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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19 순천만, 조계산 선암사 송광사 6
  2. 2019.11.12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19 3
  3. 2019.10.08 우리 강산을 그리다 5
  4. 2019.07.24 남산에서 엠티 2
  5. 2019.07.24 간만에 연극 그 남자 그 여자
  6. 2019.06.13 영월 창령사 터 오백나한 전 6
  7. 2019.06.09 한국가구박물관 4
  8. 2019.06.04 예쁘면 뭐든 좋댄다
  9. 2019.05.29 봄소풍 5
  10. 2019.05.24 산후 우울증 4


11월 8일 저녁에 떠나서 순천에서 1박하고 9일 새벽에 순천만을 돌아본 뒤, 곧장 조계산을 오르는 빡빡한 일정에 따라 나섰다. 경기 강원 근교 산이야 뭐 마음 먹고 친구들과 스케줄 짜면 갈 수는 있겠지만, 남도 쪽에 있는 산들은 이렇게 단체로 버스 타고 가는 기회가 아니면 가보기가 쉽지 않다. 

서울 모처에서 7시30분에 출발. 밤길이고 거의 다 가서도 길이 꽤 막혀서 밤 12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버스에서 나눠준 김밥을 헐레벌떡 먹었지만 그래도 출출한 건 사실이고 결국 새벽 1시반에 라면에 계란 넣어 끓여먹고서야 뿌듯한 배로 몸을 뉘였다.

당연히 잠은 설쳤고, 계획대로 6시에 펜션을 출발해 순천만 돌아보기 시작. 으아.. 이 얼마만에 보는 여명과 일출인가.​

벌써부터 오리들이 꾸륵꾸륵 울어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높고 멀어서 사진엔 잘 안보이지만 맨 오른쪽 사진엔 활강하는 새 한마리가 찍혔다! 

7시 5분이 일출시간이라며 다들 헐레벌떡 용산전망대라는 곳을 오르는데... 에고에고... 날도 추웠고 길은 멀고.. 결국 맨앞 일행은 몰라도 다들 일출을 보는 건 실패했다. 그래도 올라간 보람이 있을 만큼 숲길도 풍광도 아름다웠음.

순천만 갯벌에서 자라는 갈대도 멋졌지만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동글동글한 섬과 구불구불한 물길, 멀리 보이는 섬들이 어쩜 그렇게 정겹고 에쁜지! 오른쪽 사진에서 붉게 보이는 건 '함초'라고 한다. 함초소금이 분홍색인 이유가 있었어!

전날 밤에 미리 라면을 안 먹었으면 어쩔뻔했냐고 계속 투덜댈 정도로 이미 뱃속은 허기져서 꼬르륵꼬르륵 울어대고, 방한에 신경을 덜 쓴 관계로 내려올 땐 손시리고 춥고... 아침 식당에 가자마자 꾸역꾸역 밥으로 속을 채웠다.

​다행히 조계산 정상 장군봉을 향해 가는 대신 이왕이면 여유롭게 가을산을 만끽하는 쪽으로 방향이 수정되어 선암사에서 송광사 넘어가는 길로 모두 향했다. 얼마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대 사찰 중 하나인 선암사엘 드디어 가보는군 싶어 신이 났다. 까마득한 옛날 고딩 시절에 '여름수련회'로 갔던 통도사와 대흥사, 마곡사를 가본 걸로 친다면, 비교적 최근 답사로 다녀온 법주사, 부석사를 포함하고 이번 등산을 계기로 6개 클리어. 안동 봉정사만 가보면 되겠다. (그러나 통도사, 대흥사, 마곡사도 30여년전이 아닌 요즘 모습을 좀 보고싶다. ㅠ.ㅠ)


선암사에서 꼭 눈여겨보아야할 것들이 여럿이라고 현직 역사선생님이신 선배가 미리 준비한 동영상도 보여주고 설명도 해주는 걸 비몽사몽 대충 넘겼으나 그럼에도 선암사의 백미라는 승선교는 그 이유를 알겠더라.

승선교의 무지개 아치 안으로 쏙 들어오는 저 전각을 보려면 개울 아래로 내려가야하는데 ^^; 귀찮아서 난 내려가지 않았고 선배님들이 찍은 사진을 이렇게 퍼왔다. ㅎㅎ 내가 찍는다고 더 잘 찍을 것도 아니고!​


​그래도 이 사진은 내가 직접 찍었음. 파란 하늘과 앞서 걸어가는 일행들의 뒷모습과 노란 단풍이 정말 예뻤다.

올 가을은 날씨가 오락가락해서 잎들이 물들기 전에 말라버리거나 타버리거나 오그라들어서 단풍이 별로 안 예쁘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아직 단풍이 절정이 아닌 순천엔 예쁜 나무색이 정말 많았다. 

빨갛고 노란색, 그 중간색들이 어우러진 모습이 여기저기서 탄성을 자아냄. 그러나 역시 휴대폰으로 담아온 사진들은 그 느낌을 제대로 살려내주지 못하고... 에효. 

이번에 처음 안 건 선암사가 조계종 사찰이 아니고 태고종 사찰이라는 것. 그래서 스님들이 입은 가사 색깔이 갈색이 아니고 새빨간 색이다. 태고종은 승려도 결혼을 할 수 있으니 각자 스님들별로 살림집이라고 할 수 있는 요사채가 곳곳에 나뉘어 있고 크고 작은 암자도 자잘하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런 구조의 절집은 정말 처음 보는 느낌.

 


어딜 찍어도 옆 건물 기와가 서로 겹쳐져 걸리는데 그게 또 매력이다. 한옥집 짓고 살며 처마에 나도 풍경 매달고 싶으다.. ㅠ.ㅠ 


어딜 봐도 고풍스러운 사찰의 매력이 느껴졌는데... 꼭 보아야할 것 중 하나가 원통전 모란무늬 문살이라고 해서 홀로 앞장서 다니며 마구 찾아다녔으나 실패. ㅋㅋ 결국 선배님이 가르쳐주셨다. 내가 보러 다녔을 땐 문을 열어 젖혀놓고 예불 중이어서 보였을 리가 없다. 아래 맨 오른쪽 사진이 바로 그 선암사 원통전의 모란문살이다. 진짜 정교하고 아름답고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고색창연하고... 

선암사의 '뒷깐'까지 서둘러 구경을 마친뒤 송광사로 출발했다. 스님들이 노상 다니는 길이라 수월하다매! 기막혀서... 돌계단이 끝이 없고 구간구간 경사는 또 왜 그리 가파른지. 잘난 척 스틱 없이 오르다가 결국엔 헉헉대며 스틱을 펼쳐들고 몸을 실었다. 다행인 것은 조계산엔 중턱에 보리밥집이 있어서 굳이 도시락을 싸들고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바라보이는 산자락에도 동글동글 단풍색이 예뻤는데...


부침개와 도토리묵을 추가한 4인 상의 위용.





몇번의 헉헉대는 고비를 넘긴 끝에 깔딱고개를 넘고 넘어 '원조 보리밥집'에 도착했다. 산속에 보리밥집도 심지어 여러개! ㅋㅋ 비닐하우스를 곳곳에 짓고 그 안에 평상을 깔아놓은 식이었는데, 배도 고팠지만 우와 쌈채소도 싱싱하고 반찬이 다 맛있었다. 한잔 곁들인 동동주인지 막걸리도 환상의 맛!

아침을 배불리 먹은 뒤 1시도 안 되어 맞은 점심시간인데도 밥한 공기 다 비벼서 이 한 그릇을 싹싹 다 먹어치웠었더니만 진짜 잘먹는다고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아 예, 제가 간식은 안먹어도 밥은 엄청 잘 먹습니다요. 밥심으로 살지요.. 

이 원조집은 무려 1980년(!)부터 영업을 했대고 월요일엔 휴무란다. 도시락 없이 월요일에 조계산 등산하다 찾아가면 큰 낭패일듯. 혹시 모를 훗날을 위해 나도 기록해놓는다. (근데 과연 또 가게 될까? ㅠ.ㅠ) 



흡족하게 부른 두들기며 출발해보니 송광사까지 아직도 남은 거리가 3.5km쯤. 다시 수많은 돌계단과 비탈을 오르고 내려 드디어 송광사를 만났다. 정상만 안 갔지 거리로나 경사로 보나 힘든 등산은 똑같이 다 한 셈이었다. 다들 지치고 시간도 많이 지체되어 송광사 경내는 최대한 후다닥 돌아보기로. 

초록색부터 연두색, 노란색, 선홍색까지 모두 매달고 있는 환상적인 단풍나무들이 곳곳에 있었으나... 사진으로 찍으면 이 정도가 최선이다. ㅠ.ㅠ

​​선암사의 고색창연함에 너무 감탄했던 모양인지, 다분히 새것으로 갈아엎어 현대식 느낌이 풀풀나는 송광사는 상대적으로 별로 감흥이 없었다. 나름 멋진 건축이다 싶었던 회랑과 누각의 위용은 이 정도... ​

내가 귀찮아서 휙휙 찍은 사진들이 위와 같다면 다른 분들이 심혈을 기울여 찍은 모습은 또 좀 다르다. ^^; 

왼쪽은 내가 찍은 선암사의 해우소. 신발 벗고 들어가야 함! 그래서 난 안들어갔고.. 가보면 엄청 높아서 고소공포증이 느껴진다고 한다. 안 들어가길 잘했지. ㅋ

아이폰으로 대충 난사누군가 신형폰으로 찍어 공유해준 사진

이날은 아침 6시부터 펜션을 뛰쳐나가 집에 11시반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3만7천여보를 걸었더라. 하산 길에 무릎보호대를 했음에도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른쪽 무릎이 아파 낑낑거렸고, 다음날 당연히 근육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1박 2일간 이렇게 알차게 돌아보는 일정이 또 어딨겠나 싶어서 뿌듯했던 가을나들이. 단풍든 나무는 정말 실컷 다 보아서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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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도 2장밖에 안 남았고, 날씨가 하루하루 추워지는 걸 보니... 올해도 후딱 흘러갈 것 같다. 연말이 되면 괜한 조바심에 뭔가 기록을 남겨야할 것 같지만 또 워낙 게을러서 올해는 뭘 하고 뭘 보고 어딜 다녔는지 죄다 아득하다. 

그래도 기억에 또렷이 남은 공연이 있으니, 적어두자.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19. 7월이었던가 8월이었던가 아무 정보도 모르고 있다가 벨로가 스팅 내한 예정되었다고 해서 후다닥 예매 오픈일에 무작정 당일권 예매를 했다. 과거 스팅공연을 함께 다녔던 일행을 떠올리면 석장을 사야겠으나, 요샌 관계가 좀 서먹해진 고로 2장만.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흘러 드디어 10월 5일. 하필이면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정치적 세싸움을 벌이는 중이었고 설상가상 올림픽공원 주변 여러 경기장에선 전국체전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려했으나 담요에다 돗자리에다 소소한 먹거리에다 따뜻한 차와 물이 든 보온병에다가 짐도 많았고, 공연 끝나고 난 시각에 일행이 파주까지 가는 일이 요원하여 차로 움직이기로 했다.

다행히 꽉찬 공원 주차장을 한바퀴 돌고 났을 무렵 한 대가 빠져나가는 바람에 신나게 주차완료. 오후 4시쯤 올림픽공원 잔디마당 도착했다. 둥두르둥둥 울리는 음악 소리에 벌써부터 심장이 벌렁벌렁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록페스티벌 분위기 이 얼마만이냐!

​잔디마당을 한바퀴 두른 담벼락에서 공연포스터 발견! ㅎㅎㅎㅎ 신난다.

입장권을 손목에 차는 팔찌와 바꾼 뒤 입장하니 루카스 그레이엄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한가롭게 공연보는 분위기... 좋다좋다. 신난다. 어깨춤이 괜히 들썩들썩 났다.

5일 출연진을 대충 살피고 유튜브에서 한두곡 골라듣기도 했지만 그저 심드렁했었는데 현장에서 들으니 역시 오.. 노래 좋다. 생김새도 귀엽잖아! 갑자기 확 옷을 벗어 드러낸 상반신은 귀욤귀욤 근육질. ^____^​

​체력딸려서 록페스티벌이든 스탠딩공연은 못다닌다고 선언했지만, 또 막상 이런 현장에 나가보면 없던 체력과 에너지가 막 샘솟는 것 같다. 우리 자리에서 대각선으로 한두 자리 건너편 깔개에선 반백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와인잔을 들고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중년남녀 관객들이 보였다. 뭔가 덩달아 안심되는 분위기? 젊음의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이놈의 연령주의에 함몰되어 괜히 위축되는 비굴한 태도 좀 버려야할 텐데, 그게 잘 안된다. 남들도 우리 보며 멋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쳇...

이런데 왔으면 치맥은 필수지... 손목에 찬 성인인증 팔찌와 출입증 인증샷도 찍어주고.. ㅋㅋ

루카스 그레이엄에 이어진 무대는 아일랜드 밴드 코다라인. 나로선 듣보잡이었지만 작년엔가 내한공연도 했대고, 드디어 돗자리를 벗어나 스탠딩 구역으로 들어가보니 사운드도 좋고 음성도 좋고 팬들도 어마어마했다. 다들 노래 따라부르는데 우린 다 처음 들어보는 곡이고. ㅠ.ㅠ 에고 미안해라. 째뜬 공연음향이 돗자리에서 듣는 거랑은 천지차이라서 이전 공연도 들어와서 들어볼 걸 후회가 됐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스팅...

스팅 내한공연을 간다고 하면 비아냥거리는 누군가는 맨날 옛날 노래만 재탕할 뿐 최근 노래는 넘 후져서 들어줄 수가 없다는 말도 하지만 흥! My Songs로 세계 투어중인 연주는 아는 노래라도 느낌이 또 달랐다. 나 역시 또 앨범을 살까말까 망설였었는데 공연 들어보고 CD 사기로! 밴드 공연에 어울리게 편곡한 노래들이 새삼 정겹고 좋더라는.​

2년만인가 3년만인가... 다시 본 스팅은 여전히 변함없이 날렵하고 우아하고 멋졌다. 이 아저씨는 대체 목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걸까. 함께 공연온 기타리스트 도미닉 밀러는 확 늙어버린 느낌이던데.. 그래서 요번 공연에서도 도미닉 밀러의 아들이 더 멋진 활약을 보이는 것 같던데 참 나... 랩을 곁들인 편곡도 신나는 코러스도 다 좋았다. 에효... 행복한 한숨. 또 언제 스팅을 보게 될까? 야멸차게 앵콜 없이 90분 공연이 끝나고 쌩 돌아선 스팅을 아쉬워서 몇번 더 불러보다 우리도 공연장을 나왔다. 자정을 향해 달려가며 차에서도 계속 스팅 노래들을 들으며 행복한 마무리.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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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고 싶어 탐내던 전시였는데 9월을 허송세월한 관계로 놓치는 줄 알았다가, 중앙박물관에서 10월 20일까지 연장전시를 해준 덕분에 간신히 보고 왔다. 진경산수화도 좋고 실경산수화도 좋고... 색채 화려한 인상파 그림이나 샤갈, 마티스 등등도 다 좋지만 우리 옛그림도 진짜 볼수록 아름다워 빠져든다. 어떻게 화선지나 비단에 붓으로 그렇게 섬세한 묘사가 가능한지 원!

문제는 이 전시 보기로 하고 전날밤에 하필 무지막지한 과음을 새벽까지 했던 관계로... 술이 덜 깨고 속이 메슥거려서 ㅠ.ㅠ 속속들이 찬찬히 다 보지 못하고 중간중간 탈진해 의자에서 쉬어야 했다는 점. 

최악의 컨디션이었음에도 눈을 뗄 수 없는 그림들이 너무 많았다. 

금강산과 총석정을 그린 그림을 볼 때마다 에고 빨랑 금강산관광 재개되어서 나도 좀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옛날에 남북교류 한참 가능할 때는 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들었을까. 금강산관광은 그냥 울 아버지 같은 노친네들이나 안보관광으로 가는 건줄 알았다는;; 

암튼... 그 옛날에도 새하얀 도포자락 휘날리며 풍경 좋은 산에 꾸역꾸역 힘들게 올라가 경치 보고 좋아라하고 그림으로 남기고 그러던 풍습은 요즘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싶다.큼지막한 풍경화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사람들 찾기 놀이도 매번 즐겁다. 

양반네들의 평생 소원인 금강산 안내를 도맡느라 수시로 동원되었다는 주변 사찰 스님/중들은 뒷모습에서도 귀찮음과 피곤함이 느껴졌던 건 순전히 내 감정이입 때문이었겠지. 

하여간... 핸드폰을 꺼내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휘청휘청 보고 다녀서 그림 사진은 하나도 안찍고 돌아 나오다가 포스터만 달랑 찍어왔다. 순전히 기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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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서 엠티

놀잇감 2019. 7. 24. 16:22

​남들은 호캉스를 간다는데;; 어디 멀리는 못가도 하룻밤 외박하며 놀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누군가 남산유스호스텔이 꽤나 쓸만하다는 얘기를 했고, 검색과 결제의 달인인 내가 후다닥 찾아본 끝에 수다떨던 카페에서 바로 예약을 완료했다.

남산에 있는 서울유스호스텔은 콘도나 펜션이 아니어서 방에서 취사를 할 수는 없지만 패밀리룸을 예약하면 방 둘에 큰 거실, 침대와 침구가 무려 6인용 비치되어 있다. 소파까지 치면 여름엔 10명도 거뜬히 잘 수 있을 듯.

해서.. 체크인 시간에 맞춰 오후에 만나 짐을 방에 두고 남산둘레길을 한바퀴 산책했다.

​헥헥거리며 성곽길 계단을 오르다 돌아본 서울시내는 참 번잡하면서도 묘한 매력이 있다. 관광객의 눈으로 보면 어디든 다 낭만적으로 보이는 법. 

남산한옥마을을 꽤 여러번 갔었는데 타임캡슐 광장은 또 요번에 처음 구경했고 ^^; 예약해 놓은 중식당에 너무 일찍 도착한 바람에 그 옆 한국의집에서 남산타워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떼웠다.


다음날 아침 서울유스호스텔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풍경은 꽤나 그럴듯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출장온 사회인 기분도 좀 나고... 아니, 애들 데리고 서울로 수학여행 인솔 온 교사 느낌도 좀 나고.. ^^; 

(우리 방 주변 2, 3인실에 죄다 그런 선생님들이 묵고 있어서 더 그랬을듯;;)







옥상정원에서 전날 남겨둔 과일과 빵, 주스 따위로 아침을 먹으며 여기 넘 괜찮다고, 담에 암때나 또 날 잡아서 놀러오자고 다들 다짐을 했었다. 

좀 더 부지런을 떤다면 아침일찍 남산 새벽이슬 맞으며 산책을 해도 좋았을 듯.

남선 서울유스호스텔 자리가 아마도 옛날 안기부 건물자리라는 것 같은데 진짜로 후미진 곳에 있어서 도심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아늑하고 고요하다. 

워낙 교육적인 장소라 조심스러웠지만 우린 폭탄주를 말아먹는 대신에 흑맥 캔맥주를 공수해 시나몬 맥주를 만들어 먹었고 호호하하 즐거운 수다와 운동 정보 공유 등등을 이어갔다.  

여행을 함께 떠나보지 않은 지인들과의 동침은 속으로 은근히 두려운 게 사실이지만... ㅋ 그래서 뜻밖의 주제로 내심 좀 곤란함을 느낀 시간도 있었지만 집을 떠나 놀고 먹는 엠티란 건 결국 즐거운 행위였더라는 깨달음.

먼곳으로 떠나고 싶은데 여건이 되지 않을 때, 일단 집을 떠나 깨끗하고 편한 낯선 공간으로 잠자리를 옮긴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은 확실히 좀 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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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연극을 본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도 나질 않는데;; 지인이 공짜표가 있다고 해서 우르르 같이 보러 갔었다. 물론 제목도 내용도 하나도 모르면서 그냥 간만에 "대학로 가서 연극본다! 신난다!" 뭐 이런 기분이었다.

이 연극은 10대, 20대, 30대 연인들이 보러가면 딱인 알콩달콩 말랑말랑한 내용이라서 ㅋㅋ 종종 간질간질 민구쩍고 열렬하게 리액션하며 봐줄 수가 없어서 배우들에게 미안하고... 그랬었다. 노년에도 연애를 하는 사람들 많대고 연애 감정과 사랑이란 건 어쩌면 나이와 상관없이 설레고 두근거릴 수는 있겠으나, 그 감정을 소비하고 간직하고 휘두르는(?) 과정은 확실히 나이대별로 다른 것 같다. 중년의 연애가 얼마나 힘들고 에너지가 소진되는지 깨달은 바 있고 보니 더 그랬을까. 암튼... 나름 즐거운 나들이였다.


요즘 트렌드인지 연극 끝나고 SNS에 널리 홍보해달라며 특별히 사진 촬영시간을 오래오래 준다. 예나 지금이나 연극배우들 참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 연극 정도면 꽤 오래 롱런하고 관객수도 많은 편이라는데, 밥벌이는 될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찍어주고 박수 쳐주고 그랬다. 그러면 뭐하나, 해시태그 달아서 홍보해달라는 부탁은 못 들어주는 게으름.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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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까지 전시중이었던 근대서화전과 함께 오백나한전을 보러 중앙박물관에 가면 좋겠다고 5월 내내 별렀으나 결국 근대서화전은 놓쳤고, ㅠ.ㅠ 13일 끝으로 알고 있던 오백나한전이라도 꼭 봐야겠다 싶어 지난 월요일에 뛰쳐나갔다. 흐렸던 하늘이 점점 개면서 더욱 선명하고 초록초록하게 보이는 나무 색깔부터 감동.

매번 이촌 지하철역에서 나와 진입하거나 주차장에서 들어가 늘 건물을 보던 시선도 고정되어 있었는데 우연히 전시장에서 만난 지인들과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가는 바람에 지상 정문쪽에서 걸어들어가며 바라보이는 중앙박물관의 모습에 또 한번 반했다. 트인 공간으로 보이는 남산.. 좋다. ​

​배낭은 앞으로 매야하고, 먹물 조심해달라는 구구절절 주의사항을 듣고 전시장에 들어간 순간 흡! 전시 기획을 누가했는지 모르지만 박수쳐주고 싶더라. 대부분 유리상자 안에 가둬놓지 않아서 더욱 기뻤고.

​브로셔에 든 스타 나한상부터 하나하나 정성껏 카메라에 담으며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 같았다. 어휴... 어떻게 이렇게 하나하나 느낌이 다 다를까.

아래는 김승영 작가의 설치미술 주변 유리 안에 들어 있던 나한상들이다. 표정의 느낌 별로 모아놓은 듯.

전시 보러 가서 늘 하던 놀이대로 나한상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뭘 가질까 여러번 둘러보며 고민했는데 도무지 하나만으론 딱히 마음을 정할 수 없었던 반면, 지그시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을 흘릴 뻔한 나한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얼굴이었다.

절에서 여자 신도들에게 형식적으로 부르는 '보살님'이란 호칭에 정말로 어울리게 평생 사찰과 밀접하게 살아온 외할머니가 떠오르면서 쟁쟁한 할머니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덩달아 자비심 보살님인 울 엄마 영자씨도 생각나고. ㅠ.ㅠ

엄마는 젊었을 때 외할머니랑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는데 늙어가면서 점점 할머니랑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모나 외삼촌들이나 이웃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나도 엄마랑 나가면 하도 안 닮아서 며느리신가보다고 하는 소리를 종종 듣는데, 나이 더 들면 닮은꼴이 될까? 째뜬 우스운 건 외할머니 키가 170, 울 엄만 160... 그리고 난.. ㅠ.ㅠ

딸이 자기 엄마보다 키 작기가 드물다는데 울 엄마도 나도 자기 엄마보다 키 작은 딸이란 거 하나는 확실한 공통점이다.



전시장을 두바퀴쯤 돌고 나서 구석 의자에 한참 앉아 있다가 다시 인상적인 몇몇 나한상을 다시 눈과 마음에 새기고 돌아나서려니 이번엔 얼굴이 다 닳아 거의 없어진 나한상이 눈에 콕 들어왔다. 

파피가 먼저 전시보러 갔을 때 사진 작품의 질이 ㅎㄷㄷ하다며 엄청 탐났으나 품절이라 못구했다는 대도록은 아예 구경도 할 수가 없었고, 아쉬우나마 저렴한 엽서 크기의 소도록을 집어들고 돌아왔다. 


이번주 일요일 16일까지 연장전시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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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구박물관

놀잇감 2019. 6. 9. 16:48

그렇게 좋더란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 벼르고 별렀으나 이제야 드디어 가본 성북동 한국가구박물관. 4월초쯤에 예매 사이트엘 들어갔는데도 5월 말밖에 자리가 없었다.

개인박물관치고 가장 입장료가 비싸다는 해설사의 말마따나 무려 1人 2만원. 근데 둘러보고 나오며 아깝단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개인이 이 정도 한옥집과 고가구를 모으고 유지하기가 쉽진 않겠지. 오히려 꽤 규모가 크고 직원도 많던데 관람료와 대관료로 계속 박물관 유지가 가능할까 셈에 느린 나로선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예전엔 뜨르르하는 부자였을지 몰라도, 혹은 후대에 들어 재산관리를 잘못했는지 어쩐지 가구박물관과 부지가 경매에 나왔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으나 아직 완전 부도나서 넘어가진 않은 모양이다. 이러다 나 구경가기 전에 경매로 넘어가는 거 아닌가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는데, 관람객은 계속 꽤 많은 듯.  

비내린 뒤 개인 하늘이 정말 푸르렀던 날이었다. 대문이 열리고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감탄하며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는데 10초쯤 뒤 건물 외부 포함 모든 사진촬영은 지정된 곳 이외엔 절대 금지라고 하더군. 으으 뻘쭘하여라. 그래도 눈치 못했는지 사진 당장 지우란 말은 하지 않았다. ㅠ.ㅠ 이렇게 공개된 곳에 올렸으니 삭제하라고 연락오면 그때 삭제해야지. 

​박물관 관장이 거의 고등학생 때부터 고가구 보는 눈이 있어 버려진 고가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해설사가 하던데, 그런 안목을 갖춘 건 역시 집안에서 익히 골동품을 보고 자란 경험이 쌓여서 작용했을까? 우리 친가, 외가에도 옛날에 쓰고 있던 호족반, 개족반, 서안,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던 자개장... 이런 것들도 죄다 내버리지 않고 그냥 두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기야 쓰기 멀쩡한 상태였는데 불편해서 버렸을 리는 없고 깨지고 망가지고 그랬으니 버렸을 거다. 엄마의 혼수품이었던 자개장은 나도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엄청 무거워서 셋방살이 잦은 이사에 옮기기도 힘 들었지만 균형이 틀어져 이불장쪽 미닫이문이 잘 안닫히던 때가 있었다. 물론 전시품 자개장처럼 엄청나게 화려하게 전면에 꼼꼼히 자개를 입힌 골동품도 아니었고 듬성듬성 도안을 넣은 자개가 군데군데 떨어져나갔던 것 같다. ^^; 

전통 고가구야 다 아름답지만 누가 하나쯤 가지라고 한다면 앉은뱅이 책상인 서안을 가장 탐내는 편인데, 평평한 건 사대부들이 쓰던 거고, 끝이 위로 말려 올라간 건 사찰에서 쓰던 '경상'이란다. 두루마리 경전이 되말리지 않도록 펼처놓기 좋게 만든 거라고. 오호 그런 거였군.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에 쓰시던 저렴이 서안도 위로 말려 올라간 형태였던 것 같다. 나중엔 사대부들도 아름답고 좋아보여 널리 썼다니 한국전쟁 이후에 유통되던 가구들도 비슷하게 만들어진듯. 

암튼 근데 전시품 중 요번에 가장 탐났던 건 뭐니뭐니해도 책함! 사진찍고 싶은데 못찍어오니 인터넷 이미지를 뒤졌다. 역시... 중앙지 기자에겐 사진을 찍게 해주는군. 

책의 권수에 맞게 맞춤형으로 만들어 함째로 들고 이동해 읽었단다. 아.. 갖고 싶어라.. 사진 출처는 ㅈㅅ일보 +_+

1시간동안 다섯채 정도 되는 한옥과 그 안에 전시된 고가구를 둘러보고 나와서 드디어 사진 촬영이 가능한... 순정효왕후가 살았다는 한옥집 앞마당에 이르렀다. 사람들 없이 찍는데 성공. 

민망하지만 누마루쪽도 담긴 온전한 사진은 이것뿐이라 얼굴을 가렸다. ㅎㅎ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살게 되면 나도 저렇게 창호지 분합문과 여닫이 유리문으로 이중문을 해달아야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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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지상주의에 빠져 살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뭐든 예쁘면 혹하는 본능을 버릴 수가 없다. 자연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아름다운 대상에 더 끌리는 걸 어쩌란 말이냐. 암튼 예쁘면 다 용서되는 세상이 불만이면서도 나 역시 똑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ㅎㅎ

심지어는 병원과 약국도 예뻐서 다니는 사람이 나였어! ㅋ 

원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내과를 작년부터 한달에 한번씩 약 타러 다녔었다. 그런데 올초 와병으로 퇴원 후 약을 먹어도 계속 아픈 다리 통증 때문에 징징 울고 있을 때, 주말에 반찬 싸들고 왔던 막내올케가 그냥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냐고, 다른 병원에라도 다시 가보자고 나를 꾸짖으며;; 주말에도 늦게까지(무려 저녁6시까지)진료하는 옆 동네 병원을 찾아 나를 처음 그곳으로 데려갔었다. 

동네 병원이야 다 똑같지 뭐;; 그런 생각이었는데 첫눈에 인테리어가 맘에 들었다. 밤색 원목 바닥과 싱싱한 화분과 의자들이 언뜻 보면 카페 같은게 아닌가. 화려하게 꾸민 성형외과나 피부과 인테리어랑은 또 좀 다른 느낌. 의사 선생님도 조근조근 세심하고 친절했고, 간호사샘들도 꽤 여러명인데 시끄럽지 않고 다정했다. 내가 소리에 은근 민감해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 특유의 톤 높여 내지르는 목소리가 넘 싫다. 가뜩이나 통증 때문에 짜증 만빵인데 목청 높여서 이리 오시라 저리 오시라 5천원 되시겠다... 뭐 이런 말을 들으면 꽥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었다. 

작은 동네 의원엘 가보면 간호사를 많이 두지 않는데, 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함이란 걸 안다. 그러니 수납하랴 환자 안내하랴 바쁘고 어수선하고 간혹 불친절하거나 퉁명스러울 때가 있다. 근데 여긴 나이대가 골고루 분포한 간호사+직원들이 꽤 여럿이고, 환자마다 근처 약국을 안내하는 똑같은 멘트를 수십번 반복하면서도 다들 사근사근했다. 직원 복지가 괜찮은 모양이라고, 쓸데없는 생각까지 했다. 박봉에 시달리면 당연히 표정부터 찌들어 있을 수밖에 없지 않나? 작년부터 정형외과 외과 영상의학과 종류별로 동네 병원을 다니면서 나름 파악한 결론이다. 

하여간에 그 병원에서 다시 처방받은 진통소염제가 원인미상의 내 통증에 또 별 소용이 없었다면, 병원 인테리어와 친절함이 마음에 들었든 말았든 다시 갈 생각을 안했을 텐데, 우왕... 그날은 약을 먹고 그나마 몇 시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고 드디어 혜자로운 의사쌤과 약을 만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게다가 토요일 늦은 오후에 진료하는 병원과 세트로 늦게까지 여는 근처 약국은 주택가 2층집의 1층을 개조해 쓰고 있었는데, 약국 또한 예쁜 게 아닌가! 병원 의사샘과 약국 의사샘이 아마도 부부가 아닐까? 올케랑 속닥속닥 추측하며 약을 지어나왔었다. 처음 몇번은 그냥 주택을 개조한 약국 외관이 정겨운가보다 했었는데 내부에도 내 취향의 장식품이 있더라는;; 

설리랑 마이크 브릭이 있다니! ^^ (인스타그램에도 올린 적 있는 옛날 ㅂ약국 내부) 

암튼 그래서 별로 가깝진 않지만 나름 옆 동네에 있는 이 내과병원과 약국에 꼬박 2달간 다니며 소염진통제를 처방해 먹었고 결국 통증에서 차츰 해방되었다. 당연히 이젠 감기약도, 혈압약도 이곳으로 타러 다녔는데 우잉.. 3월 말 병원과 약국은 나란히 500미터쯤 떨어진 건물로 이사를 갔다. (함께 이사한 것만 봐도 분명 둘은 부부 관계이거나 인척이 틀림없다! ㅎㅎ). 

2달 만에 처음 이사한 병원과 약국엘 가봤는데, 약국엔 아쉽게도 브릭 장식품들이 다 사라져 아쉬웠다. 2층 주택의 낮은 천장과 벽을 활용한 인테리어여서 일반 건물엔 어울리지 않았거나 놓을 곳이 없었겠지. 그래도 여전히 베이지색 원목 장식장을 둘러 주인장의 담백함과 깔끔함이 반영된 약국 인테리어였던 것 같다. 

병원도 분위기가 전과 달라져, 훨씬 더 환하고 눈부신 느낌이었다. 흰 벽때문이겠지? 키다리 의자 놓인 벽에 작은 그림 붙여 놓고 화분 올려둔 건 마음에 들고 여전히 예쁘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병원 인테리어. ^^ 뭐 물론 의사쌤과 간호사쌤들은 여전히 친절했고, 병원을 나서며 기분이 좋았다. 동굴로 드나드는 느낌이 드는 계단 벽 인테리어가 맘에 들었나? ㅎㅎ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티는 걸 뿌듯하게 생각하며 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제발로 걸어서 병원엘 잘도 찾아간다. 아직도 좀 버티기 증상이 있지만 저번에도 요번에도 감기를 앓아보니, 예전처럼 그냥 며칠 버텨서는 그냥 지나가지도 않고 증상이 종합세트로 나타나 너무 힘들었다. 이 또한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어쩌겠나. 이왕 갈 병원, 예쁘고 마음에 드는 곳이라도 찾았으니 다행이라 여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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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소풍

아픈 손가락 2019. 5. 29. 11:04

매달 셋째 주 화요일, 엄마는 고교동창들과 만나는 점심 모임엘 나가신다. 초창기엔 열댓 명쯤 되었다던 모임 인원은 이제 6-7명으로 줄어들었다는데 그래도 80세를 앞두었거나 지난 할머니들이 매달 꼬박꼬박 모인다는 건 존경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건강하시단 뜻이니까.

모교의 첫 글자와 벗友자를 넣어 '신우회'라는 이름도 있는 이 모임은 해마다 봄엔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는 게 전통이다. 이른바 봄놀이 꽃구경. 벚꽃이나 튤립, 장미가 피는 철에 예쁜 꽃도 보고 미술관 음식점에서 점심을 사드시는 형태였다. 올해는 지난 4월에도 벚꽃보러 가봤으나 음식점에 마땅히 먹을 게 없더라. 그러니 '각자 먹을 것을 간단히 싸오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요즘 살짝 컨디션이 좋지 않아 모임에 내심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엄마는 친구와 통화를 끝내고는 짜증을 냈다. 4월에도 갔는데 대공원엘 왜 또 가? 그리고 사 먹으면 간단할 걸 무겁게 왜 도시락을 싸오라고 그러냐고. 건강할 땐 절에 가야하는 볼일을 제끼고서라도 꼭 모임에 나갈 정도로 엄마에겐 우선순위가 높고 중요한 행사지만, 심신의 상태가 좋지 못하면 엄마는 또 모임에 나가지 않으려고 온갖 핑계를 대신다. 

귀찮아서... 자격이 없어서(무슨 자격?)... 친구들에게 민폐라서... 창피해서... 멀어서... '그것들' 잘난 척 하는 꼴 보기 싫어서.. ㅠ.ㅠ  그런데 요번엔 도시락 핑계를 댈 참이었다. 모임에 빠지고 나면 또 얼마나 아쉬워하고 자책하고 괴로워하는지 알기에 그렇게 둘 순 없었다.  상태가 아주 심해 불안하면, 내가 먼저 엄마 친구분들께 연락해 양해를 구하기도 하지만 요번엔 기분전환 삼아서라도 나들이를 성공리에 다녀와야 올 봄을 그럭저럭 잘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방에서도 다 들리는 엄마의 통화 내용을 파악한 나는 슬쩍 떡밥을 던졌다. 엄마 도시락 뭘로 싸드릴까? 깁밥? 유부초밥? 샌드위치? 와, 완전 봄소풍이네. 진짜 부럽다.

정말로 모임에 나가기 싫었다면 엄마는 다 싫다며 거부의 몸짓으로 침대에 드러누우셨겠지만 ㅎㅎ 왕비마마의 선택은 샌드위치였다.  근데 너 귀찮을까봐 미안해서 그러지... 말꼬리를 흐리는 엄마에게 염려 말라고 나는 큰소리를 쳤다. 샌드위치가 제일 쉬워! 에그샌드위치 괜찮지? 재료도 집에 다 있고, 식빵만 사면 돼!

소풍 전날 달걀과 감자를 삶아 다지거나 으깨고, 양파와 오이를 채썰어 소금에 절여 꼭 짠뒤 마요네즈를 넣어 일단 밤에 샌드위치 속을 만들어놓았다. 그러고는 식빵과 초콜릿을 사러나간 내게 어디 갔느냐고 엄마 카톡이 왔다. 노상 툭탁대는 엄마와 나는 말로 잘 못하는 미안해, 고마워 따위의 말을 그나마 카톡으로 주고받는다. 평소 막 반말로 떠들어대는 나도 카톡에선 약간이나마 더 유순해지는 듯.. ㅠ.ㅠ

다음날 아침 마요네즈와 홀머스타드를 발라 샌드위치를 만들어, 꺼내먹기 좋게 유산지에 싸서 도시락을 완성했다(아침에 바삐 서두르느라 인증샷 찍는 걸 까먹음. 아까비;;). 과일도 참외 오렌지 포도 골고루 통에 담고, 평소 금기 음식인 초콜릿도 간식으로 챙겨 물과 함께 베낭에 잘 넣어드렸다. 어린 시절 소풍가는 날 김밥과 과자를 싸주던 엄마의 마음이 이랬을까? 뭔가 뭉클하고 뿌듯한 기분. ㅎㅎ 어쩐지 기분이 묘해서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드세요.. 했더니 엄마 왈. 싸우긴 왜 싸워? 각자 자기 꺼 먹으면 되지. ㅋㅋ

친구들에게 민폐라고 염려하는 건 길치인 울 엄마가 곧잘 모임 장소로 가다가 지하철 방향을 잘못 타거나 만남 장소를 헷갈려 지각하는 일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길 헤매는 울 엄마를 친구들이 데리러 나오시기도... 그런 날이면 엄마는 당신이 길치가 된 건 맨날 내가 차로 모시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너무 편해서 호강에 겨워 요강에 X싸는 셈이라고, 내 탓과 함께 습관처럼 자책을 하신다. 과천 서울대공원 가는 길은 환승 가까운 문 번호까지 하도 메모를 자주해 외울 지경이구만!

째뜬 느릿느릿 행동이 굼뜬 엄마가 한번쯤 지하철 방향을 잘못 타는 상황까지 대비해서 요번엔 10시를 넘기자마자 노친네를 집에서 내몰았고, 무사히 대공원역에 도착한 엄마는 득달같이 전화를 했다. 너 때문에 너무 일찍왔어! 12시까지 30분이나 남았잖아! 얘네들 언제 오냐...  

만남의 광장에서 잘 기다려보시라고, 분명히 엄마 친구들 15분 안에 죄다 나타나실 거라고 장담하곤 전화를 끊었는데.. (엄마가 모임에 지각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12시 땡 하면 집으로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늬 엄마 집에서 몇시에 나가셨니? 엄마 친구들은 다 일찌감치 나온다는 의미!) 아니나 다를까 10분쯤 지나 카톡이 왔다. 친구들 만났어. 다들 와서 앉아있었네... 그럼 그렇지! 작전 성공. 

미술관 앞에서 도시락부터 까먹은 뒤 수다를 떨다가 장미원을 돌아보고 오셨다는 엄마의 봄소풍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집에 돌아와 근래 드물게 만보도 넘게 걸었다며 허리 아프다고 엄살은 심했지만, 본인도 대장정을 완수한 것이 나름 뿌듯하신 듯 그날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 곤하게 주무셨다. 정신이 불안정해지면 잠을 제대로 못자고 자도 악몽에 시달리기 때문에 점점 더 상태가 나빠지는데, 일단 하루라도 푹 자고 나면 바로 어느 정도 컨디션이 회복된다.  나들이 가서 햇빛을 많이 쪼인 것도 숙면에 도움이 됐을 테고...

엄마가 봄소풍을 다녀오신 건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다. 이후 2, 3일은 '너무' 피곤하다며 침대와 물아일체로 보내는 날이 많았고 그러려니 봐드렸는데, 주말까지도 계속 집밖에 나가기 싫다는 핑계로 절에도 안 가시고 각종 수업도 빠지는 터라 순풍이 불던 모녀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자꾸 누워만 있으면 근육 풀려서 더 못움직이신다고요!! 버럭버럭 나는 또 소리를 지르고... 엄마는 당신의 끼니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 외출한 딸에게 시위를 벌이고... 에효... 어렵사리 이렇게 또 5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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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 우울증

아픈 손가락 2019. 5. 24. 00:33

울 엄만 어쩌다 조울증 환자가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딸로서 나의 최대 의문이다. 엄마 본인의 말로도, 외가 친척들의 이야기로도 가족력은 없다는데 엄만 대체 왜?

이 질문에 확실한 해답을 얻게 된다면, 나 역시 조울증 유전인자를 갖고 있어 잠재적 환자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나의 공포도 얼마간은 잠재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엄마를 가장 잘 알 것이라고 생각되는 외할머니를 비롯해 외가 친척들에게 슬며시 물어본 적이 있다. 돌아가신지 벌써 십수년이 된 외할머니는 엄마가 마음의 병을 얻은 이유를 '너무 착해서'라고 믿으셨다. 울 엄마가 바보같이 너무 착해서 할 말 못하고 참다가 병이 났다는 얘기다.

그런가 하면 외할머니에겐 못되 처먹은 시누이였고 울 엄마에게도 아동학대에 가까운 가사노동을 시켰던 고모할머니는 '가난과 고된 시집살이' 탓을 했다. 친정 살땐 그래도 웬만히 살았는데 시집가서 보니 시아버지는 엄하고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해 맏며느리로서 남편과 함께 12식구를 먹여살리느라 고생한 탓이라나. 그래서 울 엄마가 아프단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고모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비롯해(늬 아버지가 착해 빠져가지고 능력이 없어!) 친가 식구들을 욕했다.

그럴법한 이야기지만 나로선 또 의문이 생겼다. 나의 부모님은 고3때 동네 친구로 처음 만나 햇수로 8년이란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한, 1960년대 당시로선 꽤 드문 연애결혼파다. 애인이 대학 입시를 거쳐 군대를 다녀오고 취직을 하는 동안 모든 과정을 지켜본 엄마가 결혼을 결심했을 땐 예비 남편감의 가난과 8남매의 장남이라는 무게도 이미 알고 있었을텐데? 어려서 내가 아빠의 어떤 점에 반해서 가난한 집 8남매 장남에게 시집을 왔느냐고 엄마에게 물으면, 엄만 장녀라서 그런지 맏며느리란 존재가 좋아보였다고 했다. 물론 막연한 상상과 실체는 엄청 달랐겠지.

하여간 예상 밖에 고된 시집살이와 가난이 너무도 힘겨웠다면 결혼 직후 발병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혼 전부터 검찰청 공무원이었던 엄마는 나를 낳고 출산휴가 3개월만에 첫딸을 시어머니에게 맡긴 뒤 다시 복직했고,  연년생인 남동생을 낳은 뒤에도 곧바로 복직해 별일 없이 직장 생활을 이어갔다. 문제는 나와 4살 터울인 막내동생을 낳고나서부터였다.

나이 많은 우리 할머니 대신 엄마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학교에 쫓아다니며 학부형 노릇을 해주었다는 넷째 고모와 막내 고모의 최근 증언에 따르면 ^^;  울 엄마가 처음 조울증 증상을 보인 건 막내동생을 출산한 다음이었다고 한다. 검찰청 소속 첫번째 타이피스트였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엄마는 당시 여직원의 정년이 31살쯤(헉! 겨우 만 30세?)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또한 공교롭게도 최근 정신과 주치의를 만난 자리에서 엄마가 직업병으로 끝이 구부러진 손가락들을 보이며 하신 이야기다.)  그래서 셋째를 낳은 뒤엔 복직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셋째 출산 이후 엄마의 산후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온 집안에 난리가 났었다는 고모들의 증언을 듣고 보니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지기는 하는데, 전후 관계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엄마는 과연 산후 우울증 때문에 제대로 복직이 어려웠던 것일까, 아니면 강제로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서 가정주부로 살아야하는 인생의 변화를 함께 겪으며 산후우울증까지 겹쳐 심한 마음의 병을 얻게 된 것일까? 내가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으로 갖고 있는 요란한 굿 장면이 바로 막내동생이 태어난 이후 어느 즈음의 일인 것 같다. 

요번에 고모들과 대화를 나누며 또 하나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 정확하게 내가 몇살 때인지 좀 더 역사를 추적해보아야 하겠지만, 부모님은 첫딸인 나만 친가에 맡겨놓고 아들 둘만 데리고 분가를 했었는데, 그 이유가 글쎄! 외할머니가 어디 가서 점을 본 결과 '동쪽으로 이사를 가야 병이 낫는다'고 했단다. 그래서 아버지의 직장 근처인 광진구로 이사를 했다는 것! 물론 매주말마다 엄마아빠가 할머니댁에 와서 자고가는 시스템이었지만, 나는 부모님의 분가로 할머니댁에서 한참 살다가 3학년때 비로소 부모님댁으로 합류했다. 

무속인의 점괘가 맞았을리 만무하므로, 물론 엄마는 광진구로 분가를 한 이후에도 계속 심하게 아팠고 지금 생각하면 어리디 어린 삼십대 부부는 참 많은 고생을 했던 것 같다. 넷째 고모가 걱정스러워 분가한 집에 가보면 엄마는 어두운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자책하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하고,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늘 애처가였던 아버지는 병든 아내 수발이 괴로워 연일 소주를 마셔댔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엄마의 조울증 발병에 관한 실마리 하나를 푼 셈이다. 가끔 뉴스에도 보도되지만 산후 우울증은 사람에 따라 정말 무서운 병이다. 느즈막히 결혼을 해 마흔살인가 마흔 한 살에 첫 아이를 낳은 나의 친구 역시 출산 후 무서운 우울증을 앓았다. 저절로 모성애가 뿜어 나오기는커녕, 너무도 무기력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하는 갓난아기 돌보기가 힘들고 괴로워 나쁜 생각을 품기에 이르렀고 결국 아기의 안전을 위해 친구는 시댁에 아기를 보내 백일까지 떼어놓고 치료를 받았다.  울 엄마가 평생 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듯이, 그 친구 역시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몇년에 한번씩은 다시 마음의 병이 찾아온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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