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한권의 책

놀잇감 2011. 10. 31. 08:33

언제부턴가 창덕궁에서는 봄과 가을에 후원 정자 몇개를 개방하고 책을 비치해 관람객을 유치(?)하는 연례행사를 벌인다. 이른바 한권의 책. 먼저 다녀온 이의 말에 따르면 비치된 책이라는 것이 몇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얄팍한 시와 에세이, 아동서 정도라 기대해선 안된다고 했다. 의미를 둔다면 평소 특별관람으로 후원엘 들어가도 해설사 안내에 따라서 한시간 반 이내에 쫓기듯 보고 나와야하는데 반해, 행사 기간에는 후원 정자 몇개에 들어가볼 수도 있고 후원 경내를 마음껏 돌아다녀도(물론 여전히 출입금지 구역은 있지만) 된다는 점이다. 봄과 가을에 딱 2주간씩 주어지는 혜택이라 요번엔(10월 30일까지였음) 날을 잡아 엄마랑 다녀왔다.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억새와 단풍 구경을 하고 싶다는 엄마의 눈치를 진작부터 받았으나, 나도 며칠 들먹 설레어 숙소와 항공편을 알아보다가는 제풀에 포기하고 만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니 작년에 일본 갔던 악몽이 다시 떠오르질 않겠나... (내 다시는 엄마랑 단둘이 여행 안가리라 다짐도 했었으니 -_-;) 해서 단풍구경은 서울에도 좋은 데가 있다는 걸 보여줄 작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풍구경은 절반의 실패였다. ㅠ.ㅠ 창덕궁에서 가을 책 행사 기간을 17-30일로 잡았길래 나는 지난번 반짝 추위로 단풍이 예년보다 일찍 들었나보다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켁, 나의 착각이었다. 10월말에 늘 한권의 책 행사를 기획하는 건 그때가 가을 행락철이라(말하자면 설악산, 내장산 같은데로 단풍구경 다니는!) 덩달아 그렇게 잡았다는 해설사의 설명. 단풍 예쁘게 든 후원구경을 할 요량이었다면 너무 일찍 왔다고 말했다. 쳇! 그렇지만 나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후원 정자와 전각에 들어가보는 것이었으니 얼른 마음을 달랬다. 드문드문 꽤 가을색으로 물든 나무들도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지난번 창덕궁엘 갔을 때만 해도 입장료 5천원에 인정전 일대와 후원의 부용정, 연경당 부근까지 보여주더니만 그새 시스템이 바뀌었다. 일반관람료는 3천원(65세이상 무료)이고 이 표로는 오로지 전각들이 있는 구역만 볼 수 있었다. 후원을 보려면 안에 따로 함양문 앞에 있는 후원 매표소에서 5천원짜리 특별관람권을 끊어야했다(경로우대 없음). 특별관람은 1회 입장인원도 원래 10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행사기간이라 200명으로 인원을 늘여준 덕분에 우리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3시 좀 넘어 궁에 들어가 전각 구역을 설렁설렁 돌아본 뒤(친구들이랑 다닐 땐 몰랐는데 궁궐엔 계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오르기는 수월하나 계단 내려오기는 울 왕비마마의 취약점이거늘... ㅠ.ㅠ 붙잡고 다니느라 모녀 동반 땀깨나 뺐다), 4시에 후원 입장하는 표를 끊었는데 내가 표를 살 때 전광판에 적힌 4시 관람 인원이 179명인가 그랬다. 평일 오후에 별러서 궁궐 거닐러 온 사람이 참 많기도 하지!

일본인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까지 바글거려서 전각 구역은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별로 없고 사진 한 장 못찍었다. 주워들은 풍월로 설명을 해보았으나, 엄마는 정민이 어릴 때 같이 갔던 경복궁과 계속 헷갈려했다. 열심히 설명하고 나면 그러니까 이게 근정전이지?(근정전은 경복궁에 있고 이건 인정전이라니깐~!) 저 대들보 없는 건물 뒤로 가면 예쁜 꽃담이랑 그림 달린 굴뚝 있었지?(거기는 경복궁 교태전이거든요... -_-") 뭐 이런 식...  암튼 엄마의 결론은 '창덕궁엔 처음인 것 같다'였다. 근데 넌 언제 그렇게 여길 자주 구경온 거니? 누구랑? @.,@ 엄마가 섭섭한 듯 추궁할 기세를 보이길래 커피랑 물 사온다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ㅋ

제대로 단풍이 들었다면 빨갛게 터널을 이루었을 후원 입구는 아직 초록빛이 완연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단풍 요란하게 드는 활엽수들은 원래부터 창덕궁에 있던 나무가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하도 좋아하여 새로 심은 것이란다. 옛날 궁궐 후원엔 변함없이 푸르른 소나무가 대부분이었다는 해설사의 이야기가 어찌나 새삼스럽던지(과거에 듣고도 까먹은 것일까나, 해설사 설명을 귓등으로 들은 것일까나). 단풍구경은 가을 궁궐이 제일이라며 그간 구경다닌 나는 뭐람. ㅎㅎ

부용지에서 올려다본 주합루

애련지와 애련정


아무튼 후원에 들어가 제일 처음 만나는 부용지 주변을 므흣하게 바라보며 인증샷을 찍었다. 바글거리는 사람 안 넣으려니 어찌나 힘든지 원... 위 사진 둘 다 한 사람씩 잡혀 있다. 왼쪽 여자는 무려 출입금지 팻말을 세개나 거슬러 계단을 올라가 사진을 찍던 외국인. 방송으로 내려오라고 해도 못 알아듣더라. 오른쪽 사진의 빨간 잠바 아줌마도 참 사진마다 내 앞을 가리며 속을 썩이더니 어느새 찍혀 있다. ㅋ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과 반도지

존덕정의 화려한 천장


원래는 궁궐이랑 엄마 사진을 제대로 찍어오려고 디지털 카메라도 가져갔었는데... 흑.. 두장 찍고 나니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집에서 켜봤을 땐 배터리 다 차있길래 그냥 가져간 건데.. 쩝... 하여간 후원이 깊어 그런지 4시를 넘기고 나니 해도 안비쳐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 참 다들 알량하다. 얼마만에 보는 반도지와 관람정인데! 으휴... 천장의 팔각형 단청이 유난히 아름다운 존덕정엔 정조의 친필 현판과 주련이 걸려있어 더욱 유명하다. 사진 오른쪽에 밤색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정조의 친필. 마침 존덕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어 얼른 걸터앉아 쉬며 사진을 찍었다.

연경당 뒤쪽부터는 나도 그야말로 난생처음 가보는 옥류천 일대! 등산이나 다름없다고 겁을 잔뜩 주는 바람에 엄마도 나도 긴장했는데 조금 가파른 비탈길이 있어 숨이 잠시 가빠지긴 했으나(그래서 옛날 왕들도 행차하기 힘들어 후원으로 안 넘어오고 창경궁 쪽으로 돌아 다녔단다) 금세 취규정인가 뭔가 하는 정자가 나타났다. 그담부터는 다시 내리막길. 호젓한 오솔길을 내려가니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물이 흐른다는 옥류천이었다. 커다란 바위를 깎아 물길을 내고 폭포(!)를 만들었다는데, 책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옥류천은 실물로 보니 어찌나 규모가 아담하신지... ㅋㅋㅋ

옥류천 폭포(?)

청의정과 태극정


숙종이 지었다는 한시가 돌에 새겨져있는 옥류천 주변에는 정자 셋이 조르륵 둘러쳐 있다.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이 남아있는 청의정! 원래 궁궐도를 보면 청의정 주변이 연못이었다는데 대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게 주변이 논으로 변했단다. 가을이라 추수를 마친 논 한 가운데 서 있는 청의정 모습이 참 신기했음. 논에서 벤 볏짚으로 청의정 지붕을 단장한다고 하므로, 논을 다시 연못으로 바꿀 수도 없겠다. 옥류천 일대는 창덕궁의 가장 북쪽 끝이라 담장이 빤히 보이고, 그 담장 너머엔 옛날 성균관이 있었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었나, 정조가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궁궐 전각까지 몰래 대물 일행을 피신시키던 장면이 떠올라 얼핏 웃었다. 그들도 산넘고 물건너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싶어서.
 
암튼 일단은 엄마를 위하여 해설사의 이야기를 따라 듣다가 나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전각에 들어가 쉬려고 마음 먹었던 우리는 옥류천에서 뒤처졌다. 원래도 정자보다는 전각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나가면서 부용지 옆에 있던  널찍한 영화당--옛날 과거시험 본부 건물이라고--에 올라가 쉬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못했다 ㅠ.ㅠ) 옥류천 옆쪽에 농산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는데다가 외져서 그런지 사람이 한명도 없는게 아닌가! 나는 냉큼 신발벗고 들어가 아픈 허리와 다리를 쉬었으나, 엄마는 신발 벗기 귀찮다고 툇마루에만 앉아 쉬셨다.

읽고픈 책이 한권도 없었다 -_-;

그만 좀 찍어라..고 하심


전각에 비치된 책은 저 정도... 예전에 세자와 왕들이 묵으며 학문을 닦던 곳이라는데 죄다 마룻바닥이니 겨울엔 얼마나 추웠을까. 일부러 공부만 하려고 북향으로 지은 전각들도 꽤 되던데 참... 왕과 왕자도 못할 짓이었다 싶다.

두다리를 쭉 뻗고...

깔고 앉으라고 방석도 놓아두었던데, 아무리 관리를 하더라도 곳곳의 나무가 들고 일어난 걸 보니 안타까웠다. 한옥은 목조주택이라 특히나 사람의 온기가 미치고 자꾸 밟아주어야 들뜨지 않는다는데, 일년에 두어번 행사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더욱이 농산정처럼 외진 전각은 행사기간에도 거의 외면당하는듯. 책꽂이 위에 방명록이 있던데 적힌 이름이 몇 되지 않았다. 나 또한 10분도 못 넘기고 쫓겨나야 했으니...

우리가 와글거리는 일행과 떨어져 전각에 들어앉으며, 이젠 더 볼 것도 설명 들을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자 밖에서 관리인인 듯한 아저씨가 말을 거들었다. 나가는 길에 700년된 향나무 설명 듣는 게 마지막인데, 작년 곤파스 때 부러져버렸다고. 그러면서 5시반에는 이곳을 나가야 하니 5분만 더 있다가 자기랑 같이 나가면 되겠다고 했다. 궁궐은 6시까지지만 옥류천 일대는 5시반에 관람시간이 끝난다는 것. 게다가 6시 되기 전이라도 좀 더 있으면 완전 깜깜해져 나가기 불편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우린 순순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 26분. 슬슬 일어서 나가려는데 아저씨가 너구리 좀 보라고 했다. 엥? 놀라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정자 옆 오솔길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너구리 두 마리! 나는 얼른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 아저씨는 무전기로  동료에게도 너구리 구경하라고 알렸다. "민OO씨! 그쪽으로 너구리 두 마리 올라갑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야생너구리가 살고 있다니! 신기해서 물어보니 꽤나 자주 나타나는 녀석들이란다. 대체 무얼 먹고 살까 염려되었으나 워낙 잡식성인데다 주변에 상수리나무가 많아 먹거리는 풍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뒤에서 보는 궁둥이가 아주 토실토실.

전각 문을 닫고 뒷정리를 하는 아저씨를 뒤에 남겨두고 우린 얼른 너구리를 따라 언덕길을 올랐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숲으로 피신하는 너구리를 멀리서나마 포착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데도 이 너구리란 놈 도망도 안가고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테면 찍어보라는 듯이... 아무리 서툰 목수가 연장 탓 한다해도 이미 해는 기울어 어둑한데 아이폰으로 당겨 찍어봤자 한계가 있었지만, 창덕궁 후원에서 만난 너구리 두 마리는 모녀의 가을 나들이에서 아주 유쾌한 마무리였다. 곧이어 열뻗치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주 금상첨화였을 텐데.... 흠...

아무튼 단풍구경이라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어도 도심에서 원없이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를 흡입하며 장단지 허벅지가 팍팍해질때까지 산책한번 거하게 잘한 셈이었다. 막판에 헐떡거리며 올랐던 가파른 언덕 대신 더욱 호젓하고 완만한 오솔길로 퇴청한 것도 좋았고.



이날의 산책이 어찌나 고되었던지 집에 돌아온 나는 10시를 넘기자마자 뻗어버렸다. 그러고는 새벽 4시에 잠이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보통 왕들이 원래 새벽 3, 4시에 일어나 아침부터 공부를 하고 온종일 업무를 본 뒤 밤 늦게 또 상소나 경전을 읽다가 자정에나 겨우 잠드는 삶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전날 들었는데, 그래서 4시에 잠이 깼나 킬킬 대며 생각했다. 틀림없는 왕족설의 증거? ㅋㅋㅋ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