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 해당되는 글 36건

  1. 2014.02.25 안동 - 원풀이 2
  2. 2013.09.03 경회루 특별관람 5
  3. 2013.08.05 청양 10
  4. 2013.07.29 전주 한옥마을(7/21-22) 13
  5. 2013.07.12 비오는 날 경복궁 4
  6. 2013.04.21 경복궁에서 옛것 찾기 8
  7. 2013.03.25 궁궐이 좋아서 3
  8. 2013.03.21 종묘 8
  9. 2013.03.14 혜화동 나들이 6
  10. 2013.03.05 2월에 놀고먹고

안동 - 원풀이

놀잇감 2014. 2. 25. 16:59

2012년 가을에 안동 갔을 때 못 가고 못 보고 못 먹어 아쉬웠던 것들에 대한 원풀이를 얼추 다 하고 돌아왔다. 탱자탱자 놀러다닐 상황은 아니지만 일행의 생일 선물로 다녀온 여행, 마음의 여유가 없어도 노는 건 좋더라. 길고 자세한 여행후기는 생략하고, 그냥 1박2일간 움직인 동선대로 원풀이 목록을 적어볼 생각.

 

1. 일직식당 간고등어 조림

 

아침 9시에 서울을 출발했더니 딱 점심시간에 안동에 도착했다. 먹거리 1순위로 일행과 의견의 일치를 보았던 고등어조림의 위용이다. 익히 맛있단 얘기를 듣고 기대가 높았음에도 정말 맛있었다. 둘 다 밥 한 그릇 뚝딱.

곁다리 반찬도 깔끔하고 맛있는 편이었고, 아주 작은 종지만한 그릇에 주는 식혜도 심히 달지 않고 맛났다.

올라가기 전 점심으로 한번 더 먹고 갈까... 그런 생각을 품기도 했으나 실천에 옮기진 못했다.

 

안동역 바로 옆에 있는 일직식당 주소는 안동시 운흥동 176-20. 건물 바로 뒤에 유료주차장에 주차하고 식사 후 도장 찍어가면 무료. 나중 재방문을 대비한 기록차원의 포스팅이다. ㅋㅋ

 

 

2. 퇴계종택

 

도산서원 앞에 도착해보니 주차장이 전방 몇백미터에 또 있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조금이라도 덜 걷겠다는 욕심에 도산서원 입구가 어딘지 찾아보지도 않고 괜히 길을 따라 더 올라갔다가 고개를 넘어 엉뚱하게 먼저 가게 된 곳이다. ㅋㅋㅋ

 

표지판을 자세히 읽지 않아 벌써 홀딱 까먹었지만 1900년대 초에 퇴계의 후손이 지은 집이라는 것 같다. 대청마루에 유리를 낀 문을 단 것으로 보아 근대 한옥건축이 틀림없지 않을까... 짐작만 했다.

 

 

 

 

 

 

 

3. 도산서원

 

두둑한 배를 두들기며 도산서원을 먼저 찾은 이유는 숙소가 도산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 시내에서 차로 30-40분쯤 걸리는 거리. 산속으로 꼬불꼬불한 길을 꽤 많이 들어가야 나타난다. 성수기 때는 주차료도 따로 받는 모양이던데, 비수기라서 입장료 1500원만 내고 들어갔다.

 

걸어들어가는 입구부터 어찌나 아름다운지, 저 아래 흐르는 낙동강의 물소리며 주변을 아늑하게 둘러싼 산까지 진짜 명당이로군, 했다. 서원이라지만 한옥의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고, 고색 창연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아기자기했다.

 

하지만 선비문화원인가 뭔가 하는 교육(혹은 수료식?)이 진행중이라 서생 복장을 한 젊은 남녀가 대청마루에 줄지어 앉아있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사부님도 보여서 중심건물은 속속들이 제대로 구경할 순 없었다. 어쨌거나 오래된 툇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마음 뿌듯.

 

왼쪽 사진은 <시사대>였던가.. 정조가 퇴계를 기려 특별 과거시험인 별시를 연 곳을 기념해 세운 전각이라는 것 같다.

오른쪽은 아마도 서고? 초록색 단청을 칠한 덧문이 진짜 오래된 느낌... 

 

 

4. 농암 종택 

 

언젠가 신문에 크게 난 기사를 보고 일행이 찜해 예약해둔 숙소는 농암 종택. 농암 이현보의 후손이 현재 위치로 옮겨다 지었다는데 규모가 대단하다. 드넓은 대지에 집을 띄엄띄엄 앉혀놓아 엄청나게 툭 트인 느낌. 

솟을대문 앞에서 사당쪽으로 바라본 종택 입구 사랑채 왼쪽에 붙어 있는 맨 구석방이 우리 숙소

 

겨울이라 창문에 다 뾱뾱이를 붙여놓아 열수가 없었지만 여름이나 봄가을에 창문을 열면 건너편 기암절벽과 산이 보여 풍광이 대단할 것 같다. 방도 곳곳에 엄청 많고!

 

평일이라 아마 투숙객은 우리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건 완전 야무진 착각이었고, 버스까지 대절해 온 단체손님이 있었다. ㅋㅋ

그래서 밤에 큰방에 모여 노는지 좀 시끄럽긴 했지만, 기특하게도 12시 전에는 행사를 마무리해주더군. 1인당 7천원을 내면 종부가 차려주는 아침밥상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도 부탁을 했는데, 단체손님 덕에 밥상을 받는 대신 졸지에 뷔페식으로 먹어야했지만 홈페이지에서 본 반찬보다 훨씬 더 많은 가짓수의 반찬이 나온 것 또한 단체손님 덕분이었던 것 같다. 인간지사는 역시 새옹지마! ㅎㅎㅎ 

8시 반 되자마자 눈꼽도 안 떼고 제일 먼저 밥먹으러 가서 얼른 후다닥 찍어서 흔들렸는데, 맨 마지막에 구워온 간고등어까지 반찬이 무려 15가지! 장아찌 몇 종류는 아예 건너뛰고 한입거리씩만 접시에 담았는데도 저 정도... 담백하고 맛있었다! (누룽밥까지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운 일행은 점심때도 배가 고프지 않다며 정식 끼니를 거부했다. ㅠ.ㅠ 안동 한우 갈비 먹으러 갈 차례였는데! 전날 저녁도 찜닭 먹으러 나갈까 말까 하다가, 귀찮아서 읍내 하나로마트에서 사온 맥주와 안주와 컵라면으로 떼웠으므로... 이번 안동 여행에서도 토속 먹거리-헛제삿밥, 한우갈비, 찜닭-모두 맛보기는 원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묵은 방엔 '다실'이 딸려 있었는데 발시리고 추워서 겨울엔 엄두도 나지 않겠지만 여름엔 앞뒷문 다 열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차 마시는 게 가능하겠다. 모든 방에 TV는 없지만, 냉장고와 무선주전자와 다기세트가 구비되어 있다고. 도배상태며 침구류도 깨끗했고, 우리가 묵은 '내실'은 4명이 자기에도 넉넉한 크기. 다만 심야전기를 이용한다는 난방은 7시반부터 따뜻해진다고 하여 좀 추운 편. 비교적 따뜻한 날씨였는데도 공기를 덥히려 전기난로를 돌려야했음. 물론 밤중엔 뜨끈뜨끈해졌다. 세탁기가 떡하니 놓여있는 드넓은 화장실도 추워서 겨울엔 샤워하기 무리. 한참 틀어놓으면 뜨거운 물이 나오긴 했지만 다음날 머리도 안감고 모자로 버텼다. ㅋㅋ 아 참, 수건도 가져가야하고(달라면 주긴 한다;;) 헤어드라이어 같은 것도 없다. 한옥고택 체험은 아무래도 겨울엔 무리일지도. 치암고택이나 학인당은 어쩐지 겨울에도 화장실까지 따뜻할 것 같은데...  그야 모를 일.

주소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을미재 612번지. 054-843-1202

 

 

5. 하회마을

안동시내를 중심으로 동과 서로 뚝 떨어져 있는 하회마을과 도산서원. 우리 숙소에서도 하회마을까지는 1시간 30분 가까이 가야했다. 안동 관광은 욕심 내서 많이 보려면 기동력이 필수인듯.

왼쪽은 아마도 충효당? 오른쪽은 마을 중심에 있는 삼신당의 삼신목. 수령 600년치고는 둘레가 너무 어마어마하게 커서 의아할 정도인데 벌어지며 자라서 그런 듯. 암튼 일행은 삼신목에 열심히 고개를 조아리며 무언가를 빌었다. 무얼 빌었을까...

 

암튼 요번엔 나의 원풀이를 제대로 해주려고 하늘이 도왔는지(?) 지난번에 나룻배만 묶여있던 백사장 나루터에 연신 배가 오가며 부용대 쪽으로 사람들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데 30초나 걸리려나... 째뜬 '나름' 낙동강을 건너는 왕복 뱃삯 3천원.  

그렇다고 우리가 부용대 꼭대기까지 올라갈 인물들은 절대 아니고 강 건너편에 있는 옥연정사인가 하는 곳만 둘러보고 나왔다. 오른쪽 사진이 고택체험 숙소로도 묵을 수 있는 옥연정사. 하여간 그래도 뱃놀이까지 했다는 뿌듯함에 막 시(?)도 읊어주고 ㅋㅋㅋ

 

 

 

첫날은 날이 약간 흐렸는데, 다음날은 완전 쾌청화창. 두툼한 겨울 외투가 민망할 정도로 따뜻한 날씨였다.

하회마을 골목길을 돌아나오며 아쉬움에 사진 한 장 더.

 

 

 

 

 

 

 

 

 

 

 

 

 

 

 

 

 

 

 

 

 

6. 병산서원

 

주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어 병산서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 같다. 하회마을에서 걸어서도 접근이 가능하다지만, 왕복하려면 2시간 반은 잡아야한다고. 차로 찾아가도 꼬불꼬불 비포장도로를 꽤 가야 나온다. 요번에 본 한옥들은 하나같이 다 배산임수, 명당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캬... 어쩜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곳을 콕콕 집어 집을 짓고 공부를 했을까나. 이런 데서 공부를 하면 공부가 더 잘될까 어쩔까 뭐 그건 시답잖은 생각이 들었다.

 

서원 건축의 '백미'라는 병산서원은 건물의 수가 도산서원보다 훨씬 적은데도 규모가 큰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 만대루 때문일 듯... 길쭉하고 장엄한 누각이라 어디에서도 한 컷에 안잡힌다. ㅠ.ㅠ 

 

 

 

 

 

7. 맘모스 제과

안동여행 마지막 코스는 대망의 맘모스 제과!

병산서원을 다 돌아보고 났을 무렵 나는 허기가 져서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는데 ㅠ.ㅠ 간고등어도 싫고 헛제삿밥도 싫고 그저 맘모스 제과 빵으로 달콤하고 행복한 요기를 하겠다는 일행의 '빵심' 덕분에 견과류로 대충 배를 채운 뒤 다시 안동 시내로 달려갔다. 문제는 내가 검색을 대충하는 바람에 주소는 정확했으되 빵집이 대로변에 있지 않다는 걸 몰랐다는 게 함정. "목적지 부근입니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주변 도로를 두번이나 돌다가  '차로는 못 들어가는 골목'이라는 주민의 설명을 듣고서야 찾아들어갔다. ^^;

오후라서 빵이 많이 남았을라나 모르겠다는 주차요원 아저씨의 말씀에 불안했더니만, 헐.. 역시나 '맘모스 빵'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나마 좀 남은 치즈브레드와 애플또띠야, 유자파운드를 고른 뒤 커피와 함께 폭풍흡입...  

미슐랭 별점을 받은 빵집이라더니만 커피도 맛있네그려! 배를 채우고 나서야 빵사진을 찍을 생각이 들었는데, 빵집을 나오며 선반을 보니 그나마 있던 빵도 거의 다 떨어졌다. 왼쪽이 생크림치즈가 듬뿍 든 치즈브레드. 냉장고에 넣었다가 담날 먹어도 맛있었다! 안동 사과를 넣어 만든다는 애플 또띠야는 그냥 또띠야 반장에 사과절임을 넣어 삼각형으로 말아놓은 건데 아삭아삭 씹히는 사과와 바삭 담백한 또띠야가 꽤 잘 어우러졌다. 다음날 먹어본 거라 맛이 좀 덜했을 수도 있겠으나 암튼 별로 달지 않아 내 입맛엔 합격. 유자 파운드는 유자청이 콕콕 박혀 있긴 한데 겉에 설탕을 입혀놓아 너무 달았고 크기도 작았다. 가격대비 별로. 그나저나 맘모스 빵을 결국 못 먹어본 건 아쉽다. 또 가야하나... ㅋㅋ

맘모스 제과 앞길은 보행자만 다니는 쇼핑가인 듯. 주소는 안동시 남부동 164번지 

주차는 주변 남부시장 공용주차장에 하고 빵을 만원어치 이상 사면 1시간 무료라는 것 같은데, 그냥 도로변 공용주차장에 대도 완전 저렴하다. 주차비 700원 나왔음! ^^;  

 

이로써 1박2일간 왕복 690킬로미터쯤 되는 안동여행을 신나고 맛나고 뿌듯하게 마쳤다. 간단히 쓴다더니 엄청 길기도 하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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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특별관람

놀잇감 2013. 9. 3. 21:45

창덕궁 후원처럼 돈을 더 내고 봐야하는 줄 알았던 경회루 특별관람. 그냥 경복궁 홈페이지에 들어가 무료로 신청하면 된다. 다만 신을 벗고 올라가야하므로 발 시려운 동절기엔 관람통제, 4월부터 10월까지만 들어가 볼 수 있다. 하루 서너번, 한번에 80명으로 인원을 제한해서 며칠 전쯤엔 신청을 해야하는 듯. 80명이라지만 무료라서 대충 신청했다 안나타나는 사람이 많은 듯 실제 관람 인원은 80명이 훨씬 못 돼 보였다. 그래도 경회루로 들어가는 함홍문 입구에서 철저하게 이름 확인을 한 후 들여보냄.

 

 

근정전과 더불어 경복궁을 대표하는 건물인 경회루는 주역과 우주의 원리를 담은 건물이라나 뭐라나, 36궁이 어떻고 천지인이 어떻고, 24절기가 어떻고.. 자세히 설명하려 들면 엄청 복잡하고 어렵다. -_-;

하기야 궁궐 안 어떤 건물도 별 의미없이 그냥 대충 지은 전각은 없다. 최소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 사상을 바탕으로 조화를 도모했다고.

 

경회루 1층 기둥이 모두 48개인데, 그 중 바깥 기둥 24개는 네모나고 안쪽 24개는 둥글다. 그치만 연못 건너편에서 아득하게 보이는 걸로는 구분이 안 간다규~! 얼핏 콘크리트 기둥인가 싶지만, 고종 때 중건한 그대로이니 화강암이란다.  

경회루에 대해선 다들 드넓은 2층 누각 바닥이 조금씩 높낮이를 달리하여 3단으로 되어있다는 설명을 빠뜨리질 않는데, 들어가보니 1층도 마찬가지로 사진처럼 전돌을 깐 단 높이에 층을 두었다. 그리고 멀리서 볼 때보다 누각이 엄청 높더라. 천장에 보이는 연꽃문양도 예쁘고...

 

시간을 많이 주면 누각 서쪽으로 배를 탈 수 있게 연결해놓았다는 계단 구경도 하려고 했으나 설명 이후 잠깐 자유시간 주더니 우르르 다시 밖으로 내몰았다. 쳇. 착하게 해설사 말을 잘 들으면 절대로 제대로 구경을 할 수가 없다니깐.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당시엔 없었다가, 태종 때 비로소 원래 있던 작은 정자를 허물고 습지를 크고 넓게 파 대규모로 확장해 세운 누각이다. 풍수 상 경복궁 서쪽에 있는 인왕산이 돌산이라 나쁜 기운이 궁궐로 스며드는 걸 막으려고 높고 큰 전각을 세운 거라나. 더불어 명당수도 확보하고, 화재예방을 위한 방화수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는데, 실록에 노상 궁궐에 불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 걸 보면 별 효험은 없었나보다. ^^; 경회루 역시 임진왜란 때 모조리 타 돌기둥만 남았었다고...

 

암튼 주 목적인 대규모 연회장으로 가장 많이 쓰였겠지만, 세종은 무과시험 활쏘기를 경회루에서 구경했대고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단다. 단종이 세조에게 옥새를 넘겨준 장소도 바로 경회루라고. 문화재 해설할 때는 실록 기록을 중심으로  '야사'는 인용하지 말라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문화재청에서 비치한 경복궁 안내책자엔 중종과 단경왕후의 치마바위 이야기, 몰래 경회루 구경갔다가 경을 치는 대신 세종 눈에 들어 고속승진한 구종직 이야기 따위가 다 들어있다. 대체 어쩌란 말이냐, 흥!

 

아무려나...경치 좋은 곳에 지은 정자는 어디든 겉에서 건축물 감상할 게 아니라 정자에 올라 바깥 경치를 바라보아야 제격이라고들 한다. 경회루 역시 멀찍이서 올려다보는 것보다는 누각에 올라 동서남북 다른 풍경을 보는 맛이 일품이었다.  

 새 들어오지 말라고 여기도 막아놓은 그물은 이미 중종실록에도 보이는 것이라니 뭐 시야를 가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3단으로 층이 조금씩 다른 마룻바닥 한 가운데 제일 높은 세 칸의 공간은 왕의 자리이고, 신하들은 지위고하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니 나중에 자유시간때 사람들은 대부분 냉큼 왕의 공간에 올라가 드러누웠다. 나 역시 마찬가지... ㅋ

드러누워 올려다보이는 천장에 아련하게 보이는 무늬는 청룡한쌍이라는 것 같다. (아래 왼쪽 사진) 저런 모양의 천장을 우물반자라고 하지 아마;;

 

층층이 다른 경회루의 3단 마룻바닥을 내 재주로는 사진 한 장에 담을 수가 없었다. 암튼 뭐 이런 느낌...

 

목조건물의 취약점은 뭐니뭐니해도 화재에 약하다는 것과 벌레가 잘 파먹는다는 점. 그래서 단청을 하지만 바닥까지 단청을 바를 순 없으니 엄청 굵은 나무를 썼겠구나 싶은 마룻바닥에 사진처럼 죄다 얼기설기 좀먹은 자국이 있다.

특히 제일 높은 가운데 세칸 바닥에 좀벌레 흔적이 심해서 주변보다도 엄청 까끌까끌한데, 그 이유가 오래도록 카펫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란다.

70년대 대통령이 고이 카펫 깔아두고 워낙 애용하셔서 그렇다고. 그러고 보니 정말로 정부든 국민이든 문화재를 아끼고 제대로 복원하고 보존하는 식의 역사는 불과 몇십년 안됐다. 그러니깐 그 전에는 버젓이 목조 문화재를 '콘크리트'로 뚝딱뚝딱 복원해놓고 자랑스러워했겠지. (경복궁의 서쪽 대문인 영추문도 개발논리 시대의 콘크리트 복원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경회루를 바깥에서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다. ㅋㅋㅋ 역시 숲속에선 숲을 바라볼 수 없는 법.

 

경회루로 들어가는 다리는 셋이나 되는데, 궁궐 내 박석이 깔린 세 갈래 길 중에서 어도가 언제나 한가운데인 것과 달리 경회루 다리는 맨 앞 남쪽다리가 왕이 지나다니는 다리다.

이유는 왕의 처소인 강녕전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라고.

가운데 다리로는 왕실 종친이 건너다녔고, 북쪽 다리로는 신하들이 건너다녔단다.

요새 관람객이 드나드는 다리는 중간문에 연결된 다리.

 

그 옛날에도 저렇게 경회루 주변에 새파란 잔디가 깔렸을 리는 없을 것 같아서 해설사한테 물어봤더니 기록이 없어 모른단다. 전통적으로 뗏장은 무덤에만 입히는 거라며?! 쳇...

 

 

창덕궁에선 봄가을 보름날 야간에 '달빛기행'이라고 해서 고가의 특별 관람(다과와 공연 포함 3만원)을 실시하는데, 인기가 하도 많아서 티켓오픈일 기다렸다 광클릭을 해야 예매가 가능하다. 달력에 적어놓고 기다렸건만 올해도 상하반기 모두 예약 실패 ㅠ.ㅠ

 

경회루에서도 '연향'이라고 해서 똑같이 3만원 내고 공연보는 프로그램이 8. 9월에 있는데 창덕궁에 비해 좀 부실하다는 것 같다. 그래도 저렇게 분합문 들어올려놓고 은은한 조명 속에 뚱땅뚱땅 국악 공연하는 거 밤중에 구경하면 기분 근사할 것도 같다. 그치만 창덕궁 달빛기행은 연경당에서 다과 대접도 한다는데 경회루에선 같은 가격에 왜 먹을 걸 안주냐고! (그래서 안감 ㅋㅋ)

 

봄에 시행했던 경복궁 야간개장때는 수십만명이 몰려서 고수부지 놀러오듯 사람들이 술과 먹을 거리 사들고 잔디밭에 드러누워 고성방가했다지. 그래서 가을 야간개장땐 엄격히 인원제한을 한다는 것 같다. 그런 막된 사람들 욕하면서 ㅋㅋ 난 또 궁궐 전각에서 비싼 다과대접 받고 싶어하고... 이 무슨 묘한 심리인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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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여행담 2013. 8. 5. 03:07

같은 곳에 여행을 가도 뭘 좀 아는 현지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면 확실히 더 재미가 있는 건 당연.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거나 미리 공부를 해서 답사처럼 여행을 떠나는 게 유행인가보다. 나 역시 '답사'라는 이름으로 난생처음 청양엘 다녀왔다. 코스는 면암 최익현의 사당인 모덕사, 정산 서정리 9층석탑, 장승공원, 칠갑산 장곡사, 그리고 올라오다가 들른 아산 평촌리 약사여래불.

 

최익현은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퇴출을 이끌어낸 상소를 올린 인물이자 의병장. 국사책에서 들어본 이름이긴 해도 당연히 다 까먹었는데,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하다가 잡혀 대마도로 끌려간 뒤 적의 음식을 거부해 굶어죽기를 자처했단다. 이후 곳곳에 추종자들이 사당을 지었다는데 청양 모덕사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기 전 몇 해 지내던 고택과 장서각도 함께 있는 곳.

 

가랑비 속에 오래된 한옥을 둘러보니 더욱 운치가 있었다.

 

집 한쪽으로 난간 두른 누마루를 내어짓고 아래는 아궁이를 둔 독특한 구조를 보라. +_+ 상당히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 아래 왼쪽은 4천권(이랬던 것 같음;;)이나 되는 옛 서책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장서각이다. 오래 묵은 종이와 묵향에다 최근 넣어둔 좀약냄새가 뒤섞여 아주 오묘한 냄새가 났다. ㅋㅋ

 

 

내부는 이런 모습;;

 

뒷마당의 장독대도 정겹고, 흙과 기와를 쌓아올린 여러가지 모양의 굴뚝도 예뻤다.

 

나는 뒤쳐져서 한옥 구경하느라 정작 사당은 관심없었다. 확실히 옛날에 지은 한옥과 현대에 얼렁뚱땅 지은 한옥은 척 봐도 차이가 있다. 한옥 짓는 기술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암튼 나도 언감생심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살 일이 있다면 어디서든 고택 부재를 몽땅 옮겨다가 지어야지 마음먹었다;; ㅎㅎ

 

 

 

 

 

 

 

 

 

 

 

 

 

 

 

다음 행선지는 정선 서정리 9층석탑. 드물게 고려시대 초기 석탑이라는데, 절터는 온데간데없고 길가에 뜬금없이 홀로 초라하게 서 있다.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모를 듯...

 

 

 

이때만 해도 7월 초라 연꽃이 하나도 안보인다.

이날 논 옆의 연꽃밭(아마도 연근 수확을 위함인듯;;)을 보며 반색해서 사진 엄청 찍어왔는데.. ㅋㅋ 덕진공원 다녀와서 보니 그야말로 새발의 피.

 

금세 탑을 돌아보고나서 향한 곳은 예정에도 없던 천장호 출렁다리였다. 1박2일에도 나온 곳이라며 해설사와 청양군 관계자가 꼭 가보라 했다는데 ㅋㅋㅋㅋ 우리는 이런 인공조형물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라규! 게다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흠흠... 저 빨간 고추모양 있는데 까지는 나무다리라서 나도 걸어가보았으나, 국내 최장(정말??)이라는 출렁다리엔 발도 올리지 않았다. 왜 괜히 사서 고생을 하겠나...  무섭다면서도 롤러코스터 타고 왁왁 소리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유형이다. 정말 무서우면 소리도 안나오는데... 흥. 사진 같이 구색 맞추느라 옆에 올린 건 밥집 옆에 있던 장승공원.

 

 

원래 옛날부터 전해지던 장승들은 어쩌고 새로 만든 장승들을(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조형물 포함;;) 세워놓았는데 이런 데도 난 싫다. 그나마 산채정식이 맛있어서 다 용서되는 느낌.. ㅎㅎ (어르신들 틈에서 허겁지겁 밥먹느라 밥상 사진 찍는 건 까먹었다. ㅎㅎ 이름이 '맛집'이라고;;)

 

인위적인 느낌 풀풀나게 줄지어 세어놓은 장승들은 어딘가 처량맞아 보였지만, 그래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유독 푸르러 보이는 신록과 산새에 눈이 다 시원해졌다.

 

 

 

점심 먹고 간 곳은 칠갑산 장곡사.

한낮인데도 비구름이 코앞까지 내려와 깊은 산중의 느낌이 났다. 나로선 이름도 처음 들어본 절인데, 꽤나 역사도 깊고(신라시대 때 처음 창건되었다고) 국보급 불상과 오래 된 보물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특이한 점은 상대웅전과 하대웅전으로 나뉘어 대웅전이 둘이나 된다는 사실.

 

역시나 설명은 건성으로 듣고 여기저기 마음대로 기웃대느라 어쩌다 대웅전이 둘이나 생겼는지 그건 모르겠다. ㅋㅋ

암튼 상대웅전의 경우 고려시대에 처음 지었고 이후 조선 말기에 고쳐지어 주춧돌 같은 건 고려시대의 것이 그대로 남아있으면서 시대별 건축양식이 뒤섞여 있다는 것 같다. 자연석을 특별히 많이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덤벙주초'라고 하는데, 내가 찍어온 주춧돌이 바로 고려시대 것이 아닐까싶다. ^^;

 

 

 

 

 

 

 

 

 

 

 

 

 

 

일주문 대신 오른쪽 누각 사이로 난 계단을 올라가는 독특한 구조. 누각 위엔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오래 된 북과 스님들이 탁발한 밥을 담았다는 거대한 구유가 놓여 있다.  상대웅전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절집 기와지붕도 (내 눈엔) 드물게 보는 절경이다.  

이것이 바로 밥통으로 썼다는 여물통 ^^ 코끼리 가죽 북이라니... 헐..

 

하대웅전 앞에서부터 어슬렁거리던 누런 고양이 한마리는 사람들을 꺼리지도 않더니 어느틈에 상대웅전 앞마당까지 따라왔다. 꼬리까지 높이 치켜들고 아무래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소원을 들어주었다. ;-p 

 

오른쪽 사진이 아마도 국보라는 비로자나불? 대웅전 안에선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소심한 나는 밖에서 한장 건졌는데 다른 분들  막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고 사진찍다가 스님한테 다들 엄청 혼났다. 켁;; 사진에선 잘 안보이지만 대웅전 바닥엔 연꽃문양의 '전돌'이 깔려 있다. 전돌은 기와처럼 구워서 만든 일종의 타일로, 전통적인 바닥장식재다. (근정전 바닥에도 깔려있음!) 안쪽 부분 전돌은 고려시대의 것 그대로고 바깥부분만 모조품이라는 것 같다. 확실히 현대 들어 모방한 전돌과는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어보였다. 돌 자체에서도 오랜 세월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연꽃 문양이 좀 더 오묘하고 섬세해!

 

혼날까봐 못찍어온 불상 사진은 다른 용감한 분의 작품으로 대체.. ㅋ

어린시절부터 외할머니와 엄마 따라서 절 구경을 참 많이도 다녀봤지만 이런 불상과 석조대좌는 처음 보는 듯... 신기했다.  광배라고 해서 나무판때기로 만들어 세운 후광무늬도 엄청 섬세하다.

 

옆에 있는 약사여래상도 같이 보물인가 국보랬으나 그건 사진 없음.

 

 

 

국보급 불상과 오래된 대웅전의 건축양식을 확인한 것도 좋았지만 나는 산속에 들어앉은 절 구경 자체가 좋았던 것 같다. 누구는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경치 좋은 곳은 죄다 절이 차지하고 있으니 그 또한 특혜이자 비리가 아니겠느냐고 하던데, 박해를 피해 어쩔 수 없이 절이 산속으로 숨어든 것이든 아니든 암튼 구경다니는 사람으로선 풍광 좋은 곳에 오래된 한옥들이 곳곳에 남아있어 참 좋다. 부디 자꾸만 넓혀짓고 높여짓고 으리으리하게 '현대화'하지나 말았으면...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오다보니, 한쪽에 남은 기와로 얕은 담장 쌓아놓은 것도 탐이 났다. 빗속에 더욱 싱그럽게 보이는 초록잎들...

 

 

 

 

 

뭔가 불상을 하나 더 볼 계획이었는데 공사중이라는 소식에 청양을 떠나 올라오다 아산엘 들렀다. 이름하여 평촌리 약사여래불.

멀리서 볼 땐 사진처럼 저렇게 얼굴을 약간 찡그리고 있는 듯 하더니 가까이서 보니 인상이 달라져 평온한 얼굴이었다. 옆에서 보면 납작한 돌인데 저걸 어떻게 균형맞춰 세워놓았는지 그또 한 신기... 

아마도 땅밑으로 한참 더 파묻어놓았을 것이라지만 겉보기엔 파묻힌 것 같지 않고 고임돌도 시원찮다.

 

암튼 잘은 몰라도 섬세한 옷의 주름과 빼어난 생김새가 비례에 맞춰 아름답게 표현된 석불은 최소한 고려시대 이전의 보물이라고 들었다. 조선시대엔 아무래도 불교미술의 쇠퇴기니까...

이것도 고려시대 불상이라는 듯...

고려시대 석탑과 불상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으나 그쪽만 찾아보러 다녀도 흥미롭겠단 생각이 들었다.

 

 

 

당일 답사인데도 온종일 아주 알차게 여러군데 돌아다닌 하루여서 이렇게 뒤늦게라도 줄줄이 적고보니 2박3일은 되는 것 같다. ㅎㅎㅎ

 

2013년 7월 5일 청양 & 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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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갔다 온 후기도 마저 다 써야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전주 다녀온 후기부터 마무리할 작정이다. 청양은 남이 정한 행선지엘 반강제로 따라 간 거고, 전주는 내가 가고싶어서 간 데라 확실히 만족도와 감상이 다르다. 1박2일이라지만 엄밀히 따지면 전주에 딱 24시간 머물렀던 여행은 한마디로 참 좋았다. 날씨가 너무 뜨거웠던 점만 빼고. ^^;

떠나는 날 서울 날씨는 비가 오락가락했고, 다음날부터는 전국적으로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신발이며 옷을 '우천용'으로 준비했으나 그건 나의 오판이었다. 전주 터미널에 내리니 햇빛은 쨍쨍 한낮 기온은 32도. 숨이 턱 막히고 조금 걸으면 맨살 드러난 발등이 따끔따뜸거릴 정도였으니 체감온도는 훨씬 높았을 듯. 반바지를 싸갔어야 했는데!

터미널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러 가면서 제일 먼저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바로 이것.

터미널 입구 인도에 네모난 얼음을 세워놓았다. 내가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자 지나던 아저씨 한분이 시원하게 얼음을 만지고 가야 복받는다고 한 마디 던지셨다. ㅋㅋㅋㅋ 난데없는 얼음덩이 하나로 전주의 첫인상이 정해졌다. 뭔가 소박하고 꾸밈없는 느낌?

전주 한옥마을을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는 일행을 따라간 거라 난 그저 가자는 대로 가고 먹자는 대로 먹기만 하면 되었던 이번 여행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면 대부분 내가 온갖 계획을 세우고 정보를 검색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했었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필요없으니 진짜로 놀고먹는 편안한 인생!

첫 행선지는 60년 전통의 풍년제과였다. 그 유명한 수제 초코파이와 전병을 먹어줘야 하기 때문. 안동 여행 때 맘모스 제과엘 못 가본 것이 천추의 한이었던 나는 희색이 만면했다. 네거리에서 택시를 내려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정말로 관광객들이 줄줄이 택시에서 내리거나 걸어와서 풍년제과 안으로 들어갔다.

네 종류의 전병이 있다는데 일행이 추천하는 대로 생강전병과 땅콩전병을 고르고 초코파이를 집어들어 계산대로 갔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웬만한 건 셀프란다. 종이백에 전병과 빵을 담는 것도, 계산 후 튀어나온 영수증을 집어가는 것도... 주인도 손님도 그런 걸 쿨하게 이해해주는 분위기.

풍년제과에서 한옥마을까지는 한 블록 정도. 슬슬 걸어가면 된다. 나중에 알고보니 전동  성당, 풍남문, 청연루, 경기전, 남부시장... 내가 대강이나마 가볼만한 곳으로 꼽아두었던 곳은 다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아이 좋아라. 게다가 전주는 좁아서 택시로 그 어디를 가도 만원이 넘지 않는단다. 택시도 많아서 쉬 잡히고 우리가 다닌 웬만한 데는 요금이 3-5천원 사이. 시내버스 노선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수제 초코파이와 전병을 맛볼 생각에 흐뭇해하며 일단은 한옥마을 고택에 잡아둔 숙소로 향했다. 그곳 역시 일행이 대여섯 번 이상 묵어보아 검증된 한옥. <학인당>이란 곳인데, 내 마음에도 꼭 들었다!

 

왼쪽 사진은 솟을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광경이고, 오른쪽은 별채 앞 마당에서 보이는 안채의 옆모습. 한달전에도 학인당에서 묵었던 일행은 쪽문을 들어서자마자 비명처럼 외쳤다. 아니, 잔디는 언제 깔았지? 전통적으로 잔디는 무덤에나 입히는 것이고, 한옥마당과는 좀 안어울리는 것이 사실. 게다가 '겨우' 2주전에 심었다는 잔디는 모발 이식해놓은 것마냥 좀 흉측했다. ㅠ.ㅠ 어쨌거나 나는 안채, 사랑채, 별채 한옥건물이 모두 다 예뻐서 그저 헤벌레. 

방과 화장실 모두 깔끔했고 마련되어 있는 이부자리도 정갈했다. 오른쪽 사진이 우리가 묵은 별채의 모습인데 문이 열려있는 맨 끝방에서 우리가 묵었다. 두명이 자면 딱 맞을 한칸짜리 방이다.

뙤약볕 속에서도 한옥마당엔 선들선들 바람이 일었지만 그래도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좀 쉬며 풍년제과표 전병과 초코파이를 시식했다. 전병이야 옛날부터 '센베이'라고 알고 있던 양과자 맛이라 크게 새로울 게 없었는데, 초코파이는 견과류도 씹히는 것이 정말 맛있었다. 단 거 안좋아하는데도 입가에 초콜릿 묻혀가며 순식간에 흡입했음.

다음 코스는 태조의 어진이 있다던 경기전. 입장료 천원 내고 들어가야 한다. 다른 때 같았으면 패스~ 했을 곳이었지만 궁궐 공부에 필요할 것 같아 내가 가고 싶다 했었다. ㅋ 조선의 왕 가운데 어진이 남아있는 사람은 딱 셋뿐이다. 태조, 영조, 철종. 그나마 철종은 불에 타다가 일부만 남았다지. 나머지 어진은 죄다 후대에 상상하여 그린 것들이라는데도 떡하니 '어진박물관'에 여러 왕들의 어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오로지 경기전 정전에 봉안된 태조의 어진. ^^; 드물게 푸른색 곤룡포를 입고 있다잖은가. ㅎㅎ

그밖에도 담장 안에 전주이씨 시조의 사당과 예종의 태실이 어디엔가 있다는데 거기까진 가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다던 전주사고에 올라가본 걸로 만족. (그러나 옛 건물인 줄 알았더니 현대에 복원한 것이라고.. ㅋㅋ)

 

 

 

전주사고 제기고

전주사고도 그렇고 제기 창고도 그렇고 물건을 오래 보관하려면 바람 잘 통하게 전각을 이층으로 지어야하나보다.

 

경기전을 나서는데 저 멀리 전동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너무 덥기도 하고 일요일이라 미사 중일 것 같아 다음날 가보기로 했다. 서울엔 배롱나무가 이제 조금씩 피기 시작하던데 전주엔 가는 곳마다 배롱나무 꽃이 색색깔로 만발해 정말 예뻤다.

 

 

 

 

 

 

일행이 계획한 다음 행선지는 한방체험관(우석대에서 운영하는 것 같았음) 족욕. ^^; 아토피 조카를 위하여 수제 비누도 사야한다는데(비누도 하나에 5천원, 족욕 체험료도 5천원. 족욕하는 물에 뭔지 모를 한약봉지를 하나 풀어준다) 월요일엔 문을 닫는다고. 더위에 헉헉대다 시원한 에어컨 켜진 실내에 들어가 다시 또 따뜻하게 족욕을 20분쯤 하고 나자 피로가 확 풀렸다. 초코파이도 먹은 데다 더워서 입맛이고 뭐고 다 달아났다던 말이 무색하게도 좀 쉬었다고 다시 전투적으로 저녁밥 먹을 생각이 들지 뭔가. 

아래 오른쪽은 무엇보다도 밑반찬이 맛있어서 꼭 가야한다는 '나들벌'의 동태찌개 상차림이다. 반찬 종류가 더 많은데 왼쪽으론 좀 짤렸다. 찌개가 8천원, 한정식은 만원이던데 한정식을 시켰으면 어떤 반찬이 더 나왔을지 궁금했다. 최명희 문학관 바로 뒤에 있는 식당인데, 이미 문을 닫은 최명희 문학관은 다음날 가보든지  하자고 했으나 결국 담너머로 보는 걸로 그쳤다.  

최명희 문학관 8천원짜리 동태찌개의 위용 ^^

땀흘리며 저녁밥을 배불리 먹고 나니 밤거리 구경이고 뭐고 일단 쉬고 싶은 마음 뿐. 캔맥주 하나 사들고 숙소로 향했다. 시원하게 기네스 한잔 하면서 첫날 일정 끝. ^^;

돌아다녀 본 바에 따르면 전주 한옥마을엔 고택을 숙소로 개조한 곳이 꽤 여러곳 있었고 규모도 다양했다. 나야 뭐 처음 가보는 곳이니 비교가 불가능하고, 전주 고택에선 다 아침밥을 주는지 어쩐지도 모르겠는데 학인당의 장점은 종부가 직접 아침상을 차려준다는 점이라고 했다. 8시 반쯤 행랑채를 개조한 듯한 공간으로 밥먹으러 오라고 종부께서 직접 방마다 부르러 다닌다. ㅎㅎㅎ 우리가 간 날은 세 팀밖에 없어서 단촐하고 좋았는데, 성수기에 방이 다 차면 몇 차례로 나누어 순서대로 먹어야한다고. 

솟을대문과 안마당 학인당 아침상

둘쨋날 하늘은 더욱 맑아 아침부터 공기가 뜨끈뜨끈했다. 그런데 이날 서울경기지방엔 물폭탄이 쏟아지고 있었다는;; 우리나라 땅 참 넓다니깐! ㅋㅋㅋ 오른쪽 밥상이 바로 종가집에서 받은 아침상인데, 아직 쑥된장국이 나오기 전이다. 밥 먹기 전에 사진 찍는다며 수선 떠는 거 민망하여 앉기 직전에 얼른 한장 건졌다. 전주가 고향인 후배한테 오래 전 들은 풍월을 상기해 보자면, 전주엔 조선시대부터 한양에서 낙향한 양반들이 많아 궁중음식이며 한양 반가의 음식이 많이 전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맛이나 간도 경기 음식과 비슷하게 담백하다더니만 정말 그런 듯했다. 남도쪽의 진한 맛과는 완전 다른 느낌. 깔끔하고 담백하니 내 입에도 딱이었다. 전날밤 과음이라도 해서 아침 건너뛰고 늦잠이나 자겠다고 했으면 크게 후회할 뻔;; ㅋ

슬금슬금 뙤약볕으로 나가 다시 한옥마을 구경에 나서 처음 찾아간 곳은 전동성당. 정조 때 최초로 순교자를 처형한 장소에 세워진 성당이라고. 국내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 셋 중 하나라는 것 같다. 고색창연하고 아담한 것이 명동성당보다도 예쁘고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론 남부시장의 청년몰에 가서 커피를 마실까 생각했지만 더우니까 신호등 기다려 횡단보도 건너기도 싫은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부터 적어둔 전주의 가볼 곳 중 남부시장에 있다는 <조정례 남문 피순대> 역시 이번엔 경험할 수 없었다. 파트너가 순대국을 못먹는 사람이라... <전주 왱이 콩나물국밥>도 먹어보고 싶었으나, 역시나 일행이 콩나물국밥을 싫어했다. 술을 전혀 못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술국으로 유명한 음식과는 친할 수 없나보다는 것이 요번에 깨달은 나의 가설. ^^;  

풍남문 청연루

<호남제일도성>이라는 편액도 함께 걸려있는 풍남문은 동대문처럼 뒤쪽에(앞쪽인가?) 궁장이 남아있고 주변이 로터리였는데, 문 바로 코앞까지 사람들이 주차를 해놓았다. 그래서 어디서 찍어도 자동차 없이 문만 사진에 담기가 어려웠음. 오른쪽 청연루는 대로변 다리 위에 뜬금없이 서 있는 누각인데, 한시간 정도 걷고 이미 지쳐서 가까이 가보지도 않았다. 저렇게 긴 누각이 어디 또 있을까 싶다.

먹거리 목록에 있던 <외할머니 솜씨 흑임자 팥빙수>도 요번엔 못 먹었다. 뙤약볕에 줄 서서 기다렸다 먹을 만큼 내가 빙

사랑나무 카페

수를 좋아하지 않으니 뭐;; 대신 그 건너편에 있는 한옥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셨는데... 우와 정말 맛있었다. 한옥마을 곳곳에 커피를 직접 볶는 커피집이 보였고, 깨끗하게 정비된 길가쪽 한옥들은 대부분 상점이나 음식점, 카페였다. 삼청동과 북촌을 평지에 뒤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이름은 같은 한옥마을이라도 안동 하회마을은 한옥집들의 규모가 대부분 다 크고 안채를 제외한 공간은 거의 관람객들에게 공개해 놓았지만(입장료를 받으니 그렇겠지;;), 전주 한옥마을은 집들이 대개 다 규모가 작은 편이고 길가 영업장을 제외하곤 숙박용 고택들도 죄다 꽁꽁 대문을 닫아놓았다. 사유지이니 고택체험 하러 온 사람들에게만 개방한다는 문구가 대문마다 걸려 있음. 뒷골목엔 정말로 그냥 다 오래 된 살림집들이었고, 군데군데 한옥을 개조하는 공사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린시절 한강변에 있던 외할머니댁 동네에서도 본 적 있는 근대 한옥들이 여전히 그대로 명맥을 잇고 있고, 두 사람이 지나가면 어깨를 부딪힐 것 같은 좁은 골목도 많았다.

왼쪽 사진은 숙소였던 학인당 옆쪽에 있는 한약방인데 원래 아흔아홉칸으로 지은 학인당에 속했던 것을 가세가 기울며 떼어 판 집이란다. 전주 시내를 돌아보며 느낀 건 곳곳에 한의원과 한약재상이 참 많다는 사실. 좀 과장하면 남부시장 근처엔 세집 거너 하나꼴로 한의원이 있었다. ^^

전주 한옥마을을 한눈에 조망하려면 오목대엘 올라가는 것이 상책. 일행이 계단 엄청 많다고 경고해서 올라갈 생각이 없었는데 전주향교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코앞에 오목대가 있었다. 사실 그리 높지도 않음. ^^ 

이것이 바로 오목대

이성계의 할아버지가 살던 집터에 누각을 지었다는 것 같다. (더워서 안내판을 읽어도 머리에 안 들어가는 단계;; ㅎㅎ)

암튼 이곳에서 한옥마을 곳곳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길이 대여섯 군데나 사방으로 뚫려있었다.

<선비의 길>을 걸어보라며 유명한 고택 위주로 탐방로를 표시한 지도를 들고 다녔으나, 유명한 고택은 죄다 겉에서 담장 너머로 구경하는 수밖에 없어서 뭔가 야박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라도 살림집에 아무나 드나드는 건 싫겠지...

우리 숙소도 솟을대문은 항상 굳게 잠겨있고, 드나드는 건 한사람이 겨우 통행할만한 크기로 난 쪽문으로 해야했다. 집앞에서 전화를 걸면 대문을 다 열어주는지도 모르겠으나, 암튼 그집에 익숙한 일행 덕분에 우리는 밖에서도 손가락이나 접은 종이를 틈새에 넣어 쪽문 가로쇠를 돌려 드나들었다. 나름 재미있는 경험.

학인당 쪽문

 

12시쯤 체크아웃을 해야했으므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싸들고 아쉬운 별당아씨 놀이를 마감했다.

집안이 하도 고요하여, 여긴 잘 가라는 인사도 안하나보다고 종알거렸더니 그 말을 들었는지 금세 안주인이 나오셔서 배웅을 했다. 에고 민망하여라.

이번에도 우산은 싸들고 갔으되, 툇마루에 앉아 한옥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구경은 하지 못했다. 장마철에도 장마전선이 나를 배신하다니... ㅋ

학인당 쪽문을 나와 다시한번 담벼락을 돌아보며 눈도장을 찍고는 풍남문으로 향했다. 풍년제과 초코파이도 유명하지만, 일행 말로는 풍남문 근처에 있는 <원제과>의 초코파이가 더 쫄깃하고 맛있으며 바나나빵이 일미라고. (그러나 막상 먹어보니 내 입에는 풍년제과표 초코파이가 더 맛있다고 느껴졌고, 바나나우유 맛--우어 난 바나나우유 못먹는데--이라는 바나나모양 카스테라는 아예 사고싶지가 않았;;다 ㅋ)

풍남문을 향해 길을 건너자 또 다시 나타난 얼음덩어리. ㅋㅋㅋ 전주에선 구청별로 곳곳에 얼음 갖다 놓는 게 유행인가보다. 좀 귀여운 발상인듯;;

학인당 담벼락 저 멀리 풍남문

전주에서 마지막으로 돌아보기로 한 곳은 덕진공원이었다. 원래는 예정에 없던 코스인데, 전날 택시에서 덕진공원에 연꽃이 한창이며(사실 여부는 몰라도 국내 최대 규모라고 기사님 자랑하심;;) 방금 울산에서 일부러 연꽃 보러 오신 어느 할머니를 내려드리고 오는 길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연못이라니까 향원정이나 경회루 정도의 규모를 상상했다가 완전 깜짝 놀랐다. 꽤 큰 호수의 절반 가득 연꽃이 끝도없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많은 연꽃과 연잎을 본 건 내 평생 처음이었다. 우왕;;;  

그러나 난점은 호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일종의 현수교를 건너야 했다는 것. 멋모르고 따라들어가긴 했는데 ㅠ.ㅠ 철판으로 된 바닥이 약간 꿀렁거리는 것이 느껴지면서 난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중간중간 시멘트 기둥이 나올 때마다 숨을 몰아쉬었다가 다시 종종걸음으로 직진... 어찌나 긴지 나중에는 토하기 직전이었다. 흑... 일행은 엉거주춤 징징대며 다리를 건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며 낄낄대고... 나도 내 꼬라지가 우스운 건 알겠는데 무서운 걸 어쩌라고... 흑..

나중에 알고보니  정자와 연결된 튼튼한 나무다리도 있는데 왜 굳이 그 위험한 다리를 건넜는지 (내가 고소공포증 있는 걸 일행이 모른 건 아니었으나, 그 정도인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원. 하지만 어디에서도 그 드넓은 연꽃밭을 한번에 담아낼 순 없음이 아쉬웠다. 현수교 중간에선 찍을 수 있었으려나? ㅎㅎ

정자에서 보면 저 멀리 내가 징징 울며 건넌 현수교가 보인다. 정말 길지 않은가? ㅋ

덕진공원을 끝으로 2시반 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고속버스를 타려면 늘 강남이나 남부터미널로 가야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요번에 화정 터미널에서 타고 가보니 엄청 더 편리하다. 우리집에서도 전철로 불과 30분 거리. 앞으로도 강북 주민 친구들과는 애용해볼 작정이다. 안동 다녀와서도 그랬지만 전주에도 조만간 또 가고 싶다. 대구못지 않게 덥다는 여름보다는 가을쯤이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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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경복궁

놀잇감 2013. 7. 12. 17:34

유홍준 교수가  부제를 '인생도처유상수'로 붙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권에서 그랬다. 경복궁 근정전은 비 많이 내리는 날 가보아야 그 진가를 감상할 수가 있다고. 그래서 내심 장마기간 동안 기대하고 있다가 꽤나 비가 철철 내리는 날 어디 진짜 그런가 살펴보았다.

흥례문 행각, 근정문 앞마당 구석에서 찍은 사진이다. 뒷배경의 북악산에 드리워진 비구름과 어우러진 모습이 꽤나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가 궁금했던 건 정말로 근정전 앞 조정바닥에 깔린 박석 사이로 물길이 휘휘 돌아 흘러 배수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하는 점! ^^; ㅋㅋㅋ 배수구로 연신 물이 빠져나가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낮아진 박석 주변엔 어쩔 수 없는 물웅덩이가 보여, '개뻥 아냐!'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____^ 내가 조정에 얕게나마 물웅덩이 있다고 투덜대니까, 저 정도면 물 고인 거 아니라고... 집중호우 쏟아져도 강남사거리처럼 물바다로 변하진 않는다고...

째뜬 장화신고 가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만큼 궁궐 마당엔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생겨났다는 것이 현실이다.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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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궁궐 중에서 그간 내가 경복궁을 그닥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유는 일단 워낙 넓어서 어수선하고 죄다 복원해놓아 '옛맛'이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광화문부터 삐까번쩍 새것이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복원한 흥례문과 영제교 일대도 죄다 새것이고, 웬만한 행각들도, 단청 안했다는 이유로 그나마 좋아라하는 건청궁도 복원한지 10년도 안 됐다. 일제시대 훼손을 피해 그나마 남아있던 몇 안되는 건물들 역시 다들 알다시피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기에, 조선 건국 후 처음 지어진 으뜸궁궐이라고는 하나 내가 느끼는 경복궁의 위상은 그리 높지가 않다. 

 

임진왜란 때 홀라당 타버린 여러 궁궐 가운데 광해군 때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중건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어차피 궁궐도 임금이 사는 집이니 나라도 좀 더 아기자기하게 사는 맛이 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창덕궁을 택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 사견일 뿐, 조선왕조가 경복궁을 다시 짓고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란다. 첫째, 전쟁으로 파탄 난 경제사정 상 드넓은 경복궁 전각을 복원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창덕궁 복원에 돈이 덜 든다는 신료들의 입김. 둘째,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풍수가들의 주장. 셋째, 가뜩이나 왕권의 입지가 불안했던 광해군의 얇은 귀? ^^) 어쨌거나 창덕궁, 창경궁엔 3-4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전각들이 더러 있는 반면, 경복궁엔 국보로 지정된 근정전, 경회루 정도만이 15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임란이후 경복궁보다 더 오래 '법궁'의 지위를 누렸던 창덕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도 되었겠다) 더더욱 조선 최고의 궁궐이라는 자부심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경복궁 계신 분들은 파르르... 떨며 인정 안하는 분위기. 경복궁이야말로 고대 예법에 맞춰 지어진 조선 최초의 궁궐이라니깐! ㅋㅋ)

 

내눈에도 경복궁은 돌아다니기에 너무 넓고 아직도 복원이 한참 덜됐다고는 하나 구석구석 어딘가 휑하고 정신이 없다. 물론 그 이유의 절반은 항상 지나치게 많은 관람객들 때문이다. ㅠ.ㅠ  창덕궁 역시 단체 외국인 관광객이 많긴 하지만 대규모 수학여행단은 좀처럼 볼 수가 없는데, 어휴.. 경복궁엔 항상 어딜 가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요즘은 특히나 수학여행과 현장학습 철인지 와글와글 시끄럽고 요란한 학생단체가 정말 많이 몰려다닌다. 초중고생은 입장료가 무료라서 더 그렇다는데, 하긴 나 중고등학생 때도 백일장, 사생대회는 늘 경복궁에서 했었다. 흙먼지 피우며 뛰어다닌다고 그때도 주변 어른들한테 핀잔듣고 그랬으니 참 세상은 변함없이 돌고도는 듯.

 

암튼 150년도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암만해도 경복궁은 창덕궁이나 창경궁만큼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덕수궁 석어당도 월산대군 사저일 때부터 선조가 임시 거처로 쓰던 그대로인 줄 알았건만, 화재로 1904년에 다시 지어졌음을 알고나서는 예전만큼 애정이 가질 않는다 ㅠ.ㅠ)는 딜레마에 빠져있던 차(?)에 엄청 오래된 물건을 경복궁에서 발견했다. 전각은 아니지만, 돌로 된 것이라 무려 태종때부터 그대로 내려온 것이라니 오호 놀라워라.

 

그것은 바로 영제교 양옆 석축에서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록'들이다. ^^

원래 네 마리인데 사진을 셋밖에 안찍었다. 오른쪽 앞에 있는 나머지 한 마리는 등에 구멍이 뚫려있는 걸 다시 메워놓은 문제의 서수인데, 그 앞쪽으론 늘 사람들이 바글거려서...

어쨌거나 얘네들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느라 이 근방을 헐어버렸을 때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다가 복원하면서 다시 제자리를 찾은 거란다. 이 천록상에 대해서는 영조 때 유득공이 서울을 유람하고 쓴 <춘성유기>에도 적혀 있단다. 이상하게도 당시 영제교 천록은 세 마리 뿐(동쪽에 두마리, 서쪽에 한 마리)이었고, 남별궁 뒤뜰에서 등이 뚫린 천록 한 마리를 본 적 있다며 필시 다리 서쪽에 있던 한 마리가 옮겨진 것이라고 유득공은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이 남별궁 뒤뜰의 천록도 고종 때 경복궁 중건하며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다는데...

 

여기서 다시 아쉬운 점이 발생한다.

요번에 광화문 일대 복원과 함께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던 천록들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옛 기록대로 등 뚫린 천록을 서쪽에 놓았어야 하지 않은가?!? -_-;;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등 뚫린 천록은 떡하니 다리의 동쪽 앞, 경복궁 안내팻말을 등지고 놓여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내면서 경복궁을 맨 앞에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었던데, '메롱'하는 천록(가운데 사진!)의 해학 찬양하는 내용은 있어도, 왜 등 뚫린 천록자리를 옛 기록과 달리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뜨르르 하는 학자들이 죄다 복원에 참여했을 텐데, 유득공의 기록을 무시할만한 다른 근거가 있었을까? 몹시 궁금타.

 

저 천록들 말고도 경복궁에서 내가 다른 궁궐보다 더 예스럽다고 느낀 부분 역시 '돌'인데, 엄밀히 이건 150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어느 궁궐보다도 '오리지널'이다. ^^; 그것은 바로 근정전 앞 조정의 박석. 다른 궁궐 조정의 박석들은 일제가 잔디로 바꿔놓았던 것을 현대 들어 복원하며 기계로 다듬어 깔아놓은 것인 반면, 근정전 마당 박석은 고종 때의 것. 깨진 박석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 박석 역시 고종 때 박석을 캐온 강화도 채석장에서 날라온 것이라 확실히 다른 궁궐 박석과는 느낌이 다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와처럼 구운 매끈한 전돌을 깔 수도 있었겠지만(근정전 바닥은 바로 그런 전돌이 깔려있다), 조정 마당에 굳이 울퉁불퉁한 박석을 그대로 깔아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단다. 현장학습 온 학생들에게도 선생님들이 종종 그 이유를 알아오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 녀석들 머리 쓸 생각은 안하고 대뜸 해설사분들에게 달려와 묻곤 한다. 흥! 그러나 쉽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ㅎㅎ

 

첫째는 미끄럼 방지. 옛날 가죽신엔 고무창이 달려있을리 만무하니, 매끈한 전돌이 깔려있었다면 비오는 날 뇌진탕으로 쓰러지는 사람들 여럿이었을 거다. 마른 날에도 미끄럽긴 마찬가지였을 테고...

둘째는 눈부심 방지. 울퉁불퉁한 박석 표면이 햇빛을 난반사하여 눈부심도 방지하고 근정전 안까지도 조명효과를 낸단다.

셋째는 배수량 조절. 워낙에도 근정전 앞 마당의 기울기가 상당하여 배수에 신경을 썼지만, 흐르는 물줄기가 박석 사이사이로 한번 더 휘휘 돌아 천천히 배수구로 모여들게 하는 이치다. 

넷째는 경거망동 방지. 임금 앞이기도 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으니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다섯째는 지열 분산. 예전엔 박석 사이 간격이 훨씬 더 넓었고 자연히 사이사이에 풀도 많이 났단다. 한여름 뙤약볕에 달궈진 돌 대신 풀을 밟고 서면 지열을 피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지만 현재 근정전 마당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그러나 풀 자란 곳이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구석쪽에나 간신히 풀이 자란 걸 볼 수 있는데, 설명 듣기 전까지 난 박석 사이에 잡초 자란 게 오히려 관리소홀인 줄 알았었다. ㅎㅎㅎ  그런 게 미안해서 친히 풀 자란 부분의 박석도 찍어왔음.

 

왼쪽 윗부분 공백은 아무래도 내 손가락인갑다 -_-;

 

한번에 무려 세 시간씩 경복궁에 대해서 다시 심화교육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도 편전까지밖에 못 들어갔다. 하기야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했던 첫 수업에선 세 시간 강의를 들었는데도 근정문엘 들어가지 못했으니 오죽하랴. 알아야 할 것은 많고 두뇌는 한계가 있는데, 복작거리는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싫고 생활한복이든 전통한복이든 복장강요하는 것도 싫으니 고민은 계속되는 중. 일단은 배우는 데까지만 배워보는 걸로! 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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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 좋아서

삶꾸러미 2013. 3. 25. 18:00

혹시 나처럼 궁궐이, 또는 한옥이 좋아서 궁궐 전각 청소라도 하면서 가까이서 보고 싶어한다거나 궁궐 한옥과 관련된 공부에 마음이 동하는 사람이 어쩌면 또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요번에 내 경우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일을 저지르고 났더니만 공부할 땐 좋았는데, 이젠 뭔가 막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좀 당황스럽다. 원래 원했던 것이 이거였나 싶기도 하고, 궁극적인 목표(일반 관람객에게 공개되지 않는 궁궐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를 달성할 때까지 일단 참으며 계속 따라가보아야 하는 것인가 아닌가 줄곧 의문이 든다.

 

내가 멍청해서 그렇지, 요즘 사람들이야 검색 능력이 워낙 뛰어나므로 마음만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잘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겪어보니 단체와 경로도 워낙 많아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는 뭐가 뭔지 아리송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제야 좀 알게 된 문화재 관련 민간활동의 차이와 접근법을 좀 적어놓을까 한다.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면 다행이고,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 뭔가 또 다른 방법을 찾아볼 때 한 쾌에 필요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속셈도 있다. 

 

하여간에 궁궐이나 문화재, 박물관에 관심이 있고 그것과 관련된 교육을 받거나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찾아가보아야 할 곳은 문화재청(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홈페이지다. 궁궐과 한옥, 기타 문화재, 유적지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망라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연계된  NGO와 재단에 대한 링크와 소개도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 관련 자원봉사 공지는 대부분 문화재청 게시판에도 동시에 올라온다. 종종 무료 인문강좌 안내도 올라와서 나는 그걸 노리고 들락거리다 그만 궁궐을 '지키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받는 교육을 알게 되었다. ^^

 

처음 내가 알고 있던 단체는 아름지기(http://www.arumjigi.org/). 

창덕궁이 워낙 내가 좋아하던 궁궐이라 거길 청소하려면 아름지기 자원봉사 회원이 되는 수밖에 없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회원을 연중내내 모집하는 게 아닌데다 대체 언제 모집하는지 통 잘 모르겠고(알아보면 늘 모집 끝났다고 나왔다. 흥!) 연회비(12만원)도 내야한대서 일단 마음을 접었었다. 처음에 어느 대기업이 세운 재단이라는데 내가 별로 안좋게 보는 대기업이란 것도 마이너스 요인.

하지만 현재는 후원기업의 목록이 상당히 많고 문화재 주변 환경정리사업 뿐만 아니라 한옥 보급, 한옥 운영 같은 것도 함께 한다.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함양한옥이 바로 아름지기가 운영하는 곳이다. 아무래도 '재단'이다보니 영리사업도 하는 게 아닐까. 회원이 되면 함양한옥 숙박비도 약간 할인된다는 것 같다. 헌데 여기선 문화재나 역사 관련 교육도 매번 돈을 내고(1만원 정도) 신청해서 들어야 한다. 그나마도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일반인 상대 교육을 요샌 거의 안하는 것 같다. 요즘 질 좋은 무료강좌가 얼마나 많은데 돈까지 내가며 듣겠나. ㅎㅎ

 

알고보니 자원봉사를 청소수준에서만 그치고 싶었다면 내가 찾아갔어야 하는 단체는 따로 있었다. 바로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한문화재 한지킴이'(http://jikimi.cha.go.kr/community_new/newCafeMainList.action)

주요 문화재를 하나씩 기업체 하나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개인이나 가족 지킴이 신청도 받는다. 문제가 있다면 관심 있는 문화재를 딱 한 군데 지정해서 활동해야한다는 점(하기야 궁궐해설사가 된다해도, 궁을 한군데만 정해서 해야한다. 몇년쯤 경력이 쌓인 다음에 소속을 바꿀 수야 있겠지만;;). 게다가 문화재 지킴이를 신청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일정한 심사를 거쳐서 통보를 해준다고 한다. 창덕궁 같은데는 바로 옆에 있는 현대에서 맡아서 지킴이 봉사한다고 들었는데 개인이 신청한다고 창덕궁 청소활동에 붙여주기나 할지 그건 미지수다(그러고 보니 창덕궁 도배랑 청소 같은 건 아름지기 전담이라던데, 어떻게 활동영역을 나눴는지는 알수 없다). 하여간에 이 제도는 자기가 사는 곳 주변의 문화재나 유적지를 아끼고 보호하는 활동을 권장하기 위함이란다. 정부 주도의 커뮤니티 활동이므로 유료회원제도는 아닌 것 같다만 끝까지 가입해보질 않아 확실하지 않다. ^^; 내가 궁궐 전각 청소를 빌미로 문화재에 좀 들어가볼 작정으로 공부 시작했다니깐, 다들 그럼 한문화재 한지킴이를 했어야 했다고 조언해주었다. 쩝;;

 

다음으로는 '우리궁궐지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http://www.rekor.or.kr/)이 있다. 4대궁궐과 종묘에서 해설 자원봉사를 주 활동으로 하고, <우리문화사랑방>이라고 해서 한달에 한번(매월 셋째주 토요일 3시-5시) 일반인 대상으로 무료 인문강좌도 여는 단체다. 이곳에서 두어달 간 소정의 교육을 받고(교육비 15만원) 6개월 수습활동까지 거치면 궁궐 해설사 자원봉사를 하게 된다. 한달에 만원씩 회비도 내면서... (아름지기 연회비가 12만원인 걸로 보아 유사 단체들 모두 그게 적정 회비 수준이라고 정했나보다. 혹시 이것도 담합? ㅋㅋㅋ) 궁궐과 종묘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 담당 요일은 금요일과 토요일. 지원자격은 18세-65세 사이,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연말에 있는 듯. 정식으로 궁궐해설사가 되어 자원봉사를 하게 되면, '한복'이나 최소한 '생활한복'을 입고 활동해야 한단다. 궁궐을 안내하는 자원봉사자에 대한 문화재청의 요구사항이라고. (헌데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경복궁의 경우 문화재청 소속일 듯한 해설사 직원들은 한복을 입지 않는다! 가만보니 검은색 코트를 유니폼으로 입는다. 창덕궁 해설사들은 다 한복을 입던데, 왜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유무의 차이일까? 암튼... 유료 해설사들은 한복 안입고 설명하는데 자원봉사자들은 반드시 한복을 입으라고 요구하는 것도 웃긴다! 흥)  

 

궁궐지킴이의 종류는 또 있었으니, '궁궐길라잡이(http://www.palaceguide.or.kr/)'라고 원래 한국청년연합(KYC)에서 운영하던 NGO인데 따로 독립했다는 것 같다. 암튼 여기도 똑같이 15만원의 교육비를 낸 뒤 총 8개월간 이론교육과 실습교육을 마친 다음에 무료 궁궐해설사로 활동한다. 활동 요일은 일요일. KYC에서 시작한 터라 궁궐지킴이보다 상대적으로 궁궐길라잡이의 연령대가 낮다고 들었다. ^^; 그러나 교육생 지원자격은 '성인'으로만 되어 65세로 제한이 있었던 한국의 재발견보다 오히려 더 탄력적이다. 교육생 모집은 해마다 같은 시기가 아닌듯, 올해는 2, 3월에 모집 공고가 났고 최근 60명을 선발했다. 여기도 교육 마치고 해설사로 활동하려면 회비를 내야하는데 학생 5천원, 성인 만원. (오, 학생한테 유리하군! 그러나 방학도 아닌데 어찌 교육을 받으라고 쯧쯧쯧;;). 여기도 정식 궁궐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할 때는 생활한복을 입어야 한다. 궁궐지킴이들은 각자 취향에 맞는 한복과 생활한복을 입는 반면, 궁궐길라잡이들은 생활한복 유니폼이 정해져 있는 듯하다. (결정적으로 내 눈엔 심히 안 예쁘다. 내가 변형한복을 마뜩찮게 여기기 때문일 수도;;)

 

뿐만 아니라 궁궐문화원(http://gungstory.com/common/main.asp)도 있다. 여긴 어린이와 청소년 궁궐학교와 체험학습을 좀 더 세밀하게 운영하고 있는 듯, 청소년 궁궐기자단 같은 것도 모집한다. 궁궐에서 자원봉사할 문화해설사를 교육하고 훈련하는 역할은 위 단체들과 똑같다. 창경궁 내에 궁궐문화원이 있다고 하는데, 교육받는 공간이나 사무실 같은 것들이 대체 어디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사회적 기업이라서 무려 궁안에 사무실을 차리게 해준 건가? ^^

어쨌거나 여기도 지난달엔가 궁궐 해설 자원봉사자 교육생을 모집했다. 00명이라고 공고가 났던데, 신청인원이 적었는지 최종 선발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다. 똑같이 10주 정도 기본교육을 받은 뒤 6개월 현장 수습기간을 거쳐, 궁궐해설사로 활동하는데, 종묘를 제외한 4대 궁궐에서 매주 목요일에 자원봉사를 하게 된단다. 역시나 지정 복장을 해야한다는 걸 보니, 자원봉사 활동시에는 한복을 입어야하는 모양이다(맞다, 문화재청의 권고사항이랬지;; ㅋ). 자원봉사 이외에도 여기는 '문화유산 체험학습지도사', '궁궐숲해설사' 같은 자격증을 따기 위한 전문가 양성과정도 있고, 관련 자격증도 발급하는 모양이다. 자원봉사가 아니라 나중에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쪽으로 접근해야 할 듯.

 

그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서울민속박물관, 서울자연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과천현대미술관... 기타등등 온갖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도 자원봉사 해설사를 모집하고 있으며, 간간이 유무료 인문강좌를 연다. 왕릉에 대한 수업도 있고, 기획전시 일정에 따라 특정 시기의 유물에 대한 강좌도 있다. 시간과 에너지만 허락된다면 찾아다니면서 들어볼만한 인문강좌가 참 많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각종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인문강좌도 많고, 아예 문화해설사 과정도 따로 있더라. 인문학이 외면을 받고 죽어간다고 한쪽에선 난리지만(흔한 말로 "요즘 인문학을 공부하면 하버드 학위가 있어도 취직이 안돼!"라고들 한다.) 현실에선 분명 인문강좌에 대한 수요가 꽤 많다는 얘기다. 이 또한 내겐 좀 의아하고 신기했다. ^^

 

나로선, 아니, 내 돈 내고 생고생하는 자원봉사를 빡세게 교육까지 받아가면서 대체 왜??? 라는 의문이 먼저 들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참 이타적인 삶을 추구하나보다. 타인을 위한 봉사가 곧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어쩐지, 나는 아직 그런 숭고한 이념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라 기묘하기만 한데 눈 씻고 찾아보면 자신의 흥미에 맞게 찾아할 '봉사할' 일은 널려있는 듯하다. 정부와 지자체가 해야할 일을 시민에게만 떠맡기는 건 아닌가 나 같은 삐딱이는 좀 의심스럽지만 뭐 다들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데 어떡하겠나. 너도나도 재능기부가 유행인 것을. 나처럼 깊은 생각 없이 기웃대는 사람은 오래 버텨내지 못할 것임을 잘 알지만 암튼 당분간은 재미난 구경 다니는 셈치고 지켜볼 작정이니 앞날이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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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놀잇감 2013. 3. 21. 00:33

탑골 공원의 노인들이 대거 종묘 앞 공원으로 몰려들면서 종묘는 내게 더더욱 매력없는 곳으로 자리잡았던 것 같다. 파르테논 신전 기둥들만 위대하다 구경다닐 게 아니라고, 조선 왕들의 사당인 종묘 역시 신전으로서의 위엄과 품격을 갖춘 곳이라고 책에서 읽긴 했어도 내심으론 좀 미심쩍었다. 지나치게 길쭉하기만 한 종묘 건물들 역시 아름다운 한옥에 속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궁궐들과 달리 종묘에 대해선 그렇게 좀 삐딱한 생각이 있었는데, 이론수업에 이어 답사를 가보고는 의외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아 설명에 쏙 빠져들었다. 종묘제례 순서와 음악과 제관들의 역할과 동선, 각종 제물과 제기 놓는 위치까지 죄다 기록으로 남겨놓아, 지금까지도 그 전통을 실연할 수 있게 해놓다니, 비록 망하긴 했어도 조선의 문화수준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종묘 정전의 모습. 신실의 수는 모두 19칸이란다. 좌우행각을 잘라도 워낙 길어 한 화면에 잡을 수가 없다.

종묘 건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답사를 다녀온 이후에도 잘 모르겠다만 ^^; 왜 그렇게 건물이 마냥 옆으로만 길어졌는지 사연을 들여다보면 결국 저 아랫동네 종가집 제사 문화와도 관련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종묘는 궁궐보다도 먼저 지어졌다.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 그리고 곡식과 땅의 신을 모시는 사직이 국가의 근간으로 궁궐보다도 더 중요했단 얘기다. 사극에서 만날 '종묘사직' 운운하는 이야기가 그 때문이란다.

 

암튼 천자국은 7묘, 제후국은 5묘가 당시 예법이고 왕실제사도 4대조만 봉사하면 되므로 신실 5칸만 만들어놓으면 되는데 왜 저렇게 자꾸만 길이가 늘어났느냐. 그건 결국 '효'를 확장하면 '충'이 되는 유교원리를 널리 지배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기 위한 일환인 것 같다. 그리고 그놈의 '정'과 '정통성에 대한 집착'? ^^; 세월이 흘러흘러 4대조 봉사에서 벗어나는 까마득한 조상 신주는 옆에 따로 마련한 영녕전으로 옮기면 그뿐인데,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인물이니 옮길 수가 없어 그냥 놔두었고, 태종도 공이 많으니 그냥 놔두었고, 세종대왕은 당연히 위대한 왕이므로 옮길 수가 없었고... '불천지주'라고 해서 옮기지 않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을 늘려짓게 된 거다. 종묘에선 서쪽이 높은 자리라서 왼쪽 신실은 그대로 두고 계속해서 오른쪽으로만...  

이성계가 추존한 4대조와 정전에서 밀려난 나머지 왕들의 신주가 있는 영녕전. 여긴 지붕높이로도 가운데 4칸이 가장 선대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공덕이 높은 선대 왕만 정전에 계속 두기로 원칙을 세웠지만, 왕이 되고 보니 자기 아버지가 '불천지주'가 되야 그야말로 '끝발'이 서는 셈이니 숙종 같은 임금은 아직 신주 옮길 순서도 되지 않은(원래 4대째 후손 왕이 신하들과 논의하여 정해야 하는데!) 아버지 신주를 후다닥 불천지주로 정해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암튼 그래서 몇칸씩 자꾸만 미리 늘려지어놓은 정전 신실이 무려 19칸에 이르게 됐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걸 다시 지은 원래 건물 부분의 기둥은 배흘림 기둥이고 후대에 증축한 부분의 기둥은 민흘림 기둥이라나 뭐라나... 예리한 눈으로는 기둥 다른 것도 구분할 수 있다는데 난 설명듣기에 바빠 그것까지 확인하진 못했다. ^^

 

하여간에 종묘를 직접 가보고서 처음 알게된 것 하나는 내가 그간 왕릉 구경다니면서도 궁궐과 똑같이 가운데가 어도이고 좌우가 문무 신하들이 다니는 길이라 착각했던, 박석 깔린 길의 용도였다! 아 글쎄, 가운데는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을 옮기는 제관)만 다닐 수 있는 신도이고 오른쪽이 왕이 다니는 길, 왼쪽이 세자가 다니는 길이었단다. 대동한 신하들은 박석에도 못 올라갔단 얘기. 심지어 종묘 정전과 영녕전 앞의 대문도 신주와 주요 제례용품만 드나들 수 있다. 왕릉 홍살문이 신성한 공간임을 가리키는 곳이란 건 전에도 알고 있었는데, 양쪽 대문도 궁궐문처럼 다 막힌 판문이 아니라 홍살문처럼 위쪽이 뚫려있었다. 왕과 제관들은 종묘 입구부터 아예 동선이 달라져서 옷 갈아입고 목욕제례 준비하는 별도의 건물로 들어갔다가 동문으로 입장한단다. 악공 같은 하급 관리들은 동문 출입도 안되고 반대편 서문으로 드나든다고.

 

그래서 답사 설명 내내 교육생과 관람객들에게 함부로 한 가운데 신도를 밟지 말라는 당부가 이어졌고, 종묘에 들어서자마자 그런 내용이 적힌 팻말도 서 있었다. 하지만 어디 사람들이 그런데 계속 신경을 쓰는가 말이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인 것을. ㅋㅋ 하여간 종묘와 왕릉의 가운데 길은 인간을 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던 제례절차와 제물의 종류는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데, 제사 지낼 때 향과 술을 왜 같이 올리는지는 확실히 알았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믿는단다. '혼비백산'이 거기에서 나온 말이라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스며드는데, 그래서 혼은 사당에 모시고 묘를 만들어 백과 시신을 함께 모시는 거란다. 제사를 지내려면 혼백을 다시 모셔와야 하니, 향을 피워 혼을 부르고 술을 부어 백을 불러올린다네! 종묘 신실 앞에는 그래서 바닥에 술을 붓는 구멍도 있다고! ^^; 일부 집안에서 제사때 '모사기'라고 하여 모래를 담은 그릇에 술을 붓는 순서가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란다. 나로선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

 

어쨌거나 재미났던 건 이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명절 증후군을 앓듯, 역대 조선의 왕들도 직접 제사를 올려야하는 날짜가 잡히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종종 병을 앓았단다(가령, 재임기간이 특히나 길었던 영조가 와병으로 제사를 친히 지내지 못해 개탄하는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종종 나온다고;;). <국조오례의> 율법에 따라 왕이 직접 가는 제사(친행)와 신하를 대신 제관으로 보내는 제사(섭행)가 구분되어 있었는데, 왕이 제사증후군 때문에 지엄한 국법을 더러 지키지 못했다는 얘기다. ㅋㅋㅋㅋ 그 옛날 왕실 제사도 그럴진대 요즘 우리들 제사야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런데도 요즘 일부 종가집에서는 까마득한 몇대 조 할아버지 제사며 시제까지 꼬박꼬박 지내고 있으니... 전통을 따진다면 수천년전 전통이 더 역사 깊고 오래 된 것이고 조선의 역사는 불과 6백년인데 뭘 그리 예법 따지고 전통 따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왕실사당에서 유교 예법에 맞춰 4대조 봉사를 하고, 심지어 불천지주를 정하여 수많은 선대왕에게 1년에도 몇번씩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영녕전으로 옮긴 왕들에 대해서는 1년에 딱 한번 한식에만 제사를 지냈다. 오 나름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놀랍게도 양반가에서도 조선 중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대부분 4대조 봉사를 하지 않았단다. 간편하게 부모님 제사만 올리는 것이 대세! 하기야 부모 돌아가시면 3년상씩이나 해야하는데, 어떻게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챙기겠나! 

 

신분 가리지 않고 고조부까지 4대 봉사를 한 건 순전히 조선후기 들어 성리학에 지나치게 얽매인 지배층의 의식변화 때문이었다. 심지어 조선중기까지는 딸, 아들 구분없이 제사와 차례를 나누어 모시거나 번갈아 모셨으며 재산분배도 동등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전체적인 나라 살림살이가 거덜난 가운데 빈부상하 할 것 없이 4대 봉사의 전통이 서서히 자리잡으면서 유산과 제사 모두 장자에게 편중되는(한 놈이라도 먹고 살게 밀어주자;; 뭐 이런 심리) 악습이 시작되고 만 거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민가의 제례가 신분의 격차에 따라 아예 정해져 있었다. 벼슬이 대부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면 됐던 거다. 그나마도 불교식이라 매장이나 화장 후 신주는 절에 모셨으므로 실제 제례는 절에 가서 제를 올렸단다. 그러니까 고려시대만 해도 집안에서 복작복작 여자들이 제사음식 장만할 이유가 없었던 거지!

 

설날을 기점으로 차례와 제사가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오면서 당연히 울 엄마를 비롯해 일부 집안 어르신들이 큰 걱정을 했다. 한 번 나간 제사가 다시 돌아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내가 이번 궁궐 수업을 들으러 다닌 건 어쩌면 우리집에 그런 일이 있을 걸 미리 안 미지의 힘이 나를 조종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스운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수업때 듣고 책에서 읽은 '옛날 법도'와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어르신들의 우려를 쉽사리 잠재울 수 있었다. 성리학의 대표적 인물인 이황, 이이 때만 해도 딸이랑 아들이랑 번갈아가며 부모 제사 올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데 뭘요! 딸과 사위가 혼례 후 계속 친정에 눌러 살면서 친정집안 제사를 도맡는 경우도 많았단다. 당시 논의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건 현모양처의 화신 신사임당 드립! 오죽헌은 다들 알다시피 신사임당의 친정집, 율곡 이이의 외가다. 그리고 신사임당은 출가 후에도 오죽헌에서 무려 18년을 살았단다. +_+ 친정 집안에 아들이 없기는 했지만, 남편과의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지만 정말 '현모양처' 치고는 대단한 뚝심 아닌가? ㅋㅋㅋ (그 옛날에 신사임당이 18년간 강릉 친정 살면서 시댁 올라가서 제사 지냈겠느냐는 나의 질문에 팔순 큰고모는 대답을 못하셨다 ^^v)

 

현재까지 남아있는 한옥 고택의 사연을 읽다보면 놀랄 때가 많다. 주로 양반 아무개가 장가를 들어 처가집 근처에 새로 지은 집인 경우가 왜 그리 잦은지! 그 옛날엔 영아사망률이 워낙 높다보니 남자가 여자네 집으로 장가를 들러가면 집을 새로 짓든 말든 암튼 친정에서 최소한 3년쯤 첫 아이를 낳아서 무사히 돌잔치를 할 때까지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단다. 친정엄마한테 육아 맡기느라고 친정 근처에 집 얻는 요즘 세태와 다른 게 무언가!

 

종묘 이야기하다가 흥분해서 딴소리로 끝나고야 말았지만 하여간에 왕이든 평민이든 제사는 참 부담스러운 행사였다는

점이 이날의 교훈이었다. 그래서 진창에 발이 푹푹 빠지고 돌아다면서도 경쾌하고 기분좋게 답사를 마치고 돌아설 수 있었던 듯. 그날은 겨울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예뻤다. 

 

그러고 보니 밀린 답사후기도 이걸로 끝이다. 이때만해도 사방에 쌓인 눈이 수북했는데, 꽃샘추위라 내일은 날씨가 다시 영하로 내려간다고 하지만 햇살과 꽃눈을 보면 확실히 봄이 오고 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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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쪽으로 나가 놀일이 그간 통 없었다가 간만에 어제 혜화동을 누볐다. 맛있는 커피집을 소개받기로 했던 게 지난 여름부터였는데 벼르고 벼르다 두 계절이나 지난 뒤에 드디어 성공. 향기롭고 맛있는 반나절을 보낸 행복감에 쓰다 만 밀린 포스팅들 죄다 제쳐두고 그 자랑부터 해볼란다. 요즘은 다들 입맛이 까다로워서 카페마다 커피는 웬만하면 다 맛있는 편이지만 간만에 원두까지 장만하고픈 집을 만난 게 어찌나 반가운지.  

 

위치는 번화한 대학로 쪽이 아니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주유소 옆 도로로 좀 올라가다 왼편 골목 안에 있다. 이렇게 써놓으면 누가 찾아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흥미가 있다면야 방법은 있겠지. 원래 나는 그렇게 친절한 맛집 안내 블로거가 아니라 항상 먹고 논 거 슬쩍 자랑 수다에 치중하는 사람. ㅋㅋ

 

 

오래된 좁은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집이란 것도 나에겐 무조건 가산점! 혜화동에도 가만 보면 아직 한옥들이 점점이 박혀있긴 하지만 대부분 폐허에 가깝던데 반갑기도 하여라...

 

<Lim's Coffee>라는 곳인데 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기만 해도 고소하고 향기로운 커피 냄새가 풍겨와 황홀했다. 직접 볶은 원두도 팔지만 로스팅 교육도 하고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요즘은 일하기 싫은병에 이어 '뭐든 배우고픈 병'에 걸렸는지 순간적으로 로스팅 교육 받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_-;) 자체 개발해서 이름 붙인 커피와 직접 블렌딩한 커피도 여러종류인 듯했다.

 

어제는 '케냐투샤'라는 커피를 추천해주어서 드립으로 마셨다. 드립 커피 가격은 6천원 정도였던 듯. 드립커피야 어디나 좀 비싸지만, 여긴 원하면 다른 종류로 커피를 얼마든지 무료 리필해 마실 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든다. 시간만 늦지 않았으면 나도 세잔까지 마실 욕심을 부렸겠지만... '만델링'을 두번째로 마시고 참았다. 진하게 볶은 커피를 선호하는 편이라 요새 집에서도 케냐AA를 마시고 있는데, 이집 커피는 특히나 진하면서도 고소한 맛과 향을 높이는 로스팅 비법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만델링 원두를 사와서 오늘 내가 어설픈 솜씨로 드리퍼에 내려 마셨는데, 오오 어제 전문가 솜씨보단 못해도 맛있게 내려졌다. ^_______^  좀 전엔 모카포트로 에스프레소 추출해서도 다시 마셔보고 간만에 카페놀이에 흠뻑 빠졌음.

 

게다가 드립커피 담아주는 커피잔도 예뻐! ^^; 손님마다 커피잔을 달리 주는데 처음 마신 커피잔은 연분홍색이라 사진이 잘 안나왔다. 음식 앞에두고 여러컷 사진질하는 건 민망해서 달랑 한장 찍고 얼른 먹고 마시는데 집중하는 편이라 처음 마신 커피잔 사진은 못 올리는 것이 아쉽다. 아래 두 사진은 두번째로 리필해달라고 해서 등장한 '스프링 왈츠'와 만델링. 자체 블렌딩해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뽑아주는 커피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강하게 볶은 '하드락'이란 것도 있다고. 담에 가선 그걸 마셔봐야겠다고 결심.   

머그잔 모양이야 특별할 것도 없지만, 색달랐던 건 오른손잡이의 경우 안쪽 로고가 본인말고 상대방 쪽에서 볼 수 있게 인쇄되었다는 점. 크레마로 뒤덮인 머그잔 아래로 드러난 저 로고를 본 순간 나도 마시고 싶어졌다. ㅋ 내가 마신 저 파란색 꽃무늬 커피잔은 노리다케 제품. 커피잔마다 다 브랜드 다른 걸 골라모은 듯했다. 큼지막한 머그잔에 잔뜩 담아주는 것도 좋지만, 확실히 잔받침 있는 커피잔에 우아하게 마시는 커피도 매력있다.

 

원두는 100g에 7천원 정도. 다른데와 비교해보면 저렴하다곤 할 수 없으나 신선하고 맛있는 로스팅으로 승부하려나보다 했다. 1kg을 4만원에 신청하고 일주일에 한번씩 월요일마다 4번에 나눠서 받아먹는 제도도 있다는 것 같다. 솔깃했지만 한달에 원두 1kg을 내가 다 못먹는다는 것이 문제. ㅋ

 

암튼 테이블도 몇개 안되고 아직은 비닐로 막아놓은 테라스 자리가 좀 추울 듯하지만 원목 의자와 테이블이며 천장에 드러난 서까래와 작은 화분들까지 마음에 들었다. 담에 가볼 땐 어느 케이크 전문점에서 공수해온다는 조칵 케이크도 맛있나 먹어봐야지.

 

저녁시간이 다 되어 출출해진 우리는 무얼 먹을까 또 한참을 고민했다. 눈알이 빠지게 맛집 검색을 해보다 포기한 뒤엔, 일행이 가본 적 있다는 칼국수집으로 가기로 했다. 사골칼국수집에서 아 글쎄 통통한 생선튀김을 판다네!?  

 

이름하여 <혜화 칼국수>. 위치도 혜화동로터리에서 금세였다. 이번엔 로터리에 있는 주유소 오른쪽 골목으로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수십년 역사와 포스가 한눈에 느껴지는 알루미늄 샤시문과 낡은 간판이 나타난다. 생선튀김을 먹어야 하므로 칼국수는 하나만 시키려고 우물쭈물했더니만 서빙하시는 아주머니 재빨리 생선튀김 반 짜리가 있다며 둘 다 칼국수 시켜야 양이 맞는다고 부추겼다. (이 아주머니 별도 메뉴 시키는 다른 테이블에도 악착같이 칼국수를 인원수대로 주문 받아내는 신공이 있었다. 그건 쫌 불만!) 지킴이 면접만 없었으면 반주도 하면서 안주로 먹기에 딱이겠다 싶어 내심 아쉬웠던 통통한 생선튀김의 위용은 바로 이렇다!

흰살생선의 정체는 대구일 것이라고 짐작했는데.. 아마 맞을 듯. 바삭하고 신선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원래 허름하고 유서깊은 칼국수 집에서 다른 메뉴 성공시키기가 어려운 법인데 신기했음. 생선튀김 원래 가격이 2만5천원이고, 절반은 만3천원이니 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먹어보고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칼국수는 7천원.

 

튀김기름 처리문제가 무섭기도 하고 왕비마마에겐 기피해야할 음식 1순위가 튀김이라 집에선 절대로 튀김요리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진짜 웬만한 재료는 바삭바삭 튀겨놓으면 다 맛있다는 걸 내가 왜 모를꼬. 나 역시 기름에 튀긴 음식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저질 몸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가끔 튀김 먹고싶어지면 찾아가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ㅎㅎㅎ

 

통통한 생선살의 느낌을 찍어보려 카메라를 들이대긴 했으나 초점도 잘 못맞췄다. 생선튀김을 거의 다 먹고 났을 무렵 나온 사골칼국수는 평균적인 맛이었다. 다데기 양념을 좋아하지 않아서 거의 다 덜어내고 풀어놓은 모습이 아래 사진 오른쪽. 집 근처에도 <연희칼국수>라고 오래 된 사골칼국수 집이 유명한데, 그 집에 비하면 크게 맛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특히 연희칼국수는 백김치가 인기의 비결인데, 혜화칼국수는 김치와 무채나물이 내 입맛에 좀 짰다.  

그래도 생선튀김 때문에 다 용서되는 기분! ㅋㅋㅋ 다음에도 혜화동 가면 칼국수와 생선튀김을 먼저 먹고 림스커피에 가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는 순서로 동선을 짜볼 작정이다.

 

간만의 혜화동 나들이가 즐거워, 버스 안에서 흥얼흥얼 혜화동 노래를 부르다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얼른 동물원 노래를 찾아들었다. 내 어린시절의 골목길 추억은 헤화동과 상관없지만 기분은 딱 옛친구를 옛동네에서 만나고 온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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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놀고먹고

놀잇감 2013. 3. 5. 16:46

3월 중엔 어쩔 수 없이 슬슬 일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2월엔 그야말로 참 열심히 놀고먹었다. 머릿속도 좀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기대만큼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전시는 세 개나 봤잖니. ^^; 처음엔 다 따로따로 포스팅할 작정이었으나 벌써 다 기억이 가물거려 대강 기록만 해둘 요량이다. 안 그러면 몇달 지난 뒤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릴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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