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따리'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09.03.27 담백하다/담박하다 23
  2. 2009.03.14 욕먹을 두려움 21
  3. 2009.02.05 금기 14
  4. 2009.01.04 내 인생의 책 14
  5. 2008.12.31 2008년에 읽은 책 25
  6. 2008.09.10 혁명의 매력 10
  7. 2008.06.30 본전치기 10
  8. 2008.05.27 책구경 15
  9. 2008.04.15 피해야 할 번역투 표현 15
  10. 2008.02.16 주종목 19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고, 낙서장에 가까운 블로그지만 담백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뜻과 속속들이 맞는지 궁금해져 사전을 찾아보니, 또 하나 배우게 됐다.
<담백하다>는 원래 담박(淡泊)하다에서 나온 거란다.
1.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
2. 아무 맛이 없고 싱겁다.
3.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 
사전에 <담백한 글>이라는 용례는 없지만, 담백함의 반대말은 느끼함이라고 내 맘대로 생각하며 글에도 비유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련다.

요 며칠 또 괜히 머리가 시끄러워서 잠도 잘 안오는 밤과 새벽 머리맡에 책을 쌓아두고 정서불안 환자처럼 이 책 저 책 들춰보다가 느낀 게 있다. 나도 접속사로 연결된 복잡하고 긴 문장을 습관적으로 많이 쓰는 편인데, 확실히 간결한 문장이 더 설득력있고 마음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 문장이 긴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유려한 글쓰기를 하는 이들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은 호흡이 길어지면 시선과 이해력이 흐트러져 다시 되돌아가야할 때가 많다. 특히 요즘의 나처럼 정신 시끄러울 때 하는 독서의 경우는 더더욱. 거기다 젠체 하는 거들먹거림까지 버무려진 느끼한 글을 만나면 아예 참을 수가 없다.
어디선가 소개글을 보고 한번 읽어보고는 싶은데 내 돈주고 사기는 아까운 책이라 마침 그 출판사에 다니는 지인에게 한권 얻어놓은 책이 있었다. 이참에 한번 읽어볼까 싶어 몇달만에 드디어 들춰보려니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무거운 주제도 아니고, 인간의 <쇼핑> 욕망에 대한 잡다한 단상을 적은 것임에도 그렇더라. 조사와 접속사 빼고는 죄다 외래어인 패션잡지를 멀미나서 잘 못 읽는 나의 개인취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유없이 거슬리는 꼭지들을 건너뛰어 뒷장으로 넘어가도 문장들이 딴죽을 걸듯 자꾸 턱턱 걸렸다. 어찌나 멋을 부리셨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패션전문가의 손을 빌려 꾸미고 명품으로 휘감았는데, 진품인지 모조인지 구분하기는커녕 명품 브랜드에 무지한 나는 그게  명품인줄도 모르는 격이랄까. 아니지, 내눈엔 진짜도 죄다 가짜로 보인다는 게 더 맞겠다.
아무튼 결국 난 그 책 읽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다 읽진 못했어도 나도 쓸데없이 기교와 멋부리는 문장은 쓰지 말아야한다는 교훈을 주었으니 그마저도 성공적인 독서라고 할 수 있으려나. ㅎ

상대적으로 수전 손택, 서경식의 글과 생각들은 어찌나 명징(나는 이 단어가 참 좋다!)한지 하나같이 밑줄 그어 두고 싶은 주옥같은 표현이다. 우리말로 옮긴이들의 공도 당연히 있겠지만 저들은 삶부터 겉치레 따위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원래 글도 담백하고 간결했을 거라 믿는다. 
한 두어달 일은 관두고 장서욕심에 사두고 밀린 책들이나 죄다 읽으면 좋겠건만 마음만 바빠서 독서도 초조한 메뚜기처럼 자꾸 이 책 저 책 옮겨다니게 되니 어쩌면 좋으냐. 으휴. 하기야 그런 욕심을 품으면 담백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건가? 이래저래 딜레마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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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을 두려움

책보따리 2009. 3. 14. 16:31

실제로 욕하는 사람들과 대면할 일은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긴 하지만 번역가 역시 대중에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직업이기에 어느 정도 욕 먹을 각오는 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요즘처럼 검증과 검색 수준이 뛰어난 독자들을 상대로는 더욱 그렇다. 나 역시 과거에 번역서들을 읽으며 통 내용 이해가 잘 되지 않거나 문장 호흡이 길어 심히 얽힌다 싶으면 <번역이 뭐 이따위야!> 또는 <번역이 엉망이군>이라는 말을 아무 생각없이, 수없이 외쳤던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지금도 내노라하는 이름난 번역가들이 옮긴 책에서도 혹시 제자를 대리 번역시켰나 싶은 의혹이 드는 이상한 문장이나 비문을을 발견하는 일이 더러 있을 정도이니 오죽하랴.

어차피 입맛 다양한 독자들을 일일이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번역문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로 위로를 삼기는 하지만, 굳이 지난번 시리즈물 번역건으로 속쓰렸던 일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특히 잘 팔렸으면 싶은 책이거나 잘 팔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책의 경우는 욕먹을 두려움 때문에라도 점점 최종 원고를 넘기는 일이 망설여진다. 물론 그래야 번역의 질이 높아지고 더 정성들인 문장이 태어날 터이니 나에겐 도움이 되는 고민이긴 한데, 아무리 고민을 해봤자 딜레마는 깊어만 간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과거 출판사들은 대부분 독자들을 위해 가독성이 뛰어난 매끄러운 번역문장을 선호하여 너무 복잡한 문장은 번역이나 편집 단계에서 <알아서> 정리했지만 최근들어선 가독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원문의 문체와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번역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쉽게 술술 잘 읽히는 문장만이 능사는 아님을 책만드는 사람들도 책 읽는 사람들도 깨닫기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나 역시 골머리가 썩을지언정 쉽게 번역하자고 대여섯줄씩 이어지는 복잡한 문장을 생선 토막치듯 난도질해 편히 옮기는 것보다는 기필코 유려하게 원문과 <최대한> 유사한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고 나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걸 더 즐기는 편이다. 복잡한 만연체로 쓴 작가의 작품을 선택해 읽는 독자라면 호흡이 더뎌 진도가 느리더라도 문장을 곱씹어 읽는 정도의 수고는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글을 다듬는 과정을 <윤문>이라고 하는데, 번역서의 경우 윤문의 정도가 얼만큼이 적당한지, 원작 훼손과 가독성의 문제를 어느 정도까지 양보를 할 수 있을 것인지의 논란은 아마도 인류가 다른 언어권의 책을 읽어대는 행위가 끝나지 않는 한 영원히 지속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옷을 바꿔입으면서 이미 원전은 훼손을 피할 수 없지만, 그 훼손의 정도를 최소로 줄여 전달하는 것이 번역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할 때 번역가의 존재는 눈에 띄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은이와 독자 사이의 소통에 옮긴이의 개입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독서를 이끄는 번역. 냄새 고약한 정로환에 분홍색 껍질을 입혀 냄새를 없앤 정로환 당의정 같은 느낌의 번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약효는 똑같으니 본질은 같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겠지만, 일단 다른 언어로 먼저 쓰인 책을 만들고 읽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거북한 냄새가 나는 정로환은 냄새 나게, 달콤하고 알록달록한 새알 초콜릿은 또 그렇게 경쾌하고 달콤하게, 번역가도 편집자도 독자도 그대로 인정하고 삼킬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내 경우도 이 생각은 어디까지나 내가 번역작업을 하며 목표로 삼는 <이상>일 뿐, 현실에선 끊임없는 유혹을 느낄 때가 많다. 이왕이면 좀 더 그럴듯하게 유려하게 문장을 다듬고 싶은 유혹. 읽다가 턱턱 걸려서 짜증났던 과거의 수많은 번역서 독서 경험도 원인으로 작용했겠고, 일단은 쉽게 풀어 독자 입에 쏙 넣어주는 매끄러운 번역을 선호했던 과거의 번역경향에 이미 내가 꽤 길들여진 탓도 있을 것이다. 다행히 원문이 워낙 유려하다면 오히려 그 느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할까 염려해야 하는 형편이니 더욱 공을 들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원문이 의도적인 비문이라면?

이번에 번역한 책이 그랬다. 중국인 지은이가 <고의로> 서툰 영어로 쓴 일기식 소설. 초반부엔 완전한 문장이 단 한줄도 없는 단어의 나열이고, 맞춤법을 틀리게 쓰는 건 유머스러운 애교 수준이었으며 중반 이후에도 주어와 동사가 마구 생략되거나 시제는 무시되었다. 물론 처음엔 재미있는 작업이라 여겼고, 점점 문장력이 향상되는 지은이의 글쓰기 과정을 독자들도 생생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원전의 비문을 온전한 문장으로 만들려는 관성 같은 것이 되살아났고, 몇번이나 서술어를 지우고 다시 눈에 거슬리게 비문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출판사 및 담장자와 의논하여 결정한 번역방향이기도 했고, 그 책의 독특한 특징이므로 옮긴이로선 당연히 지켜야할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_-;; 그렇게 어렵사리 고민하고 넘긴 원고가 교정지 형태로 다시 되돌아온 지난주 내내 나는 역자교정을 하며 새삼 두려움에 떨었다. 책속의 수많은 비문과 불온전한 문장, 서툰 글쓰기와 표현을 과연 독자들이 순순히 원전 때문이라고 여길 것인가? 아니면 옮긴이의 역량부족이라고 불평하며 짜증이 나서 책을 집어던질 것인가?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하마터면 역자후기에 수많은 비문과 서툰 글쓰기 및 표현은 지은이의 의도이니 옮긴이의 책임이 <절대> 아니라고 티나게 유치한 변명을 적어넣을 뻔했다가 참았다. 욕을 할테면 하라지. 나만 떳떳하면 되는 거니까, 라고 마음을 다잡고는 있는데 그래도 슬며시 되살아나는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다. 욕 먹는 거 너무 싫은데. 온당한 욕이라면 발전의 밑거름이라도 삼겠지만, 부당한 욕은 나같은 소심생이 투덜이에겐 큰 상처와 좌절을 남긴다. 잘해야 본전인 번역 인생에서 앞으로도 욕 먹을 일은 수없이 많을 텐데 햇수가 거듭될수록 대범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고민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나마 발전적인 고민이라고 새삼 위로를 하고는 있지만, 이 책 잘 팔렸으면 좋겠는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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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책보따리 2009. 2. 5. 23:05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주변 어른들에게 퍽 인상적인 충고를 들은 적이 있다.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고 싶다면 세 가지 화제를 금하라는 것.
정치, 종교, 출신지.
시국이 어지러웠던 대학시절 정치는 곧 현실인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직장인으로 탈바꿈한 순간 정말로 정치 문제는 어디서든 섣불리 꺼내드는 순간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나타내거나 끝없고 피곤한 논쟁을 일으켰다.
종교와 출신지 문제도 마찬가지. 드디어 호남 출신의 대통령이 배출되긴 했어도 여전히 뿌리 깊은 지역감정은 쉽사리 치유될 수 없는 뜨거운 감자 같은 느낌이었다.
종교색이 그리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미국회사라며 누군가 재치기를 하면 옆에서 꼭 "Bless you!"(신의 가호를 빈다고??)라고 해주어야 예의바른 것이라는 양 행동하는 직원들과 한국말을 하다가도 걸핏하면 "Oh my God!"이라고 추임새를 넣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일년에도 몇번이나 엄마따라 절에 간다는 사실을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세 가지 금기는 아직도 쓸모있게 통용되는 대인관계의 비법인 것도 같다. 섣불리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없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입장이 아니고선 상대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우니까.
특히나 종교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불교니, 천주교니, 기독교니 선택을 하기는커녕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애매한 불가지론자인지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언젠가 내 블로그에 들렀던 막내동생이 "누나 요새 너무 정치적인 거 아니야?"라고 언급해서 뜨끔했을 정도로 
가끔 이곳에 못마땅한 정치에 대한 나의 푸념을 늘어놓긴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약간은 조심스러우며,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괜히 금기를 깨뜨린 건 아닌가 염려스럽다. 
그러지 말아야지 내심 다스리고는 있지만, <너무>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심히 드러내는 언사를 일삼는 사람을 보면 나는 덜컥 인간적인 실망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종교란(특히 대부분의 기복종교) 냉철한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합리의 궁극이라 생각되는데, 또 남들은 이런 나의 <비인간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에 새삼 실망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언제부턴가 모든 종교가 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이 여겨졌고 몹시 못마땅했으며, <종교의 자유>를 앞세워 휘두르는 <종교인>들의 권력과 횡포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의 배타성과 일부 인간들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결국 종교 역시 인간들이 필요 때문에 만들어 낸 제도일 뿐이니 종교 자체에 대해서 좋고 나쁨의 판단을 내리는 것도 내 자유라는 결론에 어렵사리 도달할 수 있었다. 
내가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 금기라는 저 세 가지 주제의 구속을 너무 심하게 받은 탓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나마도 얄팍한 지식이나 견해로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나마 있는 정치나 출신지 문제와 달리 신앙과 신의 영역은 워낙 아는 것이 없는 터라 더더욱 피해야 할 부분이었다.

대체로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신앙에 동조할 순 없지만, 각 종교의 배타성에 물들지 않은 공평무사한 교양인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던 것 같다. 엄마 따라 절에 가면 부처가 신인지 아닌지 고민없이 그냥 예를 올리는 차원에서 기도와 절을 했고, 친구 따라 교회나 성당에 가게 되더라도 그들의 신을 믿는다기 보다는 역시 존중과 예의 차원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얄팍하나마 현대 교양인으로서 보여야 할 관용이 아닐까 하면서.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 있다면 혹시 모르니깐 기도는 해보지 뭐. 신실하지 않다고 내 기도는 안들어줄 옹졸한 신이라면 까짓것 나도 상관없어. 싫음 말고!" 정도의 속셈이었달까.

그러던 차에 TV를 보다가 알게 된 책이 <만들어진 신>(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김영사)이었다.
2007년엔가 KBS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졌는데(아쉽게도 내가 애청하던 이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은 최근 폐지됐다) 신의 존재 유무를 하나의 가설로 접근하는 과학자의 논증 방식이 흥미로워 보였다.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작심했던 이 책은 일단 책값이 비싸 매번 온라인 서점에서 쇼핑카트에 담았다가 슬며시 빼놓기를 반복하다가는 우선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는데, 속 표지를 넘기자마자 적힌 글귀부터 쿡 웃음이 나왔다.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 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
- 로버트 퍼시그 -

 맞아, 맞아... 그러면서 읽던 책은 결국 끝을 보지 못하고(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중간에 내가 게으름을 부려서;;) 독촉을 받아 도서관에 반납해야 했지만, 작년 말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주목할 만한 책인가로 다시 소개된 걸 보고는 마저 읽어봐야겠다 싶기도 하고, 내가 몸소 읽어본 바로도 소장해서 두고 볼 값어치를 한다는 결론을 내려 정가 25000원이라는 거금임에도 결국 사들이고야 말았다.
(역시 나는 정말 북리뷰를 못쓰는 게 맞다. 이건 뭐;; 책 구매의 역사도 아니고;;)

리처드 도킨스 본인도 이 책은 신은 있다고 철저하게 믿는 신앙인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어중간한 입장에서 섣불리 속마음을 밝히지 못하는 이들을 목표 독자로 삼는다고 밝혔다는데, 신은 반드시 있다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는 사람들이라면 <신은 없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지은이의 과학적 논증을 제대로 객관적으로 따라갈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유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 즉 모든 세계의 지적인 설계자로서의 신, 초자연적인 지성으로서의 신은 없다는 <과학자> 도킨스의 주장은 나에게 깊은 공감을 끌어냈다.
그 이유는 내가 종교보다 과학을 더 진리를 찾는 도구에 적합하다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이 내게 더 믿음직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치밀한 검증을 추구하지만 스스로 오류나 실패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우리가 우리 믿음을 확인하게 위해 주도면밀하게 실험적으로 되짚어 보다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기꺼이 믿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각주:1] 황 모 박사가 인간의 야망 때문에 사기극을 이어갈 때 거짓을 밝혀낸 이들 또한 과학자가 아니었던가. 심지어 세계적인 지성 호킹 박사도 연구를 거듭하다 자신의 과거 이론에 오류를 발견하면 순순히 인정하고 이론을 뒤집기도 한다. 100퍼센트 확실한 진리가 아니라 현재까지 오류라고 알려진 바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학이므로, 오히려 오류없는 진리와 가치를 지닌 종교보다 못미덥다는 시각도 당연히 존재하지만 꼼꼼한 검증과정을 거쳐 진리라고 <인정된> 수많은 과학적 가설들이 내겐 인류의 초베스트셀러 <성경> 글귀보다 진정성을 갖는다. 지구가 둥글다는 <미친> 가설이 오랜 과학 검증의 역사를 거쳐 급기야 우리는 우주선에서 찍은 동그란 지구의 사진을 보아 진리로 알고 있듯이, 또한 다윈의 진화론이 허무맹랑한 가설이 아니라 확고한 증거를 갖추어 진리로 입증되었음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하듯이.

오래 전 그랜드캐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직 사회 교사였으리라 의심할 할 정도로 쓸데없이 박식했던 여행사 가이드는 그랜드 캐년의 실물을 보여주기에 앞서 우리를 먼저 그랜드캐년의 사계와 생성역사 따위를 담은 영상물 상영관으로 몰아 넣었다. 입체 안경을 쓰고서 마치 실제로 헬리콥터를 타고 협곡 사이를 지나는 양 그랜드캐년 곳곳을 구경하고 난 뒤 드디어 관광 포인트에 사람들을 풀어놓았을 때, 나는 아득히 보이는 드넓은 협곡과 단층의 모습을 보며 퍽 담담했다. 
수십만년(수백만년이던가?) 동안 변한 지표면의 모습이 장엄하기는 했으나, 그것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현상이자 시간이 만들어낸 마술 같은 현실이라 의심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른바 순진한 기독교인들이었는데 그랜드캐년의 가장 넓은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서서 어느 부부는 손을 맞잡고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행하실 수밖에 없는 기적의 현신이라고 말했다. 조금 전 나와 똑같은 영상물을 본 이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들은 겹겹이 쌓인 단층이며 어마어마한 협곡의 깊이가 도저히 <단순한> 지층 부식의 결과일 리 없다고 나를 설득하려 들어 난감했다.
 
내가 보기엔 <만들어진 신>을 읽는 이들의 입장도 그랜드캐년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다.
다윈주의를 출발점으로 하는 논증의 기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과학의 시각에서 도킨스의 논증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종교인의 입장에서 분개하거나.
아무려나 나는 인간이 신을 믿는 게 아니라 <믿음을 믿는다>는 지은이의 주장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상엔 수많은 종교인들과 신을 연구하는 무수한 신학자들이 있어 마치 신의 존재가 당연한 것 같으며,
내 주변에도 직접 신의 목소리로 기도의 응답을 들었다는 신실한 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신이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데 방점을 찍어왔고
그 방점을 좀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데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기여했음은 인정할 수 있다.

존레논의 노래처럼,
천국도 지옥도 국가도 종교도 없다면 인류는 훨씬 더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니깐 그래!

(그나저나 원제는 The God Delusion이다. delusion은 망상의 뜻. 원제가 더 충격이라 <만들어진 신>으로 다듬어진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 더 훌륭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만들어진 전통>의 아류작 같기도 하다. 나 같으면 번역하며 가제를 어떻게 붙였을지 한참 고민하다 머리아파져 관뒀다. 독자로서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더러 번역하라고 했더라면 멀미 깨나 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었겠다. 그야말로 과학 <전문> 번역가이신 옮긴이가 존경스러울 따름) 
  1. [자오선 여행] 16쪽, 쳇 레이모 지음, 사이언스북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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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책

책보따리 2009. 1. 4. 22:16
하루하루 연속되는 날들의 연장이라지만
새해엔 그래도 마냥 투덜거리기만 하는 잡문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책만드는 업계에 한 다리 걸치고 사는 인간으로서 책 관련 포스팅이 제격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힘든 회상이었다.
어쨌거나 블로그 이웃이신 노나또님키드님의 바통을 이어본 내 인생의 책.


기억하고 있는 최초의 책은? 언제, 어떤 책인지? 

대여섯 살 무렵, 버스, 택시, 삼륜차, 케이블카, 비행기 따위의 탈것과 동물, 꽃 등이 소개된 딱딱한 그림책 시리즈다. ^^
우리 삼남매는 그 책을 <읽으며> 놀기 보다는 주로 집을 짓거나 방 한 가운데에 성을 둘러치고 그 안에서 놀았는데, 총 대여섯권쯤 되는 그 그림책은 제법 탄탄하게 생긴 빨간 가방 안에 들어 있어서 다 놀고 나면 큰누나인 내가 낑낑거리며 어렵사리 책을 그 가방 안에 넣느라 애를 먹었다. 
그때만 해도 워낙 옛날이라 책이 꽤 귀했던 것 같은데, 나중엔 그것 말고도 그림책 시리즈가 또 한 질 생기는 바람에 집짓기 재료가 많아져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책 읽는 습관은 어떻게 들이게 됐는지?

취학전부터 책을 줄줄 읽었다는 신동 이웃들도 계시지만, 그 옛날의 나는 7살에 제 이름 석자 쓸 줄 아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이 대견스러워하는 상황이라 연년생 동생과 터울을 두기 위하여 입학식도 못하고 뒤늦게 덜컥 국민학교엘 입학했다. 다른 아이들도 대개 그런 수준이긴 했지만, 할머니와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1학년땐 꽤나 늦된 아이라 칠판에 적힌 알림장 내용을 <적는>게 아니라 <그려> 오느라 다른 애들 청소할 때까지 홀로 책상에 앉아 낑낑대며 베껴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7월생의 아이를 덜컥 입학시켜놓고 담임으로부터 한글 배우기가 늦어 <이해력>이 약간 딸리는 것 같다는 평을 들은 엄마는 뒤늦게 후회를 하며, 큰 마음 먹고 월부로 동화책 전집을 사들였다.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이었다.
각권마다 사전처럼 빳빳한 책껍데기가 갖추어진 양장본에다 빤질빤질한 노란색 표지, 책등이 빨간색인 그 책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나는 수시로 동화책을 꺼내 읽었다. 처음엔 이야기가 짤막한 안데르센 동화, 이솝 이야기 등부터 읽었고 차츰 장편도 무리없이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고학년이 된 후에도, 심지어 중학생이 된 뒤에도 가끔 심심하면 뽑아 읽을 정도로 계몽사 동화전집은 내 유년 독서의 중심이었다.
동화책을 열심히 읽은 덕분인지, 늦된 아이였다가 2학년부터 비교적 우수한 학생의 범주에 속하게 된 맏딸의 선례에 고무된 울 엄마는 어려운 살림에도 간간이 월부로 전집류를 사주셨다. 재미있는 건, 나와 달리 두 남동생들이 독서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특히 큰 동생 녀석은 책읽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동네에 월부 책장사가 나타나면 꼭 우리집으로 데려와 엄마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남들은 대문도 잘 안열어주는 판국에 앞장서서 장사꾼을 데려오는 아들녀석이라니...  워낙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 울 엄마는 동생녀석의 너스레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월부 책을 들일 때도 있었는데, 내 기억으론 굉장히 두꺼운 백과사전 세트(아마도 4권짜리), 위인전집류도 그래서 생겨났던 것 같다.
독서에 맛을 들인 나는 일단 책을 잡으면 옆에서 누가 불러도 모를 만큼 빠져들었다. 엄마가 밥먹으라는 소리도 못 알아듣고, 만날 책만 본다고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땐 밥먹는 것보다 책의 뒷이야기가 정말이지 더 궁금했다.

살면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절은 언제인가?
우습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중학생때인 것 같다.
국민학교땐 집에 있는 서너 질의 전집류를 읽고 또 읽는 반복독서를 했던 반면, 중학생 때는 드디어 학교 도서실 책을 빌려읽기 시작했고 한권에 300원짜리 삼중당 문고판을 골라 사서 읽는 묘미를 알게 되었으며, 친척 중에 출판사에 다니시는 분들이 생겨나면서 세로판형에 글씨도 깨알같은 한국단편문학 전집, 세계문학전집이 생겨났다.
그뿐인가, 나랑 9살 차이인 막내고모가 읽던 <방황의 끝> <풀잎처럼 눞다> 같은 대중소설도 모두 섭렵했고, 일간지에 연재되던 소설들도 악착같이 찾아 읽었다. 너는 아직 어려서 보면 안된다는 고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마음에 꽤나 야하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대중소설을 훔쳐 읽고는 친구들에게 조숙한 척, 어른들의 세계를 다 아는 척 하는 게 재미 있었다.
더욱이 내가 다닌 중학교 국어선생님들이 특이했는지 월말고사 국어 과목에 교과서와 상관없는 필독도서 관련 시험이 세 문제씩 꼭 나왔는데, 책만 읽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시험에 나오는 필독서는 거의 단편소설인데도 아이들은 죽어라 안읽고 시험문제를 찍거나 차라리 컨닝을 시도하는 반면, 나는 해당 단편소설 한편만 읽는 게 아니라 굳이 책 한권을 다 읽느라 오히려 다른 공부를 못하는 형편이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월말고사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어찌나 기쁘던지. 종이는 갱지처럼 싯누렇고 세로판형에 글씨도 작았지만, 표지에 명작 그림이 자랑스레 들어가고 나름대로 책 껍데기(크기만 작았지, 형태는 반양장인 셈이다)도 있었던 삼중당 문고판은 매달 새 책이 몇권씩 나올 때마다 무얼 골라 살 것인가 행복한 고민을 하게 해주었고, 집에 전집으로 있는 책도 굳이 문고판으로 사서 들고 다니면서 읽는게 좋았다. 
김동리, 김동인, 황순원, 염상섭, 나도향을 비롯해 지금은 이름도 가물거리는 근현대작가들의 책을 나는 모두 중학생때 읽었고 순전히 그 때 읽은 <감>으로 대입 학력고사까지 버틸 수 있었을 정도다. 

좋아하는 작가는?
과연 내가 아무 사심과 조건 없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싫증을 잘 내는 편이라 누굴 언급해야 하나 막막하다. 좋아했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존경하지만 종종 너무 어려워서 심술나는 작가도 있으니 원.
마가렛 애트우드는 음울하고 비장하지만 꽤 오래 좋아하는 작가였으나 한동안 멀리했다. 어느 순간 너무 힘들어져서.
제인 오스틴은 번역본으로 읽으면 어쩐지 좀 짜증스러워지는데, 어순도 낯설고 말투가 흥미로운 원서로 보면 시간여행을 하듯 그 때로 되돌아가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된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 
혼불과 최명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에게 우리말과 사투리, 옛말 공부 교과서 같은 존재이지만, 성역화, 권력화된 느낌이 싫어지는 중이다. 책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즐기는 대상이어야 하거늘.  
노엄 촘스키, 마루야마 겐지, 수잔 손택, 강준만은 나의 무지를 일깨워 살살 이끌어주는 선생님 같은 느낌이라 좋으면서 동시에 또 너무 거대하고 종종 어려워서 심술난다.

읽다가 포기했던 책은?
<삼국지>, <존재와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프루스트는 아직 최종적으로 포기는 안했다).  
그밖에 단권짜리들도 읽다 말고 던져둔 책들 꽤 많다. +_+ 과거의 나는 책이 재미 없어도 악착같이 끝장을 내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런 인내와 열정도 사라지더라.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 뉴스를 본 날, 언젠가 사두고 다 못 읽은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고 아직 못 끝냈다.
최근에 독서를 마친 책을 의미하는 거라면 <서울은 깊다>.

내 인생의 책은? 많겠지만 다섯 권 이하로 압축해본다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국민학교 4학년때였을 거다. 활자 빽빽한 동화책과 위인전, 세계명작 전집이 책의 전부인 줄 알던 나에게 친구가 선물했는데 예쁜 그림과 단출한 글귀도 마음에 들었지만, 어린 아이가 서점에 가서 단권으로 책을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그 뒤로 좋아하는 친구에겐 나도 문방구 선물 대신 이 책이나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책을 선물하곤 혼자 뿌듯해 했다. 
<빨간머리 앤>
계몽사의 50권짜리 동화전집 가운데 딱 한권 파본이 있었으니, 바로 <빨간머리 앤>이었다. 잘못된 책을 보낸 뒤 새책을 받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빨간머리 앤>의 내용을 홀로 상상하며  읽고 싶다고 염원하기만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가서 도서실에서 발견한 뒤에야 드디어 읽을 수 있었다. 뒤늦게 읽은 이 책이 어찌나 재미 있던지 책을 훔쳐다가 집에 있는 동화전집 빈자리에 끼워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소심해서 훔치지는 못했지만...  <제인에어>와 함께 중고등학생 시절 나의 단골 반복독서용 책이었다.   
<제인에어>
부모님이 사주신 세계문학전집의 <제인에어>말고도 중학생 때 나는 집에서 또 한권의 <제인에어>를 발견했었다. 그때도 이미 종이가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던 그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 22권으로 1963년 9월에 발행했고 정가가 290원이라고 적혀 있다(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 먼저 읽은 제인에어는 아무래도 청소년용으로 생략된 부분이 있었던 반면, 한 페이지를 상하로 구분해 빽빽하게 세로쓰기로 인쇄된 이 책은 제인과 아델, 소피가 사용하는 프랑스어도 모두 원어로 실리고 주석이 꼼꼼하게 달린 그야말로 <완역본>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너무도 달랐다.
어린 마음에 확실한 이유를 찾아내진 못했지만 막연한 분노와 불편함을 느끼며 못마땅한 구석이 참 많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속상할 때나 화날 때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진정되는 효험이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도, 어른이 된 뒤에도 가끔씩 읽으며 막연한 불편함의 정체를 찾아보려 애를 썼던 것 같은데, 결국엔 20여년 뒤 석사논문을 제인에어로 쓰게 되더라. 
<혼불>
고등학교때 막연하게 대학엘 가면 국문학을 전공해야지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국어선생들을 좋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때 내가 따르던 국어선생님이 은사님이 쓴 책이라며 <혼불> 1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대보름날 달맞이 하는 장면의 묘사부터 무척이나 매혹적이었고, 종종 국어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순우리말 낱말들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나도 순우리말을 자유자재로 쓰는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했으며 더불어 국어공부에도 자극제가 되었다. 
<태백산맥>
당시 대학생에게 강요되는 사회과학 서적들에 대해 나는 묘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알아야 하는 진실이기는 하지만, 이북 출신에다 빨갱이라면 서슬이 퍼래지시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향 때문인지 '용공불순서적'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금서들이 불편해서 외면했다고나 할까. (80년대 중반 웬만한 사회과학서적은 전부 금서였다^^) 그런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렇게 긴 대하소설인줄도 모르고 한권한권 눈빠지게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헐레벌떡 밤새 읽곤 했는데,태백산맥을  몇권 읽고 나자 그제야 <해방전후사의 인식> 같은 책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음 권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공부하듯 관련 역사책을 찾아읽으며 뒤늦게 정치와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으니, 나에겐 다른 독서를 이끄는 좋은 책이었다.

좋아하는 구절을 한 구절만 소개해 달라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기록을 하는 습관도 없고 기억력도 나쁜 허당이라 슬프다.
그나마 오래 전 미니홈피 대문에 남겼던 글귀가 있어서 옮겨 적는다.

"네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오늘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 마루야마 겐지 <천년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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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 읽은 책

책보따리 2008. 12. 31. 21:18

블로그 이웃들이 한해를 갈무리하는 모습 가운데 작년에 제일 부러웠던 게 읽은 책들을 나열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리뷰를 올리시는 분들의 글을 읽고 뒷북치듯 더러 책을 사 읽기도 했지만 
내 경우  읽다 팽개친 책과 오래 전 사둔 책과 새로 산 책들이 서로 뒤엉켜 도저히 한해의 독서 목록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숙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올해 가을 본의 아니게 작업실을 정리하면서 책정돈을 할 일이 있었던 덕분에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고 순전히 탐서용으로 아무렇게나 사들여  되는 대로 꽂아두기만 했던 책과 출판계 지인들이 준 책들을 따로 꽂아두면서 틈틈이 일과 상관 없는 독서열을 높여보려고 애를 썼다.
다른 분들의 책 리스트를 보면서 과연 나도 올해는 정리가 되려나 책꽂이를 살펴보니, 여전히 다 못 읽은 책과 손도 안 댄 책들이 나를 째려보고 있긴 해도 올해 새로 읽은 책들은 기특하게도 대부분 한군데 몰려 있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결과는 꽤나 흡족하다. 책 사는 건 좋아해도 읽는 건 등한시 하는 게으름뱅이로서 작년에 반성하며 내가 세운 목표는 평균 <1달에 책 1권 읽기>였는데, 목표를 초과달성했기 때문이다. ^^
빌려준 책도 몇 권 있을 것을 감안하면 더 될 지도 모른다!
책이 열두권 안되면 일 때문에 읽은 참고서도 포함시킬까 고민했을 텐데, 안 그래도 돼서 어찌나 기쁜지. 
내년엔 책으로 밥 벌어먹는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도록, 좀 더 많이 읽었다고 자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 하나 책 몇 권 더 읽는다고 과연 해마다 사상 최악 불황의 늪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출판계가 반짝 되살아날 리 없겠지만, 좋은 책 만드는 사람들은 이 위기를 잘 버텨내길 빌어본다.


자전거 여행. 김훈 지음. 생각의 나무 - 느루 장만 후 호기롭게 사들였는데, 자전거 얘긴 거의없는 국토순례
오기사, 여행을 스케치하다. 오영욱 지음. 예담. - 역마살 도질까봐 여행기 잘 안읽는데 글이 짦아 좋더라 
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창비 - 재미있게 본 것 같긴 한데 이상 얘기 빼고 기억 잘 안남.  
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 작년부터 질기게 오래 읽었다. 보통은 당분간 사절.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백영옥 지음. 위즈덤하우스. - 상 탄 작가래서 읽어보고 화났음.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퀴어이론문화연구모임 WIG 지음. 사람생각 - 루인님이 공동 집필한 책 !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돌베개 - 올해 꽤 여러번 읽고 반성하고 생각했다.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알마 - 기자가 쓴 가벼운 근현대사 산책
서울은 깊다. 전우용 지음. 돌베개. - 상대적으로 위 책보다 훨씬 깊고 알차고 재미 있다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김영사 - 이런 거 읽어도 글쓰기는 늘 어렵더라
뉴요커. 박상미 지음. 마음산책. - 뉴욕에 대한 괜한 그리움을 현실로 잠재워주는 책
취향. 박상미 지음. 마음산책 -  내 취향엔 너무 고급인 듯. 어려워서 심술났다.
젊은 천사. 김원우 지음. 세계사 - 느리게 읽어야 하는 책. 가끔 이런 글 읽어줄 필요가 있다.
혜초. 김탁환 지음. 민음사 - 굴러다니던 책인데 일하기 싫은 어느 날 읽고 불교역사 공부가 땡겼다.
아름다운 밤하늘. 쳇 레이모 지음. 김혜원 옮김. 사이언스북스 - 여행지의 빽빽한 별이 그립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 시공사 - 못간 유럽여행 대신;;
소박한 정원. 오경아 지음. 디자인하우스 - 마당 염원 때문에 읽으며 행복했다
오늘도 집밥. 서나형 지음. 브레인스토어 - 해리님 꼭 2쇄, 3쇄 성공하시길 ^^
커피홀릭's 노트. munge 지음. 예담 - 커피 아마추어에겐 심심풀이로 딱이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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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매력

책보따리 2008. 9. 10. 23:12
세계사에 몹시 취약한 내가 요즘 어쩔 수 없이 러시아 혁명사를 공부하고 있다.
1년 넘게 미루고 미뤄두었던, 볼셰비키 혁명부터 세계 1차대전에 이르는 대하소설을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작업은 멀미나게 힘들고 온종일 용을 써도 진도는 눈곱만큼씩 나가는 중이라 앞이 캄캄하다.
그런데 나 같은 무식쟁이에게도 러시아 혁명의 역사는 몹시 매력적이다.
물론 비러시아인의 비판적인 사관으로 쓰인 책과 트로츠키 같은 혁명의 주동 인물이 기록한 책은 느낌이 전혀 다르고, 양쪽의 견해를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순수한 의미의 인민 혁명은 결국 불가능하다는 허무한 결론에 도달하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혁명은 (유혈폭력을 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유혹적인 변화의 시도인가.

혁명을 꿈꾸었던 수많은 역사적 인물과 실패를 맛본 인간들의 기록을 들여다보며 갑자기 혁명가를 만나고 싶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온종일 했다.
세상은 늘 혁명가가 필요한 냄새나는 부패를 떠안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엔 혁명가도 늘 부패하거나 권력에 숙청당하는 역사가 반복되긴 했지만
퇴폐 낭만주의에 빠지거나 말거나, 아무리 봐도 '혁명'은 참 멋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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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전치기

2008. 6. 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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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구경

책보따리 2008. 5. 27. 16:13
언뜻 떠오른 글의 제목으로 <난산>이라고 적으려다가 말았다. 가끔 자기 책을 자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책 한권 나오는 과정에 어찌 감히 생명의 신비와 어미와 자식 간의 오묘한 공감대까지 끌어다 붙일 수 있겠나 싶어서.
어쨌거나 <난산>이라는 말이 떠올랐다는 얘기는 요즘 내가 옮긴 책구경 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 원래 출판이라는 것이 시의적절한 것 같아 기획했다가도 교묘한 <타이밍>을 놓치면 아예 통째로 엎어지기도 하고, 시리즈로 기획했다가 초반에 생각만큼 판매가 되지 않으면 뒤에 만들려던 책들은 다 준비해 놓고도 마냥 썩히기 일쑤이며, 저자나 번역자가 속을 썩이며 원고를 넘기지 않아 질질 출간이 지연되는 예도 허다하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출간이 미뤄지거나 영업전략상 출판 순서가 뒤바뀌는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자 입장에서 제 아무리 성실하고 부지런히, 꾸준하게 번역을 해도 어떤 해엔 책이 가뭄에 콩나듯 두어 권 나오다 말더니 그 다음해엔 한꺼번에 여기저기 출판사에서 마구 쏟아져 나와 한달에 한꺼번에 세권이나 신간코너에 내 이름이 박힌 책이 깔릴 때도 있었다.

작년엔 개정판으로 다시 나온 2권 말고 새로 작업한 번역서는 겨우 2권이 출간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사정이 있어 하반기엔 일을 거의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이번에 세금정산 때문에 작업 스케줄을 확인하니 놀랍게도 2007년 1년 동안 번역을 완성해 넘긴 원고가 5권이나 되었다. 개인적으로 생계유지를 위한 1년 번역 목표량을 6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5권이면 얼추 목표를 달성했다는 뜻이다.
작년에 출간된 2권 가운데 하나는 그나마도 재작년에 작업한 책이었으니, 작년에 일해서 제대로 빛을 본 책은 달랑 1권. 4권의 책은 세상구경을 할 날이 2008년으로 넘어갔다는 얘기인데, 연초부터<곧> 출간할 계획이라던 두어 권의 책들은 차일피일 편집이 미뤄져 얼마 전 들으니 6월에나 나온다는 것 같다(그 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나와야 나오는 거지 뭐. -_-;;)

결론은 5월이 다 가도록 2008년도엔 버젓이 옮긴이로 내 이름을 달고 출간된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점.

기획이 아예 엎어져 원고가 사장되는 경우(심하면 원고료를 홀라당 떼먹히기도 한다 ㅠ.ㅠ)도 겪어 보았기에, 일단 원고를 넘기고 번역료까지 챙겨받고 나면 책이 나오든 말든 내 소관이 아니라 여기며 모른체 하고 싶지만 사람 마음이 또 그렇지가 않다. 편집자의 교정과 표지 디자이너의 정성스런 손길을 거쳐 떡하니 책으로 인쇄되어 세상에 선을 보여야 그간의 모든 노고와 정성이 제대로 보답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들이는 품과 에너지와 정성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 출판계의 번역료 수준은 그리 후한 게 아니므로 나처럼 부끄러운 공명심으로 그 모자란 성취감을 채우려는 인간은 해마다 내 이름을 달고 차곡차곡 늘어나는 번역서의 권수가 꽤나 중요하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더러 모이는 자리가 생기면 우리나라도 얼른 일본처럼 출판계가 발전하여 매절 번역료가 원고지 장당 최소 만원은 돼야 한다고 별 희망도 없는 이야기로 핏대를 세우기도 하는데, 정말로 그런 날이 오지 않는 한 생계를 위해서라도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려는 나 같은 치졸한 번역가의 욕심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ㅎㅎ

어쨌거나 새해 들어서도 내내 작업은 늘어지기만 하여, 책구경 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로 원고 넘기기도 죽도록 힘들어 허덕이고만 있었는데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무려 4년전에 한두 꼭지 번역에 참여했던 문학선집이 드디어 출간된다는 것. 교수님 소개로 얼떨결에 맡는 바람에 당연히 주최측도 아니었고, 그간 통 소식이 없어서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에 책이 출간된다는 것만으로도 기쁜데,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료와 해설료도 지급되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것인데도 어찌나 고마운지 내심 몹시 뿌듯해 하며 이제나 저제나 책구경 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더니 오늘 증정본이 배달되었다. ^^;;

신비주의 블로그를 표방하는 터라 이곳에 본격적으로 책자랑을 할 날은 요원하리라 생각하지만, 이 책은 공역이니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리도 없고 ^^ 문학선집이라 작가들도 십여 명이어서 옮긴이들 이름은 아예 표지에서 구경도 할 수가 없으니 막 자랑하고 싶어졌다. 일반 서점에서도 판매가 될 책인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도서관에나 보급될 확률이 높은 듯하고, 엮은이의 이름도 하도 거창하여 공동 번역자 이름으로 검색될 가능성도 별로 없을 듯하니 더더욱 금상첨화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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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로그 첫 화면에 떡하니 사진들이 떠 있으니 마치 속옷 삐져나온 채로 앉아 있는 기분이 들어서 영 불편했다. -_-;; 남들은 사진으로만 블로그를 잘도 채우던데 역시 나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 아닌 모양이다. 어느 전직 교수의 번역을 못마땅해 하시는 키드님의 글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급조의 느낌이 나더라도 퍼뜩 생각난 자료를 <퍼다가> 정리하기로 했다. 블로그 시작할 때 <펌질> 역시 지양하기로 한 터라 이것도 불편해서 얼른 딴 글로 내릴지 모르겠다. 그저 소심한 인간의 발악이라고 여겨주시길)


쓰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번역을 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기계처럼 돌변해 상투적인 번역투의 표현들을 남발할 때가 있는데, 특히 번역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은 원문의 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어색한 문장과 표현을 떨쳐버리기가 더욱 쉽지 않다.
경력이 꽤나 오래 됐다고 하는 번역자들 역시 타성에 젖거나 시간에 쫓겨 문장을 제대로 다듬지 못하고 원고를 넘겼을 때는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이 많으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일부 출판사에서는 자체적으로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법, 피해야할 번역투 표현의 예> 따위를 파일로 만들어 일찌감치 번역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편집자들이 교정할 때 편의를 도모하기 위함이다.

번역된 책이나 영화 이외에도 워낙 번역투 표현이 남발되어 어느새 실생활에서도 적지않게 쓰이는 말이라 나처럼 번역하는 사람들 외에도 글을 끼적이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듯하여 여기에 적어두기로 했다. 뻔히 잘 알면서도 나 역시 번역 원고를 매만지다 보면 심심치 않게 부딪치는 표현들이며, 평소 글쓰기에도 침투해 있다. 역시나 잘못 굳어진 습관은 참 고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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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목

책보따리 2008. 2. 16. 01:56
어느 분야든 전문성을 갖춘 이들만이 각광을 받는 세상이다 보니
'번역가'라는 이름에도 언제부터인가 '전문'이라는 말이 붙었다.
'전문번역가'라는 말은 그러니까 가끔 전천후 아르바이트나 부업으로 번역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번역을 본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는 뜻일 게다.
아 참, 번역을 전문으로 하여 생계를 잇는 사람들 중엔 번역가 말고 '번역사'도 있다. ^^
번역사는 출판계 번역이 아니라 주로 계약서와 매뉴얼 등 서류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을 칭한다는 것이
그쪽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의 설명인데, 내가 보기엔 의사, 검사, 판사, 세무사 따위와 같은 계급으로
상승하기 위해 (또는 동등한 권위를 지닌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라는 접미어를 붙인 직업명이거나
혹시라도 번역가와 번역사 집단 어느 한 쪽에서 서로 동등하게 취급받기를 꺼려 차별화한 이름인 것 같아서
좀 우습다. (친구야 미안^^)  

아무튼 누가 제일 먼저 '전문번역가'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직업을 지칭하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문'을 떼어버리고 그냥 '번역가'만으로도 얼마든지 '외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것을 생업으로 삼은 이'라는
뜻이 충분이 전달되지 않는가 말이다.
사실 내가 보기엔 '번역가'라는 말보다는 '옮긴이'가 훨씬 더 정겨운데, 옮긴이라는 말은 책에 맨 뒤에 인쇄되는 책만든 사람들의 목록과 책소개 글에나 사용될 뿐 직업명으로 불리기엔 분명 어감상 모자람이 있다.
그렇다고 빈대나 벼룩, 이를 연상시키는 '옮기는 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물론 훌륭한 번역가들 가운데는 확실히 자신만의 확고한 전문영역을 갖추고 그 분야에만 매진하는 분들이
있으니, 그분들께는 '전문 번역가'라는 말이 퍽 잘 어울리기도 한다.
환경 관련 서적만 번역한다든지, 과학 서적을 전문으로 옮기기 때문에 출판인들도 독자들도
그 사람의 번역이라면 선뜻 믿게 되는 객관적인 신뢰를 쌓은 분들이다.
'환경 전문 번역가'라든지 '과학 전문 번역가', '추리소설 전문 번역가'로 번듯하게 소개될 수 있는
(책 한 권 달랑 번역한 사람에게도 아무렇게나 뭉뚱그려 너그럽게 붙여주는 '전문번역가'--사이에 띄어쓰기 없음--와는 다르다) 그야말로 '주종목'이 확실한 번역가들이라고 하겠다.

가끔 내게도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이 있다.
'어떤 분야를 전문적으로 번역하느냐, 또는 어떤 분야의 일을 가장 흥미로워하느냐'는 것이 그들의 질문이다.
다행히도 이미 출간된 책들의 성향을 알고 있거나 이미 여러 번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저는 주종목이랄 게 없답니다"라는 민망한 대답을 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초창기엔 주종목이고 자시고 따질 것 없이 의뢰받는 일은 무조건 하겠다고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고(처음부터 소신있게 전문 분야를 개척하시는 분들도 당연히 계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다는 자기변명이다), 번역으로 꽤 자리를 잡은 사람이라 해도 일이 뜸할 땐 원숭이 줄타기 법칙의 본능에 따라 가끔은 하기 싫은 일(내 경우, 책마다 그 나물에 그 밥 타령인 자기계발서 류와 경제, 경영, 처세서!)도 질끈 눈감고 해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책을 고를 수 있게 된 입장이 된 뒤에도
나는 '주종목'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한 분야(또는 몇몇 분야)를 구축하고 그에 관련된 책만을 주야장천 번역하며 흥미로워할 자신도, 인내심도 없는 '얄팍한' 인간임을 깨달았다.
위에 언급한, 내가 싫어하는 분야의 책이 아닌 한 모든 책은 읽고 옮기기에 흥미로웠던 반면, 비슷한 책을 연이어 옮기다 보면 아무리 재미있는 책도 지루해져 소신과 영혼이 있는 번역가의 작업이 아니라 번역기계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자판을 치고 있거나, 막무가내로 일하기가 죽도록 싫어지는 단계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을 번역할 때 문장을 매만지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원서 5백, 6백 페이지가 넘어 우리말로는 1, 2권으로 출간되어야 할 장편소설에 심혈을 기울이고 나서
곧이어 또 그 같은 소설을 작업하려면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럴 땐 좀 더 건조하고 진이 덜 빠지는 교양과학서라든지 인문서 같은 비소설로 눈길을 돌려
그간 한쪽으로만 지친 뇌를 환기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개인적인 무지 탓에 기본 자료조사와 두어줄 건너 한 번씩 정보 검색에 진땀을 흘려야하는
인문서나 과학서도 많지만 일도 하면서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는 그 묘미는 확실히 문학작품의 문체와 씨름할 때와 다르다. ^^
그렇기 때문에 내 경우 일을 계약할 땐 일부러 소설과 비소설, 무거운 책과 '말랑'한 책을 적절하게 시기적으로
배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어느 책이든 번역은 모두 '골빠지는 작업'임엔 틀림없지만 그래도 소모되는 에너지가 조금씩 다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독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옮긴이로서 섭렵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 번역가가 갖는 특권인 것 같다.

형편이 이러니 혹자들이 바라는 대로 주종목을 키워 명실상부한 '전문' 번역가가 되는 것은
내게 매우 요원한 일이다.
그래서 내게 주종목을 묻는 출판인들에게 나는 얼굴에 한자락 철판을 처억~ 깔고 이렇게 변명한다.
"제가 워낙 싫증을 잘 내서 한 분야만 줄곧 작업하는 건 괴로워하거든요.
게다가 요즘 출판사도 모두 '종합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저도 '종합 번역인'으로 살려구요." -_-;;

사실 회사원 시절 계약서와 매뉴얼, 온갖 서류 번역이 멀미 나게 싫어 '진짜' 번역을 해보겠다고
야무지게 나섰던 초창기엔 번역가로서의 내 주종목이 어린시절 일어판 중역으로 읽었던 수많은 고전작품과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이른바 '정전'이 될 것이라 거침없이 믿었음을 이참에 고백하고 넘어가야겠다. ㅋㅋ
하지만 어설프게나마 대학원에서 영문학계의 판세를 들여다보니
대형 출판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번역으로 야심차게 기획 출간하는 고전들의 번역을
대개 진짜 전문가인 '교수들'에게 맡기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물론 해당 교수들이 정말로 손수 번역을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섣불리 고전작품이나 영문학 교과서들을 번역했다가 고매하신 박사님들이 구구절절 오역이니 아니니 따지고 나서면 어쩌란 말인가!! *_*
하물며 영문학 교수가 번역한 문학작품도 오역 연구 논문이 발표되는 마당인데?

욕심을 부려 내 평생 영문학 정전 가운데 몇 권쯤을 번역하고 오역의 지탄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지금 같아선 당장 내게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같은 작품 번역의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선뜻 나서기가 꺼려질 것 같다.
아니, 실제로도 꽤 야심찬 기획으로 영문학 전공 번역가를 대거 찾는다는 모 출판사의  의견타진을 받고
심히 고민중이다. 밀려 있는 일도 일이려니와, 일년 내내 그렇게 피말리는 일만 하고 사는 건 나 같은 얄팍한 인간에게 보나마나 무리임을 왜 모르랴.
역시 난 별다른 주종목 없이 그저 잡다하고 어수선한 번역서 약력 가운데
보석처럼 소중하고 뜻깊은 몇 권의 책이라도 간간히 박혀 있으면 흡족할 작은 그릇인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번에 나올 책에도 출신학교와 옮긴 책 목록 밖에 없는 알량한 약력엔
부디 민망한 '전문번역가'라는 말 대신 '이러이러한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구절이 들어가면 참 좋겠으나, 출판사의 성격상 내 바람은 무시될 확률이 대략 8할 이상이다.
차라리 '전문' 대신 '종합'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하면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
으음..
주종목도 없는 주제에 쉰소리는 관두고 나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것이 좋을 듯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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