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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기

추억주머니 2007. 2. 21. 16:23

대인기피증에 관한 쌘의 글을 어제 읽고 나서 댓글에도 적었지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내가 친하게 어울리고 생각과 마음을 공유하는 지인들 가운데는
사람들 앞에 보란듯이 나서서 대중의 이목을 즐기는 사람들이 정말로 거의 없다.
물론 예외 없는 규칙은 없듯, 아주 드물게 사람들의 시선과 '조명발' 같은 것을 즐기는 측근이 한두 사람 정도 있기는 하지만, 고백컨대 그들과의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유유상종, 동병상련이라는 옛말이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모든 면에서 똑같을 순 없겠지만, 지인들은 물론이고 하물며 블로그 파도를 타다가 만난 낯선 이에게서도 이런저런 공통점을 발견하면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기쁘고 반갑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숫기'라는 게 없어서 곤혹스러울 때가 참 많았다.
이제는 '세월의 때'가 많이 묻은 것인지, 나이와 함께 약간이나마 연륜이 쌓인 것인지
일 때문에 만나는 경우라면 낯선 사람들과도 제법 대화를 잘 나누는 편이지만,
예전엔 낯선 사람과 마주한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는지 늘 앞이 막막했다.
회사 다니던 시절 간혹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프리젠테이션 같은 거라도 하게 되면, 정말 심장이 터져나갈 것처럼 괴롭고 떨려서 말이 겉잡을 수 없이 마구 빨라지기도 했다.

이번 설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조카들이 어른들께 세배하는 걸 뒤에서 쳐다보려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맙습니다"라고 똑똑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제 엄마들한테 매번 꾸지람을 듣는 조카들의 모습에 내 옛날 모습이 겹쳐져 보였다. ^^
나 역시 어린 시절 친척들이 사방에 둘러서거나 지켜보는 가운데 세배를 하는 것이 너무도 창피하고 쑥스러워서, 7살 무렵엔 세배 안 하고 세뱃돈 안 받겠다고 도망쳤던 전적도 있었다.
나중에 '돈맛'(!)을 알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세배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세배의 순간은 늘 당혹스러웠기 때문에 반드시 동생들과 나란히 서서 동시에 세배를 했다.
혹시라도 동생들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혼자서 세배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면...
역시나 심장이 두근거려 지레 치맛자락이나 옷고름을 밟고 비틀거렸던 것 같다.

꼭 설날이 아니라도, 우리 조카들도 만날 어른들께 인사를 제대로 못한다고 혼이 나는데, 나 역시 옛날엔 그랬다.
그건 버르장머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목소리 높여 인사하는 것이 쑥스럽고 민망하기 때문이란 걸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나 뿐만 아니라 동생들까지 포함하여 우리 삼남매는 숫기 없고 수줍어하기로 유명했다.
외가의 사촌들은 우리와 정반대로 대단히 활달하고 인사성 밝고 누가 노래라도 시키면 주저없이 나서는 바람에 우리들 기를 팍팍 죽이는 반면, 다행히 친가의 사촌들은 대부분 우리와 사정이 비슷했다.

간혹 먼 친척분들이나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애들한테는 대개 용돈을 주시지 않나?
마지못해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마치고, 손님들이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용돈을 내밀면 또 나는 그걸 받으러 앞으로 걸어나가는 순간이 죽도록 싫었다.
용돈을 받은 뒤 또 다시 "고맙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 순간도.. -_-"

내성적이고 숫기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죽도록 싫고 민망했던 성격을 조금이나마 고쳐보려고 우리 삼남매 모두 대학에 들어가선 나름대로 각자 노력을 기울이긴 했던 것 같다.
나와 큰동생은 연극 동아리엘 들어갔고, 막내는 노래 동아리엘 들어가 어떻게든 무대 공포증을 약간이나마 극복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두 동생은 이제 어쩌려는지 몰라도, 나는 여전히 멍석체질이다.
나름 힘들게 교직이수를 하고 교생실습을 했지만, 시골 학교 영어선생님이 되어 집에서 벗어나는 로망을 짧게 품었던 때를 제외하면, 누군가를 앞에두고 목청 높여 뭔가를 가르친다는 게 나로선 못할 일이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다. 물론 임용고시에 붙을 자신도 없었지만 말이다. ^^;;
이래저래 생각해봐도, 숫기 없이 뒷전에서 투덜대기만 하는 내 성격엔
조직을 떠나 이렇게 혼자 방구석에 틀어박혀 컴퓨터 자판이나 두들겨대는 일이 딱 맞는 것 같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한다고 할 때, 일부에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좋아하고 나다니는 거 좋아하는 니가 혼자 고립되어 끙끙대는 일을 평생 할 수 있겠냐?"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혼자 일한다고 해서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나다닐 기회 역시 마찬가지여서, 가끔 계약서를 쓸 때나 얼굴을 대면할 뿐, 전화나 이메일로 원고 청탁을 받고 원고를 넘기는 정도로만 일과 관련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내 적성엔 딱이다.

그리고 넘치는 '끼'를 주체못하는 수많은 '요즘' 사람들의 '이상한' 풍조 속에서
나처럼 숫기 없이 약간의 자폐기질과 대인공포증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알음알음 더 많이 갖게 되는 과정이 참으로 행복하다.
익명으로 끼적댈 수 있는 이 공간이 소중한 것도 역시 나의 숫기없음 때문이지만
아무도 나무랄 사람 없으니 더욱 기쁘지 아니한가.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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