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22.02.10 모르겠다 1
  2. 2014.12.15 그간... 1
  3. 2011.03.16 잡다 10
  4. 2010.03.18 마지막 선물 14
  5. 2010.03.18 몇 가지 2
  6. 2010.03.07 노년의 생일 19
  7. 2009.11.06 어렵다 6
  8. 2009.09.18 애자 10
  9. 2009.09.15 늙음에 대하여 4
  10. 2009.07.21 어떤 죽음 2

모르겠다

삶꾸러미 2022. 2. 10. 21:11

어느덧 주변에 아픈 친구들이 많아졌다. 이제 그럴 나이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 유병장수 시대라지 자조해보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의 기대수명이 80세를 넘겼다는 얘기를 들으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 많다. 대사증후군이나 퇴행성 질환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오갈 수도 있는 중병을 앓고 있는 친구들 때문이다. 

작년 여름과 올해 1월, 반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두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I는 희소난치질환을 오래 앓다가 마지막엔 재활병원에 누워 힘겹게 하루하루를 넘겨야 했고, J는 예후가 좋지 않은 병을 진단 받았지만 씩씩하게 두번이나 수술을 받고 오랜 항암기간을 잘 견뎌내 희망을 주더니 금세 상황이 나빠졌다.

늘 느끼는 거지만 죽음은 아무리 미리 예상하고 마음을 다져도 준비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친했던 친구의 부음은 타격이 클수밖에 없다. 오십을 넘기면 인류가 태고적부터 DNA로 넘겨받은 타고난 생명은 다 한 셈이고 나머지 삶은 의학의 힘과 영양, 본인의 운동 여부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제 내 또래 친구들은 자다가 심장이 멎어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라는 말도 책에서 본 적 있지만, 확실히 지나온 나의 삶 보다 남은 삶이 더 짧을 거란 것도 알지만, 그래도 황망함과 충격은 여전하다.

아직 어리기만 한 친구들의 자녀는 앞으로 엄마 없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자식을 먼저 보낸 친구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가슴이 사무칠지 생각할수록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친구에 불과한 남겨진 자로서 되게 하찮은 고민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디지털 세상에 남은 친구들의 흔적은 또 어떻게 마무리해야할까. 잘 모르겠다.

새해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던 단톡방엔 친구의 흔적과 프로필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마도 홀로 남은 딸은 엄마의 휴대폰을 해지하지 않고 계속 간직할 모양이다. 나 역시 친구가 남긴 흔적들이 애틋해 얼마간의 애도기간은 필요할 거라 생각하면서 동시에 그 흔적을 볼 때마다 너무 슬프고 마음이 무거워져서 이젠 그만 들여다보고 싶다는 이기적인 충동이 들기도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 마음은 개운하지 않을 테고, 톡방에서 나오거나 SNS연결을 끊어버린다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떠오르는 건 마지막까지 오히려 내 걱정을 했던 친구 J의 충고다. 너는 이제 네 생각만 해, 나도 이제 딸 걱정 그만하고 내 생각만 할 거야. 니가 행복해야 주변도 챙길 여유가 생기는 거야. 네 생각만 해, 꼭. 조근조근 타이르는 친구의 목소리까지 아직 생생한 그 말대로 올해의 목표는 내려놓는 삶, 내 생각만 하기... 이런 걸로 정해야지 다짐했었는데...

역시 그래서 잘 모르겠다. 늘 우유부단하고 갈팡질팡할 때 거침없이 방향을 정해주던 친구 J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에게 뭐라고 해주었을까. 친구의 부재를 결국 이런 고민으로 더 아쉬워하는 내가 또 좀 한심하고. 빈소에서 한참 울고 웃고 또 울다가 헤어지며 누군가 말했다. 이제 우리한테 가장 좋은 친구는 건강하게 오래 곁에 있어주는 친구라고. 이제 나는 확실히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러니 친구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서라도 건강을 좀 더 챙겨야겠다는 것만 일단 알겠다. 몹시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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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투덜일기 2014. 12. 15. 16:50

마지막 포스팅을 한지 한 달이 넘었다. 다른 때는 종종 중간에 비공개로 써놓은 글도 있곤 했는데 이번엔 그야말로 완전 블로그를 방치했다. 바쁘기도 했고 확실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간... 별일이 좀 있었다.

늘 허둥대듯 폭풍처럼 몰아쳐 원고를 마감했고,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못 미더워 붙들고 매달렸던 원고를 이메일로 보낸 뒤 허겁지겁 대충 싼 짐가방을 끌고 공항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탔다. 3월에 시도했다 실패했던 터키 여행. 7박9일짜리 패키지 상품에 3일을 연장해 짧게 자유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두어달 전부터 예약을 해놓고도 정말 가도 될까 염려하며 이번에도 타의로 못떠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일주일 전 출발확정일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귀국편 비행기 연장도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는 그래, 이번엔 확실히 잘 다녀오라는 하늘의 뜻인 게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같이 가는 후배 J도 나도.

하지만 마음이 그리 가뿐하진 못했다. J의 어머니는 암투병 중이셨고, 울 엄마는 중이염 치료를 위해 입원을 권유받는 형편이었다. 심지어는 월요일 출국 예정인데 토요일에 의사가 얼른 치료 시작하자며 엄마에게 입원장을 내버렸다. 거기서 엄마는 또 넌 예정대로 가려므나, 난 홀로 입원할테다... 그러시고 ㅠ.ㅠ 막대한 취소 수수료를 물고 이번에도 터키를 포기해야하나, 고민하던 나는 의사와 원무과에 다시 뛰쳐가서 입원 못한다고 버텼다. 2주 뒤나에 입원 가능하다고.

암튼 우여곡절 끝에 떠나 도착한 이스탄불엔 계속 비가 내렸다. 12월부터 우기라더니 왜 벌써! 비쯤이야 뭐 방수재킷에 우산까지 준비했으니 맞아주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카파도키아에선 심지어 폭설이 내렸다. 우리보다 하루, 이틀 먼저 여행을 시작한 팀들은 폭설에 고립되어 산맥을 넘지 못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식도 들려왔으니, 열기구를 못 탄 것쯤이야 불운도 아니라고 위안을 삼아야했다. 그래, 눈 덮인 터키를 또 언제 내가 구경하겠니, 그러면서.

지중해쪽 안탈랴, 케코바에 갔을 때만 잠깐 날씨가 개었을 뿐 그밖엔 계속 우중충 비가 내렸고, 장기여행이 하도 간만이라 그랬는지 서둘러 짐을 싸서 그랬는지 내가 가져갔던 옷들은 너무 두껍거나 얇아서 춥지 않으면 더워서 낑낑대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나마도 챙겨간 바지도 티셔츠도 갯수가 부족했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사프란볼루를 떠나 다시 이스탄불로 갔다가 인천공항에 내리니 우릴 기다리고 있던 건 엄청난 한파. 엄마가 미리 보일러를 돌려놓았다는데도 방의 냉기는 그날 밤에야 비로소 좀 가시는 듯했는데, 오자마자 세탁기 돌려 빨아놓은 옷들이 다 마를 새도 없이 다시 병원 짐을 싸 귀국 다음날 곧장 엄마를 입원시켰다. 

집에 돌아와 딱 하룻밤 자고 다시 떠돌이처럼 병실 쪽잠을 자야한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여행 파트너였던 J에게 엄마 상태는 좀 어떠시냐고 문자를 보내도 통 답이 없었다. J도 귀국하자마자 잡지 마감 들어가야한다더니 바쁜가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곧이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J에게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던 어머니가 우리 떠나 있는 동안 돌아가셨다는 것. 여행 중 J가 계속 가족들에게 어머니 안부를 물었을 때도 분명 암말 없이 신경쓰지 말고 잘 놀다오라고 했다던데, 어떻게 그런 일이. 

알고 보니 이미 우리가 터키 가는 비행기 안에 있을 때 돌아가셨기에, 이스탄불에 도착해 곧장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도 시간상 장례절차가 다 끝난 다음일 것이 뻔해서 식구들이 아예 말을 하지 않은 것이란다. 아아. 자식으로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만큼 평생 한이 되는 일이 없다던데 얼마나 기가 막힐까...  괜히 터키 여행을 강행했구나 싶어 J에게도 그 어머니에게도 죄스러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나이롱 환자처럼 그냥 시간 맞춰 항생제 주사만 맞으면 된다던 멀쩡한 엄마가 혈압 불안정으로 입원기간 동안 또 나를 식겁하게 하는 상황도 어쩐지 천벌 받는 것 같고... 안정되지 않은 떠돌이 같은 삶이 3주를 넘어가니 심신에 쌓인 피로로 신경은 더더욱 날카로워지고...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 J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는 것도 어쩌면 몹쓸 짓일지도 모르겠다. 순전히 내 마음의 무게를 덜어보겠다는 심보가 아니고 뭔가. 그래서 이 글은 생각을 좀 더 해본 뒤 공개를 안하게 될수도... 그치만 너무도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7년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그러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곱씹으며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려 자책하는 과정을 자꾸 되풀이하게 된다. 역시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다. 왜 하필 올해 내내 터키 타령은 해가지고... 나도 이런 지경일진대 J는 괴로운 마음이 오죽할까. 부모님을 잃었을 땐 섣부른 위로가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고, 더욱이 나는 이런 상황을 야기한 죄인인지라 J에게 더더욱 할 말도 면목도 없다. 이럴 땐 나 말고 차라리 남탓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수도 있으니 J가 내 탓을 하며 욕을 하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고...  

아무튼 우리 엄마는 무사히 8일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고, 나 역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당분간은 터키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워서 사진도 들여다보지 못하겠고 계속 가슴이 먹먹하다. 때로 인생은 참 가혹하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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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

하나마나 푸념 2011. 3. 16. 17:32

내가 책을 잘 못(안?) 읽는 이유는 의지력 박약이 첫째고 둘째는 TV다. 바보상자 TV를 한번 켜면 리모컨을 돌려가며 계속해서 넋놓고 앉아 있다. 여러 방송사 모두 뉴스는 낮에 방영했던 내용이 저녁 뉴스에 또 나오고 토씨하나 안 틀린 기자의 보도 클립이 마감뉴스에도 되풀이된다. 그런데도 난 또 그걸 '뉴스'랍시고 보며 질질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울고 싶어서 빌미를 찾고 있나 싶기도 하다. 실종자 가운데 2천명이 무사히 살아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있었지만 대체로 서글픈 지진 뉴스를 보며 문득 나는 다이고를 생각했다. 영화 <굿'바이>에서도 드러났듯 일본의 모든 장례지도사들이 다이고나 그 사장님처럼 경건하게 고인의 시신을 대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수많은 다이고들이 참으로 바쁘고 힘들게 정성껏 일하고 있겠구나 싶다. 내가 입관 절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지켜본 건 외할머니 때 뿐이다. 친할아버지, 할머니 때는 정신줄을 놓은 엄마를 지키느라 들어가볼 기회를 놓쳤다. 전통적으로 원래 염은 자식들이 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입관때 가까운 친지들은 꼭 참관을 하는데, 나는 서른 중반에야 처음 그럴 기회가 있었다. 우느라 대체로 정신이 없었지만 놀라운 경험이었다. 아버지 장례 때는 친척분들의 협의를 거쳐 염하는 과정을 중간부터만 참관하기로 했었는데, 그 '중간'이라는 게 어중간해서 결국 우리는 장례지도사가 수의를 다 입혀놓은 다음에야 아버지를 보러 들어갈 수 있었다. 최대한 천으로 가리고 진행하더라도 고인의 사지와 맨 몸이 드러나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기가 불편하다는 친척 어르신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자식으로서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차디찬 아버지의 이마를 만지며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했을 때의 황망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참담한 현실과 수많은 죽음 앞에서 더욱 가슴이 아픈 건 내가 겪은 죽음을 자꾸 환기하기 때문인 것 같다. 역시나 이기적인 감상이다.

어젯밤엔 MB의 수족 사장 치하에 들어간 MBC에서 강제 인사이동을 당한 원래의 제작진이 만든 <PD수첩> 마지막 방송분이 방영되었다. 소망교회에서 목사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렸다는 대통령을 다루려 했던 지난주분은 결국 방송이 무산되고 말았지만, 어제 다룬 문제들 역시 PD수첩다웠다. 논문심사비로 교수에게 300만원을 바치고 나서도, 다시 논문 읽는데 걸린 1시간 15분에 대한 비용을 추가로 내라는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는 학생의 증언을 보며 이젠 막 웃음이 나왔다. 어느 미대 교수는 병원에 입원한 동안 조교에게 밤샘 간병을 시켰단다. 레지던트를 발로 차고 밟고 때리는 놀라운 폭행을 일삼은 의대 교수는 행정소송을 거쳐 3개월 만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수술실에서 부분 마취한 환자가 그 의대교수의 폭력행위에 공포를 느껴 병실로 돌아온 뒤에도 충격을 가누지 못했다는 증언까지 방송에 나왔지만, 2차 징계위원회에서 그 밥에 그 나물인 교수들은 슬며시 동료를 감싸주었다. 당당히 학교로 복귀한 폭력 교수 본인의 변명으로는 다 제자 잘 되라고 한 행동이란다. 제자들의 청원으로 비리 혐의가 인정돼 1개월 정직 처분을 받은 교수는 뻔뻔하게 여전히 소송중이다. 졸업한 제자들의 개인전에까지 찾아가 협박을 일삼고 자기가 괴롭혔던 제자들을 증인으로 불러대면서. 요번에 국립대학에서 파면된 음대 교수도 변호사 선임해서 소송할 움직임이던데, 승소하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내부고발자들이 아무리 용기를 내어 비리를 폭로하면 무엇하나. 법과 제도와 사회가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걸. 정말 이 나라는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나라가 한참 멀었다는 걸 간간이 꼬집고 일깨워줄 TV 프로그램도 사라질 형국이다. 다른 공중파방송에도 간간이 볼만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있지만, 워낙 가뭄에 콩나듯 방영하고 있으니 이젠 공중파 3사가 노상 용비어천가만 불러대고 있게 생겼다. 일본 지진 소식이 워낙 강렬했기에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온종일 엄마가 틀어놓는 KBS 뉴스에서 끼니 때마다 MB가 아랍에미레이트에서 이룬 '쾌거' 소식을 들을 뻔했다.

한 사람의 개인이긴 하지만 엄기영을 봐도 MBC의 운명이 실감된다. 설마 MBC가 MB네 회사라는 뜻이었던가? 트렌치코트 깃을 높이 세우고 에펠탑이나 개선문, 상젤리제를 배경으로 "파리에서, 엄기영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멋진 기자 이미지로 내게 각인되었으며 꽤 괜찮은 앵커를 거쳐 MBC 사장까지 했던 사람은 결국 결국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심지어 자기가 몸담고 있던 방송사를 '까대는' 언사로 선거유세를 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그렇게도 정치와 권력이 좋은지 진짜 궁금하다. MBC엔 아직 제작을 거부하며 싸우고 있는 시사교양국 기자와 PD들이 존재하지만, 하나하나 종영되고만 수많은 시사 프로그램 가운데 이제 <PD수첩>은 프로그램이 사라지지만 않았지 거의 색깔과 생명이 끝장났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점점 볼 거리도 사라져가는데 이제 그만 테순이 노릇은 관두고 독서로 눈을 돌리면 좋으련만, 난 또 공중파를 대신해 케이블 채널을 기웃거린다. 이러니까 권력이 자꾸만 방송을 장악하려는 것이겠지. 더더욱 바보가 되라고. 알면서도 나는 손에 리모컨을 쥔 채 그 장단에 계속 놀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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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물

삶꾸러미 2010. 3. 18. 15:30

"따지고 보면 '베푸는(?)' 사람의 자기 만족인것 같아요. 준혁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마음을 한번도 제대로 돌아봐준 적 없는 세경으로선, 그렇게 해서라도 추억 한가지라도 더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준혁이가 준 것에 비해 자신이 준게 너무 없다고 생각한 세경이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거란 점에선 그 '선물'은 결국 자신에게 주는 것인 듯." - 미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문상의 절차가 어렵고, 낯선 이들과 홀로 애도의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나 말고는 거의 아무도 갈 사람이 없을 것이 확실한 친구의 빈소에 나만은 가야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는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쳤는데 다녀오고 보니 그 역시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마지막 인사도, 마지막 선물을 대신한 조의금도 결국엔 나를 위한 위로의 행동이었던 거다. 내쪽에서 단 한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던 최근에도 그렇고 그 옛날에도 친구에게 받은 것에 비해 준 게 너무 없다고 느끼므로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 그러고는 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던 거다. 어쩌면 모든 선물이 받는 사람의 기쁨을 지켜보며 흐뭇해지고 싶거나 마음 빚을 갚고 홀가분해지려는 이기적인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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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삶꾸러미 2010. 3. 18. 04:59

그동안 막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깜박 잊고 있다가 요 며칠 새삼 깨달은 사실 몇 가지.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돌아가는 데는 정말로 순서가 없다는 것.
사십대 중반이란 자다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뜰 수도 있는 나이라는 것.
인간관계를 많이 맺는다는 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그 관계의 종결을 목도할 가능성도 많아진다는 의미라는 것.
바로 지금이 앞으로 살아갈 나의 인생 가운데 가장 젊은 순간이라는 것.
남은 자는 또 그럭저럭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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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생일

투덜일기 2010. 3. 7. 18:13
떠들썩한 환갑잔치를 내가 처음 목격한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수원에 살던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더니 난데없이 주말에 시간 되면 밥을 먹으러 오라며 수원의 어느 갈비집을 알려주었다. 터울이 많은 손위 형제들을 둔 막내였던 친구는 부모님이 옛날 분들이라 환갑엔 꼭 동네잔치를 한다고 했다. 내 조부모님의 경우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도 조촐하게 집에서 가족모임으로 치렀던 터라, 환갑잔치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그날 목도한 사건이 워낙 인상 깊었던 모양으로 같이 간 친구와 내가 축의금 봉투를 가져갔는지 그냥 입만 가져갔던 건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무슨무슨 가든이었던 수원의 갈비집엔 큼직한 방마다 온통 잔치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한 가운데 불판에선 갈비가 익어갔으며 마당으로 연결된 스피커에선 계속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왔다. 결혼한 큰오빠와 큰언니가 낳은 자식들이 친구와 또래일 정도였으므로 잔치상 앞에 앉으신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며 차례로 절을 하던 자손들의 수가 꽤나 많았던 기억이 나고, 식사 후 여흥이 시작되자 춤과 노래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잔치 주인공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자손의 친구들도 다들 앞에 나가 술잔을 올리고 축하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인 모양이었지만, 숫기 없는 우리의 난감함을 알아차린 친구는 싫으면 굳이 안해도 된다고 말해주어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친구 부모님의 환갑이나 칠순에 초대받았던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동네 잔치를 처음 경험한 때문인지 나는 그날 온종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순간순간 불편하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막판엔 지겹고 곤혹스러웠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사회자가 지목하면 무조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고함을 질러야하는 상황도 그렇고 떼로 몰려나와 춤을 추는 모양새도 처음엔 흥겹더니 술판이 무르익으면서는 취객들 때문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수시로 잔치판에 불려다니느라 우릴 챙겨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친구는 그제야 지루해하는 우리 태도를 눈치 챘는지, 먼저 가도 된다며 우릴 배웅했다.

잔치집을 나오며 나는 당시에 아직 멀게 느껴지는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염려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잔치를 원하면 어쩌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구경꾼처럼 모여든 하객들 앞에서 한복을 떨쳐입은 채 무대처럼 마련된 잔칫상 앞에 나아가 술잔과 절을 올린 뒤 나중엔 큰딸이랍시고 노래까지 한자락 불러야 하는 상황을 내 숫기로는 못견딜 듯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고민해야하는 시기가 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요란한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었고, 환갑은 청춘이라며 다들 잔치대신 여행을 떠나는 세태도 나를 도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다닌 직장의 정년퇴직과 맞물린 아버지의 환갑을 그냥 멀뚱히 넘길 순 없었다. 평소 생신에도 몇몇 친지들이 모여 <밥>은 먹어왔으니, 날 잡아서 조촐하게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마다해도 환갑 기념이라며 맏사위를 위해 고운 한복까지 맞춰 보내셨다.  

환갑 안한다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며 화를 내다시피 했던 아버지는 결국 친가, 처가 가족들이 모여 <간단히 밥을 먹는> 그 자리에 장모님 소원대로 엄마와 나란히 한복을 입고 참석하셨다. 음식점에 미리 부탁해서, 그간 은밀하게 아버지의 옛날 앨범을 뒤져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사진을 모아 삼남매와 올케들의 영상편지까지 담은 영상물을 틀었던 그날 우리 삼남매와 다른 친척들은 다들 뿌듯해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버지는 몹시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바로 다음해였던 엄마의 환갑은 연달아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엄마의 완고한 고집으로 부부동반 여행으로 대체되었고, 또 10년은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오래 걸릴 것만 같던 10년이 어느새 흘러 엄마의 칠순생신을 고민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친척분들 모두 환갑은 건너뛰는 분위기여도 칠순에는 다들 모여 맛있는 밥을 먹어왔고, 가뜩이나 홀로 남은 엄마의 칠순 생신은 그냥 넘겨선 안된다는 것이 역시나 집안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늬 아버지를 봐라. 그렇게 빨리 갈 줄 아무도 몰랐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늬 아버지 환갑 안 챙겼으면 어쩔 뻔했니? 니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한이 됐을 거다."

아버지 환갑 때도 음식점을 알아보고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초청하는 과정을 내가 주동한 전적이 있었으며, 그땐 부모님 몰래 큰동생이 영상물 만드느라고 사진 고르고 녹화하고 제법 법석을 떨었는데도 즐겁기만 하더니 이번엔 왜 모든 과정이 온전히 스트레스로만 여겨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에도 주인공이신 왕비마마가 민망하다며 모임 같은 거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다. 하지만 "남편 앞서 보낸 여자가 무슨 염치로 생일잔치를 하느냐"는 엄마의 자학성 핑계는 용납되기 어려운 발언이다. 친척 어르신들은 엄마가 혼자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칠순을 그냥 넘기면 안된다는데!

잔치가 아니라 그냥 밥 한끼 먹는 것 뿐이라며 엄마를 계속 달래는 한 편, 두 동생 부부와 의논하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고 음식을 정하고 참석인원을 확인해 연락을 취하며,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소망이 다시 떠올랐다. 어쭙잖게 니체를 읽고 전혜린을 읽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에게 "딱 예순살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장담하고 다녔었다. 생존해 계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는 상관없이, 단지 나의 노년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생각됐던 것 같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은 최대한 오래 사시는 게 좋겠지만, 나는 홀로 씩씩하게 딱 예순살 까지만 살다가 깨끗하게 죽겠노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그래 어디 두고보자"며 나를 흘겨볼 뿐이었다. 그런데 요번에 엄마 칠순을 준비하며 문득 세월이 흘러 나중에 누가 내 칠순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고 칠순이라며 주인공으로 떠밀리는 게 싫어서라도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저도모르게 하고 앉았더라는 뜻이다.

예순살까지 살겠다던 어린 시절의 나는 분명 환갑 잔치 따위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고 다만 그 이후 노년의 삶이 막연히 구질구질할 것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칠순 생일의 부담으로 또 다시 내 수명을 재단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칠순을 <가족모임> 행사로 치르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밥먹기 행사 대신 칠순에도 가족여행을 떠나는 집이 있다지만, 울 엄마의 건강으로 보나 시기적으로 보나 그건 실행되기 어려운 대안이다. 어차피 매년 우리끼리 생신밥은 먹어왔으니 그걸 좀 확대시킨 것뿐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다. 문제는 부모님 형제가 많아놔서 그 자손들까지 모이면 4, 50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삼남매가 나누어 분담한다고는 해도, 규모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분위기며 음식 맛, 입을 옷까지 시시콜콜 미리 걱정하는 나 같은 소심증 환자에게는 더더욱!

사실 욕을 좀 먹을 각오만 한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아무리 들쑤셔도 엄마 본인의 뜻대로 칠순같은 거 안 챙긴다고 통보한 뒤 시치미 뚝 떼고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 건강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쓸만한 핑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남들(친척도 남이라고 치면) 눈 의식해서 자식으로서 속물스럽게 생색을 내려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옛날부터 환갑이나 칠순 때 잔치를 여는 목적은 장수를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자손들이 그 정도 거나하게 잔치를 해줄 수 있을 만큼 번창했음을 자랑하려는 노인들의 허세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해서 일부 노인들은 자식들의 능력이 되든 말든, 잔치 때문에 빚을 지든 말든 남부끄럽지 않게 소리꾼들까지 불러다가 왁자지껄 노는 잔치를 강요한다던데, 울 엄마가 그런 부류의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깊이 감사할 일이지만 그냥 조용히 밥 한끼 먹는 것뿐이라고 여기래도 난감해하며 지레 생병을 앓아 속을 썩이는 상황도 녹록치가 않다.

과연 울 엄마의 진짜 속마음은 무얼까. 말로는 모임 안 했으면 좋겠다지만 내심 뿌듯해하며 잔칫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의지에 반하는 칠순잔치의 억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노라는 생각이 들만큼 회의를 느낀 내 마음처럼 엄마도 정말로 싫은 걸까. 그렇게 싫다는데 연회 예약을 취소하는 대신 엄마에게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오라고 말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홧김에 다 확 취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드는데, 정말로 그러면 울 엄만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까.

어쨌거나 이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달 넘게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극도로 높인 왕비마마의 칠순 모임이 겨우 엿새 뒤로 다가왔다. 토요일이 후딱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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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투덜일기 2009. 11. 6. 16:45

어제 친구 아버님의 부음을 듣고 밤에 문상을 다녀왔다. 작년에 엄마를 여의고 1년 반만에 다시 아버지를 여읜 그 친구에겐 언니오빠가 다섯이나 되는데도 부음을 전하는 전화를 끊으며 퍼뜩 든 생각은 <고아>라는 말이었다. 엄마아빠 다 돌아가셨고 비혼이니 아이는 아니어도 고아인 셈이라는 생각이 든 거다.
여러가지 병치레로 요즘 특히 고통을 겪고 있는 왕비마마가 걸핏하면 빨랑 아버지 따라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 내가 버럭 소리치는 말도 비슷하다. <엄마도 없으면 나더러 고아로 살란 말이야?!>
나이 사십이 넘어서도 부모가 없으면 고아로 느껴지는 유아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새삼 네이버 국어사전을 뒤져보니, <부모가 없는 아이> 말고도 두번째 뜻에 <북한어] 예전에 어버이를 잃은 상제가 스스로를 이르던 말>이라고 돼 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니 한편으로 위로가 되지만, 그래도 역시나 <고아>라는 말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어젯밤엔 문상을 다녀와 잠든 엄마의 어깨 위로 이불을 올려주며, 성질 좀 죽이고 좀 더 다정한 딸이 되어야지 결심했는데, 만 하루도 못돼서 오늘 계속 왕비마마랑 티격태격했다. 종종 정적속에 입다물고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딸과, 온종일 틀어놓은 TV소음을 배경으로 치덕치덕 붙어서 만지고 얘기하길 원하는 엄마의 조합은 늘 어렵다. 
원래부터 오늘 약속이 있어서 외출해야 하는데, 왕비마마는 또 화난 딸의 임시 가출로 여길 게 뻔하다. 특별히 잘못한 것 없는데도 서로에게 뾰족한 말을 날리게 되는 이런 날엔 그냥 침묵의 시간이 약이란 걸 왕비마마는 왜 모르실까. 이럴 때마다 좀머씨가 생각난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 딸 참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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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자

놀잇감 2009. 9. 18. 23:49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최단기간 100만부를 돌파해 기념파티를 했다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싶지가 않다. 내심 궁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나에겐 초대형 베스트셀러 기피증 말고도 엄마를 소재로한 소설이라는 점이 더 큰 요인이다. 거의 매일 24시간 이렇게 붙어지내는 모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울 엄마를 생각하면서 나는 괜스레 저 책을 안 읽기로 마음 먹었다.
영화 <애자>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철부지 딸과 병들어 죽어가는 엄마의 눈물겨운 신파극. 최강희는 세상의 딸들이 엄마랑 손잡고 가서 보기를 권했다지만, 나는 엄마와 둘인 절대로 싫었고 따로도 보기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질질 울기 싫어서 보기 좀 그렇다는 나의 말에, 그렇게 신파조로 슬프지 않고 밝게 그려졌다니 볼만할 거라고 지인이 설득을 했다. 그분에게도 병들어 누워계신 엄마가 없었다면 아마 난 끝까지 안보겠다고 우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만나면 서로의 어머니 건강을 염려하는 사이인지라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따라나섰다. 

애자도 예쁘고 작가지망생의 저 방도 마음에 든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애자>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원래부터 최강희는 내가 퍽 선호하는 배우이고 김영애 아줌마의 연기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나머지 조연들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다. 이름도 하필 <동팔>이어서 돌팔이 의사라고 놀림받는 최일화도, <찬란한 유산>에선 별로 매력을 못살렸지만 <바람의 화원> 정조 역할로 나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배수빈도, 낭랑한 목소리 때문에 좋은 장영남 편집장도,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김C도!
요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유독 많은 것 같은데, 외지인인 내가 보기엔 어색한지 안한지 잘은 몰라도 가끔 <몬 알아듣는> 대사가 있어서 좀 답답하긴 했다. 해운대 볼 때는 최소한 열마디에 하나쯤 못알아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도 강하고 세고 독하기까지 한 두 모녀의 캐릭터엔 아마도 경상도 사투리가 필수적이었을 것 같다. 
우려했던 대로 꽤 따라울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 지끈거릴 만큼 피곤하게 울리는 영화가 아니어서 좋았고 툭툭 던지는 퉁명스러운 모녀의 대사하며, 구석구석 세심한 부분까지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이 좋았고, 특히 죽음과 병을 다루는 방식이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신파 극심한 영화처럼 병든 엄마가 끔찍하게 아파하며 관객을 고문하는 장면이나 뒤늦게 철든 딸의 한스러운 통곡 장면이 너무 길면 어쩌나 몹시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다.
만에 하나 죽기 전에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아마도 그건 울 엄마 얘기 일 거라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어쩌면 세상의 모든 딸 마음 속엔 애자가 하나씩 들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간만에 유리알 가득 미세한 눈물방울이 흩뿌려져 있어서 하...하... 뜨거운 입김을 불어 안경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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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에 대하여

삶꾸러미 2009. 9. 15. 18:27
예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주말에 놀러가 함께 저녁을 먹다 보면 늘 되풀이되는 광경이 하나 있었다. 밥상 아래로 자꾸만 밥풀이나 반찬을 흘리는 할아버지를 타박하시는 할머니의 목소리.
양반은 모름지기 매끄러운 놋쇠 젓가락으로 청포묵 하나를 집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입까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젓가락질에 능해야한다며 코흘리개 시절부터 우리 손주들에게 엄하게 젓가락질을 가르치셨던 바로 그 할아버지가 진지를 잡수시면서 뭔가를 흘린다는 건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물론 할머니도 가끔 입가에 밥풀 같은 게 묻었는데 느끼지 못하실 때도 있지만, 그런 사실을 잘 아는 할머니는 수시로 입가를 닦거나 스스로 밥상 아래를 살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밥상을 치우고 나서도 매번 지저분한 할아버지 자리와 달리 할머니 자리는 늘 깨끗했다.
게다가 골초였던 할아버지한테선 늘 심한 담배냄새와 함께 할아버지 특유의 냄새가 났는데, 할머니는 그게 늙은이 냄새라면서 질색을 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은 늙은이 냄새 나면 애들이 싫어한다며 언제나 바지런하게 씻고 로션(할머니 용어로는 여전히 '구루무')을 바르셨는데, 정말로 우리 할머니한테선 노인 특유의 냄새를 느낄 수 없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6개월쯤 다시 할머니와 한집에서 동침하며 살던 시절, 내가 새벽녘에 컴퓨터를 끄고 옆방으로 들어가 부시시 할머니 옆자리로 파고들면 할머니는 나를 꼭 안아주셨는데 팔순이 넘어서도 아기피부처럼 매끄럽고 반들반들한 할머니의 팔다리를 어루만지면 금세 잠이 들었다. 마지막까지도 우리 할머니한테선 흔한 노인냄새 대신 우리 할머니만의 달콤한 체취가 났던 것 같다. 역시나 팔순 넘어서까지 전국 방방곡곡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만큼 정정했던 우리 외할머니한테서도 노인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다. 친할머니처럼 잘 때 껴안고 자는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주 뵙고 팔다리 주물러드리고 했으므로 충분히 체취를 맡을 기회는 있었을 텐데.

내가 늙음에 대해서 새삼 생각하게 된 건 엄마 때문이다. 올해 나이 예순 아홉. 아직도 나에겐 아줌마 영자씨가 익숙하지만,  어느 누가 봐도 할머니라고 인정할 나이다. 요즘엔 특히 젊게 사는 노인들이 많아 칠순 넘어서도 펄펄 날아다니며 건강을 자랑하는 분들도 많지만, 지병도 많고 마음도 약하고 의존적이기까지 한 울 엄마는 그들과는 확실히 다른 그냥 할머니로 늙어가고 계신다. 그간의 여러 병력을 따져본다면 이 정도 회복도 고마워 해야 하는 수준이고, 노인으로선 그게 당연한 건데도 내 마음 속 어린아이는 젊은 엄마를 포기할 수가 없는 모양인지 자연스레 노인의 특징을 보이는 엄마가 매번 놀랍고 속상하고 서글프다가 버럭 짜증이 치민다. 
노인들이 밥풀이나 반찬 양념이 입가에 묻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입주변의 근육과 신경이 노화해 정말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입술과 혀의 놀림도 자연히 전보다 날렵하지 못해 음식을 입에 넣거나 씹을 때도 흘릴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울 엄마는 당뇨 합병증으로 말초신경이 상해 손가락 소근육의 움직임이 원할하지 못해 젓가락을 떨어뜨리기 일쑤이니 오죽하랴. 엄마 티셔츠를 보면 하나같이 앞섶에 보일락말락한 얼룩이 묻어 있다. 음식물을 흘린 자국이다. 미리 알아차렸을 때는 얼른 애벌빨레를 하거나 문질러 지우기나 하지, 몰랐다가 그냥 세탁기에 돌리고 나면 나중엔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식탁 밑 엄마 자리도 흘린 음식물로 매 끼니마다 어지럽다. 어린 조카 밥먹고 난 자리랑 똑같다고 농담을 하면서도 치우자면 버럭 화가 난다.
진짜 화가 나는 대상은 인간의 노화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편협함인데, 짜증과 분노는 늘 엄마에게 날아가고 만다. 숟가락질에 서툰 아이가 밥을 흘리는 게 당연한데도, 그걸 치우는 게 짜증나서 애한테 화풀이는 하는 몹쓸 엄마처럼.
며칠 전엔 심지어 울 엄마한테서도 드디어 노인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사로잡혔다. 노인 특유의 냄새는 피부 노화로 떨어진 죽은 세포와 각질 때문이라 완전히 피할 순 없으니 잘 씻고 향수를 사용하는 수밖엔 없다고 들은 듯하다. 빨간 립스틱 하나 바르는 게 화장의 전부인 울 엄마가 향수를 쓸 리는 없고, 벌써부터 춥다고 매일 샤워는 안할 태세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새삼 느껴진 모양이다. 쓸데없이 민감한 나만 가끔 감지할 정도이긴 하지만, 끈적거린다고 바디로션 바르는 것도 싫어하는 왕비마마의 노인 냄새를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청력도 나빠져 TV도 거실을 왕왕 울릴만큼 틀어놓아야 하고, 돋보기가 없으면 작은 글씨는 전혀 볼 수가 없으며 기억력도 현저히 나빠져 했던 얘기를 자꾸 되풀이해 당부하는 엄마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저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데도 딸로서 선뜻 수긍하게 되질 않는다. 그건 본인도 마찬가지라 나보다 더 속상할 텐데 화를 내는 건 언제나 못된 딸이다.
조금 전에도 늙은 딸 먹으라고 복숭아를 주고 가면서 끈적끈적한 과일물을 사방에 뚝뚝 흘리며 먹고 다니는 엄마에게 와락 신경질을 부렸다. 식탐에도 여러종류가 있지만 울 엄마의 식탐 특징은 입 한가득 넣고 씹는 쾌감을 유독 즐기신다는 점이다. 예쁘고 정갈하게 자른 과일을 포크로 얌전하게 찍어먹는 건 절대 울 엄마 스타일이 아니다. 무조건 통째로 들고 우적우적 크게 베어먹어야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보다. 아오리나 홍옥사과는 나도 당연히 그렇게 먹어야 제맛이라고 인정하지만, 단물 뚝뚝 흐르는 복숭아 같은 건 좀!!!
당연히 눈도 어두워졌으니 늙은 엄마가 닦는다고 해봤자 끈적임을 말끔히 닦아낼 리 만무해 두어군데는 빼먹기 일쑤인데 걸레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종목. 결국엔 내몸 편하자고 내는 화풀이였던 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안계셨던 것도 아니고 팔순 넘어 시들어가시는 그분들을 익히 지켜봤으면서도 늙어가는 엄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잘 안되는 걸 보면 나란 인간은 늙음에 대한 지극한 공포를 품고 있나 보다. 늙기 싫어서 발악하는 사람들의 흉한 모습을 손가락질하면서 말로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게 멋진 거라고 주장하지만, 나 또한 다른 방향으로 흉하게 발악하며 억지 용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확실히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는 지나버렸으니 아쉽고 중년도 노년의 미래도 선뜻 받아들이는 건 싫으니 천상 이게 철 안든 사십대의 청승이 아니고 무언가. 스무살 무렵의 유치한 나는 예순살까지만 열심히 살다가 죽으면 좋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적이 있다. 아마 그때도 죽음보다 늙음이 더 무서웠던 건 아닐까.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이치라고 고개 끄덕이기엔 늙음이 가져오는 심신의 흐트러짐이 너무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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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

삶꾸러미 2009. 7. 21. 17:10

최근에 목도한 어떤 죽음, 아니 죽음 이후 산자들에게 남겨진 의식의 절차와 과정을 지켜보며 마음이 참 착잡했다. 확실히 장례는 망자보다, 남겨진 산자들을 위해 그것도 남들에게 뵈주기 위해 치르는 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게, 최소한 흉하지 않게 죽음을 치러내려면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코미디 소재로 사용될 만큼 흔해진 상조회사들의 존재는 바로 그런 필요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상조회사들의 도움과 비용, 제례 준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의식이 장례라는 점이다.
혼례는 하객을 많이 부르지 않고 간소하고 조용히 치러도 의식 있는 이들에게 칭송받을 수 있으며 단 둘이서도 얼마든지 치를 수 있지만, 장례는 절대 그렇질 않다. 버젓이 배우자와 자식도 있고 친지들도 있는데, 문상객이 거의 없고 살뜰하게 곁을 지키는 사람들이 드물어 운구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 망자와 가족들이 살아온 방식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들은 의례적인 품앗이가 싫어 안주고 안받겠다 여기며 살았을 지도 모르고, 단순히 반사회적인 성향 때문에 은둔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딱히 그들의 태도가 누구에게든 해악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말릴 도리도 없고 잘못이라고 여길 이유는 없다. 특히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선 그런 삶의 방식이 주변인들에게 민폐일 수 있음을 이번에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지인들의 좋은 일은 모른 체 해도 나쁜 일엔 모른체 하면 안된다는 옛말이 철저하게 옳다는 것도 비로소 새삼 깨달은 것 같다. 과거 조부모님, 외할머니, 그리고 아버지까지 상을 치르며 나는 오히려 너무 많이 몰려드는 손님을 버거워했고 슬퍼할 겨를 없이 문상객 접대에 힘써야 하는 장례문화를 개탄했을 뿐, 그렇게 찾아주고 상주들의 곁을 지키는 문상객들의 존재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막힐 정도로 한산하고 썰렁한 장례를 지켜보니 확실히 죽음도 사람의 일이기에 사람이 필요하며, 사람은 돈만으론 살 수 없는 복이고 재산이란 게 실감된다. 가끔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짜증스럽고 관계의 유지가 힘들어도 계속해서 <잘하고> 살아야할 이유가 생긴 셈이다. 단순히 물질과 노동의 품앗이를 위해 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의 도리라는 것, 사람들에게 마음의 곁을 내주는 역사를 쌓아간다는 것,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선뜻> 지인을 지켜줄 진심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무시해선 안되겠다는 말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은둔이 자타에게 모두 편리함이겠지만, 죽음 이후엔 민폐일 수 있다는 점은 사실 이번에 내게 아득한 충격이었다. 사후세계를 부정하든 않든,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든 알든, 죽음이 남겨진 이들에게 민폐인 삶이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겠나. 앞으로 현대인들 대부분은 더욱이 독거노인으로 살다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데 과연 내가 <잘하고>살려고 노력하더라도 마지막은 민폐를 면할 수 있는 삶일까. 그건 장담할 수 없겠지.
삶은 살수록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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