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해당되는 글 39건

  1. 2012.11.13 창덕궁 나들이 6
  2. 2012.10.28 노는 건 좋구나 14
  3. 2012.09.18 환절기 10
  4. 2011.10.31 창덕궁 한권의 책 13
  5. 2011.10.24 꽃파는 마트 12
  6. 2011.10.04 홍대 와우북 페스티벌 11
  7. 2011.09.14 변덕 20
  8. 2010.11.04 가을 나들이 4
  9. 2010.10.19 가을꽃 3
  10. 2010.08.19 매미 8

창덕궁 나들이

놀잇감 2012. 11. 13. 00:28

생각해보니 가열차게 놀러다닌 날들이 벌써 한달이 다 돼간다. 그때만 해도 단풍든 나무보다 새파란 나뭇잎이 더 많았는데 어느새  요 며칠 겨울 같은 날씨에 나무들은 헐벗었고 올해도 한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ㅠ.ㅠ 남은 기억 다 지워지기 전에 사진 쳐다보며 밀린 이야기를 다 풀어내야할 터인데. 이것 참.

 

일본에 다녀온 다음날부터 곧장 이틀에 걸쳐 서울 관광 스케줄을 쫀쫀하게 짜놓았으나, 그건 그저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태평양을 건너온 시차도 너끈히 견딘 친구와 달리 며칠 전까지 급마감에 힘쓰며 밤샘을 거듭했던 나는 혓바늘이 돋질 않나,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길 않나 저질체력임을 여실히 실감했고, 연일 강행군은 무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냥 하루는 장이나 봐다가 맛난 거나 해먹으며 쉬자고... 

 

LA선 절대 맛볼 수 없다는 납작말랑한 홍시와 홍옥사과, 막걸리와 해물부추전으로 비타민과 영양(?)을 보충한 다음날에야 비로소 나설 수 있었던 창덕궁. 그나마 원래는 창덕궁과 종묘를 한꺼번에 돌려던 계획이었으나 창덕궁 하나만 보기로...

 

친구가 이날 저녁부터 주말까지는 외가에 들러야 해서 짐을 싸가지고 나왔기에 마냥 돌아다니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창덕궁엔 입구에 무료 사물함이 있고, 나중에 이대앞에선 지하철역 사물함을 이용할 수 있었다. 지하철 사물함 나도 난생처음 이용해보는 것이었는데 열쇠 없이 디지털 화면으로 사물함이랑 비밀번호 지정하고, 심지어 거기서 택배도 보낼 수 있더군! +_+ 놀랍도록 편리한 나라임을 새삼 실감. ㅋㅋㅋ

 

암튼 창덕궁에 들어서자마자 다리 건너편 느티나무가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에 반해, 왼쪽에 사열하듯 서 있는 장엄한 회화나무 세 그루는 찍어오는 걸 까먹고 말았다. 걔네들은 아직 초록이 성성한 자태였는데...

 

 

 

대개는 인정전과 대조전 등지의 전각을 먼저 다 보고 후원 들어가기 전에 낙선재를 둘러보는데, 사진 순서를 보니 이날은 낙선재부터 들렀던 모양이다. 한달도 안 돼 벌써 이렇게 기억이 흐려지다니 뜨끔;; 아무튼 까마득한 오래 전 지금처럼 복원이 끝나기 전에 이방자 여사가 개조해 놓고 썼던 양실 목욕탕도 구경할 수 있었던 때도 좋았고, 원래대로 바꿔놓은 지금도 좋은 낙선재. 궁궐에 있을 정도니 당연하겠지만 참 짱짱하고 단아하게도 지었다는 느낌이 든다. 

자세히 보면 난간에도 이렇게 정교하게 구름과 호리병 무늬를 조각했다.

 

낙선재 마당에 있던 감나무마다 또 감이 얼마나 튼실하게 매달려 있던지 원. 잘 생긴 한옥집에 살 일은 아마도 요원하겠지만 혹시라도 다시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나도 감나무를 꼭 심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 사는 집앞에 있는 앵두나무도 시작은 버릴까말까 고민하던 작은 분재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인정전과 대조전 사진은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는데, 후원쪽으로 건너가면서 회랑 너머로 보이는 인정전 지붕이랑 원래 궁궐을 모두 감싸고 있었을 소나무가 나온 이 사진은 좀 괜찮은 것 같다. 옛날엔 내가 사진 찍은 자리도 그냥 마당이 아니라 빼곡하게 전각이 서 있었겠지... 

 

 

 

 

아래는 아마도 내의원이 있었다는 전각인 것 같다.  이날은 해설사 설명도 안 듣고 브로셔도 안들고 그냥 설렁설렁 돌아다녔는데, 떼를 지어 수첩과 볼펜 들고다니며 역사공부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어찌나 많은지 귓등으로 많은 정보를 얻기는 했으나 이미 다 까먹었다. ㅋ 암튼 누각과 단층 전각을 이어서 지은 이 건물 마음에 든다. 안에선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려나 심히 궁금.  

 

 

 

 

 

10월 중순이라 새파란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더 많긴 했지만 창덕궁 후원으로 넘어가니 조금씩 깊어가는 가을이 느껴졌다.  

 

역시나 가을의 손길이 제일 먼저 찾아온 곳은 애련지와 애련정 주변.

 

 

 

궁궐 전각들이 다 화려하고 근엄하긴 하지만 창덕궁에서 역시나 제일 마음에 드는 한옥을 꼽으라면 양반 사가를 그대로 궁에 옮겨놓았다는 연경당이 최고. 낙선재도 아담하고 예쁜데 한 군데 콕 집어서 살라고 하면 난 역시 사랑채 안채 별채 서재까지 다 갖춘 연경당을 택하겠다. ㅠ.ㅠ

 

 

특히나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난 작은 저 문.

옛날에 해설사한테 주워들은 가락을 옮겨보자면, 사랑채에 손님이 오면 안방마님이 하인들한테 굳이 묻지 않고 저 문으로 살짝 내다보아 사랑채 섬돌에 놓인 신발 켤레 수로 주안상을 준비한다나 뭐라나...

요새도 해설사가 연경당 안내할 때 그런 설명을 하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ㅎㅎ

 

암튼 단청 안 칠하고 적당히 낡고 바란 아담한 나무문과 문살이 참 예쁘지 아니한가. 

 

 

 

 

 

 

창덕궁의 가을은 작년에도 포스팅한 적이 있으니 이쯤해두련다.  (2012.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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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건 좋구나

투덜일기 2012. 10. 28. 15:33

 

 

7년만에 한국에 다니러 온 친구 덕분에 나도 2주간 꼬박 관광객 모드로 마냥 먹고 놀러다녔다. 몇달 전부터 꼼꼼하게 다닐 곳과 먹을 것과 볼 것을 주르륵 뽑아놓고 하나하나 지워나갈 계획이었으나 돌이켜보니 큰 얼개만 맞아떨어졌을 뿐 소소한 곁가지는 도통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여행지에선 어쩜 그렇게도 시간이 잘 부서져나가는지 원.

 

친구는 다시 열세시간을 날아 왔던 곳으로 돌아갔고 남은 것은 몇장의 사진과 내몸에 붙은 살... 살...

매일같이 얼마나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고 잘 쉬었는지, 빵빵해진 얼굴에 주름살이 다 펴졌음은 물론이려니와 숱 적은 머리칼에 자르르 윤기마저 도는 걸 보며 노는 게 이리도 좋은 것임을 새삼 실감했다.

 

계속 이렇게 탱자탱자 여행다니며 놀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로또 1등 당첨 밖에 없다는 서글픈 현실을 인정하고 내년 휴가나 또 기약하자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 터키. 칠레. 쿠바. 파리. 아를. 더블린. 프라하. 빈. 바르셀로나. 가고픈 곳은 많은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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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투덜일기 2012. 9. 18. 18:09

무서운 고양이 사진이 너무 많기도 하고 가끔 고양이 물품과 관련하여 어쩐지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어서 즐겨찾기에서 지워버렸던 스노** 사이트. 지금도 즐겨찾기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이따금 궁금해져 찾아가본다. 어차피 주소도 어렵지 않고... 아마도 이유는 그곳 주인장이 스스로 우울증, 조울증 심증을 고백하며 블로그는 아예 닫아버렸기 때문인 듯하다. 그냥 남들이 지나가는 말로 증상이 그렇다고 하니까 겉으로만 인정하는 건지, 진짜로 상담이나 약물치료라도 받는 건지 염려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역시나 내가 환자의 가족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심리적,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은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남들보다 조금 민감하게 넘기는 편이라는 것이 나의 오랜 관찰 결과인데, 일년에 네번이나 되는 환절기가 다 문제는 아니고 가장 불안함이 두드러지는 시기는 역시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과 가을에서 다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아마도 줄어든 일조량과 호르몬의 관계라지. 사실 나도 이거 우울증 아닌가 싶게 가을은 좀 힘들다.

 

암튼 낮이 하염없이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저녁이 좀 일찍 찾아온다 싶은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불안이 감지되는데, 그 시작은 지나친 씩씩함과 활동성이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거기에 덧붙여 더 많은 '건수'를 만들어 온종일 돌아다니고 안하던 쇼핑도 막 하러 다니고, 양손 가득 무거운 찬거리를 들고 들어오기도 한다. 갑자기 집안일에 열의를 보이며 새벽부터 구석구석 먼지를 파내기도 하고 오래된 물건 정리도 하며, 그 어떤 잔소리를 해도 하하호호 기분이 좋다. 어떤 날은 집에 있으면서 종일 사방에 전화를 걸어 호호깔깔 목청 높여 대화를 한다. 잘 모르는 사람은 활기차고 건강해졌다며 반기는데, 절대 그게 아니다. 이른바 조증 상태이기 때문. 무기력한 울증 상태보다 더 나쁜 상황이고 곧이어 수렁같은 울증이 찾아올 것이라는 암울한 예고편이다.

 

오늘 문득 생각이 나 홈피에 가보았는데, 짧지만 비슷한 사연을 올려놓았다. 그래도 발전적이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여 다행이다 싶긴 하다. 하지만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을 인정하면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무기력하게 늘어져 쓸모없는 인간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계속 의욕을 보이는 것은 조증 상태의 전형적인 반응. 그런 상황이 되면 나는 붕붕 떠 있는 마음을 끌어잡아내리는데 안간힘을 쓰면서도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 늘 겪는 일인데 뭐, 좀 있으면 지나갈 거야, 걱정하지 마슈. 약 조절도 받았고, 일단 잠의 질만 더 나빠지지 않으면 최근 몇년 그래왔듯이 또 다시 수월하게 잘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여름 끝자락부터 내가 버럭버럭 성깔을 부리며 독 오른 짐승처럼 굴었던 건 어쩌면 환절기를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 지레 겁먹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계절은 바뀌었고 해는 확 짧아졌고 노친네는 부쩍 부지런해져 노상 바쁘다. 슬슬 체력 떨어질 때도 됐으니 고비도 머지 않았다. 약간 엄살을 부리는 것이면 좋겠으나 스노**도 노친네도 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다시 중간즈음의 평온을 되찾기를. 스산한 가을도 싫고 추운 겨울도 싫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은 역시나 환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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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한권의 책

놀잇감 2011. 10. 31. 08:33

언제부턴가 창덕궁에서는 봄과 가을에 후원 정자 몇개를 개방하고 책을 비치해 관람객을 유치(?)하는 연례행사를 벌인다. 이른바 한권의 책. 먼저 다녀온 이의 말에 따르면 비치된 책이라는 것이 몇권 되지도 않을 뿐더러 얄팍한 시와 에세이, 아동서 정도라 기대해선 안된다고 했다. 의미를 둔다면 평소 특별관람으로 후원엘 들어가도 해설사 안내에 따라서 한시간 반 이내에 쫓기듯 보고 나와야하는데 반해, 행사 기간에는 후원 정자 몇개에 들어가볼 수도 있고 후원 경내를 마음껏 돌아다녀도(물론 여전히 출입금지 구역은 있지만) 된다는 점이다. 봄과 가을에 딱 2주간씩 주어지는 혜택이라 요번엔(10월 30일까지였음) 날을 잡아 엄마랑 다녀왔다.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억새와 단풍 구경을 하고 싶다는 엄마의 눈치를 진작부터 받았으나, 나도 며칠 들먹 설레어 숙소와 항공편을 알아보다가는 제풀에 포기하고 만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니 작년에 일본 갔던 악몽이 다시 떠오르질 않겠나... (내 다시는 엄마랑 단둘이 여행 안가리라 다짐도 했었으니 -_-;) 해서 단풍구경은 서울에도 좋은 데가 있다는 걸 보여줄 작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풍구경은 절반의 실패였다. ㅠ.ㅠ 창덕궁에서 가을 책 행사 기간을 17-30일로 잡았길래 나는 지난번 반짝 추위로 단풍이 예년보다 일찍 들었나보다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켁, 나의 착각이었다. 10월말에 늘 한권의 책 행사를 기획하는 건 그때가 가을 행락철이라(말하자면 설악산, 내장산 같은데로 단풍구경 다니는!) 덩달아 그렇게 잡았다는 해설사의 설명. 단풍 예쁘게 든 후원구경을 할 요량이었다면 너무 일찍 왔다고 말했다. 쳇! 그렇지만 나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후원 정자와 전각에 들어가보는 것이었으니 얼른 마음을 달랬다. 드문드문 꽤 가을색으로 물든 나무들도 있어 다행이기도 했다.

지난번 창덕궁엘 갔을 때만 해도 입장료 5천원에 인정전 일대와 후원의 부용정, 연경당 부근까지 보여주더니만 그새 시스템이 바뀌었다. 일반관람료는 3천원(65세이상 무료)이고 이 표로는 오로지 전각들이 있는 구역만 볼 수 있었다. 후원을 보려면 안에 따로 함양문 앞에 있는 후원 매표소에서 5천원짜리 특별관람권을 끊어야했다(경로우대 없음). 특별관람은 1회 입장인원도 원래 10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행사기간이라 200명으로 인원을 늘여준 덕분에 우리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3시 좀 넘어 궁에 들어가 전각 구역을 설렁설렁 돌아본 뒤(친구들이랑 다닐 땐 몰랐는데 궁궐엔 계단이 왜 그리도 많은지! 오르기는 수월하나 계단 내려오기는 울 왕비마마의 취약점이거늘... ㅠ.ㅠ 붙잡고 다니느라 모녀 동반 땀깨나 뺐다), 4시에 후원 입장하는 표를 끊었는데 내가 표를 살 때 전광판에 적힌 4시 관람 인원이 179명인가 그랬다. 평일 오후에 별러서 궁궐 거닐러 온 사람이 참 많기도 하지!

일본인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까지 바글거려서 전각 구역은 어떻게 봤는지 기억도 별로 없고 사진 한 장 못찍었다. 주워들은 풍월로 설명을 해보았으나, 엄마는 정민이 어릴 때 같이 갔던 경복궁과 계속 헷갈려했다. 열심히 설명하고 나면 그러니까 이게 근정전이지?(근정전은 경복궁에 있고 이건 인정전이라니깐~!) 저 대들보 없는 건물 뒤로 가면 예쁜 꽃담이랑 그림 달린 굴뚝 있었지?(거기는 경복궁 교태전이거든요... -_-") 뭐 이런 식...  암튼 엄마의 결론은 '창덕궁엔 처음인 것 같다'였다. 근데 넌 언제 그렇게 여길 자주 구경온 거니? 누구랑? @.,@ 엄마가 섭섭한 듯 추궁할 기세를 보이길래 커피랑 물 사온다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ㅋ

제대로 단풍이 들었다면 빨갛게 터널을 이루었을 후원 입구는 아직 초록빛이 완연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단풍 요란하게 드는 활엽수들은 원래부터 창덕궁에 있던 나무가 아니고 후대 사람들이 하도 좋아하여 새로 심은 것이란다. 옛날 궁궐 후원엔 변함없이 푸르른 소나무가 대부분이었다는 해설사의 이야기가 어찌나 새삼스럽던지(과거에 듣고도 까먹은 것일까나, 해설사 설명을 귓등으로 들은 것일까나). 단풍구경은 가을 궁궐이 제일이라며 그간 구경다닌 나는 뭐람. ㅎㅎ

부용지에서 올려다본 주합루

애련지와 애련정


아무튼 후원에 들어가 제일 처음 만나는 부용지 주변을 므흣하게 바라보며 인증샷을 찍었다. 바글거리는 사람 안 넣으려니 어찌나 힘든지 원... 위 사진 둘 다 한 사람씩 잡혀 있다. 왼쪽 여자는 무려 출입금지 팻말을 세개나 거슬러 계단을 올라가 사진을 찍던 외국인. 방송으로 내려오라고 해도 못 알아듣더라. 오른쪽 사진의 빨간 잠바 아줌마도 참 사진마다 내 앞을 가리며 속을 썩이더니 어느새 찍혀 있다. ㅋ

부채꼴 모양의 관람정과 반도지

존덕정의 화려한 천장


원래는 궁궐이랑 엄마 사진을 제대로 찍어오려고 디지털 카메라도 가져갔었는데... 흑.. 두장 찍고 나니 배터리가 나가버렸다. 집에서 켜봤을 땐 배터리 다 차있길래 그냥 가져간 건데.. 쩝... 하여간 후원이 깊어 그런지 4시를 넘기고 나니 해도 안비쳐 아이폰으로 찍은 사진이 참 다들 알량하다. 얼마만에 보는 반도지와 관람정인데! 으휴... 천장의 팔각형 단청이 유난히 아름다운 존덕정엔 정조의 친필 현판과 주련이 걸려있어 더욱 유명하다. 사진 오른쪽에 밤색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정조의 친필. 마침 존덕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어 얼른 걸터앉아 쉬며 사진을 찍었다.

연경당 뒤쪽부터는 나도 그야말로 난생처음 가보는 옥류천 일대! 등산이나 다름없다고 겁을 잔뜩 주는 바람에 엄마도 나도 긴장했는데 조금 가파른 비탈길이 있어 숨이 잠시 가빠지긴 했으나(그래서 옛날 왕들도 행차하기 힘들어 후원으로 안 넘어오고 창경궁 쪽으로 돌아 다녔단다) 금세 취규정인가 뭔가 하는 정자가 나타났다. 그담부터는 다시 내리막길. 호젓한 오솔길을 내려가니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물이 흐른다는 옥류천이었다. 커다란 바위를 깎아 물길을 내고 폭포(!)를 만들었다는데, 책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옥류천은 실물로 보니 어찌나 규모가 아담하신지... ㅋㅋㅋ

옥류천 폭포(?)

청의정과 태극정


숙종이 지었다는 한시가 돌에 새겨져있는 옥류천 주변에는 정자 셋이 조르륵 둘러쳐 있다. 창덕궁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이 남아있는 청의정! 원래 궁궐도를 보면 청의정 주변이 연못이었다는데 대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게 주변이 논으로 변했단다. 가을이라 추수를 마친 논 한 가운데 서 있는 청의정 모습이 참 신기했음. 논에서 벤 볏짚으로 청의정 지붕을 단장한다고 하므로, 논을 다시 연못으로 바꿀 수도 없겠다. 옥류천 일대는 창덕궁의 가장 북쪽 끝이라 담장이 빤히 보이고, 그 담장 너머엔 옛날 성균관이 있었다고 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었나, 정조가 성균관으로 이어지는 궁궐 전각까지 몰래 대물 일행을 피신시키던 장면이 떠올라 얼핏 웃었다. 그들도 산넘고 물건너느라 고생깨나 했겠다 싶어서.
 
암튼 일단은 엄마를 위하여 해설사의 이야기를 따라 듣다가 나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전각에 들어가 쉬려고 마음 먹었던 우리는 옥류천에서 뒤처졌다. 원래도 정자보다는 전각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나가면서 부용지 옆에 있던  널찍한 영화당--옛날 과거시험 본부 건물이라고--에 올라가 쉬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 못했다 ㅠ.ㅠ) 옥류천 옆쪽에 농산정도 책 행사로 개방되어 있는데다가 외져서 그런지 사람이 한명도 없는게 아닌가! 나는 냉큼 신발벗고 들어가 아픈 허리와 다리를 쉬었으나, 엄마는 신발 벗기 귀찮다고 툇마루에만 앉아 쉬셨다.

읽고픈 책이 한권도 없었다 -_-;

그만 좀 찍어라..고 하심


전각에 비치된 책은 저 정도... 예전에 세자와 왕들이 묵으며 학문을 닦던 곳이라는데 죄다 마룻바닥이니 겨울엔 얼마나 추웠을까. 일부러 공부만 하려고 북향으로 지은 전각들도 꽤 되던데 참... 왕과 왕자도 못할 짓이었다 싶다.

두다리를 쭉 뻗고...

깔고 앉으라고 방석도 놓아두었던데, 아무리 관리를 하더라도 곳곳의 나무가 들고 일어난 걸 보니 안타까웠다. 한옥은 목조주택이라 특히나 사람의 온기가 미치고 자꾸 밟아주어야 들뜨지 않는다는데, 일년에 두어번 행사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더욱이 농산정처럼 외진 전각은 행사기간에도 거의 외면당하는듯. 책꽂이 위에 방명록이 있던데 적힌 이름이 몇 되지 않았다. 나 또한 10분도 못 넘기고 쫓겨나야 했으니...

우리가 와글거리는 일행과 떨어져 전각에 들어앉으며, 이젠 더 볼 것도 설명 들을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자 밖에서 관리인인 듯한 아저씨가 말을 거들었다. 나가는 길에 700년된 향나무 설명 듣는 게 마지막인데, 작년 곤파스 때 부러져버렸다고. 그러면서 5시반에는 이곳을 나가야 하니 5분만 더 있다가 자기랑 같이 나가면 되겠다고 했다. 궁궐은 6시까지지만 옥류천 일대는 5시반에 관람시간이 끝난다는 것. 게다가 6시 되기 전이라도 좀 더 있으면 완전 깜깜해져 나가기 불편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우린 순순히 그러마고 대답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 26분. 슬슬 일어서 나가려는데 아저씨가 너구리 좀 보라고 했다. 엥? 놀라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정자 옆 오솔길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너구리 두 마리! 나는 얼른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 아저씨는 무전기로  동료에게도 너구리 구경하라고 알렸다. "민OO씨! 그쪽으로 너구리 두 마리 올라갑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야생너구리가 살고 있다니! 신기해서 물어보니 꽤나 자주 나타나는 녀석들이란다. 대체 무얼 먹고 살까 염려되었으나 워낙 잡식성인데다 주변에 상수리나무가 많아 먹거리는 풍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뒤에서 보는 궁둥이가 아주 토실토실.

전각 문을 닫고 뒷정리를 하는 아저씨를 뒤에 남겨두고 우린 얼른 너구리를 따라 언덕길을 올랐고, 인기척을 느꼈는지 숲으로 피신하는 너구리를 멀리서나마 포착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내가 사진을 찍는데도 이 너구리란 놈 도망도 안가고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사진을 찍을 테면 찍어보라는 듯이... 아무리 서툰 목수가 연장 탓 한다해도 이미 해는 기울어 어둑한데 아이폰으로 당겨 찍어봤자 한계가 있었지만, 창덕궁 후원에서 만난 너구리 두 마리는 모녀의 가을 나들이에서 아주 유쾌한 마무리였다. 곧이어 열뻗치는 일만 없었더라면 아주 금상첨화였을 텐데.... 흠...

아무튼 단풍구경이라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어도 도심에서 원없이 맑은 공기와 피톤치드를 흡입하며 장단지 허벅지가 팍팍해질때까지 산책한번 거하게 잘한 셈이었다. 막판에 헐떡거리며 올랐던 가파른 언덕 대신 더욱 호젓하고 완만한 오솔길로 퇴청한 것도 좋았고.



이날의 산책이 어찌나 고되었던지 집에 돌아온 나는 10시를 넘기자마자 뻗어버렸다. 그러고는 새벽 4시에 잠이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보통 왕들이 원래 새벽 3, 4시에 일어나 아침부터 공부를 하고 온종일 업무를 본 뒤 밤 늦게 또 상소나 경전을 읽다가 자정에나 겨우 잠드는 삶을 계속했다는 이야기를 전날 들었는데, 그래서 4시에 잠이 깼나 킬킬 대며 생각했다. 틀림없는 왕족설의 증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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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파는 마트

투덜일기 2011. 10. 24. 05:08

찾아보니 벌써 7년전이다. 부산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KTX타고 셋이 내려가면 울산에 사는 한 사람이 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회사를 마친 직딩 둘을 서울역에서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부산으로 떠났고, 9시쯤 반가운 상봉 후 곧장 숙소를 잡아놓은 해운대로 향했다.

시간이 넉넉했던 울산 친구는 일찌감치 부산에 도착해 우리가 2박3일간 먹고 지낼 먹거리 장만까지 미리 다 해둔 터였다. 해운대 횟집에서 거나하게 배를 채우고 숙소엘 가보니, 화장실 세면대에 분홍색 장미 한 다발이 비스듬히 물에 잠겨 있었다. 광안대교가 바라다보이는 밤풍경에 이미 신이 나 있던 나는 너무 좋아서 꺅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울산 친구는 낑낑대고 혼자 미리 장을 보며 마트에서 파는 장미다발을 충동적으로 샀다고 했다. 마트에서 꽃을 판다고? 환영의 의미로 장미를 마련해둔 친구의 센스도 만점이었지만, 꽃파는 마트에 대해선 금시초문이었던 나는 부산 마트가 서울보다 좋다고 술김에 막 감탄했다. 그랬더니만 친구가 울산 마트에서도 꽃 판다고 했던 것도 같고...

암튼 그날 우리는 다시 본 술상 한 가운데 장미를 꽂아놓고 기분을 냈고, 다음날부턴 우리가 마신 빈 맥주병에 장미를 꽂아 창가에 놓아두었다. 이렇게...

떠나오는 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아깝지만 저렇게 꽂아두고 방을 나서며 빗방울 맺힌 유리창과 맥주병에 꽂힌 장미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트에서 장볼 때 기회 되면 꽃도 같이 사야지 마음 먹은 게 이때였을까나...

작업실 있던 시절엔 코앞에 이마트가 있어 자주 갔었지만 매장 규모가 서울에서 제일 크다는(확실한지 모르겠다) 그곳에서도 생화는 잘 팔지 않았다. 꽃이 핀 화분(주로 양란이나 포인세티아 정도)과 알록달록 조화 파는 건 많이 봤어도, 한다발씩 묶어놓은 꽃을 파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최근 이마트는 조카들 장난감과 레고를 사러 가는 일이 없으면 아예 가질 않는다. 대형마트는 너무 정신없고 피곤하고 무엇보다 이상하게 숨이 가쁘다. 특히 멀미나게 지하6, 7층까지 뺑글뺑글 내려가 주차를 시켜놓고 나면 벌써부터 호흡곤란을 느끼는 듯.

그래서 내가 주로 다니는 마트는 동네 근처에서 주차가 그나마 편한 곳이다. 대형 유통업체의 프랜차이즈기는 하지만 매장이 단층이고 멀미나게 넓지도 않아 빠르게는 30분, 길어야 1시간내에 후다닥 장을 보기에 딱이다. 그러니 당연히 생화까지 갖춰놓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재래시장 쪽으로 가보면 화원이 하나 있기는 해도 소박한 다발꽃을 파는 것 같지는 않다. 동네 꽃집도 다 문을 닫는 바람에, 내가 가끔 전철역 근처 좌판에서 꽃을 만나면 반색하고 사는 이유도 다 워낙 꽃보기가 드물기 때문이다.

헌데 요번에 노상 다니는 굿모닝마트(혹시나 담당자가 검색하고 들어와 보고 또 꽃화분 기획하길 바라는 흑심에 밝혔다;; ㅋㅋ)엘 갔더니 입구에 꼬맹이 소국 화분이 좌르륵 놓여 있었다. '국내산 1990원'이라고 찍힌 가격표까지 붙어있는 걸 보니 어찌나 기쁘던지 쇼핑카트에 제일 먼저 소국을 두 개 실었다. 나중에 안고가기 번거롭겠지만 어떠랴. 우리동네 마트에서도 꽃을 팔다니. 아니, 마트에서 가을을 파는 것도 같았다. 1990원짜리 가을. ^^

절화는 생명줄을 똑똑 끊어 파는 거라는 말을 들어놔서, 일주일이나 열흘 쯤 눈요기 삼자고 사긴 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찔린다. 뭐 그렇다고 살아 있는 꽃화분을 사서 결국 말리거나 썩혀 죽이는 것도 별로 나은 짓은 아니겠으나, 꽃화분을 사는 건 절화 다발을 사는 것보다는 좀 덜 찔리는 행동 같다. 분홍과 노랑, 두 종류를 품에 안고 돌아와 엄마한테 자랑하니, 엄마 역시 어느쪽을 고를까 잠시 고민하다 (처음엔 분홍을 선택하셨다) 꽃이 많은 노랑을 곁에 놓고 보겠다 하셨다.  


재주없이 따로 찍은 사진을 편집하렸더니 영 시원찮다.

꽃파는 마트로서의 위상을 계속 유지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동네 마트에서 꽃을 사왔더니 고릿적 여행추억까지 떠올라 두루두루 기뻤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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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두해 정도만 열심히 구경다녔지 몇년째 방구석에서 벼르기만 하다가 놓쳤으나, 이번엔 28일부터 거리 도서전을 하는 걸로 착각하고서 비오는 날씨를 미리 걱정하는 심리적 부지런을 좀 떨었더니 (원래는 1일부터 3일까지 사흘간;;) 둘쨋날에 성공적으로 다녀올 수 있었다. 사실 거리도서전 책구경도 구경이지만 제니스 브레드 샌드위치와 초콜릿 스콘이 근래 부쩍 간절히 땡겼기 때문이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

어쨌든 일요일 늦은 점심을 아주 뿌듯하게 먹어치우고 나서 거리 도서전을 하는 주차장길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조짐이 예사롭질 않았다. 죠스 떡볶이랑 무슨 핫도그집, 그 옆 분식집들 앞에 각기 줄이 10미터도 넘게 서 있고 그 인파의 대부분이 아이들을 동반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더니 드디어 전시부스의 하얀 뾰족천막이 눈에 들어왔는데... 헐... 양쪽 골목이 모두 빽빽한 인간의 물결이었다. 문학동네가 맨 처음 부스였던 것 같은데 사람의 장막에 둘러싸여 책 진열대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 +_+ 된장, 된장... 첫날인 토요일에 올 걸 그랬다고 속으로 자책했지만 이미 늦은 후회였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만날까 (특히 원고에 매진하지 않고 놀러나왔다고 타박할 수 있는 '갑' 입장의 거래처 담당자들 -_-;) 처음엔 슬쩍슬쩍 피해다녔는데 좀 지나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그 많은 인파 중에서 과연 누가 날 알아보겠어! 게다가 아동서를 함께 내는 대다수 출판부스엔 아예 진입이 불가능할 만큼 사람이 많았다. 책 좀 찾아보고 싶었는데 두어번 배회하고도 끝내 인파를 못 뚫고 들어간 부스가 몇개나 됐다. 현암사, 문학동네, 시공사... 또 어디더라.

원래 따끈따끈한 신간을 30% 할인받아야 뿌듯한 건데 하도 도떼기 시장이라 신구간을 따져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으면 훑어보는 거고 아님 그냥 기웃거리다 마는 거고... 따끈한 신간 코너엔 특히 사람이 많아! 루나파크의 런던 에세이도 책 있으면 일단 구경이나 해보려 했는데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 쳇

게다가 일요일이라 가족단위의 내방객이 많을 것을 예상했는지 부스마다 유독 아동서가 많아보였다. 어우... 정신없어. 아무리 일년에 한번이라지만 휴일에 불려나와 엄청난 인파에 시달리면서도 친절히 인사를 건네고 있는 출판사 직원들도 측은하고, 엄마 손에 이끌려나와 얼른 책을 고르라고 강요 당하고 있는 몇몇 아이들도 안쓰럽고, 꽤 오래도록 부스 안에 진입 못해서 빙글빙글 주변만 맴도는 나도 처량하게 느껴졌다. ㅋㅋ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순 없는 일! 그나마 사람들이 덜한 끄트머리 팝업북 코너에서 이책저책 열어보다가 (수입책이라 그런지 내가 온라인서점에서 사는 값이랑 할인가가 별 차이 없어 굳이 살 이유가 없었다) 점찍어둔 몇몇 출판사 부스에 재진입을 시도했다. 두세번 가보고도 인간의 벽을 뚫지 못한 데도 있으나, 결국엔 마음산책, 문학과지성사 구간 부스에서 책을 고를 수 있었다.

오래된 문지 시선은 단돈 2천원에, 소설은 3천원에 살 수 있는데 황순원의 저 <별>은 무려 '천원'이라고 했다. 집에 황순원 소설선이 있는 걸 알기에 같은 책 아닌가 하면서도 3천원인데 뭘, 이러면서 골랐더니만 '천원'이래고 집에 있는 책은 <카인의 후예>더라. 그야말로 오늘의 득템!

아쉬운 건 30% 할인중이던 기형도 전집도 살 생각이었는데 2천원짜리 구간시집 남은 게 얼마 없어서 고르다보니 그새 까먹는 바람에 빠뜨렸다는 것. ㅠ.ㅠ. 

표정훈과 페터 회는 오래 전부터 읽을까말까 하는 책이었기에, 그리고 문지 부스에서 이리저리 밀리며 시집을 고르느라 이미 지칠대로 지친 상태라 원래 목표인 5권을 채워야한다는 일념으로 대충 고흐 책까지 집어 계산해달라고 했다. 다섯권 목표였는데 일곱권을 샀으니 대단히 훌륭하게 지름신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마침 막내동생네가 놀러온다는 바람에 애들 책을 사느라 체력과 쇼핑욕이 급격히 떨어진 덕분이기도 하다. 어딘지 출판사 이름도 까먹었고 책도 벌써 조카들이 가져가버려서 여기 자랑할 수도 없는데, 애들 책 사니깐 예쁜 연필세트도 선물로 주더라! 다만... 자녀가 몇분이냐고 물어서 잠시 머쓱. 넷이라고 하려다가, 민망하여 둘이라고 대답했는데 연필 선물로 주려고 그러는 줄 알았으면 그냥 넷이라고 할 걸 그랬다. ㅋㅋ 조카들 책까지 치면 목표량의 두배인 셈이지만 할인받은 가격을 생각하면 입이 저절로 귀에...

똑같은 지름신을 영접하더라도 책을 사는 건 소비욕에 대한 자책감이 훨씬 덜하므로, 아마 동생네가 저녁먹으러 온다고 하지 않았다면 일단 커피숍으로 후퇴해서 카페인으로 심신을 가다듬은 다음 한번 더 공격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한편 아쉽다. 그러나 올해는 일단 방구들을 박차고 나갔다는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최승자 시집 말고는 그냥 순전히 제목으로 고른 시집이긴 해도, 가을에 시집을 사본지가 과연 얼마만인가 싶은 것이 아주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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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

투덜일기 2011. 9. 14. 16:11

지난주에 대학로에 갔다가 전철역 앞 꽃좌판에서 파는 소국을 보고 반색했다. 박스에서 찢어낸 누런 골판지에 적힌 '한다발에 2천원'이라는 글귀까지 여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밤기운도 서늘하고 가을은 가을이구나 싶어 가을맞이 소국 한다발 꽂아야지 마음을 먹었다. 집에 오는 길에 다시 들러 한다발 주세요 했더니 무작정 5천원에 세 다발 가져가라며 제일 볼품없는 꽃들로만 주섬주섬 챙기는 아줌마. -_-; 

5천원도 싸다 생각은 했지만, 내가 아무리 소심하다 해도 시든꽃 바가지를 쓸 수는 없었다. 겨우 한 다발은 싱싱해 보이는 걸로 바꿔달라는 데 성공을 거두고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화병에 꽃으려니... ㅎㅎㅎ 세 다발이라는 소국 5천원어치가 겨우 다섯줄기였다. 그럼 그렇지.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아직도 소국 한 다발에 2천원, 3천원이 옛날 그대로 있겠나 싶으면서도 씁쓸했다. 꽃 다섯 줄기를 이리저리 요령껏 잘라 최대한 풍성하게 꽂아놓고 이제 내 몸과 마음도 가을맞이 준비를 해야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서늘해졌던 날씨는 추석날부터 다시 더워져 어제 오늘 계속 30도래고, 원래 열흘은 끄덕없이 싱싱해야 정상(?)인 소국은 일주일만에 꽃잎이 꽤 작아진 느낌이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일까, 영 션찮은 소국을 챙겨준 꽃좌판 아줌마 때문일까, 요즘 웬만한 생화도 중국에서 들여온다던데 혹시 저 소국의 원산지 때문일까.

예쁜 꽃을 보며 자꾸 심술이 돋아나면 안되느니라, 변덕스러운 날씨 따라 꿀렁대는 마음을 다스리는 중. 덜컥 가을오면 겨울과 추위도 금세 쳐들어올 테니  여름이 안 가고 미적거리는 게 어쩜 더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신문지에 대충 둘둘 말아주세요'라고 특별히 주문해서 들고 오다 찍은 꽃사진.
 

일부러 둘로 나누어 꽂은 5천원의 행복. 사오자마자 찍은 이 싱싱한 모습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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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나들이

놀잇감 2010. 11. 4. 16:57
 
멀지 않은 곳에 신나게 낙엽 밟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충동질에 옳다구나 신이 나서 다녀왔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는 조선의 왕릉 가운데 화성에 있는 융릉과 건릉. 각각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부부 합장묘다. 사는 동네가 서울 북서쪽이다보니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능이라면 지겹게 여길 정도로 소풍 때마다 섭렵했다. 서오릉, 정릉, 태릉, 홍릉, 동구릉... 그땐 만날 똑같게만 보이는 '묘지'에 뭘 볼 게 있다고 만날 소풍을 가나 불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왕릉 주변의 아름다운 숲과 드넓은 잔디밭이야말로 소풍의 최적소였겠다 싶다.

특히 융건릉은 숲이 아름다워 원없이 종류별로 낙엽을 밟을 수 있다고 들었으나, 우리가 너무 일찍 움직인 탓인지 막상 가보니 단풍이 이제 막 들기 시작한 참이었다. 화성이 서울보다 아래쪽이란 걸 감안하지 않은 탓이다. 1, 2주일 늦게 갔더라면, 하고 아쉬웠지만, 그래도 피톤치드 풍성한 숲길을 한가롭게 거닐다 왕릉 앞 비탈 잔디에 벌러덩 드러누워 해바라기하면서 망중한이란 게 이런거지 싶으면서 행복했다. 낙엽밟기의 염원도 용주사에서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었고... 이렇게 가을이 간다.


사진은 위에서부터 융릉(사도세자 부부묘), 융릉에서 건릉으로 가는 소나무 숲의 오솔길, 참나무 숲길, 건릉(정조대왕 부부 묘) 앞 박석, 용주사 앞마당의 단풍나무와 느티나무, 낙엽 풍성한 용주사 입구의 순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쾌청한 날씨가 딱이었는데 아쉬웠던 점은 지난 태풍에 피해를 입은 나무들이 엄청 많아 계속 전기톱으로 가지를 자르는 작업을 하고 있어 그 소음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망쳤고, 설상가상 근처 공군비행장에서 전투기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다녔다. -_-; 하필 우리가 왕림한 날 비행훈련을 할 게 뭐람;; 잘은 모르지만 담에 갈 땐 수요일을 피해야겠다. ㅋ
 

참나무에 높이 매달린 담쟁이 단풍이 예뻐서 애써 줌으로 당겨찍어온 소중한 사진. ^^;
좀 더 당겨 찍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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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놀잇감 2010. 10. 19. 21:03
가을맞이 꽃을사다 꽂았다. 물가가 오르긴 올랐다. 작년까지 소국은 한다발에 3천원이었는데 올핸 5천원.. 그래도 가격대비 만족도는 여전히 높으니 고마울 뿐.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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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투덜일기 2010. 8. 19. 16:01

오늘도 아침 내내 집앞 나무에서 시끄럽게 울어대 올빼미족의 단잠을 방해하던 매미들이 오후들어 쥐죽은 듯 조용하다. 돌연 마음 한 구석이 싸해진다. 장마 때는 별로 큰 비를 안 내리다가 오히려 그 이후에 간간이 밤새 한번씩, 때로는 새벽이나 아침나절에, 또는 오후에 무섭게 쏟아지던 소나기와 폭우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울어대던 매미들이 아닌가. 밤인 줄도 모르고 울어대는 도시의 매미는 낮밤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을 밝힌 보안등과 가로등 때문에 감각이 마비된 탓이니 녀석들을 미워해선 안된다는 얘기를 들으며 이미 또 마음이 한번 짠했었다.

어제부터 다시 날씨가 더워지긴 했지만, 낮에도 선풍기가 필요없을 정도로 선선해졌던 요 며칠간 드디어 한여름 무더위도 힘을 잃었구나 생각하니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스산한 가을이 기어이 오는 것인가 싶어 잠시 망연했다. 어제 얘기를 들으니 일산 사는 동생네는 선선했던 그 며칠 사이 매미들이 벌써 생을 마감해 바닥에 떨어져 있더란다. 선선한 날씨에 여름이 다 간줄 알고 성질 급한 녀석들이 살 힘을 놓아버렸던 모양이다.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야 하는 세월이 몇년이라는데 그렇게 오래오래 뜸들이며 참다가 겨우 한 철 매미로 사는 주제(?)에 어딜 가나 성질 급한 놈들은 있기 마련이구나 생각했다가, 오히려 그렇게 어렵사리 기다림 끝에 얻은 세상이라 끝에 대한 절망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들었다.

매미 우는 소리도 시끄럽고 더위는 좀 물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을이 오는 건 또 아직 두렵기만 하니 뭘 어쩌자는 건가. 입추, 말복 다 지난 건 알았어도, 새삼 달력을 보니 다음주 월요일이 처서다. 어려서부터 익히 들어온, 처서엔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은 이제 사장된 표현이지만 그래도 이름마저 '처량맞게' 들리는 처서를 지나고 나면 제 아무리 아열대 기후권에 돌입했다는 한반도에도 스산한 계절이 올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가을 지나면 또 무서운 겨울이잖아! 새삼 여름을 붙잡으려면 매미채 들고 나가 옆 동네로 날아가버린 매미들이라도 다시 몰고 와야할 것만 같다. 매미들아, 변덕 부려서 미안한데, 한동안은 좀 더 울어다오. 응?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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