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안하무인 MB 정권의 처단을 위해서라도 새누리당 후보는 절대 대통령 되면 안된다고 열심히 세뇌교육에 힘썼더니, 왕비마마는 그럼 강지원 변호사를 뽑겠다고 했었다. 자기가 '아는데' 정말로 청소년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나. 나는 ㅂㄱㅎ만 안 찍으시면 된다고 반색했다가 나중엔 또 다시 유치하게 이민 카드를 휘두르며(MB 대선 때도 익히 써먹은 수법이다 ㅠ.ㅠ) 정말이지 ㅂㄱㅎ가 대통령 되는 사태는 저지해야하므로  이왕이면 야권단일화 후보를 밀어주는 게 어떠냐고 엄마를 꼬드겼었다. 왕비마마는 대선 후보자 토론을 두어번 보고 나선(특히 이정희가 활약한 1차는 전편을 다 보시곤 그 여자 말 한번 시원시원 조리있게 잘하네, 했다) 2번을 찍겠다고 동의해주었다. 사람 순하게 생긴 게 박력은 없지만 꼼꼼하게 일 잘하겠다면서. 그러나 과반의 국민들은 우리와 의견이 달랐고, 모녀는 낙담했다.

 

어제 동짓날 절에 가서도 왕비마마는 대다수 ㅂㄱㅎ(어윽...이름도 쓰기 싫다!) 지지자 할마시들의 설레발에 적잖이 마음을 상하고 돌아온 듯했는데, 오늘은 또 열혈 ㅂㄱㅎ 지지자인 고모 한분과 안부  통화를 하다 정치 얘기로 화제가 넘어갔는지 논쟁이 좀 길어졌다. 멀리서 듣자하니 대화가 흥미진진하여 깔대기처럼 귓바퀴를 늘이고 통화를 엿들었다. 오, 울 왕비마마 조리있게 잘 받아치시는군!

 

ㅂㄱㅎ 당선에 할렐루야를 외쳤다는 60대 고모는 이를테면 부유한 강남 할머니의 전형. 온 종일 기분이 너무 좋아 콧노래를 불렀다고 한 모양인데, 열살쯤 손위인 엄마는 그게 콧노래 부를 일이냐, 표 차이도 얼마 안났다고(엄마, 백만표 차이래요 ㅠ.ㅠ) 문재인이 아깝게 떨어졌다고 응수했다. 고모는 무엇보다도 '예쁘고' 불쌍한 데다(부모 잃은 고아라고;;) 똑똑해서 정치를 잘하니까 ㅂㄱㅎ를 지지한다고 했다는데, 왕비마마는 부모 다 총 맞아서 불행하게 죽었으니 불쌍한 건 맞지만 토론 보니까 똑똑한 건 모르겠다고(울 엄마 화이팅!), 중요한 일 있을 때마다 쏙쏙 빠져나가면서 정치 잘 한 게 뭐 있느냐고 반박했다. 30년 넘게 똑같이 육영수 여사 흉내내는 머리 모양 하는 것도 그만큼 생각이 꽉 막혔다는 뜻이라고도 했다. (오, 내가 해준 말인데, 울 엄마 기억력 짱!!)

 

논리적으로 밀린다 싶었던 고모는 이정희를 들먹이며 종북좌파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아마도 민주당까지 싸잡아서 다 종북좌파라고 했겠지. 이 대목에서 엄마는 우아하게 웃으며 요즘 북한이 얼마나 못사는지 다 아는데, 북한 좋아서 추종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인정상 도와주자는 거지... 그리고 이정희 말도 들어보면 일리가 있더라나... ^^; 저쪽에선 또 '퍼주기' 비판을 시작한 모양이었고, 엄마는 4대강에 쓸데없이 돈 처들이고 파헤치는  것보다는 굶어죽는 사람들한테 쌀 퍼주는 게 더 나은 게 아니냐고 대꾸했다. 오오.. 존경스러운 왕비마마. 뉴스 볼 때마다 내가 추임새로 넣었던 말들을 다 귀담아 두셨었군요... ㅠ.ㅠ 그러고선 추가 공격하듯, 자기는 유니세프에 다달이 기부도 하고 있다고, 굶어죽고 병든 애들 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정점을 찍으심! (이후로 대화는 유니세프에서 산 6만원짜리 천가방이 얼마나 가볍고 쓰기 편한가 하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수백만원짜리 명품백이 여럿인 고모는 과연 왕비마마의 자랑을 어떤 표정으로 들었을지 몹시 궁금타.) 으음, 어느 대목에선가 정수장학회, 박정희, 전두환 비판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까먹었다. ^^;

 

심신이 건강해진 울 왕비마마는 최근 어딜가나 '사람이 또릿또릿해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자기가 옛날에 얼마나 멍청하고 흐릿해보였으면 그랬겠느냐고 속상해하는 적이 더러 있다. 우울증을 거의 떨쳐버려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우와 말 많고 잘난 시누이와 정치토론도 거뜬히 해내시는 걸 보니 내가 밖에서 활동하는 엄마의 모습을 못봐서 그렇지 매사에 정말로 똑똑해지고 자신감도 넘치는 게 분명했다. (하긴, 얼마전 실버합창단의 제2회 송년음악회에서 잘난 척 대장인 젊은 할머니와 왕비마마가 무대 위에서 살짝 '한 판 붙는' 장면도 내가 찍은 동영상에 담겨 있다. ^^; 알토 파트는 입다물고 기다리는 도입 부분에서 왕비마마는 단지 리듬을 타며 고개만 살짝살짝 움직이고 있었는데, 뒤에서 기분나쁘게 콱 찌르며 노래 부르지 말라고 혼냈단다. 울 엄마는 홱 고개를 돌려 왜 엉뚱한 사람 잡느냐고, 당신이나 잘하라고 대꾸하셨다고... 그 순간 입다물고 있었다는 증거 동영상도 있으니, 담주에 개강하면 정식으로 한판 붙으시라고 내가 부추겨놓았다. ^^ 울 엄마 화이팅! ㅋㅋ)   

 

전화통화를 끝낸 왕비마마는 "@@동 고모가 우리더러 좌파세력이란다"라며 씩 웃었다. 나는 70대 할머니 중에서 좌파 흔치 않을 텐데 멋지다고 대꾸했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울 엄마도 덩달아 보수파에 깊이 세뇌되어 ㅂㄱㅎ를 찍어주었을 확률이 높다는 건 잘 알지만, 투덜이 딸이 옳다니까 귀기울여 들어주고 지지해주고 촛불시위에까지 따라나서는 울 엄마. 5년 그 개고생을 하고도 또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이 나라 국민들은 도대체가 가망이 없어, 라고만 할 게 아니라, 연로한 울 엄마가 바로 내가 찾는 희망이구나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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