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전부터 덕수궁에서 열린 이 전시를 나는 볼까말까 망설이고만 있었다. 아시아 미술에 대한 무지가 가장 두드러진 이유였지만, 또 그래서 더 보러가야하는 게 아닌가 했었다. 유명 서양 미술가 작품에만 환장하며 좋아하는 내 태도가 걱정스러워 반성하는 의미에서라도 봐야하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10월 10일이 전시 마지막이라(역시 10월 10일까지였던 이응노 전시회도 결국 못갔다 ㅠ.ㅠ 그나마 대전 이응노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위로하기로 했음) 시기적으로 못보기 쉽겠다 여겼는데, 확실히 공짜는 게으름뱅이도 움직이게 한다는 게 맞다. ^^; 입장료가 비싸진 않았지만(덕수궁 입장료 포함 5천원) 그래도 초대권이 있으니 저녁 모임 이전에 구경하고 오라는 착한 지인의 권고에 지난 수요일 좋아라 달려나갔다. 잠이야 두 시간을 잤든 말았든...

염려했던 대로 '보기 불편한' 식민시대의 아픔과 전쟁의 참상이 주제인 그림들도 전시실 한두 개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난생 처음 보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일본, 필리핀, 인도 등의 근대 화가들 작품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어디 있겠나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우리나라 화가들의 작품도 있기야 하겠지 생각했지만, 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횡재한 기분으로 만난 그림은 바로 이것.

이인성의 1944년 작품인 <해당화>다. 정물 해당화 그림도 아니고(과천 현대미술관에 있다는데 만날 교체전시중이라 난 구경도 못했다), 한용운의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며 해방에 대한 염원까지 담아냈다는 이 거대한 작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삼성 리움 미술관에 있단다. 돈이 많으니 리움에서 대작은 참 많이도 갖고 있다. -_-;

요번엔 설렁설렁 맘에 드는 그림만 감상하리라 마음 먹었던 터라 도슨트를 따라다니지도 않았었는데, 바글바글 사람들에 둘러싸여 오래 설명하는 그림이 바로 이 작품이란 걸 깨닫고는 우리도 얼른 귀동냥을 했다.

먹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머지 않은 광복의 희망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림 오른쪽 아래 놓인 우산이 접혀 힘겨운 시기는 이제 다 지나갔음을 뜻한다는 등이 조목조목 그림 설명은 관두고라도, 나는 이인성의 그림이 '예뻐서' 좋다. (이런 무지한 감상 태도를 버려야한다는데 그게 안된다;;) 그냥 척 보면 정감 가는 작품이랄까. 하얀 수건을 쓰고 앉아 있는 누이의 얼굴은 옛날 우리 할머니의 젊은 시절과도 닮은 듯하고 정말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더라도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기꺼이 뿌듯했을 심정이라 유난히 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전시실을 돌고 나서 아픈 다리를 오래 쉬어야 했음에도 그저 좋았다.


이 그림 말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포스터에도 실렸던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였다. 인도네시아 화가의 그림이라는데 이유는 몰라도 소장은 싱가포르 국가위원회더라. 중앙에 있는 인물이 워낙 인상적이라 작품을 구석구석 자세히 보지 않다가 그림 제목을 보고 잠시 움찔했기 때문에 (나는 병아리가 무섭다 +_+) 그림을 검색해 찾아오지 않고 미술관 앞에 있던 걸개그림 찍은 걸 대신 자랑하련다. (기다란 그림 아래쪽에 병아리 둥지가 놓여있고 병아리들이 껍질을 막 깨고 나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결혼식을 앞두고 머리 손질을 받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란다. 엄청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을 것으로 짐작됐다.

인물화가 많았지만, 같은 여자가 봐도 아름다운 여인을 그린 그림들이 확실히 사랑스럽고 시선을 오래 끄는 이유는 뭘까 매번 궁금한데, 결론은 늘 하나다. 모든 동물의 수컷이 더 아름답다지만 인간은 예외라고. ^^; 이 그림이 포스터와 티켓에 실린 이유 역시, 전시 기획자가 나처럼 이 모델을 가장 어여삐 여긴 게 아닌가 의심했었는데, 그건 아니고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걸친 이번 작품들 가운데 시기작으로 딱 중간이라 선정됐다는 설명을 지인이 도슨트한테 듣고 와 전달해주었다. ㅎ


어쨌든 덕수궁에서 하는 전시회는 궁궐에 대한 끝없는 나의 선망 때문에 언제나 입구부터 행복해진다. 습관처럼 현대미술관을 나오며 계단 꼭대기에서 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같은 구도의 같은 사진이라도 아이폰으론 처음 찍는 거잖아, 그러면서... 가을 단풍이 고울 무렵엔 다른 궁궐에도 꼭 가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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