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자

놀잇감 2009. 9. 18. 23:49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최단기간 100만부를 돌파해 기념파티를 했다지만 나는 그 소설을 읽고 싶지가 않다. 내심 궁금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나에겐 초대형 베스트셀러 기피증 말고도 엄마를 소재로한 소설이라는 점이 더 큰 요인이다. 거의 매일 24시간 이렇게 붙어지내는 모녀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울 엄마를 생각하면서 나는 괜스레 저 책을 안 읽기로 마음 먹었다.
영화 <애자>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철부지 딸과 병들어 죽어가는 엄마의 눈물겨운 신파극. 최강희는 세상의 딸들이 엄마랑 손잡고 가서 보기를 권했다지만, 나는 엄마와 둘인 절대로 싫었고 따로도 보기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영화를 봤다는 얘기다. 질질 울기 싫어서 보기 좀 그렇다는 나의 말에, 그렇게 신파조로 슬프지 않고 밝게 그려졌다니 볼만할 거라고 지인이 설득을 했다. 그분에게도 병들어 누워계신 엄마가 없었다면 아마 난 끝까지 안보겠다고 우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만나면 서로의 어머니 건강을 염려하는 사이인지라 믿어도 좋겠다는 생각에 따라나섰다. 

애자도 예쁘고 작가지망생의 저 방도 마음에 든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애자>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원래부터 최강희는 내가 퍽 선호하는 배우이고 김영애 아줌마의 연기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나머지 조연들도 하나같이 마음에 들었다. 이름도 하필 <동팔>이어서 돌팔이 의사라고 놀림받는 최일화도, <찬란한 유산>에선 별로 매력을 못살렸지만 <바람의 화원> 정조 역할로 나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배수빈도, 낭랑한 목소리 때문에 좋은 장영남 편집장도,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김C도!
요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가 유독 많은 것 같은데, 외지인인 내가 보기엔 어색한지 안한지 잘은 몰라도 가끔 <몬 알아듣는> 대사가 있어서 좀 답답하긴 했다. 해운대 볼 때는 최소한 열마디에 하나쯤 못알아 들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도 강하고 세고 독하기까지 한 두 모녀의 캐릭터엔 아마도 경상도 사투리가 필수적이었을 것 같다. 
우려했던 대로 꽤 따라울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 지끈거릴 만큼 피곤하게 울리는 영화가 아니어서 좋았고 툭툭 던지는 퉁명스러운 모녀의 대사하며, 구석구석 세심한 부분까지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이 좋았고, 특히 죽음과 병을 다루는 방식이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신파 극심한 영화처럼 병든 엄마가 끔찍하게 아파하며 관객을 고문하는 장면이나 뒤늦게 철든 딸의 한스러운 통곡 장면이 너무 길면 어쩌나 몹시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다.
만에 하나 죽기 전에 내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아마도 그건 울 엄마 얘기 일 거라는 생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는데, 어쩌면 세상의 모든 딸 마음 속엔 애자가 하나씩 들어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간만에 유리알 가득 미세한 눈물방울이 흩뿌려져 있어서 하...하... 뜨거운 입김을 불어 안경을 닦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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