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안동 얘기까지 왔으니 여행자의 삶 후기도 얼마 안남았다. 쓰고 보니 많이 다니지도 않았구만 왜 그렇게 노상 쏘다닌 것처럼 느껴졌는지 원. 아무튼... 이웃 주민들 영향으로 통영과 함께 선망의 여행지였던 안동에 결국 다녀왔다.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짰던 시간표와 동선은 완전히 무너져 허망했고, 얼마 다니지도 못했음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마구 찍어댄 풍경사진을 '소장'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뿌듯하며, 그곳을 30년지기와 함께 거닐었다는데 의미가 있으니 됐구나 싶다.
그래도 왠지 억울해서 적어보자면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고속버스편으로 아침 일찍 출발.
안동에 도착해 점심으론 <헛제삿밥>을 먹는다.
오후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돌아본 뒤 저녁은 안동 구시장 찜닭골목에서 <안동찜닭>을 먹어줘야지.
숙소인 고택으로 가기 전에 필히 맘모스 제과에 들러 안동사과를 넣어 구웠다는 30년 전통의<사과파이>와 <맘모스빵>을 산다.
이걸로 다음날 아침 커피와 함께 요기.
이틑날 오전에는 도산서원을 돌아본 뒤 다시 안동시내로 돌아와 역앞에 있다는 간재비 아저씨네 식당에서 고등어조림과 구이로 거하게 점심.
커피 한잔 마시며 여유 부리다 오후 늦게 부산으로 출발.
그러나... ㅠ.ㅠ 야무진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세운 계획에 제동을 건 것은 일본에 같이 가겠다고 했다가 막판에 취소를 해서 오사카 상품을 놓치게 만들었던 친구 M이었다. 일본도 같이 못갔으니 안동은 꼭 같이 가겠다고, 하지만 자기는 바빠서 먼저 올라와야하니깐 고속버스 관두고 자기 차로 모시겠다고, 가면서 수다도 떨고 좋잖아... 근데 8시 출발은 너무 빠르다며, 아침 출근시간이랑 딱 겹쳐서 막히니깐 10시에 만나자고 M은 말했다. 가서 점심 먹으려고 했는데.... 라는 내 말에 M은 '엄청 쎄려밟고 가면 돼!'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D데이인 월요일엔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울 엄니께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마치고 약속장소인 신사동까지 전철을 타려고 집을 나서려던 찰나, 띠디링 울리는 M의 카톡 문자. 급하게 사무실에 자료 전해줄 것이 있어서 12시에 만나잔다. -_-; 이노무 지지배가! (자료 전해주는데 왜 2시간이나 더 필요한지는 묻지 않았다. 짐작컨대 M은 문자를 보내고 더 퍼질러 잤을지도 모르겠다. 이로써 헛제삿밥은 날라갔다)
어쨌거나 철철 내리는 빗속에 우산을 받쳐들고 걸어가며 내가 애써 기운을 내어 말했다. 친구들이 안동갔을 때도 비왔는데 더 운치있고 좋았댔어. 낙숫물 떨어지는 거 우리도 보겠다. 헤헤헤.
'엄청 쎄려밟고' 가겠다던 M의 호언은 우릴 따라 남쪽으로 움직인 비구름으로 무산될 수밖에 없었고, 헛제삿밥 대신 점심은 휴게소에서 맛없는 떡볶이와 식은 오뎅으로 때워야 했다. 그래, 헛제삿밥이야 뭐 나물 비빔밥이지, 제일 덜 먹고 싶은 메뉴였어, 라고 나는 자신을 달랬다.
당연히 오후에 돌아보겠다던 하회마을 일정은 다음날로 넘어갔다. 일단은 찜닭부터 먹자규~!
헌데, 미운 짓은 참 가지가지 하려는지 M은 보름간 작정기도를 하고 있다며 6시 이후 금식을 실천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뭘 먹든 상관없지만 자기는 6시 이후엔 아무 것도 안 먹는다고... 자꾸 딴짓하다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길을 몇번이나 놓쳐서(나중에는 뒷좌석에서 내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안내해야 했다. 나: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도로라잖아!!! - M: 알았어.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시끄럽게.... ㅠ.ㅠ ) 안동시내에 들어선 시간은 이미 어둠이 깔린 5시 반. 어휴...
어쨌거나 M이 주차하는 사이 먼저 시장골목으로 뛰쳐들어가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은 건 6시 이전이었다. ㅎㅎㅎ
어마어마한 크기의 접시에 담겨 나오는 안동찜닭. 매콤해서 나는 헉헉 진땀을 흘리다 맥주로 사이사이 입가심을 했는데, 몹시 배가 고팠음에도 닭 한마리가 어찌나 큰지 셋이 낑낑거리며 먹고도 3분의 1은 고스란히 남긴 것 같다. 옆 테이블엔 남자도 껴있었는데 결국 셋이 다 못먹고 싸가더군.
나름 검색한 끝에 찜닭골목에서 제일 맛있다는 '유진찜닭'집엘 간 거였는데, 솔직히 나는 서울에서 먹은 봉추찜닭이 더 맛있다고 생각했다. ㅋㅋ 원조 안동찜닭은 좀 더 담백하고 순수한 맛이랄까? 어쩌면 조미료와 설탕이 덜 들어가 더 건강한 맛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LA에서 온 S는 매콤하니 맛있다고 평했으니 됐다. 찜닭도 별로 맛없고 김치는 최악이고 밥도 푸실푸실 맛없다고 혹평 일색이었던 M의 반응은 뭐 그러려니 했다. 금식 선언 깨고 6시 이후에 저녁을 먹어준 게 어디냐, 황송하다.
아무튼 사다리처럼 가파른 계단을 올라 엉금엉금 앉아서 움직여야하는 다락방 같은 2층 자리에 앉았다는 점이 색다르고 재미있었고, 나와서 보니 저렇게 커다란 냄비에 닭을 한마리씩 넣고 펄펄 끓여 조려진 뒤에야 내오는 것이었다. 어쩐지 오래 걸리더라니...
M의 6시 금식 이전에 도착해 찜닭을 먹어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며, 길잡이까지 하느라(안내 안 듣고 가려면 내비게이션은 왜 달고 다니냐고!) 에너지를 소진한 나는 맘모스제과고 뭐고 일단 숙소에 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새로 주소 찍어주기도 귀찮아... 커피 한잔 마시고 정신 차린 다음에 다시 빵을 사러 나가든지...
.....
여차저차해서 전날밤 한숨도 자지 못했고, 차안에서도 불안하여 (수원 톨게이트만 두번이나 들락거렸으니 말 다했지;;) 눈 한번 붙이지 못했던 내가 방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수다에 참여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M은 숙소가 영 마음에 안드는지 그 밤에 서울로 출발하겠다고 했다. (M: 펜션이 낫지 야, 여기 뭐야. 무섭다. 난 이런 데 무서워서 싫어. 그 돈이면 엄청 좋은 펜션도 많은데... 나: 한옥 고택에서 묵고 싶어서 일부러 여기 예약한 거야, 우쒸....) 어쨌거나 갈 때는 부디 국도에서 헤매지 말라고 일부러 내비에 고속도로로만 경로지정을 해준 후 우린 또 조마조마 기다려야 했다. 졸지 않게 간간히 전화 해달라더니 왜 전화를 안받느냐규~~~!!! 에구 삭신이야.... 다행히 비도 그쳐 올라갈 땐 정말로 쎄려밟을 수 있었던 듯 12시 전에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M의 전화로 열통터지는 길고 긴 하루가 드디어 끝이 났다. 더불어 아침에 요기할 맘모스 제과점의 빵도 당연히 확보하지 못했다. ㅠ.ㅠ
사람따라 취향의 차이겠지만, 셋이 묵을 생각으로 화장실 딸린 방을 구하다 보니 결국 별채로 얻게 된 고택 숙소는 깨끗하고 따뜻하고 좋기만 했다. 흥!
일본 료칸에서 저녁 먹으러 다녀온 사이 우렁각시가 다녀간 것처럼 해주겠다며, 내가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 친구가 이불을 깔아놓았다. 이날 사진들은 폰카로 찍은 탓도 있지만 찌뿌등한 내 심리를 반영한듯 죄다 흐리고 흔들렸다. ;-p
하소연이 아니라 속 좁게 친구 욕으로 점철된 첫날 이야기는 부끄러워서라도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본격 하회마을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겨야겠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