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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6.20 서도호 <집속의 집>
  8. 2011.10.31 창덕궁 한권의 책 13
  9. 2011.07.26 홍유릉 12
  10. 2010.02.20 오래될수록 튼튼 14

덕수궁 답사

놀잇감 2013. 2. 26. 17:50

포스팅거리가 너무도 많이 밀려있다보니, 길고 긴 겨울방학 끝자락에 훌쩍훌쩍 눈물 훔쳐내며 밀린 일기와 숙제 하는 아이 같은 심정이다. 방학일기야 까짓것 대충 써가거나, 아예 안 써가면 그만이지, 하며 대범하게 넘겼던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서도 나는 지난 신문더미에서 한두달 전 날씨까지 확인해가며 꼬박꼬박 밀린 일기를 쓰곤 했다. 연필 하나로 계속 연달아 쓰면 밀렸다 한꺼번에 쓴 일기임이 탄로날까봐(대체 앙큼하게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았을까??) 연필도 뭉툭한 거 진한 거 흐린 거 바꿔가며 쓰던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해간 방학숙제와 일기로도 상을 하나쯤 은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_+ 

 

아무튼... 정신없이 2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 궁궐지킴이 시험을 볼지말지도 아직 결정을 안 내렸고, 1월달엔 꽤 열심히 했던 예습복습(! 답사 후 포스팅하는 게 주요 복습이었는데;;)도 완전 무시하며 지낸 터라 머리에 뭐가 남아있긴 한가 잘 모르겠다. 일단 기억을 환기하여 적어보기로...

 

현대미술관 덕수궁 분점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 덕수궁에 대해서는 그나마 익숙하고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ㅋ 전각 이름 좀 알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아는 건 결코 아니었다. 덕수궁 답사의 시작을 환구단 정문에서 한다고 할때부터 의아했다. 엥? 시청앞에 환구단 정문이 있다고? 답사안내문에 나눠준 사진과 그림을 보니 그렇다는데, 지난 가을 덕수궁 프로젝트 관람하고 나서 대한문을 나와 분명 시청앞 광장으로 길을 건너가 저녁을 먹으러 갔었음에도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내심 요 몇달 새에 생긴 건가 싶었다.

 

최근에 복원된 건 맞지만(2005년이라던가;;), 물론 환구단 정문은 분명 작년 그날에도 시청앞 광장 건너편에 엄연히 서 있었다. 무지한 내가 못 본 것일뿐.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덕수궁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와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덕수궁 자리는 과거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타버려 피난 갔던 선조가 돌아와 석어당(석어당이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다)에 머물게 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렸었다. 헌데 일반주택이라 해도 일단 왕이 머물고 나면 일반인이 다시 살 수가 없으며, 집에도 '궁'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운현궁이 '궁'인 이유도 훗날 왕이 된 고종이 살던 집이기 때문이다. 암튼 그래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가 머물렀던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내렸다. 덕수궁을 경운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의 근본이다.

 

임란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고 난 뒤 경운궁은 오래 별궁으로 남아 외면당했다가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다시 역사의 중심이 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성기 때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했단다. 궁역을 자꾸만 넓히며 건물을 짓다 보니 심지어 정동길 너머로도 영역을 확대하여 구름다리로 연결해 썼단다. 이론수업에서 아직도 그 때의 구름다리 흔적이 남아있으니 정동 돌담길 걸으며 한번 확인해보라는 말도 들었겠다, 공식 답사일정이 끝나고 나서 실제로 둘러보니 그 부분이 눈에 딱 들어왔다.

 

두툼한 구름다리 석축이 확실히 담장보다 튀어나와 있는 게 보이지 않나? 여기 말고도 경희궁 쪽으로도 구름다리로 두 궁궐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같다. 경희궁 터야 완전 박살나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이 건너편은 서울 시립미술관이니까 구름다리를 복원해도 좋겠다 싶었다. 어차피 덕수궁(경운궁)은 고종황제가 근대왕조국가를 꿈꾸며 새로 짓다시피 확장시킨 궁궐이니 현대 기술로 복원하기에도 수월하지 않을까나.

 

덕수궁이 다른 궁궐에 비해 이질감이 컸던 이유도, 궁궐건축의 원칙과 풍수에 따라서 산세를 등지고 터를 고른 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남은 땅을 최대한 활용한 데다 근대건축술을 도입한 서양식 건물을 한옥전각 바로 옆에 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고종의 지시로 덕수궁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이 셋 있는데,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이다. 석조전을 고종황제가 생활공간으로 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입김으로 생겨난 건물인 줄 알았더니 고종이 친히 의도하여 지은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궁궐은 전각별로 쓰임새가 다 나뉘지만, 서양식 궁궐은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 하나에 온갖 용도의 공간이 다 들어있지 않은가. 고종 역시 석조전을 크게 지어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려 했다. 

 

언젠가 한국근대미술전 보느라 석조전에 들어가서 본 서양식 응접실과 다실에서 고종황제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의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짠했다. 나라를 빼앗긴 무능력한 왕의 전형으로 오래도록 알려졌던 고종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그 시기는 중세왕조가 사라져가고 근대국가가 생겨나는 시기였으니 조선의 패망이 고종황제의 무능력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탓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고종황제가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러 다닌 것도 황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뜻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전까지는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기에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엄연히 내려왔던 환구단의 전통이 조선초 완전히 사라졌던 것을 고종이 되살린 것이라고.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 문앞에서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옛날 환구단의 모습인데, 담장 주변 잡초로 보아 일제가 철거하기 얼마 전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환구단의 흔적은 시청앞 광장에 있는 줄도 모르게 서 있는 복원된 정문과 빌딩숲에 가려져 간신히 보이는 환궁우와 삼문(흑백 사진 왼쪽의 팔각정 같은 전각과 아치 세 개 부분), 돌북 세 개뿐이었다. 복원공사를 계속 하고 있긴 하던데 아는 사람이나 알지, 나도 예전엔 조선호텔 후원에 세워놓은 정자인 줄만 알았거늘... 흠.

 

왼쪽 사진이 바로 환구단의 정문을 뒤쪽에서 찍어온 것이다. 시청앞 광장 쪽에서는 사실 찍어도 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건물인 재능교육에서 해고당한 방문교사들이 바로 저 문 앞 인도에 천막을 쳐놓고 천팔백몇십 일째 농성중이었다. 올 겨울 유독 추위가 엄혹했는데 천팔백일만 따져도 대체 몇년째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복원은 했다지만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환구단 정문의 위상이나 재능교육 해고교사들의 위상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고종황제는 덕수궁 대한문을 나서 환구단까지 위엄 돋는 행차를 거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일제의 압박에 왕위를 물려줄 때도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뿐 정식으로 양위의 뜻을 밝힌 적이 없단다.  그런데 일제와 친일파 대신들이 얼렁뚱땅 왕위를 순종에게 넘긴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일제는 상왕이 된 고종을 격하시켜 '덕수궁 이왕'이라는 궁호를 내렸다. 그래서 덕수궁이란 이름을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에 열을 올리는 이들도 많은가본데, 대체로 덕수궁으로 그냥 쓰자는 분위기가 대세라고. 덕수궁 원래 이름이 경운궁인 걸 아 글쎄, 일반인들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지난 가을 찍어왔던 정관헌 사진 재활용^^ 경운궁 내 최초의 서양 건물이라는 중명전

 

<무한도전>에도 나와서 꽤 유명해진 '정관헌'은 경치좋은 곳 여기저기 정자를 세워두었던 다른 궁궐과 달리 땅이 좁은 덕수궁에 정자 대신 세워놓고 고종이 커피도 즐기고 연회를 벌이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장소다. 서양식 건축과 한옥 양식을 섞어 지어서 어찌보면 이도저도 아닌 요상한 양식이 되었지만, 베란다에 깔린 타일도 예쁘고 기둥과 난간에 새긴 십장생이며 용무늬도 꽤나 정교하다.

 

'중명전'은 덕수궁 담장 밖에 있다. 홍순민의 <우리 궁궐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이 건물이 해방 이후 여러번 팔리다가 개인 소유가 되어 사무실 건물로 함부로 쓰이고 있다는 통탄의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얼마 전 정부가 사들여 복원해놓았다. 미 대사관저를 사이에 두고 현 덕수궁과 뚝 떨어져 골목 안에 숨어 있다는 중명전이 궁금해서 답사 끝나고 열성 뻗치게도 나중에 찾아가 보았다. ㅋ 입장료는 무료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도 있게 해놓았다.

 

원래는 황실 도서관으로 지은 건물로 '수옥헌'이라 불렀다는데 덕수궁에 큰불이 났을 때 고종이 다른 궁궐로 옮겨가지 않고 이곳에서 지내며 연회장이나 접견장소로 이용했단다. 원래 왕이 머무는 전각엔 '-전' '-당' 수준의 이름이 붙는다. 그래서 나중에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겠지. 헌데 여기서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대고, 헤이그 특사 파견도 이루어진 비운의 역사적 장소란다. 신발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안에 들어가면 여러 사진과 함께 친절하게 여러 설명문이 적혀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설명문보다 복도 바닥에 깔린 색깔 타일이 더 인상적이었지만서도...

 

여기도 정관헌처럼 건물 바깥쪽을 베란다로 둘러놓았다. 날씨만 안 추웠더라면 저 의자에 걸터 앉아서 높은 담장으로 가려진 미대사관저 부지까지도 궁궐터였던 때를 상상하는 놀이에 젖어볼 수 있었을 텐데... 얼른 사진만 한장 찍고 퇴장했다.

 

 

 

 

 

에고고...

덕수궁에 있는 서양 건물 셋 얘기만으로도 너무 사연이 길고 지친다. ㅋ 암튼 덕수궁 미술관 구경다니면서, 뜬금없이 화장실 건물과 나란히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문과 그 안에 놓인 자격루 따위의 보물이 좀 수상하다 여겼었는데 이번에 의문이 약간이나마 풀렸다. '광명문'이라는 편액이 달린 저 문은 원래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엉뚱하게 옮겨진 거란다. 제 자리도 아닌 문 안에 포와 종과 물시계를 나란히 진열해놓은 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궁궐이라는 것이 어차피 죄다 과거 속의 죽은 공간이라 훼손의 역사를 빼고는 도무지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걸 안다. 그래서 궁궐을 볼 땐 상상의 나래를 많이 펼칠수록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덕수궁은 가장 최근까지 근대의 서글픈 과거가 담긴 공간이다보니 안타까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중화전만 해도 다른 궁궐처럼 처음엔 중층으로 지어졌는데 대화재 후 재정궁핍으로 조촐하게 단층으로 축소해서 지었다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궁궐 조정 마당엔 죄다 행각을 복원해서 둘러놓았으면서, 왜 덕수궁 중화전만 휑하니 뚫리게 그냥 두었는지?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하면서 가장 많이 망가진 줄 알았더니만, 궁궐 훼손의 정도는 어느 게 더 심하다고 손꼽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째뜬 내가 덕수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석어당은 퍽이나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선조가 피난 갔다 돌아와 임시로 거처한 역사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이미 고이 보존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었대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살다던 공간이기도 하며,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온 고종황제 역시 경운궁을 본격적으로 넓혀 짓기 이전에 석어당을 임시 거처로 썼단다. 다만... 1904년에 큰불이 났을 때 다른 전각들과 같이 홀라당 다 타버려서, 현재 건물은 당시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지금 전각도 100년이 훨씬 넘기는 했지만, 선조 때의 모습 그대로인가 했다가 아니라니까 왜 실망스러운지 원...

 

가을에 찍어온 석어당 사진도 재활용 ^^

아무려나,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가 옥새를 넘기면서 저 석어당 마당에 광해군을 무릎 꿇려 앉혀놓고 조모조목 죄목을 읊으며 꾸짖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으로 <광해> 2편이 마구 그려지면서 새삼 흥미진진했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아 글쎄 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놀랍게도 예순살이 넘도록 살았다네그려. 나중에 인조반정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나오면, 배경이 석어당인지 아닌지 꼭 확인해야지!  

 

 

 

 

 

 

 

탑루만 남은 러시아 공관

이날 덕수궁 미술관에선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프라하'에 대한 선망 때문에 별 생각도 없이 무작정 들어가 본 그림들은 공교롭게도 상당수가 덕수궁의 근현대사와 맞물리는 시기에 그려진 거였다.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화가 많아서 기억에 남는 그림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오히려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한국근대미술: 꿈과 시> 작품들을 한번 더 볼 수 있어 좋았다. 아픈 다리를 끌고 굳이 내가 러시아 공관이 있던 언덕까지 정동길을 헤매고 다닌 이유도 아마, 이날 본 1907년 즈음의 정동 주변 그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구한말, 고종황제, 을사늑약, 한일합방... 같은 말을 들으면 까마득한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바로 그 시기 이땅의 화가들은 또 서양 미술을 배우고 익혀 유화로 서울 풍경을 그려 남기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불과 백여년 뒤의 내가 구경하러 다니는데, 그림 속에 담긴 러시아 공관의 모습이 일부나마 여전히 현재의 시공간 속에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이 어쩐지 기묘했다. 

 

게다가 지금은 저렇게 철책으로 둘러쳐 지정문화재 따위로 엄히 보호받고 있는 공간이지만, 15년전쯤만 해도 난 친구들과 김밥 몇줄 사가지고 올라가 러시아 공관 폐허 바로 옆 잔디밭에서 뒹굴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때도 여기가 아관파천의 역사 현장이래.... 어쩌구 종알거렸던 것 같다.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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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놀잇감 2013. 1. 28. 23:13

지난 주말 하필 최저기온 영하 13도라는 날에 창경궁 답사를 가며, 덕수궁 못지않게 궁이 좁아서 30분이면 다 둘러보겠던데 3시간이나 무슨 설명을 하려나 좀 의아했었다. 그러나 웬걸... 너무 뺨시리고 손시려워서 볼펜과 수첩은 꺼낼 생각도 하지 않고 핫팩만 감싸쥔 채 열심히 들으며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3시간이 다 지나가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궁궐은 무조건 창덕궁이라고 주장했었는데, 창경궁도 아기자기 정말 예쁘다. 복원한지 몇년 되지 않아 너무 선명하고 화려해서 오히려 거부감 드는 다른 궁궐에 비해 예산 편성이 되질 않아 복원 속도도 가장 느리고 단청 색깔도 몹시 낡고 바란 것이 되레 더 정겨웠다. 마음 편히 산책하기에도 딱 적당한 크기와 구조인듯. 게다가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 셋(500년도 넘었다는 창덕궁 금천교 말고;;)은 글쎄 다 창경궁에 있었다!

 

 

광해군 때 세워진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전각 셋 중 하나가 바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이란다. 버스 내려서 횡단보도 건너기 직전에 건너편 길에서 얼른 한장 찍었더니만 수평이 안맞았다. ㅠ.ㅠ

창덕궁의 보조 궁궐 성격이 크다보니 규모와 품격도 낮아 중간에 문이 하나 생략되었고, 정문에서 곧장 정전이 들여다보이는 유일한 궁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명정전이랑 명정문, 홍화문 축이 일직선은 아니란다. 의도적으로 좀 틀어놓은 듯하다고...

추정되는 이유도 두 가지쯤 설명 들었는데, 하나는 화살 사정거리 때문이래고 나머지 하나는 뭐였더라... 까먹었다. ㅋ 

 

째뜬 바로 저 문밖까지 왕이 나와서 친히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고(영조가 균역법 실시 전에 홍화문 밖에 나와 일종의 설문조사를 했단다!), 정조는 화성행차 이후에 쌀을 나눠주기도 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정치적인 쇼였다지만 그래도 쌀 받아든 백성들은 감동하지 않았을까? +_+

 

창경궁 이론수업에서도 나왔던 <홍화문 사미도>가 안내책자에도 작게나마 들어있었다. 원래도 왕실 행사는 죄다 기록으로 남긴다지만 이런 기록까지 죄다 의궤로 꼼꼼하게 남기게 한 정조는 진짜 기록문화의 대가, 원조답다. 이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수많은 화원들은 또 뭔가! 문앞에 쳐놓은 차일까지도 대단히 정교하다. 앞으로 어디선가 의궤 전시회 한다고 그러면 꼭 달려가서 구경해야지... ㅠ.ㅠ

 

 

새삼 내가 찍어온 사진과 이 그림을 같이 놓고보니 차도로 잘려버린 홍화문 앞 마당이 더욱 초라해보인다. 어차피 왕도 사라졌고 조선의 궁궐이란 다 죽은 공간이지만, 문화재면 문화재답게 대우하고 보존하는 것도 나라의 수준과 함께 발전하는 것 같다. 문화재 보호도 다 먹고 살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겠지.

 

그나마도 율곡로로 잘려버린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공사가 요새 한참 진행중이다. 자동차는 지하로 다니게 하고 본래 창덕궁, 창경궁, 종묘로 이어졌던 숲을 일부나마 연결한단다. 그간 안국동에서 버스타고 대학로 가려면 무진장 막혀서 짜증냈었는데 알고보니 그 길 뚫는 공사였다. 앞으론 불편해도 암말 말아야지...

 

 

궁궐에서도 품계석이 서 있는 조정 마당에 들어설 때면, 문이 액자처럼 건너편 전각을 둘러싸고 있는 듯한 거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감상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 비슷하게 찍어본 것이 홍화문 정문에서 들여다본 명정문의 모습이다. 어차피 안에 들어가면 설명 듣느라 사진은 못 찍을 테니까....

 

날이 워낙 춥기도 하고, 창경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인기도가 떨어지는 편이라 토요일 오후임에도 다른 관람객들이 많지 않아 좋았다. 저기 안으로 들여다 보이는 명정문도 그러니까 광해군이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은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금천 위로 가로지르는 옥천교도 옛날 그 다리다. 더욱이 창경궁 금천에는 실제로 졸졸졸 물도 흐른다! 다 얼어붙긴 했지만 흐르는 물을 직접 확인했음. 창덕궁 금천은 물길이 말라버려 어느 지점에선가 일부러 물을 끌어다 흐르게 했다던데.

 

일제시대  창경원으로 전락하며서 가장 많이 훼손된 아픈 역사를 지닌 궁궐이면서 또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갖춘 건물이 제일 많기도 한 궁궐이라는 묘한 아이러니가 이곳의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어린시절 흑백사진을 보면 정말로 창경원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 많다. 동물원에서 코끼리 과자 주는 사진도 있고, 드넓은 잔디밭에서 도시락 펴고 먹는 사진도 있고...

 

궁궐 안에서 보이는 너른 잔디밭은 곧 건물의 무덤이라는데(홍순민의 <우리궁궐 이야기>를 어제부터 다시 읽고 있다 ㅎㅎ), 그 옛날엔 까마득히 모르고 궁궐 전각의 무덤에서 신나게 뛰놀며 도시락을 까먹었구나 싶다. 일제는 조선왕실을 부정해야 하니 그렇다쳐도, 창경원은 80년대까지 있지 않았나? ㅋ

 

 

창경궁에선 특히나 광해군 때, 19세기에, 1980년대 이후에 각기 지은 건물이 공존하기 때문에 서로 지붕 모양이며 처마의 각도도 미묘하게 조금씩 다를 거라고 했는데(이건 또 대목장의 취향과도 관련된 문제란다;;), 나의 막눈으로야 당연히 구분하지 못했지만 최근에 새로 지은 경복궁 흥례문이나 창덕궁 인정문과는 확실히 좀 다른 것 같다. 같은 팔작지붕이라도 각이... 좀 더 예리하다고나 할까? 암튼 예쁘다. ㅎㅎㅎ

 

옥천교 앞에서 본 명정문

 

창덕궁도 후원을 돌아다니려면 언덕을 오르고 내리며 헉헉대야 할 때도 있고 높은 지대에서 아래쪽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도 있지만, 궁궐 전각들의 지붕을 조망하는 건 북촌 언덕에 올라야만 가능하다. 헌데 창경궁엔 높은 계단 위 언덕의 자경전 터에 서면 곧장 궁궐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숨도 고르면서 사진 한장 찍어도 된다고 해서 얼른 나도 찍어보았다.

 

오른쪽 사진 앞쪽에서 보이는 작은 건물은 후궁들의 처소로 추정되는 '집복헌'이다. 80년대 이후 복원해 놓은 건물이긴 하지만, 암튼 옛날 저기 있는 집복헌에서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단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하여 자주 저기 드나들었대고, 아예 바로 옆으로 이어진 건물(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쓰다 거기서 세상을 떠났단다. 정조 관련 이야기는 창덕궁에 더 많은 줄 알았더니만 아니었다. 사도세자를 위한 경모궁을 서울대학병원 터에 지어놓고 한달에 한번씩 특별히 드나들던 문(이름하여 '월근문')도 여기 있더라. +_+ 

 

그밖에도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여성 인물들의 거처도 다 창경궁에 있었다. 나름 자주 찾아다녔던 다른 궁궐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긴 전각 이름도 죄다 낯설고 어려워 공부를 한참 더 해야 턱턱 건물 이름이 생각날 것 같다. -_-; 째뜬 내게도 추억의 장소인 대온실도 구경했다. 궁궐과는 참 안어울리는 일제강점기의 잔재이지만 (당시엔 아시아 최대 온실이었다고;;) 이미 100년을 넘기고 보니 그 또한 등록문화재이고, 나름 아름답다. 궁궐 해설할 땐 안 들어간다는데 우리는 너무 추워서 잠시 들어가 몸을 녹였다.

 

원래 있던 희귀식물들은 죄다 과천 식물원으로 옮겼고 지금은 한국 자생식물들로 채워져 있단다. 봄가을에 시민들에게 야생화 모종 나눠주기 행사도 한다고...

어린 시절 난 저 온실 안에서 동생들이랑 술래잡기 하다가 뛰어다닌다고 다른 어른들에게 혼이 났던 것도 같다. 온실 안이었던 건 확실한데 어쩌면 남산 식물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창덕궁에 갈 때마다 인정전 꽃문살 참 예쁘다고 늘 한번 더 어루만졌는데, 그 또한 창경궁 명정전 문살이 '오리지널'이고 인정전과 근정전은 명정전을 본보기로 삼아 복원해 놓은 거란다. 어디서나 '원조', '오리지널'이라고 하면 왜 더 다시 보이는 건지 원. ㅎㅎㅎ 암튼 세월이 느껴지는 허름한 단청 빛깔도 원숙해 보이고, 일제시대에 전각이 있던 터까지 죄다 파버려서 복원하기에도 수월하지 않아 휑하니 사방에 빈터 투성이에다 건물 주변의 행각은 좀체 볼 수도 없는 창경궁은 그 허망한 느낌이 또 은근하게 좋았다. 다른 궁궐엔 눈 새하얗게 쌓였을 때 꼭 한번 가보고싶어지던데, 여긴 어쩐지 따뜻한 봄날에 다시 찾아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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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답사

놀잇감 2013. 1. 22. 01:23

한옥의 역사와 궁궐의 역사, 이론 수업을 두 주일 하고 나니 벌써 궁궐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최초의 조선 궁궐인 경복궁을 시작으로 일단 창덕궁까지. 경복궁은 가뜩이나 관람객 바글거리는 토요일 오후에 시끌시끌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창덕궁은 휴관일인 월요일에 교육생들만 특별 출입을 할 수 있어서 고즈넉하니 좋았지만 온종일 철철 비가 내렸다는 사실이 함정. 다행스럽게 이틀 다 날씨가 별로 안추웠지만, 경복궁은 허허발판이라 칼바람이 불어 체감온도는 역시나 영하였고 창덕궁엔 살얼음이 얼거나 얼어붙은 길이 다시 비에 녹아 미끌미끌 위험천만이었다. 완전무장 후 핫팩을 들고 다녔는데도 발시리고 손시리고 코시려워서 여간 힘이 든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을만한 한겨울의 궁궐답사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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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투덜일기 2013. 1. 4. 18:09

새해들어 과연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시작한 일이 하나 있다. 자원봉사 따위와는  완전 담쌓고 살아온 사람이지만, 궁궐 청소 같은 일은 해보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모종의 기획이라면 기획. 궁궐과 문화재 지킴이를 모집하는 단체가 꽤 여럿인 모양인데, 여기저기 기웃대다 한 군데서 마침 연말에 모집기간임을 극적으로 발견하고 마감일 하루 전에 허겁지겁 신청했다. 00명 모집에다 선착순 마감이라고 적혀있어서, 안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름 조마조마했다. 돌이켜보니 이 얼마만의 '응시'인가.

 

교육대상자 발표를 보니 무려 100명. 내가 막연하게 바랐던 궁궐 전각 청소 소임과는 사뭇 다르게, 해설사 양성 교육이라서 좀 어마어마한 느낌은 있지만 궁궐과 한옥,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뭔가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 꽤나 뿌듯하게 소정의 교육비를 냈다. 그러고는 어제 첫 강의가 있어 27년만에 찾아왔다는 강추위를 뚫고 수업을 들으러 갔다. 6시반부터 시작되는 평일 저녁에 수업을 들으러 올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이들일까 자못 궁금했다. 방학 맞은 대학생들이 좀 있을 테고 나머지는 나처럼 죄다 백수? ^^;

 

아직 어떤 이들이 모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령비율로 보니 20대부터 60대까지 제법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고 남녀 성비는 25대 75로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많았다. 하기야 궁궐 해설사치고 여자 아닌 사람을 나는 입때껏 한번도 못봤다. 창덕궁도 그렇고 나는 궁궐 해설사들이 죄다 문화재청 소속 공무원이거나 계약직 직원인 줄 알았는데 다들 자원봉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직은 확실치 않지만 암튼,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해설사로 활동하고픈 마음은 없다해도 그만큼 교육내용이 알차려니 싶어서 기대중이다. 3월까지 일주일에 세번이나 교육이 있는데 끝까지 남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궁금타. 그렇다면 과연 나는 끝까지 버틸까? ㅎㅎㅎ

 

흥미로운 주제라고는 해도 강의 방식이 따분하고 지루하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는데 세계 건축 통사를 훑어주었던 첫 강의는 퍽 재미있었다. 반사적으로 강의 내용을 공책에 열심히 필기하며(교육 끝나면 나중에 필기시험도 본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걸 후회했다. 파워포인트로 비추는 스크린이 앞좌석에 가려져 주요 사진 캡션을 하나도 못 읽은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내일 수업땐 같은 구석자리라도 한 세쨋줄 정도로 노려볼 생각이다. 그럼 담배냄새 쩌는 지각생 아저씨가 옆자리로 파고드는 일도 없겠지. ㅠ.ㅠ 어젠 정말이지 수업 내용은 흥미진진한데 숨쉬기가 어려워서 죽는 줄 알았다. 얼마나 골초면 옆사람한테까지 그토록 호흡곤란을 일으킬까나. 한껏 몸을 틀어 앉아 수업 내내 내가 스카프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던 걸 옆자리 그 골초 아저씨도 눈치챘을까? 생김새도 못봤으니 미리 알아서 피할 순 없을 테고, 무조건 중노년의 아저씨 주변엔 앉지 않겠다고 첫날 수업 한번으로 결심이 섰다.

 

공부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진즉 깨달았으면서도 또 뭔가를 배운다고 생각하니 설레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제 수업에서 인류는 사냥과 채집으로 생존하던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역마살, 노마드 가질이 있어 여행을 좋아하며, 어딜 가든 현지에서 뭘 꼭 사오는 것도 채집 본능이라고 설명하던데, 공부 싫어하면서도 배움에 대한 선망을 버리지 못하는 건 무슨 본능일까 문득 궁금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여호아라는 공자님 말씀에 그리 깊이 세뇌된 건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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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나들이

놀잇감 2012. 11. 13. 00:28

생각해보니 가열차게 놀러다닌 날들이 벌써 한달이 다 돼간다. 그때만 해도 단풍든 나무보다 새파란 나뭇잎이 더 많았는데 어느새  요 며칠 겨울 같은 날씨에 나무들은 헐벗었고 올해도 한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ㅠ.ㅠ 남은 기억 다 지워지기 전에 사진 쳐다보며 밀린 이야기를 다 풀어내야할 터인데. 이것 참.

 

일본에 다녀온 다음날부터 곧장 이틀에 걸쳐 서울 관광 스케줄을 쫀쫀하게 짜놓았으나, 그건 그저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시차도 너끈히 견딘 친구와 달리 며칠 전까지 급마감에 힘쓰며 밤샘을 거듭했던 나는 혓바늘이 돋질 않나,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길 않나 저질체력임을 여실히 실감했고, 연일 강행군은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냥 하루는 장이나 봐다가 맛난 거나 해먹으며 쉬자고... 

 

LA선 절대 맛볼 수 없다는 납작말랑한 홍시와 홍옥사과, 막걸리와 해물부추전으로 비타민과 영양(?)을 보충한 다음날에야 비로소 나설 수 있었던 창덕궁. 그나마 원래는 창덕궁과 종묘를 한꺼번에 돌려던 계획이었으나 창덕궁 하나만 보기로...

 

친구가 이날 저녁부터 주말까지는 외가에 들러야 해서 짐을 싸가지고 나왔기에 마냥 돌아다니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창덕궁엔 입구에 무료 사물함이 있고, 나중에 이대앞에선 지하철역 사물함을 이용할 수 있었다. 지하철 사물함 나도 난생처음 이용해보는 것이었는데 열쇠 없이 디지털 화면으로 사물함이랑 비밀번호 지정하고, 심지어 거기서 택배도 보낼 수 있더군! +_+ 놀랍도록 편리한 나라임을 새삼 실감. ㅋㅋㅋ

 

암튼 창덕궁에 들어서자마자 다리 건너편 느티나무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에 반해, 왼쪽에 사열하듯 서 있는 장엄한 회화나무 세 그루는 찍어오는 걸 까먹고 말았다. 걔네들은 아직 초록이 성성한 자태였는데...

 

 

 

대개는 인정전과 대조전 등지의 전각을 먼저 다 보고 후원 들어가기 전에 낙선재를 둘러보는데, 사진 순서를 보니 이날은 낙선재부터 들렀던 모양이다. 한달도 안 돼 벌써 이렇게 기억이 흐려지다니 뜨끔;; 아무튼 까마득한 오래 전 지금처럼 복원이 끝나기 전에 이방자 여사가 개조해 놓고 썼던 양실 목욕탕도 구경할 수 있었던 때도 좋았고, 원래대로 바꿔놓은 지금도 좋은 낙선재. 궁궐에 있을 정도니 당연하겠지만 참 짱짱하고 단아하게도 지었다는 느낌이 든다. 

자세히 보면 난간에도 이렇게 정교하게 구름과 호리병 무늬를 조각했다.

 

낙선재 마당에 있던 감나무마다 또 감이 얼마나 튼실하게 매달려 있던지 원. 잘 생긴 한옥집에 살 일은 아마도 요원하겠지만 혹시라도 다시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나도 감나무를 꼭 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사는 집앞에 있는 앵두나무도 시작은 버릴까말까 고민하던 작은 분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정전과 대조전 사진은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는데, 후원쪽으로 건너가면서 회랑 너머로 보이는 인정전 지붕이랑 원래 궁궐을 모두 감싸고 있었을 소나무가 나온 이 사진은 좀 괜찮은 것 같다. 옛날엔 내가 사진 찍은 자리도 그냥 마당이 아니라 빼곡하게 전각이 서 있었겠지... 

 

 

 

 

아래는 아마도 내의원이 있었다는 전각인 것 같다.  이날은 해설사 설명도 안 듣고 브로셔도 안들고 그냥 설렁설렁 돌아다녔는데, 떼를 지어 수첩과 볼펜 들고다니며 역사공부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어찌나 많은지 귓등으로 많은 정보를 얻기는 했으나 이미 다 까먹었다. ㅋ 암튼 누각과 단층 전각을 이어서 지은 이 건물 마음에 든다. 안에선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려나 심히 궁금.  

 

 

 

 

 

10월 중순이라 새파란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더 많긴 했지만 창덕궁 후원으로 넘어가니 조금씩 깊어가는 가을이 느껴졌다.  

 

역시나 가을의 손길이 제일 먼저 찾아온 곳은 애련지와 애련정 주변.

 

 

 

궁궐 전각들이 다 화려하고 근엄하긴 하지만 창덕궁에서 역시나 제일 마음에 드는 한옥을 꼽으라면 양반 사가를 그대로 궁에 옮겨놓았다는 연경당이 최고. 낙선재도 아담하고 예쁜데 한 군데 콕 집어서 살라고 하면 난 역시 사랑채 안채 별채 서재까지 다 갖춘 연경당을 택하겠다. ㅠ.ㅠ

 

 

특히나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난 작은 저 문.

옛날에 해설사한테 주워들은 가락을 옮겨보자면, 사랑채에 손님이 오면 안방마님이 하인들한테 굳이 묻지 않고 저 문으로 살짝 내다보아 사랑채 섬돌에 놓인 신발 켤레 수로 주안상을 준비한다나 뭐라나...

요새도 해설사가 연경당 안내할 때 그런 설명을 하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ㅎㅎ

 

암튼 단청 안 칠하고 적당히 낡고 바란 아담한 나무문과 문살이 참 예쁘지 아니한가. 

 

 

 

 

 

 

창덕궁의 가을은 작년에도 포스팅한 적이 있으니 이쯤해두련다.  (201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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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투덜일기 2012. 7. 13. 17:04

등잔밑은 확실히 좀 어둡다. 전국방방곡곡은 물론이고, 나고 자라 살고 있는 도시만 해도 안가본 동네를 꼽아보면 아직도 많다. 유명한 곳일수록 더 그렇다. 각자 서울서 산 세월이 40년을 넘겼지만 삼청동은 꽤 다녔어도 길 하나 위에 있는 북촌은 골목골목 제대로 구경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누군가 가보자고 나섰다.

북촌 한옥에 대해선 책을 먼저 읽었다. 몇채 안남았다는 건 알고 갔는데도 골목이 금세 끝나 허무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도 들고 다니며 북촌 7경이니 8경이니 순례를 다니더라. 째뜬 이나마 남아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인데, 박제되어 먼지 낀 짐승을 보듯 마음이 무거웠다. 제대로 원없이 사람냄새 나는 한옥을 보려면 그러니까, 안동이나 전주 같은 델 가야한다고 결론지었다.

 


 

 

이를테면 여기가 북촌 한옥마을의 '메인스트리트'다. 저 골목 끝 언덕 꼭대기에서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것이 포인트라고 지도에 안내되어 있는지, 너도 나도 그 지점에서 사진을 찍었다.

올라가다 나도 슬쩍 돌아보았지만 한옥 처마 사이로 보이는 부연 하늘과 볼품없는 건물들과 남산타워는 하나도 멋지지 않던데. 뭐가 멋있다는 건지. 흠.

 

 

 

 

 

 

 

 

 

 

 

 

저런 아치형 문은 대문엔 안 쓰고 궁궐 중문에서나 본 것 같은데.. 이른바 퓨전한옥인가보다, 그랬다.

그렇지만 기와 넣어 쌓아올린 황토담과 어우러져 예쁘긴 하다. 저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나. 북촌 한옥에 사는 건 뿌듯하다 해도 노상 사람들이 와글와글 돌아다니니 참 시끄럽겠다. 오죽하면 골목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니 조용히 해달라고 팻말이 적혀있을라고...

 

 

 

 

 

 

 

 

 

같은 집 담장은 아니지만... 왼쪽 집은 시원시원한 느낌이고 오른쪽 집은 아담하니 정겨웠다. 담장 밑에 내놓은 화분도 꽤나 부지런히 가꾼 흔적이 보인다.

 

 

 

<한옥이 돌아왔다>라는 책에서 북촌 한옥 이야기를 읽긴 했는데 어느 집이 그집인지 'OO헌'이었다는 것 말고는 통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책에서 이렇게 담장에 낸 창문 사진을 본 적은 있다. 이집이 그집일까, 잘 보이지도 않는 저 창살 틈새로 기웃기웃 안마당을 들여다보다 킥킥거리며 포기했다. 새어나온 담쟁이랑 다 예쁘다.

 

 

 

 

 

 

 

한옥 사이에 자리한 어느 양옥집 담장 너머로 축 늘어진 감나무 가지에 열매가 어찌나 다닥다닥 탐스럽게 열렸던지... 가을까지 안떨어지고 잘 버티면 좋겠다.

우리집앞 골목길 감나무는 얼마 열리지도 않은 열매가 노상 떨어져 바닥에 으깨져 있어 볼 때마다 심난했는데 튼실한 초록감을 보니 괜스레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골목을 벗어나 밥먹으러 가려다가 해무리를 봤다. 아직 저렇게 어둡진 않았는데, 한옥에 초점을 맞추면 해무리가 안보이고, 해무리를 찍자니 한옥이 그림자로만 나왔다. 가뜩이나 구도도 엉망인데 전깃줄이라도 없으면 딱 좋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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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해마다 연초가 되면 그해 예정되어 있는 '볼만한 전시' 목록을 포스트잇에 적어 벽에 붙여놓는다. 그도 못 미더워 탁상달력에도 표시를 해둔다. 게으름부리다 놓치지 말라는 나름의 독촉질을 미리 해두는 거다. 그런데도 올해는 좀처럼 굼뜬 엉덩이를 들기가 쉽지 않았다. 작년말부터 3월초까지 했던 <하늘에서 본 지구> 특별전은 차일피일 벼르다 정 보고 싶으면 나중에 책으로  사보지 뭐, 그랬고,  1, 2월에 있었던 <김환기 회고전>은 나중에 '환기 미술관'에 가서 보면 된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며 건너뛰었고, 3-5월에 열린 <한국의 단색화> 전은 마감일정에 쫓기는 중인데다(언제 안 쫓기는 적 있었냐? 쳇;;) 과천까지 가야한다니 더욱 떨치고 나서기가 힘들어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적어놓은 것이 서도호의 <집속의 집> 전시. 서도호에 대해서 내가 뭐 쥐뿔이라도 알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도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한옥 위주 설치미술'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설치미술보다는 회화쪽을 더 좋아하지만 한옥이라니! 무조건 가야해, 싶었다. 전시일정은 3월 22일부터 6월 3일까지 리움미술관. 4월쯤에 보러가면 딱이겠다 계획했던 이 전시를 결국 나는 끝나기 겨우 며칠 전에야 겨우 보고 왔다. 그러기까지 이러다 기회를 놓치고 말 것 같아 어찌나 조바심을 쳤는지 원.

 

뜨거운 한옥 열풍 덕분인지, 리움미술관에서 홍보를 잘한 건지, 나만 몰랐을 뿐 서도호 작가가 워낙 유명한 예술가인 건지, 어디나 '촬영금지'를 원칙으로 삼는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드물게 사진 촬영을 허락한 전시라 특히 입소문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인지, <집속의 집> 전시는 시종일관 호황이었대고, 당연히 마지막주 평일에도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뉴스를 보니 리움에서 역대 최고의 관객수를 자랑했던 앤디 워홀 전시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찾았다나 뭐라나. 역시... 한옥 좋아하는 건 한국인은 나뿐이 아니었다. 대개 설치미술 작품 전시는 회화 작품보다 관객이 적게 마련일 텐데... 놀라워라.

 

암튼 전시를 보러가기 전부터 방송에 소개된 전시장과 작품 설명, 블로그 사진들을 꽤 많이 봤던 터라 정작 가서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마음 한구석에 없지 않았는데, 다행히도 그건 기우였다. 실제로 보지 않고선 여간해서 그 느낌을 실감할 수 없는데도 너도나도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심정이 나도 충분히 이해가 되더라니까!  

사진은 전시장 입구에 매달려 있는 <투영>이란 작품. 철사로 틀을 잡고 한복 갑사 같은 천으로 한옥의 문을 형상화해 매달아놓은 형국인데, 어우 내가 딱 좋아하는 '파란색'이 아닌가. 다른 블로그에서 이 작품사진을 접하며 밖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 미술관 유리창 벽에 빗물이 맺혀 있다면 더욱 운치가 있겠다고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었으나, 내가 보러 간날은 해가 쨍쨍했고 설사 비가 내렸다 해도 건물 구조상 통로 옆면이라 저 유리창에 빗물이 맺힐 수는 없었다. 혹 천창에 빗물이 떨어질 수는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암튼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 전시장으로 내려가며 곧장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역시나 철사와 실크로 탄생시켜 천장에 매달아놓은 한옥 <서울집>이었다. 청덕궁에 있는 연경당을 본떠 작가의 아버지가 지었고 실제로 작가가 어린시절 살기도 했다는 한옥을 재현한 것이라고. 모든 작품이 섬세함과 꼼꼼함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교한 문창살은 물론이고 복잡한 구조의 분합문까지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정도로 재현하려면 한옥 건축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설계도 잘 알아야할 것이다. 바느질이야 다른 전문가가 했다지만, 존경심에 감탄만 발할 뿐이다. ㅠ.ㅠ  

시카고 전시 때 영상을 보니 관객들이  이 작품 아래 바닥에 드러누워 서까래도 올려다보면서 실제로 한옥에 누운 듯한 기분을 체험해보던데, 용기가 없어서 차마 나는 그래보지 못했다. 그저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이런 집에 살았던 작가의 추억을 부러워하다 사진으로 찍어 남기고...

 

이 인상적인 한옥의 한쪽 벽면은 또 다른 작품으로 탄생했다. 이름하여 <북쪽 벽>. 

서도호, [북쪽 벽]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잠깐 주변을 비운 틈을 타 이 사진을 찍어오느라 한참을 기다려야 했는데, 투명하게 비치는 이 작품 앞뒤로 사람들이 한가롭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옛날 이 집에 살았을 사람들이 안에서 거니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게 바로 설치미술의 묘미겠거니.  바람이 불면 하늘하늘 연기처럼 흔들릴 것만 같은 느낌의 <서울집>(재질이 실크라고 하니까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과 달리 이 작품은 폴리에스터와 철사로 구현된 것이라 만지면 까슬까슬한 모기장 느낌이 날 것도 같았으나 확인할 길은 물론 없다. ㅋ

 

순전히 내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고, 암튼 작품 재질 때문에 손상을 우려해 브로셔도 못 갖고 들어가게 하는 (아마도) 실물 크기의 <뉴욕집>은 콘센트 하나 경첩 하나까지 일일이 천과 바느질로 정교하게 표현해놓아, 그 탄생 과정을 상상하면 숨이 막힐 정도였다.

 

하지만 한번에 다섯 명만 작품 '안'에 들어가 관람을 할 수 있는 탓에 15분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이 <뉴욕 집>보다 나는 그 뉴욕 집이 있는 건물의 전면과 현관을 표현한 작품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작품제목에 348이라는 저 주소가 들어갔던 것도 같은데;; 하나같이 작품 제목이 벽이나 기둥 한 귀퉁이에 숨어있다시피 해서 일일이 찾아보며 다녔는데도 벌써 전시 다녀온 지가 한참 되다보니 많이 까먹었다. 흑...

아무려나 이 작품이 줄 한참 서서 구경한 <뉴욕집>보다 좋았던 건 내가 초록색보다는 무작정 파란색을 더 선호하기 때문만은 아니겠고, 어느 공간으로든  어느 공간으로든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에 대해서 원래도 좀 관심이 많다.

나의 한옥 열망에는 가로지른 빗장을 풀고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솟을 대문으로 드나들고 싶은 욕망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난 작가가 느낀 정체성의 혼돈과 공간적 이질감 때문에 특히나 <집속의 집>이라는 주제와 이런 작품들이 탄생했으니, 작품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여러 종류의 문들도 예사로운 소재는 아닌 것 같다.

작품이 허공에 붕 떠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현관 입구의 계단부터 정겹다기보다는 어쩐지 위압당하는 느낌을 받은 건 내 착각이었으려나?

 

 

2층으로 이어지는 전시에서도 인상적인 문이 하나 더 있었다. '리움버전' <문>이라는 작품으로, 방처럼 따로 마련된 전시실에서 그 문에 여러가지 영상물을 비춰 볼 때마다 느낌을 달리했다. 작품의 반대편에서도 볼 수 있고 둥근 아치 밑으로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도 있게.

새들이 날아가고 매화가 피어나고, 노루가 지나가고, 시나브로 날이 저물고...

살아 움직이는 노루와 매화 그림, 서예 글씨체를 보며, 작가가 한국화를 전공했다니 직접 쓰고 그렸나보다, 완전 천재로구나 싶었는데 브로셔를 읽어보니 일본을 비롯해 다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차용한 거란다. 아시아 예술의 접목과 만남.. 이런 주제였던 것 같은데 브로셔를 벌써 홀랑 잃어버려 확인할 길이 없다. 결론은 2층 전시에서 이 작품 <문>이 제일 좋았다는 얘기. ㅋ

 

 

나와 달리 2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꼼꼼함과 정교함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별똥별>이라는 작품이었으나, 재미있는 발상과 섬세함에 감탄하기는 했어도 역시 난 한옥!이 더 좋았다. ㅎㅎㅎ 

낙하산에 매달려 날아온 한옥이 영국 어느 건물에 부딪혀 망가진 모습을 일일이 아파트 소품 하나하나까지 축소해 만들어 놓았던데, 사진으론 도저히 그 사실적인 정교함이 찍히질 않는다.

 

영상물을 보니 영국 무슨 비엔날레에서 실제로 한옥이 서양 건물 두채 사이에 날아와 떨어진 것처럼 작품을 전시한 적도 있던데, 이건 그 작품의 축소판인 셈. 

 

그밖에도 작품의 탄생과정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가지 평면도와 축소 모형, 빨간색 실을 풀분무기로 붙여 만든 듯한 작품도 있었으나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 한옥 작품들 주변에서 좀 더 서성거리다 돌아왔다. 앞으로도 <서도호 전시>라고 하면 지체없이 달려가 보게 될 것 같다.

 

 

어느덧 올해도 반년이 다 지나가려고 하는데, 돌아보니 이게 제대로 본 첫 전시인 듯하다. 이인성 회고전도 벌써 시작했으니 그건 놓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며, 마무리하는데 3주도 더 걸린 전시관람 후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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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한권의 책

놀잇감 2011. 10. 31. 08:33

언제부턴가 창덕궁에서는 봄과 가을에 후원 정자 몇개를 개방하고 책을 비치해 관람객을 유치(?)하는 연례행사를 벌인다. 이른바 한권의 책. 먼저 다녀온 이의 말에 따르면 비치된 책이라는 것이 몇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얄팍한 시와 에세이, 아동서 정도라 기대해선 안된다고 했다. 의미를 둔다면 평소 특별관람으로 후원엘 들어가도 해설사 안내에 따라서 한시간 반 이내에 쫓기듯 보고 나와야하는데 반해, 행사 기간에는 후원 정자 몇개에 들어가볼 수도 있고 후원 경내를 마음껏 돌아다녀도(물론 여전히 출입금지 구역은 있지만) 된다는 점이다. 봄과 가을에 딱 2주간씩 주어지는 혜택이라 요번엔(10월 30일까지였음) 날을 잡아 엄마랑 다녀왔다.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억새와 단풍 구경을 하고 싶다는 엄마의 눈치를 진작부터 받았으나, 나도 며칠 들먹 설레어 숙소와 항공편을 알아보다가는 제풀에 포기하고 만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니 작년에 일본 갔던 악몽이 다시 떠오르질 않겠나... (내 다시는 엄마랑 단둘이 여행 안가리라 다짐도 했었으니 -_-;) 해서 단풍구경은 서울에도 좋은 데가 있다는 걸 보여줄 작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풍구경은 절반의 실패였다. ㅠ.ㅠ 창덕궁에서 가을 책 행사 기간을 17-30일로 잡았길래 나는 지난번 반짝 추위로 단풍이 예년보다 일찍 들었나보다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켁, 나의 착각이었다. 10월말에 늘 한권의 책 행사를 기획하는 건 그때가 가을 행락철이라(말하자면 설악산, 내장산 같은데로 단풍구경 다니는!) 덩달아 그렇게 잡았다는 해설사의 설명. 단풍 예쁘게 든 후원구경을 할 요량이었다면 너무 일찍 왔다고 말했다. 쳇! 그렇지만 나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후원 정자와 전각에 들어가보는 것이었으니 얼른 마음을 달랬다. 드문드문 꽤 가을색으로 물든 나무들도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지난번 창덕궁엘 갔을 때만 해도 입장료 5천원에 인정전 일대와 후원의 부용정, 연경당 부근까지 보여주더니만 그새 시스템이 바뀌었다. 일반관람료는 3천원(65세이상 무료)이고 이 표로는 오로지 전각들이 있는 구역만 볼 수 있었다. 후원을 보려면 안에 따로 함양문 앞에 있는 후원 매표소에서 5천원짜리 특별관람권을 끊어야했다(경로우대 없음). 특별관람은 1회 입장인원도 원래 10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행사기간이라 200명으로 인원을 늘여준 덕분에 우리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3시 좀 넘어 궁에 들어가 전각 구역을 설렁설렁 돌아본 뒤(친구들이랑 다닐 땐 몰랐는데 궁궐엔 계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오르기는 수월하나 계단 내려오기는 울 왕비마마의 취약점이거늘... ㅠ.ㅠ 붙잡고 다니느라 모녀 동반 땀깨나 뺐다), 4시에 후원 입장하는 표를 끊었는데 내가 표를 살 때 전광판에 적힌 4시 관람 인원이 179명인가 그랬다. 평일 오후에 별러서 궁궐 거닐러 온 사람이 참 많기도 하지!

일본인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까지 바글거려서 전각 구역은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별로 없고 사진 한 장 못찍었다. 주워들은 풍월로 설명을 해보았으나, 엄마는 정민이 어릴 때 같이 갔던 경복궁과 계속 헷갈려했다. 열심히 설명하고 나면 그러니까 이게 근정전이지?(근정전은 경복궁에 있고 이건 인정전이라니깐~!) 저 대들보 없는 건물 뒤로 가면 예쁜 꽃담이랑 그림 달린 굴뚝 있었지?(거기는 경복궁 교태전이거든요... -_-") 뭐 이런 식...  암튼 엄마의 결론은 '창덕궁엔 처음인 것 같다'였다. 근데 넌 언제 그렇게 여길 자주 구경온 거니? 누구랑? @.,@ 엄마가 섭섭한 듯 추궁할 기세를 보이길래 커피랑 물 사온다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ㅋ

제대로 단풍이 들었다면 빨갛게 터널을 이루었을 후원 입구는 아직 초록빛이 완연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단풍 요란하게 드는 활엽수들은 원래부터 창덕궁에 있던 나무가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하도 좋아하여 새로 심은 것이란다. 옛날 궁궐 후원엔 변함없이 푸르른 소나무가 대부분이었다는 해설사의 이야기가 어찌나 새삼스럽던지(과거에 듣고도 까먹은 것일까나, 해설사 설명을 귓등으로 들은 것일까나). 단풍구경은 가을 궁궐이 제일이라며 그간 구경다닌 나는 뭐람. ㅎㅎ

부용지에서 올려다본 주합루

애련지와 애련정


아무튼 후원에 들어가 제일 처음 만나는 부용지 주변을 므흣하게 바라보며 인증샷을 찍었다. 바글거리는 사람 안 넣으려니 어찌나 힘든지 원... 위 사진 둘 다 한 사람씩 잡혀 있다. 왼쪽 여자는 무려 출입금지 팻말을 세개나 거슬러 계단을 올라가 사진을 찍던 외국인. 방송으로 내려오라고 해도 못 알아듣더라. 오른쪽 사진의 빨간 잠바 아줌마도 참 사진마다 내 앞을 가리며 속을 썩이더니 어느새 찍혀 있다. ㅋ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과 반도지

존덕정의 화려한 천장


원래는 궁궐이랑 엄마 사진을 제대로 찍어오려고 디지털 카메라도 가져갔었는데... 흑.. 두장 찍고 나니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집에서 켜봤을 땐 배터리 다 차있길래 그냥 가져간 건데.. 쩝... 하여간 후원이 깊어 그런지 4시를 넘기고 나니 해도 안비쳐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 참 다들 알량하다. 얼마만에 보는 반도지와 관람정인데! 으휴... 천장의 팔각형 단청이 유난히 아름다운 존덕정엔 정조의 친필 현판과 주련이 걸려있어 더욱 유명하다. 사진 오른쪽에 밤색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정조의 친필. 마침 존덕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어 얼른 걸터앉아 쉬며 사진을 찍었다.

연경당 뒤쪽부터는 나도 그야말로 난생처음 가보는 옥류천 일대! 등산이나 다름없다고 겁을 잔뜩 주는 바람에 엄마도 나도 긴장했는데 조금 가파른 비탈길이 있어 숨이 잠시 가빠지긴 했으나(그래서 옛날 왕들도 행차하기 힘들어 후원으로 안 넘어오고 창경궁 쪽으로 돌아 다녔단다) 금세 취규정인가 뭔가 하는 정자가 나타났다. 그담부터는 다시 내리막길. 호젓한 오솔길을 내려가니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물이 흐른다는 옥류천이었다. 커다란 바위를 깎아 물길을 내고 폭포(!)를 만들었다는데, 책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옥류천은 실물로 보니 어찌나 규모가 아담하신지... ㅋㅋㅋ

옥류천 폭포(?)

청의정과 태극정


숙종이 지었다는 한시가 돌에 새겨져있는 옥류천 주변에는 정자 셋이 조르륵 둘러쳐 있다.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이 남아있는 청의정! 원래 궁궐도를 보면 청의정 주변이 연못이었다는데 대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게 주변이 논으로 변했단다. 가을이라 추수를 마친 논 한 가운데 서 있는 청의정 모습이 참 신기했음. 논에서 벤 볏짚으로 청의정 지붕을 단장한다고 하므로, 논을 다시 연못으로 바꿀 수도 없겠다. 옥류천 일대는 창덕궁의 가장 북쪽 끝이라 담장이 빤히 보이고, 그 담장 너머엔 옛날 성균관이 있었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었나, 정조가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궁궐 전각까지 몰래 대물 일행을 피신시키던 장면이 떠올라 얼핏 웃었다. 그들도 산넘고 물건너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싶어서.
 
암튼 일단은 엄마를 위하여 해설사의 이야기를 따라 듣다가 나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전각에 들어가 쉬려고 마음 먹었던 우리는 옥류천에서 뒤처졌다. 원래도 정자보다는 전각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나가면서 부용지 옆에 있던  널찍한 영화당--옛날 과거시험 본부 건물이라고--에 올라가 쉬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못했다 ㅠ.ㅠ) 옥류천 옆쪽에 농산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는데다가 외져서 그런지 사람이 한명도 없는게 아닌가! 나는 냉큼 신발벗고 들어가 아픈 허리와 다리를 쉬었으나, 엄마는 신발 벗기 귀찮다고 툇마루에만 앉아 쉬셨다.

읽고픈 책이 한권도 없었다 -_-;

그만 좀 찍어라..고 하심


전각에 비치된 책은 저 정도... 예전에 세자와 왕들이 묵으며 학문을 닦던 곳이라는데 죄다 마룻바닥이니 겨울엔 얼마나 추웠을까. 일부러 공부만 하려고 북향으로 지은 전각들도 꽤 되던데 참... 왕과 왕자도 못할 짓이었다 싶다.

두다리를 쭉 뻗고...

깔고 앉으라고 방석도 놓아두었던데, 아무리 관리를 하더라도 곳곳의 나무가 들고 일어난 걸 보니 안타까웠다. 한옥은 목조주택이라 특히나 사람의 온기가 미치고 자꾸 밟아주어야 들뜨지 않는다는데, 일년에 두어번 행사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더욱이 농산정처럼 외진 전각은 행사기간에도 거의 외면당하는듯. 책꽂이 위에 방명록이 있던데 적힌 이름이 몇 되지 않았다. 나 또한 10분도 못 넘기고 쫓겨나야 했으니...

우리가 와글거리는 일행과 떨어져 전각에 들어앉으며, 이젠 더 볼 것도 설명 들을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자 밖에서 관리인인 듯한 아저씨가 말을 거들었다. 나가는 길에 700년된 향나무 설명 듣는 게 마지막인데, 작년 곤파스 때 부러져버렸다고. 그러면서 5시반에는 이곳을 나가야 하니 5분만 더 있다가 자기랑 같이 나가면 되겠다고 했다. 궁궐은 6시까지지만 옥류천 일대는 5시반에 관람시간이 끝난다는 것. 게다가 6시 되기 전이라도 좀 더 있으면 완전 깜깜해져 나가기 불편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우린 순순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 26분. 슬슬 일어서 나가려는데 아저씨가 너구리 좀 보라고 했다. 엥? 놀라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정자 옆 오솔길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너구리 두 마리! 나는 얼른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 아저씨는 무전기로  동료에게도 너구리 구경하라고 알렸다. "민OO씨! 그쪽으로 너구리 두 마리 올라갑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야생너구리가 살고 있다니! 신기해서 물어보니 꽤나 자주 나타나는 녀석들이란다. 대체 무얼 먹고 살까 염려되었으나 워낙 잡식성인데다 주변에 상수리나무가 많아 먹거리는 풍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뒤에서 보는 궁둥이가 아주 토실토실.

전각 문을 닫고 뒷정리를 하는 아저씨를 뒤에 남겨두고 우린 얼른 너구리를 따라 언덕길을 올랐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숲으로 피신하는 너구리를 멀리서나마 포착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데도 이 너구리란 놈 도망도 안가고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테면 찍어보라는 듯이... 아무리 서툰 목수가 연장 탓 한다해도 이미 해는 기울어 어둑한데 아이폰으로 당겨 찍어봤자 한계가 있었지만, 창덕궁 후원에서 만난 너구리 두 마리는 모녀의 가을 나들이에서 아주 유쾌한 마무리였다. 곧이어 열뻗치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주 금상첨화였을 텐데.... 흠...

아무튼 단풍구경이라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어도 도심에서 원없이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를 흡입하며 장단지 허벅지가 팍팍해질때까지 산책한번 거하게 잘한 셈이었다. 막판에 헐떡거리며 올랐던 가파른 언덕 대신 더욱 호젓하고 완만한 오솔길로 퇴청한 것도 좋았고.



이날의 산책이 어찌나 고되었던지 집에 돌아온 나는 10시를 넘기자마자 뻗어버렸다. 그러고는 새벽 4시에 잠이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보통 왕들이 원래 새벽 3, 4시에 일어나 아침부터 공부를 하고 온종일 업무를 본 뒤 밤 늦게 또 상소나 경전을 읽다가 자정에나 겨우 잠드는 삶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전날 들었는데, 그래서 4시에 잠이 깼나 킬킬 대며 생각했다. 틀림없는 왕족설의 증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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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

놀잇감 2011. 7. 26. 07:55

삼계탕 챙겨먹기도 지겨워진 중복날, 동생들과 갈비 먹으러 가자고 의기투합한 김에 주 목적지인 갈비집과 가까이 있다는 홍유릉에 들러 반나절을 보냈다. 지난 가을 융건릉 다녀왔다고 자랑했을 때, 친구가 지척에 있는 홍유릉에도 좀 왔다가 자기네(꽤 유명한 갈비집인데 수년째 통 못가봐서 상당히 미안했다 ^^;) 들러가라고 퉁박을 주었던 걸 내내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오릉이나 융건릉 만큼 규모가 커서 산책길이 꽤 길 것으로 예상했건만 웬걸, 입구에서 빤히 다 보이는 곳에 홍릉과 유릉이 바싹 붙어 있어 서로 5분도 안걸리는 거리라 산책을 운동 삼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래도 왕릉을 에워싼 숲은 깊고 높은 느낌이 들었고 잔디밭도 잘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피톤치드 섭취(?)의 의미로 나무 그늘에서 한참을 잘 쉬다 돌아왔다. 과거 서오릉에선 잔디밭에서 축구도 하고 놀았던 기억이 있으나, 조선 왕릉 세계문화유산 지정 덕분/탓인지 경건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지령이 내려진 모양이어서 이제 이곳에선 공과 글러브를 아예 갖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_+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대체 어떤 혜택이 있는 건지, 예산이 더 투입되어 좀 더 관리가 잘 되는 이점이 확실히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 세계자연유산 지정과 관련한 잡음을 봐도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세계적인 유산으로 지정을 받은 말든 지켜야할 문화재나 자연이라면 힘써 보호하면 그만 아닌가. 모든 호들갑엔 '야로'가 있을 것만 같아 통 못마땅하다. 암튼 그래서 가져간 축구공은 차보지도 못했고, 야구 캐치볼도 주차장에서 조금 하다 마는 아픔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뿌듯한 나들이였다고 인정. 

고종과 명성왕후를 모신 홍릉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금세 보이는 연못엔 연꽃도 피어있고 팔뚝보다 더 긴 잉어가 돌아다녔다. 한쪽 옆에는 내가 '핫도그'라고 부르는 수생식물이 자리를 잡았고.



왕릉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홍릉과 유릉은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중국의 제후국임을 거부하면서 건축양식도 다르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보기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홍살문부터 전각까지 이어지는 온갖 석상들이었다. 말과 해치, 양 모양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코끼리와 낙타도 있더라! 맨 안쪽에는 문신과 무신 상도 서 있고... 능 옆에 지어놓은 한옥도 규모가 꽤 대단했다. 

전각에서 비각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틈에 피어난 처음 보는 꽃이 하도 신기해서 검색해보려고 찍어왔다. 혹시 나무님이 꽃 이름을 아실지도 모르겠고. ^^;; 궁궐 가서도 늘 하는 타령이지만 왕릉을 돌아다니면서도 결론은 하나, 이런 정원을 갖고 싶다는 것. 으휴.


오솔길을 따라 순종과 왕후, 계비를 모두 합장했다는 유릉까지 한바퀴 돌고 나니 제일 앞장섰던 큰동생이 대문이 활짝 열린 한옥 안에서 우리를 마구 불렀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아예 드러누워 쉬면서...
보통 관람용 한옥엔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떡하니 적혀 있기마련인데, 여긴 참 관람객 친화적이로군, 하며 신나했다. 잘 깎은 잔디밭도 구석구석 밟아보았고, 사랑채와 행랑채 방문도 여기저기 열어보며 새로 깔고 바른 장판지와 창호지까지 감상했다. 결론은 또 하나로 귀결, 아 이렇게 잘 생긴 한옥에 살고 싶어라!


 

 

분합문을 들어 올려놓은 대청마루에
아예 이렇게 자리를 잡고 놀았다는 얘기다.
입장료 천원(초등학생은 500원^^)이 조금도 아깝지 않아! 여기 너무 좋다! 이러면서...
(올케는 잠시 뒤 쿠션 좋은 제 남편 배를 베고 드러누웠다 ㅋㅋ)
 
그렇게 한 20-30분쯤 있었던가?
관리인 아저씨가 대문으로 들어서더니 우리에게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_-; 
원래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라 늘 잠가두는데 일이 있어 잠시 대문을 열어놓았던 것 뿐이라고...
우리는 민망해 하며 얼른 밖으로 나왔지만 한옥의 묘미와 대청마루의 시원함은 이미 즐길대로 다 즐긴 뒤였다. ㅋㅋㅋ
나와서 보니 대문이 두 군데 있고 정문쪽 대문에는 빨간색으로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 있었다. ;-p 우린 진짜로 몰랐을 뿐이고!


더 볼 것도 할 것도 없어진 우리는 늦게 출발한 막내동생네가 합류할 때까지 눈에 띄는 제일 큰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냥 쉬기로 했다. 오전에 내린 비로 잔디밭은 축축했지만 그늘엔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음이라...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이 큰나무를 막내는 '낙엽송'이라 우겼는데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축축 늘어져 넓게 퍼진 가지가 아주 일품이어서 드러누워 올려다보며 므흣했다. 
 

 

요새 건강해지시면서 부쩍 콧바람을 쏘이고 싶어했던 울 엄마, 너무 가깝기는 했지만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복날 갈비 먹기'였으므로 먹기도 전에 흡족하셨는지 표정이 좋다. 휴대폰 들이대며 좀 웃어달랬더니 흔쾌히 협조도 하고.
 
그치만 새삼 사진으로 보니... 내가 아무리 '아줌마'라고 우겨도 어째볼 수 없는 할머니시구나. 역시나 아줌마는 내게 더 어울리는 호칭이었어. 그래도 염색 안한 회색 머리가 징그럽게 새카만 염색머리보다 나는야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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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지 5년 된 마루 TV가 며칠 전부터 화면이 흐려졌다. 왕비마마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TV시청인데 사람얼굴도 흐릿하고 자막 글씨는 못 읽을 정도라 게으른 인간치고는 꽤나 빨리 as 신청을 했다. 당장 그날로 기사가 방문했다. 탐욕과 비리의 상징인 그 대기업 물건을 자꾸 쓰게 제일 큰 이유는 역시 빠른 as 때문임이 실감났다. 어쨌거나 가전제품 5년이면 우리집에선 완전 새것인 축에 드는데 고장이 났으니 빈정상하긴 했다. 브라운관이 부실해 포커스가 나갔다며 최대한 조정해주고는, 언제 또 그럴지 모른다는 하나마나한 대답을 하는 기사에게 나는 왜 산지 15년도 넘은 같은 회사의 TV는 아직도 멀쩡한데 새것이 망가지느냐고 따졌다. 비싯 웃으며 <옛날 게 다 더 튼튼하기 때문>이란다. 옛날엔 HD니 뭐니 하는 특수 기능도 없이 구조가 단순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얄팍하게 벽걸이형으로 나온 LED나 PDP TV의 수명은 더 짧다는 것도 같다. 겉모양만 번지르르할 뿐이지...

내방에 있는 볼썽사납게 뚱뚱한 TV는 20년쯤 나이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15년 전에 집 뒤쪽에서 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흙더미와 함께 방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수재>를 겪고도 아직 멀쩡하다. 물론 제일 오래된 거라서 케이블 컨버터가 없으면 나오는 방송이 딱 공중파와 홈쇼핑 채널 뿐이지만, 옆구리에 그날의 흔적이 황토색 흠집으로 남아있는데도 속썩인 적이 없으니 특히 전자제품은 오래될수록 튼튼하단 얘기가 맞다. 여름에 포스팅한 골드스타 선풍기의 수명을 봐도 수긍이 간다. 기술력은 훨씬 더 발전했을 텐데 왜 내구성은 자꾸만 떨어지게 만드는걸까? 소비를 촉진해 무작정 돈을 벌려는 속셈? 아니면, 한국인들이 그만큼 싫증을 잘내서 빨리 망가지는 제품을 선호하나? 얼리 어답터가 칭송받는 시대이니 일부는 그럴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게으르고 귀찮음 많은 인간들은 분명 하나 사서 오래오래 쓰고 그래서 마음에 들면 다시 그 브랜드를 선택하는 충성심을 발휘할 텐데, 다 내마음 같은 건 아닌 모양이다.

점점 내구성이 떨어지는 건 비단 전자제품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타워팰리스 같은 데는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번드르르 유명한 브랜드 이름이 붙은 새 아파트엘 가봐도 층간소음이나 방음은 놀랍게도 낡은 우리집만 못한 것 같다. 물론 이 집도 수돗물 소리가 요란하고 요즘 집에 비해 천장이 낮은 문제를 비롯해 여러가지 단점이 있지만, 여름에 창문을 다 열어놓지 않는 한 지금껏 살면서 애들 뛰고 떠드는 소리, 쿵쾅거리는 소리로 이웃간에 싸움 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요즘 새로 짓거나 주인 마음대로 개조한 아파트는 방마다 문턱을 없애는 추세인 걸로 아는데, 문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방음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물론 장애인의 거동이나 아기의 활동에는 방마다 문턱을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나처럼 쓸데없이 민감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에게 소음 문제는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하는 요건이다.

이 집에선 왕비마마가 마루에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봐도 작업실 방문을 콕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헌데 문턱을 없앤 동생네 집엘 가보면 문을 닫아도 다른 방에서 하는 얘기가 다 들린다. 지진 때문에 나무를 주골재로 짓고 카페트를 온 집안에 깔고 사는 미서부의 친구 집에서도 느꼈던 문제다. 푹신한 카페트가 별도의 방음재 역할을 할 텐데도 문턱 없는 방문은 닫으나 마나 옆방 소리가 다 들렸다. 잠자리도 선데다 온갖 소음이 방문 아래쪽의 좁은 틈으로 다 쏟아져들어오는 느낌이라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카페트가 화장실까지 이어져 거기도 문턱이 없으니 볼일도 마음 놓고 못 볼 정도로!

<안춥게 개조한 한옥>에 대한 로망을 내가 버리지 못하는 건 어쩌면 한옥이 오래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숭례문이 인간의 실수로 하루 아침에 불타버리긴 했지만 대표적인 한옥인 그 건물만 봐도 나무로 지은 한옥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옥은 숨을 쉬며 살아 있는 집이라 계속 여기저기 손보고 고쳐가며 살아야한다지만 (양옥이든 아파트든 계속 손보고 고치긴 마찬가지다 뭐;; 몇년에 한번 페인트칠해야지 방수액 도포해야지...) 그래도 나는 오래오래 튼튼한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에 살고 싶고, 최대한 쓰레기 만들지 않게 오래 가는 튼튼한 물건들을 쓰며 살고 싶다. 오래될수록 튼튼할 가능성은 전무한 인간이기에 더더욱.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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