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마지막에 본 전시가 김환기였다면, 2014년 들어 처음 본 전시는 박수근.

 

동시대 화가이다보니 탄생 연도가 한해 차이였고 당연히100주년 기념전도 나란히 붙어 열렸다.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근현대회화 100선에도 박수근 그림이 몇 개 포함되어 있었지만, 위작 논란에도 휩쓸렸고 최고 경매가를 기록한 <빨래터>를 비롯해서 내가 제일 탐내는 <아기 업은 소녀> 그림까지 모조리 한꺼번에 구경할 기회를 그냥 넘길 순 없지. 스케치 포함 작품 수가 120점이나 된대고, 그 중 유화만도 90여점이라 몇년전 45주기 회고전 때보다 훨씬 대규모다.

 

3월 16일까지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하고, 입장료는 만원. 월요일은 당연히 휴관인줄 알았는데 전시기간 중 무휴라고 하고, 매주 수요일엔 오후 9시까지 관람가능하단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도 수요일엔 늦게까지 열고 매월 마지막 수요일엔 무려 '무료' 입장이라던데!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모르지만 한번 노려볼만 하다고 생각;;)

 

가나아트센터 4층까지 전시실 네 군데를 빼곡하게 채운 박수근의 그림들은 기대대로 정겨웠고, '예쁜' 그림을 탐닉하는 나는 특히 아직 화강암의 질감이 너무 두드러지지 않고 색채감이 살아있는 초창기의 아련한 그림들이 좋았다. 그 유명한 <빨래터>도 파스텔 톤 저고리 색깔이 예쁜 그림과 무채색 느낌만으로 처리한 작품이 2개더군.

 

박수근이 같은 주제로 워낙 많은 그림을 그려서 똑같은 제목이 많았다. 박수근 그림 싫어하는 한국사람은 없을 거라고들 하는데, 그 이유는 조부모나 부모의 옛 추억을 공유한 세대에 공통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장 좌판에 바구니를 놓고 앉은 여인들이나 광주리를 이고 나무 아래를 걷는 모습은 어쩐지 딱 우리 할머니의 모습처럼 느껴지고, 상고머리를 한 아기 업은 소녀도 10살 차이 나는 막내 이모 업고 골목길에서 서성대는 울 엄마의 옛모습과 겹쳐지니 말이다. 

 

[노상] 1957년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까지 여전히 쪽머리를 하고 있던 친할머니도 부산 피난시절에 아마 이 그림과 비슷한 모습으로 생선행상을 하지 않았을까. 나의 아버지가 평생 등푸른 생선과 멸치 비롯해 비린 생선을 못먹게 된 것도 어쩌면 졸지에 생선장수를 나선 어머니를 마중다니며 비롯된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 비린내가 죽도록 싫어서 엄마의 생선광주리를 받아들면 입으로 숨을 쉬면서도, 깜깜한 길 홀로 돌아올 어머니를 매일이다시피 마중나갔다는  열두살 장남의 기특함을 할머니는 평생 나한테 자랑하셨었다.  

 

ㅎㅎ 그건 그렇고 박수근이 주로 그린 노점상은 과일 행상과 소금장수인듯. 아무렴... 생선장수 아줌마는 저렇게 새하얀 치마를 입고 시장에 나갈 수가 없단 말이지! 울 할머니는 몸빼바지에 거무티티한 나이롱(!) 치마를 덧입었다는 것 같다. 어쩌면 <고목과 행인>에 나오는 이런 모습? ㅋ

 

[고목과 행인] 1960년대

김환기 100주년전에서도 브로셔가 없어서 심술을 부렸었는데, 박수근 100주년전에도 브로셔는 없었다. 무료 브로셔는 관람객들이 휙휙 가져다가 보고 금세 버리기 때문에 안만드는 게 갤러리들의 추세인가? 쳇...

어쨌거나 브로셔 고이 모셔와서 한참동안(어쩔 땐 1년 내내) 벽에 붙여두거나 세워놓고 감상하는 나 같은 사람은 어찌나 서럽고 짜증나는지 원. 3만원씩하는 기념 화집을 대신 사라고 강권하는 것 같아서 계속 툴툴거렸다. 12장짜리 기념 엽서도 낱장으론 안팔아서 선뜻 사기 부담스러운 것도 불만. 몇 개만 골라서 살 수 있게 하면 좀 좋은가! 흥!

 

게다가 작품 설명에 죄다 작품 제목과 연도만 기록되어 있고 그림 재료에 대해선 설명이 없어, 아니 뭐 이렇게 불친절한 전시가 다 있나 구시렁거리다가 끝내 안내원에게 묻고 말았다. 왜 유화인지, 목탄인지 그런 설명은 안 적혀 있나요?

그랬더니만, 어차피 박수근 화백의 작품은 캔버스에 유화 아니면 종이에 연필 아니면 목탄인데, 워낙 오래된 그림들이라 작품별로 재료를 확실하게 기록해둔 것도 없어서 부러 적지 않았단다. 아... 박수근도 김환기 못지않게 아내와 금슬이 좋긴 했지만, 김환기의 아내 변동림(김향안)처럼 아내가 철저한 매니저 역할까지 한 건 아니었겠구나 싶었다. 박완서의 소설에도 등장하듯, 박수근은 생활고로 미군PX에서 초상화가로 돈을 벌었고 당연히 화구 구입에 들일 돈이 많지 않았으니 작품 사이즈도 그리 크지 않다. 딱 엽서만한 1호짜리 캔버스에 그린 그림도 여럿 본 것 같다.

[아기 업은 소녀] 캔버스에 유채, 1953년, 28x13cm

어쨌거나 이번 전시를 보면서도 작품을 딱 하나 가져갈 수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그림을 선택할지 쓸데없이 계속해서 고민을 했는데, "당연히 <빨래터>를 가져야지!"라고 하던 일행과 달리 나는 크기도 아담하고 정겨운 <아기 업은 소녀>로 정했다. ^^; 역시나 똑같은 제목으로 여럿이나 되는 작품 중에서 내가 좋아라 하는 <아기 업은 소녀>는 바로 이것.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전시장 밖 포토존에도 저 소녀가 (조악하나마;;) 제작되어 있었다. ㅎㅎㅎ 작품 사진은 못찍게 하니 아쉬운 대로 다른 층 포토존에 마련된 화가와 작품 형상도 찍어왔음. 

 

화가 뒤편 벽에 걸린 그림은 [나무와 두 여인]이다

 

꽤 많은 작품 이외에도 그림을 팔고 사느라  주고받은 편지며 관련 기사 스크랩, 직접 그린 연하장도 전시장 한쪽 구석에서 소소하게나마 구경할 수 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박수근 본인 입으로도 자기 작품은 소재와 정서로 보나, 화강암의 질감으로 보나 서양화가 아니라 한국화라고 했단던데(정확한 말인지 벌써 가물가물, 암튼 뭐 이 비슷한 맥락이다;; ㅎㅎ) 그 말이 딱 맞다. 고향인 양구에 박수근 미술관이 있다니, 진품이 늘 상설 전시되고 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또 박수근의 그림이 그리워지면 언제 한번 가보고 싶다고 느꼈다. 전시장 곳곳에 박수근을 회고하는 박완서의 글귀가 있기도 했지만, 박수근과의 일화를 소설로 엮은 <나목>도 한번 더 읽어봐야 하려나...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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