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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17 사람들 11
  2. 2011.04.15 누가누가 잘하나 7
  3. 2010.11.15 신기한 금요일 18
  4. 2010.03.07 노년의 생일 19
  5. 2009.05.10 진지 17
  6. 2009.01.19 소심 20
  7. 2008.05.30 손님 9
  8. 2008.04.05 자신감 13
  9. 2008.01.09 원숭이 줄타기 9
  10. 2007.12.24 재롱잔치 7

사람들

투덜일기 2013. 1. 17. 00:47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즐겁다. 간만에 새로운 사람들이 백명이나 득시글거리는 공간에 자주 출입하면서 뭔가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만만치가 않다. 물론 얼굴치라서 이제껏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매번 다른 자리에 앉기도 했었고...

 

첫 수업에서 뒷줄 구석자리에 앉았다가 두시간 반 내내 담배쩐내에 혼줄이 난 뒤로는 비교적 중간 이전 구석을 노리고는 있으나, 나로선 아무리 일찍 가도 넷째 줄 이상은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볼일이 일찍 끝나 40분이나 일찍 강당에 가보았는데 맙소사, 맨앞 세줄은 이미 다 차 있었다. 주최측에선 이름표를 달기를 권하고 옆자리 앉은 사람과는 통성명과 인사를 나누라고 하는데, 어우 그런 거 민망하고 싫어서 나는 10분 전쯤 가서 될 수 있는대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열심히 예습복습하는 척 하며 강의를 기다린다. 때로는 가방만 내려놓고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거나...

 

그렇게 사전차단을 하는데도 며칠 전 옆자리에 앉은, 사교성 뛰어난 아주머니 한분은 자기 원칙이라며(옆에 앉은 사람 얼굴 익히고 연락처 받아내는 게;;) 굳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따갔다'. 교육 끝나도 주최측에서 주소록이나 명단 같은 거 만들어주지도 않는다니 나중에 수업 내용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헐... ㅠ.ㅠ . 째뜬 이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앞자리에 좀 앉아보려고 자기가 1시간 일찍 온 적도 있었다는데 그 때도 겨우 셋째줄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15분 전부터 슬슬 나타나는데 20여명의 열혈 학생들이 앞자리 다툼을 엄청 한다는 얘기다.

 

좀 일찍 가방으로 자리만 맡아놓고 사람이 오래 나타나지 않으면, 과감하게 가방을 치우고 앉는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자기 가방을 분명 몇째 줄에 놓았는데 엉뚱한 데 가 있다고 씩씩대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놀라운 친화력으로 벌써 뭉친(혹은 원래도 서로 아는 사이였거나;;) 몇몇 아주머니들은 서로 자리도 잡아주고 그러는 모양이어서, 그러지 말라고 핀잔 주는 사람도 보았다. ㅎㅎㅎ 시험기간에 피튀기며 도서관 자리잡던 때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맨앞 세줄에 앉은 이들은 대부분 중년이상이고, 그들 중엔 매번 휴대폰으로 강의내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집에 가서 그걸 매번 다시 볼까? 녹화된 화질과 강의 내용은 쓸만할까? 챙겨보니까 계속 촬영하겠지만서도... 나로선 참 신기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크게 티 안나게 녹음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놀라운 학구열;;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강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꼬치꼬치 질문을 해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수업시간 끝날 무렵 괜히 질문해서 강의시간 넘기게 하는 애들 진짜 미워했었는데, 그나마 수업 끝나고 공개질문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천만다행. ^^; 

 

반면에 평일엔 강의시간이 7시부터다보니 꾸벅꾸벅 졸거나 곤하게 자는 사람도 보인다. 지난주엔 내 바로 뒤에 앉으신 어느 밍크코트족 아주머니께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주무셨다. 아직 친한 사이들이 아니다보니 누가 깨우기도 뭣하고 아주머니 스스로 놀라 깨어나 잠시 소리가 멎었다 싶으면 이내 다시 드르렁 드르렁... 신경에 거슬려 짜증나기도 하면서 또 어찌나 웃기던지. ㅋㅋㅋ 옛날 요가 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젊으나 나이드나 여자들 중에도 코 고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요가 마무리 때 송장자세 하고 있으면 시간이 몇분 되지 않는데도 드르렁 드르렁 코골며 자는 사람이 두셋은 꼭 있었다. 요가원도 그렇고 이곳 강당도 그렇고 워낙 따뜻하고 어두컴컴하니까 까무룩 잠드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코 까지 골며 숙면을 취하다니. ㅎㅎ

 

이십대로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강의 직전에 나타나 뒷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 어르신들의 열기를 못 따라가거나 양보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강의 내용에 대한 리액션도 아주머니들이 가장 열정적이다. 한번은 강의 끝나고 그날 담당 교수가 안식년이라 다음주에 외국으로 연구 여행을 떠나므로 문의사항이 있으면 이메일로 해달라고 했더니, 대뜸 아쉬움의 '어우~~~' 소리가(순간 방청석인가 착각할 뻔했다 ㅋ) 크게 일었다. 아니 언제 봤다고???? *_* 어차피 모든 강사진이 맡은 부분을 딱 한번씩 강의하는 체계라 두번 볼 사람도 없구만...

 

강의를 듣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강의를 하는 교수, 강사들도 스타일이 다채롭다. TV 특강에서도 본 적 있는 엔터네이너형 강사가 있는가 하면, 두서없이 어려운 건축용어만 잔뜩 주워섬기다 만 사람도 있었다. 연구를 잘하는 학자가 다 강의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몇년째 거의 같은 교재로 거의 같은 수업을 하면서 횡설수설하는 건 좀 심했다. 같은 한옥 건축 이야기라도 재미있는 예를 들어가며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더구만...  강의는 횡설수설하면서 대뜸 자기 책 참고하라고 광고한 이도 있었다. 그런 책이라면 절대 안 산다 안 사!  반면에 강의 교재도 그렇고 설명도 짜임새 있어서 책을 사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대뜸 사들이지 말고 일단 서점에 가서 들춰보고 결정할 작정이긴 하다만.

 

아참, 요즘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가장 궁금한 사항이 '어디에서' 사는 것인가 보다. 내 전화번호를 따갔던 아주머니도 그렇고 지난번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목례 후에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걸까말까 하는 듯하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는 동네 같으면 같이 가자고 할 리는 없겠지만, 동네 이름 말해주면서 기분이 묘했다. 뭐냐, 요샌 소개팅 나가서도 첫 질문이 어디 사느냐는 거라던데, 사는 동네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건가? 그러더니 둘 다 자기네는 OO구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도 다음에 똑같은 질문을 들으면 OOO구에서 왔다고 대답해야지. 대개 옆자리엔 시선도 안주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앉아도 몰라보기 십상이지만 이제까지는 한번도 같은 사람들과 나란히 앉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공책이나 수첩 정도는 본다규. 과연 내일 수업 땐 또 어떤 사람이 내 옆에 앉을지, 어색한 대화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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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오후, 거실쪽 TV에선 어김없이 동요가 들려온다. <누가누가 잘하나>를 하는 시간이다. 채널 충성도가 대쪽같은 영자씨가 꼭 놓치지 않고 보는 프로그램이 몇 가지 있는데 <누가누가 잘하나>는 그 가운데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41년생인 영자씨의 어린시절 소원이 <누가누가 잘하나>에 뽑혀 나가 상을 타는 것이었다고 하니 프로그램의 역사가 정말 오래 됐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반 친구가 이 프로그램에 나가서 예선을 통과해 TV에 나왔던 적도 있다. 비록 상은 타지 못했지만 그 친구는 한동안 교내 스타였다. 영자씨는 본인이 못 이룬 소망을 자식들이 이루어주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지만 우리 삼남매는 일단 노래실력을 제쳐두고라도 그런 데 나설 만큼 숫기 있는 아이들이 못됐다. 합창할 때도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처지에 감히 독창이라니. 어린시절 TV에서 <누가누가 잘하나>가 방영되면 영자씨는 니들도 저기 나가면 좋을텐데, 라고 몇번 아쉬워 했지만 자식들의 깜냥을 알고 쉽사리 포기했다. 그저 동요를 따라부르는 것만으로도 흡족한 듯했고, 지금도 못말리는 동요 사랑은 여전하다. 

영자씨는 장래 희망이 한때 성우였을 만큼 목소리도 고운 편이다. 음치는 아니라서 옛날 동요는 거의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알고 불러줄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심한 박치다. TV를 보며 동요를 따라 불러도 늘 혼자 뒤쳐지면서 숨차다고 막 짜증을 낸다. 본인도, 자식들도 <누가누가 잘하나>에 못나간 한이 어찌나 깊은지 영자씨는 손자들한테도 잠시 희망을 품었었다. 문제는 손녀손자들이 아주 잠깐 동요를 즐겨부르다 이내 가요로 관심이 넘어가는 바람에 <누가누가 잘하나> 같은 프로그램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도 지치지 않고 금요일 오후가 되면 손녀딸한테 전화를 걸어 <누가누가 잘하나> 하니까 니들도 좀 보라고 종용하곤 했는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는 <누가누가 잘하나>에 어린이만 출연하는 게 아니라 아무나 다 나온다. 동요를 좋아하는 애어른이 연합으로 가족 팀을 이루어 나오기도 하고, 할머니나 대학생이 혼자 나와 동요를 부르기도 한다. 평생 염원을 품었던 영자씨는 옳다구나 싶었던지, 언젠가 "우리도 노래 하나 연습해서 저기 나가면 저 사람들보다 잘하지 않을까..."라고 말을 흘렸다. 당연히 나는 펄펄 뛰었다. 창피하게 온 가족이 TV엘 나가서 노래를 부르자고요??? +_+ 동요야 요즘 아이들에게도 길이길이 전해야할 문화유산(?)이라고 나도 동감한다. 동요보다 유행가를 더 잘 부르는 요즘 아이들이 안타깝기도 하고. 그렇지만 동요 부르기 운동을 위해 직접 나설만큼은 아니다. 게다가 영자씨의 노래솜씨는 결단코 '대회'에 나갈 만한 수준이 아니시라고요! 가족 중창단으로 밀어붙인다고 해도 우린 도무지 구성원이 안나온다. 대학시절 노래 깨나 한다고 껄렁댔던 동생들은 둘 다 혼자 질러대는 스타일이지 결코 조화로운 합창에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고, 올케들도 음치를 면한 정도일 뿐 대회 재목은 아니다. 집안 내력 따라 숫기 없는 조카들은 또 어떻고!

그러고 보면 영자씨는 동요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몇년 전까지는 구청에서 하는 노래교실도 꽤 오래 쫓아다녔다. 아무리 노래교실을 다니며 새 노래를 익히고 연습해도 그놈의 고질적인 박자 틀리기는 변함없었지만서도. <전국노래자랑> <가요무대> <열린음악회> 같은 다른 노래 프로그램도 열심히 보는 편이지만, 영자씨가 노래를 따라부르기까지 하는 열정을 드러내는 건 어디까지나 <누가누가 잘하나> 하나 뿐이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 결론은 하나다. 중간에 TV에서 사라졌다 다시 시작된 <누가누가 잘하나>가 앞으로도 계속 방영되어 영자씨의 동요 열망을 일부나마 풀어주는 수밖에 없다. 다음엔 이왕이면 영자씨가 제일 좋아하는 동요 '오빠 생각'을 누가 나와서 불러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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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금요일

투덜일기 2010. 11. 15. 14:12

지난 금요일 저녁의 일부는 마치 잠깐 딴 세상에 다녀왔거나 시간의 블랙홀 같은 데 빠져 요상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느낌이었다. 서로 연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나에겐 '신기하게' 느껴진 경험 두 가지.

갈까말까 좀체 끝나지 않는 나의 고민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듯이, 확인사살을 하듯 참석을 독려하는 담당자의 전화를 이틀에 걸쳐 받는 바람에 결국엔 약속 시간에 맞춰 뚜벅이로 집을 나섰다. 그런데 저녁 7시가 조금 못된 시간 강남의 어느 전철역에서 한강다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줄곧, 나 말고는 인도에 '민간인'이 하나도 없었다. 가로수나 가로등처럼 5미터 간격으로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경찰관들 빼놓고는. -_-; 그나마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에망정이지 멍하니 걸어가는 중이었다면 너무 어색해서 괜스레 발목이라도 삐끗할 것처럼 삼엄한 분위기였다. 더욱이 인도 바로 옆 차도에도 시내 방향으로는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았고 그냥 텅 비어 있었다. 반대편 모 호텔 앞쪽 차도엔 차들이 빽빽하게 서 있던 것과 대조적이어서 더욱 기묘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한쪽 도로에만 차들을 지워버린 거나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드디어 내가 골목으로 꺾어져 들어가야할 무렵 즈음 경찰 오토바이가 한 대 앞장서 가더니 이어 비상등을 켠 검정색 세단 두 대가 휙 지나갔다. 어느 나라 국기인지 모를 소형 깃발을 양쪽에 휘날리면서. 

수십년 전 거국적인 행사나 귀빈 방문이 있을 때마다 걸핏하면 여의도광장으로, 경복궁 옆이나 광화문 앞길로 교복을 입은채 동원됐던 나의 학창시절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도로가 통제되어 몇 정거장쯤 전에 미리 버스를 내려 정해진 집결지까지 마냥 걸어가야 했는데, 주로 아침이나 대낮이긴 했어도 꼭 그렇게 경찰들이 줄지어 서서 '길'을 경호하고 있었다. 가깝게는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텅 비어 있던 평양 거리와 인도에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진달래꽃을 흔들어대던 북한 주민들도 떠올랐다. 말도 안되는 '국격'이니 뭐니 떠들지 말고 차라리 그런 독재적인 사고방식만이라도 차별화를 두려 했다면 전 세계 외신에 또 한 번 서울과 평양을 혼동하게 만들 남부끄러운 장면을 연출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저들'은 참말로 이해가 안되는 족속들이다. 그렇게 높이려는 국격이 겨우 북한과 동격의 수준이라니... 북한이 세계적으로 누리는 독보적인 위상이 그리도 부러웠던 것일까?

출판 기념회 같은 자리에 많이 쫓아다니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더러 가보면 그냥 뷔페 음식 차려놓고 간단히 인삿말이 오간 뒤 담소하는 분위기가 전부였다. 애당초 내가 담당자의 초대에 응했던 것도 그렇게 큰 부담은 없을 거라는 막연한 예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금요일의 행사는 놀랍게도 단상에 마이크가 차려지고 공식적인 인삿말과 짧은 강연까지 식순에 따라 진행되는 엄청난 분위기였다. 심지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이름표 달기'와 '일으켜 세워서 인사시키기'도 자행됐고, 2부엔 여흥을 돋울 초대가수도 등장했다. +_+ 안내되는 자리에 앉은 순간 이미 나 정도의 내공으론 참석해선 안될 자리였구나 싶었던 나는 마치 연예인 구경하듯 유명 번역가들을 좌우로 흘끔거리며 안절부절 못했다. 문인들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서로 안면을 잘 트고 지내는 것과 달리 번역하는 이들은 웬만해선 서로 안면이 없음을 잘 안다며, 출판사 대표와 담당자가 곳곳에 앉아 분위기를 무마해주기는 했어도, 초중반엔 정말 민망하고 뻘쭘했다. 이날의 경험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다시는 뭣도 모른 채 그런 자리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나마 수확이라면 저명한 번역가들도 어김없이 열악한 번역료와 불규칙한 수입과 자기관리와 '마감지연'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깨닫고 동병상련의 기쁨을 맛보았다는 정도? ㅋㅋㅋ 아 맞다, 나 만큼이나 그분들도 '전문' 번역가라는 말을 싫어했다. 소설가 앞에 굳이 '여성'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역 장르에 대한 은근한 비하의 느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뉘앙스는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글과 말은 달라서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반드시 말을 잘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있었는데, 거기 온 분들은 다들 달변이어서 놀라웠다. 계속 안면 있는 담당자와만 속닥거리다가 나중엔 나도 술기운으로 버텨내긴 했지만, 그날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저명도'에 따라 사교성도 비례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나처럼 숫기도 없고 지명도도 떨어지는 인간이 얼마나 좌불안석이었을지! 아무려나 신기한 경험이었다는 것으로 외출 결과 보고 및 지난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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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생일

투덜일기 2010. 3. 7. 18:13
떠들썩한 환갑잔치를 내가 처음 목격한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수원에 살던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더니 난데없이 주말에 시간 되면 밥을 먹으러 오라며 수원의 어느 갈비집을 알려주었다. 터울이 많은 손위 형제들을 둔 막내였던 친구는 부모님이 옛날 분들이라 환갑엔 꼭 동네잔치를 한다고 했다. 내 조부모님의 경우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도 조촐하게 집에서 가족모임으로 치렀던 터라, 환갑잔치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그날 목도한 사건이 워낙 인상 깊었던 모양으로 같이 간 친구와 내가 축의금 봉투를 가져갔는지 그냥 입만 가져갔던 건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무슨무슨 가든이었던 수원의 갈비집엔 큼직한 방마다 온통 잔치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한 가운데 불판에선 갈비가 익어갔으며 마당으로 연결된 스피커에선 계속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왔다. 결혼한 큰오빠와 큰언니가 낳은 자식들이 친구와 또래일 정도였으므로 잔치상 앞에 앉으신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며 차례로 절을 하던 자손들의 수가 꽤나 많았던 기억이 나고, 식사 후 여흥이 시작되자 춤과 노래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잔치 주인공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자손의 친구들도 다들 앞에 나가 술잔을 올리고 축하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인 모양이었지만, 숫기 없는 우리의 난감함을 알아차린 친구는 싫으면 굳이 안해도 된다고 말해주어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친구 부모님의 환갑이나 칠순에 초대받았던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동네 잔치를 처음 경험한 때문인지 나는 그날 온종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순간순간 불편하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막판엔 지겹고 곤혹스러웠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사회자가 지목하면 무조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고함을 질러야하는 상황도 그렇고 떼로 몰려나와 춤을 추는 모양새도 처음엔 흥겹더니 술판이 무르익으면서는 취객들 때문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수시로 잔치판에 불려다니느라 우릴 챙겨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친구는 그제야 지루해하는 우리 태도를 눈치 챘는지, 먼저 가도 된다며 우릴 배웅했다.

잔치집을 나오며 나는 당시에 아직 멀게 느껴지는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염려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잔치를 원하면 어쩌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구경꾼처럼 모여든 하객들 앞에서 한복을 떨쳐입은 채 무대처럼 마련된 잔칫상 앞에 나아가 술잔과 절을 올린 뒤 나중엔 큰딸이랍시고 노래까지 한자락 불러야 하는 상황을 내 숫기로는 못견딜 듯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고민해야하는 시기가 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요란한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었고, 환갑은 청춘이라며 다들 잔치대신 여행을 떠나는 세태도 나를 도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다닌 직장의 정년퇴직과 맞물린 아버지의 환갑을 그냥 멀뚱히 넘길 순 없었다. 평소 생신에도 몇몇 친지들이 모여 <밥>은 먹어왔으니, 날 잡아서 조촐하게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마다해도 환갑 기념이라며 맏사위를 위해 고운 한복까지 맞춰 보내셨다.  

환갑 안한다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며 화를 내다시피 했던 아버지는 결국 친가, 처가 가족들이 모여 <간단히 밥을 먹는> 그 자리에 장모님 소원대로 엄마와 나란히 한복을 입고 참석하셨다. 음식점에 미리 부탁해서, 그간 은밀하게 아버지의 옛날 앨범을 뒤져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사진을 모아 삼남매와 올케들의 영상편지까지 담은 영상물을 틀었던 그날 우리 삼남매와 다른 친척들은 다들 뿌듯해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버지는 몹시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바로 다음해였던 엄마의 환갑은 연달아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엄마의 완고한 고집으로 부부동반 여행으로 대체되었고, 또 10년은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오래 걸릴 것만 같던 10년이 어느새 흘러 엄마의 칠순생신을 고민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친척분들 모두 환갑은 건너뛰는 분위기여도 칠순에는 다들 모여 맛있는 밥을 먹어왔고, 가뜩이나 홀로 남은 엄마의 칠순 생신은 그냥 넘겨선 안된다는 것이 역시나 집안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늬 아버지를 봐라. 그렇게 빨리 갈 줄 아무도 몰랐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늬 아버지 환갑 안 챙겼으면 어쩔 뻔했니? 니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한이 됐을 거다."

아버지 환갑 때도 음식점을 알아보고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초청하는 과정을 내가 주동한 전적이 있었으며, 그땐 부모님 몰래 큰동생이 영상물 만드느라고 사진 고르고 녹화하고 제법 법석을 떨었는데도 즐겁기만 하더니 이번엔 왜 모든 과정이 온전히 스트레스로만 여겨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에도 주인공이신 왕비마마가 민망하다며 모임 같은 거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다. 하지만 "남편 앞서 보낸 여자가 무슨 염치로 생일잔치를 하느냐"는 엄마의 자학성 핑계는 용납되기 어려운 발언이다. 친척 어르신들은 엄마가 혼자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칠순을 그냥 넘기면 안된다는데!

잔치가 아니라 그냥 밥 한끼 먹는 것 뿐이라며 엄마를 계속 달래는 한 편, 두 동생 부부와 의논하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고 음식을 정하고 참석인원을 확인해 연락을 취하며,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소망이 다시 떠올랐다. 어쭙잖게 니체를 읽고 전혜린을 읽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에게 "딱 예순살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장담하고 다녔었다. 생존해 계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는 상관없이, 단지 나의 노년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생각됐던 것 같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은 최대한 오래 사시는 게 좋겠지만, 나는 홀로 씩씩하게 딱 예순살 까지만 살다가 깨끗하게 죽겠노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그래 어디 두고보자"며 나를 흘겨볼 뿐이었다. 그런데 요번에 엄마 칠순을 준비하며 문득 세월이 흘러 나중에 누가 내 칠순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고 칠순이라며 주인공으로 떠밀리는 게 싫어서라도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저도모르게 하고 앉았더라는 뜻이다.

예순살까지 살겠다던 어린 시절의 나는 분명 환갑 잔치 따위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고 다만 그 이후 노년의 삶이 막연히 구질구질할 것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칠순 생일의 부담으로 또 다시 내 수명을 재단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칠순을 <가족모임> 행사로 치르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밥먹기 행사 대신 칠순에도 가족여행을 떠나는 집이 있다지만, 울 엄마의 건강으로 보나 시기적으로 보나 그건 실행되기 어려운 대안이다. 어차피 매년 우리끼리 생신밥은 먹어왔으니 그걸 좀 확대시킨 것뿐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다. 문제는 부모님 형제가 많아놔서 그 자손들까지 모이면 4, 50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삼남매가 나누어 분담한다고는 해도, 규모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분위기며 음식 맛, 입을 옷까지 시시콜콜 미리 걱정하는 나 같은 소심증 환자에게는 더더욱!

사실 욕을 좀 먹을 각오만 한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아무리 들쑤셔도 엄마 본인의 뜻대로 칠순같은 거 안 챙긴다고 통보한 뒤 시치미 뚝 떼고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 건강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쓸만한 핑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남들(친척도 남이라고 치면) 눈 의식해서 자식으로서 속물스럽게 생색을 내려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옛날부터 환갑이나 칠순 때 잔치를 여는 목적은 장수를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자손들이 그 정도 거나하게 잔치를 해줄 수 있을 만큼 번창했음을 자랑하려는 노인들의 허세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해서 일부 노인들은 자식들의 능력이 되든 말든, 잔치 때문에 빚을 지든 말든 남부끄럽지 않게 소리꾼들까지 불러다가 왁자지껄 노는 잔치를 강요한다던데, 울 엄마가 그런 부류의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깊이 감사할 일이지만 그냥 조용히 밥 한끼 먹는 것뿐이라고 여기래도 난감해하며 지레 생병을 앓아 속을 썩이는 상황도 녹록치가 않다.

과연 울 엄마의 진짜 속마음은 무얼까. 말로는 모임 안 했으면 좋겠다지만 내심 뿌듯해하며 잔칫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의지에 반하는 칠순잔치의 억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노라는 생각이 들만큼 회의를 느낀 내 마음처럼 엄마도 정말로 싫은 걸까. 그렇게 싫다는데 연회 예약을 취소하는 대신 엄마에게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오라고 말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홧김에 다 확 취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드는데, 정말로 그러면 울 엄만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까.

어쨌거나 이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달 넘게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극도로 높인 왕비마마의 칠순 모임이 겨우 엿새 뒤로 다가왔다. 토요일이 후딱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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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삶꾸러미 2009. 5. 10. 16:23

이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제일 먼저 어떤 뜻을 생각할까?
대부분은 <진지하다>의 어간인 진지를 떠올릴 것 같고, 군대와 관련된 직업인이나 갓 제대한 이는 부대에 꾸려놓은 진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밥>의 높임말인 순우리말 <진지>다.
숫기가 없던 나는 어렸을 때 <진지 잡수세요>, <진지 잡수시래요>라는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가 없었다.
끼니 때가 되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나무를 손보시거나 집 한켠에 비닐로 덮어 마련한 새장에서 새들을 거두고 계시면 할머니나 작은엄마, 우리 엄마는 꼭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가서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그러면 당연히 큰딸인 내가 할아버지를 불러와야하는 것처럼 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퍽 자주 있는 일임에도 나는 저 말이 좀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웅얼웅얼 쭈뼛거렸다간 할아버지한테 혼쭐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번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질끈감고 어렵사리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래요."
그러고는 그 어려운 말을 혹시라도 잘못 발음한 건 아닐까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른 후다닥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중에 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진지 드시래요>로 좀 바꾸기도 했다. <진지>도 어렵지만 <잡수시다>라는 존칭어가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다 대학생쯤 되고 나선 더 영악해져 <진지>라는 말을 아예 빼버리고 <할아버지, 점심 드세요> <저녁 드세요> 그렇게 내 마음대로 바꾸어 썼다. 어른 공경에 관해서는 몹시 엄하셨던 터라 어른에겐 뭐든 먹을 것을 권할 때 <잡수세요>라고 해야한다고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박히게 잔소리를 하셨던 할아버지도 그 즈음엔 기력이 쇠하셨던지 별 타박없이 "알았다"고만 대답하셨다.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나조차 쓰기 어렵다고 바꿔쓰고 외면했던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요즘은 더욱 듣기 어렵다는 생각에 자꾸 안타깝다.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유아어인 <아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선 거의 반말을 썼던 내가 아버지 생전에 직접 진지 잡수시라고 제대로 된 높임말을 썼을 리 없다. 그나마 나도 끼니때 조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할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영 자신이 없다. 늘 하던대로 <저녁 드시라고 해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너무 높으니까.
요샌 너도나도 <식사하다>라는 말을 아무때나 쓰고 있긴 한데, 난 또 그 말이 왜 그리 싫은지 모르겠다.
호감이 갔던 사람이라도 그 입에서 "식사했어요?" "식사하셨어요?" "식사하셔야죠?"라는 말이 흘러나오면 난 순간적으로 오만정이 다 떨어짐을 느낀다. 더불어 <식사시간>이란 말도 싫다. 그냥 점심시간, 저녁시간, 이라고 하면 좀 좋은가. 서류로 만든 일정표 따위엔 어쩔 수 없이 <식사시간>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더라도 흔히 쓰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나의 편견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 저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서 나의 언어생활은 여전히 상스럽다. 엄마에게 툭툭 던지는 반말은 친근함의 표현이라 극구 주장하며, 화난 거 티 낼때만 엄마에게 존댓말을 쓴다. 평소엔 아무 생각없이 "엄마 밥 먹어!"와 "엄마 저녁 드셔!"를 거의 반반씩 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럴진대 조카들이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연습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옛날 거의 매일 그 어려운 말을 입에올려야했던 나도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거늘 우리 조카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의도적으로 우리 집에서나마 <진지>와 <잡수시다>라는 말이 사장되지 않도록 써보리라 마음은 먹었는데, 열두살이 된 큰조카는 단 1초도 고민없이 이미 내가 예전에 했던 말바꾸기를 실천한다. 가령 내가 "할머니 과일 잡수시라고 해라"고 하면 공주는 "할머니 과일 먹어!"라고 외친다는 얘기다. -_-;;
나 역시 애써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예전처럼 지금도 그 말들이 좀체 입에서 나오질 않으니, 무작정 조카를 나무랄 수도 잔소리를 할 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먼저 상스러운 반말을 줄여나가는 수밖에. 이따 저녁때는 기필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볼 작정이다. "엄마 저녁 진지 잡수셔." 반말과 높임말의 어중간한 형태라 요상해도 어쩔 수 없다. 갑작스레 극존칭 어미를 쓰면 왕비마마는 늙은 딸이 또 화난 줄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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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투덜일기 2009. 1. 19. 15:23

블로그를 시작한지 2년이 조금 넘었다.
익명의 허울에 무작정 기대어 사적인 일기장에나 써야할 넋두리들을 적어놓고는
그저 홀로 느끼는 배설의 희열이라 여기기엔 너무 많이 왔고 드러냄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듯하다.
그래도 천성적으로 숫기가 없다보니 온라인 세상에 익명으로 차지한 이 공간의 노출도 자꾸 신경이 쓰인다.
어차피 티스토리에 세를 들었으니 관련 사이트에서 추적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을 테고,
내 실력이나 게으름의 정도로는 일부 이웃블로거들처럼 독립계정으로 블로그를 옮겨 주요 검색엔진을 아예 막아놓는 치밀함을 발휘할 수도 없으니 그냥 눈 질끈 감고 버티는 것이 장땡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여행을 앞두었을 때나 괜찮은 음식점을 찾을 때, 요리 레시피가 필요할 때 나 역시 인터넷 검색으로 다른 이들의 블로그 덕을 보기도 하므로, 이곳 또한 누군가에게 일말의 <쓸모>가 있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공간은 특별히 무엇이라 특징지울 수 없는, 그야말로 흔한 수다와 넋두리의 장이다.
멋진 사진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영화나 책 리뷰를 멋지게 올리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주제로 심도 있는 논의를 풀어내는 건 더더욱 아니며, 많은 이들의 방문을 염원하며 기발한 아이디어나 생활의 지혜를 풀어내는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쩍 늘어난 방문자수는 나에게 부담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매일 달라지는 곡선이 그려낸 모양이 재미있다는 지인의 얘기에 팔랑귀를 펄럭이며 덩달아 방문자수 그래프를 달아놓고 뿌듯해하긴 했으나 그 덕분에 예전과 달리 방문자수에 시선이 자꾸 가는 것이 신경에 거슬려 그래프를 다시 없앨까도 고민 중이다. 
내 뜻과는 상관없이 얼결에 재작년 우수블로거에 드는 바람에 일시에 방문자가 늘어나긴 했지만
그래봤자 백명, 2백명 정도였던 것 같은데 지난주 들어선 계속 7백을 오르내린다.
내 푸념을 가상히 들어주는 현실과 가상의 지인들, 그리고 그 중간쯤에 자리한 듯한 블로그 이웃들을 독자로 여기고는 있는데, 내가 감당하기엔 수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겁이 덜컥 났다.
훌륭한 블로거들은 방문자가 많아지면 거의 매일 쓸만한 포스팅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긍정적인 동기로 작용하여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한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런 훌륭한 인품과 근면성을 갖춘 인간이 아니다. 퍽 자주 블로그에 글을 끼적이는 이유는, 일을 한답시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자꾸만 딴짓을 하고 싶기도 하고 태생적으로 내가 수다스럽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방문자들이 많아지면, 내가 무슨 얘기를 했기에 이러나 싶어 겁부터 나는 소심이 유형에 속한다.
어떻게 하면 방문자수가 다시 조촐한 수준(조촐한 수준은 과연 몇명일지 그것도 잘 모르지만)으로 떨어질 수 있을것인가, 한 열흘쯤 블로그를 방치해볼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러기엔 만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손과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을 반큼 이미 블로그 중독증이 심하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구시렁구시렁 하찮은 투덜거림과 사적인 고민이며 흔한 자랑질로 블로그를 이어갈 테지만 바라건대 더는 방문자가 늘지 않으면 좋겠다.
나처럼 일하기 싫고 심심해서 같은 사람들이 두세번씩 블로그에 드나든다고 계산해도 7백은 너무 많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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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투덜일기 2008. 5. 30. 14:38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집에 손님이 오는 게 싫었다. 숫기 없는 아이들은 원래 그렇지 않은가. 낯선 사람 앞에 불려 나가 꾸벅 인사를 하고, 의무적으로 몇 마디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나면 무슨 시험에 합격한 것처럼 용돈을 손에 쥐기도 했지만, 나는 용돈 따위 필요 없으니 제발이지 집에 손님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심지어 동네 친구들이 많았던 중학생 때를 제외하면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서 노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지금 사는 이 집에 다녀간 친구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다들 한두번에 그쳤을 뿐 "우리 집으로 놀러와"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웬만해선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행히 부모님도 그리 숫기가 많은 편은 아니어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드러내는 걸 꺼려하셨던 지라 집에 손님이 자주 들이닥치진 않았다. 친척들이야 워낙 많으니 무슨 날 때마다 오가는 일이 잦았지만, 우리 집에서 친척들은 손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냥 가족일 뿐.
하지만 아주 가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친구들을 몰고 오시거나, 학교에 다니실 때 학생들을 몰고 들이닥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막 화가 났다. 낯선 사람들에게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온 식구들이 청소엔 젬병이라 늘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사는데, 우리끼리야 편하고 좋지만 남들이 보고 게으르다거나 지저분하다고 욕할 게 뻔하니 창피했던 거다.

그나마 손님이 미리 온다는 걸 알면 눈가리고 아웅하듯 보이는 데만 대강 청소라도 해두지만, 그런다해도 낯선 이들과의 어색한 대면이라든지 손님접대 과정은 참 싫고 민망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손님을 싫어하는 마음은 여전한데, 특히 회사를 관두고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중년 및 노년에 접어든 아줌마들의 취미가 몰려다니며 수다떨기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수시로 이집저집 몰려가 끼니를 해먹고 와글와글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의 취미가 가끔 우리 집에서 발현되는 경우, 내 입장이 몹시 난감해진 것이다. 특히 올빼미 생활에 빠져든 프리랜서 번역가가 집구석에서 낮동안 대체로 어떤 모습일지를 감안할 때, 상황은 더욱 괴로워진다. 쑥대머리 산발을 하고 나가서 엄마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자니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고, 인사를 안하자니 그 집 딸 예의없다는 소리를 들을 테고. -_-;
내가 오밤중에 일하고 대낮까지 잠을 자야하는 오묘한 직업을 가졌음을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도 이해해 주셨기 때문에, 요즘엔 감지 않은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눈꼽도 떼지 않은 얼굴로도 꾸벅 인사를 하거나 아예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을 정도로 편해지긴 했지만, 우리 집으로 마실 오시는 엄마의 최측근 동네 친구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집에 누가 오는 게 싫다.

아 그런데, 요샌 신경질나게도 손님들이 자주 들락거린다. 엄마가 깁스를 해 꼼짝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만방에 자랑하듯 알렸기 때문에 문병객이 늘어난 것이다. ㅠ.ㅠ 물론 다리를 다친 걸 빼면, 엄마는 그 어느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으시다. 뭔가 당신 몸에 더 큰 위기가 닥치면 울 엄마의 우울증은 언제 그랬냐 싶게 꼬리를 내리는 오묘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한동안 심해지는 듯하여 나의 제주도 여행까지 무산시켰던 왕비마마의 우울증은 이번에도 발목 뼈에 금이 간 것과 동시에 급호전되었다. ^^ 온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 친척들의 관심이 집중될 뿐만 아니라, 툴툴거리며 성깔 부리던 늙은 딸도 순한 양처럼 왕비마마를 보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무래도 몹시 뿌듯하신 모양이다.

어쨌거나 여전히 올빼미로 살아야 하는 나로선 갑자기 늘어난 손님접대가 짜증스러울 만큼 짐스럽다. 바쁠 땐 집안 청소에 신경쓰기는커녕 사흘씩 머리도 안감고 질끈 묶고 있는 데다가 무릎 나온 추리닝이 기본 옷차림인데 사정 빤히 아는 동네 아줌마들이야 그렇다 치고 낯선 이들에게까지 그런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야 없는 법 아닌가! ㅠ.ㅠ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엄마가 다니시는 절에서 떼지어 문병을 다녀갔다. 원래 어제부터 온다는 소식에 기겁하여 일단 청소는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극구 말렸는데 급기야 쳐들어 온 것이다. 그분들이야 아픈 사람을 문병하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슨 자랑이라고 사방팔방에 부상 소식을 알려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들을 불러들이는 왕비마마가 신경질나고 꼴보기싫었다. (나 못된 딸 맞다)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다지만, 별 것 아니라도 과일 깎아 내고 차 끓여 내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젠장. 게다가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구석에 앉아 있는 것도 완전 고역이다. 눈치 봐서 얼른 방으로 도망쳐 나오기는 하지만, 손님 접대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다!  어서 엄마가 깁스를 풀어 병문안 오겠다는 사람들도 없어지길 바랄 뿐인데, 앞으로 남은 3주가 참 길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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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삶꾸러미 2008. 4. 5. 22:51

벨로를 시초로 블로그 이웃분들의 연이은 <자신감> 포스팅을 보면서
약간은 자아비판 비슷한 고백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나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간 바쁘기도 했지만 자꾸 뜸을 들이게 됐던건
과연 내 인생에서 자신감 100개인 시절이 있었던가, 아닌가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그냥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시기를 정점이자 100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즈키님이나 키드님처럼 살아오는 동안 자신감이 100개로 온전히 채워진 적은 없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장 자신만만하고 심지어 오만불손하기까지 했던 시기를 억지로라도
100개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나를 믿는 마음>인 자신감이 앞으로 더더욱 고개를 숙이거나 고작해야 수평선을 유지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자신감 백개>라는 말을 처음 뱉은 11살 이쟁그만 양이나 벨로의 <자신감 백개>와 비교한다면 나의 자신감 백개의 수준은 최소한 다섯개쯤 부족한 기준의 정점임을 미리 털어놓고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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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오래 하다보면 "주로" 그간 같이 일해왔던 출판사의 일을 계속 맡거나
알고 지냈던 편집자들이 거처를 옮기고도 연락을 해와 일을 진행하게 되는데
가끔은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 경우도 있다.
말이 "뚫는다"는 것이지 주변머리도, 숫기도 없는 내가 일면식도 없는 출판사에
일감 달라고 뜬금없이 찾아가거나 연락을 하는 경우는 없다.
맨 처음 번역일을 해보겠다고 작심한 뒤 이력서를 써서 출판사 몇 군데에 보냈던 때를 제외하면. ^^

늘 새로운 출판사 쪽에서 주변에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거나 아는 출판인의 소개로 내게 처음 일감을 의뢰하면서 "첫 거래"가 시작되기 마련인데, 어쩔 때는 서로 대면하지도 않고 이메일과 전화통화 만으로 의견을 조율하여 책과 원고를 주고받아 출간에 이르는 때도 있다.
비즈니스에 관한 한 꽤나 철면피가 되기는 했어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밥 한끼 먹고 나서 차츰 친해지고 얼굴을 맞댄 채 원고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든 반갑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나의 초면 대인기피증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듯, 얼굴 대면 없이 전화와 이메일만으로 추진하던 일 하나가 최근 틀어졌다. ㅋㅋ

서로 바쁘니까 계약도, 책 검토도 온라인으로만 진행했는데
원서 출간이 늦어지네, 번역할 책이 바뀌네 마네 하더니만
계약 원고마감일이 지나도록 원서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기에 볼 일 보고 밑 안닦고 나온 것마냥 -_-;
기분 찜찜하게 차일피일 지연되기만 하던 일감 하나를 완전히 잘라낸 것이다.
그쪽에선 새삼 지금 당장 일을 서둘러달라지만, 나도 그간 밀린 원고며 앞으로 할 일 스케줄이 있는데
무작정 그러마고 할 순 없고 아직 서로에 대한 신뢰나 의리 같은 것도 쌓이지 않았으니
받은 계약금 돌려주고 깨끗이 마무리하는 쪽으로 정리를 했다.  

번역으로 먹고 살려면, 아니 프리랜서로 생활을 꾸리려면 "원숭이 줄타기 법칙"을 절대로 지켜야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지만, 줄 하나를 놓기 전에 다른 줄을 잡아야 바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원숭이의 입장은
꽤나 비장하다.
아마도 문제의 이 계약을 성사시킬 때도 "원숭이 줄타기 법칙"에 의거해서 다달이 빠짐없이
작업 스케줄을 잡느라 꽤 무리해서 일을 끼워넣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전체적으로 암담 그 자체.
요령을 피워 재주를 부리려던 원숭이는 여러갈래 늘어뜨려놓았던 줄이 마구 꼬여 갈피를 못잡고
결국 땅바닥에 자진해서 내려와 꼬인 줄을 푸느라 진땀을 흘리는 중이다.
1년전에 받았던 계약금을 다시 토해내려니 괜스레 생돈 날리는 것 같아 속이 쓰리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책 구경도 안하고 받았던 남의돈 잠시 맡아두었다가 내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아까울 건 없다.
다만 이제부턴 쓸데없는 욕심에 줄이 꼬이는 것도 모르고 아등바등거리진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까먹지 말아야할 터인데, 늘어진 줄 몇개를 지나고 나서도 또 새로운 줄이 드리워질지 어쩔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여전히 원숭이의 조바심을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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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롱잔치

삶꾸러미 2007. 12. 24. 17:39
해마다 나의 연말이 바쁜 이유엔
조카들의 재롱잔치도 한 몫 한다.
4살때부터 유치원엘 다녔던 정민공주부터 벌써 몇해째 재롱잔치 구경을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여전히 꽃다발 사들고 가서 지켜보면 울컥 눈물이 날 정도로(주책 고모란 거 나도 안다;;) 감동적이고 뿌듯하지만 어린 아이들이 한달 이상 연습하며 받았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숫기 없는 유전자의 난관을 극복하고 이젠 어느 정도 안무와 노래를 소화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울집 공주와 왕자들이 정말로 기특한데
유심히 지켜보면 공연도중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데,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심지어 울고 있는 아이들이 꼭 있다.
그 아이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
우리 정민공주도 유치원 다니던 시절 재롱잔치때마다 거의 2년은 그렇게 무대에 서서 꼼짝않고 반항(?)을 하는 바람에 캠코더와 카메라까지 싸들고 간 제 부모는 물론이고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키지도 않는 재롱을 떨어야 하다니;; 얼마나 끔찍했을까 +_+

유치원 교사나 부모들은 그런 재롱잔치가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하지만, 그건 '주류'에 속하는 다수의 아이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일뿐
자의식이 유달리 강하거나 수줍음이 많은 아이들에겐 그저 끔찍하고 괴로운 '망신의 장'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도 옛날이라 유치원을 다닌 적은 없지만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발표회 같은 게 있을 때
단체 합주나 합창은 몰라도, 연극이라든지 소수가 출연하는 꼭두각시 춤 같은 공연을 해야하면
나는 그야말로 주눅이 잔뜩 들어서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 혼자 실수를 하거나 넘어지면 어쩌나...
대사를 까먹으면 어쩌나..  그런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것인데
공연이 끝나면 성취감보다는 그저 지겨운 일이 끝났다는 것만 반가웠더랬다.

하기야 요즘 아이들은 절반 이상의 장래희망이 *연예인*이라니
그들의 끼와 숫기가 내 어린시절과는 수준부터 다를 것도 같다.

째뜬 올해도 2주 연속 토요일마다 우리집 왕자님들의 공연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두 녀석 역시 재롱잔치를 꽤나 즐긴 모양이다.
분명 녀석들에게도 얼마간은 스트레스였겠지만, 무사히 재롱잔치를 마치고 갈채를 받은 조카들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우리 조카들 옆에서 내내 울음을 터뜨렸거나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아이들도, 그들의 부모도
너무 큰 마음의 상처는 받지 않았기를 빈다.
2년 내내 무대 구석에 홀로 서있기만 했던 정민공주도 3년째 되던 해에는 단체 소고무와 합창을
곧잘 따라해서 우리에게 기쁨과 감동을 안겨주었단 얘기를 그들에게 귀띔해주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모든 아이들이 다 무대체질은 아니라고요!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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