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09.05.30 이유 6
  2. 2009.05.25 그날 9
  3. 2009.05.21 품위있게 죽을 권리 3
  4. 2009.03.04 쌍화점 + 워낭소리 14
  5. 2009.01.24 사진 7
  6. 2009.01.11 돌아감 9
  7. 2007.04.04 문상 3

이유

하나마나 푸념 2009. 5. 30. 16:40

그저 궁금했다.
인간적인 연민과 슬픔이야 나도 느끼는 것이지만 무작정 미화되는 그의 모든 정치행적에 동감할 순 없었기에 조문은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저께밤부터 시청앞엔 나가서 머릿수를 보태야한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죽음의 정치적 이용이니, 소요사태 우려니 하는 돌머리 인간들의 입바른 말도 나의 삐딱함을 부추겼다. 촛불과 광장 공포증에 걸린 듯한 현정부를 조롱하는 의미에서라도, 그리고 자기 재직시절에 만든 광장이라 제 땅인줄 착각하는지 명바기가 걸핏하면 차벽을 쌓아 막아놓는 시청앞 잔디도 좀 밟아주고 싶었다. 굳이 덕수궁으로 찾아가 꼬박 세시간을 기다려 조문을 하고도 마지막날 밤 아직 조문 못한 지인을 데리고 또 가보겠다는 측근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오며 궁금증이 동하기도 했다. 봉하마을과 덕수궁을 비롯한 빈소를 지키고 찾아가고 일주일 내내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이들이며, 현직때는 그토록 욕하며 낮은 지지율을 보이더니 국민들이 고인의 열혈지지자로 돌변한 이유는 뭘까. 
영결식은 관두고 처음부터 1시 노제를 목표로 했으면서도 뜨거운 햇살아래 나서는 게 망설여질만큼 시큰둥한 참여자였던 내 눈으로는 도무지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해서 어떻게든 뭉뚱그려 파악할 수 없었고 검은 물결속에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노란 풍선과 노란 모자 때문에 분위기는 숙연하면서도 경쾌하기까지 했다. 노제가 끝나고 눈물로 영구차를 떠나보낼 무렵, 나로선 가족에게도 잘 하지 않는 말인 "사랑합니다"라는 외침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크게 따라했다. 다들 울며 잊지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그 옆에서 나는 속으로 "정말? 과연 그럴까? 그 다짐들이 얼마나 갈까?"하며 의구심을 되뇌이고 있었다.

추도사를 거부당한 김대중 대통령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국민들이 이토록 슬퍼하는 건 민주주의가 퇴보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대중과 국민을 위한 정책과 정치는 사라졌고, 순순히 말 안들으면 잡아 가두고 일터에서 쫓아내 굶겨 죽이겠다는 서슬 퍼런 칼날만 휘두르는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늙은 엄마와 어린 조카까지 이끌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 촛불을 들러 나갔을 때, 나는 광장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사기꾼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이긴 해도 대중들만 똘똘하게 지조를 지키면 일개 권력자가 나라를 완전히 들어먹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촛불의 물결에 놀랐는지, 반성하겠노라며 겸허히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던 사기꾼 대통령은 손바닥 뒤집듯 이내 태도를 바꾸었고, 군사독재 시절처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걸핏하면 잡아가두는 공포정치를 실천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도 예전과는 다르다. 대의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이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광우병 우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었던 건, 정치적 대의보다는 유달리 건강에 신경을 쏟는 현대인들의 강박증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자기네 집값 땅값 올라가고 재산 많이 모으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철거민 세입자들이 길바닥으로 나앉든 말든 시위하다 죽어가든 말든 조금도 관심 없고 주거환경 나빠진다며 주변에 임대아파트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요즘 국민의 전형이다. 어차피 연임도 안되는 대통령은 3년만 더 참다가 갈아치우면 된다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수치심 없이 탐욕을 최고 선으로 당연시하는 한 희망은 없으니 그게 더 큰일이다.

어쩌면 어제 나는 수십만명이 운집한 시청앞 광장에서 또 한번 희망을 꿈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없이 방송에서 되풀이되는 고인의 과거 영상 속에서, 살기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 끊는 사람들이 더는 없는 공평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나도 그를 믿고 지지했던 때의 장면을 보며, 어느 노동자의 분신 자살 사건을 두고 이제는 분신으로 자기 뜻을 관철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냉혹하게 말하던 재임 대통령 시절의 그가 떠올랐었다. 그러던 그 역시 스스로 몸을 던져 자신의 뜻을 표했으니, 이 사회는 여전히 수십년 전의 불공평하고 암울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몸소 입증했다는 의미다. 파르르 쉽게 들끓었다가 또 단세포 동물처럼 쉽사리 잊기를 잘하는 이 나라 국민들도, 과거엔 억울한 죽음 앞에서 퍽 의미있게 여론을 수렴해 역사와 사회에 변화를 이끌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젠 웬만한 죽음 앞에서도 쉽게 고개를 돌리는 이기심이 팽배하고 있지만, 부디 이번 죽음은 유의미한 국민들의 자각을 오래오래 이끌어주기를 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고 하더라도 제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토록 가열된 추모열기를 촉발할 순 없었을 테니까.
내 손으로 투표를 해놓고도 정말 대통령이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감격했고, 말도 안되는 탄핵 사태때는 연일 광화문으로 달려가 촛불을 들었으되, 그 이후로는 거의 모든 정책에 실망해 계속 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나는 특별히 미안할 것도 없지만, 퇴임 후에도 언론의 무시와 억측 속에 고뇌에 찬 극단의 선택을 한 그의 죽음이 나 역시 안타깝고 서글펐기에 어제 시청앞에 나간건 어쨌거나 잘한 일인 것 같다. 이젠 남겨진 자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뿐인데, 또 다른 절망의 가능성도 없지 않으므로 섣부른 희망의 여지는 아주 조금만 남겨둘 작정이다. 삼성재벌은 면죄부를 받았고, 시청앞 광장은 다시 빼앗겼고, 고인에 헌화하며 야유를 받았던 명바기는 뜨끔하기 보다는 속으로 이를 갈았을 거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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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마나 푸념 2009. 5. 25. 17:26

2009년 5월 23일.
막내 조카가 만 세돌을 맞는 날이었다. 막내동생네 집으로 축하하러 가기 전에 조카가 좋아하는 약식을 만들 작정이라 다른 날보다 일찍 알람을 맞춰놓고 자는데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웠다.
이어지는 뉴스 속보를 계속 보면서도 멍한 느낌일 뿐 믿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화면과 원고 읽기가 되풀이되다가 한시간쯤 지나면 새로운 속보가 이어지는 TV를 계속 틀어놓고 나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약식을 만들어 잣으로 하트를 그려넣었고, 조카에게 줄 생일카드를 적었고, 짤막한 유서 내용이 공개될 즈음 조카들과 놀아주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으려니 큰동생이 물었다. "누나는 조문하러 봉화마을에 안 가냐?"
"나 노사모 아냐! FTA이후로 나 노무현 버렸잖아!" 나는 버럭 화를 내듯 말했다. 왜 화가 나는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꽤 오래 담배를 끊었다가 몇해 전부터 다시 골초가 되어버린 큰동생은, 그 순간 만약에 경호원에게 담배가 있었고 그래서 그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문득 나는 2년전 아버지의 죽음 뒤 수없이 <만약에>를 상상하며 자책했던 모녀를 떠올렸다.
만약에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더라면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을까.
만약에 몸살 기운 있는 아버지의 전날 등산을 못가게 말렸더라면.
만약에 응급실 의사가 엉뚱한 말라리아로 의심하는 대신 뇌수막염을 먼저 의심해 척수검사를 했더라면.
만약에 아버지가 숨겼던 건강진단 결과서류를 진즉에 내가 빼앗아 읽었더라면...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조카들의 재롱에 깔깔 웃고 있던 저녁 무렵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마음이 아파서 혼자 술 한잔 하고 있는데 전화 할 데가 없더라..."
2002년 대선에서 선거 전날밤 정몽준이 전격적으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를 발표했을 때, 마침 메신저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 녀석이 손수 만든 전단지를 들고 나가 동네에라도 뿌려야겠다고 울분에 떨며 접속을 끊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시답잖은 위로랍시고 몇 마디를 떠든 뒤 이내 전화를 끊었고, 다시 조카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며 웃어댔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계속되는 뉴스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도 가슴 깊은 곳의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나 말고도 화와 분을 삭이지 못한 이들이 더러 뉴스에 비쳤지만 그들의 분노와 내 화가 같은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화는 묵직한 응어리로 내 팔다리에 매달려 나를 자꾸 끌어내리고 있는 듯하더니, 이제야 비로소 영정사진이며 생전 영상을 볼 때 눈물이 난다. 이제는 편한 곳에 계시길 빈다는 말, 명복을 빈다는 말을 하거나 쓰는 것도 구차하게 느껴지는 내 기분은 아직도 슬픔보다 분노에 훨씬 더 가깝다. 안과 밖을 동시에 향한 나의 분노가 속으로 곪을까봐 결국 배설하고 있는 이 행위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또 화는 꼬리를 문다. 그래도 이건 오래 담아두고 기억하고 끝까지 지켜보리라는 결심의 기록이라는 것으로 위안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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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대법원에서 존엄사 권리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소송중이었던 환자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 같은데, 얼마 전 서울대병원에서도 말기암 환자의 경우엔 별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을 존엄사의 범위와 관련법 제정 문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진척이 있는 듯 해 기쁘다. 소모적인 중병으로 오래 앓지 않고 편히 자연사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사람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수명이 나날이 길어지면서 말년에 온갖 병마에 시달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게 사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죽음을 맞게 되어 있지만, 자살을 제외하곤 그 운명의 순간을 자기 의지대로 결정할 방도가 없었다.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는 물론이고 이제껏 중병에 걸린 환자의 치료방향에 대한 결정권은 언제나 의사와 보호자의 몫이었다. 입원할 때부터 치료비를 담보할 수 있는 연대보증인을 반드시 세워야 하고, 아주 간단한 수술에도 각종 의료사고에 대한 온갖 책임을 다 짊어지겠다는 보호자의 동의서가 필수적인 이 나라 의료체계에서는 무엇 하나 환자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회생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 의미도 없고 소모적이기만 한 연명치료를 무작정 이어가며 환자 본인과 가족들을 경제적,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뜨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치료비가 없거나 병상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살아날 가망성이 있는 환자의 목숨을 비정하게 끊어버려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당연히 살인이고 파렴치한 범죄임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치료의 단계가 아예 불가능해져서 진통제로도 고통을 제대로 줄여줄 수 없고, 전적으로 기계장비에만 의존해 고통스럽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죽음의 순간을 억지로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라면, 그 환자가 바로 나라면 나는 환자의 인권따위를 운운하는 게 하찮게 보이는 중환자실의 숨막히는 공기를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을 것이고, 기꺼이 편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가족의 입장에선 또 마음이 달라짐을 나 역시 잘 안다.
2년 전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멀쩡히 걸어다니며 농담을 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시지 않았을 때, 우리 가족들은 냉정하게 가망성을 낮춰 말하는 의사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린 의사들을 믿느니,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 등산을 다니시던 울 아버지의 의지력과 건강을 믿는다며, 고집을 부렸다. 겨우 2주만에 뇌손상으로 적극적인 치료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요양병원 같은 곳으로 모시고 나가라는 세브란스 병원측의 몰인정한 통보를 받고도 우린 아버지가 곧 깨어나실 것이기 때문에 믿음직한 의료진이 없는 요양병원 같은 곳은 절대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온갖 연줄과 인맥을 동원해 다른 대학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나서도 우린 희망을 버릴 수 없었고, 의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든말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장기 입원에 대비해야 한다고 의논을 했었다. 그땐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렇게 온갖 주사와 약물로 버티고 있으면 기적 같은 게 일어나 아버지가 조만간 번쩍 눈을 뜨실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날이 약물과 주사의 양이 늘어났고, 체액순환이 거의 안되는 아버지의 체중도 늘어났다. 의사들은 <뇌사 직전의 상태>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아직 뇌사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고 우기는 우리들에게 의사들은 그나마 아버지가 그 어떤 고통도 느끼실 수 없으니 다행이라는 식으로, 아버지를 우리가 쓸데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었다. 마지막엔 거의 협박처럼 들리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보호자들의 고집 때문에 무리한 치료를 계속하게 되면 나중에 임종후에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고. 우리 아버지도 그 병원으로 옮긴 뒤부터 따져도 이미 10kg이나 체중이 늘었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의사들이 냉혹하게 퍼센티지로 말하는 가망성에 연연하지 않고 온갖 치료방법을 동원해 아버지를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최선을 다해보지도 않고 쉽사리 처음부터 포기할 가족이 어디 있겠나. 야속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한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는데, 너무 많이 부어 평소의 모습과 퍽 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켠에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한다. 억지로 온갖 약물과 주사액을 주입하던 과정에서 혹시 아버지가 고통을 느끼셨던 건 아닐까, 내 마음 편하자고 심한 고집을 부린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죄송한 마음은 마음이고, 가족으로서 품는 희망은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쪽을 선택했더라도 후회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여한없이 노력하고 버텨보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환자의 입장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센터 중환자실에 계시는 동안 그곳 의료진들은 무의식인 환자의 치료를 편하게 하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버지에게 환자복도 입히지 않은 채 얇은 시트로 덮어놓기만 했었다. 중환자실에서도 홀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체온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해당 바이러스에 맞는 항생제를 찾는 게 시급한 상황이긴 했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인권을 찾는 게 사치일 순 있어도, 평생 점잖으셨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내가 아무리 의식이 없는 환자라도 발가벗겨져 아무렇게나 의료진의 손길에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품위 있게 죽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조목조목 따질 순 없지만,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으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기필코 나는 그 방법을 택하겠다. 타인이 주체가 되어 거의 의도적인 살인의 의미마저 풍기는 <안락사>라는 말 대신 <존엄사>라는 말이 쓰이게 된 배경에도 환자 본인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들어있을 것이다. 존엄사 결정권에 대한 엄밀한 법적 통제와 의사들의 정직한 직업윤리, 환자 및 보호자의 인권을 모두 감안한 도덕적인 존엄사의 존재는 정말로 환영할 일이다. 부디 엄숙한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이 제도가 맹목적인 종교 윤리를 앞세운 무작정 반대나 패륜의 도구로 이용되는 일 없이, 진짜로 품위있게 죽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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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상열지사-스캔들>로 사극영화에 대한 내 눈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에 이후 사극들은 대부분 실망스러웠고 딱히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었다. <쌍화점>도 나만의 게으름 수준으론 호기심이 일기는 했으나 결국 놓쳐버리기 쉬웠을 영화였다. 하지만 조인성과 주진모의 아리따움을 꼭 나와 함께 보고 싶다는 지인의 부지런한 검색 덕분에 개봉관에선 이미 내린 이 영화를 씨네큐브의 이대 분관인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미술감독 기획전의 일환으로 예매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화를 보기 전날밤, 공교롭게 주진모가 백상 연기상을 타는 바람에 조인성의 엉덩이와 별도로 주진모의 연기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증폭되었다. 
영화를 보기 전 김기철 미술감독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보니, 내눈엔 어째 몹시 거슬리는 중국풍의 인테리어와 의상들도 그러려니 용납할 수 있었다. 어차피 원의 부마국 지위인 고려 궁궐에 중국풍의 소품들이 가득 차있는 걸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고, 어차피 고증에 참고할 자료들도 거의 없는 마당이니 나머지 여백은 상상력으로 채워도 무방했단 말이 맞다. 이야기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역줄거리가 연상되는 레이스 같은 옷깃들은 좀 과했다 싶었다. 
어쨌든, 나에게 <쌍화점>은 충격이었다. 내가 한국영화 자주 안 본 사이에 노출 수위가 그렇게 높아졌었나 싶게 놀라운 장면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래서 거슬렸다기 보다는, 작품성보다 마케팅에 우선적으로 이용되었을 영화의 선정성이 어쩌면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 감상을 방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죽여가며 본 주진모, 조인성, 송지효의 연기는 예상외로 모두 좋았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막으로는 조인성이 제일 먼저 나오던데 연기로는 역시 주진모가 상을 탈만하다 싶었고, 그의 눈빛과 눈물에 제일 마음 아팠다. 영화에 삽입된 가시리와 쌍화점 노래가 멋지단 얘기를 원래부터도 듣고 갔지만, 예상보다도 더 좋더라. 고려가요를 다시 공부해보고 싶어질 만큼.
하지만 지나친 피칠갑 장면들은...
유하 감독의 영화를 내가 잘 못보는 건 역시나 그 처절한 격투 장면 때문이다. 조폭도 싫고 싸움도 싫어서 <비열한 거리> 같은 영화는 아예 볼 생각도 하질 않는 사람이 바로 나다. 그래도 보게 된다면 잔혹한 싸움질 장면마다 피 튀기는 걸 못 견디겠어서 눈을 감고도 또 손으로 눈을 가리는 건 내 버릇이다. 앞으로도 이 감독의 영화를 또 보는 기회가 생기면 미리 마음 좀 더 다잡고 가야겠다.
아무려나... 턱없는 제작비에 맞추느라 왕의 공간으로 세트를 꾸며 일주일 찍은 다음에 다시 뜯어서 다시 왕비의 공간 세트를 만들어 또 일주일 찍는 재활용을 감행해야 했으며, 칼 하나도 우리나라에서 쇠로 제대로 만들면 2백만원인데 중국에서 만들어오면 40만원에 불과하니 5백자루쯤 되는 칼은 물론이고 의상도 대부분 중국에서 제작해 들여와야 했다는 후일담을 들으니 뒤늦게라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준게 잘했다 싶었다. 

<워낭소리>가 관객 2백만을 돌파할 거라는 뉴스가 나온 바로 그 주말에 나도 일조를 했다.
원래 떼거리로 우르르 휩쓸리는 걸 싫어해서 베스트셀러도 잘 안 읽고 너무 잘 나가는 영화는 보기 싫은 심술이 작용하는 바람에 처음엔 보고싶었다가 최근 들어서는 그냥 건너뛰려고 했었는데, 왕비마마가 보고싶다는 한 마디에 그냥 못이기는 척 넘어갔다. 몇년 째 씨네큐브에 다녀봐도 객석이 절반 이상 차는 걸 거의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놀랍게도 울 엄마 같은 어르신들이 부부동반으로, 가족동반으로 엄청 몰려들더라. 이 추세라면 3백만 돌파도 어렵지 않겠구나 싶어서 한편으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다시 심술이 동했다. 
나 역시 여러 번 눈물을 쏟았고 감동스러운 장면들이 많기는 했지만, 작품성으로 따져볼 때나 이야기 면에서 <워낭소리>는 다큐멘터리 독립영화의 최고 걸작도 아니고 힘겨운 독립영화 제작 현실에서 어떤 기준이 되어서도 안될 작품이다. 그런데 예상 밖의 흥행 때문에 이 영화가 단순한 인간들의 탁상공론에서 본보기 같은 것으로 자리잡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듯 싶다. <워낭소리>의 감동을 이어 다른 다큐멘터리 영화들도 계속 보라는 마케팅에 힘쓰고는 있던데 과연...
<워낭소리>에서 내가 제일 눈물을 쏟았던 장면은 비틀비틀 어렵사리 걸음을 옮기는 누렁소의 다리와 나란히 옆에서 움직이던 할아버지의 가느다란 다리가 비춰졌던 순간, 그리고 수의사가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합니다"라고 말했던 순간인 것 같다. 누구의 죽음이든 절대로 마음의 준비가 되지는 않는다는 걸 의사나 수의사는 알고나 이야기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이제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집스러운 노동에서 좀 벗어나 편한 삶을 누리고 계시면 좋겠다. 영화배경이 된 봉화와 그 마을을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겠다는 정신나간 인간들의 들쑤심에서 부디 온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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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꾸러미 2009. 1. 24. 22:52

나이든 어르신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나이들어 죽음을 반기는 사람이야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환자 이외는 아무도 없으리라 믿지만)
적극적으로 죽음을 대비하고 언급하며 자연스러운 수긍의 태도를 보이는 분들과
철저한 금기사항이나 불경스러운 일처럼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는 분들.
"오래살면 뭐하누. 내가 빨리 죽어야지 니들이 편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몸소 늙고 병들어 경험해보지 않고는 말이다.

절에서 흔히 여신도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여든여섯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는 부처에 대한 믿음이 삶의 중심이었고 실제 삶에서도 보살처럼 자식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베푸는 분이셨다. 불교든 기독교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극락과 천국엘 간다고 믿으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데는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암튼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우리 외할머니만큼 죽음을 자연스레 대한 분도 없었던 느낌이다.
"나 죽으면 꼭 화장해서 산에다 휘휘 뿌려라."는 외할머니의 말씀은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고
환갑 즈음에는 손수 수의를 장만해두었다가 볕좋은 가을날엔 가끔 샛노란 삼베 수의를 툇마루에 내놓고 거풍과 일광욕을 시키셨다.
처음엔 그게 수의인 줄도 눈치채지 못했다가 하필 내가 놀러간 날 툇마루에 놓여 있는 삼베옷을 만나게 되면 공연히 화가 났다. 인간이 나이들면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자손들 코앞에 죽음을 들이밀어 환기시키는 할머니의 태도가 야속했던 것 같다. 묘자리와 수의를 미리 장만해 놓으면 오히려 노인들이 더 장수한다는 속설도 있으나, 우리 외할머니는 장수를 바라며 수의를 장만해놓으신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냥 그 날을 당신이 손수 준비해두고 싶으신 듯했다.
중한 병환 때문에 이십여년이나 간수해온 수의를 정말로 입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또 자진해서 영정사진을 찍으라 하셨다.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색 철쭉을 배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 나의 사촌동생에게 찍으라고 하셨다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액자에 담겨 1년 넘게 대형TV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입퇴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를 뵈러 집에 갈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며 꽃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정겨움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날의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차마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손수 죽음을 꼼꼼히 준비하셨던 외할머니와 달리, 그보다 10년이나 먼저 돌아가신 우리 친할아버지의 경우엔 남은 가족들이 참 많이 허둥댔던 것 같다. 워낙 정정하셨다가 갑자기 쓰러지시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는 말 따위를 입에 올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여든 중반에 접어드셔선 예전보다 기력이 떨어지시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식사량이나 거동의 정도로 볼 때 우리 할아버지가 백살까지 거뜬히 사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무작정했다.
이북5도청에서 실향민들을 위한 묘지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들과 논의해 조부모님의 묘자리를 장만했지만 할아버지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신 노인들의 수의나 묘자리를 미리 장만하는 건 곧이곧대로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불효가 담긴 행동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우리는 여든을 넘기고 장수하시는 두분의 존재에 그저 감사할 뿐 머지않은 사별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일부러 생각을 거부했던 듯하다. 그저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며...
그러다 황망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린 당장 할아버지의 영정사진부터 고민을 해야 했다.
동네 사진관에서 찍으신 듯한 주민증 사진은 너무 마음에 안들고, 가족사진을 오릴 순 없는 상황이라 결국엔 칠순때 찍으신 기념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들어야 했다. 앓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루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초상을 치르는 일은 온 가족에게 충격이었고 기막힌 슬픔도 슬픔이지만 장례절차도 낯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친할머니때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할머니와 수십년 만에 다시 동침 파트너가 된 나는 할머니의 매끈매끈한 살결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행복을 최소한 몇년은 더 누릴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겨우 여섯달 만에 또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으신 할머니는 야속하게도 끝내 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우린 그때도 영정사진을 마련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고, 우린 또 15년도 넘은 너무 젊은 할머니의 낯선 사진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속앓이를 했다. 왜 예쁜 할머니의 모습을 미리 담아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

죽음을 대비하지 않는 성품도 유전인지 우리 아버지 역시 우리 앞에선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는 일이 거의 드물었고, 우리들 또한 아직 젊고 건강하시다고 굳건히 믿은 터라 언젠가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만 늘 병치레를 하는 우리 엄마보다 하루만 더 살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다. 그래야 자식들한테 부담을 덜 주면서 병든아내를 보필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어쨌든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가 대단히 위중한 상태임에도 우린 도저히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가 한달 가까이 이어지며 의사들이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자 집안 어르신들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 삼남매에게 넌지시 이르셨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기보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와 오래도록 병원생활을 하는 경우를 상상하며 고집스레 그에 대한 대비를 의논했다.
결국 아버지의 임종 후 우리는 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식구마다 디지털카메라를 사들여 그렇게도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데, 막상 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담은 독사진은  드물었다. 간혹 퍽 멋진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영정사진으론 사용하기 곤란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양복을 입은 모습의 여권사진을 쓰라고 조언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등산 나들이 차림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숱적은 머리는 반드시 등산모자로 가린 채로.

장례식장에서 다급히 집에 돌아와 내가 골라간 등산복 차림의 사진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인화지만 있었던 사진이라 확대하는 과정에서 많이 흐려졌고, 아주 최근의 모습은 아니라 나는 또한번 속앓이를 했다. 조카들 사진은 그렇게도 많이 찍었으면서 왜 아버지 사진은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물론 가장 멋진 모습의 아버지는 우리들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고인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 아버지, 그렇게 네번째 장례를 치르며 비로소 깨달은 듯하다.
이번에 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에 세라믹으로 사진을 붙여달게 되면서 또 다시 사진고민에 빠졌던 우리는(그나마도 영정사진으로 썼던 인화지 사진은 돌려받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옛날 디카파일부터 모든 사진파일들과 앨범을 다시 뒤져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드물었던, 산에서 찍은 아버지의 독사진을 이번에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새로 저장해둔 폴더의 날짜를 보면 2007년 7월 1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그건 분명 내가 컴퓨터 파일들을 뒤져 노트북으로 옮겨 장례식장으로 들고갔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 땐 그 사진을 고르지 않았을까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당시 그 사진을 본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슬퍼하느라 다들 경황이 없기는 했지만 노트북에 든 사진들을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같이 뒤졌던 것도 같은데;;;

암튼 화질이 그리 좋지도 않고 크기도 작아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살아생전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잘 담긴 도봉산 오봉 사진을 새삼 발견한 날 나는 슬피 울어야 했지만 그래도 많이 기뻤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제부턴 엄마 사진도 내 사진도 많이많이 찍어야겠다고.
독사진은 영판 쑥스러워 거부하던 것도 이젠 좀 덜해야겠다고.
아직 죽음을 대비하기에 이르다면 이른 나이지만 이왕이면 나는 준비된 상태로  언제일지 모를 내 마지막을 맞고 싶다.
남은 이들이 최대한 덜 허둥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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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감

삶꾸러미 2009. 1. 11. 21:02

어린 조카들이 차츰 말을 배워 적절하게 써먹고 뜻을 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 참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이제 겨우 원할한 소통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나이인 세살 짜리 꼬마가 발음도 어눌하게
"일단은 해보자." "어차피 내 거야." 따위의 말들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른 사람들한텐 어떻게 들리는지 몰라도 난 너무 귀여워서 거의 자지러지는 반응을 보이며 자꾸만 말을 시켜보게 된다.
어른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새겨두었다가 나름대로 적지적소에 배운 말을 써먹는 아이들의 언어능력은 정말이지 깜찍하다.

운좋게도 어른이 된 다음에 할머니, 할아버지 상을 당했던 나와 달리, 너무 어린 나이에 노할머니와 할아버지 상을 당한 조카들은 <돌아가시다>란 말이 죽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임을 이미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말은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되는 불길한 말이라는 것도 어느새 깨달은 듯하다. 더불어 동방예의지국의 후예들 답게 '시'라는 접미어엔 높임의 뜻이 들어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해서 가끔은 너무도 어른스럽게 어른들을 놀래킨다.

재작년이었던가. 탈장수술을 받느라 입원을 해야했던 어린 준우가 병실에 누워 제 엄마에게 심각하게 물었단다.
"엄마, 나 돌아가는 거야?"
어린 꼬마가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사실이 안쓰러워서 눈물바람을 하는 제 엄마 때문에 제딴엔 대단한 중병에 걸린 것으로 오해를 했던 모양인데,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녀석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이나 깔깔거리다가, 죽음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조카들이 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며칠 전엔 또 정민공주 때문에 웃다가 서글퍼진 일이 있었다.
그동안 고모의 직업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도 아니건만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책 때문에 서점에서 제 눈으로 고모의 명성(?)을 확인한 정민이는 새삼스레 고모가 번역한 책들을 욕심내기 시작했고, 처음엔 재미있는 책만 추천해달라고 하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든 번역서를 죄다 한권씩 자기에게 달라고 졸라대기에 이르렀다. 초기 번역서들은 나도 한권밖에 갖고 있지 않은 터라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공주는 내 번역서들이 꽃힌 책꽂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고모 돌아가면 이 책들은 전부 정민이한테 물려준다고 유언장에다 써주라. 아참, 무서운 책들은 빼고 다 준다, 그렇게 써놔. 알았지?"

말로는 걸핏하면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르니깐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가 부족한 하루하루를 핑계대고 있긴 하지만, 죽음 역시 삶의 연속선에 놓여 있음을 실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 조카들이 죽음을 너무도 가까이 실감하고 예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찌나 서글픈지 하하 웃으면서도 가슴엔 뻥 큰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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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

삶꾸러미 2007. 4. 4. 03:14

아닌 척 잊고 살지만, 죽음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매번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든다.

배고파 죽겠네, 신경질 나 죽겠네, 짜증 나 죽겠네,
심지어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네... 따위의 엄살스러운 죽음과 다른 진짜 죽음.
말로는 오늘 내일 당장 사고로 죽을 지 모르는 게 현대인의 삶이라고 늘 떠들어대지만
내심으론 당분간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떠밀어내며 살다가
덜컥 부음을 듣고 나면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면서 아득한 느낌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익숙해진다는 것의 동의어이기도 한 것 같다.
어려선 장의차만 보아도,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만 보아도 섬뜩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고
'월하의 공동묘지', '망우리 공동묘지' 같은 괴담 시리즈가 연상되었다.

제법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문상을 갈 일이 생기면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는 건 도저히 못할 일이었던 것 같다.
간신히 음료수 정도나 마시거나 그것도 그냥 들고 있다가 가방에 넣어오거나
그냥 살며시 테이블 아래 놓고 나올 정도로, 나는 죽음과 관련된 그 어떤 것과도
단절되고 싶었나보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때 본격적으로 초상이라는 것을 치르면서
비로소 죽음도, 죽음의 의식도 그저 삶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다.
온종일 꺼이꺼이 목놓아 울다가 눈이 퉁퉁 부어 떠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도 어느 순간이 되면 허기가 느껴져 육개장에 밥을 말아 입에 퍼넣다 그런 내가 또 혐오스러워져서 또 눈물이 나고, 넋나간 듯 주저 앉아 있다가도 또 아는 얼굴이 눈에 비치면 가서 인사도 하고
상복 옷고름에 김치국물 묻혀 가며 음식과 술도 나르고,
문상객들 뜸해진 새벽이면 고인의 영정 앞에서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잠깐 눈을 붙이기도 하고...
그런 일들을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았을까.

어려선 공동묘지는 무조건 으스스한 곳이라 여기고, 혹시나 국도변을 지나다 봉분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곳을 보면 언짢은 듯 시선을 피했건만
할아버지, 할머니를 합장해 모시고 10여년 째 성묘 다니는 공원묘지는 이제 우리 가족에게
단체로 찾아가는 나들이 장소처럼 친근하기만 하다.
두분이 생전에 다시는 못 가보신 이북 땅 대신에,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돗자리를 넓게 펴고 절부터 올린 뒤, 소풍객들처럼 우르르 둘러 앉아 음복하고 가져간 과일과 음식 나눠 먹고 담소를 나누면, 조카들은 신나게 봉분 사이를 뛰어다닌다. 

이처럼 개인적인 경험으로 죽음과 친근해진 것은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현재에 맞이하는 죽음은 단번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차츰 문상 갈 일이 많아지는 걸 보면, 내 나이가 실감되기도 하는데
이번엔 친구 동생의 부음이라 더욱 허망했다.
장례식장엘 다녀오고 나면 며칠은 신변 정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의 습관이고 보니
요 며칠은 또 유언장 쓰듯 내 삶을 정리하느라 청승을 떨게다.
그 호들갑이 다만 며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여튼 그 며칠이 지나고 나면 슬며시 다시 죽음을 떠밀어 내고
모르는 척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겠거니 하련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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