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역사와 궁궐의 역사, 이론 수업을 두 주일 하고 나니 벌써 궁궐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최초의 조선 궁궐인 경복궁을 시작으로 일단 창덕궁까지. 경복궁은 가뜩이나 관람객 바글거리는 토요일 오후에 시끌시끌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창덕궁은 휴관일인 월요일에 교육생들만 특별 출입을 할 수 있어서 고즈넉하니 좋았지만 온종일 철철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 함정. 다행스럽게 이틀 다 날씨가 별로 안추웠지만, 경복궁은 허허발판이라 칼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역시나 영하였고 창덕궁엔 살얼음이 얼거나 얼어붙은 길이 다시 비에 녹아 미끌미끌 위험천만이었다. 완전무장 후 핫팩을 들고 다녔는데도 발시리고 손시리고 코시려워서 여간 힘이 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을만한 한겨울의 궁궐답사가 아닐는지.
교육에 집중해야 되기 때문에 사진기는 가져오지 말라고 했고 사진촬영도 되도록 삼가라는 당부가 있었으므로 사진은 답사 시작 전과 중간 쉬는 시간에 겨우 몇장 찍었을 뿐이다.
모임 모임장소였던 흥례문. 광화문은 그냥 드나들 수 있지만 여기부터는 입장료를 내고 표를 사야 들어갈 수 있다. 우린 목에 거는 명찰이 입장권 대신이라 계속 큼지막한 이름표를 달고 다녀야 했다. 민망하여라;;
생각해보니 경복궁엘 몇번 가봤어도 복원한 지 얼마 안되는 흥례문 옆 행각은 자세히 돌아보지 않은 것 같아 유심히 구경하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처마 아래쪽 단청 위에 작은 삼지창(?)들이 꽂혀있는 게 아닌가! ㅎㅎㅎ 귀엽기도 하지.
3시간 넘게 궁궐 답사를 하게 될 터이니 어느 지점에든 설명이 나오겠지 짐작했는데, 정말로 그랬다.
궁궐에 가보면 주요 전각마다 지붕 밑 단청에 죄다 그물을 쳐둔 걸 알 수 있다. 난 그게 단청보호를 위한 문화재청의 묘안인 줄로만 알고, 안 예쁘게 그게 뭔가 불만을 품었는데 그건 내 무지의 소치였다.
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옛날부터 '부시'라고 하여 사용했던 그물이래고, 회랑이나 궐담처럼 그물을 치기 어려운 곳에는 저렇게 새가 집을 짓거나 앉지 못하도록 오지창을 꽂아 두었단다. 새의 배설물이 강산성이라 목재건물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라고. 캬... 단청을 감싼 그물은 내막을 알고 보아도 별로 아름답지 않지만, 저 오지창은 정말 귀엽다. ㅎㅎㅎ
경복궁은 중고생때 사생대회다 소풍이다 해서 많이 다녀 꽤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 옛날엔 남은 전각들이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그냥 허허벌판이었던 것 같다. 너른 잔디밭에서 반대항 장기자랑하고 수건돌리기도 하고 놀았는데, 이제는 건물을 많이 복원해놓아 휑한 느낌이 많이 사라졌다.
궁궐관련 책에서도 읽은 적 있다. 구중궁궐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 주요 전각들은 주변에 빼곡하게 행각과 부속 건물들이 있어 겹겹이 담장으로 둘러싸였으며, 근정전이나 인정전 마당인 조정 이외에 궁에서 이상스레 널찍한 공간을 보면 거기에도 분명 전각이 있었겠구나 짐작하면 맞다고.
경복궁엔 아직도 널찍한 빈 공간이 꽤 많았고 여전히 복원공사가 진행중이었다. 각종 기록이 있다해도 어차피 재료도 달라진 마당에 옛모습 그대로 돌려놓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몇년이 걸릴지 복원후의 모습이 기대된다.
경복궁에서 지붕이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은 무엇일까? 혹시 근정전?
땡. 답은 경회루란다. 그래서 처마 위에 올려둔 잡상의 갯수도 제일 많아서 11개나 된다고. 인왕산 백악을 배경으로 얼어붙은 연못에 서 있는 경회루의 위용이 멋져서, 쉬는 시간에 코 찔찔 훌쩍이면서 여러장 찍었는데 영... 각이 잘 안나온다.
세시간 반에 걸쳐 하도 들은 게 많아 벌써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른 궁궐과 달리 경복궁의 근정전에만 월대에 난간석을 둘렀으며, 십이지신을 새겨놓은 각 방향의 조각을 눈여겨봐야한다는데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사방신이나 겨우 외웠지 십이지신 방향까진 못외우겠다. -_-;
경복궁에서 유일하게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고 최근 복원했지만 나의 한옥살이 열망과 더해져 제일 좋아하는 전각으로 손꼽고 있던 건청궁엔 글쎄 고종 창건당시 원래 일부 단청을 칠했었단다. ㅋ 헌데 아직 단청을 칠하지 않은 이유는 워낙 좋은 강원도산 금강송을 구해 지어 나무색이며 향기가 좋은데 아직은 단청 안료가 화학성분이라 더 좋은 재료의 안료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나... 항상 원래대로의 복원이 능사는 아니라는 좋은 예가 아닐지.
하도 움츠리고 다녀서 삭신이 쑤심을 느끼며 돌아나오는 길에 근정전 행각 기둥 사진도 한장 찍어왔다. 옛날엔 안쪽에도 담장이 쳐진 관청건물이었다는데... 기둥이 줄지어 서있는 이런 회랑이 나는야 참 좋다. 음양오행에 따라 기둥의 바깥쪽 주춧돌은 원형이고 안쪽 기둥의 주춧돌은 사각이라는 것이 감상의 포인트. ^^;;
그리고 근정전 앞의 넓은 조정이 평평한 것 같아 보이지만,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지대가 높아져 행각 지붕도, 바닥도 계단식이라는 얘기는 예전에 1박2일에서도 들은 적 있다.
사진은 나오면서 찍어서 저 먼 쪽이 낮은 근정문 쪽.
광화문부터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까지 남북방향으로 주축이 일직선으로 정확히 맞으며 좌우대칭되는 구조도 얼추 맞는 유일한 궁궐이 경복궁이라는 것으로 답사 정리 끝.
문닫힌 돈화문 안쪽에서 사람들 모이기를 기다리며 나무 사이로 보이는 금천과 진선문을 찍었다. 진눈깨비도 사진에 담기려나 기대했는데 무리였음. 다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줄지어 서 있는 회회나무가 보인다. 세 그루인가 했더니 안내책자엔 총 여덟그루라고. 비가 내려 나무기둥이 검게 보여 그런가, 분위기가 신령스러운 것 같다. ^^;
이번엔 점심먹고 나서 들어와, 회화나무쪽에서 본 진선문과 저 멀리 솟은 인정전. 바글거리는 사람이 없으니 이리도 좋구나...
창덕궁 전체가 특별관람일 때 전각 안내를 대충 들은 게 마지막이고, 이번엔 교육용이라 설명이 더 자세한 덕분이겠지만 옹기종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전각 구역에도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했다. 모퉁이 모퉁이마다 사연 깊은 전각들이 어찌나 많은지... 규장각은 주합루 1층에만 있는 줄 알았다가, 너무 후미진 곳에 있어 정조 때 궐내각사로 옮겨 두었다는 아담한 규장각과 검서청 건물 설명을 들은 것이 기억에 남는 소득이었다. 검서청엔 청나라에서 들여온 모든 서적을 가장 먼저 읽고 정리하는 관리들이 일했다는데, 딱 내가 하고싶은 일이구만...
우산을 뻗쳐들고 다니다가 그 사이사이 수첩에 뭔가를 기록해야 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너무도 고단한 일이어서 집에 와 열어보니 무슨 글자인지 못 알아보게 생긴 게 태반이다. 괜히 열성인 척 부산 떨지 말고 그냥 경청이나 할 것을...
째뜬 눈 새하얗게 덮인 후원에 발자국 찍으며 구경다니고팠던 소망을 이룬 건 아니지만 얼어붙은 부용지와 부용정을 보니 얼른 찍어와야할 것 같았다. 후원은 늘 특별관람이라 이 근방은 내가 좀 잘 안다고 생각했음에도 처음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정조 때 경사가 있으면 이 부용지에 배를 띄워 신하들과 술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다는데, 정약용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제 순서에 시를 짓지 못하는 신하는 정조가 저 섬에 잠시 버려두기도 했단다. 정조는 짓궂게 장난도 잘 치는 왕이었군. ㅋㅋ
후원의 제일 깊숙한 곳에 있는 초가집 청의정에 대해서도 그간 들은 설명에 오류가 있었다. 해설사마다 청의정 주변 좁은 연못에 벼를 심어 수확하는 이유가 청의정 지붕을 얹기 위함이라더니, 거기서 나는 볏단 정도로는 청의정 지붕
을 잇는 게 어림도 없단다! 그냥 상징적으로 심는 것일 뿐이라고..... 쳇.
어쨌거나 비가 철철 오는데도 초가지붕에 쌓인 눈은 녹지 않는 신기한 모습을 보이는 청의정 모습도 한장.
아참, 재작년엔가 창덕궁 전각을 개방하는 <한권의 책> 행사때 내가 유일하게 들어가 앉아보았던 후원의 농산정은 온돌방은 물론이고 유일하게 부엌도 딸려있는 전각이란다. 그래서 왕이 활쏘기 연습을 하다가 날이 저물면 묵어가기도 했고, 정조는 화성행궁 행차를 이곳 후원에서 예행연습 시켰는데 그때 혜경궁 홍씨의 가마꾼들에게 농산정에서 만든 음식을 대접했다는 내용이 실록으로 전한다고...
그러니까 활쏘기에 지친 정조가 자고 갔을지도 모르는 전각에 내가 들어갔던 거였다! ㅋㅋㅋ
암튼 조선의 왕들이 이토록 비탈진 후원 정자에 직접 걸어다녔을지 가마를 타고 갔을지 말을 타고 갔을지 그야 알 수 없지만, 직접 걸어다녔다면 퍽이나 힘겨운 운동이었겠다 싶다. 비 때문에 3시간으로 예정된 오후 교육을 2시간 40분으로 줄였는데도 다리가 풀릴 지경... ㅠ.ㅠ 집에 와 곧장 쓰러져야 했다. 이로써 전생에 궁궐에 살았을지도 모르며 창덕궁 후원 같은 정원을 둔 엄청난 한옥에 살고싶다는 막연한 꿈은 완전히 버리기로 했다. 너무 넓어서 피곤해! @.,@ 그냥 연경당이나 낙선재 정도 한옥이면 만족할 텐데, 연경당만 해도 무려 120여칸... ㅋ 아직도 과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