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에 해당되는 글 55건

  1. 2010.10.29 생선가시 2
  2. 2010.03.18 마지막 선물 14
  3. 2010.03.05 외할아버지 6
  4. 2009.12.08 서글픈 고백 21
  5. 2009.08.26 칠석에 내리는 비 6

생선가시

투덜일기 2010. 10. 29. 20:23

밥먹을 때 혼자 생선가시를 발라 먹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는 당연히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충 짐작컨대 열살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호통 교육으로 젓가락질은 국민학교 이전에 이미 통달한데다, 밥상머리에서 오래도록 엄마의 시중을 받기엔 두 동생이 있어 어려웠을 테고, 그때도 이미 잘난척 했던 나의 성격이 그런 걸 허락치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살쪽을 우리에게 나눠준 뒤 당신은 남은 살에서 생선가시를 대충 발라서 입안에 넣고 마구 씹다가 남은 가시를 뱉어내는 방식을 어려서도 몹시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동생들은 머리가 굵어진 뒤에도 생선을 먹을 땐 꼭 엄마가 거들어줘야 했다. 막내는 아예 비린것을 싫어해서 웬만해선 젓가락도 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억지로 먹이려고 자꾸 밥그릇에 생선살을 올려주는 편이었고, 큰동생은 생선가시를 바르는 게 아니라 생선 몸통을 헤쳐놓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영악한 나는 생선 종류가 달라지더라도 중간 뼈대와 등, 배에 난 가시의 구조를 알면 완벽하게 생선살만 발라먹는 게 어렵지도 않은데 다들 왜 헤매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행히도 착한 올케들은 생선반찬을 식탁에 올릴 때마다 어린 조카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일일이 가시를 발라 살만 먹기 좋게 마련해주는 성품이다. 그게 습관이 된 덕분에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땐 우리 모녀를 위해서도 가시를 발라주는 지경. 애들과 남편을 위해 돌아가며 생선 가시를 발라주느라 생선을 굽거나 조리는 날엔 정작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한다고 푸념하면서도, 지켜보면 노상 그러고 있다. 엄마도 위대하지만 아내도 위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끔 나도 밥상머리에서 일손을 돕느라 조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다 보면, 녀석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정말로 젓가락을 쉴 수가 없고, 내 입으론 생선살 한톨 못들어간다.

물론 이젠 나에게도 밥상머리에서 늘 생선가시 바르는 시중을 들어들어야 하는 왕비마마가 계신다. 과거에도 그랬듯 왕비마마는 대충 큰 가시만 발라낸 생선 살을 마구 씹다가(잔 가시는 칼슘 섭취를 위해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신다) 걸리는 가시가 있으면 뱉어내는 분인데, 그러다 꼭 가시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 못하게 말린다. 일주일 단위로 병원에 다닐망정 생선가시 빼러 응급실 가는 일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식단을 구체적으로 짜서 해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생선을 굽거나 조려 상에 올리는 편이라 어느새 생선가시 바르는 일도 나름 주간행사다. 

돌아보면 굴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위해 말년에 생선가시를 바르는 일도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땐 당연히 할머니가 생선 살을 발라 내 밥숟갈에 얹어주셨겠지만, 눈이 어두워지신 할머니를 위해선 나나 엄마가 할머니 밥숟갈에 굴비 살을 올려드려야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은 됐으니 너나 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잔 가시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살코기만 할머니 숟가락에 얹어 드리며 나는 몹시 뿌듯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엄마를 위해 생선살을 바르는 요즘은 뿌듯함보다 서글픔이 앞서고 그래서 자꾸만 심술이 난다. 할머니를 위해선 꼭 숟가락에 생선살을 얹어드렸으면서, 엄마를 위해선 가시만 따로 발라 치워놓고 직접 집어 드시라고 하는 것만 봐도 태도가 다르다. 벌써부터 매사에 너무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엔 엄마가 완전히 힘없는 '할머니'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보가 녹아 있다. 

오늘 저녁에도 가시가 젤 없는 편인 삼치를 구워 먹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열살무렵에 생선가시 분야(?)에서 독립했다고 쳐도 엄마의 시중을 받은 게 10년이니 최소한 나도 10년은 군말없이 봉사해야 맞는 거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봉사의 세월이 이어지면 감사할 일이고... 생선가시 때문에 툴툴대다 갑자기 철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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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선물

삶꾸러미 2010. 3. 18. 15:30

"따지고 보면 '베푸는(?)' 사람의 자기 만족인것 같아요. 준혁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또 그 마음을 한번도 제대로 돌아봐준 적 없는 세경으로선, 그렇게 해서라도 추억 한가지라도 더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준혁이가 준 것에 비해 자신이 준게 너무 없다고 생각한 세경이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을 거란 점에선 그 '선물'은 결국 자신에게 주는 것인 듯." - 미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문상의 절차가 어렵고, 낯선 이들과 홀로 애도의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나 말고는 거의 아무도 갈 사람이 없을 것이 확실한 친구의 빈소에 나만은 가야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친구의 마지막 가는 길에 인사는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스스로를 다그쳤는데 다녀오고 보니 그 역시 나를 위한 행동이었다. 마지막 인사도, 마지막 선물을 대신한 조의금도 결국엔 나를 위한 위로의 행동이었던 거다. 내쪽에서 단 한번도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던 최근에도 그렇고 그 옛날에도 친구에게 받은 것에 비해 준 게 너무 없다고 느끼므로 그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 그러고는 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던 거다. 어쩌면 모든 선물이 받는 사람의 기쁨을 지켜보며 흐뭇해지고 싶거나 마음 빚을 갚고 홀가분해지려는 이기적인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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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삶꾸러미 2010. 3. 5. 01:03

제일 많이 쓴 태그가 제일 큰 글씨로 보이는 나의 블로그 스킨에서 드러나듯이 이곳의 태그 1위는 단연 가족이다. 어쩌면 가족이란 안온한 울타리이자 동시에 나를 가두는 가시철망 또는 멍에라는 것이 내 삶의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갖고 있는 관계만으로도 무겁고 힘겨워서 내 스스로 새로운 가족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비혼의 가장 큰 이유일 테고. 어쨌거나 읽는 이들이 지겹든 말든 또 나의 가족 이야기다.

다 저녁때 외사촌동생에게 전화가 왔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 끌려갔다 생사를 모르게 된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혹시 나올지 모르니 조금 전 mbc에서 하는 <후플러스> 방송을 울 엄마가 유심히 봐주셨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내 머릿속에 <할아버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은 늘 한분이었던 터라 이제껏 이 공간에서 내가 언급했던 할아버지 역시 죄다 친할아버지셨는데, 이참에 처음으로 얼굴도 모른 채 함자로만 알고 있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광복절 즈음과 삼일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뉴스나 특집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징용조선인>이 바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이름표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울 엄마가 세살 때 외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끌려가셨고 해방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온다며 마침 일본 항구에서 만난 이웃에게 당신은 다음 배로 갈 터이니 먼저 고향에 도착하면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달라셨다는데 이후론 행적이 묘연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각지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다가 고향으로 귀국하려던 조선인이 9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방송에서 우리 외할아버지의 사연과 아주 똑같은 경우를 만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부산으로 가려는 조선인들이 너무 많아 작은 연락선으론 수용이 불가능하자, 낡은 목선을 단체로 빌려타고 귀국을 시도하면서 우연히 만난 친지나 이웃에게 소식 먼저 전하고는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사연이 중복된다는 뜻이다. 풍랑에 배가 난파되었거나 오랜 뱃길에 병사하였거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일본에 남았거나 또는 귀국 길에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났거나 뱃길이 꼬여 이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붙들렸거나, 이리저리 짐작만 할 뿐 그분들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대다수 어둠에 묻혀 있다.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네 마네,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유골을 회수하네 마네, 미쯔비시 같은 거대기업의 징용 조선인 관련 기록이 20만건이나 발견되었네 마네 하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매번 실질적인 일의 진척은 단 한 톨도 없었으므로 언제부턴가는 다 소용없는 헛짓이라고 아예 외면하는 쪽을 택하셨다. 유골회수를 위한 진상조사 신청이라도 하려면 우리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자라는 증거서류를 내놓아야 한다는데, 해방되자마자 전쟁 통에 보퉁이 짐만 꾸려가지고 피난 내려갔다 온 집안에 그런 게 남아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과거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셨다는 편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피난 보퉁이를 싸면서는 나라도 편지 따위 대신 귀중품과 생필품을 챙겼을 터이고 잿더미로 변한 서울에 돌아와선 우선 먹고 사느라 바빠 편지 꾸러미를 불쏘시개로 써버렸대도 당연할 것 같다. 

생사도 알 수  없고 행적도 모른 채 그저 당연히 돌아가셨으리라고 짐작하는 외할아버지의 경우, 우리 가족은 유골을 찾는다거나 더 나아가 있을지 말지도 모를 보상금을 받는다거나 하는 희망은 버린지 오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울 엄마가 세 살 때 헤어졌으니 자손들에게 얼굴도 기억날 리 없는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그저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키큰 어르신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전주이씨 XX대군파 십몇대손>임을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사촌동생은 입장이 좀 다른 모양이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면 할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일 게다.

사촌동생은 249명이라고 인원까지 정확히 언급된 징용조선인의 명단이라도 방송에 나올까 기대했던 모양인데, 냉소적인 생각으로 방송을 지켜본 내 짐작대로 새로울 것은 전혀 없었다. 일본 곳곳의 사찰에는 주소와 성명까지 똑똑히 기록된 재일 조선인의 유골함이 수두룩빽빽한데도, 훌륭하신 이 나라는 징용 조선인의 유골회수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국회에서 쌈박질을 해대는 동안 법안 통과가 늦어져 예산집행이 되지 않는 바람에 그나마 해마다 이맘때쯤 미미하게 이루어지려던 한일합동 조사는 무산되고 말았단다. 오히려 일본인들과 일본 사찰에서 그 오랜 세월 징용조선인의 유골함을 보관하다 더 적극적으로 한국으로 돌려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무작정 기다리며 보관하기 어려우니 담당자 마음대로 합골해서 아무렇게나 뒤섞어 놓은 곳도 있던데, 반백년이 넘도록 제 나라에서 찾아갈 생각도 안하는 남의 나라 백성 유골을 그렇게 다룬다고 해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조선으로 되돌아가다가 태풍에 난파된 배에서 떠밀려온 조선인의 시신이 엄청나게 쌓이는 바람에 손수 매장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일본 노인이 과거 조선인 유골 매장터라고 가리키는 대마도의 어느 바닷가엔 요즘 한국에서 흘러들어간 쓰레기 더미가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이 나라에서 징용 조선인 문제를 대하는 권력자들의 태도를 상징하는 듯한 그 쓰레기를 보고 있자니 분노도 치밀지 않았다. 다만 그 쓰레기 더미 앞에서 고인들을 위한 묵념을 올리는 일본 노인의 인간적인 마음이 고마울 뿐.

물론 징용조선인의 유골 환수 문제는 전범 일본의 배상금 책임 문제와 엮여 있고, 강제노역에 끌려간 할머니들에게 배상금이랍시고 겨우 99엔을 내미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 일본 정부의 떳떳한(?) 입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원조를 빌미로 정부차원에서 배상문제를 제멋대로 마무리한 이 나라 권력자들의 과오 탓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힘없는 나라 탓에 남의 나라에 끌려가 억울하게 노동력을 착취 당하다가 죽은 국민들의 후손이 원한다면 그 유골이라도 되찾아 이 땅에 모셔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미온적이고 알량한 태도로 90만에 이르는 징용 조선인의 흔적을 찾고 유골을 반환하려면 앞으로 몇년이 더 걸릴지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인데, 국회에 앉아 있는 놈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집행 예산 삭감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사촌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일쯤 녀석에게 외할아버지의 흔적 찾기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전화를 할 것이다. 이 나라 권력자들은 올림픽에서 메달 따온 선수들에게는 <국격>을 높여 자랑스럽다고 플래카드 내걸고는 앞다투어 같이 사진찍고 생색내기 좋아할지 몰라도, 힘없고 돈없는 소시민들의 조상 찾기는 놈들이 보기에 <국격>이나 <국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쓰레기 더미 뒤지기로 여겨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굳이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아도 사촌동생 역시 방송을 봤다면,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이 나라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어린 시절은 대여섯 살 무렵인데, 놀랍게도 울 엄마는 세살 때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하얀 한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키 큰 남자가 자신을 안고 마당을 왔다갔다 했다는 울 엄마의 말에, 외할머니가 희안하다며 "그분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고 했다니 우리로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괜한 전화 한통에 울 엄마 역시 얼굴도 모른 채 느낌으로만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새삼 달구는 듯하던데, 혹시 외할아버지 함자가 나오는지 눈 부릅뜨고 지켜볼 터이지 걱정말고 주무시라고, 그래도 별 기대는 하지 마시라고 미리 언질은 했지만 내일 대뜸 엄마한테 화부터 낼까봐 걱정이다. 부디 "엄마는 그렇게 겪고도 아직 이 나라에 기대하는 게 있어!? 징용 끌려간 사람들 생사 확인해주려고 나섰더라면 벌써 해줬어야지!"라고 버럭 소리지른 대신 그냥 얌전하게 "우리 외할아버지 얘긴 전혀 안나오더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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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고백

투덜일기 2009. 12. 8. 16:19

나이가 늘어날수록 자신감도 늘어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확실히 나이와 함께 자신감이 줄어듬을 느낀다. 어쩔 수가 없다. 각별히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마흔을 넘기고 난 뒤의 나이듦은 성숙을 지나 노화를 향할 수밖에 없나보다.
지난 몇년 새 내 자신감을 특히 좀먹기 시작한 신체적 노화 증상은 바로 노안, 코골이, 흰머리다.

사람에 따라 30대 중반부터 시작되기도 한다는 노안은 <중년안>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어쨌거나 그게 그거다. 노안 대신 <중년안>이라고 박박 우기는 게 더 서글픈 느낌이다. 몇년 전부터 친구들이 휴대폰을 최신형으로, 최대한 액정 큰 기종으로 바꾸면서, 작은 액정에 뜨는 글씨는 당최 보이질 않는다고 할 때는 나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문자를 보내면 답 문자 보내는 게 골치아파 대신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들을 늙은이라고 놀리며 그들보다 한두 해 젊은 걸 기뻐했던 것 같다. 그때 친구들이 장담했었다. "너도 금방이다! 두고봐라."
아직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받는 게 어려운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나도 명함에 박힌 제일 작은 글씨라든가 화장품 상자 구석에 적힌 작은 글씨들을 읽으려면 안경을 벗고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안>이란 안구와 수정체, 각막 따위의 탄력이 떨어져 순식간에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현상을 말할 거다. 처음엔 안경을 벗거나 눈을 찌푸려 애써 초점을 맞춰야 하고, 좀 더 지나면 돋보기의 힘을 빌어야 하는... 
벌써부터 휴대폰 문자를 보낼 때 휴대폰을 코앞에 두는 게 아니라 멀찌감치 떨어뜨리고 느릿느릿 문자판을 찍는 친구들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 될 거라 생각하면 그야말로 서글프고 괜히 억울하다. 어려서부터 눈이 나빠 고생했으면 노안이라도 건너뛰어야 공평한 거 아닌가!

노안 만큼이나 보편적인 노화현상인 코골이도 나에겐 제법 충격적이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서 누가 옆에 있기만 해도 잠을 못잔다고 타박하던 인간이 코를 골다니. 평소에 코를 골지 않던 사람들도 심히 피곤하면 코를 고는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어려서부터 얌전한 잠버릇으로 유명했다던 내가 자기 코고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놀라움과 슬픔은 이루말할 수가 없다. 코골이는 목젖이 늘어지거나 비강이 좁아져 생기는 현상이라고 알고 있다. 마흔 넘어 뺨이 쳐지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보이지 않는 목구멍 살까지 쳐지고 말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옆에서 확인해줄 사람이 없으니 나의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 또한 코고는 여자가 되고 만 것이다. (코골이가 얼마나 심한지 궁금해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자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걸 확인하는 마음은 더 무거울 것 같아 관두고 말았다.)
요가 강습은 매번 맨 마지막에 팔다리를 약간씩 벌린 채 힘을 쭉 빼고 가만히 누워있는 자세로 끝이 난다. 어둑한 조명과 따뜻한 열기 속에 낑낑대며 몸을 쓰다 드러누워 있노라면 그 3분에서 5분 사이가 참으로 평화롭게 느껴지긴 한데, 놀랍게도 그 짧은 시간에 잠드는 사람이 (가끔 잠드는 어린 정민공주 말고도!) 있다. 의식적인 호흡에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누군가 까무룩 선잠이라도 들라치면 쌕쌕 숨소리가 달라지고, 간혹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5분 뒤 요가 강사가 손가락발가락을 살살 움직이라고 하면서 휴식에서 일깨워주어도 모른 채 잠들었다가 다들 일어나 앉는 소리에 퍼뜩 깨어나는 이를 보노라면 얼마나 피곤했을까 안쓰럽기 보다는 거기서 코까지 골며 잠들 수 있는 무던함이 부러울 정도다. 그러면서 코골다 깨어난 강습생의 나이를 유심히 가늠하며 나를 위로한다. '그래... 쟤는 20대 후반밖에 안됐는데 벌써 코를 골잖아. 넌 40대에 접어든 중년이야. 코 고는 게 큰 흉은 아닐 나이잖니...' 하지만 아무리 자위해 보아도 슬픔은 가지지 않는다. 
게다가 ㅌㄹ 마을 엠티도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조심스러워서 어디 잠이라도 잘 수 있겠나. 생각 같아선 이번 기회에 나의 코골이 수준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오랜만의 떼 취침에 내가 먼저 잠들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엔 흰머리를 한꺼번에 일곱개나 뽑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보다 네 살 어린 막내동생은 20대 중반에 이미 염색이 필요할 만큼 흰머리가 많았고, 큰동생 역시 이젠 머리숱이 적어져 흰머리를 뽑는 게 아까운 지경이 되었으니 같은 유전인자를 타고났을 동생들에 비해선 내 상태가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새치를 한둘씩 보이는 아이들과 달리 얼마 전까지는 새치 하나 없던 사람에게 생겨나는 중년의 흰머리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몇년 전부터 여기저기 가끔씩 보이는 흰머리를 하나 둘 뽑을 때는, 흰머리가 아니라 <새치>라고 극구 우겨보았지만 요번에 양쪽 귀언저리에서 집중적으로 서너개씩 흰머리를 뽑고 나니 귀밑머리부터 센다는 전형적인 노화현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는 스스로 스컹크가 되었다며 염색을 하지 않고는 절대 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백발이 성성해졌음을 토로하는 이도 있으며, 흰머리를 뽑기는커녕 한 오라기라도 소중히 보호해야한다면서 두드러진 흰머리를 중후함의 상징이라 자랑하기 시작한 친구도 있다. 하지만 흰머리에 대처하는 방식이 누구나 다르듯, 몇가닥이든 수십가닥이든 수백가닥이든 본인이 느끼는 충격의 정도는 다를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다.

실제 나이가 어떠하든 누구나 동안을 추구하고 젊고 튼튼한 육체가 아니면 손가락질 받는 연령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 분위기에 편승할 필요는 없다고 나의 이성은 부르짖고 있지만, 두드러지는 노화의 증거 앞에 이토록 맥이 빠지는 걸 보면 속으론 그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의미다.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는 <나이값>이라는 말이 싫어서 나이와는 상관없이 <나답게> 사는 걸 무모한 철없음과 동격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여겼는데, 이런 두려움은 결국 사십대의 나이값인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더욱이  내 정신은 아직 중년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내 육신은 이미 앞서 노년을 준비하고 있으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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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날짜보다 음력이 더 편한 할머니 두분이랑 오래도록 가까이 산 데다 이젠 울 엄마도 할머니가 되어 매일 양력과 음력이 나란히 적혀 있는 달력을 들춰가며 날짜계산을 하는 터라 며칠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오늘이 칠석이라고. 절에선 칠석(음력 7월 7일이다)부터 백중(음력 7월 보름)까지 계속 특별기도가 있는 터라 왕비마마는 원래 절에 가셨어야 하는데 마침 안과 정기검진일이라 못 가게 된 게 엄청 아쉬운 모양이었다.
왕비마마의 아쉬움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오늘도 과연 비가 내릴 것인가 그것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방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칠월칠석은 견우랑 직녀가 일년에 딱 하루 오작교를 타고 만나는 날이고, 그래서 기쁨의 눈물이 비로 내린다는 전설을 나는 전래동화책을 보기 이전에 까마득히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것 같다. 한 여름 낮잠을 자려고 할머니방에 누우면 친할머니는 잠이 쉬이 오도록 머리칼을 살살 쓸어넘겨 주시거나 부채질을 해주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평안북도 고향에 사실 적에 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었는데 계집애라 학교에 못가게 하는 바람에 오라버니들 책 읽는 걸 귀동냥으로 들으며 독학으로 대강 한글을 익혔다는 이야기며, 몸종 거느리고 꽃가마를 타고서 시집 오던 날 이야기, 한량 남편의 기생질 사건 같은  할머니의 실제 경험담도 있었지만, 견우 직녀 얘기랑 햇님달님 이야기 같은 옛날 이야기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어린 나에게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는 곧 진리이기도 했지만, 칠월칠석엔 정말로 해마다 비가 내려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비가 조금 내리면 기쁨의 눈물이라 살짝 울고 마는구나, 오늘처럼 장대비가 내리면 이번엔 그동안 서로 헤어져 지내는 게 힘들어서 서러움의 통곡을 하나보다, 하는 할머니의 부연설명까지 곁들여지면 어찌나 더 실감이 나던지. 여름마다 옥수수를 사다가 쪄먹을 때 옥수수 끄트머리에 달린 수염을 뜯어내면서도, 햇님달님 호랑이가 마지막에 썩은 동아줄이 끊어져 옥수수밭에 떨어지는 바람에 옥수수 수염이 빨갛게 됐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나는 호랑이 피가 묻어 색이 변했다는 옥수수 수염을 단 한오라기도 남겨놓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왈칵 울음을 쏟아내던 견우와 직녀가 진정했는지 이 글을 쓰는 사이 어느새 비가 그쳤다. 언젠가는 칠석날 아침에 비가 내렸다가 해가 쨍 났다가 저녁무렵 다시 비가 내린 적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날 직녀랑 견우가 만나서 기뻐 울다가 행복해져서 해가 났었는데 저녁때 다시 헤어져야 하는 게 슬퍼 또 눈물을 흘리는 거라고 하셨고, 종일 비가 안 내려 이상하다 싶었다가 오후 늦게 비가 내린 어느해 칠석엔 아마 까마귀랑 까치가 게으름을 부려서 오작교를 늦게 만들어줬나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10여년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나에겐 참 늘 위대한 분이었던 우리 할머니, 이제 돌이켜보아도 정말 참 대단하시다. 할머니가 소싯적에 전해 들었던 이야기였든, 당신이 직접 꾸며내신 이야기였든 칠석날 하나에도 손녀딸에게 이토록 소중한 추억과 다양한 이야기를 남겨주셨다니.
오늘따라 눈물나게 할머니가 보고싶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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