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직전 옷을 다 차려입고서 전등 스위치를 끄기 전 마지막으로 거울을 한번 봤는데 정수리에서 뭔가 반짝. 손가락 한마디 만큼 자란 흰머리다. 또 그 자리네. 쪽집게를 찾아들고 새치 소탕작전. 급한 마음에 그 옆 검은 머리칼 한올을 먼저 뽑고서야 성공. 아까비. 어릴 때부터 머리숱이 적고 올이 가늘어 정수리가 훤했는데,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 이러다 대머리 되는 거 아닌가. 요샌 여성 대머리도 흔하다던데.
머리칼을 자꾸 뽑으면 모근이 아예 죽어버려 어느 순간 다시는 새 머리칼이 나지 못한단다. 좀 더 지나면 흰머리 한 오라기도 아쉬워 절대 뽑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기에 나중엔 나도 그냥 백발을 염색도 않고 자랑삼아 다니리라 마음 먹어보지만 아직은 반사적으로 흰머리 소탕을 시도한다. 특히 쭈뼛 서듯 홀로 삐죽이 튀어나오는 정수리 흰머리는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어! 아 글쎄 지난 번엔 지하철 타고 가다 내리려고 문앞에 섰는데 유리창에 비친 정수리 부분이 또 반짝. 어찌나 거슬리는지 개찰구 빠져나가 화장실까지 가기도 전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얼른 서서 흰머리를 뽑았다. 남들이 보면 미친여자인가 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참을 수가 없는 걸...
염색 않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이어서, 맏이 주제에 3남매 중 흰머리가 제일 덜 나는 편이어서 고맙지만 욕심은 끝이 없는 법. 50살 될 때까지 좀 참아주라, 하고 흰머리한테 애걸하고 싶어진다.
주변에 입시생이 없어진지 꽤 되서 수능이 언제인지 별 관심도 없는 삶이 죽~ 이어지고 있었는데, 작년부턴가 친구들이 하나 둘 수험생 부모노릇을 시작했다. 운 좋게 제 앞가림을 알아서 잘 하는(달리 말해 공부를 잘하는;;) 자식을 둔 부모든 아니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입시 때문에 다들 골머리를 앓았다. A형 문제를 선택하면 어떻고 B형이면 어떻고, 과목별 등급 컷이 어쩌고 저쩌고... 우웩~!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였지만, 들어도 통 모를 소리만 해대는데... 덩달아 한숨이 나왔다. 몇년 째 고3 담임을 맡고 있는 선배 하나는 매년 바뀌는 입시정책을 대학별로, 해당 학생 별로 따로 '열공'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 준비는 할 시간도 없다고 푸념했다. 어차피 수능영어는 애들도 학교에서 배우겠단 기대도 하지 않는다나.
암튼...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명심할 건 단 하나라고 했다. 입시 과정이든 결과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말것. 대학 어떻게 됐느냐고 괜히 물으면 향후 '20년간' 계속 재수가 없단다. ㅎㅎ 얼마나 싫으면 그런 속설을 만들어냈을까. 모범생 딸 둘의 입시를 연이어 치른 친구가 얼마전 만났을 때 그랬다. 2년 간 지켜보니 드디어 알겠더라고. "대한민국 입시의 정답은 무조건 특목고, 자사고야! 거긴 내신이며 모의고사 점수 바닥인데도 대부분 수시로 합격하더라고." (그 조언에 힘입어 다른 친구들은 요번에 죄다 애들을 특목고, 자사고에 밀어넣었다. 물론 애들도 실력이 되고, 뒷바라지 할 경제력도 되니깐 보냈겠지만;;)
친구의 두 딸은 경기 지역에서 일반고를 다녔다. 고교평준화 이전의 마지막 세대였다는 것 같다. 특목고, 자사고 특유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싫다며 성적이 우수한데도 일반고를 선택한 아이들이었다. 듣자하니 그런 학교에 다니려면 학비며 기숙사며 비용이 대학 등록금에 버금가게 든단다. 좋은 기업에 다니면 자녀 학자금 지원도 받을 수 있다지만, 암튼 그 아이들은 일반고를 선택했고, 줄곧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는 듯했다. 이른바 '좋은 대학'에 수시 원서를 넣을 정도로.
하지만 둘 다 수시는 모두 낙방. 결국 정시로 대입에 성공했다. 서울 소재 대학이긴 하되 부모도 아이도 별로 성에 차지는 않아 했다. 나도 좀 놀랐다. 일반고에선 전교 10등, 20등 안에 들어야 마음 놓고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겨우 갈 수 있는 수준이라더니 정말이로군... 입시 뒷바라지 내내 아이들 얘기는 일언반구 하지 않았던 친구들(그래서 수험생인 줄도 몰랐던;;)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지방 사립대를 보내놓고 걱정을 토로했다. 요샌 SKY 나와도 취직이 안된다는데... +_+ (심지어는 '하바드'를 나와도 문과 전공이면 실업자가 수두룩하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대학 진학률에 목매는 부모들은 너도나도 특목고, 자사고를 보낼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든다. 하물며 이젠 예고도 예체능 특기로 가는 곳이 아니란 놀라운 사실. 미술학원에 다니며 예고 준비를 했던 나의 조카는 중3이 되자, 그림 실력은 다 거기서 거기니깐 미술 실기 중단하고 내신성적이나 올리라는 학원 선생의 조언을 들어야했다. 아니 공부 잘 하는 애가 뭐 아쉬운 게 있어서 예고를 가냐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고, 예고는 이제 대학 가기 유리한 방편으로서 일종의 '특목고'에 불과한 듯했다. 어차피 이미 예중 출신이 아니라면 예고도 반에서 5등 안엔 들어야 수월하게 갈 수 있다네. ㅠ.ㅠ 맙소사.
세상 꼬라지가 어떻게 되려고 이 모양인가 아주 다양한 분야에서 한심스럽기 그지없지만, 입시 관련해선 더더욱 기가 막히다. 선행학습 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지만 과연 그런다고 사교육이 줄고 교육이 정상화될까? 애들은 학교 교사의 무능력을 탓하고 교사는 또 애들의 방만함을 탓하고.. 악순환만 지속될 뿐인 것 같던데. 순진하게도 나는 조카들이 클 무렵엔 다들 공부에 목매지 않아도, 대학따위 가지 않아도 제 인생을 펼쳐나갈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그런데 이놈의 빌어먹을 학벌주의 사회는 이 나라가 망하는 날까지도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얼추 학교만 졸업하면 다들 '정규직'으로 취직해 제 앞가림은 하고 살던 때 역시 다시 돌아올 것 같지도 않고.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며 성적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당연한 풍토 속에서 난 중뿔나게도 "어떻게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할 수 있냐! 공부가 싫고 못하는 애들도 있는 거지!"라고 투덜대자니 괜히 욕만 들어먹는다. 니 자식 아니니까 함부로 말하는 거라나. 그래도 난 모두들 입시와 성적과 성공을 목표로 아예 초등학생 때부터 노선을 정해 애들을 잡는 부모들을 도통 이해 못하겠다. 알바까지 해가면서 애들한테 들이는 사교육비만큼 따로 떼서 차라리 노후 준비나 하라고, 그게 미래를 위한 나은 투자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어차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며! (혹시 이젠 성적순이 맞는 건가?)
덩치만 컸지 아직 정신연령은 애기처럼 느껴지는 큰조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다고 하니 너도나도 '이제 입시지옥 시작이구나' 한다. 지옥이란 걸 안다면 거기 발을 내딛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내 자식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흔히 100세 시대라고 하는 길고 긴 인생에서 굳이 다 똑같은 길을 가야하는 건지, 튀지 않는 평범한 삶을 위해선 그냥 대세를 따르기만 해야 하는건지, 뭔가 다른 길이나 미래는 없는 건지, 대답 없는 질문만 머리를 맴돈다.
일주일이 아직 다 가지 않았는데, 직딩 시절 월요일부터 연일 야근에 시달리다 맞은 금요일처럼 축 늘어진 파김치 신세다. 그간은 약간씩 '기운'만 돌다 말았을 뿐 매번 내가 먹어대거나 푹 쉬거나 하는 수법으로 늘 물리쳤던 감기가 드디어 내 면역력을 넘어섰다. 다행히 요즘 유행한다는 독감은 아니고 그냥 지저분한 콧물감기. 요란한 재채기 몇번 이후 코찔찔 흘리느라 목소리가 변했다. 코를 풀다풀다 지쳐 코주변에서 껍질이 벗겨질 때쯤이면 감기가 떨어지겠지.
조카의 중학교 졸업식에 갔었다. 삐까번쩍 멋지게 들어선 아트센터 건물에서 거행된 졸업식은 어쩜... 수십년 새 그렇게 하나도 안변했을 수가 있나. 심지어 더 나빠진 것 같다. 예전에도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불렀던가? 어쨌거나 저 아래층의 학생들도 2층 객석의 나도 몸을 배배 틀며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개그콘서트에서 박지선이 늘 "몸이 고생을 기억해요~" 따위의 대사로 웃기는데, 30년 넘게 부를 일 없었던 교가와 졸업식 노래가 다 기억나서 깜짝 놀랐다. 하와이 민요에 붙인 그 졸업노래는 딴 데 가서도 진짜 들을 일 없을 텐데 ㅋ.
식이 끝난 후 멀고먼 교실 건물까지 또 낑낑대고 따라가서 보니 여전히 복도는 좁아터져 학부형들로 발디딜 틈조차 없었고, 저 안에 어떻게 70명이 바글거리고 앉았나 싶게 교실도 작았다. 이제는 학생 수가 그 절반도 안되는 30명이라던가. 왁자지껄한 교실엔 그래도 누군가 풍선도 매달고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종이도 붙여 놓았고 교탁에 케이크도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담임이 뭐라고 하건 말건 지들끼리 수시로 왁왁 괴성을 질러대는 아이들이 나는 조금 무서웠다.
모든 게 끝나고, 싫다고 도망치는 조카를 애써 담임 옆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지만 당연히 흔들려 하나도 건질 게 없다. 괜히 찍으라고 그랬나.
돌아오는 길에 봐온 장으로 어젠 또 종일 대보름 먹거리를 준비했다. 여름부터 엄마가 말려놓은 호박, 가지, 시레기, 나물 3종세트에 콩나물과 시금치를 더해 5종 세트 완성. 9가지엔 못미쳐도 그나마 작년보다 한 가지 더 많아졌다. 냉장고가 그득하니 안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지금 배가 부른 건 오곡밥을 하도 많이 먹어서지만...
고된 일주일을 씩씩하게 보낸 나에게 장하다고 뭔가 상이라도 줘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날짜를 보니 발렌타인 데이. 옳다구나 냉장고를 열어 친구가 보낸 초콜릿을 한귀퉁이 쪼개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달콤쌉싸름한 카카오의 맛이 고단함을 달래 잠시라도 영혼을 말랑말랑하게 해주기를.
혈압이 좀 높고 빈혈이 있고 위염 소견을 보인다는 것이 지난 연말 건강검진 결과의 요지다. 몇년 전 위내시경을 했을 때는 흔한 표재성 위염이라더니 역시 '그냥' 위염으로 발전한 것이 간간이 느낀 속쓰림과 소화불량의 이유였구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위내시경 소견서에도 그렇게 써 있었다. 지속적인 속쓰림이나 불편함이 느껴지면 내원하여 치료를 받고, 별 이상이 없으면 1년 뒤 다시 내시경을 받으라고. 요즘 다시 멀쩡해졌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 혈압이야 뭐 잠 못자고 가서 쟀으니 당연히 높게 나왔고, 집에 와 푹 자고 다시 쟀을 땐 정상이었다. 그럼 그렇지, 새해 들어 며칠 나가서 운동(이라고 쓰고 산책이라고 이해해야;;)도 했단 말이지.
암튼 새해들어 담당 보험설계사가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의료실비가 보장되는 보험을 또 들라는 거였다. 친구의 언니이기도 하고 같은 동네 사는 터라 걸핏하면 집까지 찾아와 당근(각종 선물;;)과 채찍을 휘두르며 실비보험의 필요성을 설파한지 벌써 몇년째였고, 요번엔 계약서까지 뽑아들고 와 아주 사인을 해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을 태세였다. 다 나를 위해서라고... 부모님의 고혈압 유전자도 있으니 미리 대비하는 게 좋겠다고. 처음엔 요리조리 회피를 해보았으나, 우유부단함과 거절 못하는 지병이 도져 결국엔 옛다, 서명을 해주고 말았다.
나로선 선심 깨나 베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뒤 보험사에서 또 사람이 나왔다. 나의 건강상태가 보험 가입에 적합한지 일종의 평가를 하러 나온 셈이었다. 오래 전 종신보험과 연금보험을 들 때는 아예 간호사가 나와서 혈압을 재고 혈액 샘플까지 뽑아가더니만, 이번엔 조목조목 건강 상태와 병원 진료 경험을 캐묻다가 내가 귀찮아서 건강검진 결과표를 보고 읽어주자 아예 그걸 사진으로 찍어갔다. 아우 기분나쁘고 찜찜해...
그러더니 두둥. 며칠 뒤 친구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의 건강상태가 보장되지 않아 실비보험 가입이 거절되었다나. 우엑~~~!!!! 왜 가만 있는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기분 나쁘게스리!! 해서 보험청약을 철회하고 1회분 보험료를 돌려받고 어쩌구 하는 귀찮은 절차를 거친 뒤, 나는 의료실비 보험도 못드는 중년의 불건강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으으으으 기분 더럽도다!!
누군가는 이미 몇년 전 의료실비보험을 들었다가, 건강 우량체로 인정되면 보험료 할인된다는 말에 검진을 받아본 뒤 괜히 고혈압 판정만 받았다느니(병원에만 가면 괜히 혈압이 올라가는 새가슴도 있지 않은가;;), 함부로 건강검진 받을 게 아니라느니, 보험공단에 괜히 기록만 남아 나중에 불리해진다느니(뭐가??) 하는 말이 뒤늦게 이런저런 경로로 귀에 들어온다. 언제는, 건강검진은 정기적으로 받아야 좋다며!! 우쒸....
애당초 의료실비 보험 따위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했으니 다시 원점이라고 쿨하게 생각하면 그만인데, 생각할수록 보험사의 행태가 괘씸하고 기분나빠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이렇게라도 씨부리면 좀 풀리려나.... 생각해보니 그간 내가 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을 계속 외면해왔던 것도 일리가 있는 행동이었구나 싶다. 원래 병원에 쪼르르 달려가는 성격도 아니고, 감기 걸려도 약을 먹는 유형도 아니니, 그동안엔 어디에도 기록이 남질 않았잖아! 헌데 이젠... 기록상 그쪽 세계에서 여러가지 병인을 지닌 '환자'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엄청나게 억울하다. ㅠ.ㅠ
생전에 아버지는 설날 전에 은행에 가서 꼭 만원짜리 신권을 바꿔다가 세뱃돈을 주셨다. 95년부터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가 참 공교롭게도 꼭 한해 간격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설날 세배드릴 어른들이 확 줄어든 것도 슬펐지만 천원짜리 몇장 푼돈이라도 재미삼마 받던 세뱃돈을 주실 분은 부모님 뿐인 것도 못내 섭섭했다. 직장인이 되고부터 어른들께는 세뱃돈을 드리면서 세배하는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마치 물물교환이라도 하듯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에게도 주섬주섬 쌈짓돈 챙겨주시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하여간 아버지는 머리 큰 자식들에겐 빳빳한 만원짜리 한장 세뱃돈으로 건네면서 '종돈'(種돈)으로 지갑에 넣고 다녀라, 하셨고 정말로 나는 그 씨앗 돈이 무럭무럭 새끼를 치면 좋겠다고 바라며 늘 다음해 설날까지 지갑에 모시고 다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첫 설날, 엄마는 손주들 세뱃돈 봉투만 챙길 뿐 삼남매와 조카들에게 주는 '종돈'은 준비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게 어딨어!! 나도 세뱃돈 받고 싶단 말이야! 늙은 딸은 앙탈을 부렸고, 아들 며느리들도 아빠가 하시던 일 엄마가 그냥 이어가기를 바랄 거라고 계속 꼬드겼다. 엄만 어차피 세뱃돈 남는 장사잖아! 협박도 좀 하고...
그 덕에 올해도 설날 빳빳한 만원짜리 한장이 든 봉투를 받았고, 작년에 받은 종돈 옆에 나란히 지갑에 넣어두었다. 종돈이 두 장이면 새끼를 더 많이 칠 지도 몰라, 이러면서 ㅋㅋ.
어쩐지 미신덩어리가 되어버린 듯한 내 지갑엔 요번 입춘 부적도 새 걸로 개비되었다. 정작 입춘 날엔 낙상 후유증으로 절에도 못가고 끙끙 앓느라 식구들 부적 챙겨놔 달라고 전화만 한 뒤, 노친네가 며칠 지나고 찾아오더니 내껀 작년부터 특별히 삼재 부적이라며 시뻘겋고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아오, 진짜... 교회 다니는 둘째 며느리 것만 빼고 본인이며 자식들 부적을 갯수대로 다 받아와서는 다들 빨랑 바꿔줘야 하는데... 전전긍긍하는 노친네를 보자면 짜증스럽다가도 결국 피식 웃음이 난다. 동생들도 다들 별 군말 없이 부적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이유는 미신을 믿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노친네 마음 편하시라고 그러는 거겠지.
작년에는 절에서 입춘첩도 받아와 현관문에 붙여두었던 터라, 문 여닫고 드나들 때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한문으로 적혀 있는 한지를 보며 괜히 기분이 좋았으나, 올핸 입춘첩 받아오면 엄청 추웠으니까 거꾸로 붙여야지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부적만 챙겨준 모양이다. 한해 무사태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붙이는 입춘첩이나 부적이나 지갑에 돈 많이 들기를 바라는 종돈이나 어떻게 보면 다 터무니 없는 미신이고 허튼 짓인데, 또 한편으론 재미나고 정겨운 풍습이니 손가락질 할 것만도 아니다. 종돈이든 아니든, 이 나이에도 새배하고 세뱃돈 받으면 그저 흐뭇한 걸 어쩌겠나.
제목을 적고보니 뜬금없이 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폭포가 '나이야가라'라는 관광버스 유머가 생각났다. -_-; 암튼 인간의 탐욕 때문에 좁고 더럽고 스트레스 심한 환경에서 사육된 조류들의 질병이 더는 생겨나지 않도록 세상이 좀 바뀌면 좋겠다. 읽혀 먹으면 닭고기 오리고기는 아무 문제없다고 언론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마트나 시장에서 일단 닭과 오리를 사기가 힘들어진 것 같고 (특별 할인 스티커를 붙이고 있지 않으면, 아예 매장에서 제품이 잘 보이지 않는다) AI가 수도권까지 퍼졌으니 죄다 살처분하고 나면 당분간 닭고기 오리고기 값은 고공행진일듯. 이런 악순환은 좀 어떻게 안되겠니!
먹거리 포스팅이 뜸하다는 나무샘의 요청에 힘입어, 그리고 AI가 수그러들기를 바라는 닭고기 애호가의 마음으로 그간 먹어댄 닭고기 음식 사진을 모아보았다. 닭고기는 정말이지 어떻게 요리해도 맛없기가 어려운 재료가 아닐지. 내가 다 애정하는 집들인데, AI 때문에 닭수급에 어려움이나 심히 겪지 않기를 바란다.
1. 동대문 원조 닭한마리 칼국수
내가 동대문 시장 뒷골목에 자리잡은 양푼 닭한마리 칼국수를 처음 접한 건 90년대 초. 같이 졸업한 학교 선배가 동대문 근방 청계천변에 헌책방을 인수했고, 개업 축하 비슷하게 친구들과 몰려갔던 날 선배가 닭고기의 신천지를 소개했다. ^^;
등에 감자를 꽂은 닭 한마리가 통째로 냄비도 아니고 커다란 양푼에 담겨 나오는데, 시커먼 가위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어설프게 가위질을 할라치면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어우... 근데 겨자와 간장 식초 따위를 넣은 양념장에 찍어먹는 닭고기 맛이 그야말로 신세계! 인근 시장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술집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자주 갈 기회도 없었는데 회사 생활 때려치우고 번역을 한답시고 준백수처럼 대낮엔 학원다니고 나이 어린 친구들과 몰려다니게 되자,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닭한마리 칼국수를 먹으러 가기에 이르렀다. 외국인 선생들이 이런 험악한 음식을 더 좋아할줄이야! (국물까지 싹싹 저 양푼을 바닥까지 비우고는 뿌듯해하며 여럿이 양푼 쳐들고 찍은 엽기 관광객 모드 사진도 어딘가 있다) ㅎㅎ 암튼 동대문에 밀리오레, 두타 같은 패션타운이 생겨나면서 야시장 구경을 수시로 다녔던 시기까지 겹쳐, 30대 중반까지 참 많이도 먹으러 다녔다. 그러나 그 뒤로 너무 유명해지고 맛집으로 소문이 나면서 점점 외국 관광객들을 포함해 찾는 사람들도 많아져 줄을 오래 서야하는 게 싫어 이젠 아주 많이 별러야 가는 정도. 정 먹고 싶으면 집에서도 비슷하게 흉내내서 끓여먹기도 하는데, 맛을 똑같이 낼 순 없다. 그러니 노상 그렇게 사람들이 많겠지. 90년대에도 이미 주인 할머니는 여름 내내 하와이 별장에 가서 쉰다는 둥, 빌딩이 수십채라는 둥 갑부설이 나돌았었다. ^^; 저 사진을 찍어온 날은 울 엄니까지 대동하고서 추위를 뚫고 동생네랑 갔었는데, 노인 동반 대가족 프리미엄 덕분에 줄 서 기다리는 남들보다 금방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이고, 그러고 보니 20년 넘게 다녔다는 얘기다. 중간에 가게에 불도 나고 아들이 분점 내면서 맛이 변했네 어쨌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째뜬 20년 넘게 안 없어지고 건재하는 게 고맙다. 시장통 골목 음식점이라 위생이니 친절이니 꼼꼼하게 따질 순 없지만 묘한 중독성을 지닌 맛인 걸 어쩌겠나. 추릅.... 올 겨울 가기 전에 한번 더 가봐야지.
2. 춘천 우성 닭갈비
작년 가을 남이섬에 갔을 때 선착장 근처에서 도저히 닭갈비라고 부르기에 화나는 수준의 닭갈비를 먹고는 춘천 원조 닭갈비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그 다음 달에 다녀왔다. ㅋㅋ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명동 닭갈비 골목 말고 춘천 시민들이 간다는 바로 그 우성 닭갈비! (파피야 고맙다 ^^;)
삽처럼 커다란 뒤집개가 아주 인상적이지 않은가? ㅎㅎㅎ
원래 닭갈비는 숯불에 구워먹는 거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닭갈비는 저렇게 철판에 볶아먹어야 제맛인 것 같다. 방산 시장 가서 저런 철판을 사다가 한번 해먹어보면 비슷한 맛이 나려나 늘 궁금한데, 그런 수고를 들이느니 그냥 춘천으로 먹으러 다니는 게 낫지, 그러며 참는다. 알싸하고 시원한 동치미까지 곁들여 먹으려면 암.. 가서 먹어야하고 말고.
이날 꽤 아침 일찍 서둘러 갔기에 내 생각 같아선 소양댐도 올라가고 청평사도 가고 그럴까 싶었으나, 동행의 반대로 소소하게 공지천 산책길만 둘러보고 춘천MBC 건물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고는 휭하니 올라와 좀 아쉬웠다. 순전히 닭갈비 먹으려고 춘천 가는 여자다 나. ㅋㅋ
공지천 입구엔 내가 고딩때 최초로 땡땡이 치고 춘천행 기차를 탄 뒤 가보았던 '이디오피아' 가 여전히 주홍색 지붕을 빛내며 서 있었지만 마땅히 갈만한 새로운 카페는 보이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역시나 추억의 장소인 춘천MBC를 찾았다. 예전에도 로비 한 구석 카페가 괜찮았었는데, 호수가 내뎌다보이는 전망 좋은 위치에 꽤 괜찮은 갤러리 카페로 변해있어, 일행의 찬사를 받았다. 좀 비싸긴 했지만 커피 맛도 쓸만했고 사진처럼 초콜릿을 한알 곁들여 주는 데 괜히 혹했다. ㅋㅋ 안개 자욱한 호숫가를 잠시 산책한 것도 좋았고...
3. 부암동 계열사 치킨
부암동 치킨집이 서울 3대 치킨에 든다는 말을 들은 터라, 김환기 미술관 구경갔던 날 꽤나 벼르고 기대해서 찾아간 곳.
요즘 추세처럼 튀김옷에 온갖 양념과 자극적인 맛을 첨가하는 게 아니라 옛날 방식으로 담백하게 튀겨낸 치킨이었다. 치맥은 진리~ 라며 생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먹으니 맛은 있었지만, 진짜로 이게 서울 3대 치킨이라고?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음. 물론 치킨과 같이 나오는 큼지막한 감자튀김이 흡족했고 둘이서 배가 터지도록 바구니를 싹 비웠지만, 소문처럼 그렇게 몇시간씩 줄 서서 사먹을 만한 맛인줄은 잘 모르겠다. 다행히 이 날은 춥기도 했고 평일 저녁이라 줄을 서야하는 문제 따윈 없었으나, 우리가 나올 무렵엔 거의 자리가 없었다. 듣자하니 맥주를 제외한 안주메뉴는 추가주문이 안된다고. 골뱅이 세트도 있는데 그런 건 앉자마자 시켜야한다는 뜻. 켁.. 하여간 저 한바구니에 2만원이다.
나중에 부암동 주민께 물어보니, 원주민들은 이집보다 되레 그 골목 안쪽에 있는 다른 치킨 집 맛을 더 쳐준다고... 나중엔 그 집에 가서 한번 먹어보고 비교해야지.
4. 백숙
사실 닭고기는 집에서도 일주일에 한두번 이상 해먹는 것 같다. 백숙과 안동찜닭을 번갈아 해먹는 중간중간 닭안심을 사다 얼려두고는 스파게티에도 넣으니까. 하지만 토종닭 백숙은 뭐 딱히 요리랄 것도 없어서 사진을 찍어둘 생각도 하지 않는데, 차례상을 차릴 때마다 서식 안내서를 들고 낑낑대는 동생들을 불쌍히 여겨 언젠가 찍어둔 사진이 생각났다. ^^;
우리집은 제기 설거지를 최대한 피하고 얼른 우리가 상 차려 먹을 수 있도록 기름기 있는 음식은 죄다 접시에 올려 제기로 받치기만 한다는 사실~!
그러고 보니 요번 설날 차례 때는 단감을 사과 왼쪽에 둔 것 같은데 쩝;;; ㅋㅋㅋ
하여간 차례나 제사때는 어쩔 수 없이 저렇게 껍질째 통닭을 삶지만, 평소 먹을 땐 끓이기 전에 껍질과 꼬리, 온갖 지방을 완전히 제거한 뒤에 담백하게 삶는다. 차례와 제사 때도 통대파와 통마늘 듬뿍 넣고 푹푹 삶아 건져버림. 순전히 산자들이 맛있게 먹기 위한 음식이라규~
5. 단호박 치킨 파스타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마지막 닭안심을 녹여서 바로 어제 해먹었다. 사진 찍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예쁘게 담았어야 하는데, 가지런히 담았던 엄마 접시는 이미 시식중이셨고, 마침 모짜렐라 치즈 얹은 파스타 해먹는다는 자랑에 친구가 사진 보내보라고 해서 찍은 거라 민망타.
명절 때만 되면 남북 양쪽에서 정치적인 카드로 써먹으려드는 느낌이 강한 이산가족 상봉. 요번에도 실무 접촉이 시작되고는 있지만 꾸준히 연례적으로도 못하고 걸핏하면 중단되는 양상이 참 못마땅하다. 뉴스에 나오는 이산가족 상봉 회담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가 중얼댔다. 이젠 다들 돌아가시거나 너무 늙고 병들어 만나러 갈 사람도 없지 않나...
실향민인 우리 할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셨더라면 올해로 무려 105세가 되시는 셈이고, 10년쯤 전엔가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다녀오신 큰고모님도 어느덧 80대 중반이 되셨으니 정말로 몇년 안에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유명무실한 생색이 되고 말 것이다. 큰 기대를 안고 떠났던 큰고모님 말씀으로는 얼굴 알만한 노인들은 다 사망해 다 그 자손들이랍시고 나와 상봉을 하니 별 감흥이 없으셨다던데.
암튼 얼마 전 중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한통 받았다. 돌아가신 울 아버지 성함을 대며 찾는데, 대번에 중국동포 말투가 너무 확연해서 보이스피싱이구나 싶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표독스럽게 대꾸하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자기는 중국에서 북한을 드나들며 무역업을 하면서 더러 북한 사람들을 돕고 있는데, 북한에 있는 아버지의 친척들이 아버지와 연락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연락처는 오래 전 이산가족 상봉 때 큰고모님한테 받은 것이라며 고모님의 이름과 주소 그 아들들 이름을 줄줄이 읊어 신빙성을 주려 애를 썼다. 의도는 알겠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이기적이게도 내심 이거 골치아프게 금전적 지원이나 탈북 알선에 연루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도, 내가 알기론 아버지랑 실제로 아는 친척은 하나도 없는 것 같던데. 어쨌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하니, 저쪽에서도 그럼 자기도 뭘 더 도와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죄송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고는 부산 큰고모님께 연락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며칠 고민하다 그냥 나 혼자 씹고 말았다. 엄마한테 이야기하면 또 괜한 걱정과 공포에 잠이나 설칠 게 뻔하고, 이산가족 상봉 후 큰고모님도 고생스럽게 괜히 갔다고 말씀하셨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통일을 앞두고 당연히 더 많은 탈북자 새터민들이 생겨날 것이고 지금도 여러 민간단체에서 북한 주민을 돕고 있듯이 꾸준한 물밑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남북 정권의 정치적이고 극단적인 결정보다는 차츰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과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할 테고 말이다. 그런데 막상 개인적으로 그런 기회가 가능할 수도 있는데 대번에 꼬리를 내리고 움츠러드는 나를 보니 어찌나 한심스러운지. 늦었지만 큰고모님께라도 실토하고 조언을 구해야하는 게 아닐까. 그 고민조차도 며칠째 계속 전전긍긍.
블로그를 일기삼아 매일 뭔가를 끼적이면 좋겠지만, 도무지 그런 부지런함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고 2014년을 맞아 매달 집계용 월기(? 블루고비 따라하냐? ㅋㅋ)를 남겨볼 생각이다. 그러면 민망해서라도 독서량이 좀 늘까, 아닐까. ;-p
1월엔 달랑 책 1권을 읽고 영화 4편과 전시회 둘을 보았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반권이라고 해야하나 ㅠ.ㅠ)
인 디 에어(Up in the Air, 2009)
변호인(2013)
어바웃 타임(About Time, 2013)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2013)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 <종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중남미 소설 읽기의 일환으로 오래 전에 장만해놓고 계속 겉표지만 구경하다 드디어 시작했다. 드라마 <따뜻한 말 한마디>가 동기로 작용하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다. ㅠ.ㅠ 고사 직전이라는 출판계에서 요새 그나마 움직이는 건 드라마에 인용된 책이라고 넋두리들을 한다는데, 아무 맥락없이 드라마에 PPL로 등장하는 책들은 모르겠고 확실히 작가가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책들은 효과가 큰가 보다. 어쩐지 끼워팔기나 묻어가기로만 살아가야 하는 책의 신세가 서글프지만 그래도 아예 주목 못받는 것보다는 낫겠지... 어쨌든 난 이번에 산 게 아니고 사둔지 몇년 된 책이라규~
조지 클루니의 영화라 다운 받아놓은지 오래 된 <인 디 에어> 빼놓고는 다 영화관에서 봤다. <그래비티>에서 아주 잠깐 나오고도 존재감이 컸던 조지 클루니에 대한 애정이 되살아나 (한때 온라인에서 '마이클루니'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한 적도 있을 만큼 ER 시리즈 속 클루니의 팬이었다 내가 ㅋㅋ) 벼르기만 했던 <인 디 에어>를 봤고, 조금 울었다.
그러고 보니 네 편의 영화 모두 한줄 감상을 쓰자면 어느 순간 조금씩 울었다는 이야기일 듯.
주변에서도 혹평과 호평이 나뉘었던 <변호인>과 <어바웃 타임>은 그 이유와 한계가 뭔지 알겠지만 대체로 뭐 괜찮았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1월 최고의 영화로 선정. 우와... 감탄했고, 집에 돌아와 나도 여행 상품을 한참 뒤졌다. ^^;
박수근 전시는 방금 포스팅했으니 됐고...
2월 23일까지 경복궁 옆 민속박물관(무료!)에서 하는 <종가>는 제사와 손님맞이를 전통적으로 이어온 종가집의 의미와 자취에 대해서 실제 여러 종가의 유물까지 아기자기하게 마련해놓은 전시였다. (어느 종가에서 종부에게 대대로 내려졌다는 '악어가죽 핸드백'도 있다. ㅋㅋ) 무료라서 유치원생들과 외국인 단체 관광객이 바글바글한다는 것만 빼면 꽤 볼만하고 일부 구간에는 신기한 신문물(일정한 지점을 밟으면 탁한 유리가 촥~ 투명하게 변하며 사당의 제사상과 제주가 나타난다든지;;)을 전시에 응용한 것도 좋았다.
그밖에 상설전시관도 함께 둘러보았는데 민속악기 전시실 앞엔 전화 수화기 모양으로 생긴 걸 귀에 대면 악기 소리가 들린다더니만 주로 지지직~ 소음만 들리거나 고장! 애들 등쌀에 쉬 고장나는 건 이해하겠지만 음질에 더 신경 좀 쓰시지... 쯧쯧...
이렇게 적고 보니 꽤나 바지런을 떨며 보낸 것 같지만 사실 1월은 내내 아직 새해가 밝지 않았어, 설날이 남았잖아.. 그러면서 미적거렸다. 이젠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새해임을 감안하여 2월부턴 좀 더 나사를 조일 것.
동시대 화가이다보니 탄생 연도가 한해 차이였고 당연히100주년 기념전도 나란히 붙어 열렸다.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근현대회화 100선에도 박수근 그림이 몇 개 포함되어 있었지만, 위작 논란에도 휩쓸렸고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빨래터>를 비롯해서 내가 제일 탐내는 <아기 업은 소녀> 그림까지 모조리 한꺼번에 구경할 기회를 그냥 넘길 순 없지. 스케치 포함 작품 수가 120점이나 된대고, 그 중 유화만도 90여점이라 몇년전 45주기 회고전 때보다 훨씬 대규모다.
3월 16일까지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하고, 입장료는 만원. 월요일은 당연히 휴관인줄 알았는데 전시기간 중 무휴라고 하고, 매주 수요일엔 오후 9시까지 관람가능하단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도 수요일엔 늦게까지 열고 매월 마지막 수요일엔 무려 '무료' 입장이라던데!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지만 한번 노려볼만 하다고 생각;;)
가나아트센터 4층까지 전시실 네 군데를 빼곡하게 채운 박수근의 그림들은 기대대로 정겨웠고, '예쁜' 그림을 탐닉하는 나는 특히 아직 화강암의 질감이 너무 두드러지지 않고 색채감이 살아있는 초창기의 아련한 그림들이 좋았다. 그 유명한 <빨래터>도 파스텔 톤 저고리 색깔이 예쁜 그림과 무채색 느낌만으로 처리한 작품이 2개더군.
박수근이 같은 주제로 워낙 많은 그림을 그려서 똑같은 제목이 많았다. 박수근 그림 싫어하는 한국사람은 없을 거라고들 하는데, 그 이유는 조부모나 부모의 옛 추억을 공유한 세대에 공통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장 좌판에 바구니를 놓고 앉은 여인들이나 광주리를 이고 나무 아래를 걷는 모습은 어쩐지 딱 우리 할머니의 모습처럼 느껴지고, 상고머리를 한 아기 업은 소녀도 10살 차이 나는 막내 이모 업고 골목길에서 서성대는 울 엄마의 옛모습과 겹쳐지니 말이다.
[노상] 1957년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까지 여전히 쪽머리를 하고 있던 친할머니도 부산 피난시절에 아마 이 그림과 비슷한 모습으로 생선행상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아버지가 평생 등푸른 생선과 멸치 비롯해 비린 생선을 못먹게 된 것도 어쩌면 졸지에 생선장수를 나선 어머니를 마중다니며 비롯된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비린내가 죽도록 싫어서 엄마의 생선광주리를 받아들면 입으로 숨을 쉬면서도, 깜깜한 길 홀로 돌아올 어머니를 매일이다시피 마중나갔다는 열두살 장남의 기특함을 할머니는 평생 나한테 자랑하셨었다.
ㅎㅎ 그건 그렇고 박수근이 주로 그린 노점상은 과일 행상과 소금장수인듯. 아무렴... 생선장수 아줌마는 저렇게 새하얀 치마를 입고 시장에 나갈 수가 없단 말이지! 울 할머니는 몸빼바지에 거무티티한 나이롱(!) 치마를 덧입었다는 것 같다. 어쩌면 <고목과 행인>에 나오는 이런 모습? ㅋ
[고목과 행인] 1960년대
김환기 100주년전에서도 브로셔가 없어서 심술을 부렸었는데, 박수근 100주년전에도 브로셔는 없었다. 무료 브로셔는 관람객들이 휙휙 가져다가 보고 금세 버리기 때문에 안만드는 게 갤러리들의 추세인가? 쳇...
어쨌거나 브로셔 고이 모셔와서 한참동안(어쩔 땐 1년 내내) 벽에 붙여두거나 세워놓고 감상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찌나 서럽고 짜증나는지 원. 3만원씩하는 기념 화집을 대신 사라고 강권하는 것 같아서 계속 툴툴거렸다. 12장짜리 기념 엽서도 낱장으론 안팔아서 선뜻 사기 부담스러운 것도 불만. 몇 개만 골라서 살 수 있게 하면 좀 좋은가! 흥!
게다가 작품 설명에 죄다 작품 제목과 연도만 기록되어 있고 그림 재료에 대해선 설명이 없어, 아니 뭐 이렇게 불친절한 전시가 다 있나 구시렁거리다가 끝내 안내원에게 묻고 말았다. 왜 유화인지, 목탄인지 그런 설명은 안 적혀 있나요?
그랬더니만, 어차피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캔버스에 유화 아니면 종이에 연필 아니면 목탄인데, 워낙 오래된 그림들이라 작품별로 재료를 확실하게 기록해둔 것도 없어서 부러 적지 않았단다. 아... 박수근도 김환기 못지않게 아내와 금슬이 좋긴 했지만, 김환기의 아내 변동림(김향안)처럼 아내가 철저한 매니저 역할까지 한 건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박완서의 소설에도 등장하듯, 박수근은 생활고로 미군PX에서 초상화가로 돈을 벌었고 당연히 화구 구입에 들일 돈이 많지 않았으니 작품 사이즈도 그리 크지 않다. 딱 엽서만한 1호짜리 캔버스에 그린 그림도 여럿 본 것 같다.
[아기 업은 소녀] 캔버스에 유채, 1953년, 28x13cm
어쨌거나 이번 전시를 보면서도 작품을 딱 하나 가져갈 수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그림을 선택할지 쓸데없이 계속해서 고민을 했는데, "당연히 <빨래터>를 가져야지!"라고 하던 일행과 달리 나는 크기도 아담하고 정겨운 <아기 업은 소녀>로 정했다. ^^; 역시나 똑같은 제목으로 여럿이나 되는 작품 중에서 내가 좋아라 하는 <아기 업은 소녀>는 바로 이것.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전시장 밖 포토존에도 저 소녀가 (조악하나마;;) 제작되어 있었다. ㅎㅎㅎ 작품 사진은 못찍게 하니 아쉬운 대로 다른 층 포토존에 마련된 화가와 작품 형상도 찍어왔음.
화가 뒤편 벽에 걸린 그림은 [나무와 두 여인]이다
꽤 많은 작품 이외에도 그림을 팔고 사느라 주고받은 편지며 관련 기사 스크랩, 직접 그린 연하장도 전시장 한쪽 구석에서 소소하게나마 구경할 수 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박수근 본인 입으로도 자기 작품은 소재와 정서로 보나, 화강암의 질감으로 보나 서양화가 아니라 한국화라고 했단던데(정확한 말인지 벌써 가물가물, 암튼 뭐 이 비슷한 맥락이다;; ㅎㅎ) 그 말이 딱 맞다. 고향인 양구에 박수근 미술관이 있다니, 진품이 늘 상설 전시되고 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또 박수근의 그림이 그리워지면 언제 한번 가보고 싶다고 느꼈다. 전시장 곳곳에 박수근을 회고하는 박완서의 글귀가 있기도 했지만, 박수근과의 일화를 소설로 엮은 <나목>도 한번 더 읽어봐야 하려나...
어젯밤 취침 전에 읽은 책 내용 때문인지, 방학을 맞은 조카가 다니러 와 동침이 불편했는지, 암튼 아주 찜찜한 꿈을 꾸었다. 여러 사람의 죽음과 시신들을 둘러싸고, 통곡과 행패와 분란이 난무하는... 꿈속의 꿈까지. 어떤 이(최측근)의 시신이 미라처럼 붕대로 친친 감겨 누워있는데, 내가 그럴 리 없다고 막 행패를 부리며 옆에 누워 막 미라를 흔들었더니 점점 줄어들어 헝겊인형이 되었다. 안도하는 순간 그게 꿈속의 꿈이었고, 또 다른 장례식장으로 배경이 이어졌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게 어떤 건지 단번에 경험할 수 있는 꿈이랄까. 흐억흐억 우는 느낌으로 온몸에 힘을 주다 퍼뜩 깨어나선 꿈이라 다행이다 싶으면서, 혹시라도 어떤 징조이면 어쩌나 염려가 들었다. 물론 난 현몽이나 예지몽 따위를 꾸는 사람이 아니지만.
게다가 어제는 온종일 밤까지 자꾸 눈이 내렸고 기온이 내려가 길이 얼어붙었고, 하필 대비마마는 오늘 아침부터 병원 예약에다 점심 모임까지 홀로 바쁘신 날이었다. 한달에 한번 가는 대학병원 정기검진 때는 내가 안 쫓아다닌지 어언 몇달. 왜 노친네 외출하는 날 눈이 오고 난리! 어제부터 걱정스러워 몇번이나 나가 마당과 골목길을 쓸고 염화칼슘을 뿌려놓고도 마음이 안놓여, 아침에도 조바심을 내며 정말 혼자 가실 수 있겠나 다짐을 받았다. 조카녀석이 자고 있으니 후딱 모셔다 드리거나 따라갈 수도 없고...
내다보니 길 다 녹았다며, 조심해서 다닐테니 염려 말라는 노친네, 병원에 도착하면 전화하시라 하곤 안절부절 기다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신촌 버스정류장에서 넘어지셨단다. ㅠ.ㅠ 다행히 어디 부러진 데는 없고 넘어지며 짚은 손목이 약간 아프시다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정형외과 들러 압박붕대 감고서, 전철타고 모임장소 가신다기에 그런줄만 알았더니...
압박붕대로 감아놓은 오른손이 팅팅 붓고 시퍼런 멍이 점점 손가락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고, 숟가락을 쥐거나 물건을 들 수도 없는 상태였다. 저녁이 되면서 붓기는 점점 더 심해지고 팔을 내리고 있으면 아프다기에 스카프로 팔을 매달아드려야했다. 고관절을 다쳤거나 뇌진탕에 걸렸으면 어쩔뻔 했느냐고, 이만하기가 천만다행이라며 배시시 웃는 초긍정 노친네에게 나도 맞장구를 치기는 했지만 내 잘못이 아닌데도 속이 쓰리다. 어쩐지 어젯밤 꿈이 좀 찜찜했다는 내 말에, 노친네는 그럼 꿈땜한 거라고. 정말 간단하게 꿈땜으로 넘어가는 건지는 내일 다시 병원에 가봐야알겠지만... 앞으로 길 미끄러운 날엔 제발이지 집에서 꼼짝도 마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