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프의 계절

놀잇감 2008. 9. 29. 16:44

언제부턴가 스카프만 보면 광분하는 경향이 생겼다.
비교적 어린 주변 지인들이 스카프 매는 걸 껄끄러워하는 걸 보며 곰곰이 따져보니, 나도 20대 초반엔 스카프를 꽤나 거추장스러워했고 노회함의 상징이라 여겼던 것도 같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거추장스럽더라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선물로 받거나 어디서 생겨 매고다니던 스카프의 매끄러운 실크의 감촉은 좋아도 훌러덩 미끄러져 빠져버리거나 흘리는 일도 잦았기 때문에 찬찬하지 못한 나로선 간수가 그리 쉽질 않았다. 그래서 날씨가 아주 쌀쌀해지면 얼른 모직이나 털 목도리로 바꿔 매곤 했다.
그러다 아주 마음에 드는 스카프를 내 손으로 구입하기도 하고 즐겨 매고 다니는 일이 시작된 건 20대중후반부터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직 '애기'나 다름없는 스물여섯, 스물일곱 살의 나는 후반부 직장생활에서 늘 최고참 여직원이었다. -_-;; 업계를 잘못 선택한 내 탓이 컸지만, 어쨌든 그 당시의 나는 최대한 위엄있게 보일 필요가 많았고 회사에선 유니폼을 입어야하는 데도 거의 정장을 입고 출퇴근을 했다.
여성의류를 다루던 첫 회사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옷차림이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준다> 따위의 원칙에 너무 세뇌당했던 탓에 청바지에 티쪼가리 같은 걸 입고선 도저히 출근을 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지만, 암튼 그땐 그랬다. ^^
그리고 그때 멋스러운 스카프 한 장을 목에 두르면 (짧은 목을 남들이 답답하게 여기거나 말거나;;) 내 나름대로는 노회한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암튼 예나 지금이나 단조롭거나 실증난 옷차림이라도 스카프 하나만 잘 골라 매주면 그럭저럭 신선함을 느낄 수도 있음은 물론이고 보온효과도 대단하지 않은가 말이다. 목을 감싸주면 체감온도가 5도쯤이나 올라간다는 말을 최근 몇년 꾸준히 들어온 듯한데, 이미 나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그 진리를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즘엔 한 여름에도 깊이 파인 목선에 가늘게 스카프를 둘러메는 인간들이 있을 만큼 스카프가 유행이라 번쩍이는 실크 이외에도 다양한 질감과 색감의 스카프가 선을 보이고 있으니 나로선 반갑기 그지없다.

물론 난 그렇게 유난을 떨 정도로 목이 길거나 우아하지도 않고;;;
참을성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여름 지나고 찬바람 불기 시작해서 한 겨울, 그리고 봄까지는 멋스럽기도 하고 보온성 또한 뛰어난 스카프를 애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삶을 단출하게 꾸려야 한다고, 쓸모없는 과잉의 욕심을 버려야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좋아하는 물건에 대한 애착은 쉬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해마다 고민고민하다 정리해 버리기도 하지만 옷장엔 여전히 20년 가까이 된 스카프부터 최근에 사들이거나 선물 받은 스카프까지 빼곡하게 매달려 서로 매달라고 나를 유혹하고 있는데(왜 스카프는 해지지 않는 거냐!), 가을이 되면 나는 마치 나쁜 습관을 완전히 끊지 못한 중독자처럼 스카프에 탐닉한다. +_+

몇년 전 늦가을엔 한꺼번에 스카프를 세 장이나 사놓고는, 미쳤어 미쳤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한편으로 풍성해진 스카프 옷걸이를 보며 기뻐한 뒤 스카프 욕심 좀 그만 부리자고 다짐했고, 정 사고픈 스카프가 있으면 내가 사는 대신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누렸었다.
그러나 그 의지력의 약기운이 떨어졌는지, 올해도 지인의 생일선물을 스카프로 고르다가 급기야... 내 스카프도 사고 말았다. 그것도 두장이나. ㅎㅎ

그리고 그 스카프가 조금 전 택배로 배달되었다!
당장이라도 스카프를 두르고 나가 걸으며 바람에 펄럭이는 스카프 자락의 미묘한 흔들림을 만끽하고 싶지만 어느것부터 매고 싶은지 아직 마음의 결정을 할 수가 없다.
내일 약속 때까지는 정해야 할 턴데... ^_______________^

끝없는 나의 스카프 욕심에 핀잔을 주는 엄마한테 들킬까봐 얼른 별것 아니라고 얼버부리면서 꽤나 찔리긴 했지만, 까짓것, 수십만원짜리 사치품도 아니니 이정도 소박한 기쁨을 누리는 건 허락될 수 있다고 믿을란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가 속상해서 바야흐로 스카프의 계절이 돌아왔다는 사실로 위로 좀 받겠다는데 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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