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프로젝트

놀잇감 2012. 11. 19. 15:07

원래는 친구의 LA 동료들과 만난 날 밤에 같이 가려고 했었는데, 자기들끼리 바로 다음날 궁궐순례 계획을 잡아놓았다고 하여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해서 친구는 결국 덕수궁 프로젝트를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친구에겐 궁궐과 설치미술 구경보다는 수세미, 행주부터 수면바지, 속옷까지 식구수대로 사가지고 갈 쇼핑품목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미술관 때문에 제일 자주 찾는 궁궐이 덕수궁이지만 '서도호'를 포함한 설치미술이 전각 안에 전시되어 있다니 더욱 흥미가 동했다. 드디어 덕수궁 전각 안에도 들어가보게 되는군!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은 덕홍전. 금속으로 만들어놓은 곡선형 좌식 의자가 바닥에 빼곡하게 깔려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전각 밖에서 안을 흘끔흘끔 들여다보고만 있는데, 입구에 서 있는 안내인은 들어와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왜?! 내가 먼저 신발을 벗고 성큼성큼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이 부쩍 차가워져 엉덩이와 등이 이내 시려왔으니망정이지 안그랬으면 한 30분쯤 누워 쉬었으면 좋았겠다 싶을 만큼 인체공학적으로 몸에 딱 들어맞는 편안한 디자인이었다. 하지훈의 <자리>라는 작품이라고. 찍어온 안내판 사진을 보니 성기완의 음악도 연주되고 있었다는데 사실 기억에 없다. ㅋ

 

파도의 일렁임 같기도 하고 터미네이터2가 생각나기도 하는 금속 의자와 덕홍전 천장 사진을 세트로 찍어오는 블로거들이 많던데 그럴만했다. 편히 눕다시피 앉으니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새로이 채색한 듯한 화려한 단청이었다. 예쁘기도 하지...

 

 

석조전도 그렇고 중화전 뒤쪽으로도 그날따라 공사중인 곳이 꽤 많아 길을 돌아돌아 가다보니 고종이 커피를 즐겼다는 정관헌이 나왔다.  

아니 이것도 작품인가 싶게 거울을 사이에 두고 회의 탁자가 놓여있었다. 설치미술은 뭔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다시 되살려준 정서영의 작품. ^^

 

 

전시 시작할 때는 미술관에서 설치미술 제작 과정을 죄다 보여주는 특별전시도 함께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갔을 땐 미술관 문이 닫혀 있었다. 어쩐지, 입장료로 달랑 천원만 받더라니... 좀 아쉬웠다.

 

 

단풍으로 아름다운 나무들을 바라보며 궁을 가로지르다 보니 바닥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최승훈+박선민의 <결정>이라는 작품. 전시 안내책자에 어찌나 인색한지 브로셔도 없이 내키는대로 돌아다니다 작품과 함께 설명 표지판을 찍어온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어서 작품 제목까지 기억하는 게 가상타. -_-;

 

 

아래 사진은 덕수궁에서 제일 잘생긴 건물이 아닌가 싶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석어당의 옆모습.

 

이상하게도 단청 화려한 궁궐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전각을 꼽다보면 꼭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창덕궁에선 연경당.

덕수궁에선 석어당.

경복궁에선 건청궁.

 

경희궁과 창경궁은 아직 복원이후 구경가보지 못했다. 어서 거길 다 가보아야 남아있는 5대궁궐 탐사가 다 끝날 텐데... ^^;

 

예술가들도 각별히 애정을 품었는지, 이곳에선 두가지 작품을 볼 수 있었다.

김영석의 <better days>와

이수경의 눈물.

 

 

덕혜옹주를 특히나 어여삐 여겼다는 고종이 석어당에 유치원을 만들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복과 보료, 영사기로 투사된 덕헤옹주의 사진들로 방을 재현해놓은 작품이 왼쪽의 모습이다.

 

 

흑백사진을 투명한 망사에 저렇게 비춰놓으니 더욱 처연하면서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죄다 어디에서 난 사진인고 했더니, 그 사진 액자들이은 분합문 위 문틀에 나란히 올라가 있다.

 

 

 

 

 

중화전 행각에 있던 이 작품은 이름도 모르고 작가도 모르겠다. 궁중소설을 읽어주는 성우의 목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오던데 우린 철사에 묶여 있는 소설책을 대충 넘겨보다 잠시 앉아 다리만 쉬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중화전에도 뭔가 조명과 음향을 설치해놓은 것 같던데 하나도 안보이고 안들렸었다. 밤에만 보이는 건가?

 

 

기대했던 서도호의 함녕전 작품 <동온돌>은 약간 의외였다. 

고종이 명성황후와 엄비를 그리워하여 항상 이불 세채를 깔고 주무셨다는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래고, 대청 한가운데에선 한복 입은 남자가 자리에 누웠다 일어나고 궁녀들이 이불 개고 펴며 잠자리 준비하는 동영상이 계속 돌아갔다. 이불 세채의 사연이 좀 안쓰럽긴 하지만 서도호의 리움 전시를 본 사람으로선 애개개 싶었음.

 

 

 

덕홍전 천장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함녕전의 천장. 전혀 다른 느낌이지만 쌍학이 날고 있는 똑같은 그림이다. 천장마저도 서글픈 느낌.

 

 

 

궁궐 전각과 예술품의 만남이라는 프로젝트의 의의도 좋았고 뿌듯했지만, 역시나 이날 가장 감동을 주었던 건 가을 풍경이었던 것 같다. 아직 만추가 되기 전이었던 저 나무들도 지금은 다 완전히 색이 달라졌거나 헐벗었겠지. 게으름 부리다 밀린 일기 쓰는 것의 장점 하나는 떠난 계절까지도 오래도록 질질 붙들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덕수궁 프로젝트는 12월 2일까지.

 

 

 

 

 

(2012. 10. 30)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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