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추억파먹고사는것좀그만하지'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2.04.24 인사동 5
  2. 2012.01.20 옛날 이야기 6
  3. 2011.10.26 물려받은 옷 4
  4. 2011.10.24 꽃파는 마트 12
  5. 2011.08.15 탱고의 추억 12
  6. 2011.06.29 머리숱 염원 7
  7. 2011.05.20 파란 대야 13
  8. 2011.03.27 풀 그림 10
  9. 2011.03.21 딸기와 신문지 12
  10. 2011.03.11 30년 11

인사동

추억주머니 2012. 4. 24. 20:19

얼마전 무척 오랜만에 인사동엘 갔었다. 그것도 날씨 화창한 토요일 오후에.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깔려죽을 것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인사동길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며 숨막힘을 느꼈고, 마냥 아쉬웠다. 이제 그 옛날 인사동 분위기는 절대로 느껴볼 수 없겠구나 싶어서였다. 관광객과 온통 중국제 투성이 기념품으로 가득한 인사동은 이제 더는 전통의 거리도 아닌데, 사람들이 왜 자꾸 모여드는지 그걸 통 모르겠다. 하기야 나도 순전히 항아리 수제비 먹을 욕심에 간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확실히 인사동은 이제 포장만 요란한 불량품 같다. 내가 맨처음 화방과 골동품 가게 늘어선 인사동 구경을 다니던 중학생 시절은 물론이고,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인사동은 꽤나 멋진 곳이었다. 하지만 이젠 인사동에 나갈 일이 생기면 심호흡부터 하며 스트레스를 미리 차단하는 노력이 필요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 동네를 버려놓은 건 서울시일까, 상업자본일까, 그냥 세월의 변화일까.

 

어린시절 인사동엘 왜 처음 나가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잘난 척 서예도구를 사러가지 않았을까 싶다. 같은 화선지라도 학교앞 문방구에서 파는 거랑 인사동 화방에서 파는 거랑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같은 가격이라도 인사동 화방에서 파는 화선지는 두툼하고 표면이 오톨도톨 먹물이 잘 번지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이랑 화선지를 묶음으로 사서 나눠갖고 뿌듯해 했다. 서예용 붓도 적당한 가격에 꽤 질 좋은 걸 살 수도 있었다. 우리 같은 애송이는 감히 구경도 못할 엄청난 고가의 붓부터 학생용 붓까지 화방엔 다양한 종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화선지 몇 장 사러가서도 그런 붓을 쓰다듬어 보는 게 나는 퍽 기분이 좋았다. 멋드러지게 생긴 벼루나 연적 같은 건 그저 그림의 떡이었지만 별로 비싸지도 않으면서 잘 갈리는 먹을 사는 것도 가능했다. 고가품만 파는 화방에서야 중학생 손님쯤 거들떠도 안보는 데가 많았고, "화선지 있어요?"라고 물으면 귀찮은 듯 손사래를 쳐 내쫓는 주인들도 만났지만, 의외로 친절하게 맞아주는 주인들도 있었다. 미술반 시절엔 고급 액자로 골라 그림 표구를 맡긴 부잣집 딸 친구를 따라 표구상에 들어가본 적도 몇번 있었는데, 표구상에서 나는 향긋한 나무 냄새(지금 생각해보면 나무냄새가 아니라 '본드' 냄새였을 수도 있겠다;; ㅋ)가 또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암튼 인사동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그림과 골동품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후로도 어른이 될때까지 인사동엔 가끔씩 나갈 일이 있었다. 지금은 어느 문방구든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한지로 된 편지지와 편지봉투, 곱게 물들인 한지 포장지가 당시엔 인사동 화방에만 있었고, 종이를 꼬아 만든 갈색 지끈도 거기 나가서 구해야 하는 품목이었다. 또 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되면 낙원상가 아래의 허름한 술집에서 풍겨나오는 냄새를 피해 후다닥 길을 건너 꼬불꼬불 골목길로 경인미술관을 찾아가 대추차나 수정과를  마시며 뿌듯해했다. 나의 한옥 선망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던가? 당시만 해도 경인미술관엔 잔디 깔린 너른 마당이 있고 잘 생긴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 비오는 날 처마로 떨어지는 낙숫물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거기가 번잡한 종로 한복판이란 걸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마당이 사라진 경인미술관에선 이제 그런 정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아직 안 없어지고 있어주는 걸 고마워 해야 하는 건지도.

 

째뜬 끼니때 인사동엘 나가면 나는 비싸기만 했지 별로 먹을 건 없는 한정식보다 꼭 <조금> 솥밥을 먹어야 직성이 풀렸다. 안국동쪽 초입에 있는 그 밥집에서 먹던 굴 솥밥, 새우 솥밥, 송이 솥밥 같은 걸 무척 좋아했는데, 5, 6천원쯤 할 때 먹기 시작했던 <조금> 솥밥 가격이 마지막 먹었을 때 만삼천원이었으니, 참 세월이 엄청 흐르긴 한 것 같다. ^^; 하지만 일식 느낌이라 반찬도 별로 없고 양도 많지 않은 솥밥을 그 가격에 먹는건 낭비라는 측근들도 있었고, 인사동의 번잡함을 다들 싫어하는 탓에 최근엔 가본 적이 없어 혹시 없어진 건 아닌가 모르겠다. 내가 인사동 밥집의 양대산맥으로 치는 또 한 군데, 인사동 항아리 수제비집은 아직 그대로던데. 사실 지난번에 번잡한 토요일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간 이유는 순전히 항아리 수제비집엘 가기 위함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맛이 좀 변하긴 했어도(옛날엔 깻잎을 넣어 향이 더 진했는데, 외국 관광객 입맛에 맞추려는 노력인지 언제부턴가 깻잎은 사라지고 말았다 ㅠ.ㅠ) 굴과 감자를 넣어 끓여 항아리에 담아주어 표주박으로 각자 퍼담아 먹는 항아리수제비는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는 음식이다. 동동주에 해물파전을 곁들여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옵션.

 

회사생활 할 때 외국에서 온 사람들 서울 관광을 시켜줘야 할 때면 나는 거의 창덕궁-인사동-남대문시장 정도로 동선을 짰고, 불고기나 갈비 이외의 한국음식에도 도전해보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 항아리수제비집으로 끌고갔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아무래도 굴을 넣은 수제비를 난감해했지만 해물파전과 동동주 싫어하는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회사를 때려치운 뒤 영어로 씨부리는 걸 까먹지 않으려고 종로통 학원엘 꽤 오래 다니면서는 거의 하루 걸러 한번씩 인사동 찻집과 카페를 전전했다. 차를 마시고 싶으면 <경인미술관>이나 <옛찻집>에,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산타페>와 <볼가>에 가서 두세 시간씩 수다를 떨었다. <산타페>와 <볼가>엔 꽤 먹을만한 점심 특선도 있었고 좀 진한 커피도 맛있었는데, 둘 다 이국적인 인테리어 때문에 좋아하긴 했어도 특히 <볼가>엔 늘 싱싱한 생화가 여기저기 꽂혀 있어 더 애용했다. <산타페>는 없어진지 한참 됐는데, <볼가>는 대학로의 <릴리 마를렌>과 더불어 아직 있다는 것 같다. <볼가>엔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인사동엘 나가는 게 워낙 부담스러우니 선뜻 실행하지 못한지가 수년째다. 상대적으로 항아리 수제비집엔 한가한 시간을 틈 타 꽤 들락거린 걸 보면 난 역시 커피보다 탐식 욕망이 더 강한 사람. 아, 그러고 보니 인사동에만 있던 주막 분위기의 전통술집도 거의 다 사라졌다. 솔잎 막걸리를 비롯한 온갖 막걸리와 동동주, 홍주 따위에 취해 비틀거리며 인사동 밤거리를 빠져나오던 것도 다 과거의 추억일뿐.   

 

오래 전엔 엄마 때문에도 인사동엘 갈 일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엄마는 알록달록한 통영 누비 덧신을 사러 꼭 종로쪽 인사동 초입에 있는 잡화상을 찾았다. 본인이 신을 것 말고도, 외할머니, 이모 것까지 크기별로 덧버선을 고른 뒤엔 수 놓인 누비 주머니 같은 것도 오래 만지작거리다 사들였다. 화장품 지갑, 염주 지갑, 동전 지갑 등으로 쓰던 통영 누비 파우치 몇개는 아직도 멀쩡한 모습으로 집에 남아 있다. 헌데 생활한복을 파는 집들이 더러 인사동에 남아있긴 하지만 오며가며 살펴본 바로는 이제 통영 누비를 파는 잡화점은 사라진 것 같다. 인사동에서 파는 복주머니, 행낭, 조각보 같은 것들이 이젠 다 중국에서 들여온 싸구려 물건이라니 손으로 일일이 꿰매 누빈 통영 누비 수공예품이 발 붙일 구석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 옛날에도 통영 누비는 시장에서 파는 막 덧버선보다 꽤나 비쌌는데, 엄마랑 외할머니는 그래도 통영 누비 덧버선이 편하고 따뜻하고 오래 간다며 굳이 인사동까지 행차했던 거다. 하지만 통영 누비 덧신의 오랜 팬이었던 울 엄마도 어느덧 보들보들한 수면양말의 매력에 굴복한지 오래다. 

 

주말 오후의 인사동엔 걸어다니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지만 뜻밖에 항아리 수제비 집은 한산했다. 전에 없던 메뉴가 생겨난 걸 보면 그곳의 인기도 시들해진 듯했다. 그곳 역시 20년 가까이 안 없어지고 있어주어 고마워해야할 판. 그러나 수제비가 먹고 싶을 때 제일 처음 떠오르는 곳일지언정 앞으로도 선뜻 가겠다고 나서기엔 인사동이 너무 많이 변했다. 요번에도 거의 2, 3년 만에 다시 찾은 것 같은데,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있어주길 바라는 마음과 별도로 시끄럽고 번잡한 인사동에선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쓰고 앉았으면서도 대체 왜 쓰는지 의아해 하며 며칠에 걸쳐 이 포스팅을 하고 있는 이유도 아마 그런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인사동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사라져간 것들을 돌이키는 마음은 늘 조금 서글프고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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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추억주머니 2012. 1. 20. 21:53

할아버지, 할머니가 생전해 해주시던 이야기들이 나는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일합방되던 해와 그 이듬해 이북에서 태어나 해방을 맞고, 만주 생활을 거쳐 한국전쟁을 겪고 90년대까지 사신 두분은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개인의 역사로 지니고 계셨다. 물론 그 나이대의 어르신들이 다 그러했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가 젊어서 기운이 장사라 단오날 씨름대회에서 이겨 황소를 탔다는 이야기, 할머니가 꽃가마 타고 몸종까지 데리고 시집오던 이야기, 손기정 옹이 바로 이웃에 살았는데 뜀박질을 정말 잘해서 노상 심부름을 시켜먹었다는 이야기, 만주에서 여각하며 돈을 막 궤짝으로 벌어들였는데 밤마다 돈 세기가 싫어 큰고모 둘이 서로 미뤘다는 이야기,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다른 사람들처럼 집 살 생각은 안하고 곧 고향 돌아갈 거라 여겨 그 많은 식구가 여관에서 지내며 갖고 온 돈을 다 탕진했다는 이야기, 결국 평생 한량으로 사신 할아버지 대신 할머니가 광주리 이고 나가 생선장수를 하며 생계를 꾸렸던 고생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수하신 덕분에 서른살 무렵까지 두분의 옛날 이야기를 되풀이해 들으며 나는 우리 조부님 세대가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겠나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드라마틱하기는 마찬가지다. 두분 역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열살 무렵 전쟁통에 피난살이 했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라디오와 전축에 이어 흑백TV와 컬러TV, 자동차, 컴퓨터 따위의 등장을 지켜보셨다. 젊어선 지금은 사라진 전차를 타고 다니며 통학 및 데이트를 했다고 하고, 서울이라도 동네가 높아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부모님은 결혼 이후에도 한참 물을 지게로 길어다 먹고 살았다고 전한다. 또 울 엄만 공병호 타자기라나 뭐라나 해서, 국내에서 최초의 국가공인 타이피스트 자격증을 딴 몇 명에 속한 덕분에 일터에서 콧대높은 '미쓰 리'로 불리며 그 옛날 출산휴가와 복직을 거듭하며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 10년도 넘게 검찰청엘 근무했다고 들었다. 타이피스트들이 서류를 타이핑해주지 않으면 사건을 못넘긴다나 뭐라나. 그때 엄마의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 위쪽에 '후까시'를 잔뜩 넣어 부풀리고 아랫머리를 밖이나 안으로 살짝 꼬부려 '고데'(일명 '소도마끼'라고 하던가?-_-;)를 한 모습이다. 그땐 일주일에 한번 머리를 감고 월요일 아침 일찍 미장원엘 가서 그 머리를 하고는 얌전히 자면서 일주일을 버텼다나! 

엄마는 옛날부터 TV를 보다가는 뉴스에 얼굴을 비치는 유명 정치인들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그때는 '새파란 검사보'였다는 둥, '부장검사'였다는 둥 알은체를 했다. 막내 낳고 퇴직을 했으니 일을 관둔지가 40년도 넘었는데, 엄마는 그때 검찰청 동료 아줌마들과 아직도 연락하고 만난다.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당시 국가정책을 무시하고 셋이나 애를 낳았다며 주변의 눈치를 꽤나 받았다는데, 엄마는 막내를 낳아 아들이 둘 되니까 그제야 마음이 턱 놓이더라고 했다. 이왕 산아제한 정책 무시한 거 딸 하나 더 낳지 그랬느냐고, 엄마가 아플 때마다 나는 계속 툴툴댔다. 아들들은 다 소용없고(!) 딸 하나는 너무 불리해!

실제로 어린 시절 내 친구들은 형제들이 대부분 많아서 보통 네다섯은 되었다. 제 밥 그릇은 지가 알아서 쥐고 태어난다면서. 그런 친구들 집에 가보면 우리 할머니가 내 이름 부를 때 고모들 이름을 먼저 두어번 부르고 나서야 성공하듯, 친구네 엄마도 자식들 이름을 부를 때 몇번씩 헷갈려했다. 울 엄만 그러는 일 없던데. 어쨌든 얼마전 <무한도전>에서 추억의 골목놀이가 종류별로 나오며, 맨 마지막에 엄마들이 저녁밥 먹으라고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을 하나씩 불러들여가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짠했다. 요즘엔 그렇게 동네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없고, 엄마들이 골목어귀에서 "OO야 밥먹어라!"고 소리치며 아이를 찾는 일도 더는 없으니 말이다. 대신에 학원 간 아이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낼 뿐...

더불어 내 나이와 역사도 만만칠 않음을 느낀다. 내 어린 시절 사진은 거의 흑백사진이다가 열살 무렵에야 겨우 컬러사진이 등장할 정도니 말해 무엇하리. 그뿐인가, 나도 동네를 돌아다니던 물지게, 똥지게의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남아있고 ㅠ.ㅠ 나무로 짜인 장식장에 들어 양쪽으로 문을 드르륵 열게 되어 있던 흑백TV가 집에 생겨나, 학기초 <가정생활환경 조사서>에 드디어 '텔레비죤' 항목에 표시할 수 있게 됐음을 기뻐했던 기억이 있다. 누런 육성회비 봉투의 추억이 없나, 교복자율화 세대라서 사복입고 고등학교엘 다닌 경험이 없나, 7,80년대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는 게 하나도 없다. ㅠ.ㅠ 대학시절 좀 깨어 있는 친구들은 교양과목으로 컴퓨터 기초를 수강했지만, 나는 거금주고 산 <클로버> 타자기만 믿고 신기술을 외면했다. 먹끈이 돌아가고 자판을 아주 세게 쳐야 글씨가 새겨지는 수동 타자기만 사용해보다가, 회사에 취직해 처음 전동타자기를 접하고는 너무 힘주어 치는 바람에 한번에 알파벳이 세개씩 다다다 쳐져서 당황했던 건 또 어떻고! 사무실에 컴퓨터가 등장한 건 두번째 회사로 옮긴 이후였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나는 주로 수십 종류의 서류양식 인쇄물에 기안서, 보고서, 영업계획서 따위를 손글씨로 쓰느라 끙끙대야 했다.
 
컴퓨터에 그나마 좀 익숙해진 건 90년대 중반이었던 직장생활 막바지. 개통하는데만 당시 돈 150만원쯤 들었던 무전기 만한 모터로라 휴대폰과 '임원진' 자동차에만 부착되어 있던 카폰을 신기해하던 나도 그 무렵 공중전화 옆에서만 통화가 되는 <시티폰>을 거쳐 PCS폰을 개통했다. 그때부터 썼던 번호를 3년전까지도 고수했으니 참 놀랍다. 그간 바꾼 핸드폰은 또 몇개나 될까. +_+ 아주 어릴 땐 집에 전화도 없어서 10원짜리 챙겨들고 공중전화 걸러 나가 까치발을 들고 다이얼을 돌렸는데, 이젠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다. 아버지 학교로 전화를 걸면 친절한 교환수 언니들이 자리 비운 아버지를 찾아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어떻게든 연결해주었고, 교복 입고 놀러가면 아버지가 교환실에 넣어놓고 퇴근시간까지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면 교환수 언니들은 간식으로 중국집에서 군만두랑 잡채밥을 시켜주었는데, 그 때 먹은 잡채밥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아직도 잡채밥은 중국집 음식에 대한 나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 극장 간판화가, 버스 차장과 더불어 교환수도 이젠 오래전에 사라진 직업이다.

이웃 블로그에서 공포 영화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한 이야기지만, 내가 어릴 땐 골목 담벼락에 주르륵 영화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포영화는 예고편도 못보는 겁쟁이라,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은 글씨체로 쓰인 <캐리>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는 골목은 잘 지나지도 못했다. 방학이면 꼭 종로에 데려가 <로보트 태권브이> <똘이장군> <칠칠단의 비밀>따위의 만화영화를 보여주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사주시던 삼촌 덕분에 나의 형제들은 꽤 어려서부터 단성사, 피카디리, 명보, 스카라, 국도, 대한 극장 같은데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외화의 등장인물까지도 거의 실물과 똑같이 그린 극장 간판이 걸려있던 시절이었다. 시내 개봉관 극장간판은 참으로 사실적인데, 동네 3류극장 쯤 되면 배우 얼굴을 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장간판 그림의 질이 달랐던 것도 기억난다. 오랜 독재 끝에 총맞아 죽은 대통령과 계엄령을 겪은 것이 중학생 때이니 참 나도 오래 살았구나 싶어 입만 열면 자꾸 옛날 이야기가 나온다. 꼰대스럽게도 아, 옛날엔 말이지... 그러면서. @.,@

굳이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민담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원래 그냥 지난 이야기 회상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아직 어린 조카들도 자신의 '옛날'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한다. 너 어릴 때 이러저러했노라고 걔들은 기억도 못하는 아기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또, 또, 또... 그러면서 자꾸 옛날 이야기를 들춘다. 생각해보니, 어떤 시대를 살든 어느 세대에 속하든 인간의 수명이 워낙 길어 평생 따져보면 누구나 드라마틱한 삶과 역사를 겪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내가 <소년중앙>과 <어깨동무> 같은 어린이 월간지를 보던 시절 21세기엔 쉽사리 우주여행을 다니고 다른 행성의 우주인과 교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그 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조카 세대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그만큼 변해 나중엔 오늘의 현실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로 회상하게 될 것이다. 나의 남은 생엔 또 어떤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남은 날에서 오늘이 제일 젊고 팔팔한 순간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운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중년은 중년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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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옷

투덜일기 2011. 10. 26. 00:56

맏이임에도 어렸을 때 물려받은 옷을 종종 입었다. 주로 네살 많은 사촌언니가 입던 옷이었는데, 한복이야 내가 워낙 명절에 한복 떨쳐입기를 좋아하는 어린이였던 터라 신을 냈지만 그밖의 옷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나 나일론이라서 보풀이 사방에 일고 소매를 두세번 둥둥 걷어야 겨우 손이 나오는 스웨터 같은 건 진짜 입기 싫었다! 물려받는 옷이라도 차라리 엄마옷을 물려입는 건 신나고 좋았다. 엄마가 손수 줄여주든 세탁소나 양장점엘 가져가 줄여오든 내 몸에 맞게 제대로 줄여서 예쁘게 맞춰주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옷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건 두벌인데, 아무래도 사진이 증거로 남아있기 때문일 거다.

하나는 국민학교 1학년 봄소풍때 입고 간 점퍼스커트. 옛날에 촌스러운 노인들이 산으로 단풍놀이 가면서 양복 떨쳐입듯, 내가 어린 시절 소풍 때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가는 게 '관례'여서 그때 사진을 보면 아래 위 정장을 입은 남자아이들, 곱게 원피스나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1년중 드물게 '사진'을 박는 날이니 당연하지! 암튼 그날 사진 속의 나도 분홍색 블라우스에 민소매 원피스처럼 생긴 진회색 모직 점퍼스커트를 입고, 풍선을 든 모습이다. 언젠가 앨범을 보다 엄마가 말해주었다. 소풍에 입고갈 새옷을 벌로 다 사입힐 돈이 없어서 블라우스만 새로 사고, 점퍼스커트는 엄마 치마를 고쳐 만들어 입혔다고. 내가 엄청 좋아했던 옷이라 블라우스 말고, 흰색 폴라티에도 엄청 입고 다녔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두번째 엄마옷 리폼은 목둘레에 인조털이 붙은 겨울 코트. 5, 6학년 겨울에 엄마가 낡아 헤진 당신 모직코트의 안감을 떼고 천을 뒤집어 만들어 입혔는데 정말 따뜻하고 우아해서 신나게 입고 다녔다. 그 코트에다 목도리를 한번만 감아 앞뒤로 늘어뜨리면 어찌나 어른이 된 느낌이던지. 아마 국민학교 졸업식날도 그 코트를 입었을 거다.

거의 대학 다닐때까지 사촌언니 옷을 계속 물려받아 입기는 했지만, 중간에는 언니가 너무 몸이 비대해지는 바람에 그게 불가능한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 내가 물려받기를 노렸던 옷은 넷째 고모와 막내고모 옷이었다. 두분 고모는 또 제일 '부자'인 셋째고모에게서 가끔씩 옷을 물려받았는데, 그런 옷들이 내 눈엔 또 어찌나 멋져보이던지. 6학년쯤 되어보이는 어린시절 사진을 보면 어깨부분이 너무 넓어 어른 옷이 분명한 빨간색 페이즐리 무늬 공단 재킷을 소매만 잘라 좋다고 입고 웃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하기야, 9살 차이나는 막내고모는 계속 내 우상이었으니까. 고모가 좀 작아졌다며 프린트 티셔츠라도 한장 주면 기분이 하늘을 날아가는 것 같았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언제부턴가 정민이는 나와 체격이 비슷해지자 자꾸 내 옷을 노렸다. 핑계는 있었다. 계획없이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자고가게 될 때 입을 옷이 없다는 것. 그럴 때면 녀석은 편한 티셔츠는 관두고 과거의 나처럼 꼭 어른스러운 옷을 직접 골라 입고갔다. 티셔츠 원단으로 만들어졌으나 실은 정장용인 셔츠 같은 것. 고모 옷이 자기한테 맞는다는 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고모가 입기엔 '너무 귀엽다'면서 후드티도 뺏어가고, 어떤 옷은 그냥 빌려가는 거라더니 돌려주지 않았다. -_-;

그러던 것이 올봄을 기점으로 중단되었다. 이미 키는 나보다 커진게 작년 초였으나 워낙 조카가 가늘가늘해서 체격은 얼추 비슷하더니 올해들어 쑥쑥 크고나선 어깨도 나보다 한뼘은 넓어진 것 같고 팔도 엄청 길어졌다. 녀석의 최대관심사가 다이어트가 될 만큼 살도 붙었음은 당연하다. 이젠 웬만해선 내 옷을 빼앗아입을 수 없게 된 것! 며칠 전엔 조카가 자기 옷장을 열어보라니 이제 자기한테 작아져 입을 수 없는 옷들을 넘기겠다고 했다. 고모한텐 맞나 그거랑 그 하얀 거 입어봐, 고모. ㅠ.ㅠ

결국 나는 정민이가 나한테서 빼앗아 가거나 무단으로 빌려갔던 옷들과 함께 작아진 조카의 옷을 한 무더기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카들이 쑥쑥 크는 바람에 옷뿐만 아니라 운동화랑 인라인 스케이트 같은 거 물려입고 신는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가끔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고 보니 기분이 아주 묘하다. 내가 자기 옷 입고 있는 거 보면 녀석은 또 얼마나 잘난 척을 해댈까나.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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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파는 마트

투덜일기 2011. 10. 24. 05:08

찾아보니 벌써 7년전이다. 부산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서울에서 KTX타고 셋이 내려가면 울산에 사는 한 사람이 역으로 마중을 나오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회사를 마친 직딩 둘을 서울역에서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부산으로 떠났고, 9시쯤 반가운 상봉 후 곧장 숙소를 잡아놓은 해운대로 향했다.

시간이 넉넉했던 울산 친구는 일찌감치 부산에 도착해 우리가 2박3일간 먹고 지낼 먹거리 장만까지 미리 다 해둔 터였다. 해운대 횟집에서 거나하게 배를 채우고 숙소엘 가보니, 화장실 세면대에 분홍색 장미 한 다발이 비스듬히 물에 잠겨 있었다. 광안대교가 바라다보이는 밤풍경에 이미 신이 나 있던 나는 너무 좋아서 꺅 소리를 질렀던 것 같다. 울산 친구는 낑낑대고 혼자 미리 장을 보며 마트에서 파는 장미다발을 충동적으로 샀다고 했다. 마트에서 꽃을 판다고? 환영의 의미로 장미를 마련해둔 친구의 센스도 만점이었지만, 꽃파는 마트에 대해선 금시초문이었던 나는 부산 마트가 서울보다 좋다고 술김에 막 감탄했다. 그랬더니만 친구가 울산 마트에서도 꽃 판다고 했던 것도 같고...

암튼 그날 우리는 다시 본 술상 한 가운데 장미를 꽂아놓고 기분을 냈고, 다음날부턴 우리가 마신 빈 맥주병에 장미를 꽂아 창가에 놓아두었다. 이렇게...

떠나오는 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아깝지만 저렇게 꽂아두고 방을 나서며 빗방울 맺힌 유리창과 맥주병에 꽂힌 장미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트에서 장볼 때 기회 되면 꽃도 같이 사야지 마음 먹은 게 이때였을까나...

작업실 있던 시절엔 코앞에 이마트가 있어 자주 갔었지만 매장 규모가 서울에서 제일 크다는(확실한지 모르겠다) 그곳에서도 생화는 잘 팔지 않았다. 꽃이 핀 화분(주로 양란이나 포인세티아 정도)과 알록달록 조화 파는 건 많이 봤어도, 한다발씩 묶어놓은 꽃을 파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도 최근 이마트는 조카들 장난감과 레고를 사러 가는 일이 없으면 아예 가질 않는다. 대형마트는 너무 정신없고 피곤하고 무엇보다 이상하게 숨이 가쁘다. 특히 멀미나게 지하6, 7층까지 뺑글뺑글 내려가 주차를 시켜놓고 나면 벌써부터 호흡곤란을 느끼는 듯.

그래서 내가 주로 다니는 마트는 동네 근처에서 주차가 그나마 편한 곳이다. 대형 유통업체의 프랜차이즈기는 하지만 매장이 단층이고 멀미나게 넓지도 않아 빠르게는 30분, 길어야 1시간내에 후다닥 장을 보기에 딱이다. 그러니 당연히 생화까지 갖춰놓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재래시장 쪽으로 가보면 화원이 하나 있기는 해도 소박한 다발꽃을 파는 것 같지는 않다. 동네 꽃집도 다 문을 닫는 바람에, 내가 가끔 전철역 근처 좌판에서 꽃을 만나면 반색하고 사는 이유도 다 워낙 꽃보기가 드물기 때문이다.

헌데 요번에 노상 다니는 굿모닝마트(혹시나 담당자가 검색하고 들어와 보고 또 꽃화분 기획하길 바라는 흑심에 밝혔다;; ㅋㅋ)엘 갔더니 입구에 꼬맹이 소국 화분이 좌르륵 놓여 있었다. '국내산 1990원'이라고 찍힌 가격표까지 붙어있는 걸 보니 어찌나 기쁘던지 쇼핑카트에 제일 먼저 소국을 두 개 실었다. 나중에 안고가기 번거롭겠지만 어떠랴. 우리동네 마트에서도 꽃을 팔다니. 아니, 마트에서 가을을 파는 것도 같았다. 1990원짜리 가을. ^^

절화는 생명줄을 똑똑 끊어 파는 거라는 말을 들어놔서, 일주일이나 열흘 쯤 눈요기 삼자고 사긴 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찔린다. 뭐 그렇다고 살아 있는 꽃화분을 사서 결국 말리거나 썩혀 죽이는 것도 별로 나은 짓은 아니겠으나, 꽃화분을 사는 건 절화 다발을 사는 것보다는 좀 덜 찔리는 행동 같다. 분홍과 노랑, 두 종류를 품에 안고 돌아와 엄마한테 자랑하니, 엄마 역시 어느쪽을 고를까 잠시 고민하다 (처음엔 분홍을 선택하셨다) 꽃이 많은 노랑을 곁에 놓고 보겠다 하셨다.  


재주없이 따로 찍은 사진을 편집하렸더니 영 시원찮다.

꽃파는 마트로서의 위상을 계속 유지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암튼 동네 마트에서 꽃을 사왔더니 고릿적 여행추억까지 떠올라 두루두루 기뻤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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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의 추억

추억주머니 2011. 8. 15. 23:58

제목이 너무 거창한 감이 있어 좀 찔린다. 얼른 고백하자면 오래 전 울며 겨자먹기로 딱 한달 탱고를 배워봤다는 이야기다. 학교 때 연극을 했었는데, 하필 내가 맡은 배역이 잠깐 탱고 추는 장면이 있었다. 연극이라고는 하지만 거창한 극단 동아리는 아니고 매년 가을 학과 행사처럼 무대에 올리는 원어 연극이라, 순전히 숫기 개발과 영어공부(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발을 들였다가 꼬박 3년이나 코를 꿴 터였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탱고라고는 코미디언들이 우스꽝스럽게 팔을 뻗고서 <라쿰파르시타>에 맞추어 격렬하게 방향을 바꿔가며 앞뒤로 오가는 춤 정도가 고작이었다. 헌데 나더러 무대에서 그런 우스운 춤을 추라니, 난감했다. 연출을 맡은 선배는 나와 파트너에게 탱고 추는 장면이 들어간 외화 비디오 하나를 주더니 잘 보고 연구해 따라하라고 명했다. 으악. 비디오를 보고 나니 더욱 막막했다. 전혀 우스운 춤이 아니잖아! 철거 직전의 도시 폐허에서 노숙인처럼 사는 소녀가 꿈속에서 짝사랑하는 우유배달 소년과 탱고를 추는 장면이라 애틋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하는데 탱고 음악과 함께 우리가 엉거주춤 되도 않는 탱고 흉내를 내며 걸어다니면 으레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름방학과 함께 본격 무대 연습이 시작되자 보다 못한 기획이 우리를 이끌고 학교 앞 무도학원을 찾아갔다. 노상 회식때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던 중국집 송X원 건물 바로 3층에 무도학원이 있었다. 수완 좋은 기획 선배는 이미 박카스 한 상자 사들고 가서 학원 원장과 강사를 잘 구워삶아 놓았으니 염려 말라고 했지만, 쭈뼛거리며 들어간 허름한 무도학원 분위기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고 우릴 반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빠글빠글 파마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여 기른 퉁퉁한 원장 아줌마의 태도도 시큰둥했지만 앞으로 우리를 가르칠 거라는 강사 아저씨는 어휴... 맥가이버 머리인지 단발머리인지 암튼 뒷머리를 길게 기른데다 '올빽'으로 넘긴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통 넓은 검정바지를 잔뜩 허리춤 위로 끌어올려 입은 '배바지'를 보노라니 한숨이 나왔다. 내심 이 사람들이 진짜 탱고를 가르칠 수나 있는 걸까 의아했다.

첫날 우리 둘에게 기본 스텝을 가르치던 강사는 나와 파트너 모두 뻣뻣한 몸치임을 깨닫고 역시나 한숨을 쉬었을 거다. 둘쨋날 연출에게 호통을 듣고 쫓겨나다시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무도학원엘 다시 가보니 마룻바닥에 분필로 발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시작하는 발만 제대로 짚으면 그림 따라 번갈아 발만 옮겨도 스텝이 완성될 거라면서. 그러나 문제는 스텝이 아니었다. 상체는 우아하게 뒤로 젖히고 하체는 서로 일직선이 되도록 붙여야 한다는데, 후배였던 우유배달 소년과 나 둘 다 발놀림에 신경을 쓰다보니 당연히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엉거주춤 엉덩이는 뒤로 빠지고... 한쪽 벽면의 거울로 보는 우리의 몰골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스텝 순서는 또 왜 그렇게 안 외워지는지! 무도학원까지 보내주었는데 도통 탱고가 늘지 않자 해병대 출신이었던 연출 선배는 잡아먹을 듯이 길길이 화를 냈고, 나는 3학년이랍시고 바락바락 대들며 정 못봐주겠으면 탱고 장면을 빼라고 항변했다.

몹시도 더웠던 그해 8월, 전체 연극 연습 말고도 선풍기만 휘휘 돌아가는 허름한 무도학원에서 매일 한시간씩 땀을 삐질삐질 흘렸지만 탱고 실력은 별로 늘지 않았다. 알고보니 수업료를 제대로 낸 것도 아니었고, 기획선배가 거의 담뱃값 정도를 쥐어주며 한 일주일 기본 스텝만 가르쳐주면 된다고 했다는데 몸치 둘이 꼬박 한달이나 춤 강사를 귀찮게 했으니... -_-; 단신인 나보다 키가 한뼘 정도밖에 크지 않은 느끼한 생김새의 강사 아저씨가 직접 나를 리드하며 가르칠 땐 열심히 배우려는 생각보다 그저 지독한 그의 머릿기름인지 스프레이 냄새와 등에 닿은 손길이 싫기만 했다. 후배였던 나의 파트너도 어쩜 그렇게 춤을 못추는지 원. 강의실에서 둘이 따로 연습을 하면서도 서로 발을 밟다가 웃어대기 일쑤였다. 나중엔 도저히 안되겠는지 학원장 아줌마와 제비 같은 강사가 마지막으로 직접 시범을 보여줄 터이니 분위기만 참고해서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손을 떼겠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그때까지 연습했던 탱고 음악의 테이프를 복사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두 사람이 추는 탱고를 지켜보며, 똑같은 스텝인데 어쩜 춤이 우리와 그렇게도 다를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원장 아줌마의 푸짐한 몸매도 느끼하게 생긴 강사 아저씨의 제비 같은 손길도 보이지 않았다. 가벼우면서 박력있는 두 사람의 스텝과 회전이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당시 난 대사 외우기도 벅차 죽겠는데 무대에서 난데없이 탱고를 추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저 괴롭고 부담스럽다는 생각에 빠져 춤도 음악도 음미해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공연일은 다가왔고 얼렁뚱땅 흉내만 낸 탱고 장면도 무사히 넘어갔다. '괴롭고 어려운' 탱고와도 안녕이었다.

물론 지겹도록 들으며 연습했던 <라쿰파르시타>를 비롯해서 탱고 음악을 들으면 비싯 웃음과 함께 진땀이 나는 것 같은 조건반사가 한동안 이어지긴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몇년 뒤엔가 알 파치노가 나온 <여인의 향기>에서 탱고 추는 장면이 나왔을 땐 워낙 영화가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불쑥 내가 몸치가 아니어서 탱고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탱고의 묘미를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영화에서 탱고를 처음 춰본다는 여자가 알 파치노의 리드에 맞춰 완벽하게 춤을 춘다는 건 리얼리티가 영 떨어지지만!

요즘 알 파치노의 그 영화와 제목이 같은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역시나 탱고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탱고 장면이 나올 때마다 이 드라마 때문에 또 당분간 탱고 학원에 사람들이 드글드글 하겠군, 중얼거리며 옛날 생각도 함께 떠올라 웃음이 난다. 내게는 난감하고 고통스러웠던 탱고의 추억도 지나고 보니 다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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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숱 염원

투덜일기 2011. 6. 29. 00:29

지난 겨울 쥐뜯어 먹은 것처럼 너무 짧게 커트를 해놓는 바람에 미용실 가는 게 두려워 7달이 넘도록 방치하다시피한 머리칼이 꽤 많이 자랐다. 집에 있을 땐 머리가 짧을 때도 거치적거리지 말라고 앞머리를 넘겨 실핀으로 꽂고 있는 편이라, 머리가 길어진 뒤로는 늘 질끈 동여매고 산다. 여름엔 확실히 숏커트보다도 가뜬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가 시원하다. 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노란 고무줄로 묶었었는데 가뜩이나 숱 적은 머리칼이 뽑혀 나오는 것 같아 머리끈도 몇 개 샀다. 예전부터 간간이 쓰던 검정 고무줄은 형편없이 늘어져 버려야 했다.
 
머리칼이 길어서 머리 고무줄을 상용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머리끈도 규격이라는 게 있는지 크기는 거의 일정하고 고무줄의 굵기만 좀 차이가 있다. 거기에 장식이 달렸거나 안 달렸거나의 차이. 사람 머리숱이 저마다 다른데 왜 고무줄은 일정한 길이로만 나오는지 새삼 불만이다. 물론 '고무줄'이므로 탄력성이 있어 두번 돌려 묶든 세번 돌려 묶든 묶는 사람 마음이니 상관없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정한 고무줄의 탄력성이란 게 뻔한 수준이라 무한정 늘어날 리 없다. 보통 시중에서 파는 고무줄로 숱이 꽤나 많은 조카의 머리를 하나로 묶어보면 딱 두겹으로 돌리면 적당하다.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팽팽해서 머리칼이 뽑혀나오는 느낌도 없을 정도로. 그러나 똑같은 고무줄로 포니테일을 해도 알량한 내 머리숱엔 최소 세번은 돌려야 고정된다. 고무줄이 좀 느슨해 많이 늘어나는 건 네번도 돌려진다. 허나 그렇게 쓰다보면 고무줄이 금세 늘어나 헐거워져 망가지고 만다. 고무줄도 소모품인지 몇달 쓰다보면 힘없이 늘어지거나 안쪽의 고무줄이 끊어져 바깥쪽 실만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종종 발생한다. 그렇게 규격이 허물어진 고무줄로는 도무지 내 머리를 묶을 수가 없다. 한번 더 돌리자니 모자라고 그냥 두자니 헐겁고...

거의 매일 일어나자마자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머리를 질끈 동여매며 염원한다. 나도 고무줄을 두번만 돌려 묶을 수 있을 정도로만 머리숱이 많으면 좋겠다고. 고등학교 때 아침마다 내가 늘 머리를 땋아주던 친구가 있었다. 머리숱이 하도 많아서 아침에 머리를 감고 나면 드라이를 쪼여도 다 마르길 기다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물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말린 뒤 그냥 산발을 해가지고 학교에 오는 아이였다. 샴푸도 엄청 든다고 했다. 긴 머리칼을 이리저리 모양내서 땋는 놀이를 즐기던 나는 하루는 디스코머리, 하루는 반고정 머리, 하루는 이단 땋기, 하루는 양갈래 머리, 하루는 그냥 포니테일, 하는 식으로 열심히 스타일을 바꿔주었다. 그 친구의 머리를 손으로 잡으면 한움큼이 넘어 일반 고무줄로는 제대로 묶을 수가 없었다. 파는 규격 고무줄로는 절대 두번 돌려지지 않는 굵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란 검정 고무줄을 적당한 길이로 잘라 칭칭 동여 매 묶는 방식을 택했다. 고무줄 한쪽 끝과 머리칼 한손으로 잡고 다른 끝을 빙빙 돌려 마지막에 팽팽하게 딱 묶는 기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_-v

당시엔 사복을 입을 때라 검정 고무줄로는 마음에 차지 않아 그 위에 리본을 덧묶었다. 헤어밴드나 머리장식으로 쓸 수 있는 체크무늬, 땡땡이 무늬, 민무늬 리본을 각종 넓이로 팔던 시절이었다. 친구는 빨간색 체크무늬 리본을 좋아했던데 반해 나는 하늘색 바탕에 하얀 물방울 무늬가 있는 리본을 좋아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침 조회 시작 될 때까지 머리칼을 다 못 묶어서 담임한테 핀잔을 듣기도 했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머리 길이가 어깨에서 어느정도 넘어가면 반드시 묶어야 하는 두발 규정이 있었다)

나는 스무살 무렵에도 속알머리 없다고 놀림을 당할 정도였으니 지금 머리숱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도 최근에 산 제일 짱짱한 고무줄로 세번 돌려 머리를 묶고 풀리지 말라고 머리채도 빼다 말고 접어 끼워두었는데도 금세 느슨해지는 걸 보며, 문득 그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머리를 땋으려고 세 갈래로 갈라놓은 한 묶음이 내 전체 머리보다 굵었으니 최소한 머리숱이 내 세 배라는 뜻이다. 동년배 친구들 모두 이젠 흰머리도 소중해서 함부로 뽑지 않는다는 나이가 되었는데, 그 친구의 머리숱은 여전할지 궁금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번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 그 숱많은 머리를 지금은 어떻게 하고 다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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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대야

추억주머니 2011. 5. 20. 23:21

온 집안 가득 대부분 옛날 살림살이로 들어찬 우리집.
창고나 다름없는 옷방 한 구석엔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재봉틀이 아직도 있다. 아주 오래 전 방바닥을 죄다 뜯고 새로 난방용 파이프를 깔던 대공사를 했을 때, 나는 쓰지도 않는 그 재봉틀을 버리자고 주장했다가 혼만 났다. 반들반들한 까만색에 자개로 양쪽 문에 무늬를 넣어 키 큰 문갑처럼 생긴 발재봉틀은 의자를 놓고 사용해야 하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어른 둘이 들기에도 만만칠 않은 애물단지다. 그 재봉틀로 엄마가 시집와서 옷감 끊어다가 어린 시누이들 옷도 만들어 입혔고, 온갖 낡은 옷 수선하고 20년 전쯤까지는 내 바지 길이도 잘라 박아주고 통짜 커튼이랑 식탁보도 만들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효용 면에서나 공간 면에서 이젠 그만 버려야한다는 것이 당시 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집안 개조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도져 거의 정신줄을 놓았던 엄마 등 뒤에서 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춰 나를 나무랐다. 엄마 혼수품 중에 딱 하나 남은 재봉틀이 상징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그러냐고, 우리가 함부로 버리고 말고 할 순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엄마가 스스로 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둬야한다고. 10년쯤 전에 내가 또 슬쩍 재봉틀 쓰지도 않는데 버릴까, 하고 물어봤을 때도 엄마는 니 마음대로 해라, 고 하라면서도 눈빛으로는 몹시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직접 만든 누렇게 바란 천덮개를 쓰고서 골동품 발재봉틀이 아직도 옷방 구석에서 온갖 짐에 눌려 있는 이유다.
 
정수기 청소를 하러 오는 분들이 작년부턴가는 물을 받을 통까지 들고 오지만, 그 전까지는 우리에게 물을 받을 커다란 통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엄마가 간단히 김치 담글 때나 만두를 빚을 때 쓰던 대야 두개(하나는 둥근 동심원 무늬 요철이 있는 양은[?] 재질이고 하나는 파란색 플라스틱이다)는 싱크대 밑에서 먼지를 쓰다가 두달에 한번씩 요긴하게 쓰였다. 헌데 이제는 그 두달에 한번 쓸모가 없어진 거다. 어차피 김치는 담가먹지 않기로 했으니 정수기 청소용으로도 필요 없게된 그 대야는 없애도 되는 물건이란 생각에 난 또 슬쩍 버려도 되겠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요즘 잘 못버리는 지병 자가치료를 시도하는 중이다 ㅎ) 어차피 크기가 커서 재활용품 버리는 날 몰래 들고나가는 건 불가능한 물품이다. 엄마는 또 니 마음대로 해라, 고 말은 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파란 대야의 사연을 들려줬다.

둘(울 엄마와 아버지)이 벌어 총 열 식구 먹여살리느라 워낙 살림이 빠듯하고 정신이 없던 가난한 집안에선 첫손녀딸 백일이 오는지 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엄마는 섭섭함을 감추고 주말에 몰래 나가 백일사진이나 찍어주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날 아침 일찍 출근도 하기 전에 외할머니가 뜨끈뜨끈한 수수팥떡을 이고 오셨단다. 나의 백일 떡을 문제의 그 파란 대야에 담아서. 심지어 새벽같이 부처님 앞에 올렸다가 날라온 거였다나. (나의 우상이자 영원한 1순위 천사표 친할머니가 나의 백일도 몰랐다는 놀라운 반전에 잠시 멍했다가, 그런 일에 꽁하는 내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냥 내다버리기엔 너무 멀쩡하다고 인정;; 이러다 평생 끼고 산다

'나쇼날'이라서 물도 잘 안들고 플라스틱도 튼튼하고 좋다고, 요샌 그런 플라스틱 나오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엄마 앞에서 파란 대야를 뒤집어보니 정말로 영어로 National이라고 적힌 마름모꼴 로고 위에 역시나 영어로 National Plastic Co., Limited라고 둥글게 찍혀 있었다. 나는 슬며시 다시 대야를 싱크대 밑으로 밀어넣고 일어섰다. 무려 사십여년 전 내 백일에 맛있는 수수팥떡을 담아 외할머니가 이고 오신 대야라는데... -_-;
이런저런 의미와 추억을 이유로 결국 나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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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그림

추억주머니 2011. 3. 27. 16:02


풀 그림 이야기가 나오면 내겐 또 남다른 사연이 있다. 예전에 미니홈피에도 밝혔던 이야긴데, 풀로 그린 조카 그림도 하나 더 있겠다 그 추억도 마저 상기해야겠다. 부모님이 동생들을 데리고 분가하시고 나서도,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중간 무렵까지 본적지이자 출생지인 ***동 집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과 살았다. 연년생인 남동생과 입학 터울을 둘 겸,
생일이 여름인데도 제법 똘똘하다는 것만 믿고 제 이름밖에 쓸 줄 모르는 나를 덜컥 7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시켜놓고, 할머니는 매일 전교에서 제일 작은 1학년 학생인 나를 업어나르셨다. 울 엄마는 또 첫딸 입학을 위해 제일 비싼 최고급 책가방을 사주었다는데 (가죽이었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빨간색이었던 그 가방은 무척 재질이 두꺼웠고 열고 닫기 불편했다) 그게 또 엄청 무거워, 할머니가 보기엔 책가방 무게 때문에 애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단다. ㅋㅋ

늘 교문 앞에서 수업 끝나기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나는 친구들과 가방 들어주기 가위바위보를 했다. 지금도 그때도 가위바위보에 젬병인 나는 당연히 꼴찌였다. 책가방을 앞 뒤로 매고 양손에도 하나씩 친구 책가방을 들었다. 꼴찌에서 두번째는 신발주머니를 모아 들었다. 낑낑대며 학교 앞 언덕길을 내려가는 나를 저 멀리서 발견한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치시며 달려왔다. 힘 없는 아이 괴롭히는 나쁜 놈들이라고... 친구들의 엉덩이까지 한대씩 퍽퍽 때려준 할머니는 내가 옆에서 괴롭힌 게 아니라 그냥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것 뿐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고도 분에 못 이기셨는지 할머니는 울먹거리는 친구들에게 집이 어디냐고, 앞장서라고 말씀하셨다. 애들 부모에게 일러 다시는 손녀딸을 괴롭히지 말라고 당부할 작정이었던 거다. 그래서... 화난 그 아이들은 한동안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한글도 못 떼고 들어가 이해력이 많이 떨어졌던 나는 1학년 미술시간 준비물을 알려준 선생님의 설명을 오해했던 모양이다. 미술책을 미리 들춰보았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겠지만, 어린애가 뭘 알았겠나. 늦둥이로 낳은 막내딸도 거의 다 키워놓아 국민학생의 학부모 노릇에 서툴렀을 할머니, 할아버지도 마찬가지고. 어쨌든 "풀에 물을 들여오라"는 선생님의 설명을 나는 집에 가서 그대로 전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고심 끝에 누렇게 말라붙은 (아마도 채 신록이 우거지기 전인듯..) 풀들을 마당에서 따다가 정성껏 물감으로 이런저런 색을 칠해 물을 들여주셨다.

다음날 곱게 '물들인 풀'을 갖고 학교에 간 나는 친구들이 다 나와 달리 '찍어 쓰는 풀통'에 물감을 풀어 색색깔로 물들여온 걸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건은 어린 나에게 제법 큰 충격이었던 듯하다. 부모님 슬하로 옮기느라 전학을 했던 이후 국민학교는 몰라도, 입학한 국민학교 시절의 기억은 거의 사라졌는데도 책가방 사건과 더불어 이 사건은 또렷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날 나의 담임이셨던 '호복순' 선생님(이 이름도 절대 잊혀지질 않는다^^)은 우는 나를 달래시곤 옆 친구에게 색깔풀을 나눠주라 하셨고, 미술시간은 친구의 준비물을 빌어쓰며 무사히 넘어갔다.

정민공주에게 내가 언제 이 사연을 들려주었는지 모르겠는데, 어린 정민이에게도 몹시 인상적인 이야기였던 듯 가끔씩 불쑥 고모 어렸을 때 미술시간에 '물 들인 풀' 준비물을 잘못 해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서 선생님이 왜 준비물을 잘못 해간 고모를 혼내지 않았는지, 친구는 왜 암말 없이 자기 물감을 나눠주었는지(자기 그림 그릴 것도 모자랄지 모르는데!) 꼬치꼬치 묻곤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 날은 어김없이 풀을 쑤어 물감 풀을 만들어 바쳐야 했고.. -_-;

2007년 1월. 장 뒤뷔페의 우를루프 정원 전시회를 함께 다녀온 날도 공주는 위대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받았는지 물감풀을 청해 풀 그림을 시도했다. 파란색 풀과 빨간색 풀 두 가지나 만들어야 했는데 찹쌀가루(마침 밀가루가 집에 없었다)를 아낀 탓에 풀이 너무 묽어 다른 때보다 작품엔 열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작품이 마르지도 않은 상태에서 개구쟁이 동생이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사진으로만 남은 공주의 풀 그림을 천재 시리즈에 넣을까 말까 하다가 뺐는데 결국 이렇게 올리게 되는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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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와 신문지

투덜일기 2011. 3. 21. 02:05

나이가 많아지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뜨악해 하거나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험들이 내게도 꽤 많다. 동네 시장 어귀에서 살아 있는 닭 한마리를 골라 주인이 탁 모가지를 쳐서 잡아가지고 드럼통을 개조해 만든 털뽑는 기계에 넣어 닭털을 정리한 뒤 생닭을 팔거나 그 옆에 기름솥을 놓고 튀겨서도 팔던 닭집이라든지, 아궁이에서 연탄갈기, 석유곤로 따위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도 흔해빠진 흰색/검정색 비닐봉지 이전에 모든 시장에서 사용하던 신문지도 빠뜨릴 수 없다.

닭집 앞을 지나치는 게 너무 무섭긴 했지만 엄마 따라 시장 다니는 걸 좋아하던 나는 나중엔 엄마 대신 혼자 장보기 심부름을 다녔다. 그땐 모두들 플라스틱 장바구니나 동그란 손잡이에 실뜨개로 짠 망이 달린 장바구니를 가져갔다. 닭을 사도, 생선을 사도, 돼지고기를 사도, 하다못해 콩나물이나 풋고추를 사도 그 옛날 시장에선 다들 신문지 두어장에 내용물을 둘둘 말아 장바구니 안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시장터 가게마다 신문 전지를 4등분한 크기의 신문지를 몇뼘이나 되는 높이로 쌓아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학교에서 폐품을 걷을 때도 신문지가 제일 인기 품목이었고.

환경 문제로 비닐봉지 사용을 자제하려는 움직임이 요새 다시 일고는 있지만, 장바구니를 가져가더라도 마트를 가든 시장엘 가든 여전히 모든 먹거리는 기본적으로 비닐봉지에 담아주는 것이 정석으로 굳어졌다. 무게를 담아 파는 채소를 살 때도 일단은 작은 비닐에 담아야 가격이 적힌 스티커가 나오는 판국이니까. 게다가 이젠 종이 신문 보기가 거의 하늘의 별따기처럼 느껴지고 있으니, 재활용도가 높은 신문을 옛날처럼 쓰라고 해도 다량으로 구할 수가 없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몰라서 그렇지 신문지는 여전히 유용하게 쓰이는 포장재였던 모양이다. 주말에 이모가 다니러 오며 빨간 플라스틱 대야를 맞붙여 노끈으로 묶은 딸기를 들고 오셨다. 마트에서 파는 딸기는 대개 스티로폼이나 투명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지만, 과일 도매상에 가보면 그렇게 광주리 만한 빨간 대야에 수북하게 담아놓은 딸기를 팔기도 한다. 둘이 다 언제 다 먹나 싶게 걱정이 앞설 만큼 엄청난 딸기 대야를 여니 안엔 신문지 한장이 덮여 있었다. 아래쪽 대야 맨 안쪽에도 마찬가지로 신문지 한 장이 깔려 있었고.

그런데 싱싱해 보이는 딸기를 일부 씻어 먹으려니 희미하게 석유냄새 같은 것이 났다. 입맛이 무뎌진 왕비마마는 아무 말씀 안하셨지만 나는 이내 고민에 빠졌다. 딸기를 물에 덜 담갔다 씻었나? 혹시 보일러 난방유가 불완전 연소되는 비닐하우스에서 수확한 딸기라 기름 냄새가 밴 걸까? 과일가게 주변에서 혹시 기름사고 같은 게 있었나? 주말 내내 별별 가능성을 다 상상하며 찝찝한 마음으로 딸기를 먹던 나는 드디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범인은 바로 신문지다.

어느 신문사였던가 인체에 좋은 콩기름으로 인쇄한다는 홍보를 한참 했던 것 같은데, 다른 신문사들도 다 그렇게 휘발유 냄새가 안나는 잉크로 바꿨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갓 배달된 신문에서 풍기던 휘발유 냄새를 맡으면 나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면서 멀미 비슷한 증상이 생겼다. 그래서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조간신문을 꼭 다 저녁때 본다고, 신문이 아니라 '구문'을 보는 거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 뒤적여놓아 그나마 휘발유 냄새가 희미해진 다음에야 두통 없이 신문을 볼 수 있는 걸 어쩌랴.

옛날 신문지는 워낙 오래된 것들을 폐지 도매상에서 떼어다가 썼을 테니 휘발유 냄새가 다 날아간 다음이었겠지만, 요즘처럼 종이 신문이 많지 않을 때는 아무래도 최근 신문을 활용했을 것 같다. 게다가 수익성이 날로 떨어지는 주요 신문사든, 사방에서 남발되는 무가지든 고가의 인쇄용 기름을 썼을 것 같지는 않으니, 예나 지금이나 신문지 특유의 매캐한 기름냄새는 변함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그리고 워낙 과육이 무른 딸기에 그 미세한 휘발유 냄새가 온통 배어들었을 테고.

어쨌거나 식탐꾼답게 먹거리의 미묘한 맛에도 까탈스러운 나는 아직도 꼬박 닷새는 더 먹어야 할 만큼 많이 남은 딸기가 돌연 먹기 싫어졌다. 아무리 물에 오래 담가 놓아도 사라지지 않는 석유냄새를 나로선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다. -_-; 물론 아주 옛날 과일가게 좌판에 둥그렇고 큰 '다라이'에 담긴 딸기를 근으로 달아 팔 때도 양은인지 주석인지 알 수 없는 쇠다라이 바닥엔 딸기 물크러지지 말라고 신문지가 깔려 있었다. 그래도 딸기에서 석유냄새를 맡은 적은 없었는데 우째 이런 일이. 짐작컨대 이모는 아마도 과일가게를 오래 하고 있는 어느 주인에게서 딸기를 사왔을 것 같다. 신문지로 딸기를 포장해도 불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던 때부터 과일가게를 해온 주인장으로부터. 그렇지 않았다면 신문지 대신 과일상자 위에 흔히 덮여 있는 얇은 스티로폼이나 투명 비닐을 대신 덮지 않았을까나.

건강에 해로울지 아닐지도 모르겠고, 내 추측이 맞는지 틀리는지 자신도 없지만 암튼 방금 결심했다. 남은 딸기는 생으로 먹지 말고 쨈을 만들기로. 내 아무리 딸기를 좋아하기로서니 석유냄새 나는 딸기는 못먹겠다. 현재로선 팍팍 끓이면 휘발성인 냄새가 다 사라질 거라 생각하는데 막상 쨈으로 만들어도 그 냄새가 안 가시면 어쩌나? 작년엔가 귤쨈을 만들어본 경험에 따르면 한시간 가까이 서서 계속 저어줘야 하던데 으으윽. 괜히 시간낭비하며 일감만 만드는 거 아닌가 걱정도 앞서지만 하는 수 없다. 암튼 과일가게 주인 여러분, 딸기는 웬만하면 최근 신문지로 덮지 말아주세요. 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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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추억주머니 2011. 3. 11. 23:12

이번에 중학생이 된 조카가 배정된 학교는 공교롭게도 나의 모교다. 무려 30년도 더 차이나는 동문이 된 셈이다. 아무리 같은 학교라도 30년이 더 흘렀으니 내가 아는 선생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 놀라워라. 내가 중3때 막 대학을 졸업하고 솜털인지 수염인지 보송보송한 얼굴로 부임했던 한문 선생이 요번 조카네 담임이란다. 담임들 이름도 얼굴도 다 까먹은 내가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면 몹시 치 떨리게 싫어했거나 퍽 괜찮게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다행히도 후자쪽이다. 어눌하고 착하고 순박한데다 어리바리 부임 첫 해라 중3인 우리들에겐 간혹 '밥'이 되기는 했지만, 한문을 정말로 유려한 필체로 잘 썼고 서예반 담당이라 미술반에서 힘 쓸 일이 있을 땐 자주 일꾼으로 불려다녔다. 환경미화나 채점 도우미 같은 일로 늦게 집에 가게 됐을 때 하굣길에 만나면 혼자 집에 가서 밥해먹기 싫다면서 우리들과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 김밥, 우동 같은 걸 사주기도 했다. 출석부로 머리통을 찍는 선생이 없나,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퍽퍽 때리는 선생이 없나, 조각분필 담아놓은 플라스틱 통으로 뒤통수를 쳐 깨뜨리는 선생이 없나, 여학생에게도 살벌한 체벌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그 선생도 기다란 나무 막대를 꼭 가지고 다니긴 했지만(그 학교 교사들 사이에선 일종의 패션이었을까?), 그건 어디까지나 칠판 가리키기 용이었을뿐 체벌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친개, 똥싼바지, 변태, 복부인, 입걸레, 싸롱화, 손버릇 따위의 부정적인 별명이 대세인 학교에서 그 선생의 별명은 상당히 우호적이고 귀여운 구석마저 있는 '도날드덕'이 되었다. 단지 입술이 좀 투툼하고 튀어나왔다는 이유로. (조카가 대번에 지네 담임 별명 뭐였냐고 묻기에 안 가르쳐줬다. 저절로 알게 되면 모를까.. 30여년 전 별명으로 아직도 불리는 거 싫을지도 모르잖아;;) 애들이 막 장난치고 떠들어도 그냥 담임이 허허 웃는다는 조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별로 안 변하신 것 같기는 한데, 진실이야 알 수 없어도 어쨌든 다행이다 싶다.   

재단이 부유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거느리고 있는 그 사립학교는 원래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에선 언감생심 절대 배정되는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졸업하던 해 처음으로 우리 동네 아이들을 꽤 많이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몇몇 선생들이 가끔가다 한 마디씩 학생들 들으라고 가시돋친 소리를 해댔다. 출신학교 성분이 과거와 달라져서 학교 '질'이 떨어졌다나. 가뜩이나 산꼭대기에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학교에 정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건 되먹지 않은 일부 선생들 때문이었다. 인근 구와 달리 아무래도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OOO구' 출신 아이들이 많아져 자기네 '부수입'이 줄어드는 걸 안타까워했으리라는 건 나중에야 알 수 있었지만, 당시에도 선생들 가운데 누구누구가 돈봉투를 특히 밝히는지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들은 성적과 상관없이 같은 재단의 사립 국민학교 출신들을 드러나게 예뻐하는 분위기였다. 사립 국민학교 학비를 댈 정도면 퍽 부유한 집안이니 '당연히' 때마다 상당 금액의 촌지 봉투를 상납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고등학교까지 그 재단 학교로 진학하고 말았는데, 거긴 더 심했다. 그 학교 고3 담임을 연이어 3년만 하면 집 한채를 거뜬히 살 수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나중에 졸업하고 나서 들으니, 사업가 아버지를 뒀던 친구 하나는 고3때 담임(나도 같은 반이었다 -_-;;)이 진학조언을 핑계로 한달에 한번씩 집으로 찾아와 '정기수금'을 했다고 고백하며 치를 떨었다. 내가 졸업 후 완전히 학교를 외면하고 살았던 것도, 교생실습을 모교로 정해 나가는 애들을 보며 '미친 거 아닌가' 생각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런 학교지만 더러 의롭고 '착한' 선생들이 없지는 않았다.(학교 축제 때 액자 값도 안 낸 나의 그림을 걸어준 미술반 선생도 그 가운데 한 분이다 ^^;) 주로 부임한지 얼마 안되는 풋풋한 신참 선생들이었다. 스승의날 두당 정해진 돈을 내서 담임에게 고가의 전기밥솥을 선물했는데(선물 품목도 학급 서기를 통해 넌지시 지시된 사항이었다) 색깔과 디자인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다시 바꾸러 다니게 만들었던 닳고 닳은 아줌마 선생이 있는가 하면(자기가 바꾸지! 지금 생각해도 화난다;), 꽃과 편지만 받고 선물은(스카프였던가 그랬다;;) 굳이 돌려주며 나무라던(너희들이 돈이 어디 있다고 이런 비싼 걸 사느냐고)  해맑은 풋내기 담임 선생도 있었다. 세속에 찌들지 않은 그런 선생들을 반기긴 했지만, 이미 시니컬해진 우리는 그들도 지금 젊어서 그렇지 몇년 더 지나면 탐욕스러운 다른 선생들이랑 똑같아질지 모른다고 씁쓸해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총각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사춘기 여학생 특유의 무대포 감수성으로 짝사랑을 불태우는 아이들은 없었다. 의도적으로 성적을 올려보겠다고 선생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영악한 학생은 있었을망정.  

모교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어서 통 모르고 살다가, 악연 때문인지 학교와의 고리를 끊지 못해 지금까지도 끌려다니는 친구의 말을 듣자니 탐욕스럽기로 유명했던 선생들은 하던 가락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벌써 오래 전에 정년퇴직을 한 사람도 있고, 정년 이전에 관두고 음식점 같은 걸 차린 선생도 있는데 불쌍한 그 친구는 개업식에 화분을 보낸 것도 모자라서 간간이 그 집에서 모이는 퇴물 남녀 선생들 모임(역시나 유유상종이다)에 불려나가 음식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30년전 제자를 여전히 봉으로나 여기는 선생들이라니 에잇! 전화번호를 확 바꾸고 다시는 이용당하지 말라는 나의 충고에, 친구는 하필 퇴물 선생 하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공교롭게 동네 마트에서 만났을 때 예의상 장본 비용을 한번 내줬더니만, 그 담에 만났을 땐 잘 나가는 제자(친구는 전업주부라고!!!) 덕을 수십년째 본다고 마트 점원에게 마구 자랑하면서 또 내달라는 식으로 뻔뻔함을 보이더란다. 아니 왜?!?! 게다가 만나는 동창들 있으면 다음번 모임에 어디 한번 데려와보라고도 하더라나. 정말로 애정을 쏟으며 사제지간을 다진 것도 아니고, 순전히 촌지로 얽힌 악연을 그들은 왜 계속 누리려고 하는지 원! 나는 거의 게거품을 물다시피 흥분하며 욕을 하다가, 앞으로 또 그런 속물퇴물들한테 연락오면 시댁이든 친정이든 우환이 생겨 지방에 내려갔다고 거짓말 하라고 시켰다. -_-"
 
교수에 대한 나의 인상이 나쁘듯, 안타깝게도 교사에 대한 나의 인상도 그리 좋지 않다. 간혹 정말로 아이들의 인성교육과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기는 하지만, 내가 겪어보고 주변에서 전해들은 교사의 모습은 교육자가 아니라 그냥 월급쟁이 조직원에 가깝다.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의 문제점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 교사가 무능하다고 무시하고, 선생들은 선생들대로 학생들이 걸핏하면 교육위원회에 고발하겠다고 협박이나 한다며 교권이 땅에 떨어졌느니, 말세니 운운한다. 나도 한때 잠깐 교사가 천직이 아닐까 상상한 적이 있지만, 역시 그 길을 안 가길 잘했다 싶다.

내가 교생실습을 나갔던 모 중학교엔 마침 엄마와 이래저래 아는 분이 영어과 주임 선생님이었다. 교생실습을 하던 당시에 그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라서, 실습 점수에 부당한 이득을 누리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실습이 끝나고 나서 세상 참 좁다며 웃어 넘긴지 몇달 후, 나에겐 그분과 엄마를 통해 모종의 교직 협상안이 들어왔다. 교생실습을 나간 그 학교에 영어교사 충원 계획이 있는데, 이미 서로 안면도 있고 시범수업도 해보았고 하니 '천만원'의 기부금을 내면 나를 곧장 취직시켜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형편에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도 엄마는 그분의 설득에 약간 넘어가서 (빚을 내서라도 일단 취직을 하고 나면 평생 '우량 직업'이 생기는 거고, 그 정도 돈은 금세 만회할 수 있다고 했다나;) 아버지까지 포섭할 기세였다. 그러나 당시가 어느 때인가, '압제와 굴종'을 깨치고 나아가 투쟁해야 한다고 노상 나라와 대학가가 들썩이고 있었다. 불의와 타협하면 큰일나는 것으로 생각했던 나는 말로만 듣던 교직비리라며 당장 고발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물론 엄마의 지인의 안위까지 걸린 사안이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내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한 뒤에도 엄마는 교직에 대한 미련을 오래도록 버리지 못했다. 졸업한 다음해였던가, 걸핏하면 철야에 야근에 시달리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엄마는 심지어 나와 상의도 하지 않고 덜컥 임용고사 시험에 접수를 해놓고 아무 준비도 없이 내게 "혹시 아니? 한번 시험이나 봐  봐라."고 종용했다. 서울/경기 지역에 영어교사를 세 명인가 뽑는 그 시험에 내가 합격할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 암튼 그 이후 직장을 옮겨다니면서 간혹 나도 가지않은 길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교직비리에 응해 그때 천만원을 내고 영어교사 자리를 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긴 했다. 설마 그 천만원을 단기간에 벌어들이느라고 부임 첫해부터 부잣집 애들 학부모 면담하며 노골적으로 촌지를 달라고 하진 않았겠지? 라고 킥킥거리면서.

살기 좋은 나라인지 아닌지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국민소득이 아니라 사회의 투명성과 아이들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우하는 시스템을 보면 된다고 했다. 겉으로는 학교 체벌도 사라지고 촌지도 불법이고 교직비리도 없는 사회가 된 것 같지만, 주변의 학부형들을 보면 알게 모르게 여전히 백화점 상품권을 스리살짝 담임교사에게 건네고 티 안나게 집으로 택배선물을 부친다. 작년 배추파동 때는 몇몇 엄마들이 아예 담임선생의 김장김치까지 책임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다 자기 자식을 잘 보이기 위한 극성 엄마들의 몸부림 같아서 씁쓸하지만, 30년 전에도 촌지 수금하러 다녔던 선생이 존재했듯 지금도 여전히 백화점 상품권 수십장 들고 다니며 바리바리 쇼핑하는 '일부' 교사 목격담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더러 오가는 걸 보면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어디나 썩은 구석은 있다지만, 그런 몰상식한 교사들이 존재하는 한 학교 현장에서 피해를 보는 학생들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이고, 학부모 교육열은 어디에 내놔도 최고라는 이 나라 교육의 현실은 확실히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이제 궁금한 건 딱 하나다. 30년 넘게 한 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쳐온, 젊은 시절 청렴하고 곧아 보였던 조카네 담임 선생님의 현재 성품은 어떠할까. 사람은 좀체 안변한다는 게 진실이듯, 사람은 세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는 사실도 진실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한낱 인간이 30년간 어떻게 안 변하겠나. 너덜너덜해져서 버릴까말까 하다가 못 버리고 그냥 서랍장에 들어있던 중학교 졸업앨범을 새삼 꺼내 '도날드 덕'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한번 확인하며 간절히 빌었다. 휙휙 갈겨쓰듯 칠판에 적어도 멋드러졌던 선생의 한문 필체가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듯이, 착했던 선생님의 인품은 안변했기를. 그리고 이젠 최고참 교사에 속할 그분의 조용조용한 카리스마로 촌지 밝히던 속물 선생들이 끼리끼리 목청 높이던 학교 분위기는 확 바꾸어 놓았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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