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때를 연상시키듯 비도 내리고 있겠다, 여행후기나 마저 올려야겠다.
비바람 속에 첫날을 보내느라 제풀에 지친 모녀는 전날 밤 일본 말도 모르면서 TV를 틀어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 일기예보를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일본열도 아래쪽은 죄다 우산 그림이었다. 6시부터 울린 모닝콜에 눈을 떠 커튼을 젖혀보니 당연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 아침 먹기 전 온천욕 한판의 욕심은 내리는 비와 함께 꼬리를 감추었다. 비오는 날 뽀송뽀송하고 푹신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마저 풍겨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4월 12일. 또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은 9시였으므로 우리는 최대한 뭉기적거리며 아침시간을 잠으로 축내다 드디어 아침을 먹으러 로비 식당으로 향했다. 둘쨋날의 첫번째 식사는 부페식. 전날 가이드가 나누어준 식권을 내자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 종업원이 빈 접시와 나무 젓가락이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놓고 한바퀴 휘 둘러보니, 대부분은 일본식 밑반찬과 각종 생선구이류가 대다수였고 식당에 드글드글한 료칸 숙박객도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내가 먹을 수 있겠구나 싶은 건 약간의 샐러드와 토마토, 빵, 오렌지 주스, 우유 정도. 원래 아침을 안 먹는 인간이지만 강행군 여행을 떠났을 땐 반드시 잘 챙겨먹는 것이 원칙인데, 아침부터 맥이 빠졌다. 그나마 왕비마마는 먹을만 하다며 하얀 밥 한공기에, 샐러드, 생선구이, 미소시루 한 그릇으로 요기를 했다. 쓴 커피까지 대충 먹고난 나는 방에 올라가서 슈크림이 든 빵으로 배를 채웠고...
숙소를 한군데 정해두고 돌아다니는 여행이 더 좋지만 아쉽게도 이번은 명탕 <순례>라 료칸을 하루씩만 묵어야 했으므로 얼른 짐을 꾸려 내려간 나는 왕비마마를 로비에 앉혀놓고 재빨리 료칸 주변을 살폈다. 대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온천 마을에서 그냥 목욕 한 번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ㅠ.ㅠ 역시 패키지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다.
역시나 군데군데 피어있는 벚꽃은 죄다 떨어져 아쉬움을 더했다. 휘날리는 벚꽃 비 대신에 진짜 비를 맞아야 하는 여행이라니 우쒸!
기모노에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료칸 앞 다리까지 나와 양쪽에 줄지어 서서 떠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찾아간 우리의 첫 행선지는 시마네현 마쓰에 시에 있는 마쓰에 성. 우리나라로 치면 행주산성쯤 되려나? 벚나무가 8천그루나 있어서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 드는 곳이라던데 뭥미 싶을 정도로 벚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이런 엄청난 장수목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일본말을 모르니 무슨 나무인줄은 모르겠고 수령이 350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쩐지 뿌리 드러난 모습이랑 생김새가 토토로 같은 데서 많이 봤음직하지 않은가?
이런 나무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 꽤 많이 내리는데도 공원 곳곳에서 위아래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쉼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환경미화원들은 비가 와도 서울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공원이나 고궁에선 비오면 아무도 일 안하던데... 주로 갈쿠리 같은 걸로 자잘한 돌이 깔린 성 마당을 고르게 다듬는 사람들이었는데, 계속해서 관람객이 드나들어 발자국이 찍히는 걸 어쩔 수가 없을 텐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갈쿠리질을 해댔다. 우리가 지나가서 또 발자국을 만드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비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원수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대부분 할머니이거나 할아버지였다. 다들 날씬하고 자세가 꼿꼿해서 언뜻 보아서는 노인임을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로 일본에서 지내는 사흘동안 울 엄마처럼 뚱뚱한 할머니는 단 한명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비마마는 더욱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그들과 비교되어 걸음도 잘 못걷는 뚱뚱한 노인이 무슨 관광이랍시고 일본을 휘젓고 다니느냐고... 휠체어를 타고서도 구경 다니는 일본 노인들과 맞닥뜨린 적도 있으므로 그들을 가리키며 용기를 북돋아드리려 해보았지만, 그들은 일본 사람이니까 괜찮단다. ㅜㅜ
왕비마마 특별출연 ^
왕비마마의 눈빛은 당신도 올라가보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과장 안하고 경사가 6, 70도쯤 되는 나무 계단들은 확실히 노인들에게 무리였고, 층마다 무사들의 갑옷이며 투구, 옛날 지도, 무기류, 우물이 전시되어 있는 걸 보는둥마는둥 뛰다시피 가파른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층층이 올라가 증명용 사진을 찍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마쓰에성 바로 옆에 자리잡은 사무라이들의 고택. 해자로 둘러싸인 성안에는 오로지 성주와 식솔들만 살고, 무사들은 성밖에 따로 집을 마련해 살았단다. 암살당할까봐 그랬겠지 뭐. 사무라이들의 집을 복원한 건지 보존해 놓은 집들은 딱 남산 한옥마을이 떠올랐다. 소박하게 기와를 얹고 나무로 지은 집들이며 우물, 부엌에 놓인 그릇, 대청마루 다다미방 한 가운데 앉혀놓은 사무라이 마네킹까지! ㅎㅎ
수수한 집들은 뭐 그리 예쁘다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굵은 모래인지 자잘한 자갈인지 암튼 신발에 닿는 감촉이 좋은 정갈한 마당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구석구석 쏘다니는 대신 툇마루 비슷한 데 앉아 쉬고 있다가 문득 발견한 것은 나무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마리! 크기가 엄청 컸다. 집에서 쌈채소 씻다가 작은 민달팽이를 더러 발견한 적은 있어도 실제 집 매달고 기어가는 달팽이를 목격한 건 최소한 20년은 넘은 것 같아 더 반가웠다.
일본 달팽이! |
무사의 집에서 나오면 길 건너편에 바로 강물 같은 해자가 흐르는데, 우리도 저 배를 타고 해자를 한바퀴 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총 몇개라던가, 그런 설명은 당연히 까먹었는데 암튼 저 배(저래 뵈도 이름은 호리카와 유람선!)를 타고 나즈막한 나무다리를 지나려면 위에 씌운 지붕이 내려와 더욱 납작해지고 안에 탄 승객들은 잔뜩 고개와 상체를 수그려야 한다. 추울 땐 코다츠도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드디어 코다츠를 경험해보는가 기뻐했더니만, 그래도 봄이랍시고 코다츠는 없고 이불만 놓여있었다.
사실 이날은 전날만큼 비바람도 심하지 않고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서 나는 크게 추운 걸 몰랐지만, 왕비마마는 50분간 배를 타는 사이 춥다고 덜덜 떨으셨다. 이불이라도 있으니 어찌나 다행인지!
뱃사공 할머니, 허락받고 사진찍었다. 막판엔 노래도 불러주심^^ |
이불 뒤집어쓴 왕비마마 또 출현 |
한국 관광객이 꽤 많이 오는지, 뱃사공 할머니는 지붕이 내려오면 숙이는 연습을 처음에 한두번 시키더니 이내 한국말 안내방송을 틀어주었다. 물가에 서 있는 집들을 보노라니 가보지도 않은 베네치아가 잠깐 떠올라 이 무슨 엉뚱한 비약인가 싶기도 했는데, 아주 낮은 다리를 지나는 동안 네다섯 번 정도 지붕이 내려와 다 함께 찌그러져야 하는 경험이 예상외로 꽤나 재미있었다.
저 멀리 천수각도 올려다보이고....
다리마다 난간 조각도 달라서 아주 짧은 다리도 있고 아래쪽은 콘크리트로 된 다리도 있는데, 주로 사람들만 건너다닐 수 있는 좁은 다리들이 훨씬 예쁘더라.
유람선을 끝으로 오전일정은 끝이 났으니 기다리던 점심시간. 시마네현 특선음식인 이즈모 소바정식에다 신지코 호수에서 잡힌 빙어 튀김도 나온다고 해서 살짝 기대를 했는데... 했는데...
메밀 소바는 한 젓가락씩 작은 찬합에 세 단이나 들어 있으되 한국에서 먹는 메밀국수처럼 갈은 무와 파를 듬뿍 넣은 국물에 푹 담가 먹는 게 아니고 그냥 작은 주전자에 든 국물을 살짝 부어 <비벼> 먹어야 하는 수준이다. 국물이 워낙 짜서... 거기다 밥 한그릇이 나왔는데 그냥 쌀밥이면 좋겠구만 버섯과 재첩(역시나 신지코 호수 특산물이란다)을 넣어 간장으로 간을 해 지은 거무스름한 밥이었다. 근데 왜 밥맛이 비리냐고!? 빙어튀김은 새끼손가락 만한 거 딱 두 조각. 그나마도 차갑고...
해서 우리 일행은 다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얼른 아래로 내려가 핫바 같은 걸로 빈 속을 채웠다. 핫바 값은 한국이랑 비슷하게 200엔. 대신 크기는 훨씬 작더라. ㅠ.ㅠ
다음 행선지는 아다치 미술관. 미술작품보다는 정원으로 더 유명한 곳이란다. 일본식 정원의 최고봉이라나 뭐라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었고.. ㅋㅋ 그래도 정원이며 마당 예쁜 건 좋아라 하니 기대했는데, 나가볼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아래 사진은 다 거대한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찍은 거다. 미술관의 자랑인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미술관 1, 2층을 돌아다니며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저런 정원 사진을 매번 찍고보니, 죄다 비슷해보였다. 정원마다 이름도 다 다르더구만...
경치 좋은 산자락 아래 같은 데를 일부러 배경으로 골라서 이렇게 인공미 넘치는 정원수로 꾸미는 게 일본식 정원 가운데서도 무슨 형식이라고 하던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글동글 깎아놓은 정원수를 보노라니 나는 어디선가 텔레토비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슬몃 웃음도 났고, 공원묘지에 가면 수없이 볼 수 있는 봉분 생각도 떠올라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렇게 숨막히는 정교함으로 꾸며놓고 사람 발길 못닿게 한 채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조금 흐트러졌더라도 들어가서 거닐고 숨쉬고 어루만지는 쪽이 나는 더 좋단 말이지...
주로 일본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는 미술관은 그야말로 <왜색> 짙은 그림과 글씨 투성이라 건성으로 지나다녔다. 얼마 전 동화 원화 전시회에서 본 제비랑 아기
둘쨋날 여정의 마지막은 역시나 인공미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하나카이로 정원. 나는 식물원 같은데 별로 안 좋아하지만, 흐드러진 꽃구경은 왕비마마가 특히 좋아하시는 거라 상품 검색하면서 은근 기대했고, 역시나 전 일정 가운데 왕비마마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며 흡족해했던 듯하다. 워낙 넓은 곳이고 시간도 촉박해 산책 대신 코끼리열차 비슷하게 생긴 빨간 기차를 타고 한바퀴 휘휘 돌아본 것도 다리를 쉬기에 좋았고.
계절마다 다양한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는데, 봄이라 주로 보이는 건 튜울립과 히야신스였고, 동산 가득 양귀비가 피어나는 중이기도 했다. 입구부터 꽃향기가 진동하여 눈과 코가 잠시 즐거웠음.
이 정도 튤립이야 에버랜드에도 있지 않나.. |
돔안으로 들어가면 어지러울 정도의 양란 천국 |
돔에서 사방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난 꽃보다 이런 조형물이 더 좋다 |
관광을 모두 마치고 료칸으로 가기 전에 일본의 이마트라는 자스코에 잠시 들르기는 했다. 혹시나 예쁜 장화가 있으면 사오려는 욕심을 품고 갔으므로 확인해보았지만, 지방 소도시 마트에 예쁜 장화가 있을리 없잖아! 해서 슈퍼에 들러 그날 저녁 목을 축일 캔맥주 세 개랑 찝찔한 과자부스러기만 사가지고 나와 버스에서 마냥 일행을 기다렸다.
둘쨋날 간 온천 이름은 카이케 온천이고 일왕이 묵었다고 해서 유명하다는 료칸은 토고엔이었다. 일본 전역에 체인망을 갖고 있는 호시노야 리조트 계열의 료칸이라더라. 전날 묵은 료칸처럼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안내하는 곳이 아니라 현대식 호텔처럼 검정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여전한 친절함으로 우릴 맞이했다. 여행 일정을 계속 바꾸고 조정하느라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합류한 탓인지,전날 방배정에서 하필 제일 먼 끝방에 묵느라 왕비마마가 고생하셨기 때문에 미리 가이드에게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방을 부탁하였더니, 료칸에선 다른 일행과 달리 우리만 1층에 방을 내주었다. 그것도 지하에 있는 온천과 2층 식당으로 갈 수 있는 별관 엘리베이터 바로 옆방으로. 그 정도 배려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는데, 짐을 풀자마자 다시 저녁을 먹으러 올라간 식당에서 우린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가이드는 다리가 불편한 분이 있다는 말로 방 배정에 편의를 부탁한 것뿐인데, 식당에 가보니 울 엄마 자리에만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음식을 차려놓은 것이 아닌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 게 불편하긴 해도 남들이 다 올려다보는 높은 자리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에 왕비마마는 난색을 표하며 민망함에 밥도 제대로 못드셨지만 (그래서 고맙지만 담날 아침 식사는 그냥 남들과 똑같이 밥상에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로선 료칸 측의 배려가 정말 인상 깊었다.
오른쪽에 살짝 비치는 테이블 다리가 왕비마마의 개인 식탁이다
료칸의 규모도 훨씬 크고 웅장한 데다 울 엄마에 대한 배려로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인지 카이세키 요리도 전날보다는 입에 맞는 편이었다. 전날엔 식당에 내려가니 이미 티라이트에 불을 붙여놓아 스키야키와 스테이크가 제멋대로 익어가고 있었지만, 여기선 일일이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에야 불을 붙여주었고, 찹쌀떡이 이상한 국물에 담겨있는 걸 비롯해 밥과 미소시루 이외에도 여기 보이지 않는 코스가 서너 가지 더 나왔다. 물론 오른쪽 위에 있는 소바는 점심에 먹은 소바를 떠올리게 했고, 회접시에 있는 가운데 생선은 방어로 짐작되는데 역시나 비렸다. 그나마 오징어(한치일수도..) 회와 나머지 회는 악착같이 다 먹어주었다. 저기 맨위 왼쪽 뚜껑 덮여 있는
이름하여, 딸기 치즈 무스
다시 방에 올라가 배가 좀 꺼지기를 기다리던 모녀는 아마도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거의 6층이나 되던 마쓰에성 천수각 사다리를 무슨 경주하는 사람처럼 뛰어오르고 내려온 탓에 나도 다리가 욱신거렸고, 여행오기 사나흘 전부터 홍제천변 산책길에서 사전준비를 하긴 했지만 역시나 운동 총량으로 볼 때 무리를 한 셈인 왕비마마도 녹초가 된 터였다.
하지만 뜨거운 몸을 담가 피로를 풀 수 있을 거라며 모녀는 묵직한 몸을 이끌고 다시 온천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온천 료칸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유카타 기념촬영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얼른 왕비마마를 앉혀놓고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피로에 지쳤는지 이미 엄니 표정은 별로 좋지않다.
처음 방으로 안내 받을 때 방에 준비되어 있는 유카타는 두벌 다 s 사이즈라면서, m사이즈를 친히 가져다준 직원의 친절도 왕비마마에겐 민망함이었다. 아 왜 일본 사람들은 그리도 날씬한 거냐고! 쳇...
전날 묵은 마츠노유 료칸 온천은 딱 우리나라 목욕탕 분위기가 강했는데, 그 이유는 대중탕에서 흔히 보는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와 플라스틱 대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토고엔 료칸 온천에는 옻칠한 나무 의자와 나무로된 대야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온천탕엔 당연히 디카를 가져가지 않았으므로 그 생김새를 보여줄 순 없지만, 우리방 욕실에 놓여있던 나무 의자와 대야로 느낌이나마 전하려고 찍어왔다. 둘다 진한 옻칠을 해서 빤질빤질한 느낌을 살리고, 의자 높이를 두배로 높이면 딱 온천탕에 놓여 있던 의자와 대야다. 한국 일식집에 가보니 저런 나무통에다 밥을 섞어서 요리를 만들어주던데.... 설마... 그들이 용도를 헷갈린 게 아니라 저런 나무 용기가 일본에서도 다방면으로 쓰이는 것이겠지?
온천탕엔 8시반쯤 내려갔는데 우리 일행들은 벌써 다 온천욕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고 월요일 밤이라 그런지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어서, 온천은 그야말로 왕비마마와 나의 독탕이었다. 2천엔 쯤 내면 별도로 가족탕을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2천엔 번 셈이다. 온천 료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벌써?) 또 언제 와보겠나 싶은 나는 왕비마마를 살살 꼬드겨 노천탕에도 나가보자고 설득했다. 전날밤보다는 확실히 덜 춥기도 하고, 낯선 데 홀로 있는 걸 겁내는 왕비마마를 두고 혼자 나갈 수도 없으니 어쩌겠나. 다행히도 왕비마마는 엉거주춤 나를 따라 노천탕으로 나가주셨고, 일부는 빨간색 뾰족 지붕을 덮어 물이 식는 것을 막았지만 가장자리에선 소나무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진기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별빛이라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새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선 소나무 아래로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로 땀을 식히며 즐기는 노천탕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전날 료칸은 온천 운영시간이 자정이면 끝났지만, 이곳은 24시간 운영이라고 했다. 1시반 부터 2시반 사이에청소를 하고, 새벽 청소가 끝나면 남탕과 여탕이 서로 바뀐단다. 양기와 음기를 섞기 위함이라는 얘기를 진즉에 들었는데 진짜로 그런 료칸 온천엘 왔구나 싶었다. 모녀는 또 다시 새벽에 탕이 바뀐 뒤 한번 더 온천을 하고 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염원을 다지며 방으로 올라왔다.
몸은 젖은 솜 같았지만 마지막 밤을 좀 더 불태워(?)야 한다는 생각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캔맥주(산토리, 기린, 예츠비)를 꺼내 왕비마마는 한모금만 따라드리고 혼자서 기분을 냈다. 온천 내려갈 때 싸가지고 가서 노천탕에서 마실 걸, 하는 뒤늦은 회한이 들었지만 다 쓸모없는 짓... '다음번(과연?)엔 기필코!' 라고 생각하며 겨우 캔 하나에 얼굴이 벌게져가지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