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에 해당되는 글 55건

  1. 2015.05.08 5월 8일 3
  2. 2015.04.18 그랬다고.. 7
  3. 2014.12.15 그간... 1
  4. 2014.05.20 뜬금없는 잉여짓 9
  5. 2014.04.28 침묵하지 말것 1
  6. 2014.04.09 좌절된 꿈 8
  7. 2014.03.31 3월 31일 11
  8. 2013.04.16 집앞에 꽃잔치 8
  9. 2013.01.24 정신머리 6
  10. 2013.01.23 덕혜옹주 특별전 5

5월 8일

투덜일기 2015. 5. 8. 20:27

아카시아꽃 향기를 처음 느낀 건 7일이었다. 5월5일에 엄마랑 앞산을 오르러 나갔을 때만 해도 연두색 봉오리로 매달려있더니만, 외출했다가 어버이날 만찬을 위해 장을 봐가지고 낑낑대며 언덕을 오르는데 향기로운 냄새가 먼저 반겼다. 아카시아 향기를 즐길 여유도 없이 계속 우울한 나날.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이렇게 우울한 어버이날이 또 있을까.


지금은 그누구보다도 효자인 큰동생. 장손이라는 부담 때문이었을까, 고등학생때 잠시 방황을 하며 엄마 속을 무던히도 썩였었다. 그때 엄마가 벼르고 별렀다는 말. 너도 장가가서 어디 너랑 똑같은 자식 나서 속 좀 썩어봐라... 


엄마들의 저런 바람은 반드시 이뤄진다던가... 동생은 실제로 요즘 자식 때문에 엄청나게 속을 썩고 있는데, 울 엄마는 정말로 당신의 발언 때문에 그렇게 됐나 싶어 맨날 회개하고 속죄기도를 올린단다. 그런데 속없는 자식놈은 다 커서도 농담인지 진담인지, "엄마가 바란 대로 됐잖아!"라며 부모 원망을 하고, 늙은 엄마는 또 그 말에 상처를 받는다. 


이래저래 마음 상하고, 즐거이 모여 왁짜지껄 밥 먹을 상황도 아니라 동생들에게 가정의달 행사로 모이지 말자고 했다. 올해는 그냥 넘어가자. 내가 너무 바쁘다. 섭섭하지 않다. 진짜로 마음이 안내킨다. 엄마가 싫단다....


그래도 막내동생네는 일요일에 잠시 다녀갔고, 큰동생네는 장손 ㅈㅎ이가 대표로 어버이날 카네이션 사들고 왔다. 그래, 어쩐지 육회 감을 좀 많이 사고 싶더라니. 잘 됐네. 부리나케 전복구이에, 샐러드 두 종류에, 육회무침까지 한상을 차린뒤 밥을 푸려고 보니 아뿔사, 밥통에 밥이 한 그릇밖에 없다. ㅠ.ㅠ


점심은 파스타 해먹으면서 '보온'으로 켜져있는 밥통에 새밥이 한통 가득 든 줄 알았다. 누가 뭐래도 '밥은 내가 해요'라는 엄마의 주장을 '참'으로 만들기 위해서 쿠쿠 밥솥에 밥하기는 엄마 몫인데 맙소사, 한 그릇 남았던 밥은 당연히 아침에 엄마가 드셨어야 했던 거다. 하지만 어버이날 아침을 홀로 손수 차려드시기 싫었던지, 나에겐 밥 먹었다 거짓말(!)을 하고 고구마로 떼웠던 전말이 너무 늦게 드러났다. 으악...


어버이날이고 뭐고 길길이 날뛰며 왜 밥먹는 거 가지고 거짓말 하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치다가 다 차려놓은 밥상이 식어가는 가운데 씩씩대며 새로 밥을 앉혔다. 올 어버이날은 이래저래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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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고..

투덜일기 2015. 4. 18. 01:30

4월 16일엔 추모집회엔 나도 나가서 촛불 하나 들어야하지 않을까 며칠 고민했지만 나가지 못했/않았다. 꺼려지는 핑계는 너무도 많았다. 같이 나갈 사람도 없고... 비도 온대고... 일도 바쁘고... 다음날 아침부터 자원봉사 나가야하는데 체력이 될까... 분명 차벽치고 길 막고 강력진압할텐데 무사히 집에 올 수 있을까 엄마가 걱정할텐데... 구차하게 나열하고 있지만 그냥 나가기 싫었다는 게 맞다. 절실하지 않았던 거다. 냉장고가 거의 다 비어 장을 보러가야한다고 며칠째 별르면서도 내키질 않아 종일 꼼짝도 하지 않고 집에 처박혀 있었다. 


마침 다음날은 궁궐에 봉사나가는 날이란 핑계로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뉴스는 보지 않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진동으로 돌려놓은 휴대폰 울림에 금방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자정을 몇분 남긴 시간, 휴대폰 화면엔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오는 전화번호는 잘 안받는데, 시간이 시간인 만큼 괜스레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끼며 전화를 받았더니 큰조카 ㅈㅁ이가 대뜸 "고모, 어디야?" 물었다. 당연히 집이지 어디겠니... 근데 니 전화는 어쩌고!!


버스 타고 집에 가려다가 친구랑 1시간째 버스 안에 갇혀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집보다 고모네 집이 가까우면 엄마가 고모네로 가서 자라고 했단다. 와서 자는 거야 당연히 괜찮은데 문제는 집이 효자동인 친구를 어쩌냐는 것. 초저녁부터 걸어서라도 집에 가려고 시내에서 이리저리 시도했지만 어디로도 접근할 수가 없었단다. 일단 같이 오라고, 당장 내려서 전철 끊기기 전에 전철로 최대한 가까이 오든지, 어떻게든 은평차고지로 갈 거라는 버스에 계속 남아 있다가 종점 도착하면 내가 데리러 가든지 하겠다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버스는 막힌 길을 피해 명동으로 서울역으로 돌고돌아 우리 동네 전철역앞을 지나더라며 버스에서 내렸다고 40분쯤 후에 다시 전화가 왔다. 시간이 너무 늦어 마을버스가 있을지 모르겠다, 택시를 탈래, 데리러 갈까 했더니 걸어와도 되겠단다. 어차피 시내에서 막힌 길 피해 종로로 을지로로 엄청 걸어다녔는데 2정거장쯤 더 걷는 거 일도 아니라나.


씩씩하게 대꾸하더니만 막상 집에 온 두 아이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당연하지. 벌써 새벽1시. 애기들, 고생했다, 조금 쉬다가 길 뚫렸나 알아보고 친구는 효자동 집까지 고모가 데려다주면 되지 않겠니 했더니 일단 배가 고프시다고...  라면 끓여줄까 했더니 웬일로 싫단다. 다른 간식 거리는 없는데.... 그럼 복음밥? 오케이... 다행히 스팸 통조림 하나 있는 거에다 자투리 채소를 다져넣고 남은 밥 한통을 다 볶았다. 내심 아침에 조카 먹여보낼 한 그릇을 남길 요량이었는데.... 결국 위대한 십대 둘은 그 많은 밥을 다 먹어치웠다. 다이어트한다고 맨날 굶지를 말든지 야식을 많이 먹지를 말든지... 자연히 잔소리가 나오려는 걸 꿀꺽 삼켰다. 그냥 살아만 있어도 고마워해야할 아이들인데 까짓것 야식 좀 많이 먹어서 살찌면 어떠니...


뉴스를 검색해보니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시위대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고. 광화문 주변에 둘러친 차벽은 웬만해선 아침까지 버틸 것 같고 우리집에서 효자동으로 접근하는 길도 청와대 길목이라 막아놓았기 십상일 것 같았다. 친구도 그냥 재워보내기로... 배부른 십대 둘은 배를 두들기며 낄낄 깔깔 실컷 수다를 떨다가 2시를 한참 넘겨 잠이 들었지만 결국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5시반부터 깨워달라더니만 5분만 더, 10분만 더...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깨우러 다니는 한편, 고기도 없이 대충 미역국을 끓이고, 없는 반찬대신 한 덩어리 남았던 돼지고기 목살을 녹여 이른 아침부터 요란하게 냄새를 피우면서 구워먹였다. 어휴... 학부형 엄마들은 이짓을 맨날맨날 어떻게 할까, 그러다가 문득 이렇게 아침 시간에 애들 깨우느라 소리치고 밥 해먹이고 그러는 게 더 없는 소원이 된 부모들이 있다는 걸 뒤늦게 생각해냈다. 


애들을 보내고 나서는 시간이 너무 많아 느릿느릿 외출준비를 하다가, 몸 편하게 버스타고 잠깐 눈을 붙여야지 생각하며 경복궁 가는 버스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내 생각이 짧았다. 버스는 세검정부터 이미 거북이걸음... 전날밤부터 광화문 바로 앞에서 농성중이라잖니... 그래서 광화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경복궁으로 드나들려면 주차장 입구나 서쪽 쪽문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 형광노랑색 조끼를 입은 의경들이 경복궁 주변에도 골목마다 모퉁이마다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도 밤새 그렇게 지키고 서 있었을까, 얼굴을 살피게 되는 건 이제 그 아이들도 어느덧 다 내 아들뻘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라꼴이 엉망이라 니들도 고생이 많다. 


굳게 닫힌 광화문과는 상관없이 이날 경복궁엔 현장학습을 나온 단체 어린이 관람객이 넘치고 또 넘쳤다. 안내해설을 예약했던 인천의 어느 초등학교는 주변에 버스조차 세울 틈이 없어 약속시간보다 40분이나 늦게 궁궐에 입장을 할 수 있었다. 경복궁 주변에서 시위자들에게 세월호 관련 유인물을 받아들고 아무 생각 없이 궁궐 문을 들어선 중학생 아이들은 의경들의 검문을 받고 입장을 제지 당했다가 인솔교사의 강력한 항의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길에서 나눠주는 종잇장을 받아든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유인물을 받아든 아이들도 죄가 없고, 상부 명령으로 그런 유인물 소지를 막아야하는게 의무인 의경들도 죄가 없는 건 마찬가지. 청와대 코앞이라 늘 굳은 얼굴로 입구에서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그 의경 아이들도 실은, 가끔 궁에 유명인이 나타나면 신이 나서 같이 사진찍자고 청하는 이 땅의 해맑은 청년들이다. 그 옛날 학창시절처럼 경찰병력을 무조건 '짭새'라고 부르며 적대시할수만은 없는 세대가 되고 말았구나 싶다. 시위대에게 캡사이신 최루액 뿌리고 물대포 쏘아대는 건 분명 공권력 남용이지만, 잘못은 그러라고 명령을 내리는 책임자들에게 있지 맨 앞에서 방패와 곤봉들고 싸워야 하는 아이들은 또 무슨 생고생인가. 


광화문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경복궁과 그 너머 광화문 광장의 풍경은 참으로 참으로 대조적이었겠구나 싶은 하루. 오전 오후 두번이나 목이 찢어져라 해설을 하기도 했지만 담장 안쪽에 있다는 게 뭔가 죄스러워서 흥이 나질 않아 이상스레 고단하고 심신이 쳐졌다. 과연 나는 여기서 왜 이렇고 있는 걸까.... 회의가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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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투덜일기 2014. 12. 15. 16:50

마지막 포스팅을 한지 한 달이 넘었다. 다른 때는 종종 중간에 비공개로 써놓은 글도 있곤 했는데 이번엔 그야말로 완전 블로그를 방치했다. 바쁘기도 했고 확실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간... 별일이 좀 있었다.

늘 허둥대듯 폭풍처럼 몰아쳐 원고를 마감했고,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못 미더워 붙들고 매달렸던 원고를 이메일로 보낸 뒤 허겁지겁 대충 싼 짐가방을 끌고 공항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탔다. 3월에 시도했다 실패했던 터키 여행. 7박9일짜리 패키지 상품에 3일을 연장해 짧게 자유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두어달 전부터 예약을 해놓고도 정말 가도 될까 염려하며 이번에도 타의로 못떠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일주일 전 출발확정일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귀국편 비행기 연장도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는 그래, 이번엔 확실히 잘 다녀오라는 하늘의 뜻인 게야, 그렇게 생각했었다. 같이 가는 후배 J도 나도.

하지만 마음이 그리 가뿐하진 못했다. J의 어머니는 암투병 중이셨고, 울 엄마는 중이염 치료를 위해 입원을 권유받는 형편이었다. 심지어는 월요일 출국 예정인데 토요일에 의사가 얼른 치료 시작하자며 엄마에게 입원장을 내버렸다. 거기서 엄마는 또 넌 예정대로 가려므나, 난 홀로 입원할테다... 그러시고 ㅠ.ㅠ 막대한 취소 수수료를 물고 이번에도 터키를 포기해야하나, 고민하던 나는 의사와 원무과에 다시 뛰쳐가서 입원 못한다고 버텼다. 2주 뒤나에 입원 가능하다고.

암튼 우여곡절 끝에 떠나 도착한 이스탄불엔 계속 비가 내렸다. 12월부터 우기라더니 왜 벌써! 비쯤이야 뭐 방수재킷에 우산까지 준비했으니 맞아주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카파도키아에선 심지어 폭설이 내렸다. 우리보다 하루, 이틀 먼저 여행을 시작한 팀들은 폭설에 고립되어 산맥을 넘지 못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식도 들려왔으니, 열기구를 못 탄 것쯤이야 불운도 아니라고 위안을 삼아야했다. 그래, 눈 덮인 터키를 또 언제 내가 구경하겠니, 그러면서.

지중해쪽 안탈랴, 케코바에 갔을 때만 잠깐 날씨가 개었을 뿐 그밖엔 계속 우중충 비가 내렸고, 장기여행이 하도 간만이라 그랬는지 서둘러 짐을 싸서 그랬는지 내가 가져갔던 옷들은 너무 두껍거나 얇아서 춥지 않으면 더워서 낑낑대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나마도 챙겨간 바지도 티셔츠도 갯수가 부족했다.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사프란볼루를 떠나 다시 이스탄불로 갔다가 인천공항에 내리니 우릴 기다리고 있던 건 엄청난 한파. 엄마가 미리 보일러를 돌려놓았다는데도 방의 냉기는 그날 밤에야 비로소 좀 가시는 듯했는데, 오자마자 세탁기 돌려 빨아놓은 옷들이 다 마를 새도 없이 다시 병원 짐을 싸 귀국 다음날 곧장 엄마를 입원시켰다. 

집에 돌아와 딱 하룻밤 자고 다시 떠돌이처럼 병실 쪽잠을 자야한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여행 파트너였던 J에게 엄마 상태는 좀 어떠시냐고 문자를 보내도 통 답이 없었다. J도 귀국하자마자 잡지 마감 들어가야한다더니 바쁜가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곧이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J에게 잘 다녀오라고 하셨다던 어머니가 우리 떠나 있는 동안 돌아가셨다는 것. 여행 중 J가 계속 가족들에게 어머니 안부를 물었을 때도 분명 암말 없이 신경쓰지 말고 잘 놀다오라고 했다던데, 어떻게 그런 일이. 

알고 보니 이미 우리가 터키 가는 비행기 안에 있을 때 돌아가셨기에, 이스탄불에 도착해 곧장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와도 시간상 장례절차가 다 끝난 다음일 것이 뻔해서 식구들이 아예 말을 하지 않은 것이란다. 아아. 자식으로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만큼 평생 한이 되는 일이 없다던데 얼마나 기가 막힐까...  괜히 터키 여행을 강행했구나 싶어 J에게도 그 어머니에게도 죄스러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나이롱 환자처럼 그냥 시간 맞춰 항생제 주사만 맞으면 된다던 멀쩡한 엄마가 혈압 불안정으로 입원기간 동안 또 나를 식겁하게 하는 상황도 어쩐지 천벌 받는 것 같고... 안정되지 않은 떠돌이 같은 삶이 3주를 넘어가니 심신에 쌓인 피로로 신경은 더더욱 날카로워지고...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 J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는 것도 어쩌면 몹쓸 짓일지도 모르겠다. 순전히 내 마음의 무게를 덜어보겠다는 심보가 아니고 뭔가. 그래서 이 글은 생각을 좀 더 해본 뒤 공개를 안하게 될수도... 그치만 너무도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7년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그러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곱씹으며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려 자책하는 과정을 자꾸 되풀이하게 된다. 역시 여행을 가는 게 아니었다. 왜 하필 올해 내내 터키 타령은 해가지고... 나도 이런 지경일진대 J는 괴로운 마음이 오죽할까. 부모님을 잃었을 땐 섣부른 위로가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고, 더욱이 나는 이런 상황을 야기한 죄인인지라 J에게 더더욱 할 말도 면목도 없다. 이럴 땐 나 말고 차라리 남탓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수도 있으니 J가 내 탓을 하며 욕을 하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들고...  

아무튼 우리 엄마는 무사히 8일만에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고, 나 역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당분간은 터키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워서 사진도 들여다보지 못하겠고 계속 가슴이 먹먹하다. 때로 인생은 참 가혹하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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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잉여짓

놀잇감 2014. 5. 20. 13:59

재활용 바느질에 관한 고비의 놀라운 생산성 폭발 포스팅을 보니 나도 생각 난게 있다. (이런 따라쟁이!) 물론 지금도 역시나 초절정마감모드라서 더욱 더 딴짓이 하고 싶은 심리상태란 의미일지도. ㅠ.ㅠ


세월호 사건 이틀 후엔가 곧장 궁궐 자원봉사 활동을 하러 갔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또 다시 2주가 흘러도 여전히 바닷속에 잠겨 있는 수많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니, 생활한복이라도 나름 화사하게 보이려고 작년에 장만한  빨강 저고리를 도저히 입을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뉴스보며 노상 질질 울면서 상복 입고 조문은 못 갈망정... 어차피 치마는 검정색이니깐, 위에다 임시로 검정 티에 검정 카디건을 입을까 어쩔까 고민했는데 그러고 보니 딱 원불교 정녀 차림이란 생각이... -_-; 


그때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가 동생 마고자를 리폼하자는 것이었다. 궁에서 봉사할 때 입으라고 올케가 10여년전에 입던 깨끼 한복을 상자째로 줬는데(이 또한 통치마로 수선해야 재활용이 가능하다;;) 아 글쎄 그 맨 아래 동생이 결혼 때 입었던 남색 마고자까지 들어있었던 거다. 자수가 하도 예뻐서 그것도 나중에 고쳐입든지 말든지 해야지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겨울용이라서;;) 덥거나 말거나 내친 김에 바느질을 시작했다. 남자용 마고자 길이는 대충 여성용 반두루마기와 비슷하다는 데서 착안한 것. 마침 깔맞춤 양단 목도리도 들어 있어서 깃과 고름을 만들 천도 확보되어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옆선을 사선으로 확 줄이고 소매도 통을 줄여 붙이면 되겠지 대강 계획이 섰는데, 안감이 있어서 어디까지 안감을 분리해야 하나 고민했더니 웬걸, 양쪽 소매만 튿어내고 나니 오히려 안감이 있어서 바느질이 수월했다. 안감 겉감 같이 대충 꿰매서 뒤집으면 끝!  ^^; 물론 소매는 진동 모양을 올케 저고리 선 대로 볼펜으로 그려 꿰맨 뒤 어깨선과 딱 맞춰 붙이는 게 난항이었지만 (그래서 잘 보면 한쪽 어깨는 좀 쭈글쭈글 운다;;) 그래도 밤을 하얗게 새워가며 손바느질로 완성! 다 만들고 나니, 내가 궁궐 구경을 유달리 좋아하는 이유가 전생에 궁궐 살던 공주여서가 아니라 침방 나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웃긴 생각도 들었다. 깃이며 고름이며, 재봉틀도 없이 손바느질로 대충 꿰맨 거 치고는 너무 훌륭하잖아! (완전 자화자찬 모드;;)


해서 빨강색 생활한복 저고리 대신, 자수가 화려하긴 해도 남색이라 전국적인 세월호 애도 분위기에 조금이나마 덜 튈만한 저고리를 만들어 냈단 이야기다. 하지만 그날 당장 입고 갔을 때, 실크라서 더워서 혼이 났다는;; 혼자 너무 오버했다고 느껴져, 결국 그래서 또 다시 2주 뒤 그 다음 활동일엔 도로 여름용 주홍 저고리를 입었다. 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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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무기력함을 느끼며 그저 침묵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몇줄 끄적이다 지우고 또 쓰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쓰다보면 결국 단순하게 몇몇 화풀이 상대를 찾고 있는 것도 같아서. 분노의 대상은 몇몇 사람이 아니라 줄곧 엉망진창이었던 이 나라와 사회의 시스템인데... 

나 역시 큰 사건을 겪으며 매번 그랬던 것 같다. 분노,  체념, 그리고 망각 또는 무관심.

그래서 다짐의 방편으로 여기 적어두련다. 잊지 말 것, 그리고 침묵하지도 말 것.

 

 

History will have to record that

the greatest tragedy of this period of social transition

was not the strident clamour of the bad people,

but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 Martin Luther King, Jr.

 

직업병이 도져서 원문은 무엇일까 검색해봤다. 누군지 꽤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 부조리한 세상은 참 하나도 안변했다. 특히 구석구석 썩은 내 풍기는 이 사회는 좀체 변하질 않는 것 같다. 점점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내가 착한 사람인 줄은 잘 모르겠어도 나쁜 사람, 시끄럽게 아우성 치는 몹쓸 사람이 누군지는 알겠다. 중간쯤 되는 회색분자로 살았다고 해도 암튼... 이럴 때 분명 침묵은 금이 아니다. 다만 깊은 생각없이 설익은 목소리로 떠들어대진 말 것. 독하게 마음먹고 오래오래 지켜보고 행동해야할 때다.

 

History will have to record that the greatest tragedy of this period of social transition was not the strident clamor of the bad people, but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Martin Luther King, Jr.


Read more at http://www.brainyquote.com/quotes/quotes/m/martinluth133707.html#aEIqO0uKdmO4GJWW.99

History will have to record that the greatest tragedy of this period of social transition was not the strident clamor of the bad people, but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Martin Luther King,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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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will have to record that the greatest tragedy of this period of social transition was not the strident clamor of the bad people, but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Martin Luther King, Jr.


Read more at http://www.brainyquote.com/quotes/quotes/m/martinluth133707.html#aEIqO0uKdmO4GJWW.99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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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꿈

투덜일기 2014. 4. 9. 15:08

보름도 넘게 정신만 들면 중얼거리고 있다. 지금쯤 터키에 있었어야 하는 건데... ㅠ.ㅠ 예정대로 27일에 떠났다 해도, 계획했던 귀국일이 벌써 내일. 이젠 정말 깨버린 꿈을 놓을 때도 되었다. 작년 내 별렀고, 올해들어 드디어 세부 계획을 잡아 여행사 예약까지 마치고도 못 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에효...

 

완전 자유여행으로 가기엔 경비도 이동도 부담스러워, 패키지 상품에 4, 5일쯤 자유일정을 덧붙이려는 게 우리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무조전 국적기 상품을 찾아야했는데, 치사하게도 여행사마다 막연히 문의할 땐 300달러만 더 내면 귀국일정 변경 가능하다고 해놓고 막상 예약하려고 들면 항공사 사정따라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마뜩찮아했다. 니들, 그냥 귀찮은 거였지!

 

암튼 프리랜서이면서도 매달 고정 일이 있는 파트너의 스케줄에 따라 가까스로 잡은 날짜가 3월말 4월초였는데, 왜 하필 내가 예약한 상품만 모객이 안되냐규~!!! (20명 넘어야 출발하는데 8명밖에 안모였다) 꽃보다 누나 때문에 터키 여행상품 죄다 대박이라더니 웬걸... ㅠ.ㅠ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당당하게 예약금 돌려주겠다는 여행사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도 어떻게든 다른 여행사 통합 상품이나 출발 확정된 팀에 꼽사리 껴서, 갈 수 없을까 애걸복걸했으나 결론은 '노'. 단체발권이라 귀국 일정 변경할 수 있는 티켓이 현재는 없으십니다, 고갱님...아우 쒸...

 

4월말 5월초는 황금연휴라 몇달전 부터 비행기 티켓 구하는 것도 어렵대고

5월말 6월초는 집안 행사로 내가 안되고

6월말 7월초는 파트너가 또 안되는데다 한 여름엔 더워서 가기 싫대고...

9월초엔 추석 들었고... 으억.. ㅠ.ㅠ

 

언냐, 미리 예약해서 10월에나 갈까... 라는 파트너 말에 대실망. 과연 나는 터키를 갈 수 있을까? 작업실 보증금 뺀 걸로 유럽 가겠다던 계획도 결국 차일피일 실천 못했는데! 안 돼~~~~ 놀러갈라고 퍼뜩퍼뜩 일하려던 작심은 이미 예약금 돌려받은 순간 때려치우고 공연히 아픈 배만 쓸어잡고 심술 부리다 여행도 못가고 일도 못하고 끙끙 속앓이만 했다. 그러면서 쓰지도 않은 여행 경비만큼 자꾸 이것저것 사들이고 싶은 이 욕구는 뭔가! 으휴... 암튼 내일부턴 다시 깨져버린 터키의 꿈을 모아모아모아서 다시 덕지덕지 엮어봐야겠다. 흑...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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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1일

투덜일기 2014. 3. 31. 15:45

연말에 한해를 돌아볼 때 3월은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달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대체 한 가지도 '마무리'를 한 게 없는 듯. ㅠ.ㅠ

암튼 마음만 급한 3월 말일. 게으른 나를 조롱하듯 만개한 집앞 벚꽃은 벌써 잎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오후부터 비가 내린다던 그저께. 전날만 해도 가지마다 꽃이 서너 개나 벌어졌을까말까 다 피려면 며칠 걸리겠다 여겼지만 밤새 홀라당 다 핀 걸 보고 안타까워했다. 비와서 하루만에 떨어지는 거 아냐! 그러면서 안타까워 비오기 전에 베란다 문 열고 후딱 찍어둔 사진. 

3월 29일

 

그러나 다행히도 이슬비가 내리는둥 마는둥 빗줄기가 가늘었던 덕분인지, 벚꽃은 무사했고  하루하루 더 예뻐졌다. 어제도 예뻤지만 오늘이 피크인듯, 벌써 하나 둘 꽃잎이 날리기 시작.

3월 31일

 

다 피었다고 여겼어도 이틀 전 사진엔 덜 핀 봉오리들이 꽤 많았다는 걸 이제야 비교하며 깨달았다. 송이송이 탐스럽고 예쁘다...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닌데 해마다 벚꽃 다 핀 날짜를 왜 기록하고 있나 모르겠지만 집앞 벚꽃은 암튼 다른 해보다 보름이나 일찍 피었다. 날씨가 너무 더운 거다. 진짜로 며칠 전부터 반팔 입고 지내는데 안 춥다. 세월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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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앞에 꽃잔치

투덜일기 2013. 4. 16. 17:00

질기디 질긴 꽃샘추위 때문에 아직도 간간이 발이 시린데도 꽃은 피어난다. 꽃봉오리 벌어지는 동안 찬비를 두번이나 맞아서 그런지 작년보다는 꽃송이가 좀 작다싶은 것이 덜 탐스럽다고 느껴지지만 그래도 베란다 창문 밖이 드디어 밤낮으로 환한 꽃잔치가 열렸다. 오늘처럼 흐린 날씨에도 우리집 창밖만은 환하게 햇살이 비치는 느낌.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90퍼센트쯤 다 핀 것으로 인정하고 오늘부로 '만개' 선언.(왜 니가 그런 선언을? ㅋ) 다른 해엔 살구꽃이 가장 먼저 피고, 다음으로 벚꽃, 앵두꽃의 순으로 피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앵두꽃이 되레 가장 일찍 피었다. 현재 마당에선 세 종류의 하얀 꽃이 서로 마주보며 뽐내기를 하는 형국이다. 앵두꽃도 같이 담아 올리면 좋겠지만 계단 내려가기 귀찮아서 -_-; 관두기로.

 

 

살구꽃 벚꽃

 

6년 전에 밤벚꽃놀이 포스팅을 했을 때, 나는 벚꽃이 다 피었다가 눈송이처럼 후두둑 마구 떨어질 때가 가장 예쁘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는 벚꽃이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면 앞으로 몇년이나 더 이런 꽃구경을 하겠나 싶어져 서글픈 생각이 들어 싫다고 하셨고, 나는 얼른 미안해져서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앞으로 10년간은 해마다 벚꽃놀이 다니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말 아버지의 벚꽃구경은 그게 마지막이었고 내 호언장담은 공수표가 되었다. 아버지가 그날로부터 석달도 안되어 돌아가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그날 왜 하필 그런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는지, 두고두고 가슴이 아프고 새하얗게 피어난 벚꽃을 보면서도 문득문득 슬퍼진다. 동시에 예쁠 때 많이 봐두자는 생각도 하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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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머리

투덜일기 2013. 1. 24. 14:23

황망하게도 신용카드 한 장을 잃어버렸다. 요즘 계속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잘 못잤다는 핑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통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어젯밤에 잠도 안오고 괜히 지갑정리가 하고 싶어져서(주로 커피집에서 나눠주는 종이 쿠폰이 너무 많이 쌓였다 싶었다) 똑딱이를 열고보니 가장 많이 쓰는 OO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게 어디갔지?

 

당연히 코트 주머니에 들어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없었다. 어디에서 흘린걸까. 문제는 제일 마지막으로 그 카드를 언제 썼는지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난주였던가? 이번주 월요일이었던가? ㅠ.ㅠ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문자로 받고 있다는 사실이고, 안타까운 건 사용내역 문자가 오면 확인후 금방 지워버리는 나의 조급함이다. 영수증도 지갑에 쌓아두는 거 싫어해서 대부분 금세 찢어버린다. 구매내역은 어차피 신용카드 사이트 들어가면 언제든 확인가능하니까... 

 

한참 정신머리 없어지는 나이라서 신용카드 여러장 분실신고 하고 난 뒤 엉뚱한 곳에서 되찾았다는 사연을 주변에서 익히 들었기 때문에 나도 어젯밤에 바로 분실신고는 하지 않았다. 일단 수상한 신용카드 사용 문자를 받은 적이 없으니 잃어버렸더라도 누군가 악용하고 있지는 않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십수년전 종로통 지하철에서 지갑을 소매치기 당했을 때는 거의 30분만에 신용카드 석장이 각각 청량리와 명동 소재 백화점에서 가전제품을 사들이거나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여러장 구매하는 사태를 맞이했었다. 학원수업 끝나고 집에 가려다 지갑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나름 서둘러 두어 시간만에 신고를 한 셈이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번엔 지갑째 잃어버린 게 아니므로 내가 어디선가 카드를 사용하고 나서 장갑낀 손으로 주섬주섬 영수증과 카드와 물건을 챙기다 어딘가 떨어뜨렸을 확률이 가장 높은데 그게 어딘지를 통 모르겠다. 흑흑흑... 곰곰이 더듬어본 끝에 마지막 카드 사용처가 이번주 월요일 잡화점이라고 결론을 내렸건만, 신용카드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그날은 현금으로 계산을 했는지 최근 구매내역이 지난주 금요일이다. 그럼 지난주부터 사라진 카드를 여지껏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_-;; 실은 그날의 내역을 보면서도 상호가 완전히 낯설어 가슴이 순간 쿵 내려앉았었다. 훨씬 오래전부터 카드를 잃어버렸던 게 아닌가 싶어서... 하지만 그건 내가 쓴 게 맞았다.

 

금전적 피해가 없는 게 어디냐고 위로하며 분실신고를 마치기는 했지만, 이런 정신머리로 뭘 하겠다는 건가 싶어서 맥이 쭉 빠졌다. 뭔가를 깜빡깜빡 까먹고 잊고 잃어버리는 일은 건망증 탓이라고 하겠지만 이번 사태는 나사가 어디 하나 빠진 듯한 부주의함까지 더해져 일어난 일이란 생각에 참담하다. 왜 어디에서 빠뜨렸는지도 모르겠느냐규~!! 총명탕이라도 끓여먹어야 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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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특별전

놀잇감 2013. 1. 23. 21:35

 

지난주 경복궁 답사 갔을 때 교육 끝나고, 며칠 남지 않은 덕혜옹주 특별전도 둘러봤다. 지난번 <덕수궁 프로젝트>에서 덕혜옹주의 처소를 재현해놓은 설치미술도 본 터라 실제 유품을 보는 기분이 묘했다.

 

1960년대에 한국으로 돌아와 1989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 살았으니 유품이 꽤 많을 것도 같은데 이번 전시는 일본 큐슈국립박물관 소장품을 빌어다 하는 것이라 볼 거리가 그리 많진 않다. 어렸을 때 입었던 당의와 돌복, 버선 같은 의류와 사진 몇장, 혼수품으로 가져갔을 것으로 여겨지는 비단필과 유리 공예품, 금속 촛대 따위가 전부다. 아, 맞다. 덕혜옹주가 학창시절 그리고 지었다는 그림과 시화, 엽서 글씨도 볼 수 있다. 서화에 능했다더니 정물 그림이 꽤 훌륭해서 놀라웠다.

 

학창시절 사진을 보아도 상당히 총명해 보이던데, 일본으로 끌려가 곧장 심신이 피폐해졌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아프다. 십대에 이미 조발성 치매로 진단받은 상태에서 일본인 백작과 정략결혼을 했다는데 그 병명이 확실한가?

 

90년대 초에 창덕궁에 가보았을 때, 낙선재에서 실제로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가 양식으로 바꾸어놓고 살던 내부를 들여다본 적이 있다. 시멘트와 타일로 대강 바른 화장실과 부엌이 너무도 작고도 초라했고, 당시 해설사는 곧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할 것이라고 설명했던 것 같다. 정말로 몇해 후 다시 갔을 때는 아예 낙선재 구역을 폐쇄하고 보여주지 않았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덕혜옹주 특별전보다는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궁궐의 온갖 보물과 소품들을 보고싶었으나 너무 피곤한 나머지 다음을 기약했다. 덕혜옹주의 사진으로 꾸민 몇 장의 영상물이 남긴 인상이 너무 무겁기도 했고... 망한 나라의 마지막 공주(왕비의 자식이 아니라 공주도 아니고 '옹주'이지만;;)의 운명은 대부분 불행할 수밖에 없나보다. 러시아 제국의 아나스타샤 공주에 대한 영화도 본 것 같은데;; 

 

일본에서 갖고 있는 우리나라 문화재가 워낙 많아서 일본인의 개인소장품이나 일본 박물관 소장품을 빌려다 한국에서 전시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지만, 덕혜옹주의 불행한 인생사 때문인지 1월 27일 전시가 끝나면 곧 일본에 돌려줘야한다는 상황이 더욱 서글프게 다가왔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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