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

삶꾸러미 2010. 2. 4. 21:31

나에게 동짓날이 팥죽먹는 날이라면 입춘은 부적의 날이다. 예전 마당 있는 집에 살 땐 골목길을 지나치며 더러 대문에 <입춘대길>이라고 쓰인 입춘첩을 붙여놓은 집도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요샌 통 구경할 수가 없으니, 그저 조용히 엄마가 절에서 얻어다준 새로운 부적을 지갑에 넣고 오래된 부적을 내놓고는, 집안화평을 비는 기다란 부적을 현관 문설주에 붙이는 것으로 간단한 입춘날 행사가 끝난다.

사실 모든 종교가 이승과 내생의 행복을 바라는 기복종교이긴 하지만 불교는 전래되면서 토속신앙과 특히 많이 접목된 탓에 원래 불교의식과는 상관없는 오묘한 미신이 참 많이도 스며들었다. 그래서 더욱 돈을 노리는 사이비 신앙행위가 판을 치기도 하며, 일부 탐욕스런 절에서는 다량으로 인쇄된 기복 부적을 사다가 신도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하는 상황이니 혀를 찰 노릇이다. 면죄부를 팔아 치부했던 중세 기독교인의 환생도 아니고 뭐하자는 짓인지 원.

어쨌든 지니고 다니면 화를 면하고 복을 부른다는 부적에 대한 불교신자들의 믿음이 워낙 확고한 탓에 입춘날엔 대부분의 절에서 공짜로 부적을 나눠주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들의 수가 많단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외할머니와 엄마 영향으로 불교와 친숙했던 내가 지켜봐온 바에 따르면, 입춘 부적에도 변화가 있었다. 처음엔 삼재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냥 부적과 삼재 부적만 식구들 수대로 나눠주더니, 운전하는 가족들이 있는 신도들의 특별 부탁 때문인지 어느해 부턴가 나는 입춘마다 일반 부적 말고도 자동차에 두고 다니라는 <운전용> 부적을 따로 받았다. 그나마 자동차 부적은 해마다 안바꿔도 되는지 몇해 전부터는 그냥 같은 부적을 햇빛 가리개 안쪽 주머니에 찔러넣어둔 채 잊고 지내는 중이다.

난생 처음 차가 생겨 운전을 하게 되던 날은 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사촌형부가 몰던 차를 물려받은 그날, 엄마는 미리 절에서 특별히 주지스님이 챙겨주었다는 자동차 사고를 막아준다는 부적을 받아와서는 후드를 열고 떡하니 엔진 위에 견고하게 붙여주었고, 막걸리를 사다가 차 바퀴 네 군데에 나눠 부으며 무사고를 빌었다. ^^; 우리 동네 카센터 아저씨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처음 엔진오일을 갈러 갔던 날 그 부적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도 부적이 떨어지지 않게 더 꽉 붙여주었다. 불교신자들 뿐만 아니라 천주교신자 가운데서도 차안에 걸고 다니는 염주나 묵주 외에 그렇게 자동차 엔진에까지 뭔가를 붙이고 다니며 무사고를 비는 어머니들이 꽤 있다나.  

사실 내 자동차에는 엄마가 넣어주신 부적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무사고를 기원하며 사다주신 예쁜 조각 염주도 있고, 역시나 외할머니가 주동하신 부처님 금불사(절에 모신 부처님한테 새로이 순금을 다시 입히는 행사를 <금불사>라고 한다) 때 쓰인 오색실과 팥알이 들어 있는 작은 향낭도 걸려 있다. 물론 나는 그런 물건들의 <영험한> 효험을 전혀 믿지 않는다. 바퀴에 막걸리 뿌리고 엔진에 부적까지 붙였던 나의 첫차로 두어달 만에 나는 그렌저 문짝 두개를 보란듯이 우그러뜨려 거금을 물어줘야 했고, 운전연습을 시작한 큰동생은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찌그러뜨린 뒤 몰래 도망치는 사고를 저질렀으며, 수동이라 엔진 꺼뜨리지 않고 언덕길 운전연습 한답시고 동네 약수터의 벤치를 들이받질 않나 골목길에 주차한 자동차들의 사이드미러에 죄다 흠짐을 내놓지를 않나, 큰 사고만 없었다뿐 자질구레한 사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부적에 대한 울 엄니와 외할머니의 믿음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봐라! 큰 사고 아니라서 사람도 안다치고 그 정도니 얼마나 다행이니!" 

자동차에 주렁주렁 매달린 염주와 향낭, 햇빛 가리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부적을 내가 굳이 치우지 않는 이유는 그 물건의 효험을 믿어서가 아니라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마음 때문이다. 더욱이 외할머니는 돌아가신지 5년이 다 돼가는데도, 룸미러에 매달아둔 염주만 보면 성지순례 다녀오신 할머니가 한복 저고리 주머니에서 <옴>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그 염주를 꺼내 주시며 꼭 차에 매달고 다니라고 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겐 기복용 부적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회상용 유품이 된 셈이다. 팔순 노모가 육순 자식에게 길조심을 당부하는 게 인지상정인 것처럼, 공식적으로 무사고 10년이 넘은 베테랑인데도 울 엄마가 여전히 내 운전을 염려하는 걸 알기에 날 못 믿겠으면 부적이라도 믿으시라고 군말없이 오늘도 엄마가 가져다준 부적을 지갑에 소중히 간직했다. 어쩌면 이제껏 큰 사고 없이 잘 지내온 건 나를 염려하는 어르신들의 걱정을 덜어드리려는 조심 노력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부적에 효험이 있다는 말인가 아닌가. ㅋㅋㅋ 하기야 전우치 같은 도사님 부적을 백장이나 붙인들 본인이 조심하지 않으면 말짱 꽝일 터, 결국 부적의 힘은 자중의 힘인가 보다.

아무려나 입춘대길. 얼마 안남은 진짜 새해엔 정말 크게 좋은 일만 빵빵 터져주길 무신론자인 내가 아무데나 빌어도 이루어지려나? ㅋ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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