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덜투덜

투덜일기 2009. 12. 19. 18:15

옛날에 고모들이 할머니한테 옷을 선물하면 늘 마음에 안들어하셨다. 색깔이 어떻고 소매 길이가 어떻고 <갑삭해야>하는데 너무 무거워서 틀렸다는 둥, 요란해서 이런 걸 어떻게 입냐는 둥... 교환이 가능한 경우면 몇번이나 바꿔오기 일쑤였고, 그게 아니면 할머니가 손수 리폼을 하시거나 그냥 옷장에 처박히기 십상이었다. 고모들은 할머니가 너무 까다롭게 군다면서 웬만해선 옷 선물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울 엄마가 사드리는 옷은 할머니의 취향을 최대한 고려해 골랐으므로 고모들의 안목보다는 성공률이 높았지만, 할머니가 나한테만은 못마땅한 부분을 털어놓을 때가 더러 있었다. "니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하라"면서...
외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남자 한복을 맞춰입고 사셨던 외할머니의 외투 선택은 더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 엄마나 이모가 심혈을 기울여 코트를 사거나 심지어 제일 좋은 양모 털실을 수십만원어치 사다가 뜨개질로 떠드려도 결국 그옷은 다른 사람 차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해서 친할머니, 외할머니 공히 최고의 선물은 <현금>으로 굳어지고 말았던 것 같다.
나 역시 십수년간 두분 할머니께 선물할 스카프나 목도리, 장갑 따위의 선물을 애써 고르기도 했지만, 정말 마음에 들어하셔서 애용했던 선물은 손에 꼽힐 정도다. 무난하게 가자고 산 내복마저도 색이나 레이스가 요란하다 (내 눈엔 정말 수수한 건데도!)는 이유로 슬쩍 다른 사람에게 양도되었음을 안 뒤론, 나 역시 철저하게 <현금> 선물을 추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들의 까다로움을 겪어보았으면서 난 또 새삼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사실 나는 작년부터 왕비마마에게 <털신>을 사드리려고 계속 살피는 중이었다. 왕비마마가 최근 1년 넘게 애용하는 신발은 딱 하나. 바닥이 푹신해 다리 당김이 덜 느껴지는 마사이슈즈다. 그것 말고 다른 신발을 신고 외출했다간 금세 발바닥과 다리가 아파져 고생을 하는 걸 알고 있으므로, 최대한 발이 편하면서 가볍고 신기벗기도 편리한 (끈을 조여야 하는 마사이슈즈는 신고 벗기가 불편한 게 탈이다)  따뜻한 신발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에 온라인에서 발견한 복슬복슬 부츠형 털신 하나는 방수가 안된다는 이유로 겨울 내내, 그리고 올해 다시 왕비마마의 실내화로 이용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ABC마트 같은 데 가서도 이런저런 신발을 만져보고 신어보다 마음의 결정을 못하고 있던 차에, ㅌㄹ마을에 새로운 유행 신발이라는 <사눅> 사진을 보고 옳다구나 싶었다. 나 또한 매장에서 유념해 보았던 그 신발이 아니던가! 주
민들이 신어보고 그렇게도 편하다니, 왕비마마의 겨울용 <털신>으로 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게다가 엠티에서 실물을 두 켤레나 보고나선 마음을 굳혔다. 그 정도면 바닥도 푹신하고 털 때문에 포근해 올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데 적합해 보여 이왕이면 왕비마마도 한 켤레 사드리고 나도 사 신자고.
해서 얼른 40%나 세일을 하고 있는 마을 추천 사이트에 두 켤레를 주문하고 흐뭇하게 사눅 신발을 기다렸다.
헌데 드디어 오늘 신발이 도착해 엄마에게 보여주니 표정이 좋지 않다. 방수도 안되는 신발을 겨울에 어떻게 신고 다니느냐.. 쭈글쭈글해서 신고벗기 불편하다.. 왼쪽은 크고 오른쪽은 꽉 낀다(좌우 발 크기는 누구나 다르지 않나??)... -_-;;
결국 나는 신기 싫으면 관두시라고, 왕비마마 껀 반품시키면 된다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어휴... 나는 맨발로 신어도 감촉이 좋아서 마음에 들던데 웬 타박이신지 원...
그제서야 옛날 우리 할머니들의 까탈스러움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되면 원래 저렇게 까다로워지는 것인지... 나가서 같이 고르자고 하면 또 싫다고 할 거면서! 죽을 날 머지 않았으니 새옷 새신발 사들이는 거 관두겠다고 하는 것까지 그 옛날 할머니들의 레퍼토리랑 아주 똑같다. 으휴... 
그나저나 비회원으로 구입한 신발인데 한켤레만 반품이 되나 어쩌나 그것도 모르겠고 골치아파 죽겠다. 젠장.. 투덜투덜..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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