, 그래서 4시에 잠이 깼나 킬킬 대며 생각했다. 틀림없는 왕족설의 증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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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트니미술관전

놀잇감 2011. 9. 27. 22:23

6월부터 시작해 9월 25일까지 석달도 넘게 한 전시를 끝나기 며칠 전에 간신히 다녀왔다. 처음엔 시간 많으니 애들 방학 끝나고 천천히 가지 마음 먹었다가 점점 갈까말까 망설이는 쪽으로 기울게 된 이유는 아무래도 <이것이 미국 미술이다>라는 전시 제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겠으나 어쩜 이리도 오만하고 건방진 제목을 정했을까 공연히 빈정이 상했다. 아무리 휘트니 미술관의 역사가 유럽 미술 중심의 흐름에 반감을 품고 미국 화가들을 독려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겨우 80몇점 그림 빌려와서 보여주며 그게 미국 미술의 전부라고 큰소리칠 수가 있단 말인가? (미술관을 다 돌고 나서, 진짜로 내가 무식하기 때문에 궁금하여 던지고 싶었던 질문: 에게게... 정말 이게 미국 미술의 전부라고? -_-;)

가기 전부터 이미 고까운 마음이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에드워드 호퍼 딱 세 사람의 그림만 보고 와도 '본전'은 뽑겠다고 생각했던 전시회는 퍽 실망스러웠다. 현대미술과 추상화에 완전 무지한 내 탓일 수도 있고, 무조건 예쁜 그림만 선호하는 내 취향 탓일 수도 있으나, 아무튼 나는 그랬다. 앤디 워홀 작품도 어쩜, 수프 깡통이랑 세제 박스 같은 것만 두어개 가져왔더라. 리히텐슈타인 작품도 딱 두 점. +_+
<아메리칸 아이콘과 소비문화>를 주제로 한 방이었던가? 죄다 앤디 워홀 아류작 같고 그밥에 그나물 타령인 대중적인 상업 미술을 보며

로이 리히텐슈타인,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 1993.

난 아무 감흥도 일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의 경우도 <크리스털 그릇이 있는 정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뭔가 더 크고 새롭고 유명한 작품이 왔기를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브제와 정체성, 오브제와 인식을 2, 3부로 꾸민 전시실에서도 특별히 마음을 끄는 작품이 없어 몇번이나 방을 돌아다녔어도 관람은 금세 끝이 났다. 휘트니 미술관 가면 반나절 내내 쉬지 않고 그림을 봐도 다 못보고 지친다더만 이게 뭐람! 쳇...

그나마 귀엽다 느꼈던 작품은 축소한 옷을 연결해 놓았던 빨랫줄(사진 못찾았다 ㅎ)과 찰스 레이의 <퍼즐병>.

찰스 레이, [퍼즐병] 1995.

영국에서도 이런 좁은 병안에 엄청나게 정교한 범선을 넣어놓은 작품 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일일이 조립을 하는 걸까? +_+

미국 현대미술이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물건과 이미지로 작품활동을 했다는 건 얼핏 알겠으나, 나는 그래도 뭔가 좀 회화스러운 느낌의 작품을 더 좋아한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오브제를 통해서 미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보여주겠다는 것이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였다는데(현대미술도 잘 모르지만 오브제 싫다규~!), 스스로도 좀 민망했는지 특별코너로 <20세기 미국 미술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방을 하나 꾸몄고 내가 알현을 바라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바로 이곳에 걸려 있었다. 비록 호퍼의 그림을 딱 한점 볼 수 있기는 했지만, <해질녘의 철로> 그림 앞에서 나는 이미 지나온 3개의 전시실에서 쌓였던 실망감을 어느정도 풀 수 있었다. 사실 호퍼의 그림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간 온갖 책에서 호퍼의 이름과 작품 설명을 만나며 정말이지 궁금했다. 화집이나 사진으로 보는 호퍼의 그림은 얼핏 (무식하다고 욕먹어도 할 수 없다 ㅋㅋ) 약간 <이발소 그림> 같은 느낌을 풍겼고, 인물이 등장하거나 안하거나 늘 황량하고 쓸쓸함이 물씬 묻어났다. 뭔가 아주 복잡하고 기구한 사연이나 황망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것도 같고...  어쩌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들에서 풍기는 인상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던 누군가의 평론을 보아 생긴 편견 때문일수도 있겠다. 하여간 툭 트인 공간과 여백에서 느껴지는 막막함과 무심함이 호퍼 그림의 매력이라고 나름 상상하고 있었는데, 나의 상상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그림을 만난 것 같았다. 
 

에드워드 호퍼, [해질녘의 철로] 1929.

이전까지는 모두 합해 30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휙휙 작품을 스쳐지나다가 호퍼의 이 그림 앞에서는 정말 넋이 빠진듯 한참이나 감상하고 서 있었다. 노을에 물든 하늘 빛깔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철로변이라는데 나는 이 그림을 본 순간, 문득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파주를 향해 자유로를 달리다 왼편으로 만나게 되는 한강변 철책과 군초소가 떠올랐다. 오래 전 무언가 속이 상한 일로 질질 눈물을 짜다가 통닭 한 마리랑 소주 한 병 들고 할아버지 할머니 무덤 앞에서 엉엉 눈물을 쏟은 뒤 돌아오던 길에 오른쪽 차창으로 이런 노을빛을 본 것도 같고...

암튼 결론은, 그래서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계속 입이 댓발쯤 나와 툴툴거리다가 마지막 전시실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ㅎㅎㅎ 마음이 좀 풀리니 처음엔 조악하게 입구에 재현해 놓은 복제본 작품사진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 비웃던 마음도 잊고 나도 한 장 찍어오기까지... ㅋㅋㅋ

마리솔, [여인과 강아지], 1964

마리솔이라는 화가의 작품을 입간판처럼 입구에 세워놓았는데, 실제 작품에선 왼쪽의 저 개 머리가 '박제'라고 해서 좀 놀라고 으스스했다. -_-; 이 사진에서 흥미로운 건 오른쪽 위에 구멍을 뚫어 보이게 해놓은 소화전(?)이다. 전에도 이런 구도로 다른 작품 복제본 세워놓았던 것 같은데, 그 때도 저렇게 구멍을 뚫어놓았던 걸 기억한다. 매번 저것도 작품의 일부 같아 웃기다!







'본전' 안 아깝게 호퍼의 그림을 보고 또 보고 그러다가 미술관을 나왔으나 뭔가 문화생활이 덜 충족된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한 바퀴 덕수궁을 거닐며 밤궁궐의 정취를 느껴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그러고 나서야 흡족한 심정으로 대한문을 나설 수 있었다. 갈까말까 망설여지는 전시회는 아예 안가고 아쉬워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교훈을 새삼 하나 새기면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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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전부터 덕수궁에서 열린 이 전시를 나는 볼까말까 망설이고만 있었다. 아시아 미술에 대한 무지가 가장 두드러진 이유였지만, 또 그래서 더 보러가야하는 게 아닌가 했었다. 유명 서양 미술가 작품에만 환장하며 좋아하는 내 태도가 걱정스러워 반성하는 의미에서라도 봐야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10월 10일이 전시 마지막이라(역시 10월 10일까지였던 이응노 전시회도 결국 못갔다 ㅠ.ㅠ 그나마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위로하기로 했음) 시기적으로 못보기 쉽겠다 여겼는데, 확실히 공짜는 게으름뱅이도 움직이게 한다는 게 맞다. ^^; 입장료가 비싸진 않았지만(덕수궁 입장료 포함 5천원) 그래도 초대권이 있으니 저녁 모임 이전에 구경하고 오라는 착한 지인의 권고에 지난 수요일 좋아라 달려나갔다. 잠이야 두 시간을 잤든 말았든...

염려했던 대로 '보기 불편한' 식민시대의 아픔과 전쟁의 참상이 주제인 그림들도 전시실 한두 개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난생 처음 보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필리핀, 인도 등의 근대 화가들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겠나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우리나라 화가들의 작품도 있기야 하겠지 생각했지만, 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횡재한 기분으로 만난 그림은 바로 이것.

이인성의 1944년 작품인 <해당화>다. 정물 해당화 그림도 아니고(과천 현대미술관에 있다는데 만날 교체전시중이라 난 구경도 못했다), 한용운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해방에 대한 염원까지 담아냈다는 이 거대한 작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삼성 리움 미술관에 있단다. 돈이 많으니 리움에서 대작은 참 많이도 갖고 있다. -_-;

요번엔 설렁설렁 맘에 드는 그림만 감상하리라 마음 먹었던 터라 도슨트를 따라다니지도 않았었는데, 바글바글 사람들에 둘러싸여 오래 설명하는 그림이 바로 이 작품이란 걸 깨닫고는 우리도 얼른 귀동냥을 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머지 않은 광복의 희망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림 오른쪽 아래 놓인 우산이 접혀 힘겨운 시기는 이제 다 지나갔음을 뜻한다는 등이 조목조목 그림 설명은 관두고라도, 나는 이인성의 그림이 '예뻐서' 좋다. (이런 무지한 감상 태도를 버려야한다는데 그게 안된다;;) 그냥 척 보면 정감 가는 작품이랄까. 하얀 수건을 쓰고 앉아 있는 누이의 얼굴은 옛날 우리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도 닮은 듯하고 정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더라도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기꺼이 뿌듯했을 심정이라 유난히 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전시실을 돌고 나서 아픈 다리를 오래 쉬어야 했음에도 그저 좋았다.


이 그림 말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포스터에도 실렸던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였다. 인도네시아 화가의 그림이라는데 이유는 몰라도 소장은 싱가포르 국가위원회더라. 중앙에 있는 인물이 워낙 인상적이라 작품을 구석구석 자세히 보지 않다가 그림 제목을 보고 잠시 움찔했기 때문에 (나는 병아리가 무섭다 +_+) 그림을 검색해 찾아오지 않고 미술관 앞에 있던 걸개그림 찍은 걸 대신 자랑하련다. (기다란 그림 아래쪽에 병아리 둥지가 놓여있고 병아리들이 껍질을 막 깨고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란다. 엄청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인물화가 많았지만,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그림들이 확실히 사랑스럽고 시선을 오래 끄는 이유는 뭘까 매번 궁금한데, 결론은 늘 하나다. 모든 동물의 수컷이 더 아름답다지만 인간은 예외라고. ^^; 이 그림이 포스터와 티켓에 실린 이유 역시, 전시 기획자가 나처럼 이 모델을 가장 어여삐 여긴 게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그건 아니고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이번 작품들 가운데 시기작으로 딱 중간이라 선정됐다는 설명을 지인이 도슨트한테 듣고 와 전달해주었다. ㅎ


어쨌든 덕수궁에서 하는 전시회는 궁궐에 대한 끝없는 나의 선망 때문에 언제나 입구부터 행복해진다. 습관처럼 현대미술관을 나오며 계단 꼭대기에서 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같은 구도의 같은 사진이라도 아이폰으론 처음 찍는 거잖아, 그러면서... 가을 단풍이 고울 무렵엔 다른 궁궐에도 꼭 가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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ㅌㄹ마을 필독도서가 되어버린 책을 이제야 읽었다. 내일까지 검토서 만들어 보내야할 원서가 있었는데도, 워낙 하기 싫은 일인 데다 책 네 권이 자꾸 나에게 손짓을 해대는 것 같아서 그제 밤을 꼬박 새워가며 엄마한테 구박 들어가며(원래 자는 시간인 아침이 밝은 뒤에도 안/못 자고 계속 읽었다) 거의 쉴 새 없이 내달리듯 탐독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웃분들이 거론하던 가상 캐스팅 배우들의 얼굴이 연이어 떠올라 킬킬 웃음짓기도 하고 나만의 아이디어를 짜내보려고 애쓰다가는 그냥 포기하고 이야기속에 빠져들었다.

로맨스 소설은 읽기 전엔 괜스레 뻔한 상투성을 비웃다가도 읽기 시작하면 매번 정신 못차리고 끝을 봐야 속이 시원하다. 중학생 시절 하이틴로맨스로 시작돼 할리퀸 로맨스 시리즈를 거쳐 주드 데브루가 어떻니, 조안나 린지가 어떻니 작가 따져가며 골라 읽던 시절에도 그러했고, 한동안 끊었다가(?) 로맨스 소설로 번역인생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로맨스 번역에서 차츰 손을 떼게 된 건 번역 분야를 넓혀 몸값을 올리고(?) 싶은 내 욕심도 있었지만, 그 무렵 외국(특히 미국) 로맨스 작가들의 작품이 사양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속속 등장한 국내물의 선전이 주효했다. 지나치게 진부하고 통속적인 구도와 인물에 신물나기 시작한 외국물보다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아기자기하고 인물도 정감있는 국내물이 훨씬 재미있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어서, 중소대형 출판사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로맨스 작가들을 스카우트 하려는 열풍이 불었다.

성균관, 규장각 시리즈를 쓴 정은궐 씨 얘기도 그때 지인에게 들었다. 초기 작품의 교정과 편집을 맡은 친구가 작품 의논 때문에 연락을 해보니 직장인이더라나. 다른 국내 로맨스 작가 발굴에 참여하기도 했던 눈썰미 좋은 그 친구가 글솜씨 칭찬하는 말을 들으며, 다들 막 짜증을 냈던 것 같다. 뭐냐, 직장생활도 하면서 취미생활로 돈도 벌고! 부러워서 질투난다, 뭐 그런 내용이었을 거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인기로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은 예약 판매분만 수만 부가 넘었다는 얘기도 들은 듯하다. 얼마 전까지도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 있었으니, 지금쯤 지은이는 돈방석에 올라 직장생활을 관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을까?

나로선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 <성균관>이 2007년 초에 나왔는데 <규장각>이 2009년 여름에 나왔으니 거의 2년 반이나 걸린 셈이다.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느라 그러기도 했겠지만, 직장생활과 병행하느라 더 오래 걸린 게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짐작이다. 물론 중론이 그러하듯 나 또한 <성균관> 1, 2권이 <규장각> 1, 2권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주요 인물들의 정체가 다 공개되고 말았으니 다음 시리즈는 긴장감이 더욱 느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잘금 4인방 김윤희, 이선준, 문재신, 구용하를 비롯해 덕구아범과 순돌이, 반다운, 황서영 낭자까지 참으로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해낸 솜씨라면 뭔가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엮어내고 있지 않을까나? 지은이가 정조 시대 역사와 궁궐에 대해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던데, 여기서 끝내기는 아깝다규~!

반할 수밖에 없는 훈남들의 활약상을 즐기며 상상세계에서 너무 오래 머문 탓인지, 찌질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꼬부랑 글씨 원서가 좀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재미없는 소설 읽고 검토서 만드는 건 정말 못할 짓이다! 어쨌거나 얼른 마무리해서 아침까지는 메일로 쏘아주어야 하는데 어흑... 어제처럼 이선준을 꿈꾸며 잠이나 자고싶다.(나도 이선준은 너무 완벽한 인물이라 문재신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는데 꿈엔 문재신 대신 이선준이 나왔다. 내 옆에 앉아 조보 대신에 신문을 꼼꼼히 읽더니 감미로운 목소리로 잔소리를 해댔다. ㅋㅋ)

그나저나 제 다음 순서는 통통님이신데, 워낙 바빠 언제 읽으실 수 있으려나요? 어떻게 전달을 해드려야 하옵는지... 책이 돌고도는 책방마을 ㅌㄹ마을, 나도 좀 기여를 해야할 터인데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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