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마나 푸념'에 해당되는 글 109건

  1. 2010.12.03 공포 4
  2. 2010.11.30 두 재벌 12
  3. 2010.11.24 단순한 사람들 5
  4. 2010.11.23 방송 불만 6
  5. 2010.10.31 이산가족 7
  6. 2010.07.27 장래희망 6
  7. 2010.07.12 안전거리 6
  8. 2010.07.06 비겁 3
  9. 2010.06.01 대물림 10
  10. 2010.04.03 병원 공포 11

공포

하나마나 푸념 2010. 12. 3. 20:45

오늘은 왕비마마의 정기 진료 및 상담이 있는 날. 잘 지내셨냐는 의사의 질문에 왕비마마는 어수선한 나라 상황 때문에 불안한 심경을 토로했다. 연평도 포격 날부터 왕비마마는 평소 복용하는 여러 알의 안정제와 치료제로도 소용없는 심한 불면과 공포에 시달렸다. 전쟁의 기억이란 60년이 지난 뒤에도 생생하게 되살아날 만큼 무서운 정신척 충격을 남긴다는 의미다. 왕비마마는 지금도 두려움에 떠느라 뉴스를 제대로 보지 못해, 연평도와 북한군의 동정과 관련된 소식만 전해지면 손을 벌벌 떠시면서 얼른 채널을 돌리거나 TV를 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왕비마마를 안심시키던 나의 근거 빈약한 호언장담은 이제 약발이 떨어졌다. 어떤 명분으로든 전쟁은 일어나선 안된다는 믿음과 기초상식이 안보의식 부족이라고 비하되는 상식이하의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나도 더는 할 말이 없다. 언론에선 연일 북한이 연내에 다시 남한을 공격할 것이라고 떠들어대고, 국군의 어이없는 전력은 공분을 산다. 이래서 어디 본때를 보여주겠느냐고. 역사공부에 젬병이긴 했지만 과거 역사의 모든 전쟁은 심성 비뚤어진 인간들이 탐욕 때문에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이지 한반도엔 남북 할 것 없이 끝없이 비뚤어졌으면서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 온 국민이 불안과 공포에 떠는 게 당연하다. 새로 국방장관에 임명됐다는 사람은 국회의 질문에 북한이 다시 도발하면 어쩌겠느냐는 질문에 '전투기를 띄워 반격 응수할 것이라고 '단호히' 대답했단다. 내가 알기론 전투기를 띄울 순 있어도 북한을 포격하는 명령은 이 나라 국방장관이 내릴 수 없을 텐데. 전작권 갖고 있는 형님한테 허락받고 나서 그러겠다는 얘긴가. 아니면 자기 맘대로 항명? -_-;

'전쟁이나 다름없는' 포격으로 졸지에 집을 잃고 난민이 된 연평도 주민들이 쉴 곳이라는 데가 찜질방이나 친척집 뿐이라는 사실만 봐도 알만하다. 수재민들에게 대통령궁을 개방했다는 차베스 대통령을 따라하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꼬박꼬박 세금 내며 살아온 국민으로서 나라의 보호를 제대로 받고 있다는 느낌만이라도 들게 해달란 말이다. 왕비마마의 공포는 전쟁을 겪은 세대의 뿌리 깊은 정신적 상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의 정신나간 행패를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주변국 형님들 눈치만 보는 이 나라 정부의 무능력 때문이다. 살 맞대고 있는 분단 국가에서 6자 회담 말고는 섣불리 말도 못붙이는 정부에 대체 '대북정책'이라는 게 존재는 할까. 하기야 전쟁이 난들 이 땅의 대통령과 주요 관료들은 청와대의 천하무적 '벙커'에서 무사할 수 있을 테니 지들이야 뭐가 걱정이랴.

전쟁이 나면 우리는 어디로 숨어야 하느냐고 묻는 조카와 왕비마마에게 숨을 곳은 없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그게 정답이니 웃음끝이 길지 못하다. 무슨 일만 생기면 그 책임과 비용부담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이 나라의 작태는 또 한 번 이어져 방송사마다 연일 연평도 주민 돕기 모금이 진행중이다. 전쟁 날까봐 무서워서 관련 소식도 못보던 왕비마마는 연평도 주민들 돕겠다고 한통화에 2천원이라는 전화를 두번 걸었단다. 그렇게 모금한 돈 얼렁뚱땅 제 주머니에 넣고 삼키는 못된 인간은 또 없으려나. 정권 바뀐 뒤 줄곧 참담한 세월이었지만 참 갈수록 가관이다. 이젠 욕하기도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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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재벌

하나마나 푸념 2010. 11. 30. 10:04

재벌과 캔디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 퍽 싫어하지만, 요즘 현빈이 싸가지 없는 재벌로 나오는 <시크릿 가든>을 열심히 시청중이(었)다. 대체 왜 드라마작가마다 재벌과 신데렐라의 상투적인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런 이야기를 써야만 현실적으로도 시청률이 담보된다는 상황을 나로선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으나, 이 드라마의 매력은 그런 소재가 아니라 순전히 현빈과 하지원, 그리고 이야기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재벌과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라 잘해야 재벌과 '인어공주' 이야기가 될 테니까 여주인공에게 나중에 거품처럼 사라져주면 되는 거라고 현빈이 처음부터 일갈하고 시작하는 데,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달까. 

"싸가지는 태어날 때 탯줄이랑 같이 자르고 나온" 전형적인 속물 재벌인 현빈은 만화 주인공 같은 외모와 맵시나는 옷차림 이외에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나 나올 것 같은", 깨진 유리를 청테이프로 붙여놓은 옥탑방에 사는 여자한테 미친놈처럼 반해서 너무도 신기한 나머지 심지어 '가난'을 공부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자기 감정이 혼란스러워 문학과지성사의 시집을 꺼내 읽고, 호사스러운 정원 테이블에 앉아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는 식이다. 현빈과 드라마 덕분에 의외의 대박을 친 출판사들과 아무 상관도 없으면서, 어쨌거나 나는 작가와 연출에게 박수를 보냈고 '환상의 싸가지 재벌' 현빈을 더욱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상에도 저런 재벌이 하나쯤 있다고(없다는 건 알지만!) 상상하는 게 나쁠 건 없잖아, 그러면서. 

그랬더니 내 환상을 조롱하듯 지난 일요일 곧 이어 채널을 돌려 본 <시사매거진 2580>에서 이 땅에서 현실의 재벌이 어떤 건지 여지없이 조명해주었다. SK계열의 귀한 재벌 아들께서 인수합병과 노조탈퇴를 거부하고 1인시위를 한 화물연대 노조원 운전기사를 데려다가 야구방망이로 때리며 한 대에 백만원씩 '겜값'을 쳐주었다는군. 역시 재벌의 현주소란 그런 것이었다. 룸살롱에서 얻어맞은 재벌2세의 복수를 위해 재벌1세가 직접 나서 종업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질 않나, 매질에도 값을 매겨 돈지랄을 하며 노동자를 '손수' 두들겨 패고도 무사할 줄 알지를 않나. 현빈의 얼굴을 한 재벌 김주원 같은 사람은 원래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근 한 시간 간격으로 TV에서 마주한 두 재벌의 괴리에서 '충격'을 받고 망연자실한 스스로가 어찌나 우습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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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날 똑같이 경거망동하는 단순한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로 냉장고가 텅텅 비어 먹을 반찬이라곤 김이랑 김치밖에 없는 터라 오늘은 마트를 가야했다. 어쩌겠나. 인천을 중심으로 고양, 파주, 의정부 등지에서 쌀과 생수, 라면, 통조림 따위의 판매량이 급증한 반면 돈많은 부자들은 주식값 폭락한 때를 틈타 얼씨구나 주식을 사들인다는 '웃긴 세상'(키드 님 표현)에 가난한 서민으로서 나도 일조하는 수밖에.

예상대로 마트 입구부터 줄지어 서있는 배달용 카트마다 어김없이 쌀 한두 포대, 라면박스, 통조림 박스가 바리바리 담겨 있었다.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라 원래도 생수는 많이 안 사다 먹는 편이라 생수 박스는 보이지 않았음. 마트로 들어가 적어간 목록대로 장을 보는데, 달걀 판매대 앞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한판짜리 달걀은 서너층이나 되는 진열대가 아예 텅 비어있고, 작은팩도 몇 개 안 남은 상태였다. 라면 종류는 아예 입구쪽에 산처럼 박스를 쌓아놓았고...

전쟁위기에 유용한 먹거리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두루마리 휴지와 각휴지 또한 오늘 꼭 사야할 품목이라 나 역시 산처럼 높아진 카트를 배달의뢰하며 입맛이 씁쓸했다. <휴전선에 가까운 서울 서북지역 서민들까지 생필품 사재기에 나서>라는 뉴스 보도에 한몫을 담당하고 나오는 그 기분이라니. 그나마 오늘은 쉴새없이 겁주는 뉴스속보가 방송을 도배하진 않은 모양이다. 단순하고 순진해서 겁이 많은 왕비마마가 틀어놓은 TV에선 다시 왕왕 아시안게임 중계가 흘러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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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불만

하나마나 푸념 2010. 11. 23. 23:38

온 나라가, 아니 뉴스를 보노라면 전 세계가 동요할 만한 일이 벌어져 전쟁세대이신 왕비마마는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으신지 벌벌 떨며 불안해 하셨다. 집에 쌀과 비상식량(라면)은 얼마나 있는지부터 챙기시는 걸 보면 정말 겁에 질린 게 확실한데, 무덤덤한 딸은 '천인공노할 북한의 군사도발'이 어디 한두번 있는 일이냐며 시큰둥 무시했다. 물론 남한 영토와 민간인 지역을 직접 공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지만, 북한도 생각이란 게 있을진대 전쟁이 그리 쉽게 날까.

또 다시 귀중한 인명이 희생되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고, 예의주시하고 경계할 일이라는 데는 동감하지만 천안함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호들갑을 떨어대는 언론을 보노라면 또 한번 역겹다. KBS에서는 무려 밤새도록 24시간 뉴스특보를 진행중이다. 거의 모든 정규방송이 중단된 채(그래도 아시안게임 중계는 하더라마는, 공교롭게도 쥐20과 시작 날짜가 겹쳐져서 아시안게임도 예년처럼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지는 못했었다) 계속해서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져 불타는 장면과 해군함정에서 포를 발사하는 장면들이 반복해서 보여진다. '전쟁이 따로 없다'며 인천으로 대피한 연평도 주민의 흥분된 인터뷰 또한 되풀이된다. 단순한 왕비마마는 그런 뉴스 속보에서 계속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계속 남북이 '교전중'이라 금방이라도 북한군이 밀고 내려올 거라는 상상으로 괴롭다. 어쩌면 다수의 국민들이 불안에 떨며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식한 내 견해로 봐도 북한이 '본격적으로' 다시 군사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다. 두번의 포격으로 뜻하는 바를 (또 한번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어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이미 이루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협상 테이블에서 칼자루를 쥐겠다는 북한군의 어이없는 도발은 참으로 짜증스럽지만, 그럴 때마다 난리법석을 떨어대는 언론과 당국의 태도는 그야말로 '야로가 있다'고밖엔 보여지지 않는다. 바닥으로 떨어진 지지율과 민심을 북한의 위협과 연계해 만회해보려는 위정자들의 행태는 대체 왜 변하지 않을까.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단지 '휴전중'이라는 남북대치 상황이 끝나지 않는 한 권력자들이 되풀이해 이용해먹기에 더없이 좋은 장치란 말인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도발의 원흉' 북한을 욕해대는 대신 호들갑 떠는 언론과 당국을 더 못마땅해하는 나에게 안보의식이 흐리니 어쩌니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지켜본 게 그러한데 어쩌랴. 동해안에서 북한 잠수함이 발견되고, 무장공비가 잡혔을 때마다 온 국민은 공포에 떨었다. 금강산댐이 연일 뉴스에 등장해 서울이 물바다로 변하는 '시뮬레이션'까지 방송되었을 땐 겁에 질려 눈물을 보이며 나 역시 평화의댐 성금을 냈었다. 김일성이 사망하면 반드시 전쟁이 날 거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던 때가 있기도 했다. 김정일의 후계 계승문제에 불만을 품은 북한의 군지도부가 전쟁을 불사할지도 모른다는 일부의 예측은 미안하지만 과거에도 되풀이되던 레퍼토리다. 

겨우 1박2일 동안 대체 무슨 일을 얼마나 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쥐20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나라의 품격'이 올랐다며 국민들에게 고맙다는 공익광고를 지겹도록 내보내던 관계자들은 지금 또 다시 '불바다' 화면을 되풀이해 틀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설마 전쟁 위험국 순위 1위로 '나라의 품격'을 높이려는 작정은 아니겠지? 이 땅에서 방송이야 늘 권력에 이용되는 도구였지만, 군사정권 때 못지않게 정부 입맛에 맞게 춤을 추어대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한숨이 다 나온다. 온종일 틀어놓는 TV가 유일한 삶의 낙인 왕비마마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방송의 호들갑이 부디 내일은 좀 진정국면에 접어들기를 바라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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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하나마나 푸념 2010. 10. 31. 09:45

냉랭한 남북기조 때문에 명맥이 끊겼던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이루어져 뉴스에 연일 등장하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리게 된다. 수십년씩 헤어져 살아야 했던 혈육을 만나는 기쁨과 그간의 한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당장 나라도 졸지에 형제부모와 헤어졌다가 수십년 만에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 '안' 찾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억압 때문에 가족을 '못' 찾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리움이 짙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이라는 너무도 다른 환경이 아니더라도, 오래 헤어져 산 가족의 재상봉은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헤어지게 되었는지 한 많은 사연을 주고받으며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나 싶게 각자 살던 대로 예전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다. 혹독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그냥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포장한 채 살아갈 수 있었던 때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심하게 연로해지셔서 상봉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슬픈 일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실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을 모르거나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곁에서 내가 직접 지켜보니 그럴 것 같다는 짐작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우리 할아버지는 지난 80년대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 덕에 여동생을 찾은 적이 있다. 그분은 부산에 살고계셨기 때문에 역시나 부산에 살고 있던 큰고모와 먼저 상봉을 한 후, 할아버지께 연락이 왔고 고모할머님과 할아버지의 감격적인 통화가 이루어진 뒤, 고모할머님 내외가 오빠(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셨다. 가뜩이나 북적대는 우리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잊고 살던 고모할머님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다들 마음이 짠했다. 헌데 똘똘하고 애교가 많은 막내동생이라 퍽 예뻐하셨다는 할아버지의 추억담 속에 존재했던 고모할머니는 세월에 찌들은 검은 얼굴과 시장통에서 국밥장사를 하며 거칠어졌을 입담과 엄청난 주량, 난감한 주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날의 추억은 마구 찍어댄 사진으로 남아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불콰한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맞댄 채 웃고 계시거나 음식이 차려진 상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할아버지 앨범에 들어 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그날 저녁의 분위기는 참으로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의 연속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하룻밤인가 이틀 할아버지댁에서 주무시고 서울 구경도 함께 다닌 뒤 부산으로 내려가셨던 여동생 때문에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속이 상해 홀로 약주를 많이 드셨다. 알고보니 그분은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는 남자(고모할머니의 남편인 줄 알았던 분은 그러니까 따로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그저 '동거인'으로 데리고 살고 있었고, 조강지처한테 버림받은 병든 그 동거남을 어려운 형편으로 수발중이었다. '아들' 이 아니라 '동거인'의 지위로 살아야 했던, 나에겐 '고종당숙'이 되는 그분도 삶이 엉망인듯 했고.

당시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어른들은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국 그렇게 눈물의 상봉을 한 오누이는 살가운 만남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남과 북이 아니라 겨우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그간 살아온 환경이 서로 너무 달랐고 할아버지가 보기엔 '망가진' 삶을 살아온 여동생이 못마땅했으며, 비빌 언덕이 생겼다고 여긴 가난한 누이는 오라비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바랐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그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역정을 내셨기 때문에, 나로선 제대로 묻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부산에 사시는 큰고모가 대표로 간간이 소식을 전하는 눈치였다. 굳이 탓을 한다면 힘겨운 세월과 가난 때문이라고 여겨야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어쩌다가 '그 따위'로 아무렇게나 살게 되었는지 할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셨다.

이산가족 상봉의 뒤끝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누구보다 곁에서 느끼셨을 것 같은데도, 큰고모 역시 남북이산가족 찾기로 가족을 만나러 금강산에 다녀오셨다. 이북에 두고온 형제들을 만나러 갔다는 연로하신 큰고모의 모습은 2003년 당시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우리 할머니와 재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소생이 큰고모 한분 뿐인 줄 알았던 나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금강산 상봉장에 다녀오신 큰고모의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니, 동생과 사촌이라면서 상봉장에 나온 북한의 가족들을 큰고모는 하나도 몰라보겠더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공유한 추억이 없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더라고. 당연히 감격적인 눈물의 상봉은 없었고,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보아 '꽤 사는 것 같더라'는 북한의 가족들은 고모가 가져간 선물에도 그리 반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뭐 그야 상봉인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교육탓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긴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석했던 큰고모는 고대하던 어머니 소식(큰고모가 당시 75세이셨으니 그분은 90세도 넘어 당연히 돌아가셨겠지만)도 거의 듣지 못해 괜히 갔나 싶어 후회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 사흘간이었다던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 전화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 가족들은 중국을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거나 돈까지도 보내는 방법이 있다고는 한다) 애틋한 형제의 정을 느낀 것도 아니니 뭘 더 어쩐단 말인가.

상황은 다르지만 70년대에 미국으로 입양됐던 친구 하나도 몇년 전 30년 만에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왔었고, 홀트아동복지회와 지방경찰청의 도움으로 친부모를 찾았다. 아이를 버린 부모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듯했고, 친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했다. 한국 땅에서 고아원에 버려져 살았을 삶보다 미국에 입양되어 살았던 인생이 훨씬 더 나음을 알기 때문이라면서. 2년뒤 친구 부부는 그간 낳은 갓난쟁이 딸을 데리고 한번 더 한국을 찾아와 생모를 만났지만, 친구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남편이 못마땅하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린 생모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다. 홀로 남매를 키우기 어려워 해외입양을 선택한 생부가 오히려 이해될 것 같다나. 생모 쪽에서도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친구에게 그저 죄책감을 갖고 있을 뿐 별 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는 생모가 아기 입히라며 사들고 온 옷가지와 색동저고리에 감사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돌아서서 내겐 "촌스러워서 집에 돌아가자 마자 다 버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헤어지던 날, 자긴 두번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 때문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친부모를 만나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정타는 생모의 입에서 나왔다. 말이 안통하는 양쪽을 위해 계속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나에게 생모가 넌지시 물었었다. 미국서 쟤네들이 좀 사는 것 같으냐고. 사진작가와 기자면 먹고 살만 하지 않겠느냐고. -.-; 내 친구가 어떻게 나오나 한번 실험해봐야겠다면서, 생모는 대구 산다는 자신의 손녀딸(그 아주머니는 재혼해서 새로이 딸아들 낳아 잘 살고 있었다)이 쓸만한 '유아용 카시트'를 미국에 돌아가면 사보낼 수 있겠는지 내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난감해진 내가 부피가 커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거라고 만류해 보았지만, 일단 물어는 보라나.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 카시트를 사서 대구로 보내주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질문을 받은 내 친구는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다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그날의 만남을 정리해 생모 가족과 헤어지고 나서 나와 친구, 친구의 남편은 허탈한 마음에 술을 마셨었다. 해외입양아가 친부모를 찾고, 서로 말이 안통하면서도 어떻게든 인연의 끈을 이어가려고 애쓰는 건 TV에서나 나오는 일이로구나 싶었다. 친구 부부는 뿌리를 알기 위해서였으니, 친부모를 찾은 게 잘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 과정을 줄곧 지켜본 나로선 과연 그 상봉이 잘한 짓이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가족이었다면 그냥 헤어진 채로 그리움과 의혹, 좋은 상상의 기억만 품고 사는 게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지만, 어린 시절엔 노상 전쟁통에 피난을 가다가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사방에서 폭탄이 터져 홀로 어느 낯선 곳에 숨어 있는 악몽을 꾸다 울며 깨어나곤 했다. 꿈이라 다행이라며 어린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만약에 현실에서도 내가 그렇게 이산의 아픔을 지니고 살았다면, 나 역시 현실의 괴리가 어떻든 일단은 가족을 찾으려들 것이 확실하다. 나중에야 차라리 찾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든지 말든지. 그렇기 때문에 남은 생이 얼마 안되는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하루빨리 더 많은 상봉기회를 누리기를 빌고 있기는 한데, 그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할아버지도, 고모할머님도 이제는 다 돌아가신 분들이라, 마음에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때 만나기를 잘하셨다고 생각하는지 여쭤볼 도리도 없다. "꿈에 그리던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흔한 말이 그분들에게나, 지금 이산가족을 상봉하고 있는 실향민들에게나 서글픈 진실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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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

하나마나 푸념 2010. 7. 27. 22:24

넌 꿈이 뭐니?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른들이 습관적으로, 그리고 요즘은 강박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지는 저 질문은 내가 어린 시절에도 종종 들었던 말이다. 그때마다 나 역시 생각나는 대로, 선생님, 외교관 정도의 '모범적인' 대답을 하긴 했지만 질문을 던지는 어른이나 대답하는 나나 특별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서 나눈 대화는 아니었다. 처음 만난 어른들이 괜히 할 말 없을 때 날씨 얘기, 시사 얘기 꺼내듯이 허투루  꺼내는 화제와 별 다를 게 없었다는 뜻이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직업이 뭔지 찾았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달려오긴 했지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의 꿈은 아마도 내가 남은 평생 선망을 품을 하나의 가능성이 아닌가 싶다.

헌데 가엾게도 요즘 아이들은 상황이 다르다. 자기 꿈이 뭔지, 뭐가 되고 싶은지 빠르게는 초등학생 때, 늦어도 중고등학생 시절엔 이미 목표를 정해 그 준비에 매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떨려난다고 믿는 어른들 때문이다. 뭐가 되고 싶은지 확고한 주장이 없으면 꿈도 야망도 없는 하찮은 아이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대학시절을 돌이켜볼 때 나는 지금도 그 때가 인생 최고의 황금기라고 여기며 4년 내내 거의 줄창 놀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보낸 추억을 곱씹는 반면, 요즘 대학생들은 신입생 때 이미 취업준비에 매달려 학점따기에 여념이 없다. 조교시절 내가 혹시 출석 확인 잘못하는 바람에 성적에 지장 있을까봐(지정좌석제라 2시간 내내 맨 뒷자리에 앉아 학생들 출결을 확인했었다) 수업 때마다 출석표를 일일이 확인하며 따져대던 학부생들한테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로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 꿈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훌륭한가 하면 절대 아니다. 초등학생들부터 중고등학생들까지 우선은 꿈이 죄다 좋은 학교 진학인 모양이다. 국제중학교, 특목고, 명문대 따위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목표의 반복 속에서 부모들은 정말 자식의 꿈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나와 달리 학부모의 고충을 심히 겪고 있는 친구에게 엊그제 들으니 요즘 중산층 부모가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려면 필수조건이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동생의 희생.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기가 막혀 코웃음이 나오면서도 씁쓸했다. 그래서, 자식 하나 명문대 보내서 그 다음엔 어쩔건데???

세상이 하도 거지같다보니, 그저 행복하고 씩씩하게만 자라주었으면 싶은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들도 벌써부터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자기가 뭘 잘하는지 장래희망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왜 아니겠나.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코르동 블루' 같은 유명 요리학교에 진학해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의 채근이 이어지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하찮은 그림 하나 그릴 때마다 창의력을 더 키워야 하네 마네 잔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지금 무슨 꿈을 이야기하더라도, 어른들의 결론은 하나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온 세상의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할 수 있나! 공부 잘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타고난 재능이던데...
 
100점짜리 시험지나 최우수상 상장을 자랑하며 한껏 어깨를 으쓱거리는 조카들을 무한히 칭찬해주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잘난 척 해도 나 역시 성적지상주의에 갈채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초등학생이 시험을 앞두고 2, 3주 전부터 밤늦게까지 시험준비를 해야하는 세상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혹시라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90점, 80점으로 점수가 점점 떨어져 성적표에 '노력요함'이 적힌 과목이 차츰 늘어나면 아이들은 또 어떤 상처를 받게될까.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잇달아 당선되긴 했지만 학력중심의 사회구조와 행복은 반드시 성적순이라 믿는 부모들의 맹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나라 교육에 희망은 없어 보인다. 교육정책을 만들어내는 공무원이나 교육을 책임지는 교사들도 과거 어린 시절 죄다 우등생이었을 텐데, 공부 하기 싫고 잘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까지 과연 헤아릴 수나 있겠나. 공부를 못하면, 고가의 사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면, 웬만한 꿈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 절반 이상의 장래 희망이 하나같이 '연예인'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 꿈은 지긋지긋한 학교공부와는 멀어질 수 있으니까.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재롱만 피우던 조카들의 머리가 굵어지는 걸 바라보며 그 녀석들이 장차 과연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어떤 인생을 선택할지 몹시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녀석들에게 뭐가 되고 싶으냐는 귀찮은 질문을 던져댄다. 부모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고모로선 그저 행복한 사람, 올바른 사람, 된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자꾸 속물근성이 튀어나온다. 스스로 올바른 사람, 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장래희망을 나 역시 행복한 사람, 올바른 사람, 된 사람으로 바꾸어야 할 모양이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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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거리

하나마나 푸념 2010. 7. 12. 02:42

얼마전 인천대교 부근에서 난 버스 교통사고 뉴스를 보며 너무 참혹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가끔 고속도로에 나가는 일이 있어도 나 역시 안전거리따위는 무시하고 다들 그러듯 앞차에 바짝 따라붙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간혹 미적미적 느리게 가면서 차간 간격을 쓸데없이 넓게 둔 차를 만나면 신경질을 확 부리면서 차선을 바꿔 앞지르기 일쑤고...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초보때도 시내운전보다 고속도로 운전이 훨씬 쉽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초보시절 고속도로에 감히 진출하기까지 시일이 꽤 걸렸다. 처음 한달은 올림픽대로에서 고집스레 시속 60km로 달리며 사방에서 빵빵거리는 차들의 욕을 먹기도 했으니, 시속 100km까지 밟을 자신은 정말로 없었던 거다. 당시엔 수동 자동차를 운전했는데, 기어를 4단까지만 넣겠다고 다짐하고 다녔었다. 5단은 고속도로 용이야 이러면서;; 시내에서야 기껏 사고가 나도 경미한 접촉사고겠지만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어느틈에 나는 꽤 난폭한 운전자가 되어 있었고 초보운전 딱지를 뗀지 1년쯤 뒤엔 경인고속도로에서 나를 무시하고 욕설을 해대는 대형 트럭과 추월해서 브레이크 밟기 싸움을 할 정도로 무모해졌다.

세월이 지나면서 철이 좀 들었는지 운전 방식은 퍽 얌전해지고 있어도 안전거리만은 잘 못지켰던 게 사실이다. 원칙대로 100미터쯤 안전거리를 두고 달리면 수시로 끼어드는 옆차선의 차들을 못견디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차간 거리를 너무 띄우면 오히려 함부로 끼어드는 차들 때문에 더 위험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그래도 뭔가 큰 사고가 났을 때만 반짝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성격답게 간만에 오늘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정말로 안전거리를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다. 시속 100km일 땐 안전거리 100미터가 원칙이라지 않은가. 100미터가 얼만큼인지는 몰라도 시내에서 달릴 때처럼 바짝 따라가는 짓거리는 최대한 삼가며 안전운전에 힘써보았는데, 역시나 사람들은 변함이 없었다. 다른 차선 자동차들에 비해 내가 좀 넓은 간격을 유지하는 걸 보아넘기질 못하고 다들 추월해가질 않나, 마구 끼어들질 않나, 카레이스하듯 미친듯이 달리는 자동차들이 요리조리 옮겨다니는 통로로 이용되기 일쑤였다.

이런 사고가 날때마나 지겹게 나오는 말이 '안전 불감증'이라는 짜증스러운 표현인데, 이 나라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안전 불감증이 아니라 아예 안전과 담 쌓고 사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트렁크에 삼각대랑 사고났을 때 표시할 하얀 페인트는 있어도 필수품이라는 휴대용 소화기는 없으니 하는 말이다. 아마 나 또한 기억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또 안전거리에 신경쓰고 다닐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버릇이 도져 앞차와의 거리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운전할 게 뻔하다. 어쩌면 안전거리는 운전대와 나의 거리를 최대한 띄울 때나 확보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애먼 사람들한테까지 피해를 입히는 사고뭉치는 되지 말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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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

하나마나 푸념 2010. 7. 6. 02:22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비겁함이랬는데, 내 꼴이 딱 그짝이다.
이 동네 재건축 문제는 어떻게든 진행이 되고 있는 모양인지, 얼마 전 구청에서 재건축 정비계획 안내문이 등기로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재건축 찬성파와 반대파의 우편물도 빗발쳤다. 찬성파는 이 동네 재건축 사업이 엄청 축소되기는 했지만 30년씩 노후한 주택을 새로 지어 재산의 가치를 높일 절호의 기회이므로, 일부 '이기적인' 반대파의 논리에 휩쓸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반대파는 '재건축은 곧 자살행위'이며 멀쩡히 살고 있던 집을 빼앗기고 길바닥으로 쫓겨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촉구했다.

양쪽 다 너무도 거부감이 드는 어투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태도를 보니, 왕비마마와 나의 입장은 더욱 모호해졌다. 전국 방방곡곡이 똑같이 흉물스러운 아파트촌으로 변해가는 것은 분명 싫은 일이고, 삶의 터전이 되어야 할 부동산이 치부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행위가 싫기 때문에 나도 무분별한 재개발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은 지 30년도 넘은 우리 집을 비롯해 주변 여러 집들이 조만간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할 만큼 노후한 건 사실이고, 갈수록 거동이 어려워진 병든 왕비마마를 위해선 싫지만 계단 많은 이 집을 떠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로 이사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도 실행에 옮기는 게 두려워 미적거리고 있는 나로서는 마냥 재건축을 반대하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다. 해서 또 다시 우리 모녀의 생각은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것이었다. 재건축 반대파가 득세해서 재개발이 물건너 가면 그냥 좀 조용해 진 다음에 다른 데로 이사를 가든지 하고, 찬성파가 득세해서 정말로 재건축이 이루어진다면 또 그 상황에 맞춰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부담금은 얼마인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결정하면 되겠다고 간단히 생각한 것이다.

헌데 현실은 우리를 그런 회색분자로 내버려두질 않았다. 결사항쟁을 촉구하던 반대파 주민들이 반대의견서를 받으러 우리집에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요번 재건축 지역에 해당되는 세대가 350여 가구 정도이며, 그 가운데 반대 의견서를 150장만 채우면 재건축 계획이 무산될 수 있다고 했다. (왜 과반수가 아닌지? 그건 모르겠다 -_-;;) 현재 반대파가 130여 세대이므로 20장만 의견서를 더 채워 제출하면 되니 우리도 동참하라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는데, 그들의 얘기를 듣다가 나는 그만 빈정이 상해버렸다.

나는 이 동네 재건축을 반대하는 이들이 세입자를 중심으로 분담금 부담이 당연히 어려운 서민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그저 비교적 최근에 지은 빌라나 아파트에서 4, 50평씩 공간을 누리며 넓고 편하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이 내민 반대 의견서에는 그런 정서가 담겨 있었다. '현재 주거지에서 생활하는 데 아무 불편함이 없기  때문에 재건축을 할 이유가 없어서 결사 반대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서명하라고 내민 구청 제출 의견서의 맺음말이었다. 물론 나라도 그들의 입장이었다면 재건축을 반대했을 것이다. 지은 지 얼마 안되는 새집을 대체 왜 허물고 다시 짓는단 말인가. 하지만 오르 내리기 힘든 계단과 겨울엔 추워서 달달 떨어야 하는 낡은 목욕탕, 원래가 좁아서 이층 두 집을 터서 살고 있는 등 분명히 '살기 불편한' 주거 문제를 알고 있는 나에게 무조건 그들과 똑같은 의견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며 핏대를 높이는 태도는 나의 삐딱성을 일깨우고 말았다. 아, 우리는 불편하다니까!

결국엔 재건축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찬성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이기심을 실현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고, 나 역시 좀 더 편히 살겠다는 이기심을 버리고 옳은 명분을 위해 희생하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던 거다. 비겁한 나의 결론은 역시나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겠다는 데서 한치도 벗어남이 없다. 이 동네 재건축에 관한 한은 어느쪽이 옳은지도 이젠 잘 모르겠다. 재건축 재개발 지역에선 원주민의 비율이 늘 30%밖에 안된다는데, 정말로 여기서도 그렇게 될지, 아니면 정말로 낡은 집을 새집으로 바꿔 가질 기회를 반기는 원주민들이 많은지... 확실한 건 이미 이웃들이 니편 내편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것뿐이고, 그래서 주변에 도둑 한번 든 적 없었고 새벽이면 온갖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는 이 동네에 새삼 정이 뚝 떨어졌다. 과연... 이 동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어느 쪽이든 걱정스러워서 미리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나는 진정 비겁자다. 하루 생각해볼 시간을 주겠다며, 도장 찍은 반대 의견서 받으러 내일 또 온다고 했는데 아 어쩌나. 현재의 미봉책은 왕비마마와 나 중에 한 사람만 반대의견서를 써주는 것인데 (찬성도 일리 있고 반대도 일리 있으니까) 실로 회색분자 다운 꼼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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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하나마나 푸념 2010. 6. 1. 22:06
야구 팬들이 최근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고 물으면 대뜸 멍해져서 민망해하기만 했는데, 요샌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답한다. 나는 <천하무적 야구단> 팬이라고.
물론 프로야구 원년엔 워낙 박철순 선수 팬이라 무조건 OB베어스를 응원하는 듯도 했지만, 박철순 선수가 안던질 땐 또 다른 팀에도 눈을 돌렸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연고지로 따지면 MBC 청룡을 응원해야할 것도 같았고, 고질적인 지방색을 타파하자면 그냥 공평무사하게 약팀을 응원해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이렇게 팀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야구팬보다는 죽으나사나 한팀만 결사적으로 응원하고 충성을 다 바치는 야구팬이 훨씬 더 많을 테고 그게 정상인 것도 같다.

나의 두 동생들만해도 그렇다. 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큰동생은 LG트윈스, 막내동생은 두산베어스 팬인데 그 역사가 무려 프로야구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내동생은 어린 시절 무척 구두쇠라 저금통을 웬만해선 깨지 않는 아이였는데,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현재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베어스에서 리틀야구단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자 식구들과 의논도 하질 않고 저금통을 깨 당시 초등학생에겐 상당한 거금 (아마도 5천원이었던듯;;)을 회비로 내고 가입을 했고, 팀로고가 찍힌 야구공과 유리컵, 미니어처 배트 받침대, 야구모자, 티셔츠 등을 받아와선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야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큰동생이 MBC청룡의 팬이 된건 어쩌면 먼저 치고나간 막내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녀석은 우리 고향이 서울이므로 당연히 청룡을 응원해야한다며 막내동생을 배신자 취급했었다.

만날 프로야구를 중계하는 TV앞에 앉아 옥신각신해대는 두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서, 은근이 우리가 팀 선택을 종용하면 늘 "나는 지는 팀 편이다"라고 하셨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항의를 하면, 사는 건 서울이지만 어렸을 땐 피난 내려와 부산에서 살았으니 굳이 고향을 따지면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해야하는데 이놈저놈 다 딱히 마음에 안든다는 걸 이유로 대셨다. 그게 서울 한귀퉁이에 살던 한 집안에서 프로야구 응원팀이 제각각 나뉘게 된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리고 두 동생은 각자 고집스레 지금까지 구단주가 바뀌는 역사를 거쳐서도 여전히 그 맥락을 잇고 있는  두산베어스와 LG트윈스의 팬이다.

헌데 두 동생네 집은 현재 상황이 좀 다르다. 뱃속 태아 때부터 제 아빠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을 자연스레 자기 팀으로 세뇌당한 조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횟수가 몇번 안되긴 해도 각기 제 아빠와 LG와 두산 모자를 쓰고 경기장에 나가 응원막대기까지 휘둘러본 경험이 있는 조카들은 우습게도 어른인 두 동생이 LG와 두산을 응원하며 티격거리는 양상과 똑같이 자기네 팀이 더 멋지다고 서로에게 시비를 걸기도 한다. 심지어 나이차가 나는 걸 이용하여 자기네 편으로 오지 않으면 놀아주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모태두산팬인 지우에게 정민이가 "지우야, 너는 누나랑 같이 LG팬 할 거지? 응? 안 그럼 안놀아준다~!" 이런 식이다) 

막내동생은 회사에서 아마추어 야구단도 만들어 간간히 경기도 하는 눈치고 집앞에서 아들녀석과 캐치볼도 꽤나 열심히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준우네가 야구와 두산베어스에 대한 충성도와 애정이 깊다. 그렇기 때문에 큰 일이 없는 한 준우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두산베어스나 그 맥을 이어나갈 팀의 골수팬으로 남기 십상으로 보인다. 나의 의문은 여기서 생겨났다. 과연 준우는 커서도 두산베어스 팬이라는 자기 색깔과 취향에 대해 아무런 회의감도 들지 않을까?  나처럼 야구팬이랄수도 없는 뜨내기나 방관자는 몰라도,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는 특정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수십년씩 변함없는 열성적인 팬으로 남기가 힘든 것 같다. 간혹 구단에 환멸을 느껴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이들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내 두 동생들처럼 초등학생 시절부터 25년 넘게 충성을 바치던 팀을 버리고 다른 팀에 정을 들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치문제를 두고서도 사람들의 태도는 프로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다. 나처럼 싫증 잘내고 의심 많고 귀찮은 거 싫어하고 싫은 것도 많은 인간은 정치쪽에도 만날 이랬다 저랬다 고민이 많다. 최선이라고 믿을 인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상 좀 덜 나쁜 놈 중에 그나마도 좀 나은 놈을 뽑다보니 기준이 들쭉날쭉이다.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과연 타파될 날이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운 고질적인 지방색은 종종 사람들을 여전히 나누고 수십년씩 한 가지 색깔을 신봉하게 만들기도 하며, 그 취향을 대물림한다. 어린 시절부터 부와 권력을 누려온 젊은 아이들은 그 당연한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인 선과 번영이라 굳게 믿고 체화하였으므로 대를 이어 그 누구보다 보수적이고 우익세력이 된다.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부모 밑에서 어려서부터 촛불시위에 따라다녀 보았거나 주류 언론의 행간에 감추어진 진실을 간파하는 법을 배운 경험이 있는 아이들 역시 대를 이어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체득한다. 

불행히도 이 사회는 개천에서 더는 용이 나지 못하고, 부유함이든 가난함이든 권력이든 차별이든 모두 대물림으로 세습되는 사회가 되어가는 듯하다. 선거 때마다 뭔가 좀 달라지기를 빌어보지만 통 달라지지 않는 판세를 보아도,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이 매번 권력자로 당선되는 걸 보아도, 자기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웃이 당장 맨몸으로 거리로 나앉든 말든 상관없이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 생각은 굳어진다. 그러니 변화의 희망을 품는 게 오히려 헛된 짓인지도 모르겠다. 다양성과 융통성이 꿈틀거리기엔 너무 견고하게 굳어진 집단 이기심 때문이다.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성공하면 되고, 내 자식만 공부 잘하면 돼>라는.

선거를 하루 앞두고 후보자들의 홍보물을 죄다 정리해 폐지로 구겨 넣으며 또 한번 착찹한 마음이다. 과연 요번엔 어떤 이들이 어떤 선택을 받게될지. 요번에라도 부디 대물림한 구태를 뒤집어 엎는 선택들이 많이 나오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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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얘기긴 하지만 요번에 번역한 책에 이런 놀라운 내용이 나온다. 미국 의학협회가 2000년에 발표한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전역에서 고속도로 교통사고, 유방암, 에이즈를 포함한 여러가지 주요 사망원인보다 병원에서 의료 과실로 죽는 사람들의 수가 더 많아, 그 수가 연간 9만 8천명이 이르렀다고. *_* 우리나라랑 미국이랑 인구 비율이 워낙 다르긴 하지만,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닌가!

사실 우리 아버지도 119를 불러 타고 가기는 했지만 두발로 멀쩡히 응급실에 걸어들어가셨는데, 쓸데없이 말라리아니 뭐니 엉뚱한 추측으로 밤새도록 온갖 검사 다 받고도 발열과 오한의 원인을 못찾다가 아침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위중한 순간이 된 다음에야 의사들은 심증이 가는 병명을 <짐작>해냈었다. 물론 그땐 이미 늦은 뒤였다. 의료 과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두뇌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우리의 심증뿐 의구심을 밝혀낼 도리도 없었고 워낙 황망해 아무런 경황이 없어, 우리로선 그래도 그 못미더운 의사들에게 매달리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닥터 하우스 팀도 병명을 알아내기까지 며칠씩 걸리기도 하지 않더냐고 속으로 애써 위로를 하면서.

책의 저자는 그런 의료 과실의 가장 큰 원인이 의료진의 무능이 아니라 안일하고 무심한 태도 때문이라며, 흔히 건강에 관한 한 주도권을 의료진에게 모두 맡기는 게 보통이지만 환자들이 책임의식을 갖고 의료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 있게 귀찮을 만큼 묻고 의견을 제시하고 대안을 촉구하라고 권한다.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실수를 범하는 인간인데, 또 바로 그 전문가라는 위치 때문에 실수가 있어도 제도적으로 다들 쉬쉬하며 덮기에 급급해 수많은 과거 실수에서도 통 배우는 게 없단다. 게다가 자신의 몸과 건강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다수의 통계 자료를 지식으로 갖고 있는 의료진이 아니라 바로 본인므로, 최대한 치료 효과를 높이려면 환자 본인이 주도권을 갖는 수밖에 없단다.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저자는 건강을 극단적으로 위협받는 순간엔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겠지만, 그 전엔 최대한 대체의학이나 믿음직한 민간전승요법에 더 기대어 건강을 챙기겠다는 사람이다.

온갖 지병을 다 갖고 계신 왕비마마 덕분에 한달에 평균 두세 번은 종합병원엘 가야하는 형편인데, 이 나라에선 의료 과실을 입증하는 게 미국보다 훨씬 더 어려운 탓에 돈 많은 사람들 아니고선 감히 거대권력인 의료계와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걸 감안할 때 정말이지 환자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약 처방의 날짜계산이 잘못되었다거나, 약을 하나 빠뜨렸다거나, 다음 진료예약이 상담시 정한 날짜와 달라진다거나 하는 행정적인 착오는 실수 축에도 들지 못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걸핏하면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미국에서야 연간 의료 과실로 판명된 사망자 통계가 9만 8천명이라지만, 우리나라는 아마 의료 과실로 환자가 사망했음을 인정한 건수가 역사상 통틀어도 98건도 되지 않을 것 같다. CT 조영제 주사 하나를 맞아도 온갖 부작용으로 인한 결과는 본인 책임이라는 사유서에 서명을 받는 형편이니 뭐. -_-;;

월말에 또 왕비마마의 병원 거사가 잡혀 있어 어제는 그 건과 관련하여 무려 여섯 개 과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협진 상담을 하고 수술동의를 받아야했는데, 마지막 코스였던 심장전문의와 마취전문의는 수십 가지가 넘는 약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조차 난감해 했다. 외부 병원 약도 아니고 다 지네 병원에서 처방한 약이라 컴퓨터 모니터에 진료과목 별로 종류 별로 다 뜨는 게 내 눈에도 확인되던데도! 미리 수술관련 안내문을 숙지하고 있던 내가, 그리고 작년 수술에서 이미 어떤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 익히 겪어본 내가 이런이런 약은 지혈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미리 끊어야하는 게 아니냐고 넌지시 알려줘야 했다. +_+ 

아침부터 다저녁때까지 온종일 층층마다 병원을 뺑뺑 돌며 여러 과에서 의사들이 현재 상태를 점검하는 이유는 울 엄니가 워낙 고위험군 환자이기 때문일 텐데, 의례적인 절차라고는 해도 어쩜 다들 그렇게 건성건성인지 원 도무지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왕비마마가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는 대여섯개 진료과에서 그나마 정성스럽게 오랜 시간 문진으로 시작해 이런저런 점검을 하고 검사 결과를 알려주고 다정히 환자를 안심시키는 주치의는 딱 두명 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잘 지내셨어요? 별다른 일은 없으셨죠? 그럼 드시던 약 또 처방해드릴게요."라며 1분만에 진료를 끝내는 식이다. 환자인 울 엄마도 보호자인 나도 특별히 물어볼 게 없으면 더 시간을 빼앗는 게 민망할 지경.

간병 무수리 생활을 하도 오래한 전적 덕분에 이젠 병원 돌아가는 판세가 빤히 눈에 보이는 것 같고, 그놈의 행정절차와 의료계의 자존심 때문에 환자 측에서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도 소용없는 일이 무언지 대강은 파악이 된다. 요번에 번역한 책 때문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나는 의료진의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고 수긍하는 <착한> 보호자였지만, 허망하게 아버지를 잃고 나선 의사들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게 커져 사사건건 의구심이 생겨 자꾸 꼬치꼬치 묻고 따지게 된다. 그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쓸데없이 키우지 않는 건 물론이다. 게다가 어리바리하게 주치의 지시를 잘못 알아듣는 인턴이나 간호사들의 실수를 미연에 막으려면 정말로 환자와 보호자가 똘똘하고 영악해질 수밖에 없다. (몇년 전엔 퇴원을 위해 항생제를 이틀전부터 끊기로 했는데, 멍청한 초짜 간호사 하나가 항생제를 새로 매다는 바람에 퇴원이 지연될 뻔하기도 했었다. 엉뚱한 약을 잘못 놓지나 않은 걸 고마워야 하는 건지도...)

병명도 다양하게 골고루 끼고 계신 왕비마마를 보필하려면 병원과 의사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매번 다니면서도 참 멀리하고픈 곳이 또 병원이다. 박수근 그림이 걸려있고 한켠에 갤러리와 카페가 생겨난 대학병원 로비는 마치 백화점에 쇼핑 다니듯 병원도 소일거리 삼아 다니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려고 애쓰는 듯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구태의연하게도 의술이 인술이라는 사실이다. 병을 다루는 게 곧 사람을 다루는 일임을 젊고 늙은 의사들이 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면 좋겠건만, 단지 하나의 그럴싸한 직업으로 선택되어 가는 양상이 짙은 의사라는 직업이 점점 안타깝고 염려스럽다. 눈에 불을 켜고 왕비마마를 지켜야하는 병원생활이 또 3주 뒤로 다가왔다. 왕비마마는 수술이 무서워서 심장이 벌렁거릴 뿐, 온통 관심이 집중되는 입원생활 자체는 막상 퍽 즐기는 양상을 보이시는데 간병무수리는 숨막히는 병원공기와 차고 좁은 보호자 침대에서 버티는 쪽잠 생활이 싫고 겁나서 역시나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나저나 참, 저 책은 과연 잘 팔릴까?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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