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13.09.24 친절한 옆집 할머니 5
  2. 2013.08.15 어떤 고모 8
  3. 2013.02.08 다시 그 자리 11
  4. 2012.05.28 되다 14
  5. 2011.10.18 아흔개의 봄 4
  6. 2011.04.15 누가누가 잘하나 7
  7. 2011.04.05 가족이 뭔지 10
  8. 2011.01.28 사춘기 8
  9. 2011.01.26 눈길 11
  10. 2011.01.09 모피 유감 8

연휴 전 만난 후배가 고부갈등의 가능성을 피해갈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내 머리가 시원찮아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진 않는데, 암튼 남아있는 기억으론 시어머니를 자기 남편 예뻐해주는 친절한 옆집 할머니라고 생각하면 그저 매사에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라는 거였다. 크핫, 하고 웃으며 대단한 묘안이라 칭찬해주고보니, 내게도 아주 유용한 발상의 전환이란 생각이 들었다. 맞다, 우리가 또 피붙이들에겐 뾰족한 말 턱턱 내지르고 짜증과 성질 막 부리면서도, 남들에겐, 특히나 이웃 노친네들에겐 좀 친절하고 관대하게 구는가 말이다.

 

물론 가끔 만나서 잔소리 듣는 시어머니와 24시간 붙어 살아야하는 노년의 엄마를 동급으로 취급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그런 태도를 취하는 한은 나 또한 버럭 화도 덜 내고 막말도 덜하고 짜증도 덜 부리지 않을까나. 수년동안 말짱했던 대비마마의 심신이 다시 불안해지면서, 난 왜 그리도 안쓰러운 마음보다 짜증이 더 치미는지 원.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 병이 그러는거라는 걸 머리론 아는데 입에선 이미 뾰족한 말이 튀어나가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노처녀 히스테리(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아니면 갱년기 예비증상이 아닐까 하고 주변에서 염려를 할 지경이다.

 

째뜬 한번 시도해보자 싶으면서도 무딘 머리로는 생각전환이 잘 안돼서 계속 명절증후군과 후유증을 호되게 앓는 며느리에 빙의된 딸노릇을 며칠 내내 하다가는 어젯밤 드디어 '상냥한 이웃집 아줌마 코스프레'를 결심했다. 노파심에 잔소리는 좀 심해도 친절하고 마음 약한 이 이웃 할머니는  청력까지 나쁘시니,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싫어서 버럭 화를 내기보다는 측은지심을 더 발휘해야 할 때라고 굳게 결심한 거다.

 

그 결과 비오는 아침 출근시간과 맞물려 엄청 막히는 길을 뚫고 병원 모시고 가면서 오면서는 물론이고(고백하자면 주변 얌체 운전자들과 멍청한 주차장 직원들한테는 미친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저녁이 다 된 지금까지 아직 인상쓸 일은 없었다. 끈기없는 내가 얼마나 더 이 코스프레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상냥한 이웃집 아줌마 빙의 상태에서 빠져나와 못된 딸년의 본색이 드러나면 얼른 심호흡을 한 뒤 세팅을 다시 하면 되겠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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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모

투덜일기 2013. 8. 15. 18:22

'기집애', '가시나' 소리만 들어도 엄청나게 모욕적인 욕이라고 생각해 눈물을 쑥 빼던 어린 시절. 내가 유독 싫어하는 친척 할머니가 있었다. 말끝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누구 이야기를 하든 '요년, 조년, 망할년' 따위를 추임새로 넣으니 당연했다. 그 양반 입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욕은 뭐니뭐니해도 '베라먹을년'이어서, 뜻이 궁금해진 내가 엄마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알고보니 '빌어먹을년'이라는 뜻이었다. 나 원 참. 그뿐인가. 귀엽다며 아이들 볼을 꼬집는 어른들은 원래도 있었지만 그 할머니는 그냥 쥐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아프게 꽉 잡고 마구 흔들어 빨갛게 만들거나 심지어 뽀뽀를 한답시고 뺨을 깨물어 애들을 울렸다. '정말 이상한 할머니'였다. 그러고는 또 매사에 생색을 어찌나 내는지, 옛날 전쟁 피난시절 굶는 이 집(울 외할머니네)식구들을 자기가 쌀퍼다 먹여서 살렸다는 둥(남편이 군무원이라 살림이 늘 넉넉했단다), 특히 울 엄마를 두고는 내가 재를 다 먹여살려 키웠노라, 그 어려운 시절에 입히고 먹인 건 물론이고 학교 공부는 내가 다 시켰노라 입만 열면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조카딸 학교 보내주는 고모가 세상에 어디 흔한 줄 아느냐고. (그렇다, 나에게 '고모할머니' 되는 양반이다) 우리 외할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은 그 양반의 호언장담에 맞장구도 치지않고 반박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묵묵히 듣고 넘기는 쪽이었다. 하기야 누가 말대답이라도 할라치면 괜히 막 쌍욕을 해대며 언성을 높였던 것 같다. 나로선 몇년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랑 동생들한테도 제대로 인사 안한다고(인사를 왜 안했겠나. 넉살좋게 큰소리로 반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ㅂ가네 애들 저래 숫기가 없어서 어디 가서 빌어먹기라도 하겠느냐고 보기만 하면 면박을 줘대니 얼굴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는 동안에도 그 양반의 큰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ㅇㅈ년(울 엄마)은 나한테 평생 잘해야한다'는 소리는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아 정말, 사람 이름에 왜 '년'자를 접미사로 붙이는지! 암튼 나는 또 궁금해져서, 진짜로 외갓집 식구들이 그 양반 덕을 많이 봤는지, 특히 울 엄마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물어보았다. 기막히게도 사연은 이러했다. 

 

전쟁통 피난시절, 울 엄마네는 피난을 내려가다 이미 인민군 세상이 된 걸 알고 이천인가 안성 쯤에서 서울로 되돌아갔단다. 그러고 한참 뒤, 서울 수복이 된 후 부산으로 피난갔던 그 양반 남편이 서울로 찾아왔더란다. 집에 먹을 것도 부족할 테니 군입 하나 줄이는 셈 치고 울 엄마(당시 10살)를 부산으로 데려가겠다고. 부산엔 학교도 열렸으니 학교도 보내주고 배불리 먹여주겠다고 했다나. 외할머니는 울 엄마한테 그럼 너라도 굶지 않게 따라가라 명했고, 착한 엄마는 고모부를 따라 부산으로 먼길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울 엄마가 전쟁으로 중단했던 학교를 다닌 건 맞지만 엄밀히 따져 그 양반네 집안에서 울 엄마의 위치는 '더부살이 식모'였다. 군무원이라 집에 쌀이며 기타 양식이 풍족하면 뭐하나,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보고(어린 사촌동생들이 둘이라나 셋이라나;;)... 아침에도 학교를 가려면 열살짜리 어린애가 군불을 피워 밥을 손수 해서 상차려 바치고 가야했단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화가 났다. 결국 제몸 편하려고 조카딸 데려다 식모살이 시켰다는 거 아닌가! 악당이 따로 없다. 그러면서 무슨 생색은! 미친 거 아닌가?

 

다행히 울 외할머니네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합류를 했고 드디어 모녀상봉을 했더란다. 맏딸만은 끼니 안굶고 배불리 먹으며 학교에 잘 다니고 있을 거라 짐작했던 외할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개울가에서 맨손으로 그집 식구들 빨래하느라 손등이 다 터져서 피가 줄줄 나는 딸의 손을 보고는 즉각 사태파악을 한 뒤 그 길로 도로 데려갔단다. (울 엄마 손등엔 그 때 동상에 걸려 터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고 요새도 가끔 가렵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 괴상한 양반이 울 엄마를 학교 보내고 먹이고 입히고 했으니 평생 잘해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베푼 기간은 기껏해야 1년 남짓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단 옷 입고 드러누워(울 엄마의 묘사다;;) 피둥피둥 놀면서(주로 화투를 쳤단다) 열살짜리 조카딸한테 무임금 가사노동 전담시킨 죄값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 양반의 만행은 세월이 흘러 울 엄마가 여고입학할 때 다시 속개된다. 가난한 집에서 '기집년'이 무슨 고등학교엘 가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돈 벌어 남동생 뒷바라지나 하라고 울 엄마의 교복을 진탕에 집어던졌다나 뭐라나...  자기한테 월사금 보태달라고 할 생각은 얼어죽어도 하지 말라면서... 아니, 자기가 왜 무슨 참견??

 

내 어린시절 기억 속의 그 양반 모습도 참 가관이다. 짜리몽땅한 키에(145센티미터쯤 되는 것 같다) 부를 과시하기 위함인 듯 요란한 양단 치마저고리에 주로 털배자를 떨쳐입고 동그란 얼굴엔 나비모양의 뿔테안경을 걸치고 나타나선 우리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묵어가곤 했는데, 나를 보면 최대한 방정맞게 혀를 쯧쯧쯧쯧 차면서 '기집년'이 공부를 잘하면 뭐하니, 팔자만 세진다.. 따위의 악담을 덕담처럼 던져댔다. 평생 가족에게든 남에게든 제대로 이로운 일을 하고는 살았는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 양반 입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건 들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울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지자, 그 양반은 또 귀신 들린 거라면서 굿을 해야한다고 난리를 피워서(굿을 안하면 화가 온 집안으로 퍼져 자기네도 해를 입는다나 뭐라나;;) 외할머니가 하는 수 없이 울 엄마를 데리고 굿당을 찾기도 했단다. (이날의 장면은 어린 시절 나의 뇌리에도 충격적으로 새겨졌다. 그 양반이 울 엄마를 끌어다가 마당 한 구석에 꿇어앉혔고,  무당이 울 엄마한테 살아있는 수탉을 확 던져셔 내가 막 울었음;;내가 다섯 살 때라는 것 같다)  심지어는 시집살이 때문에 울 엄마의 정신이 병들었으니 울 아버지와 갈라놓으라고도 한 적도 있단다. (진짜 그 양반 정신분석 한번 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울 엄마의 우울증 역사는 미혼시절부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른이 되어 그 양반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나는 가능하면 그 양반과 마주치는 자리를 피했고 울 엄마와도 상종을 막았으며 최근까지 거의 교류가 없었다. 잘은 몰라도,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10살에 엄마와 떨어져 배불리 학교 보내줄 줄 알고 따라간 고모 집에서 졸지에 식모살이를 하게 된 건 울 엄마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자기 잘못한 줄 모르는 양반이니, 그런 사람과는 떼어놓는 게 상책이다. 

 

아들 선호사상이 엄청난 데 하필 딸만 셋 둔 양반이라 나의 외숙과는 예로부터 쿵짝이 잘 맞아서 수시로 드나드는 모양이었지만, 울 엄마도 어린시절부터 평생 싫은소리를 들었던 상처가 워낙 컸던지 언제부턴가는 그 양반 돌아가도 문상을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양반이 불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건 다 인과응보라고 나 역시 매몰차게 악담을 했다. 딸 셋은 각기 호주와 캐나다로 이민간 지 오래였고, 혈육들도 그 양반의 더러운 입과 안하무인 태도를 못견뎌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딸들이 보내주는 일정액의 생활비로 독거노인으로 사는 수밖에. 아흔이 다 된 나이라 얼마 전부터는 거동이 불편해 요양병원에서 지내지만, 정신은 말짱하여 목에 휴대폰 걸고 다니며 사방으로 전화를 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인가 집으로 온 전화를 내가 받아서 대충 통화하고 끊었다.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였다. 니 엄마는 아파서 그렇다 치고 니년은 젊은 년이 왜 얼굴 한 번 안 뵈주러 오느냐고 했던가. 다행히 왕비마마는 집에 안 계셨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노인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뜬금없이 욕설을 퍼붓는 그 양반이 울 엄마의 '고모'이며 나에겐 '고모할머니'라고 생각하면 연민보다는 짜증이 더 치밀었다.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귀찮은 존재 정도? 차라리 남이었다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길 수도 있었을까? 

 

어쨌거나 엊그제 그 양반의 뒤늦은 부음을 들었다. 지난 설날에도 그 양반을 집에 모셔와 며칠 지냈다던 외삼촌도 나중에 일처리가 다 끝난 뒤 통보만 들었다는 걸 보면, 장례를 위해 딸자식들이 귀국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남보다 못한 '어떤 고모'의 일생이 끝난 셈이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여기다 시시콜콜 적고 앉았는지,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가깝든 멀든 집안 어르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도리도 외면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진정코 하나도 찔리지 않는 걸. 그보다는 그 양반 문상도 안가겠다 장담하던 왕비마마가, 다음번 절에 가는 날 '영가등'('영가'는 망자를 의미한다)이나  하나 켜야겠다고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그 또한 울 엄니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겠지만, 암튼 딸들도 안 들여다보는 노친네의 죽음을 결국엔 어린 시절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조카딸이 챙기누나 싶어져서 나는 또 좀 화가 난다.

 

이런 부끄럽고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이런 공개적인 공간에 적어놓아도 되는지, 내 얼굴에 침뱉기는 아닌지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결국 공개하는 건 울 엄마가 절에 가서 평생 미워한 고모를 위해 재를 올려 마음을 씻으려는 것처럼 나도 옹졸하게 마지막으로 실컷 망자를 욕해 꽁한 마음을 풀려는 시도가 아닐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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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자리

투덜일기 2013. 2. 8. 14:15

 

가구 옮기고, 집안 구석구석 찌든 때 벗기고
커튼 갈고 이불 빨고
나박김치 담그고...
체력은 국력!! 튼튼해져서 다행.

물긷는 건 안했으니 무수리 역할만 빼고 온갖 노동에 힘쓰느라 계속 책상 앞에 앉을 새가 없었는데 급히 이메일 하나 보내려고 간만에 컴퓨터 켠 김에 블로그도 들어와봤다. 덕수궁 답사도 다녀왔고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회도 봤지만 후기는 설날 지나고 심신의 여유가 있을 때 써야지... 

5년만에 우리집으로 돌아온 명절 준비, 드디어 이제 나가서 장 봐오고 대청소 한판 하면 얼추 사전준비는 끝이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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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다

투덜일기 2012. 5. 28. 23:30

삼일 내리 붙은 황금연휴 딱 가운뎃날에 사촌동생이 결혼을 했다. 눈에 콩깍지가 덮인 사촌동생 커플이 지들끼리 돌아다니며 잡은 날과 식장에 대해서 벌써부터 친척들은 말이 많았다. 사흘 연휴 딱 한 가운데인 일요일에 날을 잡으면 어쩌라는 거냐! 게다가 일요일 12시라니! 교회 다니는 사람은 어쩌라고? 멀리서 가는 사람들은 대체 몇시에 일어나라는 건지?! 그 동네가 대체 어드메 붙어있는 것이관대 거길 잡은 거냐! 너무 신랑쪽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거 아니냐! (물론 인륜지대사라는 혼사를 앞두고는 원래도 이런저런 참견과 말이 많은 법이다 ㅋㅋㅋ)

 

어쨌거나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으며 여유롭게 대사를 치러낸 사촌동생은 참으로 어여뻤고, 결혼식도 잘 끝났다. 원래도 집안 결혼식에 다녀오면 엄청 더 피곤한데, 이날은 집에 돌아와 완전 픽 쓰러졌다.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전날밤에 제대로 잠을 못잤다. 굴러다니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는 것으로 나를 식겁하게 만들기 선수인 조카녀석이 난데없이 자고 갈줄이야. 게다가 한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식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된통 자빠졌다.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먼저라 벌떡 일어나긴 했는데 ㅠ.ㅠ 심신의 충격이 꽤 컸다. 그러고는 귀가길에 한 차 가득 친척어르신을 태우고 잘 쓰지도 않는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켜고 인근 전철역을 찾는데, 우어~~~~ 꼭 5초쯤 느리게 가야할 길을 지나서야 안내를 하더군. 결국 내비게이션 전철역 안내는 무시하고 강을 건너와 내가 빠삭하게 아는 곳에서 넷째 고모를 내려드렸다. 처음부터 내 맘대로 길을 찾았으면 막히지도 않고 더 편했을 텐데! 내비게이션 떠들지, 어르신들 떠들지, 나도 간간이 맞장구 쳐야지... 운전할 때 정신 시끄러우면 음악도 잘 안듣는데 아주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간만에 한복까지 떨쳐입고 큰엄마 노릇을 톡톡히 하신 엄마도, 원피스 떨쳐입고 자빠진 사촌언니라고 사돈댁에 소문날까 무서웠던 나도 집에 오자마자 드러누웠다. 

 

부모 등골이 빠지든 말든 호화롭고 번듯한 결혼식을 선호하는 요즘 풍조 속에서 사촌동생은 퍽 야무지게 부모 도움 전혀 안받고 순전히 자기가 모은 돈으로 소박하게 결혼준비를 했고 예단도 생략했다. 유치원 교사의 박봉으로 결혼자금을 모았다니, 나는 그게 그렇게 기특하고 장할 수가 없는데 일부 어른들은 그게 또 예의가 아니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우 짜증! 친척 예단으로 돌린 이불 같은 건 짐만 되고, 현금봉투로 받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실제로 울 엄만 몇년 전 고모네 집에서 현금으로 받은 예단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예단 없어 섭섭하다는 그 고모를 흉봤다. "자기네도 예단 안했으면서!"라고. +_+ 어휴, 엄니;;) 겉치레가 더 큰 예식 자체도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지만, 가풍이니 예의니 따져가며 한 마디씩 보태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진저리가 난다. 결혼식은 사라져야 할 제도라는 심중만 굳어질 뿐이고!

 

친구 하나도 요즘 그놈의 '식' 때문에 연일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올해 학부형이 된 그 친구는 오래 전 '쿨'하게 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남자네 집에서 결혼을 결사반대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둘 다 결혼식에 들일 무모한 비용을 집 얻는 데 더 보태자는 실용적인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부모님 마음이 돌아서면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계획 같은 것도 아예 없었다. 여자라면 꼭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웨딩드레스의 로망? 그딴 거 없는 여자도 있다규! <주목 공포증>이란 게 있다는 걸 요즘에서야 알았지만, 그 옛날부터 그 친구와 나는 지인들 결혼식장 구경 다니며 서로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다. 사람들 수백 명이 동시에 쳐다보는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게 걸어들어가냐, 신기하다. 저런 것도 끼가 있어야 하는 건가봐... 나와 달리 친구는 독신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외국영화에서 남녀가 평상복 입고 시청 같은데서 혼인서약 하고 양쪽 집안에 전화로 결혼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을 멋지다고 하더니, 현실에서도 그 비슷하게 꿈을 이루었다.   

 

그런데 10년도 넘게 잘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새삼 '그래도' 결혼식은 올려야한다고 친정엄마가 졸라대고 계시다는 것. 교회에서 운영하는 부부수업(?)을 듣고나서 웨딩드레스 입고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라고, 죽기전 평생 소원이시라고 하루에도 두세번씩 협박과 읍소와 호통을 번갈아하고 계시단다. 부모로서의 마음을 일견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게 원래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집안 대 집안의 거사임을 알기는 하지만, 당사자가 싫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전화로 징징대는 친구에게 위로랍시고 내가 해준 말은 그나마 친정엄마라 싸울 수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도 안통하고 무서운 시어머니(진짜 무서운 양반이다 ㅎㄷㄷ)가 시키는 게 아니라 얼마나 좋으냐는 거였다. 20주년에 리마인드 웨딩 멋지게 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일단 10년은 시간을 버는 셈이니까;;) 해보라는 조언도 했는데, '그 전에 나 죽는다'며 엄마한테 혼만 났단다. 그럼 그렇지, 내가 뭘 안다고... 

 

푸념 들어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반복되는 상황에 내가 슬슬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친구도 알았챈 모양이다. 며칠째 시도 때도 없이 딩동딩동 날아오던 문자가 잠잠해졌다. 남들은 들로 산으로 바글바글 여행을 떠났다는 황금연휴에 나는 피곤한 심신을 달래느라 일 한자 못하고 비실비실 방바닥을 뒹굴었다. 앞으로 넘어져 무릎에 멍이 들었는데, 왜 엉덩이도 욱신거리는지 원. 정말이지 결혼은 구경하는 것도 이야기를 듣는 것도 다 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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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개의 봄

삶꾸러미 2011. 10. 18. 20:50

우울증이 심해지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엄마의 자학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는 쓸모없는 자신을 어디에든 '갖다 버리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매달 후원금을 보내시던 불교 간행물 <연꽃마을>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을 콕 찝어서 그리로 보내고 너는 자유롭게 편히 살라는 말을 하신 적도 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얼마전 엄마는 얼마 되지도 않는 월 후원금 자동이체를 끊어버렸다. ㅋㅋ) 그 말은 곧 엄마가 가장 피하고픈 상황이 어딘가에 버려지는 것이며, 낯선 곳에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깃든 투정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칠순을 넘기면서 엄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치매다. 얼마 전엔 나 몰래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노인건강관리 프로그램에서 치매검사도 하고 왔단다. 한달에 한번 꼬박꼬박 정신과의와 상담을 하고 우울증 약을 먹는데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건 다 잘했는데 단어 세 가지 기억했다 나중에 말하기 문제를 하나도 못 맞혔다면서 아쉬워하긴 했지만, 검사 결과 '양호' 판정을 받아온 엄마는 자기 치매 아니라면서 몹시 기뻐했다. 

가끔씩 내가 엄마에게 구구단을 외게 시키고, 불쑥 덧셈 뺄셈 문제를 내는 이유도 자꾸만 깜빡깜빡 잊는 건망증이 치매 초기증상일까봐 벌벌 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함이다. 헌데 멀쩡한 젊은 사람들도 잠 잘 못자고 컨디션 안좋으면 말도 헛나오고, 구구단은커녕 단순한 셈도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일조량 떨어지면서 해마다 몹시 불안불안 조마조마하게 넘기는 가을에 접어들며 심신의 컨디션이 약간 떨어진 엄마가 불면과 건망증을 잠시 겪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심지어 나는 잠 잘 자고 컨디션 좋을 때도 암산이나 돈계산 같은 숫자와 관련된 사고는 단순한 것조차 잘 하지 못하며, 가끔씩 손에 멀쩡히 들고 있는 차키나 휴대폰을 찾아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간이다. 치매초기를 의심하려면 차라리 나를 의심해야지, 수십년 전 사건부터 쓰레기 배출요일까지 나보다 더 잘 꿰고 있는 엄마는 염려할 게재가 아니다.

다른 노인들은 청년처럼 펄펄 뛰어다니실 나이인 71세에 울 엄마가 너무 엄살(?)을 떠는 것 같아 못마땅해 툴툴거리지만 내심 나도 겁이 나긴 한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아버지 세분은 앓지도 않으시다가 졸지에 쓰러져 운명하셨고, 꽤 오래  병을 앓으신 외할머니도 끝까지 정신은 거의 말짱하셨기 때문에, 우리 엄마도 자잘한 지병은 있으시되 정신은 끝내 혼미해지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으나 건강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게다가 노인성 우울증이 치매로 이어지는 확률이 꽤나 높음(치매 초기가 노인성 우울증으로 시작된다던가?)을 알기에 마음을 놓을 순 없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은 울 엄마의 우울증이 45년 역사를 넘긴 지병이라 노인성 우울증과는 양상이 다르고 (사실 엄밀히 말해 울 엄마는 조울증이시다), 꾸준히 치료를 받아오고 있으며, 평생 비빌 언덕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히려 더 잘 견뎌내고 계셔 4년째 심하게 앓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못된 딸년인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우환에 대비하여 이미 방향도 세워놓았다. 요즘은 치매노인 부양을 돕는 데이케어 센터가 동네마다 생겨나기도 했으므로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보도록 노력하되, 힘에 부친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요양병원에 모실 거라고.
 
하지만 요양병원에 방치하고 더는 돌보지 않는 수많은 노인 환자 문제를 언론에서 접하거나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일부 요양병원의 운영실태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면 이미 일어나지도 않은 일,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마치 결국엔 우리 엄마도 치매에 걸릴것임을 당연시하는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80세 이상 노인의 30-40%가 치매를 앓는다는 통계를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이든 미리 온갖 가능성을 상상하고 미리 걱정하는 나의 태도는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미리 대비해두어야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는다. 이런 생각을 엄마에게 내비친 적 없는데도, 엄마가 가끔씩 우울증이 도졌을 때 들먹이는 '내다 버려라' 레퍼토리를 보면 엄마는 당신 딸년이 능히 그럴 수  있는 '냉정한' 인물임을 미리 알고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병증이 좀 나아지고 나면 다시 "엄마는 너 없이는 못산다"는 절박한 레퍼토리로 방침을 바꾸시는 것을 봐도 그런 쪽으로 심증이 굳어진다.

요양병원에 병든 부모 수발을 내맡기는 것을 '현대판 고려장'에 비유하는 세태에 우리 엄마도 나도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몇년전 중풍에 걸려 요양병원 신세를 꽤 오래 지고 있는 친구분을 더러 면회하러 다녀본 엄마도, 거동 못하시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더니 물리치료와 집단생활 덕에 오히려 건강을 상당부분 되찾으셨다는 친구의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나도, 요양병원에 대한 거부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자식이 직접 살뜰히 모시는 것만 하겠나, 하는 인습적인 사고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지인 한분은 10년째 거동 못하시는 어머니를 간병인과 함께 집에서 모시고 있다. 자기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워낙 언사가 요란하시어 단체생활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이유인데, 내가 보기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간병인이 돌아가는 주말에 꼬박 하루 혼자서 간병을 하고 나면 심신이 완전히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왜 그 힘든 끈을 놓지 않으려는지. 하기야 그분은 나 역시 자기 같은 상황이 되어도 절대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나는 그 반대를 결심하고 장담하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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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오후, 거실쪽 TV에선 어김없이 동요가 들려온다. <누가누가 잘하나>를 하는 시간이다. 채널 충성도가 대쪽같은 영자씨가 꼭 놓치지 않고 보는 프로그램이 몇 가지 있는데 <누가누가 잘하나>는 그 가운데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41년생인 영자씨의 어린시절 소원이 <누가누가 잘하나>에 뽑혀 나가 상을 타는 것이었다고 하니 프로그램의 역사가 정말 오래 됐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반 친구가 이 프로그램에 나가서 예선을 통과해 TV에 나왔던 적도 있다. 비록 상은 타지 못했지만 그 친구는 한동안 교내 스타였다. 영자씨는 본인이 못 이룬 소망을 자식들이 이루어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지만 우리 삼남매는 일단 노래실력을 제쳐두고라도 그런 데 나설 만큼 숫기 있는 아이들이 못됐다. 합창할 때도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처지에 감히 독창이라니. 어린시절 TV에서 <누가누가 잘하나>가 방영되면 영자씨는 니들도 저기 나가면 좋을텐데, 라고 몇번 아쉬워 했지만 자식들의 깜냥을 알고 쉽사리 포기했다. 그저 동요를 따라부르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듯했고, 지금도 못말리는 동요 사랑은 여전하다. 

영자씨는 장래 희망이 한때 성우였을 만큼 목소리도 고운 편이다. 음치는 아니라서 옛날 동요는 거의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불러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심한 박치다. TV를 보며 동요를 따라 불러도 늘 혼자 뒤쳐지면서 숨차다고 막 짜증을 낸다. 본인도, 자식들도 <누가누가 잘하나>에 못나간 한이 어찌나 깊은지 영자씨는 손자들한테도 잠시 희망을 품었었다. 문제는 손녀손자들이 아주 잠깐 동요를 즐겨부르다 이내 가요로 관심이 넘어가는 바람에 <누가누가 잘하나> 같은 프로그램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금요일 오후가 되면 손녀딸한테 전화를 걸어 <누가누가 잘하나> 하니까 니들도 좀 보라고 종용하곤 했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는 <누가누가 잘하나>에 어린이만 출연하는 게 아니라 아무나 다 나온다. 동요를 좋아하는 애어른이 연합으로 가족 팀을 이루어 나오기도 하고, 할머니나 대학생이 혼자 나와 동요를 부르기도 한다. 평생 염원을 품었던 영자씨는 옳다구나 싶었던지, 언젠가 "우리도 노래 하나 연습해서 저기 나가면 저 사람들보다 잘하지 않을까..."라고 말을 흘렸다. 당연히 나는 펄펄 뛰었다. 창피하게 온 가족이 TV엘 나가서 노래를 부르자고요??? +_+ 동요야 요즘 아이들에게도 길이길이 전해야할 문화유산(?)이라고 나도 동감한다.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잘 부르는 요즘 아이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지만 동요 부르기 운동을 위해 직접 나설만큼은 아니다. 게다가 영자씨의 노래솜씨는 결단코 '대회'에 나갈 만한 수준이 아니시라고요! 가족 중창단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우린 도무지 구성원이 안나온다. 대학시절 노래 깨나 한다고 껄렁댔던 동생들은 둘 다 혼자 질러대는 스타일이지 결코 조화로운 합창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고, 올케들도 음치를 면한 정도일 뿐 대회 재목은 아니다. 집안 내력 따라 숫기 없는 조카들은 또 어떻고!

그러고 보면 영자씨는 동요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몇년 전까지는 구청에서 하는 노래교실도 꽤 오래 쫓아다녔다. 아무리 노래교실을 다니며 새 노래를 익히고 연습해도 그놈의 고질적인 박자 틀리기는 변함없었지만서도. <전국노래자랑>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같은 다른 노래 프로그램도 열심히 보는 편이지만, 영자씨가 노래를 따라부르기까지 하는 열정을 드러내는 건 어디까지나 <누가누가 잘하나> 하나 뿐이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 결론은 하나다. 중간에 TV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작된 <누가누가 잘하나>가 앞으로도 계속 방영되어 영자씨의 동요 열망을 일부나마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 다음엔 이왕이면 영자씨가 제일 좋아하는 동요 '오빠 생각'을 누가 나와서 불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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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뭔지

놀잇감 2011. 4. 5. 12:41

친구에게 회사 추천을 했더니 가족 같은 분위기라 싫다고 했다는 블로그 이웃의 포스팅을 보다 생각났다. 아직도 소규모 회사의 경우 구인광고를 낼 때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를 자랑으로 삼는 데가 많지만, 이제 구직자 쪽에선 대개 그걸 식겁하는 조건으로 여긴다. 가족은 하나로도 버겁고 족하다고 말이다.

내가 벌써 구세대라 그런지, 솔직히 나는 얼마전까지도 '가족 같은 회사'가 정말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옛날 조직원의 삶에 충실했던 나를 돌아볼라치면, 그런 가족같은 대우와 처사에 막 감동했었다. 그러고 보면 이십대까지 가족이야말로 나의 영원한 등대이자 울타리, 안식처라고 철썩같이 믿고 살았다. 절대로 내 발목을 붙드는 족쇄일 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참 순진하기도 하지. 암튼 가족에 대한 견해가 그토록 아련하고 긍정적이니, 가족 같은 회사라는 말도 좋게만 생각됐던 모양이다. 회사의 경영진과 관리자 측에서 '가족' 운운하는 건 다 노동력 착취와 유리한 위치 선점을 위한 포석이란 걸 나중에 깨닫기는 했지만, '그래도' 관성이랄까 습관이 든 때문인지 그 관계를 떨치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사이비든 아니든 '가족'이라는데.

주말마다 열심히 시청하고 있는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시즌3의 마지막 경쟁미션의 주제는 뜬금없게도 가족이었다. 가족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을 완성하라는 것. 후보 디자이너들의 어린시절 가족사진이 화면에 등장하고, 가족들의 응원 영상이 나타나자 스튜디오는 울음판이었다. 나 역시 깜깜한 거실에 홀로 앉아 TV 앞에서 덩달아 울며 막 짜증이 났다. 아, 정말 억지 감동과 스토리를 짜내려는 찌질한 제작진의 심보가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닌가! 디자인 실력만 평가하면 될 것을 왜 꼭 그렇게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안달인지.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디자이너들도 어느 정도 '신상이 털리는' 상황은 예상하고 수긍했겠지만, 그런 식으로 사생활을 파고드는 제작 태도엔 내가 다 막 화가 나고 불쾌했다. 디자인 경쟁프로그램마저 가족과 배경 자랑의 장이 되거나 동정의 빌미가 되어선 안되는 거 아닌가?

어쨌든 5회미션부터 눈에 들어 개인적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있던 디자이너의 경우엔 이십대 중반의 어린 나이임에도 가족이 곧 엄청난 상처이고 아픔이었다는 사실이 이번 가족 미션에서 드러났다. 디자인 외적인 부분이긴 하지만 너무 튀는 외모와 욕설도 서슴지 않는 거친 입담 때문에 나랑은 취향이 잘 안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노련한 솜씨가 느껴지는 디자인이 내 눈엔 그저 예쁘고 좋아서 탑3에 뽑히기를 몹시 바라는 마음이었다. 파리나 뉴욕에 있는 유명 패션스쿨 출신의 유학파와 비교되는 순수 국내파에 대한 심정적인 지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을 것에 비하면 국내에서 의상학과나 디자인학원을 다닌 사람들은 아직도 '패션은 본고장인 서양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대주의 사고에 희생당하기 십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국내파라도 내 눈에 예쁘고 멋지지 않은 디자인을 보여주는 후보를 무조건 응원할 수야 없는 일인데, 신주연 씨의 의상은 대체로 훌륭했다. 팔이 안으로 굽는 아마추어인 내 견해로만 그런 게 아니라 우승도 두번이나 했을 정도이고, 미션마다 거의 상위권이었다. 비록 9회 자전거 미션에선 내가 보기에도 너무 아니올시다, 80년대 아줌마옷 같은 투피스를 선보이는 바람에 떨어질까봐 조마조마했지만서도...


런웨이에 올라 가족에서 영감을 얻은 각자의 디자인을 설명하며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디자이너들이 울먹거리거나 통곡하는 수준이었다. 가족이란 누구에게나 짠한 부분이고 아픔이라는 방증이다. 하지만 가족이 남긴 찢어지고 곪아터진 상처를 그냥 덮어 꿰매어 놓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자꾸만 틈이 벌어져 아픔이 삐지고 튀어나온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폭로한 신주연씨의 그로테스크한 작품을 볼 때는 아예 머리가 멍해졌다. 가족이 뭐라고...

글이란 게 참 묘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줏대가 없는 건지 글이 좀 길어지면 처음 쓰려고 생각했던 이야기와 결말이 같아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지금도 내가 어쩌려고 가족 이야기와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이야기를 같이 꺼냈는지 잘 모르겠다. 가족이 멍에이고 상처라도 개인의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던가? -_-; 나도 갈피를 못잡겠다는 것으로 급마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은 이제 내게 너무 어려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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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추억주머니 2011. 1. 28. 21:34

사춘기에 대한 까마득한 기억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착하게' 보냈다고 생각된다. 갑자기 와락 화가 나거나 슬펐던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크게 반항기를 내보일 만한 형편이 아니란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어려서 잘 몰랐던 것인지 정말로 무탈하게 넘어갔던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암튼 지긋지긋할 정도로 역사가 오래 된 엄마의 우울증을 목격한 기억이 없던 반면, 중학생때 목도한 엄마의 심한 우울증은 너무 괴롭고 난감해서 나까지 속을 썩이면 절대로 안된다는 다짐을 불러올 정도였다. 그래도 중학시절의 반항 사건이 두 가지 정도 남아있는 걸 보면, 내가 기억에서 지워버려서 그렇지 사춘기의 엇나감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왕비마마의 증언에 따르면 조잘조잘 노상 집에 와서 학교 얘기를 털어놓던 애가 한동안 방구석에 처박혀서 책만 보지 않으면 한숨을 푹푹 쉬는 정도였을 뿐, 이제부터 고백하려는 거짓 일기장 사건 말고는 달리 속썩이는 일이 없었다니 앞으로도 나는 계속 '대체로 착한' 사춘기 소녀였다고 주장할 작정이다.

거짓 일기장 사건은 중학교 1학년땐가 난생처럼 수련회라는 걸 가면서 생겨났던 일이다. 이름도 우스운 '간부 수련회'라는 걸 며칠 가야했는데,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가는 것도 모자라 준비물에 '잠옷'이 있었다. 요즘 수학여행 같으면 그냥 '편한 옷' 정도로 적혀 있었을 테고, '잠옷'이라고 적혀 있었어도 그냥 편한 옷 아무거나 챙겨가면 되겠거니 여겼겠지만 고지식한 나에겐 '잠옷'이라는 품목이 반드시 지켜야할 규정으로 생각됐다. 물론 당시 나도 집에서 입던 파자마 형태의 낡은 잠옷이 있었다. 다만 그게 국민학교 때부터 줄곧 입던 거라 소매와 바짓부리가 모두 껑충하게 7부쯤으로 짧아졌고 낡아서 프린트도 다 흐려진 쪼글쪼글한 몰골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집에서 입는 건 상관 없지만 그런 잠옷을 학교 수련회에 가서도 입고 자야 한다니, 나로선 앞이 캄캄했다.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다들 그 참에 잠옷을 새로 사달라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 집안 형편은 갖고 싶은 것을 아무때나 불쑥 사달라고 말해선 안되는 수준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선 뜻밖의 지출인 수련회 회비도 은근히 부담스러워하시는 마당에 잠옷이라니. 그런데도 나는 정말이지 헌 잠옷을 수련회에 가져가기가 싫었고, 결국 잠옷 사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에 영악하게도 일기를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일기 내용은 빤했다. 수련회에 헌 잠옷 입고 가는 게 정말 창피해서 수련회도 가기 싫을 정도지만, 부모님한테 꼭 필요하지도 않은 새 잠옷을 사달라고 하는 건 큰딸로서 할 짓이 아니다. 다른 애들은 다 새 잠옷을 사온다는데 아 나는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쩌구 저쩌구... 집안 사정을 크게 고민하는 (나름) 착한 딸 코스프레를 한 거다. 그렇게 새 공책에 딱 한장 일기를 써서 책상에 올려놓고 학교를 다녀와보니(원래 쓰는 비밀 일기는 늘 책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녔었다 ㅋ)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그날 저녁 연분홍색 바탕에 진분홍 땡땡이가 찍힌 예쁜 새 파자마를 내밀었다. 물론 엄마는 내가 새 잠옷을 얻기 위해 딱 한장짜리 거짓 일기장을 '일부러' 책상에 두고갔음을 알았고, 그 때문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못된 기집애, 그냥 사달라고 할 것이지... 라면서. 그렇게 해서 생긴 새 잠옷을 수련회에 들고 가긴 했지만, 나는 두고두고 그 잠옷을 입을 때마다 양심에 찔려서 괴로웠고 엄마 역시 잊을 만 하면 친척들 앞에서도 가짜 일기장을 언급하며 내 약점을 공략했다. 쟤가 은근히 영약한 애예요.... ㅠ.ㅠ

이후 나의 사춘기가 평탄했던 건 거짓 일기장과 잠옷으로 생겨난 죄책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내가 또 한번 눈물을 쫄쫄 흘리며 괴로워했던 사건이 있었으니, 그 또한 금전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주말마다 특별활동을 상당히 심도 있게 운영했고, 미술반이던 나는 격주 토요일마다 늘 이젤과 화구상자를 들고 경복궁 등지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별도로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역시나 가끔 고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니던 막내고모를 따라 몇번 어깨 너머로 배운 수채화 기법을 '흉내'내봤더니만 교내 사생대회에서도 막 상을 주질 않나, 학교 대표로 뽑혀서 '서부지역' 중학 사생대회에 파견되질 않나 결과가 꽤 우쭐했다. 그러다 드디어 중3때 학교 축제일. 그간 교내 및 교외 사생대회에서 지나치게 두드러진(?) 성과를 보인 탓에 나는 그림을 세 개나 전시하게 되어 개인이 내야 하는 표구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그림 하나 당 5천원쯤 했던 것 같은데(당시 친구가 다니던 미술학원비가 한달에 2만5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 꽤 큰 돈이었다) 축제 기간 동안에 그림을 걸려면 각자 자기 그림을 인사동이나 홍대앞 표구상에 가져가서 유리액자에 끼워 제출하거나, 학교에서 단체로 표구를 맡기도록 그림당 돈을 내야 했다. 집에 와서 부모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니까 대번에 엄마는 꼭 그림을 전시 해야하느냐고, 그냥 액자 없이 '판떼기' 같은 데 붙이거나 이젤에 올려놓으면 안되는 거냐고 물었다. 액자 3개 값이면 한두달 치 쌀값이라는 둥... 결국 나는 알았다고, 전시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는 꽝 소리 나게 방문 닫고 들어가 눈물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 때 제일 친한 친구가 하필 우리집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동네 최고 부잣집 딸이라 (당시 마당에 수영장이 꽤 크게 있고,  뜰 한 구석엔 팔뚝보다 큰 잉어들이 노니는 연못이 있었으며, 기사 딸린 검정색 세단이 가끔 토요일에 나와 친구를 경복궁으로 실어 날라주기도 했다) 그 친구는 일부러 인사동 표구상에서 최고급 액자로 표구를 맡겼다는 걸 알기에 내 처지가 더욱 비관스러웠던 것 같다.

학교축제일까지 근 열흘쯤 그야말로 나는 학교 다니는 게 죽을맛이었다. 그림 위치 선정 외에도 축제때 미술반이 해야할 일이 꽤 많아 이런저런 잡일에 동원되느라 방과후마다 미술실에 가면서도 나는 미술선생을 계속 피해다닐 수밖에 없었다. 표구비가 없어서 그림 전시를 안하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미술반 아이들은 대개 미대 전공을 꿈꾸는 넉넉한 집안 아이들이라, 이젤과 화구상자도 고모가 쓰던 낡은 걸 물려받아야 했던 나 말고는 표구비로 전전긍긍하는 애들이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나는 마치 가난 때문에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는 그림천재라도 되는양 오만상을 떨었을 게 분명하다. 크크크. 집에선 입을 꾹 다물고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므로 부모님을 축제에 초대하는 가정통신문도 당연히 전달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걸지도 못하는데 뭣하러! 물론 나 혼자 심통을 있는대로 부리고 다니긴 했지만, 아마 무심한 엄마는 그림 표구비 때문에 내가 괴로워하는지 마는지, 학교 축제가 언제인지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친구네 엄마는 예의 그 검정색 세단을 타고서 축제 첫날 큼지막한 꽃다발과 함께 왕림하여 친구 그림 앞에서 기념촬영까지 하셨지만 말이다. ;-p 아, 맞다. 약간의 감동스러운 반전이 있기는 했다. 표구비를 못 냈으므로 당연히 내 그림은 한 개도 전시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것과 달리 놀랍게도, 미술실과 교무실 앞 복도엔 미술선생이 전시를 명했던 내 작품 세개가 모두 걸려 있었다. 비록 삐까번쩍하게 고급 액자로 새로 표구를 한 건 아니었지만, 미술실에 돌아다니는 옛날 그림 액자를 재활용해 미술선생이 내 그림을 전시해주었던 것. ㅠ.ㅠ 표구비 못내서 내 그림은 없을 거라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 얘기해놓았다가, 막상 내 이름표가 달린 그림을 마주하고 느낀 감동에다 이튿날 친구들이 그림 밑에 붙여준 장미꽃까지 곁들여져 중3 때의 추억은 신파스러우면서도 퍽 아련하게 남을 수 있었다.

쓰고 보니 사춘기 반항담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심통부린 이야기가 다 인것 같아 민망하지만, 암튼 세상 고민을 혼자 다 하는 것처럼 괴로워하던 나의 사춘기는 중3때로 막을 내렸던 것 같다. 고1때부터는 걸핏하면 병나는 엄마 대신 아침밥 챙기고 동생들 도시락 싸주고 그러느라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흔히들 하는 얘긴데 옛날 우리들은 나처럼 대개 사춘기가 짧고 굵게 금방 지나갔단다. 옛날 세대들이 확실히 삶이 덜 여유로워 철이 빨리 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지금보다 부모의 간섭이 심하지 않아 반항할 일도 덜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정답이야 모를 일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사춘기가 시작되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사춘기 성향을 보이는 요즘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올해 중학생이 되는 조카를 봐도 그렇다. 5학년때부터 이미 발칵발칵 성질을 부리고 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걸 보며 벌써 사춘기에 접어들었나 보다는 심증을 가졌는데 점점 아주 가관이시다. 제 부모도 그렇고 나도 왕비마마도 본격적인 공주의 사춘기를 두려워할 정도다. 원래 사춘기 때는 뇌의 구조와 기능부터 달라서 번쩍번쩍 아무때나 스파크가 일고 번개가 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뇌관 같은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는 어른들의 이해가 필수적이라던데, 여전히 철도 덜 났고 수시로 감정의 기복이 많은 나로서는 이해는커녕 제법 참고 지켜보다 덜컥 싸움을 할 태세가 되고 만다. +_+ 요번에 방학맞이 공주의 왕림기간 동안, 정말이지 작년 여름방학과는 다른 양상에 나도 왕비마마도 어쩔 줄을 몰랐다. 원래도 여기 오면 제멋대로 하는 경향을 보이곤 했으므로, 그러려니 했는데... 암튼 이번엔 확실히 받아주기 어려운 상황들이 많았고, 특히나 왕비마마께서 마음 상하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심지어 기물파손(?)도 한 건 있었을 정도다. ㅎㅎㅎ 왕비마마께 가장 긴요한 물건인 간단형 리모컨을 공주께서 집어던져 망가뜨렸는데, 내가 중재자로 나서야 했을 정도로 할머니와 손녀딸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는 걸 보며 나는 더럭 겁이났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하던 나의 공주는 이제 없구나 싶기도 하고. 원래는 심성이 착한 아이니까 자기도 주체 않되는 감정의 기복을 지혜롭게 헤쳐나갈 방법을 스스로도 발견하리라고 믿고 있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고모는 언제나 네편이 되어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폭탄선언까지 해야했던 조카의 사춘기가 과연 어떻게 넘어갈지... 그나마도 여자애들은 좀 나은 편이고, 남자애들이 더 문제라는데 주르륵 공주 아래로 셋이나 되는 사내녀석들은 또 어찌 사춘기를 버텨나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가는 성장과정이므로, 뭐 고민해봤자 지켜보는 것밖엔 할 일이 없겠지만 취미가 조카사랑이라고 주장해온 얼치기 어른 고모에겐 벌써부터 큰 두려움이다. 지금까지도 애들 버르장머리 없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비난을 계속 들어왔는데, 설마 조카들의 사춘기도 나 때문에 더욱 힘겨워지는 건 아니겠지? 어려서도 커서도 조카들이랑은 늘 속을 털어놓는 멋진 고모가 되는 게 꿈인데, 인품이 딸려서 과연 그런 경지에 오를 수나 있을지... 암튼 부모노릇엔 댈 것도 아니지만 오지랖 넓은 고모노릇도 뭐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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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투덜일기 2011. 1. 26. 11:24

설날 전에 두번 남은 주말 가운데 큰작은아버지의 일정에 맞춰 잡은 성묘일은 마침 대폭설이 내린 지난 일요일이었다. 집에서 출발할 즈음 눈길을 걱정스러워하는 전화를 받기는 했으나, 정말이지 그땐 눈발이 우스워보였고 공주보필에 힘쓰느라 나는 뉴스니 일기예보니 하는 것에도 무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강행한 파주 성묘길은 십여년만에 처음으로 여기저기 눈길에 서너대씩 차들이 뒤엉켜 있는 도로를 엉금엉금 달려, 작은 언덕도 못올라 빌빌 미끄러지는 차를 산소 입구에 세워두고 모두들 함박눈을 맞으며 버적버적 걸어올라가야 하는 난코스였다. 제일 먼저 출발한 나는 빌빌 기어갔어도 한시간도 안 되어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먼저 공원묘지에 당도했지만, 모두 다섯대가 다 모인 시간은 약속시간에서 한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나마도 그간 쌓인 눈이 엄청나 발이 푹푹 빠지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엔 접근도 못했고, 아버지 계신 납골당에 들어가 급히 이면지에 적은 조부모님 지방과 아이폰에 담긴 아버지 사진을 나란히 제단에 놓고 절을 올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손을 호호 불며 (부츠는 신고 갔으되 왜 장갑을 빼먹었던고!) 한참이나 눈길을 걷고나서 돌아온 다음날까지 뒷다리와 허리가 뻐근했다. 생각해 보니 뜻밖의 눈사태로 나는 울음바람도 잊었더라. 지난 추석 성묘땐 비가 철철 오더니, 설날 성묘땐 대설이라... 다 자손들 잘 되라는 뜻이라는 큰작은아버지 말씀에 비싯 웃으며 동감했다. 눈길 운전은 솔직히 겁났지만, 1킬로 미터에 한번 꼴로 여기 저기 구석에 차가 처박혀 있던 자유로를 달렸어도 열여섯 명이나 되는 가족들 모두 별 탈없이 무사히 귀가하였으니 그냥 눈구경 한번 잘했다 싶은 추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너무 춥고 장갑이 없어서 조카들이랑 눈싸움 한번 못한 건 두고두고 한이 되겠다.

그나마 돌아올 무렵엔 거의 눈이 그쳤다. 저런 길을 내가 다녀왔구나.... 사진으로 다시 봐도 놀랍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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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 유감

투덜일기 2011. 1. 9. 16:15

왕비마마와 내가 옷에 대한 취향이 사뭇 다르긴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의견통일이 이루어진 부분은 모피 코트에 대한 거부감이다. 젊어서는 모피를 싫어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고 특히 노년에 접어들면 모피, 특히나 밍크 코트 한벌쯤은 갖고 있어야 면이 선다는 말을 많이 들었으므로, 엄마가 예순살 즈음부터는 겨울마다 나도 아버지도 계속 왕비마마의 의향을 물었다. 한벌 사줄 테니 골라보시라고 말이다. 한벌에 몇천만원까지 한다는 초고가의 모피는 못 사줘도 '까짓것' 몇백만원짜리는 사주겠다며 몇번이나 백화점엘 모시고 나가 입혀본 적도 있었다. 엄마가 내심 갖고 싶은데 괜히 사양하는 '척'하는 거라면, 백화점까지 가서 입어본 다음에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실 것이라는 게 우리의 짐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때마다 억지로 걸쳐는 보았으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원래 우리 모녀는 웬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옷을 잘 입어보지 않는다. 입어보고 나면 소심한 성격에 점원에게 미안해 마음에 안들어도 얼떨결에 사버리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모피 코트가 워낙 고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왕비마마의 거절 이유는 우리가 듣기에도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첫째로는 불자로서 수백마리 짐승을 죽여 만든 옷을 걸치고 절에 다니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고, 둘째로는 당신 몸이 뚱뚱해서 그렇게 짐승털가죽 옷을 입은 본인의 모습이 한 마리 곰처럼 흉측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연말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모피코트를 입지 않은 사람은 울 엄마밖에 없더라면서 그게 속이 상했는지 아버지는 잊을만 하면 한번씩 계속 백화점 모피 매장으로 왕비마마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왕비마마는 밍크 코트 대신에 밍크털이 깃과 소매에 장식된 무스탕이나, 오리털, 모직 코트를 대신 사거나 차라리 아버지랑 세트로 등산 점퍼를 장만해 들어오셨다. 그러고 나서는 지난 몇년간 나는 왕비마마의 모피 취향이 변했는지 아닌지 떠보기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유난히 혹독한 추위가 이어지고 있는 올 겨울, 왕비마마의 나들이라고 해봤자 한달에 한번 동창모임 아니면 절에 가는 것 이외엔 죄다 병원 정기검진이긴 하지만 노친네들이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밍크 코트'를 보니 새삼 또 찔려 왕비마마에게 물었다. 엄마도 이젠 밍크코트 한 벌 입으시지, 라고. 그랬더니 단박에 싫으시단다. 더 뚱뚱해보일 거라나. 그럼 살 빠지면 입으실 거냐고 했더니 그도 아니란다. 오히려 입고 싶으면 너나 입으라고, 통 크게도 한벌 사주시겠다고, 요즘엔 젊은 애들도 많이들 입나보더라고, 한 술 더 뜨는 거다. -_-; 징그러워서 개털도 잘 못쓰다듬을 뿐더러, 특히 실감나게 생긴 밍크털은 더 소름끼쳐서 소매나 깃장식도 못 견딜 판국인데 무슨!

이렇게 모피 혐오증 환자처럼 굴고는 있지만 나도 짐승털이 얼마나 따뜻한지는 알고 있다. 할머니 유품 중에서 스웨터 말고도 내가 또 챙긴 물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밤색 토끼털 목도리다. 다행스럽게도 토끼 눈과 꼬리까지 실물처럼 재현해놓은 그런 모양이 아니라(그런 거라면 무서워서 절대 갖겠다는 소리 안했을 거다. 할머니 밍크 코트를 외면했던 것처럼;;) 둥글게 코트 깃처럼 생긴 집게형 목도리라 모직코트를 즐겨 입던 시절엔 정말 거의 매일 두르고 다녔다. 비록 이제는 몇년째 장농에 그저 매달려 있기만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가죽코트 사면서 안에 입는 토끼털 조끼가 덤으로 생겨 입어본 적도 있다. 그나마 변명이라면 내가 일부러 모피를 추구해서 장만한 건 아니라는 정도지만, 토끼털은 괜찮고 밍크 코트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과연 나도 더 '늙으면' 취향이 바뀔지 그건 모르겠으나, 어려서는 모피가 징그럽다고 나와 동감하던 친구들도 중년에 접어들더니 슬슬 모피에 눈길이 가고 호피무늬가 좋아진다고들 고백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나는 요즘 모피 코트 디자인이 제 아무리 세련되게 바뀌었다고 해도, 깜찍 발랄하게 새하얀 모피를 입은 젊은 아가씨들을 보아도 전혀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데 말이다. 호피무늬 싫은 거야 예전에도 포스팅했던 적이 있을 정도고! (좋아하는 배우가 배역 때문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호피무늬 걸치고 나오면 호감도는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선호 배우 명단에서 제명될 수도 있다) 얼마 전 혹독하게 추운날 잠깐 만나 밥을 먹었던 친구는 나 싫어할까봐 제일 뜨뜻한 모피 코트를 못입고 나왔다고 툴툴거렸다. 그 친구는 그 옛날부터 걸어다니면 반드시 팔짱을 껴야 하는데, 모피 걸치고 나온 날은 내가 내내 사모님이라고 놀려줄 뿐만 아니라 팔짱도 금지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내 취향을 고려해 하루쯤 모피를 포기한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긴 것, 짧은 것, 색깔 연한것, 조끼형까지 일일이 갖고 있는 모피 코트를 들먹이며 효용성을 피력하는 사모님에게 결국 나는 '고급스러운' 취향을 존중해 줄 터이니 그만 입닥치라고 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까마득한 옛날에 결혼할 때도 시어머니 혼수로 모피코트를 해드리고 저도 모피를 받았던 것 같다. 어차피 물려받을 거라 생각하고 좋은 걸로 바치기로 했다던가.

암튼 그렇게 뜨뜻하다는 모피 코트에 대한 왕비마마의 거부감이 진심인지 아닌지, 진심이었더라도 혹시 변하는지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떠볼 작정이다. 왕비마마가 계속 싫다고 하시면 몹시 뿌듯하고 자랑스러워 하겠지만, 못 이기는 척 입겠다고 하셔도 매몰차게 친구에게 하듯 팔짱을 못끼게 하지는 말아야지 마음먹고 있다. 곰 한마리나 바야바 같은 왕비마마를 모시고 다니는 일은 정말 싫겠지만, 뭐 그렇게 또 따뜻하다니까... 원시 시대엔 겨울에 누구나 모피를 몸에 두르고 다녔을 텐데 뭐... 암... 혹시 내가 하도 질색팔색을 하니까 왕비마마가 모피 입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계신 건 아닌가 슬며시 걱정스럽기도 하다. 빤딱이 여우털 프린세스 라인 패딩을 사다 입으라고 강요 받았을 때 내가 난감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취향을 노친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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