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지 5년 된 마루 TV가 며칠 전부터 화면이 흐려졌다. 왕비마마의 유일한 취미생활이 TV시청인데 사람얼굴도 흐릿하고 자막 글씨는 못 읽을 정도라 게으른 인간치고는 꽤나 빨리 as 신청을 했다. 당장 그날로 기사가 방문했다. 탐욕과 비리의 상징인 그 대기업 물건을 자꾸 쓰게 제일 큰 이유는 역시 빠른 as 때문임이 실감났다. 어쨌거나 가전제품 5년이면 우리집에선 완전 새것인 축에 드는데 고장이 났으니 빈정상하긴 했다. 브라운관이 부실해 포커스가 나갔다며 최대한 조정해주고는, 언제 또 그럴지 모른다는 하나마나한 대답을 하는 기사에게 나는 왜 산지 15년도 넘은 같은 회사의 TV는 아직도 멀쩡한데 새것이 망가지느냐고 따졌다. 비싯 웃으며 <옛날 게 다 더 튼튼하기 때문>이란다. 옛날엔 HD니 뭐니 하는 특수 기능도 없이 구조가 단순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얄팍하게 벽걸이형으로 나온 LED나 PDP TV의 수명은 더 짧다는 것도 같다. 겉모양만 번지르르할 뿐이지...

내방에 있는 볼썽사납게 뚱뚱한 TV는 20년쯤 나이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15년 전에 집 뒤쪽에서 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흙더미와 함께 방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수재>를 겪고도 아직 멀쩡하다. 물론 제일 오래된 거라서 케이블 컨버터가 없으면 나오는 방송이 딱 공중파와 홈쇼핑 채널 뿐이지만, 옆구리에 그날의 흔적이 황토색 흠집으로 남아있는데도 속썩인 적이 없으니 특히 전자제품은 오래될수록 튼튼하단 얘기가 맞다. 여름에 포스팅한 골드스타 선풍기의 수명을 봐도 수긍이 간다. 기술력은 훨씬 더 발전했을 텐데 왜 내구성은 자꾸만 떨어지게 만드는걸까? 소비를 촉진해 무작정 돈을 벌려는 속셈? 아니면, 한국인들이 그만큼 싫증을 잘내서 빨리 망가지는 제품을 선호하나? 얼리 어답터가 칭송받는 시대이니 일부는 그럴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게으르고 귀찮음 많은 인간들은 분명 하나 사서 오래오래 쓰고 그래서 마음에 들면 다시 그 브랜드를 선택하는 충성심을 발휘할 텐데, 다 내마음 같은 건 아닌 모양이다.

점점 내구성이 떨어지는 건 비단 전자제품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타워팰리스 같은 데는 안가봐서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번드르르 유명한 브랜드 이름이 붙은 새 아파트엘 가봐도 층간소음이나 방음은 놀랍게도 낡은 우리집만 못한 것 같다. 물론 이 집도 수돗물 소리가 요란하고 요즘 집에 비해 천장이 낮은 문제를 비롯해 여러가지 단점이 있지만, 여름에 창문을 다 열어놓지 않는 한 지금껏 살면서 애들 뛰고 떠드는 소리, 쿵쾅거리는 소리로 이웃간에 싸움 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더욱이 요즘 새로 짓거나 주인 마음대로 개조한 아파트는 방마다 문턱을 없애는 추세인 걸로 아는데, 문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방음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물론 장애인의 거동이나 아기의 활동에는 방마다 문턱을 없애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지만 나처럼 쓸데없이 민감하고 까탈스러운 사람에게 소음 문제는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하는 요건이다.

이 집에선 왕비마마가 마루에서 TV를 크게 틀어놓고 봐도 작업실 방문을 콕 닫아버리면 그만이다. 헌데 문턱을 없앤 동생네 집엘 가보면 문을 닫아도 다른 방에서 하는 얘기가 다 들린다. 지진 때문에 나무를 주골재로 짓고 카페트를 온 집안에 깔고 사는 미서부의 친구 집에서도 느꼈던 문제다. 푹신한 카페트가 별도의 방음재 역할을 할 텐데도 문턱 없는 방문은 닫으나 마나 옆방 소리가 다 들렸다. 잠자리도 선데다 온갖 소음이 방문 아래쪽의 좁은 틈으로 다 쏟아져들어오는 느낌이라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카페트가 화장실까지 이어져 거기도 문턱이 없으니 볼일도 마음 놓고 못 볼 정도로!

<안춥게 개조한 한옥>에 대한 로망을 내가 버리지 못하는 건 어쩌면 한옥이 오래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숭례문이 인간의 실수로 하루 아침에 불타버리긴 했지만 대표적인 한옥인 그 건물만 봐도 나무로 지은 한옥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옥은 숨을 쉬며 살아 있는 집이라 계속 여기저기 손보고 고쳐가며 살아야한다지만 (양옥이든 아파트든 계속 손보고 고치긴 마찬가지다 뭐;; 몇년에 한번 페인트칠해야지 방수액 도포해야지...) 그래도 나는 오래오래 튼튼한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에 살고 싶고, 최대한 쓰레기 만들지 않게 오래 가는 튼튼한 물건들을 쓰며 살고 싶다. 오래될수록 튼튼할 가능성은 전무한 인간이기에 더더욱.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