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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0 연필이 좋다 19
  2. 2008.11.07 궁궐 나들이 20
  3. 2008.10.14 가을꽃 12
  4. 2008.09.29 스카프의 계절 15
  5. 2008.08.25 커피 메뉴 19
  6. 2008.08.16 고흐의 각도 11
  7. 2008.07.26 자전거와 커피 20

연필이 좋다

놀잇감 2008. 11. 20. 18:08

문방구를 사모으는 것은 꽤 오래된 나의 취미다.
오래 전엔 눈가가 달착지근 아련해지는 파스텔 톤의 편지지를 모으던 때도 있었고,
수첩류와 무지공책, 예쁜 볼펜, 스티커, 메모지 따위를 주섬주섬 사모으던 시기를 거쳐
요샌 뭐든 주제를 정해 온갖 문방구류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첫 주제를 자전거로 정하긴 했지만 아직 '모았다'고 할 만큼의 아이템을 마련하진 못한 상태.
자전거를 장만해놓고도 게으름 탓에 제대로 타지 못하는 죄책감을 은근히 다른 소비 욕망으로 떠넘기려는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으나, 어쨌든 자전거 그림이 들어간 문방구를 유심히 찾아보겠다고 결심한 뒤 처음 눈에 띈 물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출처: 텐바이텐 all rights reserved by gongjang

자전거 그림이 들어갔대서 무조건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자전거의 환경 지향적인 메시지를 담아 재생신문지로 흑연을 말아 연필을 만들었대고, 연필이 담긴 종이 케이스도 접착제 대신 실로 박았다는데 그 만듦새가 퍽이나 정성스러웠다.
사실 자전거 그림은 약간 성의가 없게 느껴져 내 취향에 딱 맞아 떨어지는 풍은 아니지만 슬슬 휘갈겨도 잘 써지는 연필심의 부드러움과 연필깎이로 깎아놓은 돌돌말린 연필밥이 내 마음에 꼭 들어서 요샌 뭐든 메모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이 연필을 사용한다.

모름지기 연필은 연필깎이로 둘둘 돌려 갈아놓는 것보다는 일일이 칼로 약간 기름하게 깎아 세로 결을 살려놓아야 내 마음에 꼭 드는데, 이 연필은 나무가 아니라 칼날이 잘 먹히지 않을 것 같아 앙증맞은 연필깎이도 하나 장만하고야 말았다.
하지만 연필깎이는 어디까지나 이 연필 전용이고, 나머지 연필들은 죄다 칼로 깎아쓰고 있는데 전동이든 수동이든 연필깎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옛날과 똑같다.

내가 처음으로 손수 연필을 칼로 깎아 쓴 게 언제인지는 돌이켜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는 미제인지 독일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주물(혹은 무쇠?)로 된 투박한 수동연필깎이가 있었다. 원래 책상에 못으로 고정시키는 형태여서 아빠는 둥근 쇳덩어리 같이 생긴 그 연필깎이를 두툼한 나무토막에 못으로 고정시켜주셨는데, 우리 삼남매는 연필을 깎을 때면 양발로 그 나무토막의 양 귀퉁이를 누른 뒤 구멍에 연필을 꽂고 한손으로 누르며 다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그 다음엔 플라스틱으로 된 집 모양의 연필깎이도 생겨났던 것 같다. 연필을 꽂는 구멍에 집게 같은 것이 달려 그걸 젖히고 연필을 꽂으면 고정이 되기 때문에 이제 양발을 사용할 필요는 없어졌고 한손으로 연필깎이 꼭대기를 지그시 누르며 손잡이를 돌리면 됐다.
물론 몇십원짜리 휴대용 연필깎이를 늘 필통에 넣고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요즘도 아이라이너 전용으로 사용되는 손가락마디 만한 소형 연필깎이 말이다. 

그런데 나는 소형이든 대형이든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는 게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적당히 연필이 깎였을 때 빼지 않으면 연필 한 자루를 금방 몽당연필로 만들 수 있는 막강한 기계식 칼날이 싫기도 했지만, 나는 잘 드는 칼로 사각사각 연필을 돌려가며 나무를 벗겨내고 마지막에 심을 너무 가늘지 않게, 적당한 길이와 두께로 깎아놓아야 성에 찼다. 그래서 이틀에 한번은 연필 다섯자루를 가지런히 깎아 필통에 키 순서대로 넣어놓으며 몹시 뿌듯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연필의 질이 형편없었다. 심이 골아서(자꾸 떨어뜨린 탓이다) 연필을 깎고 또 깎아도 툭툭 부러져 나가는 연필이 흔했고, 재질과 색깔이 다른 나무를 붙여놓은 연필을 깎다보면 결이 이상해 깎이는 게 아니라 나뭇결을 따라 쪼개져 흑연심이 뭉텅 드러나는 연필도 있었다. 겉으로는 HB라고 적혀 있어도 심이 너무 단단해 색도 흐리고 걸핏하면 공책을 찢어먹는 연필도 종종 만났다. 그러다 겉모습도 매끈한 독일제나 잠자리가 그려진 일제, 하얀 지우개가 끝에 달린 노란 미제 연필이라도 손에 넣게 되면 부드럽게 써지는 필기감도 좋았지만 칼날 끝에서 부드럽게 밀려나가듯 깎이는 삼나무 재질(국산연필보다 심히 부드러운 나뭇결이 신기해 나중에 알아보니 삼나무라고 했던 듯)의 연필밥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었는지 모른다.
신문지를 떡하니 펼쳐놓고 바닥에 앉아 칼로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묘미는 나만이 즐겼던 것일까?
고모부가 출장에서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 세트엔 작은 연필깎이도 함께 들어 있었지만, 나는 예쁜 색심까지 날카롭게 깎이는 게 아깝고 싫어서 언제나 칼로 색연필을 깎았는데, 특히 색연필을 깎고 나서 모인 연필밥은 너무 예뻐서 단숨에 버리지 못하고 작은 통에 모아두기도 했었다. +_+

하지만 연필 깎는 칼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게 된 건 분명 국민학교 고학년 때나 가능했을 것이고, 그 전엔 연필깎이나 어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연필깎는 칼의 형태가 대단히 위험한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이었기 때문이다. 휘청휘청 얇고 너무도 예리해서 나에겐 손을 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 '도루코 면도날'을 반쪽으로 잘라(쓰다가 반쪽으로 잘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연필을 솜씨 좋게 깎아주던 최초의 손은 우리 할아버지의 것이었다.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모든 재주에 능하셨던 한량 출신의 할아버지는 서예도 일품이고 한시도 읊으시고 심심풀이로 조각도 하셨으니, 그까짓 연필 정도 깎는 것이야 우스우셨을 게다. 그리고 짐작컨대 연필깎이에서 나오는 방정맞고 짤뚱한 연필 모양에 비해 약간 길쭉하고 늘씬한 느낌의 연필을 깎아내는 나의 취향은 할아버지한테서 비롯된 듯하다. 나와는 겨우 아홉살 차이가 나고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우리 막내고모가 깎아놓은 연필 모양도 내 솜씨와 비슷한 걸 어른이 된 후에 깨달었는데, 그땐 그게 고모를 우러러보던 어린 조카의 무의식적인 모방이라 여겼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우리 막내고모와 내가 둘 다 연필깎기를 제대로 배운 인물이 할아버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너무 작아서 할아버지가 놓치면 어쩌나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반쪽짜리 도루코 면도날은 언제나 요술을 부리듯 일정한 길이로 깎인 늘씬한 연필을 탄생시켰다. 도루코 면도날 다음으로 쓰인 칼은 역시 도루코에서 나온 문방구용 칼이었는데 칼날이 좀 더 단단하고 윗부분엔 알루미늄으로 덧씌워 손으로 잡고 쓰기에 편하게 생겨먹은 그 칼도 역시나 작아서,  할아버지댁에서 분가해 나온 부모님과 살던 저학년 때엔 엄마나 아빠가 내 대신 연필을 깎아주었던 것 같다. 삼남매의 연필을 깎아주기가 번거로워져서 부모님이 연필깎이를 장만했을 수도 있겠고.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일본에서 대거 수입된 앙증맞고 예쁜 샤프펜슬에 혹해 연필을 멀리했고 수학이 아닌 한 공책에 쓰는 필기도구도 볼펜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연필에 대한 추억이 덜하긴 하지만, 특활로 미술반 활동을 했으므로 누가 뭐래도 데생 연필은 질 좋은 나무와 흑연이 들어있는 걸 골라 정성스레 칼로 깎아 갖고 다녔고 심이 물러 잘 부러지는 4B, 2B 연필 하나를 제대로 사겠다고 큰 문방구를 뒤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때는 연필과의 완전 절교 시기였고, 나의 연필 사랑이 다시 불붙은 건 직장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미국 의류회사의 서울 구매사무소라는 허울만 그럴듯했을 뿐 처음 사무실은 대단히 허름했는데
놀랍게도 메모지와 연필, 볼펜, 노트패드 같은 사무용품은 뉴욕 본사에서 보내준 것을 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허영심이라 실소가 나오지만, 어쨌든 일년에 두세 번 한국에 들르는 사장이 한국에서도 미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사무용품을 써야 직성이 풀리는 까다로운 인간이라 그렇게 됐다고 했다.
특히 사장이 하얀 지우개가 달린 노란 미제 연필로 메모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품함엔 절대로 연필을 떨어뜨리면 안된다고 했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 인간이 일년에 쓰게 될 연필이 한자루나 될까말까 한데, 본사에선 분기별로 연필을 비롯한 사무용품을 몇 박스씩 보내주었으니 참 웃기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사무용품 사물함에 들어 있는 갖가지 문방구류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회사 로고까지 인쇄해 넣은 전화 메모용 포스트잇도 좋았고, 대학때 즐겨쓰던 빅볼펜과 노란연필을 마음껏 쓰는 것도 좋았다. 
특히 팩스 비용 최소화를 위해 발신 팩스는 한꺼번에 타이피스트에게 타이핑을 시켰는데
그 전에 이면지에 초고를 쓸 땐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 듯 다들 연필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짧은 영어로 통신문을 작성하려니 모두들 학생 기분으로 돌아가 답안을 작성하듯 정성을 들였던 게 아닐까. ^^
암튼 볼펜과 연필, 갖가지 크기의 노란색 메모패드, 각종 포스트잇은 집에도 가져다놓고 썼는데
그 회사를 관두고도 몇년동안은 그때 집어온 메모패드와 노란 연필을 아주 요긴하게 집에서 써먹었던 기억이 있다. ^^;

직장생활을 관두고 나서 만날 컴퓨터와 씨름을 하던 내가 다시 연필깎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역시 조카들이 생기고부터다. 우리 조카들은 넷 가운데 돌잡이에서 세 녀석이나 연필을 잡았을 정도로 아기때부터 연필을 좋아했고 나는 조카들이 해놓은 의미없는 낙서라도 그저 대가의 작품인 양 호들갑을 떨며 열심히 연필을 깎아 그들에게 바쳤다.

마분지에 연필. 정민공주 5세때 작품


그런 정성을 들이면 이런 그림도 간간이 하사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언젠가 내가 기분전환 삼아 파마를 한 다음에 그려달라고 졸라서 얻은 건데, 나중에 정민공주가 유명한 화가가 되면 전시하려고 고이 간직해두고 있다. ㅋㅋ

암튼 나는 요즘 마냥 연필이 좋다.
조카들이 쓰다가 두고 간 동아니, 모나미니 하는 알록달록한 연필들이 벌써 죄다 몽당연필로 변해버렸지만 좀체 버릴 수가 없다.
이제 겨우 세살 된 조카의 손엔 몽당연필이 또 제격이기도 하고, 모나미 볼펜 몸통을 끼워 하나쯤은 꼭 들고 다니던 몽당연필의 추억 때문에라도 최대한 끝까지 써볼 작정이다.
물론 자전거 그림 뿐만 아니라 돌고래 무늬와 아무 무늬없는 나무색 연필, 단순한 느낌의 검정 연필도 기어이 사들였다.
검정 나무로 된 연필은 아마 또 칼로 연필을 깎아놓은 연필밥을 버리기 아까워할 것 같아 아직 구경만 하고 있다.

글씨체가 부끄러워 요샌 뭐든 손으로 쓰는 걸 두려워하게 되는데 사각사각 소리도 경쾌한 연필로는 연애편지라도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편지 보낼 연인이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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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나들이

놀잇감 2008. 11. 7. 01:25


원없이 한옥을 구경하고 너른 마당을 거닐고 싶다면 뭐니뭐니해도 궁궐 나들이가 최고다. 
덤으로 단풍구경에 낙엽길 산책까지 욕심을 낸다면 가을에 창덕궁을 찾으면 된다.
걷는 걸 즐기지 않는데도 이상스레 나는 궁궐 나들이가 좋다.
이젠 문화재 보호를 위해 도시락 까먹고 돌아다니는 소풍이나 사생대회가 금지됐다지만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거의 주말마다 경복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고
어른이 된 뒤엔 계절에 따라 눈부시게 변하는 창덕궁과 후원 구경 다니는 것이 낙이었다.
일제때 훼손된 건물들을 복원하느라 창덕궁엘 가보면 늘 한구석은 공사중이었고
궁궐 관련 책을 보면 제대로 다시 짓지 않아 어느 문은 길과 틀어졌고 복원되어 깔린 어느 박석은 기계로 다듬어 인공미를 펄펄 풍긴다고 개탄을 해놓았지만, 그래도 나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인정전이며, 대조전, 이름 까먹은 건물들을 이어놓은 회랑과 난간이 아름다운 복도를 이리저리 구경다니는 게 왜 그리 뿌듯하고 좋았는지.
궁궐 마당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그윽하게 차오르는 것이 흐뭇하고 뿌듯해져 아무래도 전생에 궁궐에 사는 공주였나보다고 내가 중얼거리면, 일행들은 "공주가 아니라 궁녀였겠지!"라고 퉁박을 주기 일쑤지만 암튼 나는 창덕궁에 갈 때마다 후원이 우리집 뒤뜰이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꾼다. 
연두색 여린 잎과 꽃잔치가 벌어지는 봄도 예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도 아름답지만
새하얀 눈세상이 된 호젓한 궁궐 흙길에 발자국을 찍으며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겨울 창덕궁도 까무라치게 멋지다.

암튼 작년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창덕궁에 가고 싶어서 궁궐 단풍놀이 가자고 지인들을 꼬드겨 지난 화요일에 다녀왔다.
대장금 (아직도!) 영향으로 일본관광객이 많다는 얘긴 들은 것 같은데, 요샌 나 말고도 궁궐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평일 오후인데도 한번에 들어가는 입장객이 엄청났다. 여나믄 명이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 들을 때나 오붓하고 좋지, 백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려니 설명 듣는 건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고 사진을 찍는 것도 전각 구경도 마음에 찰 만큼 기회가 없었다. 
추억이 미화되는 경향을 감안한다 해도 올해 창덕궁 후원의 단풍은 정말 보잘것 없었고(가물어서 전국적으로 올해 단풍이 예쁘질 않다더니, 물도 들기 전에 잎이 반이상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1년 넘게 발길을 끊은 사이 전각들의 기와를 대거 새로이 얹고 단청 또한 죄다 새로 칠해놓는 바람에 너무 새것 같아 나에겐 마냥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왕족들이 사는 것처럼 갈고 닦는다면야 좋긴 하겠지만, 인정전 내부에 걸린 왜식 전등이며 커튼은 새카맣게 때가 찌들었는데 바깥 단청만 화려하게 새로 칠하면 뭣하나. 그렇다고 단청이 죄다 벗겨진 초라한 모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모름지기 궁궐이란 수백년 세월의 무게를 적당히 간직한 모습이어야 격에 맞는 것 같다.
계속된 복원과 보호 때문인지 창덕궁은 갈 때마다 관람코스가 조금씩 달라진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최근에 복원한 낙선재를 매번 보여주더니, 치사하게 낙선재는 특별관람 코스로 나뉘었고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도 특별관람으로나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예약으로 날을 잡아야 하는 특별관람은 이미 인원이 다 차고 없어 우린 결국 3천원짜리 일반관람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2년만에 찾는 창덕궁은 그래도 좋았다.


나는 궁궐에서도 화려한 단청보다 문의 꽃무늬 살대, 기와지붕 옆면의 세모난 공간('합각'이라고 한다)의 장식이며 난간 같은 게 참 좋다. 구석구석 어쩜 저렇게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깃들여놓았는지...

애련지와 애련정



몇해전 가을엔 3초마다 탄성이 나올만큼 아름다웠던 후원의 단풍은 애련지 주변에서나 조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연못 근처라 나무에 물이 올랐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확실하진 않다.

고운 가을단풍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후원은 그저 숲만으로도 아름답고 거기 어우러진 정자와 전각들은 보기만해도 뿌듯하다. 




창덕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바로 후원 안에 자리잡은 부용지 주변이다.
부용지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부용정도 아름답지만, 그와 마주보며 언덕에 서있는 주합루는 어쩜 그리도 우아하면서 위풍당당한지. 원래 2층으로 지은 한옥은 1층을 '각', 2층을 '누'라고 부르기 때문에 주합루는 엄밀히 2층만을 부르는 이름이다. 1층은 정조가 세운 그 유명한 '규장각'인데, 올라가볼 순 없었지만 위쪽은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적당히 낡고 풍파를 이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부용지를 굽어보며 서있는 주합루

단아한 부용정



옥류천과 낙선재를 보지 못해 어쩐지 아쉬웠던 우리는 창덕궁을 나서 안국동으로 걷다가 내친김에 운현궁에도 들렀다. 다채로운 단청이 없어도 한옥이 그 자체로 얼마나 우아하고 당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건물들을 실컷 구경하려니 반나절 내리 걸었어도 다리아픈 줄을 모르겠더라.
운현궁 같은 한옥에 사는 건 몇번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겠지만, 아무려나 이런 한옥에 산다면 매일매일 열심히 산책하며 마음을 닦을 수 있을 것만 같다. ㅠ.ㅠ

운현궁의 드넓은 마당에 둘러쳐진 저 아름다운 담장을 보라! +_+

짧은 궁궐 나들이가 아쉬워서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같이 또 오자고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조만간 자유관람이 가능하다는 목요일에 날을 잡아서 마음껏 창덕궁 후원을 쏘다녀 봐야겠다는 생각이 사진을 올리면서 더욱 강해진다.
이왕이면 궁궐지킴이 같은 걸로 후원자도 되고 자원봉사를 해서 전각 안에 들어가는 영광도 누리고 싶지만, 워낙 청소하는 걸 싫어하니 매번 망설이다 포기하게 된다. 아쉬운 대로 철철이 궁궐 나들이나 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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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놀잇감 2008. 10. 14. 17:54

이어지는 가을타령.
가을이면 해마다 무슨 의식을 거행하는 것도 아닌데 소국을 사들인다.
처음엔 가을이 끝날 때까지 계속 소국을 즐기며 살리라 마음먹지만, 돌이켜보면 꽃을 사들이는 건 늘 10월쯤에 한번뿐이었던 것도 같다.
가을을 너무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이유는 홍옥과 소국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될 만큼, 작은 꽃병에 꽂아놓은 한움큼의 소국을 바라보며 새콤달콤한 홍옥의 보드라운 과육을 아삭아삭 통째로 깨물어 먹다가 앙상한 속씨 토막을 던져버리는 일은 내게 아주 큰 행복이다.

며칠 전 밤중 귀가길에 나를 기다렸다는 듯 리어카에 소담하게 꽂혀 있는 색색깔의 소국 가운데 어렵사리 노란 걸 골라 한다발 청했더니 아줌마는 물어보지도 않고 연보라색 소국 몇 줄기를 함께 싸주셨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삼천원의 행복은 넉넉한 아줌마 인심 덕분에 두 배로 누리게 됐다.

화려하지도 않고 달콤하지도 않은, 어쩐지 누리끼리한 향기가 나는 소국을 나눠 꽂아놓고는
게으름뱅이답지 않게 매일 물을 갈아준다.
이러면 이 작은 행복을 열흘은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컴퓨터를 뒤져 꽃사진을 찾아보니, 해마다 사들인 소국을 해마다 사진으로 담아두는 촌스러움을 한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나만의 대단한 가을의식일 뻔 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제부터라도 촌스러운 전통을 만들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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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프의 계절

놀잇감 2008. 9. 29. 16:44

언제부턴가 스카프만 보면 광분하는 경향이 생겼다.
비교적 어린 주변 지인들이 스카프 매는 걸 껄끄러워하는 걸 보며 곰곰이 따져보니, 나도 20대 초반엔 스카프를 꽤나 거추장스러워했고 노회함의 상징이라 여겼던 것도 같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거추장스럽더라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선물로 받거나 어디서 생겨 매고다니던 스카프의 매끄러운 실크의 감촉은 좋아도 훌러덩 미끄러져 빠져버리거나 흘리는 일도 잦았기 때문에 찬찬하지 못한 나로선 간수가 그리 쉽질 않았다. 그래서 날씨가 아주 쌀쌀해지면 얼른 모직이나 털 목도리로 바꿔 매곤 했다.
그러다 아주 마음에 드는 스카프를 내 손으로 구입하기도 하고 즐겨 매고 다니는 일이 시작된 건 20대중후반부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 '애기'나 다름없는 스물여섯, 스물일곱 살의 나는 후반부 직장생활에서 늘 최고참 여직원이었다. -_-;; 업계를 잘못 선택한 내 탓이 컸지만,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최대한 위엄있게 보일 필요가 많았고 회사에선 유니폼을 입어야하는 데도 거의 정장을 입고 출퇴근을 했다.
여성의류를 다루던 첫 회사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옷차림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준다> 따위의 원칙에 너무 세뇌당했던 탓에 청바지에 티쪼가리 같은 걸 입고선 도저히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지만, 암튼 그땐 그랬다. ^^
그리고 그때 멋스러운 스카프 한 장을 목에 두르면 (짧은 목을 남들이 답답하게 여기거나 말거나;;) 내 나름대로는 노회한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암튼 예나 지금이나 단조롭거나 실증난 옷차림이라도 스카프 하나만 잘 골라 매주면 그럭저럭 신선함을 느낄 수도 있음은 물론이고 보온효과도 대단하지 않은가 말이다. 목을 감싸주면 체감온도가 5도쯤이나 올라간다는 말을 최근 몇년 꾸준히 들어온 듯한데, 이미 나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 진리를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즘엔 한 여름에도 깊이 파인 목선에 가늘게 스카프를 둘러메는 인간들이 있을 만큼 스카프가 유행이라 번쩍이는 실크 이외에도 다양한 질감과 색감의 스카프가 선을 보이고 있으니 나로선 반갑기 그지없다.

물론 난 그렇게 유난을 떨 정도로 목이 길거나 우아하지도 않고;;;
참을성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여름 지나고 찬바람 불기 시작해서 한 겨울, 그리고 봄까지는 멋스럽기도 하고 보온성 또한 뛰어난 스카프를 애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삶을 단출하게 꾸려야 한다고, 쓸모없는 과잉의 욕심을 버려야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좋아하는 물건에 대한 애착은 쉬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해마다 고민고민하다 정리해 버리기도 하지만 옷장엔 여전히 20년 가까이 된 스카프부터 최근에 사들이거나 선물 받은 스카프까지 빼곡하게 매달려 서로 매달라고 나를 유혹하고 있는데(왜 스카프는 해지지 않는 거냐!), 가을이 되면 나는 마치 나쁜 습관을 완전히 끊지 못한 중독자처럼 스카프에 탐닉한다. +_+

몇년 전 늦가을엔 한꺼번에 스카프를 세 장이나 사놓고는, 미쳤어 미쳤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한편으로 풍성해진 스카프 옷걸이를 보며 기뻐한 뒤 스카프 욕심 좀 그만 부리자고 다짐했고, 정 사고픈 스카프가 있으면 내가 사는 대신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누렸었다.
그러나 그 의지력의 약기운이 떨어졌는지, 올해도 지인의 생일선물을 스카프로 고르다가 급기야... 내 스카프도 사고 말았다. 그것도 두장이나. ㅎㅎ

그리고 그 스카프가 조금 전 택배로 배달되었다!
당장이라도 스카프를 두르고 나가 걸으며 바람에 펄럭이는 스카프 자락의 미묘한 흔들림을 만끽하고 싶지만 어느것부터 매고 싶은지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할 수가 없다.
내일 약속 때까지는 정해야 할 턴데... ^_______________^

끝없는 나의 스카프 욕심에 핀잔을 주는 엄마한테 들킬까봐 얼른 별것 아니라고 얼버부리면서 꽤나 찔리긴 했지만, 까짓것, 수십만원짜리 사치품도 아니니 이정도 소박한 기쁨을 누리는 건 허락될 수 있다고 믿을란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가 속상해서 바야흐로 스카프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사실로 위로 좀 받겠다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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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메뉴

식탐보고서 2008. 8. 25. 17:15

비알레띠 브리카가 생긴 뒤로는 정말로 매일 커피 만들어 마시는 재미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시절 소꿉장난을 별로 좋아하진 않은 것 같은데, 다 커서 그 묘미에 빠진 걸까.
퍽 귀찮은 과정이긴 해도 커피 한잔을 만들면 금세 온 집안에 향기로운 커피향이 가득해지니
후텁지근한 여름 습기와 불쾌지수를 잠시 잊는 데도 꽤 도움이 되었다.
물론 내가 아마추어 바리스타의 기분을 내며 흥미진진해 할 수 있는 건 겨우 한 잔까지. -_-;;
2인용(이라지만 에스프레소가 2잔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에 보통은 한번 끓여서 커피 한 잔 만들 수 있다) 모카포트로 여러명이 마실 커피를 만들려면 매번 물을 담고 커피를 갈고 담고 쏟고 또 카푸치노 같은 경우 우유를 장만하는 과정이 더해져 총 2, 30분 걸리기 때문에 한 사람은 벌써 다 마셔가는 즈음에야 다음 커피가 배달된다.
다행히 아직은 2잔을 넘는 커피 주문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커피 만들다 약간 지치는 수준만 경험해 보았지만, 서너 잔을 줄줄이 만들어야 한다면 꽥~ 짜증을 부릴지도 모르겠다. ㅋ

째뜬 그간 순전히 블로그질을 위해 찍은 사진들을 모아 란다방 커피 메뉴를 소개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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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프레소
비알레띠 브리카에 딸려온 컵의 눈금대로(선보다 5mm낮게) 물을 붓고 커피를 필터에 적당히 채워 끓이면 이런 에스프레소가 2잔 나온다.
가끔 정신이 확 깨고 싶을 때 설탕을 좀 타서 마시기는 하는데 아직 식도가 끈적해지는 느낌의 에스프레소의 진맛을 느끼지는 못하겠다. ^^
이렇게 추출된 에스프레소 두 잔을 모두 큰 잔에 붓고 끓인 물을 추가해 희석하여 '아메리카노'라고 부르며 마실 때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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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푸치노
우유를 1/3컵쯤 전자렌지에 데워서 거품기로 거품을 내야 하는데 처음엔 우유를 컵에 너무 많이 따라서 사방으로 막 튕기고 난리를 피웠다.
거품의 밀도가 중요하다는데, 난 뭐 그냥 적당히 거품을 내서 에스프레소를 담은 잔에 부은 뒤 마지막 거품을 스푼으로 떠 얹으면 부드럽고 맛있는 카푸치노가 되더군.
계피가루를 살짝 뿌려 마시면 내가 최고로 치는 콩다방 카푸치노가 부럽지 않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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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으로 잔을 가득 채운 뒤에 에스프레소 두잔을 넣어 쓱쓱 흔들면
이렇게 된다.
헉헉대며 선풍기와 에어컨 사이에서 고민하던 올 여름, 매일 이거 한 잔으로 잠깐이나마 행복을 맛볼 수 있었던 고마운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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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스 카페라떼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우유를 조금 부으면 카페라떼가 된다. ^^*
원래 설탕은 잘 넣지 않으므로 시럽 따위는 없지만, 달달한 카페라떼를 원하는 이에겐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녹여 부어 만들면 됨.
오늘 오후에도 한 잔 마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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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 프라프치노?
개인적으로 별다방보다 콩다방을 많이 선호하지만 프라프치노는 역시 별다방 게 제일 맛있다고 인정하는 바인데, 까짓것 얼음 넣고 우유 넣고 드르륵 갈면 되겠지 싶어서 시도해 봤다.
커피와 우유의 양에 따라 색깔과 맛이 들쭉날쭉 매번 달라지며, 달달한 별다방 프라프치노 맛을 내려면 설탕을 '엄청'(최소한 세 스푼 이상)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수확이랄까. 연유를 넣으면 맛이 더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먹는 기쁨에 수반되는 귀찮은 설거지 과정이 가장 복잡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안 먹고 만다! ㅋㅋ

아 참..
이 모든 커피 메뉴에 필요한 도구는 브리카와 그라인더, 카푸치노 만들 때만 필요한 거품기가 전부.
귀찮아서라도 거품기는 잘 안쓰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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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커피 메뉴는 아마도 더는 생겨나지 않을 듯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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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각도

놀잇감 2008. 8. 16. 16:20
이요님 블로그에서 보고선 홍대앞에서 약속이 있었던 김에 옳다구나 찾아간 류승호의 작은 전시회.
<고흐의 각도>
고흐의 익숙한 그림들을 3차원 공간에 재구성해 놓았다.
홍대앞 상상마당 1층 한구석 갤러리에서 8월 21일까지 전시한단다.

파는 엽서인줄 알고 얼마일까, 2천원 미만이면 사야지 마음먹었던 입체카드 같은 인쇄물은
그냥 집어가도 된다는 전시 팸플릿이었다. ^^
6개나 집어와서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나도 방에 하나 세워놓았는데 기분이 아주 좋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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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는 없었지만 고흐와 관련된 작품들을 마구 사진으로 찍어도 좋다는데 또 어떻게 그냥 오랴 싶어서 서툴게 폰카를 들이대고 몇장 담아왔다. 아기자기하게 소품들로 재현해 놓은 고흐의 작품들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한 붓의 터치까지 막 살아난 듯해서 괜히 신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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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번 살아보고 싶은, 아니 그냥 꼭 한번 들어가서 걸터앉아 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고흐의 방>은 3차원으로 보니 더욱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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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의 뒷배경엔 유리를 한 장 덧대어 그 위에 칠한 붓터치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고, 천장쪽에 조명을 비췄다. 입체감이 더욱 살아나니 마치 산꼭대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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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로그의 대문 사진이자, 현재 들고다니는 지갑의 문양이기도 한 <아몬드 꽃>은 앞쪽에 모빌처럼 매달린 액자엔 아몬드나무와 꽃만 들어있고 뒷벽에 청록색 바탕이 붙어있는 구조였다.  상상마당 1층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도록 제일 크게 걸려 있는 바람에, 사진을 찍으니 입구밖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들까지 반사되어 찍히고야 말았다. ㅎㅎ


그밖에도 귀가 잘린 고흐의 초상화, 까마귀가 나는 밀밭, 해바라기꽃 등 꽤 여러 작품이 있었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일이 기다렸다가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다. 쑥스럽기도 하고...

째뜬 이렇게라도 고흐의 작품을 볼 수 있어서 몹시 행복했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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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커피

놀잇감 2008. 7. 26. 16:14
사람마다 아무리 연습해도 안되는 분야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연습하면 조금이라도 실력이 나아진다는 건 분명 삶의 동력이면서 한편으로는 스스로 채근과 욕심을 유발하는 짜증스러운 원인이 된다.
이를테면 자전거 타기 같은 것.
조금씩 자전거 타는 거리를 늘이다 드디어 집앞에서 한강까지 진출하게 된 것을 기뻐한지 몇달 됐는데
한강 자전거도로까지 가는 시간이 조금씩 단축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는 하지만 새로이 대두된 문제는 지구력이다.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타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산책객들을 피하느라 잠깐씩 멈춰설 때도 있음에도 30분을 넘기면 어느새 다리가 팍팍해 더 달리기가 겁이 난다. 갈 때보다 당연히 더 힘든 올 때를 위해 체력을 남겨두어야한다는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고작 한 시간의 자전거 타기로 녹초가 되는 몸을 지니고 산다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물론 첫날 느루를 끌고 나갔다가 동네망신을 당했던 때와 비교한다면 일취월장했다고 뿌듯해할 수 있지만, 하나같이 슝슝 나를 추월해가는 자전거들의 뒤꽁무니를 보며 버럭 치미는 부아와 욕심은  아직 멀었다고 나를 채근한다.
마음 한 구석에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 뿐이다.
다른 구석의 느긋한 마음은 나를 다독인다. 자전거 타기에 목숨걸 일 있니. 그냥 즐겁고 신나게 타면 되는 거야. 자전거 탈 때도 경쟁심을 발휘해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다른 인간들이 우스운 거란다, 라고.
그럼 또 다시 욕심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야, 그래도 운동이랍시고 타는 자전거를 겨우 1시간만에 빌빌대는 저질 체력은 좀 곤란한거 아니니?
곤란한 거 안다. 그런데 힘든 걸 어쩌라고!
^^

맛있는 커피 만들기도 비슷하다.
급기야 숭례문수입상가에 가서 수동 그라인더와 전동거품기를 장만해 본격적으로 집구석바리스타 시늉에 돌입한지 일주일째. 확실히 커피집에서 원두 살 때 아예 갈아온 커피보다는 비록 몹시 오래되어 변압기를 연결해야 하는 110V짜리 전기그라인더로 그때그때 갈아 만들어 먹는 커피가 맛있고, 그보다는 수동 그라인더로 브리카 포트에 맞는 입자로 갈아서 추출한 커피가 크레마와 향도 풍부하여 훨씬 맛있다.
당연히 유난떨며 만들어 마시는 커피의 종류 늘어났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아이스아메리카노. 아이스카페라떼. *_*
기구들이 손에 익어 이젠 꽤 그럴싸한 맛을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새로운 메뉴를 시도할 때마다 꺅꺅 감동하며 자화자찬을 하게 되고 새로운 메뉴 개발에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못말린다 정말).
별다방 콩다방 커피 못지 않다고 추켜세우는 분위기에 편승한 나는 급기야 날이 좀 더 더워지면 얼음과 함께 갈아서 프라프치노를 만들어볼까 하는 터무니없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으며, 아직은 계피가루가 없다는 핑계로 시도를 안 한 카푸치노는 조만간 성공을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
여기서도 문제는 역시 지구력과 집착.
통틀어 30분이면 족한 준비과정이긴 하지만 매번 원두를 갈고 그라인더와 주전자, 거품기, 우유그릇 (프라프치노를 만들게 되면 믹서까지!) 를 씻어 치우는 일은 나 같은 귀차니스트에겐 꽤나 번거로운 과정임에 틀림 없다. 게다가 그라인더를 매번 물로 닦기도 그렇고 안닦기도 그러니 대안은 또 다른 도구를 사들이는 것이라 여기며 커피 그라인더 청소 전용 '솔'을 사야한다는 충동을 요즘 계속 느끼고 있으며, 카푸치노에 넣을 우유거품을 흘리지 않고 따를 수 있는 전용 비이커도 사야할 것만 같은 느낌.
계속 이 추세로 나가다간 커피 아트 독학하겠다고 온갖 도구를 사들일지도 모르겠다. -_-;;
그리고 그렇게 죄다 사들인 다음엔 또 금세 집착과 번거로움이 넌덜머리나 확 집어치울지도.

확실히 연습과 발전은 삶의 재미인데, 내 경우는 쓸데없이 집착하는 욕심과 앞서 염려하는 조바심이 흥을 망친다. 무슨 일이든 그냥 신나고 행복하면 그만인데 그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늘 참 어렵기만 하다.
암튼 이렇게라도 적어두면 욕심과 집착에 브레이크가 걸리겠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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