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다

투덜일기 2012. 5. 28. 23:30

삼일 내리 붙은 황금연휴 딱 가운뎃날에 사촌동생이 결혼을 했다. 눈에 콩깍지가 덮인 사촌동생 커플이 지들끼리 돌아다니며 잡은 날과 식장에 대해서 벌써부터 친척들은 말이 많았다. 사흘 연휴 딱 한 가운데인 일요일에 날을 잡으면 어쩌라는 거냐! 게다가 일요일 12시라니! 교회 다니는 사람은 어쩌라고? 멀리서 가는 사람들은 대체 몇시에 일어나라는 건지?! 그 동네가 대체 어드메 붙어있는 것이관대 거길 잡은 거냐! 너무 신랑쪽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는 거 아니냐! (물론 인륜지대사라는 혼사를 앞두고는 원래도 이런저런 참견과 말이 많은 법이다 ㅋㅋㅋ)

 

어쨌거나 시종일관 생글생글 웃으며 여유롭게 대사를 치러낸 사촌동생은 참으로 어여뻤고, 결혼식도 잘 끝났다. 원래도 집안 결혼식에 다녀오면 엄청 더 피곤한데, 이날은 집에 돌아와 완전 픽 쓰러졌다.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전날밤에 제대로 잠을 못잤다. 굴러다니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는 것으로 나를 식겁하게 만들기 선수인 조카녀석이 난데없이 자고 갈줄이야. 게다가 한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식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된통 자빠졌다.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게 먼저라 벌떡 일어나긴 했는데 ㅠ.ㅠ 심신의 충격이 꽤 컸다. 그러고는 귀가길에 한 차 가득 친척어르신을 태우고 잘 쓰지도 않는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켜고 인근 전철역을 찾는데, 우어~~~~ 꼭 5초쯤 느리게 가야할 길을 지나서야 안내를 하더군. 결국 내비게이션 전철역 안내는 무시하고 강을 건너와 내가 빠삭하게 아는 곳에서 넷째 고모를 내려드렸다. 처음부터 내 맘대로 길을 찾았으면 막히지도 않고 더 편했을 텐데! 내비게이션 떠들지, 어르신들 떠들지, 나도 간간이 맞장구 쳐야지... 운전할 때 정신 시끄러우면 음악도 잘 안듣는데 아주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간만에 한복까지 떨쳐입고 큰엄마 노릇을 톡톡히 하신 엄마도, 원피스 떨쳐입고 자빠진 사촌언니라고 사돈댁에 소문날까 무서웠던 나도 집에 오자마자 드러누웠다. 

 

부모 등골이 빠지든 말든 호화롭고 번듯한 결혼식을 선호하는 요즘 풍조 속에서 사촌동생은 퍽 야무지게 부모 도움 전혀 안받고 순전히 자기가 모은 돈으로 소박하게 결혼준비를 했고 예단도 생략했다. 유치원 교사의 박봉으로 결혼자금을 모았다니, 나는 그게 그렇게 기특하고 장할 수가 없는데 일부 어른들은 그게 또 예의가 아니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우 짜증! 친척 예단으로 돌린 이불 같은 건 짐만 되고, 현금봉투로 받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실제로 울 엄만 몇년 전 고모네 집에서 현금으로 받은 예단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예단 없어 섭섭하다는 그 고모를 흉봤다. "자기네도 예단 안했으면서!"라고. +_+ 어휴, 엄니;;) 겉치레가 더 큰 예식 자체도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지만, 가풍이니 예의니 따져가며 한 마디씩 보태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진저리가 난다. 결혼식은 사라져야 할 제도라는 심중만 굳어질 뿐이고!

 

친구 하나도 요즘 그놈의 '식' 때문에 연일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올해 학부형이 된 그 친구는 오래 전 '쿨'하게 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남자네 집에서 결혼을 결사반대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둘 다 결혼식에 들일 무모한 비용을 집 얻는 데 더 보태자는 실용적인 결론을 내렸다. 나중에 부모님 마음이 돌아서면 제대로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계획 같은 것도 아예 없었다. 여자라면 꼭 한번 입어보고 싶다는 웨딩드레스의 로망? 그딴 거 없는 여자도 있다규! <주목 공포증>이란 게 있다는 걸 요즘에서야 알았지만, 그 옛날부터 그 친구와 나는 지인들 결혼식장 구경 다니며 서로 비슷한 말을 중얼거렸다. 사람들 수백 명이 동시에 쳐다보는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하게 걸어들어가냐, 신기하다. 저런 것도 끼가 있어야 하는 건가봐... 나와 달리 친구는 독신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외국영화에서 남녀가 평상복 입고 시청 같은데서 혼인서약 하고 양쪽 집안에 전화로 결혼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을 멋지다고 하더니, 현실에서도 그 비슷하게 꿈을 이루었다.   

 

그런데 10년도 넘게 잘 살고 있는 지금에 와서 새삼 '그래도' 결혼식은 올려야한다고 친정엄마가 졸라대고 계시다는 것. 교회에서 운영하는 부부수업(?)을 듣고나서 웨딩드레스 입고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라고, 죽기전 평생 소원이시라고 하루에도 두세번씩 협박과 읍소와 호통을 번갈아하고 계시단다. 부모로서의 마음을 일견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게 원래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집안 대 집안의 거사임을 알기는 하지만, 당사자가 싫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전화로 징징대는 친구에게 위로랍시고 내가 해준 말은 그나마 친정엄마라 싸울 수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말도 안통하고 무서운 시어머니(진짜 무서운 양반이다 ㅎㄷㄷ)가 시키는 게 아니라 얼마나 좋으냐는 거였다. 20주년에 리마인드 웨딩 멋지게 할 테니 기다려 달라고(일단 10년은 시간을 버는 셈이니까;;) 해보라는 조언도 했는데, '그 전에 나 죽는다'며 엄마한테 혼만 났단다. 그럼 그렇지, 내가 뭘 안다고... 

 

푸념 들어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반복되는 상황에 내가 슬슬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친구도 알았챈 모양이다. 며칠째 시도 때도 없이 딩동딩동 날아오던 문자가 잠잠해졌다. 남들은 들로 산으로 바글바글 여행을 떠났다는 황금연휴에 나는 피곤한 심신을 달래느라 일 한자 못하고 비실비실 방바닥을 뒹굴었다. 앞으로 넘어져 무릎에 멍이 들었는데, 왜 엉덩이도 욱신거리는지 원. 정말이지 결혼은 구경하는 것도 이야기를 듣는 것도 다 고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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